뷔민 남고생의 일상 13
요즘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다. 확실한 증거라고는 없는 말도 안되는 루머. 지민은 그렇게 믿고 싶었다.
김태형 좋아하는 사람 있대.
김태형 여친 사귄다던데?
학교 구석구석까지 퍼진 소문이다.
1. 소문
히스테리가 이런건가. 지민은 모든 것이 짜증나고 신경질 나기 시작했다. 일주일 전부터 어디선가 스물스물 나오기 시작한 소문은 점점 몸집을 부풀리기 시작하더니 이주일이 지난 지금, 학교 구석구석까지 퍼져 그의 소문을 모르는 사람이 없어졌다. 그 소문들은 지민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기 딱 좋았다. 속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오는 이 감정이 화인지,배신감인지, 속상함인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그 모든 것이 섞여 있을 수도 있다. 지민은 또 울컥 올라오는 이 감정에 또 짜증이 나 신경질 적으로 머리를 헝클였다.
왜 이런 기분 더러운 감정을 느껴야 하는 것인가 천천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지민은 태형에게서 그런 소문이 붙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태형은 누구를 좋아한다고 언질 한 번 해준 적 없었고, 그런 낌새를 보인 적도 없었다. 여친이 생겼다? 만약 여친이 생겼다면 하루 24시간 중 제일 오래 붙어있는 자신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데 대체 왜 그런 소문이 도는 거지... 지민은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마구 낙서를 하다, 문득 든 생각에 볼펜을 쥔 손을 우뚝 멈추었다. 손이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것만큼 지민의 눈동자도 잘게 떨렸다. 창문을 열어놓고 서로 이야기를 했던 어느 날 밤이 떠올랐다. 굉장히 의미심장한 대화의 연속이었다. 그 때 김태형은 자신에게 물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색시한테 물어보길 원해? 그 때 분명 그렇게 답했었지. 아니.
심장이 발밑으로 추락하는 느낌이 들었다. 지민은 헉하며 심장께를 쥐었다. 설마설마... 내가 그렇게 말해서 나한테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던 건가. 아니 근데 그 때는 분명 좋아하는 사람 없다고 했던 것 같은데... 머리가 굳어져 그 때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 기억도 안 났다. 좋아하는 사람 없다고 그랬던 것 같은데... 아닌가. 뭐라고 그랬더라. 아니 그 때 얘기 했던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 이후로 좋아하는 사람이 생길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지민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제 옆에 붙어있는 태형의 책상이 보였다. 전 시간에 수업한 교과서만 펼쳐져 있고 빈자리였다. 급히 교실을 둘러봤다. 태형이 보이지 않았다. 지민은 교실을 뛰쳐나갔다가 복도 한가운데서 우뚝 멈추었다. 나 지금 뭐 하는 거야. 비소가 터져 나왔다. 존나 웃긴다. 뭐 김태형이 하루 종일 제 옆에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쉬는 시간 10분 동안 어디 일 보러 나갈 수도 있는 건데. 이게 뭐라고 이렇게 미친놈처럼 김태형 찾는 건데. 정말 이상해졌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자신은 어딘가 이상해졌다.
야 김태형 진짜 누구 좋아한대?
몰라 씨발.
친구의 물음에 지민이 정색하며 대답했다. 지민은 스탠드에 앉아 턱을 괸 채 뚱한 표정으로 운동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김태형이 운동장을 이리저리 가로지르며 뛰어다니고 있었다.
체육시간이었지만 선생님이 자유 시간을 주시면서 남자들은 대부분 축구 하러 운동장으로 뛰어갔고, 여자들은 피구 하거나 지민처럼 스탠드에 앉아서 쉬었다. 지민은 체육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자유시간이 생기면 거의 쉬는 편이었다. 지민 혼자서 스탠드에 앉아 있으니, 쉬고 있던 반 친구들이 슬금슬금 지민의 옆으로 다가왔다. 김태형 좋아하는 사람 생겼다며? 너희 엄청 친하잖아, 누군지 알아? 아예 여친 있다던데. 별로 듣고 싶지 않은 소문들을 제 옆에서 나불거리니 지민은 팍 짜증이 올라, 그들을 째릿 노려봤다.
야 그런건 소문 당사자한테 물어볼 것이지 왜 나한테 물어봐?
친하지도 않은 사람한테 가서 어떻게 물어보냐? 네가 제일 친하잖아.
몰라, 나도 모른다고. 진짜 다들 왜 나한테 그래, 짜증나게.
다른 학교 다니는 내 친구들이 궁금하대. 내 친구 김태형 좋아한단 말이야.
헐 내 친구들도 좋아한다던데. 그래서 진짜 여친 생긴 거 맞는지 물어봐달라 그랬어.
우리가 김태형한테 물어봤자 걔 우리 무시나 안하면 다행이지. 다른 사람들한테는 얼마나 쌀쌀맞은지 아냐?
걔 진짜 너한테만 헤헤 웃고 잘해주잖아. 너한테는 잘 말 해줄 것 같은데.
지민은 입술을 잘근 씹었다. 자꾸 제 팔을 붙잡고 부탁해대는 애들 때문에 마음이 흔들렸다. 말도 안 되는 헛소문이라고 생각 하지만 태형에게 확실한 사실을 듣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정말 태형이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면? 여친이 생겼다면? 그 대답을 들었을 때 표정관리를 잘 할 수 있을까.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능청스레 물어볼 수 있을까. 여친 보여 달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할 수 있을까. 그 어느 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대답을 듣는 순간 표정이 굳어지고, 어쩌면 울음을 터뜨릴지도 몰랐다. 그 때는 어떻게 변명해야 하지.
점점 심각해지는 지민의 표정에, 옆에 있던 친구들이 지민을 툭툭 쳤다. 야 무슨 생각을 하는데 그렇게 표정이 심각해. 친구의 말에 지민이 움찔 놀라며 상념에서 벗어났다.
김태형한테 뭐 들은 건 없어? 친구들끼리 그런 이야기 안 해?
그런 이야기 안해.
근데 궁금하긴 하다. 김태형은 대체 어떤 여자랑 사귈까.
그건 지민도 궁금했다. 그렇게 생긴 애는 그렇게 생긴 애랑 사귀겠지. 그래도 애가 다정하니까 여친한테도 잘해줄 거야. 지민은 여러 생각을 하며 친구들을 보고 있던 시선을 다시 운동장으로 돌렸다. 태형과 눈이 마주쳤다. 운동장 한가운데 멀뚱히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축구 중에 저렇게 있어도 되는 거야? 지민은 턱을 괴고 있던 손을 내리고 상체를 바로 했다. 어 김태형 온다. 옆에 있던 친구가 중얼거렸다. 태형이 가볍게 뛰어와 스탠드 앞에 섰다. 스탠드 제일 위쪽에 앉아있던 지민은 태형을 살짝 내려다봤다. 땀에 젖은 앞머리가 이마에 살짝 달라붙어 있었다. 아직 숨이 차는지 숨소리가 거칠었다.
무슨 이야기 했어?
어?
엄청 재밌어 보이던데.
넌 지금 그거 물어보려고 여기까지 온거냐. 지민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옆에서 친구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쟤네는 또 뭘 기대하는 거야.
아무 얘기 안했어.
근데 왜 그렇게 재밌어 했어?
내가 재밌어 했다고? 잘못 봤겠지.
짝사랑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 하는데 재미 있을리가 없다. 제 표정은 자신도 볼 수 없지만 썩 유쾌하지는 않은 표정이었을 거라고, 지민은 생각했다.
지민의 대답에 태형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어딘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지민 역시 뚱한 표정으로 태형을 바라봤다. 둘 사이에 쎄한 기류가 돌았다. 옆에 있던 친구들도 둘을 힐끔힐끔 눈치 보기 시작했다. 잠시 말 없던 태형은 갑자기 입고 있던 후드집업을 벗더니 지민에게 홱 던졌다. 저에게 날라 오는 후드집업을 얼떨결에 받은 지민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태형을 바라봤다. 추우니까 입어. 한마디 하고 운동장 쪽으로 돌아가던 태형이 그 자리에 멈추어 서더니 지민 쪽으로 돌아봤다.
색시야.
어.
... 아니다.
머뭇거리던 태형은 결국 입을 다물고 운동장으로 돌아가 아무렇지 않게 팀에 섞여 축구를 하기 시작했다. 왜 말을 하다 말아, 궁금하게. 한 친구의 말에 같이 있던 다른 친구들이 맞장구쳤다. 지민은 멍하니 태형을 바라봤다. 궁금한 것 투성이었다. 축구 잘 하다가 갑자기 다가온 이유도 궁금했고, 왜 갑자기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도 궁금했다. 잠깐 동안의 알 수 없는 그 기 싸움은 뭐였는지도 알 수 없었다. 자신이 딱히 못할 말을 한 것도 아니었고 그렇게 분위기가 싸해질 만한 상황도 아니었는데 태형의 반응은 과했다. 아니, 과하다고 생각했다. 알다가도 모르겠네. 요즘 들어 태형에게 드는 생각이었다.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엔 모르겠다.
김태형은 지민이한텐 항상 다정하네.
어디가.
지금도 후드집업 벗어 던져주고.
그냥 지가 더워서 그러는 거야. 저렇게 뛰어다니는데 덥지.
아니 그래도. 평소에도 그냥 그렇게 느낀 적이 많아.
하긴. 김태형이 박지민한테 하는만큼 다른 사람한테 그렇게 해주는 건 한 번도 못봤다.
친구들의 말을 한 귀로 흘리던 지민은, 마지막 말에 눈이 번쩍 뜨였다. 걔가 나한테 좀 많이 유난이긴 하지? 지민이 넌지시 물었다. 뭐 좀 그런 것 같긴 해. 애기 때부터 친구라고 하니까 그러려니 하는데 사실 생각해보면 왜 저러나 싶긴 하지. 남자 둘이서 그렇게 붙어 다니는 걸 본 적 없어서 그런가.
자신만 김태형의 행동이 과하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 김태형이 너무 했어. 지민은 차라리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마음 편했다. 걔가 자꾸 자기만 특별하게 대해줘서 괜히 이상한 마음이 드는 거라고, 말도 안 되는 합리화라도 하는 게 나았다. 그러면 나중에 너 때문이라고 우기기라도 할 수 있을 거 아니야.
하 모르겠다. 자꾸 머릿속이 복잡했다. 쓸데없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지저분하게 이어졌다. 제 마음을 어떤 이유를 만들어 합리화해야 하는 것도 웃기고, 그렇게 할 정도로 제 마음을 숨겨야 한다는 것도 웃겼다. 걔 탓을 하다가도 제 탓을 하고, 그러다 또 소문이 생각나고, 그러면 또 불안해지고. 지민은 제 머리를 열면 마구 엉킨 실타래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걸 푸는 방법은 다른 거 없다. 그냥 칼로 한 번에 베어버리는 것. 그 칼은 무엇일까. 고백? 절교? 아니 내가 그걸 할 수는 있을까. 긴 생각 끝에 결론을 내었다. 애초에 칼자루를 쥐고 있는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김태형이었다. 모든 것의 답은 그냥 김태형이었다.
점심 때 먹은 것들이 얹힌 느낌이었다. 온갖 말이 모이는 급식실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 억지로 밥을 먹다보니 결국 이렇게 된 것 같다. 왜 김태형 소문인데 자신이 눈치를 봐야 하는지 모르겠다. 자신을 보며 수근 거리고, 그 수근거림 사이에 제 이름이 들리기도 했다. 왜 그 이야기에 제 이름이 언급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더 심한 경우에는 직접 찾아오기까지 했다. 선배고 후배고 할 거 없이 생전 본 적도 없는 사람이 와서 대뜸 '너 김태형이랑 친하지? 걔 진짜 좋아하는 사람 있어?'라고 물어보기까지 했었다. 무례하기 짝이 없는 상황에 표정관리도 안되고 절로 씨발이 툭 튀어나올 뻔 했다. 그런 상황에 밥이 제대로 목구멍으로 넘어갈리 만무했다.
결국 지민은 청소시간에 잠깐 빠져나와 보건실로 향했다. 청소고 뭐고, 이대로 가다가는 공부 시간에 체한 것들이 위로 올지도 모른다. 요즘 따라 되는 일이 없냐. 지민은 가슴부근을 주먹으로 툭툭 치며 보건실 문을 열려고 했다.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팍 꽂힌 것은 찰나의 순간이었다. 문을 열려고 손잡이에 손을 올린 그 순간, 그 익숙한 목소리는 김태형을 말했다. 지민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천천히 문에 귀를 댔다. 누구지, 목소리가 너무 익숙한데. 지민은 온 신경을 청각에 집중시켰지만 보건실 안에 있는 사람도 꽤나 조용히 이야기를 하는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아 알 것 같은데... 지민의 미간이 점점 좁아졌다. 집중을 심하게 한 나머지 본인이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지도 모르는 듯 했다. 보건실 문에 바짝 붙어서 인상을 팍 찌푸리고 있는 지민의 모습을 누가 본다면, 꽤나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봤을 것이다.
보건실 안에서 무어라 웅얼거리는 와중에 김태형 이름은 그렇게도 잘 들렸다. 아니 왜 김태형 이름만 이렇게 크게 들리는 거야... 지민은 그것마저 왠지 모르게 민망했다. 곧이어 들리는 말에 지민은 망설임 없이 문을 열었다.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그냥 몸이 먼저 반응한 것 같았다. 그들의 말을 듣자마자 머릿속으로 그 말을 받아들일 틈도 없이 문을 열어재꼈다. 그냥 순간적으로 감정이 욱했다. 표정관리? 씨발 그게 뭔데. 지민은 지금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관심 없었다. 몰라 씨발, 소문 처음 들었을 때랑 똑같은 표정이겠지. 화, 실망, 배신감, 뭐 그런 것들. 아니, 어쩌면 그것보다 훨씬 더 격한 감정일지도. 왜냐하면 그 때는 그냥 소문이었고 지금 들은 건 확인사살이니까.
씩씩거리며 보건실로 들어간 지민은 침대에 쳐져있는 커튼을 뜯어낼 기세로 젖혔다. 침대에 누워있던 한 명과, 걸터앉아 있는 한 명이 눈알 튀어나올 듯이 놀라 지민을 바라봤다. 지민은 그들의 얼굴을 보자마자 감정이 폭발하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제대로 느낀 적도 처음이다. 눈물은 특정 상황에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어떤 감정이든 그것이 극에 달하면 눈물이 나는 것 같다. 지민은 자신도 정확히 무엇인지 모를 감정 때문에 결국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 와중에도 입술을 피 날듯이 짓이겨 울음은 막았다. 지민은 그 둘을 노려보며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 작은 한숨에서도 울음이 섞인 듯 떨렸다. 그게 무슨 소리야. 지민은 제 속을 간신히 진정시키며 물었다. 모든 것을 찢어발길 듯이 들어온 애 치고는 꽤나 덤덤한 말투였다. 지민이 그렇게 하려고 죽을힘을 다해 애쓰고 있었다. 침대에 앉아있던 그들은 눈에 띄게 당황하고 있었다. 그 표정들이 꽤나 볼만해서 비소가 자꾸 터져 나왔다.
난 그 소문이 씨발 말도 안되는 루머인줄 알았는데 아니었네.
지, 지민아...
김태형 좋아하는 사람 있는 걸 나만 몰랐네, 나만.
......
아 뭐지, 이 배신감은.
지민은 작게 코웃음 치며 말했다. 그의 눈가에 고여 있던 눈물은 결국 툭 떨어졌다. 지민의 눈물에 둘은 크게 당황했다. 어찌할 바 몰라 안절부절 못하는 표정들이 참 가관이었다. 저러고 있는 걸 보니 숨기기도 오래 숨겼다 싶었다. 이걸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머릿속이 복잡했다. 아 좆같아. 오늘따라 자꾸 기분이 더럽더라니 마지막에 이렇게 대형 엿을 투척하기 위한 떡밥이었나. 하하하. 자꾸 헛웃음만 나왔다. 더 좆같은 것은 자신이 이렇게 마음을 추스리느라 아무런 말을 못하고 있는 이 와중에도, 그들은 입도 벙긋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 변명조차 하지 않았다.
야, 윤정우. 너 언제부터 알고 있었는데.
......
김태형이 가르쳐 줬어?
...그냥 우연히 알게 됐어.
이한 너는, 너도 우연히 알게됐냐?
......
언제... 언제부터?
지민의 얼굴 볼 낯도 없어 고개만 푹 숙이고 있던 정우는 그의 마지막 물음에 고개를 들었다. 목소리에 울음기가 있는 것 같다 했더니, 지민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제일 오래 알고 지냈고 그렇게 친하게 지냈던 김태형인데 자기만 모르는 이 상황이 배신감 들고 속상할 수도 있다고는 생각 되지만, 저렇게 울 정도인가 싶었다. 둘 사이가 그냥 친구로 보기 힘들기는 했지만... 적어도 지민은 태형이가 그냥 친구일 텐데. 아니, 잘 모르겠다. 태형은 그렇다 치더라도 지민도 옛날부터 태형에게 유난인 구석이 있긴 했다. 안 그런 척 해도 태형이 제 옆에 꼭 있어야 했고, 태형을 제일 잘 알고 있다는 부심도 있을 정도로 태형의 모든 것을 알아야 했다. 그러니 지금 지민은 배신감 들만했다. 애초에 그들은 지민이 느끼고 있을 감정을 함부로 단정 지을 입장은 안 되었다.
그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들의 침묵에 지민은 점점 속이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아까는 머리끝까지 올라 폭발할 정도였는데 이제는 밑바닥으로 축 가라앉는다. 점점 아래로, 발밑으로.
태형... 김태형은 너희가 알고 있는 거 알아?
......
...알아?
지민아 있잖아...
아는구나.
굳이 대답은 피하려는 그들을 보고 지민은 깨달았다. 아 정말 나만 몰랐던 이야기구나. 얘네들은 이미 다 알고 있었구나.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꽤나 오래 됐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민은 결국 두 손으로 제 얼굴을 묻었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냥 공허했다. 순식간에 길을 잃은 느낌이었다.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제자리에서 빙빙 돌기만 하는. 지민은 그대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마른세수를 했다. 김태형 어디 있는지 알아? 지민의 물음에 그들은 고개만 저었다. 지민은 그대로 몸을 돌려 보건실을 나갔다. 정우와 이한은 한참을 멍하니 보건실 문만 바라보다가 이내 머리를 쥐어뜯었다. 악 씨발! 김태형한테 뒤졌다.
지민은 보건실을 나오자마자 건물 밖으로 뛰어나갔다. 청소시간에 김태형이 교실에 없으면 어디로 갔을지 뻔했다. 건물 뒤쪽으로 돌아가자 바로 벽에 기대 서 있는 태형을 발견했다. 지민은 망설일 것도 없이 김태형 앞에 섰다. 멍하니 허공만 보던 태형은 갑자기 제 시야로 훅 들어온 지민에, 흠칫 놀랐다가 바로 씨익 웃었다. 우리 색시네? 태형의 말투가 퍽 능청스러웠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민은 그의 능청을 받아줄 만큼 심적으로 여유롭지 못했다.
너, 그 소문 사실이야?
단도직입적인 지민의 물음에 태형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태형의 대답에 지민의 입에서 헛웃음이 나왔다.
둘 중 하나는 거짓말이네.
... 어?
윤정우랑 이한은 알고 있던데. 너 좋아하는 사람 있는 거.
......
그게 그렇게 나한테 숨길 일이었어? 다른 애들한테는 떠벌떠벌 다 말하면서 나한테는 숨길 일이야, 그게?
색시야, 그게...
내가 이제는 이런 거에 배신감을 느껴야 하냐?
......
너... 너 정말... 정말 좋아하는 사람... 있어?
지민은 이런 식으로 태형의 마음을 물어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런 식으로 누군가한테 등 떠밀리듯 억지로 물어보게 될 줄은. 한 마디 한 마디 뱉는 게 그리도 어려웠다. 답을 알면서도 아니길 바라면서 묻는 이 상황이 너무 비참했다. 왜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했을까. 이제 와서 그런 생각 해봤자 너무 늦었다.
어. 있어.
그의 대답에 지민은 숨을 헉 들이켰다.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눈가가 뜨거워졌다. 안 돼 울지 마. 지민은 억지로 눈을 크게 떠가며 눈물 나오지 않으려 애썼다. 여기서 울었다가는 제 마음을 들킬 수도 있다. 짝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을지언정 제 마음까지 들킬 수는 없었다. 그건 최악이었다. 내가... 내가 그 때 말했잖아... 지민은 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울컥 올라오는 것을 간신히 삼키며 말했다. 계속 속이 울렁거렸다. 정신이 없었다. 지민은 지금 자신이 제대로 서 있고 제대로 말 하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내가 그 때... 너 좋아하는 사람 생겨도...
내가 끝까지 거짓말을 하길 원해?
네가 그 때 그랬잖아. 썸도 없고 사귀는 사람도 없다 그랬잖아. 네 취향인 사람도 없다며!
어. 썸도 없고 사귀는 사람도 없어. 내 취향인 사람이 나한테 대쉬한 적도 없어.
너...
네가 나 좋아하는 사람 생겨도 말 하지 말라며.
아. 지민은 순간 휘청거렸다. 태형이 재빨리 지민을 안았지만 그의 손을 거칠게 쳐냈다. 태형의 말이 다 맞았다. 잘 생각해보면 딱히 배신감이 들 만한 이유도 없었다. 이미 자신이 이야기 하지 말라고 했었으니까. 태형은 제 말을 잘 들은 것밖에 없었다. 오히려 자신이 이렇게 나오는 것은 과민반응이었다. 생각해보니 웃겼다. 어느 누가 친구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이렇게 역정을 낼까. 이게 다 짝사랑 때문이다. 짝사랑은 사람을 미친놈으로 만든다.
힘이 쭉 빠졌다. 지민은 터덜터덜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몇걸음 안가서 태형에게 잡혔다. 그의 힘에 따라 몸을 돌리자 그의 얼굴이 보였다. 항상 보기 좋은 얼굴이었는데 오늘은 보기 싫었다. 좋아하는 사람 있다는데도 굳이 그 애한테 반응하는 제 마음도 싫었다.
누구 좋아하는지는 안 궁금해?
허, 씨발 진짜. 지민은 순간적으로 욕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억눌렀다. 손목을 살짝 비틀어 그에게서 벗어났다. 내가 왜 네가 좋아한다는 사람을 궁금해야 하는데. 지민은 부러 차갑게 말했다. 스스로가 듣기에도 싸늘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였다. 태형이 움찔했을 정도면 말 다 했다. 태형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지민은 그대로 그 자리를 벗어났다. 오늘만큼은 태형을 보고 싶지 않았다.
2. 화해
춤으로는 꽤나 유명인사인 지민은 언제나 축제를 피할 수 없었다. 댄스 동아리는 아니었지만 동아리 사람들이 매 번 지민에게 부탁을 했기 때문이었다. 작년에도 그래서 축제 때 무대 섰다가 김태형이랑 엄청 싸웠다. 아니 싸울 일도 아닌데 자꾸 김태형이 오버 한 거다. 지민은 춤 얘기만 나오면 예민하게 구는 태형을 이해할 수 없었다. 막말로 내가 좋아서 춤춘다는데 춤 보는 건 좋아하면서 축제 같은데 나간다고 말하기만 하면 싫다고 난리를 쳐대니 곤란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작년에도 그랬고 올해도 진즉 축제 나가지 말라고 몇 번이나 으름장을 놨더란다. 참 나 지가 뭐라고. 지민은 무용실로 향했다. 곧 축제였고 댄스부에서 같이 무대 서달라고 부탁 받았다. 지금부터 연습을 해야 했다.
요즘 지민과 태형은 냉전 상태였다. 냉전 상태라고 말해도 되는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랬다. 서로 대화를 제대로 안한지 꽤나 되었다. 주위에서 싸웠냐고 난리였다. 여러모로 주위에서 더 사람 피곤하게 만든다. 저번에는 소문 가지고 사람 괴롭히더니 이제는 김태형이랑 같이 안다니냐고 괴롭힌다. 싸웠냐고 물어보면 안 싸웠다고 대답했다. 정말 싸우지 않았기 때문에 안 싸웠다고 말하면 또 믿지 않는 눈치다. 씨발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굳이 말하자면 어색했다. 웃기는 일이다. 서로 제 인생의 반 이상을 같이 보낸 친구인데 어색하다니. 심지어 그렇게 유난 떨면서 붙어 다녔는데. 그 수많은 세월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듯 보고도 못 본 척, 말 한 번 안 섞고 남보다도 못한 사이로 지냈다. 그깟 소문 하나 때문에. 어째보면 주위에서 더 애가 타는 것도 무리는 아닌 듯싶다. 한순간에 친구 하나 잃었는데 겉으로 보이는 만큼 덤덤할 수 있을까. 적어도 지민은 그랬다. 아무렇지 않게 태형을 무시하고, 없는 척 했지만 속은 말도 아니었다. 태형과 이런 사이로 남고 싶지 않았다. 지금 당장이라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말 걸고 같이 등하교 하고 그러고 싶었다. 그런데 제가 먼저 다가가기는 죽기만큼 힘들었다. 내가 어떻게 뻔뻔하게 그렇게 다가가... 지민은 겁쟁이었다.
그와 같이 하교를 하지 않은지도 꽤 되었다. 지민은 축제 연습 때문에 학교에 남아 있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원래라면 태형이 무용실까지 찾아와 연습을 방해하거나 가만히 앉아 춤추는 걸 봤을 텐데, 연습을 시작한 이후로 단 하루도 찾아온 적 없었다. 김태형도 나쁜 새끼다. 제가 먼저 다가가는 거 잘 못하는 거 알면서 부득불 안 오는 거 봐. 아니, 나쁜 새끼는 나다. 태형 입장에서는 황당하기만 하고 어이없기만 한 상황인 것이다. 그렇게 말도 안 되는 걸로 화내고 먼저 돌아섰으면서 태형이 먼저 오기를 기다리는 자신이 그냥 쓰레기인 거다. 아, 우울하다. 자꾸 마음이 이랬다저랬다, 잡생각이 불쑥불쑥 머릿속을 파고들어 연습도 제대로 안됐다. 결국 잠깐 쉬라는 친구의 말에 지민은 무용실 소파에 몸을 던졌다.
후, 한숨이 나왔다. 엎드린 채로 눈을 감으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저절로 김태형이 떠올랐다. 뭐가 됐든 우선 이 말도 안 되는 냉전 상태를 좀 풀어야 할 것 같다. 친구였을 때도 괴로웠는데 친구도 아니고 남도 아닌 이 어정쩡한 상태로는 정말 피 말려 죽을 것 같았다.
야, 너 김태형이랑 헤어졌다는 소문이 돌던데.
위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지민은 깜짝 놀라 파드득 몸을 떨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잠시 쉬는 타임인지 땀을 송글송글 매달고 있는 친구가 지민을 내려 보고 있었다. 뭐, 뭔 개소리야. 지민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입을 열었다. 헤어졌다는 게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괜히 제 마음 들킨 것처럼 제 발 저렸다. 잠깐 목소리가 떨린 건 기분 탓이겠지.
우리 연습 시작한지 며칠 째인데 김태형 머리털도 안 보이는 건 말이 안 돼.
걔가 여길 왜 와, 댄스부도 아니고 춤 도와주는 애도 아닌데.
네가 그런 소리를 하면 안 되지. 걔가 여기 오는 모든 이유가 다 너인데.
뭐 우리는 하루종일 붙어 있어야 하냐? 아 계속 시비 털 거면 저리 꺼져.
여자애들이 너희 무슨 일 있냐고 물어봐달라던데.
그걸 걔네들이 대체 왜 궁금해 하는데. 아무 일 없어, 짜증나게 개나 소나 다 물어봐 진짜.
싸웠구나.
안 싸웠다고!!
아니 뭘 그렇게 예민하게 굴어. 너희가 평소랑 너무 다르니까 그렇지.
아 빡쳐, 말 할 기운도 없어... 지민은 철푸덕 다시 소파에 몸을 엎드렸다.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겠다는 무언의 행동에 결국 친구도 그 이상 물어보지 못했다. 그래도 그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건 확실했다. 친구 사이에 치고 박고 싸우는 건 사실 흔한 일이지만 박지민이랑 김태형이 이렇게 남처럼 생 까고 다니는 일은 절대 흔하지 않았다. 아니, 그냥 처음이었다. 그들과 알고 지내던 애들이 그들의 일을 궁금해 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일지도 몰랐다. 원래 생전 보지 못한 것이 항상 궁금한 법이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빨리 화해해. 그냥 이대로 남 될 건 아니잖아.
친구의 말에 지민의 몸이 움찔 떨렸다. 하지만 여전히 엎드려있는 몸은 일으키지 않았다. 나중에 합류해. 지민의 어깨를 아프지 않게 탁탁 친 친구는 다시 거울 앞으로 갔다. 무용실 뒤편에는 지민만이 있었다. 친구의 말이 뇌리에 콱 박혀 떨어지지 않았다. 그냥 이대로 남 될 건 아니잖아... 태형과 남이 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적어도 지민은 그랬다. 근데 김태형은 어떨지 잘 모르겠다. 요새 자신이 했던 짓을 생각해보면 이미 정 털렸을지도 몰랐다. 갑자기 피해 다니지를 않나, 기뻤다가 갑자기 화내고 또 그러다 우울해 하는 등, 감정기복도 롤러코스터 급이었다. 김태형은 그런 애 옆에서 이때까지 잘 참아왔다 싶을 정도였다. 짝사랑이란 거 정말 감당 안 되는 일이구나 싶었다. 정말 정 털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삐질삐질 나오기 시작했다. 짝사랑은 씨발 사람 존나게 감수성 예민하게도 만드는구나... 지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팔로 눈가를 벅벅 문질렀다. 약한 눈두덩이가 금세 붉어졌다.
야 나 오늘 먼저 집에 들어갈게. 지민은 무용실 구석에 대충 던져놓은 가방을 들고 후다닥 무용실을 빠져나왔다. 야 시간 없어! 야, 박지민! 박지, 이 미친 새끼야!!! 저 멀리서 친구의 절규가 아득히 들려왔지만 지민은 입술을 꾹 깨물고 더 빨리 뛰었다. 당장 코앞인 축제보다 김태형이 더 중요했다. 어떤 결과를 받아들더라도 일단 얼굴 보고 이야기는 해야 할 것 같았다. 이렇게 앞으로 쭉 이도 저도 아닌 사이로 지내다가 나중에 정말 남이 되어버리면, 손해는 자신이었다. 아니, 손해고 자시고 그냥 사과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약간은 충동적이기도 했다. 그래, 정말 솔직히, 그냥 김태형이 너무 보고 싶었다.
무작정 뛰었다. 찬바람이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목구멍으로 찬바람이 자꾸 들어와 폐까지 차가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켁켁 기침이 나왔다. 그래도 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빨리 가야했다.
큰 대로를 지나 골목길로 들어갔다. 골목길의 가로등과 이따금 집 안에 켜진 불들만이 골목길을 밝혀주었다. 아무도 다니지 않는 조용하기 그지없는 골목길에 지민의 뛰는 소리만 들렸다. 숨이 차 헉헉거리면서도 지민은 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힘든 것을 몰랐다. 일단 김태형을 봐야겠다는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 들어차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만나면 뭐라고 이야기를 해야 할지, 어떻게 사과를 해야 할지, 아무것도 생각해 본 적 없으면서. 매우 충동적이었다.
제 집을 지나 바로 옆집 대문 앞에서 드디어 멈추었다. 찬바람을 너무 많이 쐬어 콧속이 따가울 정도였다. 목도 너무 건조했다. 토해낼 듯 기침을 하고 나서야 간신히 진정이 된 지민은 숨이 차다 못해 터질 것 같이 아픈 가슴을 살짝 토닥이며 초인종을 눌렀다. 집에는 아직 불이 켜져 있었다. 심장은 여전히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좀 오래 뛰어오긴 했다. 지민은 그것 때문이라고 믿고 싶었다.
집 밖에 아무도 나오지 않아 의아함을 느낀 지민이 다시 한 번 초인종을 누르려 손을 뻗었을 때, 굳게 닫혀 있던 대문이 천천히 열렸다. 지민은 얼굴을 보자마자 순간 울컥하는 느낌에 입술만 꾹 깨물었다. 가슴팍을 토닥이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몇 번을 더 치던 지민은 결국 그 손을 내렸다. 심장은 여전히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목도리는 어디다 버리고 이렇게 얇고 입고 다녀.
태형은 아예 대문 밖을 나와 들고 있던 목도리를 천천히 지민에게 둘러주었다. 지민은 천천히 손을 들어 목도리를 살짝 잡았다. 이제야 무용실에 놔두고 온 목도리가 생각이 났다. 태형이 둘러준 목도리와 똑같은 것이었다. 코랑 볼이 다 빨가네. 태형은 두 손으로 지민의 볼을 살짝 감쌌다. 태형의 커다란 손이 지민의 얼굴을 다 덮었다. 손은 따뜻했다. 지민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태형이 하는 것을 멍하니 보기만 하다, 문득 여기 온 이유를 깨닫고 헤 벌어져 있던 입을 꾹 닫았다. 어떻게든 말은 붙여야겠는데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할지 조차 생각하지 않았던 터라, 머릿속이 많이 복잡했다. 하고 싶은 말은 정말 많은데 하나도 정리되어 있지 않았다. 태형아. 지민이 작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입술이 덜덜덜 떨렸다. 추워서 떨리는 건 아니었다. 심장은 여전히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내가... 내가, 미안해.
......
그냥 다 미안해. 요즘 그러니까... 내가 좀 많이 이상해서... 어... 그 때 화내서 미안. 내가 많이 생각해봤는데 그냥 내가 너무 과민반응 했던 것 같아. 그렇게 막 그럴 일은 아니었잖아, 사실. 다른 애들은 다 아는데 나만 모르는 게 있었다는 게 그 때는 좀 배신감이 들었나봐. 그냥... 어... 과하게 화냈어. 그러니까... 그...
색시야.
......
울지 마.
무슨 소리야. 지민은 차마 마주치지 못하던 시선을 그대로 들어 올려 태형을 봤다. 태형이 검지를 눈 밑에 살짝 갖다 대었다. 지민은 그제야 제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래서 눈가가 이상하리만치 뜨거웠었구나. 한 번 눈물이 나니 멈출 수가 없었다. 태형은 아예 엄지로 살살 눈 밑을 쓸었다. 지민은 차마 그 손길을 피할 수 없었다. 너무 따뜻했다. 그냥 너무 좋았다. 나 피하지마. 지민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눈물 때문에 금세 목소리가 떨려왔다. 간신히 뱉어낸 말마저 물에 젖어있었다. 태형은 손을 내려 지민의 등을 천천히 토닥이기 시작했다. 지민은 그대로 태형의 어깨에 기대었다.
나 색시 못 피해.
......
내일 같이 학교 갈까.
......
그리고 같이 돌아오고.
...응.
지민이 태형의 품에서 천천히 떨어졌다. 태형은 등을 토닥이던 손을 그대로 내려 지민의 손을 덮어 잡았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지민의 집으로 향했다. 자연스럽게 대문을 연 지민은, 반쯤 들어가다 고개를 돌려 태형을 바라봤다. 태형은 손을 흔들어 주었다. 내일은 그 목도리 하고 와. 태형의 말에 그제야 목에 둘린 목도리가 생각났다.
근데 나 목도리 없는 거 어떻게 알았어?
난 항상 색시를 보고 있어.
어서 들어가, 춥다. 태형의 재촉에 지민은 어어 고개를 끄덕이며 종종걸음으로 현관까지 갔다. 고개를 돌리니 이미 대문은 닫히고 어두컴컴한 정원만 보였다. 지민은 도어락을 풀고 집에 들어갔다. 집 안의 온기가 온 몸을 감쌌다. 왠지 몸이 탁 풀리는 기분에 지민은 스르르 주저앉아버렸다. 항상... 나를 보고 있다고? 지민은 목도리를 풀다가 그대로 얼굴을 폭 묻었다. 무슨 의미야 대체. 지민은 이제 거의 무의식적으로 제 심장께를 툭툭 쳤다. 이제는 한계다.
심장은 여전히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
늦어서 정말 죄송합니다ㅠㅠㅠㅠ
몇개월만에 올라온 글인데
뷔민 오지게 삽질하는 내용만 있어서
죄송합니다... 이상하게 자꾸 길어지네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