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남고생의 일상 (完)

뷔민 남고생의 일상 외전 1

글하 2018. 4. 17. 03:01



1. 태형의 시선

 

좋아해. 한숨처럼 퍼진 지민의 말에 순간 제 귀를 의심했더란다. 몇 번이나 이건 꿈이 아닐까 되뇌어보고, 품에 안긴 지민을 계속 쓰다듬어보고 그랬더란다. 지민에게는 제 모습이 어떻게 보였을지 모르겠지만 그만큼 태형은 그 말이 굉장히 충격적이었고, 그래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사고회로가 갑자기 퓨즈 끊긴 듯 탁 멈추어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오로지 지민의 그 말만 둥둥 떠다니고 귓가에서는 그의 목소리만 반복재생 되었다. 표정 관리 하느라 죽는 줄 알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 자신이 다시 고백하고 그를 대기실까지 데려다 주고, 그 정신으로 어떻게 그의 무대까지 볼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무대를 다 마치고 자신에게 달려오며 제 무대 어땠냐고 물어보는 그를 보는 건 꽤나 곤욕이었다. 지민은 공부 때문에 이제 춤을 추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그는 아직 춤을 많이 좋아했고, 여전히 춤에 열정이 가득했다. 열정이 가득해서 반짝거리는 눈을 하고서는 저를 바라보는 그 모습은, 제가 좋아하는 수많은 지민 중 하나이기도 했다. 중학교 때 그가 처음으로 췄던 그 춤을, 그 무대를 아직까지도 바로 어제 일처럼 기억이 생생했다. 그 전부터 지민을 좋아했겠지만, 아마 제대로 깨달은 때는 그 때일 거라 생각했다. 태형에게 지민은 항상 반짝였고, 귀여웠으며, 사랑해 마지않았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지민이 춤추는 모습을 보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제 눈에도 지민이 이리도 찬란한데, 다른 사람이라고 그렇지 않으리라고는 보장 못하니까. 다른 사람이 지민에게 반하면 안되니까. 반해서 제 옆을 훌쩍 떠나버리면 안되니까.

 

그래, 태형은 단 한 번도 지민을 친구라고 생각해본 적 없다. 그를 좋아 한다 깨닫지 못한 어렸을 때조차도 본인이 지민에게 가지고 있는 어떤 감정이 우정은 아니라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했는지도 몰랐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무렇지 않게 색시라고 부를 수 없겠지. 아무리 그 어린 날에 뭘 모른다고 해도, 색시라는 말이 여자한테 쓰는 말이라는 것조차 모를 리는 없었다. 어렸을 때 정확히 어떤 감정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것만은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자신은 지민이 첫사랑이고 짝사랑을 했으며, 그 마음이 지민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오래되었다고.

 

왜 그렇게 지민이 좋아? 하고 물어보면 할 말이 없었다. 그러게, 내가 왜 이렇게까지 그 애를 좋아하지. 태형은 침대에 누워 하루온종일 고민한 적도 있었다. 그렇게 머리 싸매고 고민해서 나온 결론은 딱히 없었다. 나올 수 없는 것이 맞았다. 태형은 지민의 무언가 때문에 좋아진 것이 아니었다. 물 흐르듯, 가랑비에 옷 젖듯, 그렇게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언제 어디서 그에게 이렇게 젖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고민한 만큼 태형은 진지했다. 이게 단순히 철없는 시절, 잠시 방황하면서 스쳐 지나가는 마음이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이토록 제 감정에 진지했던 적 없었다. 자신이 느끼던 모든 것들이 거짓이라 할지라도, 지민에게 느끼는 이 감정만큼은 절대 거짓일 수 없었다. 태형은 확신했다. 지민이 제 마지막 사랑이 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지만, 이렇게 강렬한 사랑을 느끼게 해준 사람은 지민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거라고.

 

그래서 더 아팠다. 오랜 동성친구를 사랑하면서, 이 사랑은 보상 받지 못할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어차피 이렇게 혼자 짝사랑 하다가 나중에 들키고 남보다 못한 최악의 사이가 되거나, 저절로 마음이 사그라지기만을 기다리거나. 어찌됐든 좋은 결과는 염두조차 안했었는데. 혼자 그 많은 새벽을 눈물로 삼켰었는데. 그냥 좋은 친구로라도 좋으니까 계속 제 옆에 있기만을 기도 했는데. 기적이 찾아온 것이다.

 

 

 

축제가 다 끝나고 집으로 가는 길에 손잡고 나란히 걸었다. 사실 손잡고 걷는 것이 그렇게 별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이전에도 자주 손잡고 다녔었고 끌어안거나 하는 스킨십은 자주 했었다. 생각이 바뀌었다고 느끼는 감정이 이렇게 달라질 수도 있나. 줄곧 짝사랑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제 같은 마음이라는 생각이 드니까 손잡는 행동조차도 간질간질한 게 자꾸 웃음이 나고 어쩐지 부끄럽기도 했다. 손을 살짝 풀어 깍지를 꼈다. 지민이 살짝 움찔했지만 손을 빼지는 않았다. 제 손가락 사이사이에 느껴지는 지민의 온기가 너무도 좋았다.

 

서로 말은 없었지만, 굳이 억지로 말을 꺼내고 싶지도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유난히 조용했다. 너무 조용해서 저에게 들리는 이 심장소리가 혹여 지민에게도 들릴까 조마조마하기까지 했다. 태형은 힐끗 지민을 쳐다봤다가 눈이 마주쳤다. 순간 당황한 태형이 우물쭈물 하다가 환하게 웃었다. 지민은 살짝 눈이 커졌다가 홱 고개를 돌렸다. 광대부분이 봉긋하게 솟아오른 걸 보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집이 보이는 게 이렇게나 아쉬울 일인지 몰랐다. 어차피 옆집이라 마음먹으면 바로 놀러갈 수도 있고, 그것도 안되면 창문 열어놓고 볼 수도 있는데, 뭐가 그렇게 아쉬운지. 태형은 애써 웃는 얼굴을 하며 깍지 낀 손을 풀었다. 잘 들어가. 태형의 말에 집에 들어가려던 지민이 살짝 뒤돌아 태형을 바라봤다. 그가 답지 않게 우물쭈물했다. 고개를 갸웃하다 문득 든 생각에 슬쩍 앞으로 다가가 지민의 손을 잡았다. 본의 아니게 그를 당겼는지 지민이 살짝 앞으로 주춤 다가왔다. 지민이 살짝 시선을 내리깠다. 찰랑거리는 앞머리가 얼굴을 가렸다. 색시야. 태형의 부름에 음칫 몸을 살짝 떤 지민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태형을 바라봤다. 아 심장아. 적당히 크고 맑은 저 눈을 마주할 때면 언제나 심장이 제멋대로 폭주하기 시작한다. 큼큼. 괜히 심장소리 들릴까 주먹 쥔 손을 입 가까이 대고 헛기침을 한 태형이 다시 지민을 바라봤다. . 지민이 말꼬리를 살짝 늘이며 물었다. 지민이도 부끄러운 걸까. 지민이도 지금 나처럼 막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감당 안될 정도일까. 태형은 요란한 속을 숨기며 가만히 지민을 봤다. 자꾸 제 표정이 신경 쓰였다. 너무 헤벌레 하고 있는 거 아니야? 태형은 입꼬리에 힘을 주어봤지만 자꾸 올라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색시야.

 

.

 

우리.

 

......

 

우리, 사귈까?

 

 

목소리가 떨렸던 것도 같다. 행복감에 잔뜩 젖은 목소리였던 것도 같다. 순식간에 얼굴에 열이 확 올라 벌게진 지민의 얼굴을 봤다. 지민은 잡지 않은 한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그의 손 위로 빼꼼 보이는 두 눈만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었다. 그를 잡은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제 커다란 손 안에 쏙 들어간 자그만 손의 촉감이 더 단단히 들어왔다.

 

, 말해 뭐해. 지민은 홱 손을 빼 후다닥 제 집으로 들어갔다. 쾅 하고 철문 닫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어찌나 빠르던지 순식간에 사라진 지민 때문에 아무 말도 못 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 태형은 가만히 철문만 바라보다가 두 손을 마주잡고 천천히 가슴께에 올렸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간신히 담벼락에 몸을 기대었다. 지민이 한 말이 자꾸 머릿속에 맴돌았다. 말해 뭐해. 말해 뭐해. 말해 뭐해.

 

끄아아... 태형은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소리 없는 환호성을 질렀다. 제 얼굴은 안 봐도 시뻘게져서 흐물흐물 녹아내린 표정일 것이다. 아이고야 가슴이야. 태형은 제 가슴을 통통 치면서 천천히 제 집으로 향했다.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자마자 그대로 다리에 힘이 풀려 스르르 주저앉았다. 아직도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안간다. 이 모든 것이 정말 오늘 일어난 것인지 믿기지 않았다. 당장 오늘 아침만 해도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지민을 억지로 친구라 생각하며, 두근거리는 소리 들릴까 조마조마해하며, 언제나 예쁜 지민을 보며 애써 표정관리하며, 자꾸 넘쳐흐르는 제 마음을 억지로 감추며 그렇게 지나갈 줄 알았는데. 그 애를 너무너무 좋아해버려서 사귀게 된 꿈을 꾸는 거면 어떡하지. 너무 행복한데 그만큼 잔인한 그런 꿈이면 어떡하지. 태형은 잘게 떨리는 손으로 더듬더듬 가방을 열어 핸드폰을 꺼냈다.

 

 

-지민아 색시야 좋아해

 

 

무작정 보낸 카톡에 바로 1이 사라졌다.

 

 

[나도]

 

 

깔끔한 답장은 지민다웠다. 답장이 온 화면을 괜히 엄지로 쓸어봤다. 슥슥 밀리면서 카톡창이 올라갔다. 군데군데 욕과 ㅋㅋㅋㅋ이 남발하는 카톡창은 여느 고딩 친구들끼리 하는 카톡과 다름없었다. 이렇게 순식간에 관계가 바뀐다. 선 앞에서 아슬아슬 중심 잡고 있던 우리가 그냥 확 넘어가버린 것이다. 묘한 기분을 느끼고 있을 때 하단에 메시지가 또 뜨기 시작했다.

 

 

[나도 너 좋아해]

 

[진짜로]

 

[나도 지금 못 믿겠거든 이 상황?]

 

[꿈같고 너도 나 좋아한다는 거 나랑 같은 마음으로 좋아한다는 건지 자꾸 고민되고 그러는데]

 

[옛날부터 좋아했다는 그 사람 진짜 나라고 하니까]

 

[마음은 편안하네]

 

[진짜 다른 사람 있을까봐 괜히 화나고 질투 나고 속상하고 그랬는데]

 

[야 보면 말 좀 해 씹지 말고]

 

[나 혼자 안달 났나봐]

 

 

태형은 바로 대기화면으로 나가 통화버튼을 눌렀다. 연결음이 몇 번 들리기도 전에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안내음성이 나왔다. 곧이어 카톡이 또 오기 시작했다.

 

 

[야 전화 하지마 부끄러워]

 

[내가 지금 이거 믿고 막 말 하는 건데]

 

[전화하면 아무 말 못할 것 같아]

 

 

피실피실 웃음이 새어나왔다.

 

 

-정말 같은 마음이야?

 

-지금도 나처럼 막 가슴 저릿저릿한데 웃음 나오고 기분 좋고 그래?

 

-색시야

 

-나 지금 너무 행복해

 

 

 

 

 

 

 

 

 

 

2. 연애 초보들의 연애

 

연애는 어떻게 하는 것일까. 어떻게 해야 연애를 잘 하는 걸까. 태형과 지민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연애를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모솔이었고, 연애에 관심이 있는 애들도 아니었다. 연애에 연 자도 모르는 애들 둘이 만나서 연애라는 걸 해보려 하니, 참 막막한 것이다. 어쨌든 사귀고 있는 사이에 우리도 다른 커플들처럼 하는 걸 따라하면 되지 않을까. 둘은 그렇게 단순히 생각했다.

 

그래서 주말에 데이트를 하기로 했다. 태형은 인터넷에 데이트를 쳐보고 혀를 찼더란다. 아니 뭐야 이게, 색시랑 여태까지 다 했던 거잖아. 영화 보고, 밥 먹고, 쇼핑하고, 집에 데려다 주고. 사실 데이트란 게 별 거 없었다. 뭐 같은 시간을 공유 하는 게 중요한 거지. 태형은 그렇게 생각하며 집을 나섰다.

 

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보이는 지민에, 태형은 입을 틀어막았다. 너무 귀여워... 색시는 분명 자기를 심정지로 죽일 작정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멜빵바지를 입고 나올 수 없는 거다. 멜빵바지를 입고 담벼락에 기대서서 주위를 휘휘 둘러보고 있는 모습이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그에게 다가가면서 쓰고 있던 모자를 씌워주었다. 엇 뭐야. 다른 곳을 보고 있던 지민은 갑자기 씌워진 모자에 당황하면서 모자를 더듬다가 태형과 눈이 마주쳤다. 보자마자 사르르 눈이 접히며 해맑게 웃는 지민에, 태형은 흠흠 헛기침을 했다. 저렇게 바로 앞에서 갑자기 웃는 모습을 보는 건 아직 면역이 없다.

 

 

모자는 뭐야?

 

그냥.

 

그냥 너 써.

 

색시가 더 잘 어울려서 씌운 거야. 옷이랑도 잘 맞고.

 

흐응...

 

 

모자를 만지작거리던 지민이 손을 내려 태형의 손을 잡았다. 태형은 훅 들어온 지민의 스킨십에 흠칫 놀라고, 그런 태형 때문에 지민이 더 흠칫 놀랐다. 뭐야 왜 놀라. 지민의 물음에 태형은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지민과 맞잡은 손에 계속 신경이 갔다. 손에 땀나면 어떡하지. 갑자기 손을 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땀나니까 잠시만 손 떼보라고 말하는 것도 이상하고. 이 와중에 자그맣고 보들보들한 지민의 손은 너무 귀엽다. 같은 남자지만 어떻게 이 손이 제 손 안에 이렇게 쏙 들어올 수 있나 싶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에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손잡는 게 그렇게 유난 떨 일도 아닌데, 친구였을 때도 자주 잡고 다녔는데. 아 물론 지금은 친구 사이가 아니지만. 이 전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덥석덥석 잡았는데, 지금은 애인이 되었다고 바로 손잡는 것 하나까지 쑥스러워지는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혼자 앓았던 기간이 너무 길어서 그런 것인지 아직은 모든 것이 처음 하는 것처럼 뭔가 어색하기도 하고, 부끄러운 기분이 들기도 했다. 옆에서 지민이 종알종알 이야기 했지만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로지 맞잡은 손의 체온과 기분 좋게 두근거리는 심장, 묘하게 붕 뜨고 설레는 마음에 집중되었다.

 

미리 예매해둔 티켓을 찾고 팝콘을 샀다. 콜라 두 개에 빨대를 꽂고 뒤를 도니, 지민이 팝콘을 하나씩 입에 넣고 있었다. . 눈이 마주치자 씨익 웃는 지민은 참 천진난만했다. 태형이 가까이 다가가 아 하고 입을 살짝 벌렸다. 지민이 팝콘을 입 안에 넣어주었다. 혀에 닿자마자 퍼지는 달달한 카라멜 향에 절로 웃음이 났다.

 

아직 영화 시작 시간이 되지 않아 광고 중이었다. 지민은 광고를 보다가 무언가 문득 생각난 듯 아, 하면서 태형을 바라봤다.

 

 

우리 마지막에 영화 봤을 때. 나 사실 그거 영화 제대로 못봤어. 네가 했던 행동이나 말들이 자꾸 신경 쓰여서.

 

어쩐지. 그 때 자꾸 옆이 따가운 거야. 딱 돌아봤는데 색시가 나를 보고 있네?

 

나는 그 때 무진장 신경 쓰이고 괜히 설레고 그랬는데. 너는? 넌 안그랬어?

 

좋아하는 사람이랑 한 공간에 있고 같은 시간을 보내는데 어떻게 안 그럴 수 있어.

 

......

 

색시야. 난 너랑 무언가를 할 때마다 항상 떨리고 설레고, 조심스럽고 그랬어.

 

 

태형은 지민이 들고 있는 팝콘 통에 손을 뻗어 팝콘을 집어 천천히 입에 넣었다. 입에 넣자마자 사르르 녹으면서 달달함만 남았다. 그건 지금도 그래, 색시야. 태형의 말에 지민은 멍해진 표정으로 태형을 바라봤다.

 

 

... 잘도 그런 부끄러운 말 하네.

 

드디어 사귀는데 내가 무슨 말을 못하겠어.

 

 

태형이 헤 웃었다. 지민은 가만히 태형이 웃는 모습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말은 안했었는데 너 그렇게 웃을 때마다 심장이 아파. 생각지도 못한 지민의 말에 태형이 순간 멍해졌다. 온 몸이 굳은 듯 가만히 있던 태형의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 색시... 잘도 그런 부끄러운 말 하네. 태형의 말에 지민이 피식 웃었다.

 

영화는 적당히 재밌었다. 아니, 사실 잘 모르겠다. 내용이 하나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팝콘 먹으려고 무심코 뻗은 손이 살짝 얽히고 나니, 그 이후로는 팝콘 통에 손도 못 넣었다. 클리셰 범벅인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서로의 손이 닿자마자 정전기라도 통한 것처럼 찌릿한 게 심장까지 영향을 주는 거라. 평생 손 한 번 못 잡아 본 사이도 아니고, 영화를 처음 본 사이는 더더욱 아닌데 하는 짓은 영 숙맥이다. , 첫 연애니까 숙맥이 맞기는 하지. 데이트라는 게 이렇게 마음이 쓰이는 거였나. 행동 하나하나 다 신경쓰다보니 벌써 피곤해졌다. 차라리 친구였을 때가 더 데이트 같았다. 도대체 연인 사이에 데이트는 어떤 마음으로 하는 거지.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하고는 있지만 그 사랑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고 어떻게 공유를 해야 하는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냥 둘이 좋아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연애라는 건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닌가보다.

 

저녁으로는 자주 가던 초밥 뷔페에 갔다. 태형이 익숙하게 음식을 담아 자리에 돌아오니 지민이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먹고 있지. 태형의 말에 지민이 살풋 웃으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 둘은 마주보고 앉아서 적당히 이야기를 하고 적당히 먹으며 시간을 보냈다.

 

근데 우리가 하는 거 데이트 맞아? 갑작스런 지민의 물음에, 입 안에 초밥을 막 넣던 태형이 사례가 들려 켈록켈록 기침을 해댔다. 괜찮아? 갑자기 왜 그래! 지민이 다급히 잔에 물을 채워 태형에게 건넸다. 태형은 괜찮다는 듯 손을 저으며 물을 마셨다. 아 괜찮아, 괜찮아. 두어번 더 기침을 한 태형은 간신이 진정 되었다.

 

 

갑자기 왜 그렇게 생각해.

 

그냥. 이러면 우리 친구였을 때랑 별 다를 거 없는 것 같아서.

 

......

 

항상 하던 대로 영화보고 밥 먹고, 후식까지 먹거나 아니면 피씨방.

 

그러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연애하지?

 

... 글쎄.

 

 

태형은 팔짱까지 끼며 심각하게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사실 그 문제는 처음 사귀기 시작할 때부터 생각하고 있던 것이었다. 물론 될대로 돼라 식으로 무작정 데이트 나오긴 했지만, 태형 역시 아는 것은 없었다. 친구에서 연인으로 발전한 사람은 그렇게 많던데 그 사람들은 다 첫 데이트를 어떻게 한 거야. 태형은 진심으로 궁금했다.

 

 

보통 영화나 그런 거 보면 다들 이렇게 데이트 하던데. 같이 영화 보고 밥 먹으면서 이야기 하고.

 

, 그건 그렇긴 해.

 

친구에서 연인으로 발전한 사람들도 그냥 이렇게 친구끼리 하는 것처럼 노는 건가?

 

... 우리가 이상한 거였나?

 

 

지민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하는 말에 태형이 놀랐다. 내가 색시를 계속 좋아해서 나도 모르게 데이트를 하게 된 건가?! 진심으로 놀라며 말하는 태형에 지민이 빵터졌다. 끅끅거리며 한참을 웃던 지민이 간신히 진정하며 물었다.

 

 

그럼 나도 너 좋아했으니까 우리도 모르게 데이트 한 거야?

 

... 아니야. 그 때랑 지금이랑 느낌이 다르단 말이야.

 

어디가.

 

몰라. 그냥 달라. 느끼는 게 달라. 뭔가 좀 더... ... 기뻐.

 

......

 

그 때는 마음 숨기기 급급했는데 지금은 좀 더 편안하기도 하고. 이런 거 막 해도 되고.

 

 

태형이 갑자기 손을 훅 뻗어 지민의 입가를 살짝 쓸었다. 그의 부드러운 손가락이 입가에 닿고 떨어지는 그 순간을 멍하니 보던 지민은, 그의 손가락이 그의 입에 닿았다가 떨어지는 그 모습까지 다 보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얼굴에 열이 훅 올라왔다. 여기에 묻힐게 뭐 있다고 그렇게 묻히고 먹어. 타박하는 듯해도 다정하기만 한 태형의 목소리에 지민은 말없이 손부채질만 했다.

 

 

, 그런 건 말 하고 해...

 

? ?

 

갑자기 그런 거 좀 마음의 준비 할 시간을 달라고!

 

? 내가 뭘 했다고 마음의 준비 할 시간을 달래.

 

아씨... 어쨌든.

 

 

지민은 괜히 짜증을 내며 들고 온 초밥을 마구 입 안에 넣었다. 지금은 바로 앞에 있는 태형의 얼굴도 보기 힘들었다. 쟤는 뭐가 저렇게 자연스러워? 아니 내가 지금 너무 예민한 건가? 지민은 온갖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태태. 지민의 부름에 태형이 입 안에 초밥을 가득 넣은 채 지민을 바라봤다. 두 볼이 빵빵해진 채 눈을 커다랗게 뜨며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이 퍽 귀여웠다.

 

 

너 내가 첫사랑이라고 했지.

 

.

 

연애 해본 적도 없고.

 

.

 

네 얼굴이 아깝긴 하다. 이제 곧 고3인데 그 얼굴에 이제야 연애 하냐.

 

... 뭐야, 그 말은. 계속 색시만 보고 다녔는데 그럼 어떻게 연애 하냐?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이랑 어떻게 사귀어.

 

만약에 우리 평생 서로 마음 몰랐으면 넌 어쩔 생각이었어?

 

 

지민의 물음에 열심히 상하운동 하던 태형의 턱이 천천히 멈추었다. 동시에 그의 표정이 묘하게 가라앉았다. 동그랗게 뜨고 있던 눈이 천천히 차가운 눈매가 되었다. 태형이 목울대가 움직였다. 천천히 물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 태형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처음에는 색시를 무시했지. 그런데 색시가 우는 거야. 그래서 포기했어. 그 다음에는 그냥 친구로 평생 옆에 붙어있을 생각이었어. 그게 우리가 제일 오래 볼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거든.

 

......

 

내가 고백할 생각은 전혀 없었어. 가끔 나조차도 감당하기 힘든 감정인데 그걸 아무것도 모르는 색시한테 넘겨줄 수가 없는 거야. 그리고 고백하는 순간 우리 관계는 끝나는 거니까.

 

......

 

난 겁쟁이야. 너 잃는 거 무서워서 고백도 못했던 거야. 만약 색시가 먼저 말하지 않았더라면, 난 정말 이대로 쭉 색시 뒤만 보며 살았을지도 몰라.

 

 

다행이다, 그치. 씨익 웃으며 말하는 태형을 보며 지민은 따라 웃을 수 없었다. 그저 말 뿐이었는데도 태형의 진심이 그대로 전해지는 기분이었다. 자신에 대한 그의 마음이 얼마나 무거운지 너무나 잘 느껴져서 장난으로 넘길 수 없었다. 지민도 짝사랑 때문에 마음고생 꽤나 했으니까. 잠깐이었지만 누군가를 혼자 좋아하는 것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지 잘 알았다. 자신은 그 조금도 힘들어서 각오하고 고백한 건데, 태형은 그 오랜 시간동안 얼마나 어떻게 견뎠는지 감도 오지 않았다.

 

 

그래서 사실 아무것도 안해도 좋아. 그냥 이렇게 색시가 내 마음 알고, 내가 색시 마음 알고 있는 상태로 얼굴만 보고 있어도 좋아.

 

......

 

색시는 안그래?

 

... 아니.

 

......

 

미치도록 좋아.

 

 

 

 

 

 

 

 

 

 

3. 뽀뽀하고 싶소

 

벚꽃의 꽃말은 시험기간이라 했던가. 올해는 꼭꼭 벚꽃놀이 가자고 약속에 약속을 받아놨으나, 역시나 벚꽃이 만개할 시기에 딱 걸린 시험 때문에 올해도 결국 무산이 되어버렸다. 태형은 그 무산된 벚꽃놀이 때문에 아직까지도 삐져있었다. 야 지금 며칠 째야. 지민이 정색 하면서 목소리를 낮게 깔아도 태형은 책상에 볼을 대고 엎드린 채 묵묵부답이었다.

 

 

나도 가고 싶었어. 야 나라고 너랑 데이트 안하고 싶었겠냐? 만개한 날이랑 시험기간이랑 딱 겹친 걸 어떡해.

 

하루 공부 안한다고 뇌세포가 다 죽어? 색시가 이때까지 축적해놓은 지식들이 홀라당 다 날아간대? 그 몇 시간 바람 좀 쐰다고 색시 등수가 저 바닥에 처박힌대?

 

넌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난 그렇게 느껴져!

 

누가 들으면 우리가 뭐 데이트 한 번도 안한 줄 알겠네!

 

벚꽃놀이 데이트는 한 번도 안했어.

 

 

지민은 결국 입을 다물었다. 얘 이런 똥고집은 옛날부터 오졌지. 지민은 결국 태형에게 다가가 그대로 쭈그려 앉아, 태형과 시선을 맞추었다. 그 와중에 볼이 눌려 툭 튀어나온 입술 그대로 뚱한 표정인 태형이 귀여워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난 지금 웃을 기분 아니야, 색시야. 태형이 뚱한 표정 그대로 뚱하게 말했다.

 

 

올해 시기가 많이 안좋았잖아. 나도 주말에는 너랑 벚꽃놀이 하고 싶었어. 근데 주말에 비 오고 다 떨어졌잖아. 게다가 시험기간이기도 했고.

 

......

 

앞으로도 같이 있을 시간 많아, 태형아. 내년에는 우리 성인도 되는데 술 마시면서 벚꽃놀이 하면 되겠네.

 

......

 

오늘 학교 마치고 집 돌아가면서 놀이터 잠깐 들릴까? 거기 엄청 큰 벚나무 하나 있잖아. 거기 바람도 잘 안 드는 곳이니까 어쩌면 꽃이 아직 남아있을지도 몰라.

 

... 알았어.

 

 

지민의 말에 그제야 태형이 슬금슬금 상체를 일으켰다. 지민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똥고집은 어째 안변한다. 차라리 이런 건 귀엽기라도 하지, 춤 같은 거랑 관련되면 무서울 정도로 집착할 때도 있었다. 다년간의 경험을 미루어봤을 때, 태형의 똥고집을 꺾는 방법 따윈 없었다. 그나마 도저히 들어줄 수 없을 걸로 고집부린 적은 없었기 때문에 좋게 좋게 넘어가는 거지, 만약 말도 안되는 걸로 고집 부린다면 정말 끝을 봐서라도 서로 치고 박고 싸울지도 몰랐다. , 거기까지는 가본 적 없지만.

 

태형을 설득하고 나서야 제자리에 앉는 지민을 쭉 보던 정우가 입을 열었다.

 

 

사귄지 몇 달이 넘었는데도 너희는 어째 변한 게 없네.

 

우리?

 

하긴 너희 옛날부터 그러고 다니는데도 친구라고 우기는 게 존나 코미디긴 했지.

 

뭐래.

 

너희 사이가 애초에 친구였긴 했냐.

 

 

정우는 심드렁하게 하는 말에 뚱해진 지민이 고개를 돌렸다. 언제부터 자신을 보고 있었는지 태형과 시선이 마주쳤다. 턱을 괸 채 무표정으로 자신을 지그시 보고 있는 그의 모습에, 지민은 순간 헉 숨을 들이켰다. 언제나 생각하는 거지만, 태형의 그 눈빛은 누구라도 홀릴 듯한 것이어서 지민은 때때로 그를 멍하게 바라보기만 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이 깊기만 한 그의 눈을 멍하니 바라보면, 태형은 이내 피식 웃으면서 한 손을 들어 지민의 머리를 한 번 헝클였다.

 

 

그렇게 보면 나 심장 떨려.

 

 

태형의 말에도 지민은 할 말 없이 헝클어진 머리만 쓱쓱 정리했다. 누가 할 소릴.

 

 

 

3학년이 된 이후로 마음이 급해져서인지 따로 둘이 만날 시간이 잘 생기지 않았다. 그나마 옆집이고 학교도 같으니 거의 자는 시간 빼고는 하루온종일 붙어 다닐 수 있는 게 다행이었다. 태형은 사실, 전부터 공부에 큰 뜻이 없었지만 지민은 달랐다. 지민은 본인이 확실히 원하는 과가 있었고 가고 싶은 대학이 있었다. 그 학교에 가려면 공부를 꾸준히 열심히 해야 했다. 3학년 올라와서는 정말 둘이 따로 만난 시간이 없었던 것 같다. 오늘 태형이 그렇게 뚱하게 시위를 하고 있던 것이 이해되기는 했다.

 

색시 바쁘니까 잠깐만 보고 가자. 태형의 목소리가 잔잔히 퍼졌다. 밤중에 골목길은 가로등이 있어도 어둡긴 했지만, 지민은 둘만 걷고 있는 이 길이 너무 좋았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항상 같이 다니던 길이어서 많은 추억이 있었다. 제 손을 감싸 듯 잡은 태형의 손은 굉장히 따뜻하고 포근했다. 옛날부터 심심치 않게 잡았던 손이라, 이제 손이 혼자 공중에 떠 있으면 허전할 지경이었다. 그런 제 마음을 아는 건지, 태형은 언제나 먼저 손을 잡아주었다.

 

12시가 다 된 시간에 놀이터에 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미끄럼틀과 그네, 시소만 덜렁 있는 놀이터는 아직도 모래밭이 있는 옛날 놀이터였다. 봐봐, 그래도 여기 벚꽃은 아직 남아있지? 지민이 웃으면서 말했다. 놀이터 입구 즈음에 있는 벚꽃은 매우 크기도 해서, 꽤나 예뻤다. 이미 떨어진 꽃잎들이 주위 바닥을 물들여 놓았다. 이따금 바람이 살짝 불 때마다 조금씩 꽃잎이 떨어졌다. 지민은 손바닥을 쫘악 폈다. 공중에서 하늘하늘 떨어지던 꽃잎은 지민의 손바닥에 사르르 앉았다. 헐 태형아 이거 봐봐! 지민은 그대로 몸을 돌려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민을 보고 있던 태형이 그에게 다가왔다.

 

 

벚꽃 잎을 잡으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다고 그러던데. 얘는 그냥 나한테 왔어.

 

, 신기하네.

 

첫사랑이 이미 이루어져서 얘가 먼저 다가왔나봐.

 

 

꽃잎이 바닥에 떨어지지 않게 살짝 주먹 쥔 지민이 고개를 들어 태형을 보다 푸핫 웃음을 터뜨렸다. 태태한테도 꽃잎이 먼저 다가왔네. 지민이 손을 뻗어 태형의 머리 위에 떨어진 꽃잎을 조심스럽게 집었다. , 내 거. 태형이 두 손을 내밀자, 지민은 그의 머리 위에 있던 벚꽃을 두었다. 태형은 그런 지민을 가만히 바라보다, 불시에 그의 볼에 촉 뽀뽀했다. 아 깜짝아. 지민이 움찔 놀라 태형을 올려다봤다. . 태형은 마치 7살 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지민은 그의 웃음에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색시야.

 

.

 

 

태형의 부름에 지민은 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나 뽀뽀하고 싶어. 태형의 말에 지민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방금 했잖아.

 

그건 볼이잖아. 입술에도 하고 싶다고.

 

, 그건...

 

맨날 볼뽀뽀만 하게 해주고. 사귀는 거 맞아?

 

, 그럼 맞지! 내가 왜 너랑 손잡고 뽀뽀하고 그러는데!

 

웃겨 진짜. 우리 무슨 7살 애도 아니고 볼뽀뽀가 뭐냐! 나는 색시만 보면 막 응? 안고 싶고 키스하고 싶고 그런데!

 

, ... ! 너는 완전 애기 때부터 볼 거 다보고 자란 사이에 그런 거 하고 싶냐?

 

하고 싶어! 우리가 친구도 아니고, 난 색시랑 항상 닿고 싶었단 말이야!

 

 

태형의 커다란 두 손이 지민의 두 볼에 닿았다. 살짝 감싸 안은 지민의 두 볼이 열이 난 듯 화끈화끈했다. 색시야, 너 볼 뜨거운 것 같아. 태형의 말에 지민이 화들짝 놀라며 얼굴을 뒤로 빼려 했지만 태형이 살짝 힘을 줘 꾹 잡았다. 야 이그 느르... 살짝 튀어나온 지민의 입술이 삐약삐약거리 듯 움직였다. 흐흐흫. 태형이 웃으며 얼굴을 살짝 가까이 들이밀었다. 지민의 눈이 살짝 커져 끔뻑거렸다.

 

 

색시, 뽀뽀하고 싶소.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저 얼굴이 어쩐지 얄미웠다. 지민은 장난 그만하라며 태형의 손목을 잡았을 때였다.

 

입술에 부드러운 무언가가 닿았다. 가까이에 제가 사랑해 마지않는 태형의 얼굴이 보였다. 촉하는 소리와 함께 두 입술이 살짝 떨어졌다. 코끝이 살짝 닿을 거리에서 태형은 지민을 바라봤다. 태형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안그래도 빨리 뛰던 심장이 태형의 저 웃음을 보고 아예 폭주하는 듯 미친 듯이 뛰어댔다. 이 정도 거리면 이 심장소리가 들릴 것 같아 어쩐지 부끄러워졌다. , 이거 놔... 지민이 소심하게 말했다. 입술을 조금만 움직여도 태형의 입술에 닿을 것만 같았다. 나 심장 엄청 뛰어. 태형이 작게 말했다. 지민은 입술만 옴짝달싹 하다가 말했다.

 

 

나도 엄청 뛰어.

 

나 한 번만 더 해도 돼?

 

...그런 걸 왜 물어봐.

 

 

지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또 맞부딪친 입술에, 지민은 결국 꾹 눈을 감았다. 부드러우면서도 말랑한 그의 입술 감촉이 느껴지고 뒷목과 허리를 감싸는 손길이 느껴졌다. 지민은 아예 두 팔을 태형의 목에 감았다. 서로의 사이가 더 가까워졌다. 아까부터 들리는 이 빠른 심장 소리가 제 것인지, 태형의 것인지 모르겠다.

 

제 아랫입술을 깨물고 서서히 떨어지는 느낌이 나서야 지민은 천천히 눈을 떴다. 막 눈을 뜨고 있던 태형과 시선이 얽혔다. 갑자기 얼굴에 열이 확 올랐다. 내가 지금 뭘 한 거야. 어안이 벙벙했다. 지민은 어쩔 줄 몰라 애써 시선을 피하다 다시 태형을 봤다. 태형의 얼굴이 시뻘게져 폭발직전이었다.

 

 

, 네가 해놓고 네가 더 부끄러워하면 어떡해!

 

몰라, 그냥 부끄러운 걸 어떡해! 그냥 뽀뽀만 하려고 했는데...

 

너 얼굴 엄청 시뻘게졌어.

 

색시 얼굴도 터질 것 같애.

 

너 때문이잖아.

 

어때?

 

뭐가.

 

아직도 친구 같아?

 

 

태형의 낮은 목소리가 잔잔히 울렸다. 밤이 되면 살짝 가라앉는 태형의 목소리가 어쩐지 낯간지럽게 들렸다. 지민은 태형을 가만히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가슴 터질 것 같은데 친구라니 말도 안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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