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스퍼

[뷔민/다각] 에스퍼 썰

글하 2016. 12. 23. 23:00

세상은 두 종류의 인간으로 나뉘어짐. 에스퍼와 노멀.

에스퍼는 어떤 특정 부분에 있어서 인간의 범위를 넘어서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뜻함. 흔히 말하는 초능력자.

노멀은 그런 능력을 가지지 않고 평범하게 태어난 사람을 가르킴.

세계 곳곳에는 에스퍼들만 모아놓은 학교가 있음. 여러 에스퍼 학교가 있지만 한국에서 제일 유명한 학교는 국립 에스퍼 학교인데 유구한 전통과 권위를 자랑하는 학교. 이곳은 일반 에스퍼 학교와는 다름. 일종의 귀족학교라고 생각하면 되는데 권력 있고 명예 있고 돈 있는 뼛속부터 있는집안 자제 중 에스퍼를 타고 난 애들이 다니는 곳. 초등학교부터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연구기관까지 다 같은 제단이기 때문에 여기 들어오면 취직까지 프리패스. 입학은 초등학교 때만 받기 때문에 그만큼 진입장벽이 철옹성 수준으로, 입학 조건도 굉장히 까다로운 편.

학교 안에서도 수준이 갈림. 타고난 능력의 힘과 컨트롤 능력, 집안 수준도 무시할 수 없음. 겉으로는 민주사회라고 하지만 에스퍼가 처음 생긴 이후로 그런건 다 무너진지 오래. 에스퍼를 가지고 있는 소수의 집단들이 나라를 쥐고 움직이는 형식임. 이미 많은 세계가 그렇게 이루어져 있음. 나라 인구의 8:2 비율의 법칙에 따라, 나라 인구의 20%가 에스퍼임. 에스퍼들 중 20%는 모든 국민 혹은 세계에서 알만한 가문들임. 그들 중 20%는 능력 중에서 최상급 능력을 가지고 있는 에스퍼들임.

좋은 능력들이 결합될수록 아이는 좋은 능력을 가지고 태어나고, 에스퍼랑 노멀 사이에 아이를 낳으면 그만큼 아이가 에스퍼일 확률은 줄음. 같은 계열끼리 결합하면 아이는 같은계열 능력일 확률이 높아지고 다른 계열이면 상대적으로 약한 계열의 아이가 태어날 확률이 높음. 능력은 보통 유전으로 집안에서 있었던 능력이 되물림 되는 경우가 많음. 에스퍼들은 더 좋은 에스퍼와 결혼하기 위해 애를 씀. 자신들의 집안을 더 키우고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결혼이 이용되는 경우도 많음.



그리고 태형이는 이런 나라에서 노멀임. 아버지는 어렸을 때 돌아가시고 어머니랑 둘이서 사는데 태형은 딱히 불만이 없음. 살고 있는 곳도 도심과는 조금 떨어진 곳이라서 그런지 여기는 바쁘게 돌아가는 경쟁사회 속에서 여유로운 편임. 딱히 학업이나 취업에도 욕심이 없어서 그냥 나중에 고등학교 졸업하고 농사나 지을래 하는 애임. 엄마도 딱히 태형의 미래에 간섭을 하지 않는 편이라서 그러려니 함.



중3 겨울 때, 고등학교 발표난 거 받으러 오라고 해서 친구들과 학교로 감. 어차피 이 근처에 학교라고는 몇개 없어서 태형을 포함한 다른 친구들도 지망 적은 학교가 다 거기서 거기임. 태형은 어차피 이 근처에 다니게 되겠지 싶어서 아무 생각없이 보다가 끄어억!!! 소리를 지르면서 종이를 집어던짐. 김태형 왜그래? 친구들이 의아해서 태형이 집어던진 종이를 보고 친구들도 난리남. 뭐야 너, 에스퍼였어?



그럴리가. 태형은 뼛속부터 노멀인 노멀집안임. 엄마도 노멀이고, 아빠도 노멀이고 그 위에 할아버지, 할머니들도 다 노멀임. 이건 필히 잘못왔다 싶음. 이 나라에 김태형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한둘도 아니고 설마 동명이인한테 잘못 왔겠지 싶으면서도 주소도 자신의 집이고 이름도 딱 김태형, 심지어 한자로도 적혀 있는게 너무 자신을 가리키고 있음.



[선생님, 이거 잘못 온 것 같은데요? 전 에스퍼 학교 적은 적도 없고, 에스퍼도 아닌데...]


[글쎄. 선생님은 그저 오는대로 너희한테 주는 것 밖에는 아는 것이 없어서... 그쪽으로 직접 문의 해보는게 어떠니.]



아니, 말이 됩니까. 태형은 헛웃음만 나옴. 아무리 종이를 뚫어져라 쳐다봐도 '국립 에스퍼 학교' 라고 보임. 아니, 일반 에스퍼 학교도 어이가 없는데 심지어 국립 에스퍼 학교라니, 이건 아무리 생각해봐도 어딘가 잘못되었다 싶음. 당장 폰으로 학교 문의처를 찾아보는데 안나와 있음. 선생님 혹시 저한테 다른 우편물 온 건 없어요? 물어봐도 그게 끝이라는 말 밖에 없음.



김태형 에스퍼래! 종이를 본 친구의 한마디에 학교가 뒤집어짐. 뭐, 김태형이 에스퍼라고? 야, 미친 김태형 에스퍼였대! 와, 시발 어쩐지 애가 좀 도라이 같더라니. 존나 배신이다, 우리가 함께 한 세월이 얼만데 그런 걸 다 숨기냐.



친구들 말도 다 귀에 안들어옴. 그냥 이 상황이 다 말도 안됨. 내가 무슨 에스퍼야. 태형은 당장 자리를 박차고 집으로 달려옴. 고등학교까지 평범하게 졸업하고 아빠가 유산으로 물려준 땅을 가꾸어 과수원 농사 하면서 평생 엄마랑 같이 사는게 꿈이었음. 근데 에스퍼라니. 국립 에스퍼 학교라니. 거기는 심지어 여기서 5시간은 가야 나오는 곳임. 여태까지 단순하게 살아온게 제 자랑일 정도로 걱정 없이 살아왔는데 난데없는 입학통지서에 머릿속이 복잡해짐.



엄마! 태형이 현관문 부서질듯 열며 요란하게 집에 들어오다가 바로 보이는 무언가에, 결국 태형은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 있을 수 밖에 없었음. 거실에 널부러져 있는 것은 국립 에스퍼 학교 마크가 새겨진 교복이었음.











***











에스퍼 학교에서는 난리가 남. 웬 되도 않는 노멀 한명이 에스퍼 학교로 전학 온다는 소문이 그 넓은 학교 구석구석 다 퍼짐. 윤기는 당장에 이사장의 멱살을 잡고 짤짤짤 흔들며 물어보고 싶은 심정이었음. 망할 노인네 드디어 노망이 났나. 그는 차오르는 분노를 애써 꾹꾹 눌러 삼키며 학생부실로 향함. 학생부실로 향하는 유일한 복도로 코너를 도는 순간, 남준과 호석이 어디서 튀어나와 윤기를 막아냄. 형, 지금은 부실로 안들어가는게 좋을 것 같은데.



[지금 당장 김석진 좀 봐야겠으니까 이것 좀 놔봐.]


[석진이 형도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잘 몰라요. 지금 석진이 형한테 가봤자 욕만 잔뜩 먹고 올걸요. 나중에 진정 좀 되면 가는게,]


[학교 내부 사정을 제일 먼저 아는 새끼가 이 엄청난 일을 지금 알았을리가 없어. 아, 비켜!]



평소에는 그렇게 힘 없던 윤기가 어디서 이런 힘이 나는지 호석이랑 남준이를 퍽퍽 밀치면서 꿋꿋히 학생부실로 향함. 막 밀린 남준이는 순간 당황했지만 바로 윤기한테 붙어 억지로 끌어당김. 형 지금은 진짜 안된다니까요, 석진이 형도 엄청 화났다고요.



석진이 화났다는 말에 윤기는 우뚝 그 자리에서 멈춤. 인생의 반 이상을 석진과 보내서 그의 성격을 잘 아는 윤기는 석진이 화났다는 게 무슨 뜻인지도 아주 잘 앎. 하, 시발 미치겠네. 윤기는 짜증스레 머리를 헝클이면서 그냥 돌아감. 후. 호석과 남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쉼.



학부모 사이에서도 말이 엄청 많이 나왔음. 옛날부터 거르고 걸러 최고의 인재들만 모아놓은 이 학교에서 난데없이 노멀이라니, 사람능멸도 아니고 이게 뭐하는 짓이냐. 그 노멀은 대체 뭐 하는 놈이길래 학교가 세워진 이래로 단 한번도 깨진 적 없었던 학교의 규칙을 깨고 오느냐. 그 노멀에 대한 구설수가 마구 오르내리고, 노멀에 대한 소문은 날로 갈수록 커졌음. 그러다 어느순간 그에 관한 각종 소문들이 마치 없었던 일인 양, 한번에 싹 사라짐. 노멀이 이 학교에 입학을 하게 된다는 그 일은 나라가 들썩일 정도로 엄청난 일인데도 매스컴 어느 곳에서도 그와 관련된 일은 일체 언급되지 않음. 윤기는 그런 상황을 쭉 보면서 혀를 내두름. 하여튼 그 노인네, 기분 나쁠 정도로 철저하단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