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랩홉] 사랑옵다 2
남준은 괜찮다 괜찮다 손을 내저었지만 팀원들의 성화에 결국 가장 상석에 앉았다. 이번 프로젝트는 팀장님의 덕이 컸고 팀장님 덕분에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었다며 칭찬을 받는 것이 영 어색했다. 본인이 칭찬 하는 것은 잘하면서 칭찬 받는 것은 어색해 하는 남준이었다. 남준은 그 자리가 못내 불편했다. 능력에 맞는 자리에 앉는 것은 당연했지만 남준은 100% 본인의 능력으로 오른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번 일은 꽤나 까다로웠는데 여러분들 덕분에 일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할 수 있었습니다. 내일 출근 걱정은 잠시 접어두시고 오늘을 즐겨주세요.
남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환호와 함께 술잔이 부딪쳤다. 꽤나 분위기 좋은 회식이었다. 남준은 회식이 처음이라 낯선 느낌이 들긴 했지만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팀장님은 여기 입사한지 얼마나 되셨어요?
한창 분위기가 달아올랐을 무렵, 남준의 곁에 앉아있던 한 사원이 넌지시 물었다. 그냥 서로 대화 나누는 정도의 소리였기 때문에 근처에 있는 사람 외에는 그 목소리가 미치지 않았다. 끝 쪽 테이블에서는 이미 그쪽끼리 회식을 즐기고 있었다. 그의 물음을 들은 다른 사원들 역시 궁금한지 남준을 힐끔 쳐다보았다.
아 저 입사한지 좀 됐어요.
그래요?
이제 7년 정도 됐나.
남준의 말을 들은 몇 사람은 순간 헉 숨을 들이켰다. 회사 다닌 지 7년이나 되었으면 대체 지금 나이가 얼마라는 거지. 되게 젊은 팀장님 인줄 알았는데 날짜 계산 해보면 생각만큼 그리 젊은 나이가 나올 수 없다. 팀장님 아직 20대라고 들었는데... 사원들의 표정에서 혼란스러움이 드러났다. 남준은 그런 사원들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멀뚱히 앉아 그들만 끔뻑끔뻑 볼 뿐이다.
저희가 사실 팀장님 아직 30대 아닌 줄 알았거든요.
아 네. 내일모래 계란 한판이 되네요.
예?
내년에는 저도 서른이네요.
아...
사원들의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그럼 22살에 입사를 했다는 건가. 사원들의 복잡 미묘한 표정을 본 남준은 어색하게 웃으며 옆머리만 만졌다. 이래서 나이 얘기는 안했던 것이다. 이런 사소한 것이라도 혹여 뒷말이 나올까 조심스러웠다. 남준은 본인 모르는 뒷말이 나오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차라리 앞에서 불만을 얘기 했을 때 바꿀 수 있으면 바꾸고 거를 건 거를 수라도 있을 텐데. 사람 많이 모인 곳에서 뒷말 안 나오기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노력했다. 제 애인은 그런 거 하나하나 다 신경 쓰지 말라고 했지만 도저히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왜 네가 나서서 인생 피곤하게 사냐. 애인의 물음에 남준은 웃어 보이기만 했었다. 그러게.
팀장님이 가끔 사오시는 도넛이랑 커피가 정말 맛있더라고요.
그렇죠? 제가 정말 좋아하는 곳이에요.
저도 궁금해서 어디 있나 쳐봤는데 꽤나 유명하더라고요.
그래요?
사람들이 줄 서서 산다고 그랬어요.
맞아요. 맛있어요.
남준의 미소에 여사원들은 남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그의 미소는 따라 웃게 되는 힘이 있었다.
그 카페 어디냐고 물어봐도 안 가르쳐 주시고.
막내 사원이 장난스럽게 투정부리듯 말하자 남준은 푸핫 웃었다. 예의 그 다정한 미소가 아닌 고개를 숙이면서 소리를 내어 웃는 남준에, 주위 사람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남준은 손을 내저었다. 미안해요,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는데 제가 질투가 좀 심해서요. 그의 말에 더욱 의아한 표정이 지어졌다. 아리송한 말이다.
사실 저희끼리 그 카페에 팀장님이 좋아하시는 분 있는 거 아니냐고 얘기한 적 있었거든요.
어떻게 아셨어요? 그 카페 제 애인이 하는 곳이에요.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이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남준의 대답에 여사원들은 제 귀를 의심했다. 애인? 방금 애인이라고 했지?
근데 정말 애인이라서 그런 거 아니고 진짜로 맛있어서 자주 사오는 거긴 해요. 근데 거기다 대고 또 제 애인이 만든 거예요 하기엔 좀 그래서. 본의 아니게 애인 없는 척 하게 된 건가요?
남준의 말에 아니라며 손을 내저으면서도 어쩐지 아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제가 따로 시간을 안내서 저를 알 수 있는 기회가 적긴 했네요. 혹시 저에 대해 궁금한 점 있으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괜찮으니까 물어보세요. 저는 정말 우리 팀 만큼은 서로 살가웠으면 했거든요. 안 그래도 애인한테 혼났어요, 사원들이 저를 너무 어려워하면 어떡하냐고. 살풋 웃으며 하는 말에 여사원들은 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그래... 저런 남자가 애인이 없을 리가 없지...
그럼 이때까지 팀장님은 애인분 때문에 일찍 퇴근하신 거예요?
애인 때문이라는 말은 좀 그렇고... 제가 빨리 보고 싶어서 그러는 거니까요. 최대한 일을 빨리 마무리 하고 가는 편이긴 하죠.
애인분이랑 얼마나 되셨어요?
음... 알고지낸 건 12년? 정도 됐고 사귄지는 10년?
덤덤하게 말하지만 실로 어마어마한 기간에 입이 떡 벌어졌다. 그 정도면 그냥 결혼 생각 할 수준인데. 결혼 생각은 없으세요? 다른 사원의 물음에 남준은 누가봐도 설레어 하는 표정을 지으며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아, 결혼... 하고 싶네요.
애인분께는 말씀 드려본 적 없으세요? 은근 기다리고 계실수도 있죠.
그런가요? 결혼 할 수 있으면 하고 싶은데...
끝을 흐리는 남준에 사원들은 자신들이 더 애가 탔다. 10년 연애 했으면 결혼 안하는게 더 이상하지 딱 나이도 결혼 적령기인데. 여사원들은 마치 자신이 프로포즈 받는 것처럼 본인들이 더 설레발쳤다. 팀장님 정도면 프로포즈 하는데 안 받아줄 사람 없죠. 맞아요, 지금이 딱 때라니까요. 저 같으면 팀장님 프로포즈 기다리다 눈 빠졌을걸요. 한마디씩 거드는 사원들의 말에 남준은 웃었다. 고마워요, 용기 내 볼게요. 사원들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의 애인이 부러웠다. 와 세상에 전생에 뭔 일을 하면 이런 복을 얻는다냐.
팀장님이 좀 늦으시네요.
지민의 말에 창가자리에 있는 의자에 앉아 턱을 괸 채 바깥을 보고 있던 호석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아아, 오늘 회식 갔는데 내가 너희들한테 이야기 안해줬나?
예? 팀장님이 회식을 갔다고요?
팀장님이 회식 갔다고요?
주방에 있던 정국도 헐레벌떡 뛰어나오며 소리쳤다. 호석은 흠칫 놀라 괴고 있던 턱을 살짝 떼며 그들을 봤다. 그게 너희들한테 그렇게 놀랄 일이냐?
당연히 놀라죠. 맨날 사장님 보고 싶다고 7시도 안돼서 오시는 분이시잖아요.
와 그 회사 회식도 있긴 있구나.
그럼 당연히 있지. 자기가 맨날 빠져서 그렇지. 회사 사람들은 상사가 같이 회식 하는 거 안 좋아한다는 핑계 대면서 맨날 빨리 온다니까. 그래서 오늘은 빠지지 말고 회식 다 하고 오라 그랬어.
그래서 사장님이 이 시간까지 있는 거구나.
전 두 분 싸운 줄 알았죠. 너무 해맑게 말하는 정국에, 호석은 어이가 없어 대꾸할 타이밍도 놓쳐버렸다. 우리가 뭐 언제 싸우는 거 봤냐. 싸우는 거 본 적 없으니까 오늘 싸운 줄 알았죠. 전혀 악의 없는 것은 알겠지만 왠지 모르게 기분이 이상해져 호석은 고개를 갸웃했다. 뭐지 이 묘한 기분 나쁨은.
사장님이랑 팀장님은 어떻게 만나셨어요?
어, 내가 안말해줬나?
안말해줬었죠. 그냥 면접 때 동성애를 어떻게 생각하냐고만 물어봤었어요.
아 내가 그런것도 물어봤었어? 미안 미안, 사실 애초에 너희 뽑을 생각을 하고 있었어서 면접 어떻게 했는지 기억도 안나. 그냥 대충 막 물어봤었을걸.
어쩐지 질문들이 이상하게 성의가 없더라.
그래서 어떻게 만났는데요?
지민의 재촉에 호석이 잠깐 생각했다. 뭐 거창한 건 아니고 그냥 우리 고등학교때부터 같은 학교였어. 학교 친구? 뭐 그랬지. 헐 대박. 호석의 말에 지민은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놀랬다. 엄청 오래 사귀었네요. 정국의 말에 호석이 허허 널털 웃음을 지었다.
설마 고등학생 때부터 사귀었겠냐. 그때는 그냥 친구였어.
아 어쩐지. 그때부터 사귀었으면 대체 얼마나 사귄거지 싶었어요.
19살 겨울에 사귀었다. 수능 끝나고.
헐.
헐.
만만치 않은 세월에 정국과 지민의 동공이 동시에 확장 됐다. 사장님 지금 29살이잖아요. 아 나이 얘기 하지 마, 서른 다 되어가니까 나이에 예민해져.
한번도 깨진 적 없어요?
너는 말하는게 꼭 우리 언제 한번 막 끝장 보기를 바라는 것 같다?
에이 설마요. 전 사장님과 팀장님의 사랑을 응원 합니다.
주먹까지 불끈 쥐어 보이며 말하는 정국에 호석은 결국 푸학 웃어버렸다. 뭐 믿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한 번도 깨진 적은 없고. 호석의 말에 둘은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호석을 바라봤다. 그들의 표정을 읽은 호석은 손을 내저었다. 진짜야, 진짜 한 번도 깨진 적 없어.
아니 어떻게 10년동안 권태기 하나 없이 잘 살 수 있어요?
에? 권태기가 없었던 건 아닌데.
예?
아, 권태기라 하기에는 좀 애매하고... 음... 지금도 소수가 힘이 약하잖아. 옛날에는 더 그랬으니까. 한 번씩 그런 벽에 부딪히면서 힘들었던 적은 있었지. 그걸로 좀 다툰 적도 있고.
와 두 분 다투기도 하긴 하네요.
야 그럼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데 어떻게 한 번도 안 싸우냐.
전 맨날 팀장님이 사장님을 볼 때마다 무슨 사귄지 한 일주일 된 커플처럼 보길래 진짜 사귄지 얼마 안 된 줄 알았어요.
그건 뭐야.
지민의 말에 호석이 빵터져 큭큭 대며 웃었다. 사귄지 일주일 된 커플처럼 보는 건 어떻게 보는 건데. 호석의 물음에 지민은 곰곰이 생각했다. 왜 맨날 팀장님 눈빛이 겁나 꿀 떨어지는 눈빛? 사장님이 뭘 해도 하나도 안 놓치고 뚫어져라 보면서 가끔 막 웃기도 하고 그러던데요. 호석은 왠지 부끄러워져 괜시리 지민을 향하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10년이 지나도 여전히 그럴 정도면 팀장님은 사장님 엄청 좋아하나 봐요. 정국의 말에 호석은 고개를 돌려 정국을 봤다.
나는 준이 좋아하는 게 안 느껴져?
아니요 그렇다기 보다는... 팀장님은 엄청 그걸 드러내신다고 해야 하나...
맞아 맞아. 팀장님은 사장님 보는 눈빛부터가 다르니까요. 사장님이 뭔 말을 할 때마다 엄청 뚫어지게 쳐다보고 사장님 따로 카페 일볼 때도 사장님만 엄청 보잖아요. 항상 똑같은 눈으로.
뭘 또 그렇게 자세히 봤어.
우리가 보고 싶어서 본 게 아니라 그냥 우연히 볼 때마다 그러고 계시니까 그러죠.
호석은 어쩐지 열이 오르는 느낌에 손부채질 했다. 한 번도 의식해 본 적은 없는데 제 3자한테서 이런 말을 들으니까 상당히 부끄럽긴 하다. 준이가 나를 항상 그렇게 봤다고? 어쩐지 이 이후로 준이의 얼굴을 보기 부끄러울 것 같았다.
누가 먼저 고백해서 사귀었어요?
어?... 준이.
그럴 것 같았어. 뭐 연인 사이에 그런 거 따지는 것도 웃기긴 한데 남이 보면 팀장님이 사장님을 더 좋아하는 것 같아요.
뭐? 나도 준이 좋아해.
사장님이 그렇게 말하면 팀장님은 사랑한다고 말할걸요.
정국의 말에 지민이 큭큭 웃었다. 와 진짜 팀장님 그럴 것 같아. 호석의 입꼬리가 축 처져 표정이 뚱했다. 남이 그렇게 느낄 정도인가. 여태까지 딱히 그런 걸 신경 쓴 적 없었는데 남이 그렇게 얘기하니까 갑자기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내가 평소에 준이한테 사랑하다고 한 적이 없었나? 아니 내 행동에 좋아하는 게 안 느껴지나? 남한테 그렇게 보일 정도로 차이가 나나? 여러 가지 생각이 마구 머릿속을 휘저었다. 아이씨, 너네 때문에 괜히 신경 쓰이잖아! 난데없는 큰 소리에 지민과 정국이 흠칫 놀랐다. 우리가 뭘 잘못 말했나... 그들은 머리만 긁적였다. 할 일 없으면 정산이나 해. 호석의 말에 넵 순순히 카운터 금고를 열었다.
호석은 창밖을 바라봤다. 어두컴컴한 하늘에 네온사인 빛만 가득한 거리에서 사람들이 하염없이 왔다 갔다 했다. 드문드문 커플들이 보였다. 팔짱을 끼고 다니고 어깨동무 하고 다니고 여자에 맞추어 고개를 숙여 머리를 맞댄 채 무어라 이야기를 하며 다니고. 옛날에는 그런 커플을 보면 가끔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저 사람들은 저렇게 당당하게 다닐 수 있구나. 어떻게 보면 자격지심이었다. 하루하루가 견디기 힘들 정도로 자기혐오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그만큼 바닥에 처박혔던 때가 있었다. 제 인생의 암흑기였던 시간이 생각나자 호석은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끔찍했다. 그나마 남준이 있어서 떨쳐낼 수 있었던 거지, 남준이 없었으면 자신이 어떻게 됐을지 감히 상상도 안됐다
한창 사념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누군가 뒤에서 자신을 확 껴안았다. 동시에 한 손이 제 두 눈을 가리고 뒤로 살짝 당겼다. 단단한 품이 뒤통수에 닿았다. 금방 왔는지 코트에서는 아직 차가운 바람이 묻어 있었다. 그러나 제 배와 두 눈을 감싸고 있는 두 손은 따뜻했다. 호석은 몸에 힘을 다 풀어 아예 그에게 몸을 맡겼다. 흐흥. 그의 작은 웃음이 머리 위에서 들렸다. 작은 울림이 뒤통수에 느껴졌다. 그는 호석의 머리 위에 제 턱을 얹었다. 호석은 제 눈을 가리고 있는 그의 손목을 잡았다.
왜 눈은 가려.
나는 안 봐주고 바깥만 보는 게 질투 나서.
그게 뭐야.
호석은 작게 웃었다. 그가 따라 웃는 것이 느껴졌다. 잠시 둘 사이에는 말이 없었다. 카페의 온기 때문인지 그의 몸에 점점 찬 기운이 사라졌다.
나는 네 예쁜 눈으로 예쁜 것만 봤으면 좋겠어.
어?
뜬금없는 말이었다. 호석은 되물었지만 남준은 그의 머리에 살짝 입을 맞추기만 했다. 손은 여전히 호석의 눈 위를 덮고 있었다. 이 손 좀 치워봐. 호석의 말에 남준은 그를 더욱 세게 껴안기만 할 뿐, 손은 치우지 않았다.
예쁜 것만 보면서 예쁜 생각만 했으면 좋겠어.
무슨 소리야.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아니야, 별로 안 늦었어.
너무 오래 네 옆을 비웠나.
그런 게 어딨어. 진짜 괜찮다니까.
호석은 아무렇지 않게 대꾸하다 문득 든 생각에 그의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너 또 이상한 생각했지. 호석이 물었다. 남준은 아무 말이 없었다.
네가 늦게 와서 또 내가 그런 생각 하게 됐다고 생각해?
......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준아.
......
나는 네가 내 표정을 신경 쓰고 미안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미안할 일이 아니야 이건. 이건... 내가 미안해해야 하는 거야.
호석아.
예쁜 것만 봤음 좋겠다며.
......
나 지금 네가 너무 보고 싶은데.
제 말이 끝나자마자, 눈앞이 환해지며 순식간에 몸이 돌려졌다. 참 힘도 좋다. 호석은 문득 생각했다. 바로 앞에 보고 싶었던 얼굴이 있었다. 호석이 씨익 웃었다. 마주보고 있던 그도 따라 웃었다. 호석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속 허리를 숙이고 있던 남준은 그제야 제대로 허리를 폈다. 남준이 자연스레 팔을 벌려 호석을 안았다. 호석도 익숙하게 그의 품에 안겼다. 신기하네, 회식 했는데 고기 냄새가 별로 안 나. 호석의 말에 남준이 푸스스 웃었다. 냄새 안 배게 엄청 노력했지.
사장님, 애정행각은 저희 보내주시고 하면 안될까요.
멀리서 들리는 지민의 목소리에 호석이 놀라 후다닥 남준의 품에서 떨어지며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국과 지민이 똑같이 뚱한 표정으로 카운터에 턱을 괸 채 바라보고 있었다. 아, 미안 미안 오늘은 내가 문 닫을게 너희는 먼저 가도 돼. 호석의 말에 그들은 바로 에이프런을 풀며 직원실로 들어갔다. 남준은 그들이 들어가는 것을 보다 호석에게 시선을 돌렸다.
애들은 괜찮아?
뭐, 저 애들? 응, 착해. 일도 열심히 하고.
그래. 네가 뽑았으니 좋은 아이들이겠지.
오래 했으면 좋겠는데.
오래 할 거야. 내가 알바생이어도 이런 카페면 열심히 하겠다.
너는 사심이 담긴 거고.
... 부정은 못하겠다.
호석이 푸핫 웃었다. 남준은 그가 웃는 모습을 보고 따라 웃으며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저희 먼저 가보겠습니다! 직원실에서 나오면서 인사를 하는 지민과 정국에, 호석은 손을 흔들어 주었다. 내일 보자. 남준도 살짝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들도 고개 숙여 인사 한 후, 다소 요란하게 카페를 나섰다. 형 오늘 야식 먹고 들어가요. 사거리 포장마차까지 늦게 오는 사람이 쏘기. 아, 먼저 가는 게 어딨어요!
그들이 사라지고 카페는 포근한 정적만이 자리했다. 우리도 슬슬 갈까? 늦었는데. 남준의 말에 호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옷 갈아입고 올게. 호석의 말에 남준은 호석의 손목을 살짝 잡아 제 쪽으로 당기고는 허리춤에 묶여있는 리본을 당겨 풀었다. 에이프런이 그의 손에 들렸다. 에? 호석이 고개를 들어 남준을 바라봤다. 너 이거 하고 있는 거 볼 때마다 생각 하는건데 내가 매주고 싶어. 엉뚱한 그의 말에 호석은 웃음을 터뜨렸다. 언제 한번 와서 네가 대신 매주면 되지, 아니 집에서 앞치마 매줘도 되고. 남준은 그게 뭐라고 미간까지 좁히면서 표정이 심각해졌다. 허. 호석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직원실로 향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호석은 문득 제 알바생들과 한 대화들이 생각났다. 나를 우울하게 만든 주범! 호석은 옆에서 운전하고 있는 남준을 힐끗 봤다. 무슨 할 말 있어? 그새 또 시선을 느꼈는지 남준이 바로 물었다. 호석은 괜히 안전벨트만 깨작깨작 긁다가 무언가 결심한 표정으로 남준을 봤다. 준아. 응? 마침 신호에 걸려 차를 멈춘 남준이 호석을 봤다.
왜?
준아. 좋아해.
헐 잠깐만. 아, 그런 깜짝 고백은 심장에 무리 오는데.
남준은 심장을 부여잡으며 장난스레 웃었다. 좋아해, 정말로. 호석의 말에 남준은 그의 머리를 쓰다듬다 그대로 몸을 쭉 빼 그의 입술에 살짝 키스했다. 응, 나도 사랑해. 나직히 말한 남준은 몸을 원래대로 돌리고 차를 다시 출발시켰다.
'사장님이 그렇게 말하면 팀장님은 사랑한다고 말할걸요.' 정국의 말이 맞았다. 호석은 안전벨트를 두 손으로 꼭 잡고 차창으로 머리를 기대었다. 호석아, 그러다 잘못하면 머리 부딪쳐. 남준의 말에도 호석은 머리를 떼지 않았다. 차창이 시원해서 머리를 식히기 좋았다. 호석아. 남준이 다시 한 번 불렀다. 호석은 여전히 머리를 떼지 않았다. 차의 움직임이 더욱 조심스러워졌다.
차를 주차하고 호석이 먼저 내렸다. 남준도 따라 내리고 호석에게 다가갔다. 준아. 호석의 물음에 남준은 그를 내려다보았다. 무언가 결연한 표정의 그에, 남준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호석은 호석 나름대로 진지했다. 설마 그럴리는 없겠지만 혹시나 남준이 자신들 사이에 있어서 자신이 좀 더 을의 입장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 정말로 슬플 것 같았다.
준아.
응.
내가 그동안 많이 표현을 안 한 것 같은데.
응?
아니 내 착각이었으면 좋겠지만.
뭔데?
남준은 한 발짝 더 다가가 호석의 옆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내리고, 볼을 감싸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남준은 항상 마음 내킬 때마다 여기저기 입을 맞추고는 했다. 준아. 호석은 그의 셔츠 깃을 잡아 살짝 당겼다. 갑작스런 호석의 행동에 남준이 순간 당황한 듯 보였다.
사랑해.
남준은 잠시 멍해졌다가, 곧 입가를 손으로 가리며 피식 웃었다. 호석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나 진심이야. 호석의 말에 남준은 웃음기가 남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나도 사랑해. 진심으로 사랑해. 호석이 다시 말했다.
너 오늘 무슨 일 있었어?
왜?
아니... 평소와 좀 다른 것 같아서.
역시 너도 그래 보여?
호석은 안 그런척 해도 표정에서 시무룩한 것이 드러났다. 남준은 호석의 볼을 아프지 않게 꼬집었다. 므야. 호석이 잔뜩 새는 발음으로 말하자 남준이 푸핫 웃었다. 이씨... 내 마음도 모르면서. 호석은 제 속도 모르고 그저 웃기만 하는 남준이 얄미워 보여 새초롬히 쳐다봤다. 남준은 그런 호석의 머리를 헝클였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고백을 한데.
그래서. 싫으냐?
아니 그럴 리가. 너 사랑해라는 말 평상시에는 잘 안 해서 지금 나 유혹 하는 건가 싶었다니까.
내가 그렇게 표현이 박했어?
아니 그런 것 보다는... 잠깐, 너 진짜 몰라?
뭐가.
너 그 말 침대에서만 하잖아.
...에?
할 때. 너 나 붙잡고 하는 말이잖아, 그거. 평소에는 좋아한다고 하고.
......
너 부끄러워서 그러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호석은 제 얼굴을 안 봐도 시뻘게졌을 거라 생각했다. 얼굴에 온 열이 다 몰린 기분이다. 귀가 화끈거린다. 이토록 깜깜한 밤이어도 벌게진 게 다 보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화끈거렸다. 괜찮아, 호석아? 남준이 제 얼굴에 손을 갖다 대려 하자 호석은 두어 발짝 뒤로 물러나 손을 뻗었다. 가, 가까이 오지 마봐. 더듬거리는 호석의 말에 남준은 알아차리고 짓궂게 웃어보였다. 그는 제자리에 팔짱을 끼고 살짝 짝다리로 서서 호석을 바라봤다.
맞아, 그랬어... 호석은 가장 최근 지새웠던 밤을 생각했다. 터져 나오는 신음을 참으며, 달뜬 숨을 뱉으며, 그를 확 끌어안으며 계속해서 사랑한다고 뱉었었다. 아... 호석은 생각할수록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점점 고개가 숙여졌다. 그 전에도, 그 전에도, 밤을 지새울 때면 말버릇처럼 그 말이 밭은 숨과 함께 나왔었다. 이상하게 날짜만 다른 그 상황들이 제 머릿속에서 둥둥 떠올랐다. 미쳤네. 미쳤어, 정호석. 이게 다 지민이랑 정국이가 괜한 말을 해서 그렇다. 당장이라도 쥐구멍에 숨고 싶은 지경이었다.
호석은 그대로 뒤돌아 거의 뛰다시피 입구 쪽으로 갔다. 호석아. 남준이 그를 부르며 따라갔다. 이름을 부르는 그 목소리에서 웃음기가 서려 있는 게 느껴졌다. 준아 조금만 있다가 오면 안 될까, 제발. 호석은 그 말을 하며 입구 앞에 있는 도어락을 재빨리 쳤다. 정말 인생에서 손가락을 제일 빨리 움직인 순간이었다. 순식간에 문이 열리고 호석이 들어가자, 남준도 재빨리 들어와 그대로 호석의 뒤를 껴안았다. 아아가아앙강악아 호석은 속으로 미친 듯이 소리쳤다. 그냥 머릿속이 혼란스럽고 말 그대로 멘붕이었다. 아니 그냥 창피해... 거의 정신을 잃고 싶은 수준이었다. 남준이가 알아서 집까지 데려다 주겠지...
호석은 두 손으로 얼굴을 파묻은 채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남준은 훤히 보이는 호석의 뒷목만 보다가 피식 웃으며 그대로 엘리베이터까지 걸었다. 뒤뚱뒤뚱 걷는 게 펭귄 같다고 문득 생각한 남준이 큭큭 웃었다. 호석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남준은 그대로 뒷목에 살짝 입 맞추었다. 하지 마... 호석의 목소리가 옅게 퍼졌다. 뭐라고? 안 들려. 남준은 다 들었음에도 놀릴 심산으로 안 들리는 척 했다. 호석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엘리베이터에 타자마자 남준은 억지로 호석을 돌렸다. 호석은 바로 남준의 어깨 부근에 얼굴을 묻었다. 호석의 귀가 붉었다. 남준은 양 손으로 그의 귀를 살짝 감쌌다. 뜨거워. 남준의 말에 호석이 흠칫했다.
얼굴 좀 보여줘. 뭐야 이게. 아까부터 얼굴 한 번도 못 봤잖아.
안 돼 안 돼. 지금 얼굴 보면 완전 못생겼을걸.
네가 못생길 일이 뭐가 있냐.
안 돼. 진짜 안 돼. 나 지금 엄청 창피해.
뭐가. 사랑해가?
......
난 진짜로 네가 대놓고 나 유혹하는 줄 알았다, 야.
......
봐, 지금도. 너 숨이 자꾸 내 목에 닿아.
...변태야.
유혹을 하시는데 반응이 오는 건 당연하죠.
호석은 후 결심한 듯 얼굴을 들어 남준을 마주봤다. 앞머리가 살짝 헝클어진 채 잔뜩 붉어진 얼굴로 올려다보는 호석에, 남준은 시선을 살짝 돌렸다. 아 잠만, 생각보다 너무 자극적인데. 엉? 남준의 말에 호석이 고개를 갸웃했다. 남준은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살짝 호석을 바라봤다. 호석아. 응. 한번만 더 말해줘. 뭐?
사랑해?
때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남준은 호석의 손을 잡고 급하게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