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스퍼

[뷔민/다각] 에스퍼 썰11

글하 2017. 2. 28. 16:11



윤기는 팔에 머리를 대고 누워 석진을 멍하니 바라봤다. 한창 서류처리 하고 있던 석진은 결국 살짝 한숨을 쉬며 펜을 내려놓고 윤기를 바라봤다.



너는 시험 안보러 가냐?


그딴 거 왜 봐.


네가 계속 그렇게 보고 있으면 진짜 신경 쓰이거든.


뭐가. 나 아무것도 하는 거 없어.



표정변화 없이 뻔뻔한 윤기의 태도에 석진은 기가 찼다. 그럼 이거 도와. 석진의 말이 채 다 끝나기도 전에 고개를 묻고 자는 척 하는 윤기에, 석진은 헛웃음만 나왔다. 어차피 전교생이 다 봐야 하는 시험이니까 제 때 가서 시험 치고 와. 석진의 말에 미동도 없었다. 또 안들리는 척 하기는. 석진은 혀를 찼다.


그들이 있는 학생회실은 학생회 간부들만이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이었다. 이곳에서 학교 각종 행사나 사건, 학생들의 건의 사항 등, 학교와 학생과 관련된 모든 일을 처리하는 곳이었다. 일반 학교 학생회와는 다르다. 학생들과 학교와의 중간다리 역할을 하는 일반 학교 학생회장과는 다르게 이 학교의 학생회장은 그 자체가 학교를 의미한다. 이 학교에서 학생회장의 힘은 매우 컸으며, 그 학생회장에 따라 학교의 분위기가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그리고 현 학생회장인 석진은 역대 학생회장 중 가장 잘 이끄는 회장으로 평가 받고 있다.


학생회장의 자리는 아무나 오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타고난 머리와 집안은 물론이고 본인이 가지고 있는 능력 또한 우수해야 했다. 학교에서만이 아니라 향후 에스퍼들이 갈 대학이나 기관과 충분한 대화 혹은 협상을 할 수 있어야 하고, 각양각색인 에스퍼 학생들은 전부 아우를 수 있는 리더십도 있어야 한다. 학생회장은 흔하게 널려 있는 학생 마인드로는 절대 오를 수 없는 자리였다. 무엇보다 그 자리는 타고난 집안이나 능력의 영향이 매우 컸다.


그런 점에 있어서 석진은 매우 의외인 인물이었다. 같은 나이에 능력과 집안이 최상급인 윤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닥 이름 있는 집안도 아니고 능력 또한 평범한 편인 석진이 학생회장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석진이 학생회장으로 임명 됐을 때 온 학교가 들썩였다. 저런 애가 무슨 학생회장이냐, 부모님들의 반발도 심했다. 그러나 한달도 채 안되어 그를 향한 비난은 마치 없었던 것처럼 싹 사그라들었다.



네가 그때 말했던 그 노멀 있잖아.



갑작스런 석진의 말에 윤기는 상체를 벌떡 일으켜 석진을 봤다. 석진은 여태까지 노멀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윤기도 처음 그와 만난 이후로 그닥 입에 담고 싶진 않은 인물이었기 때문에 둘 사이에 그의 이야기가 나올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런 그가 노멀에 대해서 이야기를 먼저 꺼내다니.



너 저번에는 아는 거 없다고 했잖아.


아는게 없었지. 근데 네가 그렇게 난리 피운 이후로 생각해보니까 좀 이상한거야.


뭐가?


이 학교 학생회장이 학생을 모르는게 말이 돼? 전교생의 프로필은 내가 다 들고 있어. 내가 다 알고 있어야 하고. 그런데 이상하게 노멀에 대한 것만 없어. 단순히 노멀이기 때문에라고 넘어가기에는 이상한게 너무 많단 말이야.


......


기본적인 프로필만 해도 그래. 노멀이니 애초에 능력이 없으니까 잠재능력이니 컨트롤 능력이니 당연히 없겠고, 제일 가난한 구역에서 왔으니 집안 배경도 딱히 적을게 없는 건 알겠어. 근데 정보가 너무 부족하다고. 이름 김태형, 나이 17살, N구역 출신, 부 사망. 이게 다야. 아무리 적을게 없어도 그렇지 부모님이 뭐 하시는지 조차 안나와 있는게 이상하지 않아?


... 그만큼 적을게 없는 거 아니야? 아버지까지 안계시는데 걔네 집안 알아봤자 도움 될 거 없으니까.


그럼 다르게 생각해봐. 이름 있는 집안 노멀도 아니고 이렇게 뭣도 없는 노멀이 어떻게, 왜 이 학교에 입학을 했을까.


......


너희 가문에서 만든 학교야. 명문에 목숨 거는 집안인 거 네가 제일 잘 알잖아. 집안과 능력, 개인 스펙 따질 거 다 따지고 고르고 골라 입학 시키는 이 학교에서 영문도 모를 노멀을 왜 굳이 입학 시켰을까. 그것도 중간 입학, 전학 조차도 없는 이 학교에 노멀은 중간 입학이야. 학생회장을 거치지 않고 위에서 단독으로 결정한 일이었고. 덕분에 이 구역은 완전 난리가 났었지. 그런 반응이 올 것이라는 걸 너희 가문이 생각 못했을리는 없을거고. 왜 그런 것까지 감수하면서 노멀을 들였을까.


......


아니지. 그냥 노멀이 아니야. 왜 하필 '그' 노멀을 입학시켰을까.


... 무슨 말이 하고 싶은거야.



혼란스러웠다. 갑자기 많은 것을 알게된 기분이었다. 윤기는 왠지 머리가 아파지는 느낌에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애들끼리 저 노멀 그냥 노멀이 아닌 것 같다, 보통이 아니다 라고 장난식으로 말해왔지만 지금 석진의 말대로라면 그 노멀, 정말 '보통' 노멀이 아니라는 뜻인가. 윤기는 문득 그 날이 생각났다. 처음 노멀과 부딪쳤던 날, 자신의 능력이 통하지 않았던 날.



내가 저번에 너한테 얘기한 적 있었잖아. 노멀한테 능력이 통하지 않았다고.


뭐? 그랬어?


새끼, 그 날 제대로 눈 돌아갔었나 보네, 기억도 못하는 걸 보면.


능력이 안통했다고?


어. 전혀 안통했어. 김남준 능력도 안통했다고 얘기 했었고. 걔 진짜...



윤기는 구태여 말을 끝까지 잇지 않았다. 그래 애초에 말이 안되는 것이었다. 노멀이 이 학교에 들어온다는 것 자체가. 분명 뭔가가 있으니까 여기 왔겠지. 어찌보면 당연한거다. 그렇게 아무나 들여보낼 학교였으면 제 가문 사람들이 그렇게 악착같이 학교의 수준을 유지하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석진은 윤기의 말을 듣고도 여전히 턱을 괴고 깊이 생각하는 듯 했다. 아니야 그걸로는 부족해. 석진의 말에 윤기는 작게 인상을 찌푸렸다.



뭐가 더 걸리는데.


단순히 능력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이 학교에 입학 시키지는 않았을거야. 다른 에스퍼 학교 놔두고 왜 여기냐고. 막말로 능력 하나 말고는 뭣도 없는 앤데.


... 하긴.


이건 그냥 내 생각인데.


......


......


말해.


아니...



답지 않게 뜸 들이는 석진에 윤기는 점점 더 궁금해지기만 했다. 뭔데, 왜 말 꺼내놓고 말을 안 해. 윤기의 재촉에도 석진은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미간이 작게 주름졌다.



내가 앞으로 하는 이야기 절대 비밀이다. 우리 애들한테도 이야기 하지마. 아니, 그냥 여기서 듣고 잊어. 그냥 잊어버려. 어차피 진실인지 아닌지도 모르니까 그냥 재밌는 이야기 한 셈치고 넘겨.


뭐야. 뭔데 그렇게 장황하게 늘어놔.



석진은 괜히 학생회실을 쭉 둘러보고 윤기 가까이 상체를 당겼다. 윤기도 그에 맞추어 상체를 당겼다. 석진이 입을 열었다.











***











태형과 지민은 나란히 운동장 스탠드에 앉아 있었다. 위에는 천막도 쳐져 있고, 다른 학생들도 우르를 나와 너도나도 스탠드에 앉아 한창 진행하고 있는 시험을 보고 있었다. 운동장을 둘러싸고 사람들이 많았다 지금 B등급 학생들이 시험을 보고 있는 중이었다. 지금부터가 재밌지. 옆에서 자기들끼리 이야기 하는 것을 우연 들은 태형은 감흥 없는 눈빛으로 허벅지 위에 팔을 올려놓고 턱을 괴어 운동장을 바라봤다. 운동장에는 선생님 두 분과 학생 둘이 있었다. 이제 막 시험을 시작하려는 듯 보였다.


그 이후로 호석이 억지로 남준을 데려가고 태형과 지민은 어색하게 서 있다가 말 없이 운동장으로 왔다. 그 이후로 쭉 이렇게 정적 상태였다. 어색했다. 처음 만났을 때 이후로 이렇게 어색한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태형은 괜히 눈치보여 지민만 힐끔힐끔 쳐다봤다. 지민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까부터 턱을 괸 채 멍하니 운동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눈에 초점이 없는 것으로 보아 운동장을 진짜 보고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흠흠. 태형은 헛기침을 했다. 나 좀 봐 줘라는 의미로 헛기침을 했는데, 애꿎은 옆 학생만 태형을 힐끔 보고 말았다. 그것 가지고는 지민의 눈길을 끌 수 없었다. 결국 태형은 지민을 살짝 흔들었다. 어, 어? 왜? 지민이 화들짝 놀라며 태형을 바라봤다.



아니... 혼자서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나 싶어서.


아... 그냥... 이것 저것...


아...



또 대화가 끊겼다. 태형은 이런 정적인 상황을 굉장히 싫어했다. 특히 친구와 있는 이 순간에 아무 의미 없이 흘러가는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아까부터 무슨 생각해? 결국 태형은 직접적으로 물어봤다.



태형아.


응.


내 생각에 너...


......


그냥 노멀이 아닌 것 같아.


아 뭐야. 난 또 심각한 건 줄 알았네. 너희가 나 처음봤을 때부터 그렇게 말했잖아. 뭘 새삼스레. 나도 요즘 내가 보통 노멀은 아니구나 생각하고 있긴 해.


아니. 그런 느낌이 아니야.


어?


너, 노멀이 아니라 에스퍼 같다고.



태형은 지민의 입에서 에스퍼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자리에 벌떡 일어났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거지. 태형은 어색하게 웃으며 지민을 내려다봤다. 지민은 태형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그의 표정이 한없이 진지해 당혹스러울 정도였다.



무, 무슨 에스퍼야 내가. 우리 엄마 아빠 다 노멀이라니까.


그거 진짜야?


어?


너희 엄마 아빠 진짜 두분 다 노멀이냐고.


야. 무슨 소리 하는거야.



태형의 표정이 확 굳어졌다. 지민은 갑작스런 그의 표정 변화에 조금 당황했지만 곧 진지한 표정으로 그를 마주했다. 이때까지 태형과 같이 다니면서 느낀 것이 몇가지 있었다. 태어나서 한번도 노멀을 만나본 적 없지만 왠지 확신할 수 있었다. 태형은 노멀이 아니다. 지민은 자신의 감을 믿었다. 어쩌면 자신의 능력과도 관련이 있었다. 제 능력은 에스퍼한테서만 통한다. 그런 능력 특성상 에스퍼마다 느껴지는 특유의 기가 있었다. 그것은 상대방의 능력과도 상관이 있었다. 그리고 지민은 이상하게 태형에게서도 가끔 그런 기가 느껴졌다. 이것은 오직 지민만이 알 수 있는 감이었다. 



너 에스퍼 능력 통한 적 한번도 없었잖아. 지금도 넌 그걸 이용해서 시험 보려고 하고 있고.


나 N구역 출신이야. 너 여기서만 살아서 그 구역이 어딘지 몰라? 우리나라에서 제일 못살고 더럽다는 구역이야. 내가 거기서 태어났고 자랐어. 근데 에스퍼라고?


......


거기 노멀 구역이고,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에스퍼가 그런 구역에 가겠냐? 출생의 비밀 그딴 것도 없어. 나 존나 아빠 엄마랑 똑같이 생겼거든.



지민은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본인이 그렇다는데 남이 어떻게 더 왈가왈부 할 수 있을까. 애초에 노멀 구역에서 왔다는 것 자체가 에스퍼와 엮일 수 없었다. 특히 N구역이라면 하프(에스퍼와 노멀 혼혈)조차 생각할 수 없다. 그래도. 지민은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이 학교는 어떤 이유에서든지 절대 노멀을 입학 시킬 학교가 아니었다. 어떤 실수가 있었다 하더라도 한달이 넘은 지금까지 처리를 하지 않고 있는 것도 말이 안된다. 학교의 문제가 아니라면 답은 하나 밖에 없다. 태형이 중간 입학이라는 파격적인 입학을 허락할만큼 대단한 에스퍼라는 것.


맞아, 심지어 김태형은 S등급이잖아. 지민은 태형의 평균등급을 본 날이 생각났다. 태형은 S반이다. 학교가 학생들을 보는 기준에서 전부 최상위인 학생들만 들어가는 S반. 심지어 본인이 잘났고 뛰어나기만 해서는 들어갈 수 없는 반. 생각하면 할수록 태형은 그냥 여기로 왔을리가 없다. 아 그때 석진이 형한테 물어봤어야 했는데. 지민은 학생회장인 석진이 생각났다. 학생회장은 모든 학생의 프로필과 상세정보를 알고 있어야 한다. 분명 태형에 관한 정보도 알고 있겠지. 지민은 학생회실로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우연히 옆자리에서 하는 대화를 들었다.



야, 정호석 또 패스야.


뭐야 진짜. 어이가 없네.


이번에도 옆에 김남준 있잖아. 진짜 빽 없는 사람 서러워서 살겠나.


김남준이 정호석 빽 쓰는거지. S가 굳이 쟤 때문에 B에 들어가는 거잖아. 게다가 집안만 보더라도 정호석이 좀 더 월등하고.


쟤 자연계인 거 구라 아냐? 난 쟤가 능력 쓰는 거 한번도 못봤어.



정호석이라는 말에 태형도 그쪽을 힐끗 보고 지민을 봤다. 정호석이라면 그때 자신에게 지대한 관심을 가지던 그 학생회 간부 중 한명이었다. 지민이 어깨가 살짝씩 떨리고 있었다. 천천히 시선을 내리면 주먹을 꽉 쥔 채 무언가 참는듯 보였다. 지민아? 태형이 그의 어깨를 잡으며 조심스레 불렀다. 어, 어? 지민은 태형의 목소리에 놀라 살짝 움찔하며 그를 봤다. 왜 그래. 태형이 물음에 지민은 고개를 살짝 저었다. 아니야. 말은 그렇게 해도 지민의 어두운 표정은 나아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