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
뷔민 반인반수 회색늑대 태형이와 주인 지민
글하
2017. 3. 29. 01:49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태형에, 지민은 환히 웃으며 들어갔다가 보이는 처참한 집안 광경에 기겁을 했다. 집안 꼴을 저렇게 만들어 놓고 존나 얌전히 있었던 척 쪼그려 앉아 꼬리만 살랑살랑 흔들고 있다니. 지민은 배신감에 주먹쥔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런 주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반갑다고 꼬리를 더 격하게 흔들고 있는 모습에 지민은 결국 빽 소리를 질렀다. 김태형 지금 당장 거실 치워!!!
2시간에 걸쳐 드디어 청소를 끝낸 태형은 그대로 바닥에 엎어졌다. 커다란 꼬리는 두어번 살랑이다가 결국 푹 처졌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던 지민이 입을 열었다. 근데 너 귀랑 꼬리는 언제 집어 넣냐. 태형은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려 소파에 앉아있는 지민을 올려다 보았다. 나 어떻게 넣는지 몰라. 허, 참. 기가 찼다.
처음에 인간으로 변한 태형을 보고 지민은 경악을 하다 못해 그 자리에서 그냥 뒤로 넘어갔었다. 태형이 재빨리 다가와 자신을 잡아주지 않았더라면 최소 뇌진탕으로 응급실에 실려갔을지도 몰랐다. 괜찮아? 두 손과 상체로 지민의 몸을 지탱한 채 그의 얼굴을 보며 잔뜩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묻는 태형은 보이지도 않는지, 지민은 멍하니 그의 머리 끝에 쫑긋 솟아오른 두 귀만 바라보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하나 천천히 들어 결국 그 귀를 감싸듯 잡았다. 그냥 내 눈이 미쳐서 보이는 거라고 해달라는 지민의 바람이 무색하게 태형의 귀는 따뜻하기 그지 없었다. 심지어 제멋대로 쫑긋거렸다. 무언가 익숙치 않은 느낌에 푸다닥 손을 뗀 지민은 후다닥 그의 품에서 빠져나와 미친듯이 뒷걸음질 치다 그대로 베란다 창에 쿵 부딪쳤다. 지민아, 조심해. 커다란 꼬리를 살랑이면서 하는 말에 지민은 거의 정신을 잃기 직전이었다. 지금 당장 게거품을 물고 쓰러진다고 해도 이상할게 없는 전개였다. 한동안 할 말을 찾지 못해 입만 뻐끔거리다 겨우 한마디 뱉었다. 누구세요?
세상에는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미스테리한 일들이 많았다. 물론 지민은 그런 것에는 딱히 흥미 없었다. 내 인생 살기도 바쁜데 그런 답도 없는 것들에 시간 쓸 여유가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어쩌면 아직 자신의 인생에 그렇게 미스테리 하거나,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되는 일들을 겪은 적이 없어서 그랬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일어난 것이다. 그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미스테리한 일이.
대학교를 서울로 가게 된 지민은 자취를 시작했다. 나름 풍족한 집안이었던 지민은 부모님 덕에 첫 자취를 괜찮은 투룸에서 하게 되었다. 성인이 되고 진짜 내 집이 생긴 것 같은 기분에 지민은 잔뜩 설렜다. 아 맞아 집 꾸며야지. 집을 꾸밀때는 역시 다이소지. 지민은 대충 지갑과 우산을 챙겨들고 밖을 나갔다. 평소라면 비 오는 날에 집 밖으로 한발자국도 나가지 않았을테지만 오늘은 다르니까. 오늘은 뭘 해도 다 웃으며 받아줄 것 같았다. 지민은 딱 그만큼 기분이 좋았다. 갔다가 돌아오는 골목길에서 비를 잔뜩 맞아 처참히 무너지기 일보직전인 상자를 발견했다. 뭐지 아까 갈 때는 없었는데. 지민은 가까이 다가갔다. 상자 속에는 새끼 강아지 한 마리가 몸을 둥글게 말아 웅크리고 있었다. 회색과 흰색이 섞인 강아지는 그림자가 진 것을 느꼈는지 고개를 들어 지민을 바라봤다. 어머, 얘 왜이렇게 귀여워. 지민은 한눈에 반했다. 새파란 눈에 흰색과 회색이 적절히 섞인 그 강아지는 귀엽기 그지 없었다. 허스키 같기도 했다. 미친 존나 귀여워. 지민은 그 자리에 쭈그려 앉아서 강아지를 계속 보기 시작했다. 커다란 상자 속에는 어떤 종이가 있었다. 검은색 잉크가 마구 번져있는 걸로 보아, 수성펜으로 써 놓은 어떤 메모인 듯 했다. 뭐 그래봤자 잘 키워주세요 이런 거겠지. 이렇게 귀여운 아이를 왜 버렸지. 아가, 형아랑 같이 갈래? 지민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그 강아지를 품에 잘 안아들었다. 강아지는 얼마나 착한지 낯선 사람이 자신을 안아도 한번을 안 짓고 얌전히 품에 안겼다. 아이고 짓지도 않고 왜이렇게 예뻐? 그렇게 지민은 누가 짠 듯 딱딱 맞춰진 클리셰 같은 상황을 그다지 의심하지 않은 채 강아지를 안고 집에 돌아갔다. 왜냐하면 오늘은 뭘 해도 다 웃으며 받아줄 정도로 기분이 좋으니까.
그것은 크나큰 잘못이었다. 어찌보면 그 강아지를 데리고 들어온 것부터 예견된 일이었다. 지민은 현관에서 그 강아지를 내려놓자마자 강아지는 미친듯이 펄쩍이며 온 집안을 헤집고 다녔다. 비를 쫄딱 맞아 온 몸이 축축한 상태에 어디서 진흙을 묻히고 있었는지 엉망인 몸으로 뽈뽈뽈 돌아다니면서 여기저기 제 흔적을 남겼다. 야 이 똥개새끼야! 지민은 몇분 전까지만 해도 좋았던 기분이 순식간에 바닥에 쳐박힐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로 온나! 이놈의 똥개시키! 지민은 펄쩍대는 강아지를 한시간 동안이나 쫓아다닌 끝에야 안아들 수 있었다.
씻는 것도 전쟁이었다. 애가 짖지는 않았지만 물이 어지간히도 싫은지 욕조에서 벗어나려고 온 발버둥을 다 치는 탓에 거품이고 물이고 잔뜩 맞은 지민은 겨우겨우 다 씻기고 털 말리기까지 클리어 했다. 이제 좀 뽀송뽀송한 강아지가 빨빨빨 돌아다니는 것을 본 지민은 소파에 몸을 뉘었다. 아 그래도 귀여우니까 봐준다... 지민은 누운 채 거실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강아지를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강아지 이름은 뷔로 지었다. 뷔야. 하고 부르면 어디 숨었는지 안보이다가도 지민 쪽으로 빨빨빨 다가왔다. 지민은 그게 너무 귀여워서 여기저기서 이름을 부르고 다닌 적도 있었다. 가끔 산책시키면 귀엽다고 난리였다. 그러면 뿌듯하기 그지 없었다. 낯선 사람이 다가와도 짖지를 않으니 공원가면 인기폭발이었다. 애교도 많아서 심심하지가 않았다. 지민은 그래도 데려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뷔는 미친듯한 속도로 자라기 시작했다. 언뜻 보기에 허스키 같아서 검색을 많이 했다. 허스키는 진짜 빨리 자라는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뷔를 바라보면 얘는 개 중에서도 크게 자라는 듯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러려니 했다. 강아지 보고 싶다고 난리난리 치는 대학 후배인 정국 때문에 결국 그를 집에 초대한 적이 있었다. 잔뜩 설레서는 종은 뭔지 이름은 뭔지 빨리 보고 싶다며 방방대던 정국은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쪼그려 앉아서 꼬리를 흔드는 뷔를 보고 와자작 굳었다. 야 뭐해 들어가. 지민은 현관에 길을 딱 막고 서 있는 정국을 밀며 들어가려 했으나 오히려 뒷걸음질 치는 정국에 지민도 따라 밀려나갔다. 자자자자, 잠깐만 형. 지민은 그 날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낀 정국을 봤다. 얘 왜이래. 지민은 정국을 밀어내고 들어가 현관 앞에 기다리고 있는 뷔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집 잘지키고 있었어? 뷔는 눈을 감고 지민의 손길에 맡기다가 그대로 지민의 품에 파고 들었다. 들어와. 지민의 말에도 정국은 그 자리에 꼼짝도 않고 멍하니 서 있었다. 지민이 집 안에 들어가자 뷔가 그의 뒤를 졸졸 따랐다. 형. 정국이 신발도 벗지 않은 채 지민을 불렀다. 어? 지민이 뒤돌아 봤다.
형, 걔가 강아지라고요?
어, 키운지 한 세달 됐어. 이름은 뷔야.
걔 늑대잖아요.
... 어?
옆에서 형 손 핥고 있는 걔, 늑대라고요.
지민은 순간적으로 화들짝 놀라 푸다닥 손을 뒤로 감췄다. 뷔는 지민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어쩐지 애가 겁나게 늠름하다 했다. 지민은 혼란스러운 눈으로 뷔를 내려다봤다. 뷔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지민을 올려다 보다가 그 자리에서 펄쩍펄쩍 뛰고 꼬리를 흔들며 애교 부리고 난리 났다. 이렇게 애교가 많은데 강아지가 아니라고? 지민의 말에 정국이 머리를 긁적였다. 아 근데 진짜 강아지는 아닌 것 같은데... 지민은 뷔를 빤히 바라보다가 결국 목덜미를 끌어 안았다. 이렇게 귀여운 애가 늑대일리가 없어! 후에 인터넷 검색을 빡시게 한 지민은 뷔가 늑대라는 사실을 알고 충격 받았다.
뷔가 사람으로 변한 것은 키운지 거의 1년이 다 되어 갔을 때 즈음이었다. 지민의 인생에 있어서 첫번째 충격은 뷔가 늑대라는 것이었고 두번째 충격은 뷔가 반인반수였다는 것이었다. 아침에 깨어나 아무 생각 없이 거실로 나가면서 뷔를 불렀는데 웬 나체로 소파에 누워 자고 있던 남자가 자고 있다가 고개를 팍 들었다. 머리 위에 있는 귀가 쫑긋거렸다. 지민은 진심으로 기절할 뻔 했다. 처음에는 누군가 했었다. 그냥 늑대도 아니고 반인반수였어? 지민은 나중에 이름을 김태형이라고 지어주었다. 왜 나는 박씨가 아니냐는 태형의 물음에 지민은 태형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뭔가 박태형 보다는 김태형이 더 예쁘잖아.
그렇게 뷔가 아닌 태형과 살게 된지 1년이 다 되어간다. 몸만 크지 하는 짓은 5살짜리 꼬맹이와 다름 없었던 태형을 거의 키우다시피 한 지민이었다. 지금의 태형은 고등학생 수준이었다.
태형아.
지민의 부름에 방에서 태형이 미친듯이 달려나왔다. 지민은 재빨리 열고 있던 냉장고를 닫았다. 태형이 코를 킁킁거렸다. 귀도 쫑긋거렸다. 고기지. 태형의 물음에 지민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태형의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렸다.
심부름 좀 하고 와줘
에? 싫어.
안돼. 너 가끔 바깥 공기도 좀 쐬고 그래야 해.
... 지민이랑 같이 가면 안돼?
너 이제 애 아니잖아.
애면 같이 갈 수 있어? 그럼 나 애 할래.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마.
지민은 단호히 말하며 태형을 지나쳐 방에 들어갔다. 돈 줄테니까 마트 가서... 지갑을 꺼내오며 말하던 지민은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태형은 후다닥 냉장고 문을 닫고 몸을 기댔다. 어색하게 휘파람도 불어댔다. 너 고기 건들였지. 지민의 물음에 태형이 고개를 세게 저었다. 결 좋은 머리카락이 찰랑찰랑 거렸다. 너 고기 건든 흔적 있으면 오늘 저녁 고기 안먹을 줄 알아. 지민은 지갑을 그 자리에 툭 떨어뜨리고 바로 냉장고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눈에 띄게 당황하는 태형을 밀쳐내고 냉장고 문을 열려고 하자 태형이 재빨리 손으로 문을 눌러 막았다. 지민은 태형을 노려봤다. 제 아무리 남자여도 늑대의 힘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태형의 귀가 살짝 처져 있었다. 거짓말을 쳤다는 것에 양심이 찔려서 그러는 건지, 단순히 고기를 못 먹는다는 사실이 슬픈건지 가늠할 수 없다. 손 치워. 지민의 단호한 말에 태형이 낑낑댔다. 안절부절 못하는 표정으로 눈만 도록도록 굴리다 결국 지민의 목부근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아, 짐나. 꼬리도 살랑살랑, 얼굴도 부빗부빗 제 나름대로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 이 자식 끼만 늘어가지고... 지민은 자신에게 몸을 기대는 태형의 무게에 못이겨 한 걸음, 두 걸음 뒤로 밀려났다. 지민은 아예 두 손으로 태형의 어깨를 잡았다. 태형은 아예 두 손으로 지민의 허리를 감았다. 아, 잠깐만 태, 아악!! 지민은 갑자기 목부근을 살짝 깨문 태형에, 놀라 밀어내려다 지갑이 밟혀 발을 헛디뎌 그대로 넘어졌다. 태형이 재빨리 한 손으로 뒷통수를 받쳐 머리가 부딪치는 불상사는 막을 수 있었다. 태형은 자신이 깨문 자리에 혀로 할짝할짝 핥다가 살짝 빨아들인 후 얼굴을 천천히 떼어 지민을 바라봤다. 지민은 자신의 손을 제 목에 갖다댔다. 살짝 축축한 느낌이 손바닥에 그대로 느껴졌다. 태형은 목을 가린 지민의 손등에 쪽 입을 맞추었다. 지민은 그제서야 멍해진 정신을 붙잡았다.
나 네 암컷 아니라고 했지.
응.
나한테 표시 하지 말라고 했잖아.
......
나와.
같이 가줘.
어디를.
마트.
하아.
지민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한숨에 태형의 귀가 움찔했다. 지민은 천천히 그의 귀를 만져주다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늘도 자립심 키우기는 글렀네.
태형은 늑대였을 때도 지민에게서 한시도 떨어지려 하지 않았었다. 그때는 아기였고 귀여우니까, 동물이니까 그러려니 했는데 인간으로 변했을 때도 그 버릇은 변하지 않았다. 한번 인간으로 변화한 후 본인 의지로 늑대로 돌아가지는 않았지만 지민에게 붙어 있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지민이 학교를 간다고 하면 울고불고 땡깡 피우고 지민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안보내준다고 악을 지르기까지 했었다. 아침마다 전쟁이 따로 없었다. 지민도 어르고 달래고, 화도 내며 태형을 떼어놓고 재빨리 학교 강의만 듣고 오곤 했었다. 지금이야 나이도 먹고 철도 들었으니 지민이 잠시 외출한다고 옛날처럼 그러지는 않았지만 심심해 하고, 외로워 하는 것을 잘 알아서 지민도 그리 오래 밖에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지민은 고민이 많아졌다. 가끔 같이 밖으로 나가기도 하곤 했지만 태형 혼자서 나가본 적은 없었다. 이제 태형이도 혼자서 외출 해봐야 하는 거 아닌가 싶기도 했다. 자기가 없다고 하루 온종일 집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 보다는 혼자서 어디 나가서 놀다 오고 나름의 여가를 보내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 이후로 지민은 태형이 혼자서 밖에 나갔다 오도록 많은 유도를 했었지만 번번히 실패하고 말았다. 태형은 지민이 어쩔 수 없이 혼자 나가야만 하는 일을 제외 하고는 계속 붙어 있으려고 했다. 그래서 태형은 지금까지 슈퍼 앞도 혼자서 가본 적이 없었다.
어떻게 해도 태형을 이길수는 없었다. 지민은 결국 오늘도 항복했다. 옷 갈아입고 나와, 같이 가자. 지민의 한숨과도 같은 말에 태형은 벌떡 일어나 방으로 들어갔다. 뒤에 달린 꼬리가 기분 좋게 살랑거렸다.
마트에서도 계속해서 붙어오는 태형에, 지민은 몇번이나 그를 살짝 밀어냈다. 태형아, 내가 밖에서는 이러지 말라고 했잖아. 지민의 타박에도 태형은 그때만 잠깐이지 또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지 못해 안달이었다. 지민은 거의 반쯤 포기상태였다. 태형은 지민의 뒷목에 가볍게 쪽 입맞추고 고개를 들자 저 멀리 보이는 인물에 어! 소리쳤다. 야채를 보고 있던 지민은 태형의 목소리에 따라 고개를 들었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정국이 살짝 고개짓으로 인사하며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안녕!
태형아, 안녕하세요 해야지.
안녕하세요!
정국은 태형의 인사에, 태형 쪽으로도 살짝 고개 숙여 인사했다. 장 보러 오신거예요? 정국의 물음에 지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태형은 여전히 지민의 뒤에 딱 붙어서 손을 양 어깨에 올린채 지민의 너머로 정국을 보고 있었다. 못 본 새에 더 컸네요. 정국의 말에 태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민이가 나 되게 빨리 큰다고 했어. 정국은 힐끗 태형의 머리 위에 솟은 귀를 봤다.
여전히 귀랑 꼬리는 못 넣나봐요.
응. 어떻게 하는지 몰라.
내가 가르쳐 줄 수도 없으니까 스스로 깨우쳐야 하는데 그게 힘든가봐.
지민은 손을 뒤로 해 태형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태형은 눈을 꾹 감은 채 그의 손길을 받았다. 흔들리는 꼬리가 기분 좋은 듯 했다. 형 점점 늑대 냄새 진해져요. 정국의 말에 지민이 어? 되물었다. 태형도 동글동글한 눈으로 정국을 바라봤다.
점점 형 냄새가 사라진다고요.
그게 무슨 말이야?
정국이도 인간 아니지.
갑작스러운 태형의 말에 지민은 고개만 뒤로 살짝 젖혀 태형을 바라보다 정국을 바라봤다. 정국은 어깨만 살짝 으쓱였다. 뭐, 네. 멍하니 있던 지민은 말의 의미를 알아차리고 두 눈이 커졌다. 너도 반인반수였어?
숨기려고 한 건 아닌데, 뭐. 우리 과에 반인반수 은근 많아요. 그래서 요즘 힘들어해요, 형 때문에.
나, 나 때문에?
지민은 순간 당황해서 말까지 더듬었다. 태형은 둘의 대화에는 관심도 없어 지민의 목덜미에 코를 묻고 킁킁 냄새 맡기 바빴다. 지민이 냄새가 사라진다고? 왼쪽에 킁킁, 오른쪽에 킁킁거리는 태형을 지민이 잡았다. 그만해.
형한테서 늑대 냄새가 점점 심해지니까요.
나한테서?
엄청 진해요. 마치... 각인 된 사람처럼.
정국의 말에 태형이 정국을 살벌하게 쳐다봤다. 지민은 뒤에 있는 태형이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지 전혀 보지 못했다. 정국도 지민의 뒤에 딱 붙어 있는 늑대를 바라봤다. 나이도 얼마 안쳐먹은게 벌써부터 발랑 까져서는. 정국은 한쪽 입꼬리만 살짝 올리며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의 의미를 알아차린 태형의 눈빛이 더욱 서늘해졌다.
형은 좋으시겠어요. 든든한 보디가드가 있어서.
어, 어?
그리고 어차피 형은 아무리 몸 냄새 맡아도 늑대 냄새 못 맡아요.
아 그래...
지민은 머쓱한 표정으로 코에 갖다댄 팔을 천천히 내렸다. 그 냄새라는 거, 많이 민폐인가? 지민이 조심스럽게 물어보자 정국은 결국 빵터져 마구 웃어댔다. 야, 웃지마! 지민은 괜히 민망해 빽 소리를 질렀다. 태형은 아예 지민의 목덜미를 감싸 안았다.
경종한테는 조금 힘들수도 있겠네요. 어쩌면 이상할 정도로 형한테 잘 대해줄 수도 있고요. 그 대단하신 회색 늑대님인데.
회색 늑대?
몰랐어요? 김태형 회색 늑대예요. 순수혈통 희귀종인.
아, 그래... 혹시 그거 뭐 좋은거야?
어차피 인간과는 아무 관련 없어서 몰라도 돼요.
어, 그래.
지민은 지금 당장 집에 가면 반인반수에 대해서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생각해보니 반인반수랑 같이 살면서 한번도 태형에 대해 알아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애 키우는데 너무 정신 팔려 있어서 그랬나. 지민은 제 무지함을 탓했다. 정국은 지민을 보던 시선을 그대로 살짝 올려 태형을 바라봤다. 옛날에는 안그랬는데 지금은 경계한다. 목덜미까지 깨물어 자기 냄새 다 묻혀놓고 또 경계 하기는. 정국에게는 아직 어린 태형이 우스웠다.
야 그렇게 노려보지마. 나도 누구 침 묻혀 놓은 거 관심 없거든.
......
나 각인 했어.
정국의 말에 그제서야 태형은 노려보던 눈을 지우고 다시 그 순둥순둥한 눈으로 돌아왔다. 헤헤 정국을 향해 웃어보이기까지 했다. 아 그럼 정국아 나 너한테 궁금한 거 좀 물어봐도 돼? 갑자기 퍼뜩 든 생각에 지민이 다급하게 물어봤다.
그 늑대 냄새 난다는게... 뭐 어떤거야?
아. 그냥 형이랑 저 애랑 너무 많이 붙어 있어서 그래요. 딱히 민폐까지는 아닌데 뭐...
막 몸에서 냄새 나면 안좋아?
글쎄요. 회색 늑대라면 안좋지는 않을걸요.
각인은 뭔데?
정국은 순간적으로 태형을 힐끗 보며 제 목을 쓸었다. 아... 그냥 검색해 보세요, 자세히 나오니까. 정국의 물음에 지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답해줘서 고맙다.
우리 빨리 고기 먹자. 태형은 지민의 머리를 만지면서 말했다. 정국과 지민이 생각보다 대화가 길어져 심심해진 듯 했다. 아, 그래 정국아 학교에서 보자. 지민은 정국에게 인사하며 다른 코너 쪽으로 갔다. 정국 역시 손인사를 하며 멀어지는 그들을 쭉 봤다. 지민이 형도 힘들겠네. 한참 후 정국이 탁 털어놓듯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생각보다 장을 많이 봤다. 가끔 간식이나 고기 보면 사달라고 조르는 태형을 달래느라 장 보는 시간도 오래 걸렸다. 두 손 한가득 짐을 든 지민을 본 태형은 결국 지민의 것도 자신이 가져갔다. 야, 괜찮아 너 무거워. 지민이 다급히 제 몫의 짐을 가져오려 하자 태형이 쓰읍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짐을 뒤로 숨겼다. 나 늑대야, 하나도 안무거워. 태형의 말이 다 맞아서 지민은 할 말이 없었다.
지민의 집은 골목 안쪽에 위치해 있었다. 한적한 골목길을 나란히 걸어가다 우뚝 태형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뒤에서 걷고 있던 지민도 두어발짝 뒤에서 멈춰섰다. 태형이 홱 몸을 돌려 지민을 바라봤다. 지민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태형을 올려다 봤다. 태형은 꽤나 진지한 표정으로 지민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부인. 지민은 태형따라 진지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난데없이 나온 부인에 바로 인상을 구기며 태형을 퍽 때렸다. 나 네 암컷 아니라고 했지, 죽을래? 지민의 말에 태형의 귀가 축 처졌다.
왜 안돼? 왜 지민이는 내 부인이 아니야?
뭐래 진짜. 내가 너랑 같이 살고 싶어서 데려왔지 너한테 시집 가려고 너 데려왔어?
그럼 내가 지민이한테 시집 갈게...
그런 말이 아니잖아 지금. 결혼 하고 싶어? 내가 좋은 사람 소개 시켜줄까?
난 지민이가 좋아.
그런게 아니라고. 이 놈의 늑대시키야.
평생 지민이 옆에 있을 수 있어. 한눈 안 팔고.
그런건 네 여친이나 부인한테 할 소리고.
부인.
내가 아니라니까!
태형의 입이 댓발 나왔다. 아 머리야. 지민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이걸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 해야 하지. 지민은 고민했다.
태형이가 지금 좀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네가 이때까지 봐 온 사람이 나 밖에 없고 내가 너랑 맨날 같이 살고 그러니까 그런 것 같아. 밖에 나와서 여러 사람 만나보고 좋아하는 사람 만나면 어떤 느낌인지 알거야.
나 지민이 좋아해.
그런 좋아함이랑 다르다니까. 나도 태형이 좋아해. 그런데 그런 좋아함이 아니야. 태형이가 아직 진짜 좋아하는 사람 못 만나 봐서 그래.
진짜 좋아하는 건 어떤 건데.
지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진짜 좋아하는게 어떤거냐고? 또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거를 태형이가 알아듣기 쉽게 어떻게 설명해줘야 하지...
진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맨날 그 사람 생각이 나고 그 사람만 보면 웃음이 나오고 때로는 그 사람 때문에 마음이 막 아프고. 그런거야.
그러기만 하면 돼?
아... 뭐 여러가지가 있겠지. 입 맞추면 설레고 그 사람이랑 온기를 나누고 싶어 하기도 하고.
알았어.
태형은 한마디 뱉으면서 제 손에 든 짐을 툭 바닥에 내려 놓았다. 왜그러냐는 지민의 물음이 채 다 나오기도 전에 성큼성큼 다가온 태형은 순식간에 지민의 허리를 감아 당겨 안고는 그의 입을 맞추었다.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라 지민은 피하지도 못하고 그저 당황스러움에 몸이 움직여 지지도 않았다. 지민은 제 볼을 감싼 태형의 손을 잡고 떼어내려 했지만, 태형의 힘에 어림도 없었다.
입술을 살짝 깨물고 핥은 태형이 천천히 입술을 떼어내 지민을 바라봤다. 지민은 여전히 혼란스러운 눈으로 태형을 쳐다봤다. 서로의 눈동자에 담긴 제 모습이 보일 정도로, 그들의 거리는 가까웠다. 볼을 감싼 태형의 손이 따뜻했다. 허리를 감은 팔도 따뜻했다. 거의 딱 붙어있는 상체에 서로의 온기가 느껴졌다. 지민은 갑자기 얼굴에 열이 확 올랐다. 자신도 모르는 새에, 태형은 너무 많이 커버렸다.
이제 좋아해도 돼?
태형의 나직한 말이 귓가를 간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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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인반수와 인간이 공존하는 사회.
태형이는 회색 늑대
정국이는 흑표범
지민이 인간.
각인은 자신의 반려자임을 표시하는 것. 성인이 되면 할 수 있음. 결혼의 의미.
각인하면 평생 지민의 몸에 태형의 냄새가 남음.
반인반수한테는 냄새가 굉장히 중요하게 작용함.
태형이는 반인반수로 치면 미성년자. 정국은 성인이 된지 한참.
정국의 입장에서 태형이는 아직 애송이.
나이도 안된 애가 벌써부터 반려자 찾아서 냄새로 영역표시 하는게 웃김.
그리고 자신을 경계 하는 것도.
태형이는 회색 늑대인만큼 늑대의 습성이 있음.
늑대 하면 역시 일부일처제. 자신의 아내 한 명만을 평생 바라보고 사는 습성.
지민은 모르지만 이미 태형의 반려자로 찍힌지 한참.
태형이 하도 목덜미 깨물고 붙어다녀서 냄새가 안빠짐.
원래 이거 한 편으로 하고 말 생각이었는데
생각을 좀 더 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