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남고생의 일상 (完)

뷔민 남고생의 일상 4

글하 2017. 3. 30. 18:47



1. 다이어트

 

아 씨발 진짜 박지민!

 

거의 한 시간동안 우는 소리를 내는 태형 때문에 기어코 빡친 정우가 빽 소리를 질렀다. 아 왜. 대답한 지민도 신경질 나는지 목소리에 띠꺼움이 잔뜩 베어있었다. 아 그냥 취소 해 진짜, 이 새끼 우는 소리 존나 지겹다고! 어지간히도 지겨운지 책상에 손까지 쾅쾅 내려치면서 악을 지르는 정우에, 지민은 인상을 찌푸렸다. 아 몰라 썅, 어쨌든 난 적어도 5키로는 뺀다. 지민의 단호한 대답에 결국 정우는 푸스스 몸에 바람 빠지듯 책상 위로 엎어졌다. 아이고, 아이고 아부지, 우리 색시가 세상에 살을 뺀대요! 아이고 아부지 아이고... 태형의 우는 소리는 그칠 줄 몰랐다.

 

일은 오늘 아침 조례시간, 지민의 충격적인 선언 때문에 일어났다. 나 다이어트 할래. 지민의 입에서 나온 그 말은 태형과 정우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야 니가 뺄게 어디 있다고 살을 빼. 정우는 헛웃음까지 쳤다. 지민의 표정이 살짝 불퉁해졌다. 갑자기 웬 다이어트야. 태형이 물었다. 지민은 입을 꾹 다물고 말해주지 않았다. 그들은 지민이 그냥 하는 소리인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점심시간에 토마토만 싸온 도시락을 열고 야금야금 먹기 시작하는 지민을 보며 아 얘가 진짜 마음먹었구나 했다. 태형은 그렇게 느끼자마자 장장 한 시간동안 저렇게 우는소리를 내는 중이었다. 존나 또라이 새끼, 지치지도 않나. 지민은 제 옆에서 엎드려서 엉엉 거리는 태형을 흘겨봤다.

 

 

야 좀 있으면,

 

아이고!!! 아이고, 아부지!!! 세상에 우리 색시가!!!

 

아 씨발 진짜!!

 

우리 색시 뺄 살이 어디 있다고!!!

 

 

태형은 지민의 두 볼은 제 손으로 감쌌다. 양 볼살이 눌리면서 입술이 오리 부리처럼 톡 튀어나왔다. 지민은 미간을 마구 구기면서 태형의 손을 세게 쳐냈다. 좀 있으면 5교시 시작이라고! 아이고!!! 빼지마라 진짜 아이고 아이고!!! 지민의 말은 들리지도 않는지 울기 바쁜 태형을 보며 그는 결국 허탈한 표정으로 정우를 힐끗 쳐다봤다. 정우는 무언가 간절한 표정으로 지민을 봤다. 몰라, 나도 이제. 지민이 외면하자 정우는 또 다시 무너지듯 책상에 엎어졌다.

 

그래도 태형은 한 가닥 얇은 털 정도의 양심은 있었는지 수업시간에 엉엉 울며 개소리를 하지는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천만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지민은 수업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번 시간은 문학이었다. 점심시간 직후인 5교시에, 나긋나긋한 목소리를 가지신 문학 선생님의 수업은 고등학생들에게 매우 치명적이었다. 벌써부터 반 이상이 벼처럼 서서히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다. 오지게 겸손하네. 지민은 문득 든 생각에 낄낄댔다. 선생님은 한창 시를 읽다가 고개를 들더니 흠칫 놀라 태형을 불렀다. , 태형아. 선생님의 목소리에 졸고 있던 아이들 몇 명은 졸지 않았던 것처럼 갑자기 샤프를 들고 있는 오른손을 막 움직이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여전히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너 왜 우니? 선생님의 물음에 지민도 덩달아 당황하며 태형을 쳐다봤다. 태형의 눈가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헐 김태형 운다고? 아이들은 조금이나마 남아 있는 잠도 확 달아나 우르르 태형을 봤다. 왜 그래, 태형아. 지민이 당황하며 태형의 눈에 고인 눈물을 손으로 닦아냈다. 선생님... 태형이 입을 열었다.

 

 

색시가... 다이어트 한대요.

 

?

 

 

선생님은 순간 당황하면서 슬쩍 지민을 바라봤다. 다른 애들도 태형을 향하던 시선을 조금 더 돌려 지민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지민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 ... 미친놈아!! 지민은 빽 소리를 지르며 태형의 등을 세게 내리쳤다. 아 왜 때려! 태형이 억울한 표정으로 지민을 봤다. 지민은 어이가 없어 씩씩 거렸다. , 태형이가 많이 속상했나보구나. 선생님은 당황한 기색을 애써 숨기며 말했다.

 

 

 

 

 

색시야 많이 덥지? 아이스크림 먹을래? 색시야 오늘 햄버거 먹으러 갈까? 색시야 이번 주말에 새로 생긴 레스토랑 갈래? 거기 진짜 맛있대. 색시야 그렇게 안 먹고 공부만 하다가 쓰러진다, 이것 좀 먹어봐.

 

지민은 기어코 제 입에 닿은 빵에, 결국 샤프를 탁 소리 나게 내려놓고 태형을 노려봤다. 태형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빵을 들고 있었다. 좀 먹으면서 해. 태형의 말에 이제는 헛웃음도 안나온다. , 돌았냐? 지민이 정색하며 말했다. 태형은 빵을 물렀다. 내가 다이어트 한다고 했지. 지민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그니까 왜 다이어트를 하는데. 색시가 뭐가 아쉬워서 다이어트를 하냐고.

 

살쪄서 그런 거 아니야, 살쪄서!

 

어디! 어디 살쪘는데!

 

 

태형도 크게 소리를 내며 지민의 허리를 감았다. 살도 안 잡히는구먼! 지민은 태형의 손을 탁 쳤다. 태형이 화들짝 놀라며 손을 빼냈다. 나만 아는 게 있어. 지민의 말에 태형은 지민을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다 지민에게 달려들었다.

 

 

뭘 너만 알아, 죽을래? 옷 벗어봐, 어디 살쪘는지 보자!

 

야 미쳤, 야 씨발아! 아악!!!

 

 

지민은 태형의 손길을 피하려다 의자에서 떨어졌다. 태형은 놓치지 않고 그의 위에 올라타 교복 니트를 잡았다. 야 이 미친 새끼야!! 지민은 한 손으로 기어코 올릴려고 하는 셔츠를 간신히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태형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갑자기 일어난 일에 반 학생들은 당황해서 이도저도 못하고 있었다. , 윤정우!! 지민이 다급함에 정우의 이름을 빽빽 질러댔다. 한 친구가 급히 밖으로 나가 정우를 데리고 왔다. 뭐야, 갑자기 나를 왜 그렇게...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교실로 끌려 들어온 정우는 교실 뒤편에 보이는 상황에 입이 떡 벌어졌다. 이 새끼 좀 말려 보라고! 지민의 목소리에 정우가 재빨리 달려가 태형을 뒤에서 끌어당겼다. 태형의 두 손이 떨어지자마자 지민이 뒷걸음질 쳐 뒷문에 딱 붙었다. 지민이 헉헉 숨을 몰아쉬며 저 멀리 정우에 의해서 끌려간 태형을 봤다. 야 이 씨발, 저 새끼 단단히 돌았다. 지민의 말에 정우가 태형의 머리를 때렸다. 아 왜 때려 씨발! 태형이 빽 소리를 지르며 정우를 올려다봤다. 갈수록 뻔뻔함이 만렙인 태형에 지민은 헛웃음 쳤다.

 

 

내가 모르는 게 어디 있어. 너 나한테 숨기지 말고 다 말해.

 

뭘 숨겨. 내가 살쪄서 다이어트 한다는데 뭘 숨겨 진짜.

 

아 싫어 싫어. 다이어트 하지마.

 

 

또 시작됐다. 김태형의 막무가내식 우기기. , 또 뭐, 뭐가 마음에 안드는데. 지민은 거의 해탈한 표정으로 툭 내뱉었다. 태형은 입을 꾹 다물고 지민을 노려보다 말했다. 난 색시가 통통한 게 좋아. 뭐래 썅. 태형의 말에 지민이 바로 받아쳤다어이없어서 웃음도 안나왔다.

 

 

존나 날씨 더워지긴 한가봐. 또라이가 더 또라이가 됐네.

 

아 살빼지 말라고.

 

.

 

 

지민은 헛웃음을 뱉었다. 일단 빡찜 옷 정리부터 해. 정우의 말에 지민은 잔뜩 삐져나온 셔츠를 정리하고 넥타이를 바로 했다. 그러나 엉망진창으로 늘어난 니트는 어떻게 수습이 안됐다. 태형은 여전히 지민을 노려보며 제 니트를 벗어 던졌다. 지민은 가볍게 받아 들었다. 입어. 태형의 말에 지민은 머뭇거리다 결국 갈아입었다. 수업시간 종이 울렸다. 아이들은 각자 자리에 앉기 시작했다. 태형도 짜증스레 정우의 팔을 뿌리치고 제 자리에 앉았다. 지민도 자리에 앉았다. 한동안 둘 사이에는 말이 없었다.

 

쟤 진짜 갑자기 왜 저러지. 지민의 입장에서는 태형이 이해가 안갔다. , 뭐 하긴 갑자기 엉뚱한 행동을 했을 때 이해 간 적이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그런데 이번에는 정말 심했다. 심지어 옷 벗어보라며 옷까지 잡아당기다니, 지민한테는 완전 호러였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답은 하나였다. 김태형 또라이 새끼.

 

태형은 저녁시간에 밥도 안먹고 하교 했다. 그 덕에 지민 혼자 덩그러니 남았다. 어쩐지 묘한 기분에 지민은 머리만 긁적였다. 어이 빡찜, 김태형은 어디다 두고 너 혼자 있냐? 다른 반 친구의 물음에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지민은 그 날 처음으로 태형 없이 밥을 먹었다. , 근데 너 왜 김태형 옷 입고 있어? 다른 한 친구의 말에 지민은 그제서야 아까 태형의 옷으로 갈아입은 것이 생각났다. 너희 덩치 차이 오진다, 어깨 남는 거 봐. 그의 말에 지민이 찌릿 노려봤다. 품 존나 크네, 야 무슨 남친 옷이냐? 낄낄대며 하는 말에 지민이 그의 등을 내리쳤다. 아오 씨발! 빡찜 손 안 죽었어! 헛소리 한번만 더 하면 진짜 개때린다. 지민은 분노를 가득 담아 숟가락질 했다.

 

 

 

오늘은 망했다. 공부에 도저히 집중이 안됐다. 지민은 어쩐지 억울했다. 솔직히 김태형이 잘못한 거 아닌가. 자신이 왜 이렇게 신경을 쓰는지 이해 할 수 없었다. 뭔가 혼자 안달 난 사람 같았다. , 좆같아... 지민은 짜증이 확 나 제 머리를 헝클였다. 주위는 조용했다. 한적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이따금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래도 아직 여름이 오려면 멀었나보네. 잡다한 생각을 하며 천천히 걷던 지민은, 제 집 담벼락에 서 있는 누군가를 발견하고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태형은 지민의 집 담벼락에 기대 서 있다가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민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태형은 똑바로 서서 지민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아무도 다니지 않는 한적한 골목길에 가로등 불빛만이 그 한적함을 채우고 있었다. 지민은 천천히 태형의 앞에 다가가, 그의 앞에 섰다. 으흠. 태형은 괜히 헛기침을 하며 뒤로 숨기고 있던 종이가방을 건넸다. 뭔데. 지민의 물음에 태형은 억지로 그의 손을 끌어와 종이 가방을 걸어주었다. 지민은 바로 내용물을 확인했다. 새 니트가 들어 있었다. 지민이 놀라 니트를 꺼내들었다. 자연히 니트가 펴지면서 가슴팍에 명찰도 박힌 것이 보였다. 미안해서. 태형이 수줍게 말을 꺼냈다. 지민은 니트를 다시 가방 안에 넣었다. 아 그리고... 태형은 갑자기 제 지갑을 열더니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지민은 아무 생각 없이 사진을 보다가 생각지도 못한 과거 어택에 바로 주먹 쥐어 사진을 구겨버렸다. 뭐 하는 거야! 태형이 깜짝 놀라 지민의 손에서 사진을 빼냈다.

 

 

뭐야. 왜 나도 모르는 내 사진을 네가 가지고 있어.

 

내 핸드폰에 있었으니까 당연히 모르지.

 

아니 그걸 왜 네 지갑에 또 넣어.

 

귀엽잖아.

 

뭐가 귀여워. 아 진짜 내가 봐도 못봐주겠다. , 그냥 내가 지금 사진 줄 테니까 그거 제발 버리자.

 

아 싫어. 나 이 때 좋단 말이야.

 

 

지민은 태형의 마지막 말에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낮에도 통통한 게 좋다느니 어쩌니 그랬는데... 지민은 태형을 올려다봤다. 태형은 손바닥을 지민의 턱에 갖다 대고 손가락으로 두 볼을 눌렀다. 볼이 눌리면서 입술이 툭 나왔다. 태형은 그 모습을 보며 킬킬댔다. 귀여워. 지민은 태형의 손을 퍽 쳐냈다. 알겠다. 지민의 말에 태형이 뭐가? 장난기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너 나 중학생 때 나처럼 만들려고 그러는 거지.

 

......

 

어쩐지. 저번부터 존나 먹을 걸 갖다 바치더라니.

 

아니라고는 말 못하겠네.

 

와 존나 소름 돋았네. 이때까지 그럼 나 사육한 거냐? 돼지처럼 만들려고?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그냥 오랜만에 중학교 때 사진 봤는데 귀여워서 그 때처럼 보고 싶어서 그런 거야.

 

그래서 막 먹일 거 사 먹이고?

 

근데 갑자기 다이어트 한다잖아.

 

나 너 때문에 개살쪘어. 볼살 오른 거 봐.

 

빼지마.

 

 

지민이 태형을 밉지 않게 노려봤다. 네 놈이 몇 주 전부터 존나 먹을 거 갖다 바친 게 그 이유였다니. 지민은 태형을 퍽 때렸다. 아 씹, 아파! 태형은 맞은 팔뚝을 감싸면서 소리 질렀다. 내가 너 좋으라고 사냐? 지민이 흥 새침하게 태형의 옆을 지나쳤다. 아 잠깐만 색시야. 뒤에서 태형이 불렀다. . 지민이 다시 뒤돌아 그를 봤다. 태형이 헤 웃어보였다. 잘 자라고.

 

 

 

 

 

 

 

 

 

 

2. 관계

 

지민아, 너 태형이랑 무슨 사이야? 지민은 고등학교 올라오면서 이 질문을 수도 없이 들었다. 이제는 지겨울 정도였다. 뭔 사이긴 뭔 사이야, 친구지. 지민이 그렇게 대답을 하면 상대의 표정은 무언가 찝찝해 보였다. 아니 뭐 사실대로 말해줘도 그럴 거면 왜 물어봐. 지민은 그 질문이 언짢았다.

 

생각해보면 그랬다. 지민아, 너 정우랑 무슨 사이야? 라고는 물어보지 않는다. 애초에 그렇게 물어본다는 것은 나랑 김태형이랑 친구로 안보인다는 뜻인가. 생각이 거기까지 퍼지자 어쩐지 소름이 돋았다. 뭐야 씨발, 그러면 대체 무슨 사이로 보고 있다는 거야. 모르긴 몰라도 태형의 그 좆같은 호칭이 1차적인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 놈의 색시 씨발. 기억도 안나는 어린 시절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호칭이라 지민은 이제 제 2의 이름처럼 익숙하지만, 처음에 들은 사람들은 아무래도 이질적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왜 색시라고 하는지도 모르겠고, 김태형한테 물어봤자 왜냐면 색시는 내 색시니까! 이 지랄 하니까 나한테 물어보러 오는 거겠지. 또 웃긴 것은 그런 질문을 하는 애들은 다 여자라는 것이다. 의도가 유리창처럼 훤했다.

 

 

 

 

 

저 지민아. 우물쭈물 물어보는 이름도 모르는 여자애 앞에 서서 몰래 하품만 했다. 어제 미처 복습 못한 공부 마무리 짓느라 늦게 잤다. 거기다 더해서 게임 한 판만 하자고 가열차게 카톡을 보내는 김또라이의 공격까지. 아 그 카톡만 없었으면 좀 더 일찍 잘 수 있었을 텐데. 카톡 무시하려다 문자에, 전화에, 나중에는 기다란 막대기로 제 창문까지 퉁퉁 쳐대는 통에 결국 일어났다. 끈질긴 새끼. 오늘 새벽에는 진심으로 태형의 집념이 무서울 정도였다. 한번 걔 눈 안에 들면 끝장나겠다 싶었다.

 

 

네가 태형이랑 제일 친하다고 해서.

 

... .

 

 

여자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지민은 저도 모르게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매년 반복되는 제 일상 중 하나였다. 그래 이제쯤 나한테 올 때지. 학기 초에는 다이렉트로 태형에게 고백도 해보고 친해져 보려고 자주 다가가지만 오지게 철벽 치는 태형 때문에 이맘 때 즈음이면 주위 사람들을 공략하기 시작한다. 중학교 때부터 날라댕긴 윤정우랑 다른 무리들한테 뭐 물어보기는 무섭고 제일 만만한 게 나지. 지민은 이제 익숙한 레퍼토리에 지겹기까지 했다. 이제는 머리도 더 컸는데 좀 신박한 방법으로 다가올 수는 없나. 지민은 제 앞에서 볼을 불그스름하게 물들인 채 부끄러워 하는 여자애 앞에서 애써 웃어보였다.

 

 

이거 좀 태형이한테 전해줄 수 있어?

 

......

 

태형이한테 직접 주고 싶은데 태형이가 계속 안만나려고 해서.

 

그래, 내가 대신 전해줄게.

 

고마워!

 

 

여자는 지민이한테 작은 상자를 건네주고 후다닥 뛰어갔다. 총총총 뛰어가는 여자의 뒷모습만 보던 지민은 한번 더 하품을 하며 교실로 들어갔다. , 이거 네 거. 지민은 태형의 책상 위에 선물을 놓으며 제 자리에 앉았다. 옆에 애랑 막 장난치고 있던 태형은 고개만 돌려 책상 위에 있는 상자를 한번 보고 지민을 봤다. 뭔데? 혹시 색시가 나한테 주는 선물? 태형의 물음에 지민은 중지를 들어보였다. 태형은 바로 정색 했다. 네 거 아니면 안 받는다고 전해. 여전히 자신에 대한 호의에는 냉담한 태형의 반응에, 지민은 어깨만 으쓱였다.

 

 

매번 보는 반응이지만 정말 내가 다 상처다.

 

걱정마, 색시한테는 안그러니까.

 

너한테 줄 일도 없어, 새꺄.

 

색시 가질래?

 

 

태형이 선물을 내밀자 지민이 고개를 저었다. 선물 받은 것을 주는 것도 쓰레기지만, 나도 그걸 받을 정도로 쓰레기는 아니거든. 그래 그럼. 태형은 선물을 책상 서랍에 넣어두었다.

 

태형은 자신에게 호감을 드러낸다거나, 고백을 하면 반응이 차갑기 그지없었다. 매번 멀리서만 바라봤었다가 언제 한번 바로 옆에서 그 상황을 본 적 있었는데 정말 제 자신이 상처 받을 정도였다. 좀 더 상냥하게 거절할 수는 없어? 그래도 너 좋다고 용기내서 고백 했는데 그렇게 차가운 표정으로 무뚝뚝하게 반응하면 그 애가 뭐가 돼. 한번은 지민이 태형에게 말했다. 태형은 지민의 말이 다 끝날때까지 가만히 지민만 보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상냥하게 거절을 하면 그 애한테 희망고문 하는 것 밖에 안돼. 지민은 이해할 수 없었다.

 

태형은 정말로 연애에는 관심이 없는 듯 했다. 진짜 여자 끼고 놀게 생겼다는 말을 많이 듣지만 사실 태형의 주위에는 여자가 없었다. 다가오는 여자는 많았지만 태형은 그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너 얼굴 그딴 식으로 쓸 거면 나한테 달라고 주위 친구들이 농담 삼아 말하기도 했다. 어쩌면 그런 태형의 행동에 오히려 그런 말을 더 많이 듣는 듯 했다. 너희 대체 무슨 사이냐고. 개 중에는 정말로 뻔뻔한 애들도 더러 있었다. 자신 정도면 김태형이 받아들일 것 같아서 도도하게 고백했다가 무참히 까이고서는 게이 아니면 고자 아니냐고 욕하는 걸 몇 번 봤다. 아니, 김태형이 연애에 관심이 없고 애인 안사귄다고 해서 무조건 게이고 고자냐? 지민은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헛웃음만 쳤다. 김태형의 색시 드립은 그들의 말도 안되는 루머에 기름을 끼얹는 역할을 하는 듯 했다. 그래서 요새 점점 자신과 태형의 사이를 진지하게 물어보거나 이상하게 보는 경우도 늘었다. 지민의 입장에서는 존나 황당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다. 옛날에는 김태형이 자신을 가리키면서 내 색시야! 해도 아 그래 쟤는 원래 또라이니까 하고 넘어갔을지라도, 지금은 또라이라는 이유만으로는 납득이 안되는 듯 했다. 당연했다. 세상에 어느 미친놈이 자신의 친구한테 기어코 색시라고 부르며 졸졸 따라다닐까. 그것도 같은 남자끼리. 지민은 다짐했다. 이제는 그냥 어물쩍 넘어갈 수는 없다고.

 

 

 

하교 시간에 나란히 학교 교문을 나서는 길이었다. 저기. 누군가의 부름에 지민과 태형은 동시에 뒤돌아보았다. , 아까. 지민이 아는 체 하자 여자가 수줍게 웃었다. 태형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누군데. 태형이 허리를 살짝 숙여 낮게 깔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까 너한테 선물 준 여자. 지민의 말에 그제서야 아아 고개를 끄덕이며 자세를 바로 하는 태형이다. 태형은 가방을 앞으로 매더니 가방을 열어 선물을 꺼내 그녀의 손에 직접 쥐어주었다. 여자는 의아한 표정으로 태형을 올려다보았다. 나 이거 못 받아 부담스러워서. 태형의 말에 여자는 당황한 듯 동공이 흔들렸다.

 

 

, 그냥 받아주기만,

 

아니. 이 안에 뭐가 들었는지 뻔히 아는데 어떻게 그냥 받아.

 

... 애들이 다 그러더라. 너 이러는 거 지민이 때문이라고.

 

 

? 지민은 땅만 보며 발장난 치다가 갑자기 들리는 제 이름에 고개를 들었다. 태형이 등을 보이고 서 있어 그의 표정이 보이지는 않았다. 아니 둘 사이 일에 왜 갑자기 내가 나오는 거야. 지민은 절로 표정이 불퉁해졌다. 태형이 피식 웃었다. 여자 아이가 움찔 몸을 떨었다. 뭐야, 김태형 대체 무슨 표정을 짓고 있길래 저렇게 애가 떠는 거야. 지민은 괜히 자신이 안절부절 못했다.

 

태형은 서늘한 표정으로 허리를 살짝 숙여 여자와 시선을 맞추었다. 네가 뭔데 함부로 그 이름 부르냐. 태형의 속삭임에 여자가 살짝 겁을 먹은듯하면서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태형을 바라봤다. 태형이 코웃음을 쳤다. 그 표정이 여태 봐왔던 태형의 모습과는 너무 달라 그가 무서워졌다. 그 말한 애들한테 가서 전해, 한번만 더 너희들 입에서 지민이 이름 나오면 다 죽여 버린다고. 태형은 천천히 허리를 폈다. 여자는 잔뜩 굳은 채로 멍하니 태형을 보기만 했다. , 진심이야. 태형은 가라고 턱짓했다. 여자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태형을 노려보다 곧 몸을 돌려 가버렸다.

 

야 너 또 뭔 짓 했어. 지민이 후다닥 태형에게 다가왔다. 무슨 말 했는데, ? 지민의 물음에 태형은 푸스스 웃으며 지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냥 마음 못 받아준다고, 미안하다고 했지. 태형의 말에 지민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태형을 흘겨봤다. 진짜라니까. 태형은 그런 지민을 지나쳐 먼저 교문을 나섰다. 지민은 빠른 걸음으로 태형을 따라잡았다. 너 정색하면 진짜 무서운 거 알지, 나는 네가 그런 애 아닌 거 알지만 다른 애들은 아직도 네가 날라리인 줄 안단 말이야. 너 그러다 소문 또 이상하게 나면 어쩌려고 그래, 아까 그 애 표정 보니까 진짜 말이 아니던데. 그러니까 내가 조금만 상냥하게 말하라고 했잖아.

 

쫑알쫑알 제 뒤를 따라오며 잔소리 하는 지민에, 결국 태형은 뒤돌아서서 바로 지민의 양 볼을 한손으로 잡아 눌렀다. 우붑! 지민의 입술이 새 부리처럼 톡 튀어나왔다. 알겠으니까 그만해. 태형이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지민의 얼굴을 좌우로 흔들었다. 아파! 지민이 빽 소리를 지르자 그제서야 태형이 손을 떼었다. 악력 진짜 괴물이야... 지민은 얼얼한 제 볼에 손을 갖다 댔다. 조금 차가운 지민의 손이 조금이나마 아픔을 완화시켜 주는 듯 했다.

 

아 맞다, 야 나 진지하게 할 말 있어. 갑자기 비장한 표정으로 말하는 지민에, 태형도 짐짓 비장한 표정으로 지민을 바라봤다. 뭔데. 태형의 물음에 지민은 잠시 머릿속으로 생각 정리를 했다.

 

 

진짜 솔직히 얘기해.

 

.

 

진짜로 나를 계속 그렇게 부르는 이유가 뭐야?

 

색시?

 

그래, 그 놈의 색시.

 

내 색시니까.

 

죽을래? 똑바로 대답 안 해? 인간적으로 나이 18살이나 쳐먹은 놈이 18살이나 쳐먹은 똑같은 거 달린 새끼한테 할 말은 아니지 않냐?

 

약속했잖아.

 

... ?

 

색시 하기로, 약속했잖아.

 

 

? 지민은 순간적으로 머리가 멍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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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원래 이 픽 그냥 고딩들 이야기가 아니고

어렸을 때부터 지민이를 색시라고 부르는 태형이

이제는 허탈한 지민이가 보고 싶어서 구상 한 거였는데

쓰다보니까 일상 좀 넣어서

쓰면 더 나을 것 같아서 나온게 남고생의 일상.

아니 왜 굳이 색시라고 부름? 좀 그렇다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 같아서.

애초에 이 글을 쓴 이유가 그걸 보고 싶어서 그런 거였고

나름의 이유가 있긴 함. 납득 안되면 어쩔 수 없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