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스퍼

[뷔민/다각] 에스퍼 썰 15

글하 2017. 4. 16. 03:27


[형아]

 

한마디 온 문자에 지민이 후다닥 방을 나왔다. 도련님 안 됩니다! 집사들이 자신을 잡는 것을 애써 뿌리치며 저택을 뛰쳐나갔다. 넓디넓은 정원을 지나 사람이 다니는 철문을 열고 나가자, 얼마 안 되는 거리에 자신의 집 담벼락에 기대 앉아있는 정국이 보였다. 어찌나 급하게 왔는지 신발도 짝짝이었다. 정국은 지민을 보자마자 그 커다란 눈에서 굵은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형아... 처연하게 부르는 정국의 목소리에 지민은 제 입술을 짓이겼다. 형아... 아예 조그만 손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터덜터덜 다가오는 정국을 꽉 안은 지민은 정국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또 엄마 아빠가 괴롭혔어?

 

흐으... 나보고 인형 만들래... ... 부탁 받았다고... 나보고..흐으...

 

 

지민의 품에 푹 안긴 정국은 꾹 참던 울음을 팡 터뜨렸다. 끄윽끄윽 숨 넘어갈듯 울면서도 말을 잇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형아, 나 하기 싫어. 무서워. 엄마 아빠가 무서워. 사람들이 무서워. 형아. 나 안하면 안 돼? 자꾸 꿈에 나와. 죽은 사람들이 자꾸 꿈에서 나를 죽이려고 해. 형아. 능력 안 쓰면 안 돼? 나 그냥 노멀 하면 안 돼? 나 에스퍼 안 해도 되니까, 이런 능력 없었으면 좋겠어.

 

주절주절 입에 나오는 대로 말을 뱉던 정국은 종국에는 작게 흐느끼며 우는 소리 밖에 내지 않았다. 지민은 그를 더욱 꽉 안으며 계속해서 등을 토닥여 주었다. 지민은 그저 정국에게 제 온기를 나눠주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8. 아직은 친구들과 노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모를 나이였지만 정국은 달랐다. 지민은 9살이었으니, 그 역시 정국이 감당하고 있는 무게가 무엇인지 조차 알지 못했다. 이미 사회의 어둠에 몸을 담고 있는 정국과는 다르게 지민은 사회라는 세계에 발도 들이지 않은 어린이였기 때문이었다.

 

둘은 공통점이 많았다. 둘 다 희귀능력이었고, 다른 에스퍼들한테 그다지 달갑지 않은 능력이었으며, 어렸을 때부터 소외 받았고, 안 좋게 이용했으면 했지 절대 좋은 목적으로 쓰일 수 없는 능력이었다. 한마디로 악용되기만 하는 능력이었다. 둘의 유일한 차이점은 지민은 나라에서 알아주는 재벌가문이었고 정국은 그저 평범한 에스퍼 집안이라는 것이다. 이 차이는 그저 가문의 차이라고 하기에는 어마어마한 불평등을 일으켰다. '악용될 가능성이 농후한 능력' 이라는 애매하기 그지없는 기준에 부합하는 능력은 계열, 순수능력, 컨트롤 능력, 잠재 능력과 함께 위험능력자로 따로 분류하게 된다. 그리고 이 위험능력자라는 타이틀은 앞으로 살아가면서 수많은 불평등, 차별, 소외, 그리고 나라의 어둠에서만 활동하며 나라의 견제를 받게 됨을 의미했다. 지민과 정국은 위험능력자였다. 그리고 지민의 집안은 권력이 있었다. 지민은 '재벌가인 특수계 희귀능력자'  되었고, 정국은 '저주 받은 능력을 가진 위험능력자' 가 되었다.

 

정국의 부모님은 부, 명예, 권력욕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욕심에 비해 그들의 출신과 능력은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이미 강력한 능력과 그것을 뒷받침 해주는 좋은 가문들이 만들어낸 계층은 감히 넘어설 수 없는 자기들만의 세계를 만들었다. 신분이 없는 사회라지만 그런 거 무너진 지 오래였다. 이미 사회는 노멀과 에스퍼, 평범한 에스퍼와 강력한 에스퍼, 더 파고들면 그만큼 세세하게 나뉘어진. 그런 보이지 않는 신분이 엄연히 존재했다.

 

그들의 욕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정점에 있는 사람들의 눈에 들 만한 능력을 가진 자식을 낳는 것 밖에는 없었다. 그렇게 나온 것이 정국이었다. 처음에 정국의 능력을 알게 된 부모님들은 혐오감과 공포심, 소름끼침 등으로 정국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자신들의 능력을 봐서라도 자연계까지는 안 바라도 화려한 능력이기를 바랐는데. 그러다 잠시 생각해보니 자신의 아들의 능력을 잘만 이용하면 충분히 위를 노려볼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진 것이 많을수록 잃을 것이 많고,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 좀 더, 좀 더 어두운 곳으로 파고들어가기 마련이었다. 재벌가문은 뒤가 어두웠다. 그 어둠에는 각종 비리들이 오갔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어두컴컴한 비밀들이었다. 정국의 부모는 그런 어둠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제 아들을 어둠에 몰아넣었다. 그리고 의뢰를 받았다. 그 의뢰는 대게 이런 것들이었다. 내 남편이 혹은 내 아내가 바람을 폈으니 상대를 죽여 달라. 누군가가 눈에 거슬린다, 죽여 달라. 누가 내 비밀을 알아차렸다, 죽여 달라. 최대한 고통스럽고, 끔찍하고, 잔인하게.

 

성공하면 그만큼의 부가 따라왔다. 정국의 부모는 점차 그 바닥에서 알게 모르게 유명해지기 시작했다권력이 따라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점점 상위계층의 사람들과 동등해지기 시작했다. 모두 정국 덕분이었다. 그들은 철저히 정국을 이용했다. 그들에게 오는 이익을 사랑했다. 정국이 받은 의뢰를 성공할 때마다 사랑한다고 말했다. 정국은 알고 있었다. 그들이 뱉은 사랑한다는 말은 자신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과 그로 인해 오는 이익을 말하는 것을.

 

 

 

 

 

형아. 형아는 나중에 어른이 되면 뭐 할거야?

 

? 글쎄... 정국이는?

 

나는... 여기를 떠날거야.

 

?

 

저 멀리 가서 누구에게도 미움 받지 않고 살 거야.

 

......

 

형아. 같이 갈래?

 

 

지민은 정국을 힐끗 봤다. 처음 만난 날 봤던 그 차분한 표정이었다. 도저히 어린아이한테서는 나올 수 없는. 지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미움 받지 않는 곳으로 같이 가자.

 

 

 

 

 

 

 

 

 

 

 

 

 

 

 

 

 

 

 

 

그래서, 너는 무슨 능력인데? 태형의 물음에 정국은 슬쩍 고개를 숙여 제 손을 바라보며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다. 이 손으로 그토록 많은 사람을 죽여 왔다. 그리고 얼마나 더 많은 사람을 죽일지 감도 오지 않았다. 힘 한번 들이지 않고,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방법 알아요? 갑작스런 정국의 말에 태형은 흠칫 놀랐다.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당혹스러웠다. 정국은 태형을 향해 손바닥을 펴보였다. 제 직업 말해줄까요? 뜬금없는 질문의 연속이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어.

 

형도 이 학교 온 게 말이 안 되지만, 사실 저도 말이 안 되거든요. 집안이 존나게 평범해서.

 

......

 

근데 내가 여기 어떻게 들어왔게요. 그것도 16살이 1년이나 일찍.

 

......

 

내 능력을 나라에서 합법적으로 최대한 빨리 이용하고 싶은 거죠.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나 봐요, 이 나라는. 웃기죠. 자기들이 뭔데 나의 가치를 판단하는지, .

 

이용?

 

자신들한테는 없는 절대적으로 유리한 능력을 이용하는 거죠. 위험능력자라는 말을 앞세워서. 너는 위험하기 때문에 나라에서 관리를 한다는 명목 하에 그냥 뒷세계 일을 시키는 거예요. 따지고 보면 위험능력자라는 말도 우습죠. 존나 국민들 위하는 척 하면서 사실은 자신들 권력유지 하는데 위협이 되는 능력들을 다 견제하는 거예요.

 

 

뭐 어쨌든 그런 세세한 건 알 필요 없겠죠. 정국은 혼란스러워 보이는 태형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태형은 무슨 말을 해주어야 할지 몰라 입만 뻐끔거렸다. 뭔가 굉장히 엄청난 일에 말린 기분이었다. 정국은 태형의 표정을 보다가 제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냥 형은 저를 N구역에 데려다 주기만 하면 돼요. 정국의 말에 태형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말이죠. 손가락 까딱하면 사람을 죽일 수 있어요.

 

...?

 

그게 제 능력이에요.

 

, 장난치지 마.

 

장난 아닌데.

 

......

 

이 손으로 사람 죽이는 거 일도 아니에요. 누구보다 고통스럽고, 잔인하고, 끔찍하게 죽일 수 있어요.

 

......

 

그래서 사람들이 막 저를 피해요. 혹시 까딱 잘못해서 몸에 닿았다가 자기 죽을까봐. 지민이 형도 똑같아요. 까딱 잘못해서 몸에 닿았다가 자기 능력 뺏길까봐.

 

......

 

무섭죠.

 

 

정국의 물음에 태형은 놀람에 살짝 벌어진 입을 천천히 다물었다. 꽉 주먹 쥐고 있던 두 손을 폈다 접었다 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하지. 머릿속에서 갖가지 생각들이 어지럽게 부유했다. 네가 왜 무서워. 태형이 입을 뗐다.

 

 

어차피 나 능력 안통해.

 

......

 

너 나 죽이고 싶어?

 

아뇨.

 

그런데 왜 무서워. 너 그런 애 아닌 거 다 아는데.

 

... 형은 참...

 

? ?

 

 

이상해요. 정국은 결국 그 말을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능력까지 가르쳐 줬으니까 우리 서로 돕는 거예요, 알았죠? 재촉하는 정국의 목소리에 어쩐지 16살의 천진난만함이 느껴져 태형은 결국 소리 내어 웃었다. 당연하지.

 

 

근데 정확히 어떤 능력이야?

 

......

 

, 불편하면 말 안해도 돼.

 

venom.

 

... ?

 

독이요.

 

 

독이랑, 저주요. 자신의 능력을 말하는 정국의 표정은 지나치게 차가웠다. 바람이 불었다. 선선하게 부는 바람은 그들의 머리카락을 스치며 지나갔다.

 

 

 

 

 

 

 

 

 

 

***

 

 

 

 

 

 

 

 

 

 

.

 

윤기의 나직한 말에 석진이 힐끗 그를 쳐다봤다. 왜 걔 부탁 안 들어줬어? 윤기의 물음에 석진은 피곤한 듯 미간을 문질렀다. 능력 얘기 할 거면 그냥 가라. 어쩐지 평소보다 더 가라앉은 듯한 석진의 목소리에 윤기는 입을 꾹 다물었다. 나 너 능력 본 적 한 번도 없어. 곧 다시 입을 열었다. 어쩐지 오늘은 그냥 넘어갈 것 같지 않는 느낌에 석진은 결국 보고 있던 책을 덮고 안경을 벗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석진의 물음에 엎드리고 있던 윤기가 상체를 일으켜 제대로 앉아 석진을 마주봤다.

 

 

네가 어떻게 내 능력을 봐. 내가 능력을 쓰면 너도 멈추는데.

 

그거 말고 다른 거. 쓴 적이 없잖아.

 

쓸 이유가 없는데 왜 써.

 

무슨 이유면 쓰는데?

 

 

석진은 윤기를 노려봤다. 내 능력에 관심 끄라고 했었지. 석진의 날카로운 말에 윤기는 또 한 번 입을 꾹 다물었다. 윤기는 원래 자신이 흥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면 이렇게 깊게 파고드는 성격이 아니었다. 게다가 남이 싫어하는 것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그러나 그는 오늘따라 이상했다. 입을 꾹 다물면서도 힐끗힐끗 제 눈치를 보는 게 여직 궁금한 게 남아 있는 듯 했다. 석진은 그런 그의 눈치를 애써 모른 척 했다.

 

 

꿈을 꿨어. 꿈에서 네가 나오더라.

 

.......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7살인 것 같았어.

 

......

 

나한테는 없는 7살이. 꿈에서 엄청 생생하게 나왔어. 이게 혹시 진짜 내가 겪은 일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만하자.

 

무슨 일 있었지.

 

 

윤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석진이 앉았던 의자가 밀려나며 뒤로 넘어가 결국 큰 소리를 냈다. 석진은 두 팔로 책상을 디디고 고개를 숙였다. 김석진. 윤기가 놀라 자리에 일어났다. 오지 마. 석진의 단호한 말에 윤기는 주춤거리기만 할 뿐 석진에게 더 이상 다가가지는 않았다.

 

항상 이랬다. 석진은 제 능력에 관한 이야기라면 유난히 예민하게 받아들였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었다. 옛날에는 능력 관련 이야기만 나오면 무섭게 구는 석진 때문에 이야기를 꺼려했지만 이제는 알아야했다. 제 잃어버린 7살과 연관이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든 이상, 윤기도 이제는 물러나고 싶지 않았다.

 

옛날부터 어렴풋이 이상하다고 느꼈다. 형제도 아니고, 별 다른 연관이 없는 것 같은데 석진이 자신의 집에서 자신과 함께 사는 이유. 기억하려 해도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 제 7. 7살 때 이야기만 나오면 마치 짠 것처럼 입을 꾹 다무는 집안사람들과 석진. 그냥 개꿈이라고 하고 넘기기에는 무언가 찜찜한 오늘의 꿈. 지금의 윤기는 뭐가 있었겠지 싶어 그냥 넘겼던 그런 어린애가 아니었다

 

석진과 윤기는 어렸을 때부터 친구였다. 완전 갓난아기 때부터 찍은 사진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그 때 당시의 기억은 전혀 없지만 4, 5살 때의 기억은 드문드문 있다. 7살 때의 기억은 전혀 없고 8살 때부터 많이 기억이 나는데 대충 그때부터 석진과 같이 살고 있었던 것 같다. 언제부터 그와 같이 살았는지, 왜 같이 사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렇다는 말은 7살 때 무언가 일이 생겼고 그것 때문에 같이 살게 되었다는 건데. 지금까지 한 추측으로는 석진의 부모님이 사고로 돌아가시고 키워줄 사람이 없어서 제 부모님이 거둬주셨다는 것 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정말 그것뿐이라면 석진과 부모님들이 나서서 윤기에게 입을 꾹 다물 이유가 없다. 뭔가 더 있다는 뜻이었다. 아 김석진 능력만 쓸 수 있으면 되는 건데. 윤기는 짜증스레 머리를 헝클였다.

 

사실 없어진 7살 따위 모르면 모르는 대로 살 생각이었다. 이때까지 그렇게 잘 살아왔고 어차피 이미 지나간 시간 전혀 기억이 안 나는 것도 무슨 이유가 있어서겠지 싶었다. 앞으로 살아가는데 그다지 중요한 부분도 아니었다. 그 꿈을 꾸기 전까지는. 꿈을 꾸고 나서야 의문이 들었다. 1년은 어디로 갔으며 왜 석진이 연관되어 있는지, 왜 꿈에서 석진이 그 능력을 쓰는 장면과 그의 부모님의 사고가 겹쳐 보이는지. 알아야 했다. 제 느낌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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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형이와 정국이 대화 장면은

정국이와 지민이가 만나기 전

옥상에 만나서 얘기하던 부분

시점이 참 많이 왔다갔다 거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