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뷔민 무제 2



지민은 문 앞에서 들어가길 망설였다. 후 한숨을 쉬었다가 문에 손을 댔다 뗐다 부산을 떨어댔다. 아 얼굴 어떻게 보냐... 결국 지민은 문에 머리를 콩 박았다.

박지민? 갑자기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지민이 제자리에서 펄쩍 뛰며 고개 돌려봤다. 제일 얼굴 보기 불편한 사람과 마주쳤다. 태형은 지민을 쭉 쳐다봤다. 흑색의 머리와 새까만 눈동자. 단정하게 입은 교복. 첫 날 봤던 지민과 다를게 없었다. 하지만 어제는 분명. 태형은 어제의 지민을 잊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점점 더 생생하게 기억이 났다. 달빛을 머금고 빛나던 붉은색의 머리와, 더 하얘 보이던 피부, 지금처럼 반짝이는 검은색 눈동자와 그것보다 더 칠흑같던 검은 옷. 머리와 피부를 제외하면 거의 분간이 안갈 정도로 검기 그지 없었다. 그런 그는 자신의 키를 훌쩍 넘는 거대한 낫을 들고 있었다. 날 끝이 달빛에 번뜩였다. 조금만 스쳐도 살이 저밀 것 같이 날카로웠다. 그 날 선 예리함을 잊을리 없었다.

지민이 눈에 띄게 당황하는 모습에 오히려 태형이 더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지민은 주춤주춤 거리다가 결국 뒤돌아 홱 도망갔다. 지민아 어디가! 태형이 그를 불렀지만 왼쪽으로 꺾은 지민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지민은 헐레벌떡 3층으로 올라갔다. 3층 제일 첫번째에 있는 교실문을 벌컥 열어젖힌 지민은 자신한테 쏠리는 시선은 신경도 안쓰고 교실 안을 둘러봤다. 네가 이 시간에 웬일이야? 뒤에서 의아한 표정을 자신을 바라보며 말하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지민은 그에게 달려갔다. 호석이 형!!!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제 앞에 온 지민을 의아한 표정으로 보던 호석은 헥헥거리는 그의 어깨를 도닥여줄 뿐이었다. 혀, 혀, 형 어떡, 어떡하지, 진짜 어떡하지. 머릿속이 정리가 안되는지 제대로 말도 못하는 지민에, 호석은 그의 등을 쓸어주었다. 진정하고 천천히 말해봐.

어, 박지민 네가 우리 교실까지 웬일이야?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지민이 뒤돌아봤다. 남준이 교복바지에 손을 닦으며 교실에 들어왔다. 형 나 어떡해, 진짜? 지민의 말에 남준도 의아해 고개를 갸웃하며 그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인데? 남준의 물음에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대던 지민이 결국 입을 열었다.


나... 들킨 것 같아.

......

......

무슨 말이라도 좀 해봐!


지민의 큰 소리에도 호석과 남준은 눈 빠지게 놀란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아니, 너무 당황스러워서 뭐라고 해야할지... 남준의 답지 않게 당황스러워 하는 모습을 본 지민은 아예 사색이 되었다. 들키면 어떡해...? 조심스러운 지민의 물음에 호석과 남준은 답하기 힘들었다. 내 인생 살면서 이런 일은 처음이라..아악!! 아니야! 그렇게 큰 일은 아닐거야, 지민아. 자신 없게 대답하다 지민 몰래 호석에게 등을 꼬집힌 남준이 급하게 말을 바꾸었다. 그러나 이미 남준의 말을 제대로 들은 지민은 표정이 말이 아니었다. 남준은 곤란함에 눈썹만 문질렀다. 잠시 셋 사이에 말이 없었다. 그때 아침 자습 시간 종이 울렸다. 일단 지민아 교실 가 있어 나중에 다 같이 모여서 이야기 나누자. 무슨 이야기요! 문까지 제 등을 밀며 가는 남준에, 다리에 억지로 힘을 주며 안 가려고 뻐팅기던 지민이 결국 그의 힘에 인해 문 밖에 튕겨나갔다. 단호하게 닫힌 문을 멍하니 보던 지민은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하 씨발 인생... 진짜 어떡하지... 지민은 계단 앞에서 고민하다 결국 천천히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문을 닫고 제자리에 앉은 남준을 바라보던 호석이 입을 열었다. 그게 가능해? 그의 물음에도 남준은 답할 수 있는게 없었다. 뭐... 정확히 무슨 상황인지를 모르니까 그냥 우연히 허공을 보고 있던 어떤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남준의 말에 호석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너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남준은 어깨를 으쓱였다. 제발 그러기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형한테 말해야 할 것 같은데... 남준의 말에 윽 호석이 낮게 소리냈다. 지민이가 우리한테 먼저 온 이유가 형한테는 이야기 하고 싶지 않아서 그런 거 아니야? 호석의 말에 남준은 더더욱 심각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정확히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 채 형의 귀에 들어가면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감도 제대로 안잡혔다. 형도 이런 일은 겪어 본 적 없을 것 같은데... 남준의 말에 호석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박지민 너 어디야]

지민은 날라온 문자를 곱씹다 결국 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아씨 남준이 형 고새 큰 형한테 이르냐... 지민은 짜증스레 머리를 헝클였다. 불어오는 바람따라 머리카락이 살짝 휘날렸다. 문득 그 날 일이 떠올랐다. 온 동네를 채우던 빛과 소음도 잠이 든 밤, 달빛만이 어둠을 밝히던 그 폐건물에서 태형과 시선이 맞닿았던 그 날. 착각이었다고 믿고 싶었지만 그럴 일은 없었다. 고개를 살짝 들어 자신을 보며 놀라던 그 얼굴을 잊을 수 없었다. 하 씨발... 지민은 머리를 쓸어올리며 옥상 난간에 기대었다.

박지민. 갑자기 옥상 철문이 열리면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입구 쪽을 바라봤다. 아 형, 잠시만요. 살벌한 그의 표정에 지민은 두 손을 저으며 천천히 뒷걸음질쳤다. 그가 뒷걸음질 치는 만큼 그가 다가왔다. 순식간에 지민의 바로 앞에 다가온 그에, 지민은 빽 소리를 질렀다.


내가 귀신이냐.

귀신도 잡잖아요.

이게 뭘 잘했다고.

아! 아파요!

아프라고 때렸다.


씨이... 지민은 입을 툭 내밀며 맞은 곳을 문질렀다. 윤기형. 지민이 툭 내뱉었다. 왜. 윤기가 대꾸 했다. 지민은 잠시 생각 하는 듯 입술을 꾹 깨물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이때까지 이런 적 있었어요?

아니.

... 그럼 저 어떻게 되는 거예요?

글쎄.

뭔가 해결책을 좀 달라고요!


지민이 울멍울멍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윤기의 표정에 짜증이 살짝 어렸다. 야, 네가 잘못했는데 내가 수습해야 하냐? 윤기의 지민은 할 말이 없어 다시 입을 꾹 다물고 난간에 팔을 올리고 얼굴을 얹었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윤기의 뜬금없는 말에 지민이 팍 얼굴을 들어 윤기를 바라봤다.


방법이 있어요?

가장 마음에 드는 거 골라봐.

아 세상에. 심지어 여러개야.

첫번째는 그냥 생까.

......

어차피 걔도 긴가민가 할 거 아니야.

형 농담이죠?

내 인생 살면서 제일 진지해.


지민은 한숨을 쉬었다. 형 저 지금 웃을 기분 아니예요. 나도 너 웃길 생각 없어. 지민의 말에 윤기가 대꾸했다. 윤기의 표정에 웃음기라고는 하나도 없이 진지했다. 지민은 제 눈썹을 문질렀다. 다른건요. 다시 입을 열었다.


근데 너 정확히 어떤 모습을들킨건데.

소멸시키는 모습이요.

아, 그럼 두번째는 안되겠군.

뭐였는데요.

코스프레.

아, 형! 저 지금 존나 심각하다고요!

알아 나도. 그러게 왜 들키냐고 들키기를.

제가 들킬 줄 알았겠어요?! 한낱 인간이 저 보고 그렇게 놀라는데 저도 너무 놀라서 그 자리에서 넘어졌다니까요?

그거 때문에 말인데.

...에?

애초에 인간이 우리가 보이지 않는데 걔가 봤다는 거잖아.

... 예.

마지막 방법.


마지막 방법을 들은 지민의 표정이 멍해졌다. 막상 말을 한 윤기는 평온하기 그지 없는 표정이었다. 그래도 돼요? 윤기가 어깨를 으쓱였다. 몰라 근데 그것 밖에는 답이 없잖아. 하아. 윤기의 말을 들은 지민이 한숨을 쉬었다. 내가 죽일 놈이지 뭐, 그러게 왜 들켜가지고... 지민이 두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았다. 윤기가 어색한 손길로 지민의 어깨를 도닥였다. 잘해봐, 어차피 너 아직 없잖아. 윤기의 마지막 말에 지민은 허탈한 웃음만 냈다.



어디 갔었어? 3교시에 교실로 들어온 지민에게 태형이 물었다. 다른 아이들은 힐끔 지민을 보고 다시 제 일 하기 바빴다. 후 속으로 한숨을 쉰 지민이 말 없이 자리에 앉았다. 짝이었던 태형이 끈질기게 물어왔다. 여태까지 받아본 적 없는 관심이 너무 부담스러웠다. 지민은 4교시 책을 꺼냈다. 태형은 아예 지민 쪽으로 몸을 돌려 지민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지민은 애써 무시하려다 따가운 그의 시선에 결국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봤다. 아, 드디어 봤다. 그의 태형한 소리에 지민은 제 속이 다 터질 것 같았다.


뭐야. 도대체 왜 계속 그렇게 보는건데.

어디 갔었어? 들어오시는 선생님마다 물어보셔서 내가 얼마나 난감했는데.

너 원래 그렇게 오지랖 쩔어? 그냥 신경 꺼.

어떻게 그래. 난 네가 좋은데.


아, 노답이다. 지민은 입을 꾹 다물고 다시 앞을 쳐다봤다. 태형은 아예 턱을 괴고 지민을 쳐다봤다. 우리 그래도 나름 같은처지잖아. 태형의 말에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같은 처지? 뭐가? 귀신 보는 거? 뭣도 모르면서 함부로 말하지마.

알겠다.

......

너 정말 평범한 사람은 아니구나.


지민은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의자가 뒤로 넘어가면서 큰 소리가 났다. 반 아이들이 전부 뒤를 돌아봤다가 지민과 눈이 마주치자 바로 고개를 돌렸다. 몸이 절로 떨렸다. 지민은 태형을 노려봤다. 태형은 여전히 태연한 표정이었다. 그 표정이 더 짜증났다. 난생 처음 겪는 일에 너무 혼란스럽기만 했다. 이렇게 무작정 다가오는 애한테는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전혀 모르겠다. 대체 왜그래. 지민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그제서야 태형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나한테 원하는게 도대체 뭐야.

딱히 그런건 없고. 그냥 친하게 지내자고.

......

같은 처지인 사람끼리.

야. 너 뭐 착각하고 있는데. 나 너 같은 사람 아니야.

......

그리고 진심으로 경고하는데. 너 내 옆에 계속 그렇게 붙어다니면 너 명 짧아져.


태형은 입을 꾹 다물었다. 지민은 의자를 세워 앉았다. 철벽이 철옹성이네. 태형을 쩝 입을 다시며 생각했다.










이 학교에서 가장 좋은 점을 뽑으라고 한다면 꽤나 긴 점심시간과, 학교 뒷편에 가볍게 오를 수 있는 낮은 산이 있다는 것이다. 태형은 밥을 먹은 후에 자주 그 뒷산에 오르고는 했다. 뒷산에 있는 절은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 딱히 종교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왠지 그곳에 가면 귀신들이 보이지 않았다. 버려진 절이라 해도 잡귀를 막는 힘은 있나보다 싶다. 태형은 재빨리 밥을 먹고 천천히 학교 뒷편으로 가기 시작했다. 본관 건물과 신관 건물 사이 길로 들어서는 순간 팔목을 감고 있는 팔찌가 툭 소리를 내며 끊겼다. 순식간에 줄에 꿰여있던 구슬이 바닥으로 떨어져 사방으로 튀었다. 투두둑 하고 바닥과 구슬이 맞닿는 소리가 들렸다. 헐 뭐야. 태형은 당황해서 제자리에 쭈그려 앉아 하나하나 구슬을 줍기 시작했다. 크고 작은 구슬들이 다 어디로 튀었는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아씨 이게 뭐야. 태형은 괜히 짜증내며 바닥 곳곳을 유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갑자기 바닥에 그림자가 졌다. 이상할 정도로 거대한 그림자에 태형은 멈칫했다. 뭐야. 아무 생각없이 뒤돈 태형은 그대로 다리에 힘이 풀려 스르륵 주저앉았다. 두 팔과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본능적으로 빨리 도망가야 한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몸이 제멋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뭐지. 뭐지. 머릿속이 어지러웠다가 백짓장처럼 새하얘졌다. 두려움과 공포심만이 가득 찼다.

섬뜩한 눈이 천천히 밑으로 내려가면서 태형과 눈이 마주쳤다. 그 눈과 시선이 맞닿은 순간 머리 끝까지 소름이 쫙 올라왔다. 태형은 바닥을 짚고 있는 손에 힘을 주어 꽉 주먹쥐었다. 입술을 꾹 깨물었다. 기회는 한번 뿐이다. 그대로 그 커다란 눈에 줍고 있었던 구슬을 던졌다.

끄아아악!!!! 뭔지 알 수 없는 그 '존재'는 구슬을 맞고 괴로움에 몸부림 쳤다. 그 틈을 타 태형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무조건 학교 뒷쪽으로 미친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다리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아 몇번이나 휘청거렸다. 이 악물고 달렸다. 저게 뭔지는 몰라도 본능적으로 저 '존재'를 피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주먹을 꽉 쥔 손에 땀이 차기 시작했다. 다른 한 손에 여전히 남아 있는 팔찌 구슬들의 감촉이 느껴졌다. 뒷산을 미친듯이 뛰어 올라갔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다리는 금방이라도 쓰러질듯 아팠지만 그따위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발가락이 아파왔다. 아오 씨발 발톱 빠질 것 같아! 피가 나올 것 같은 아픔을 참고 올랐다. 땀이 미친듯이 쏟아졌다. 땀이 눈 안에 들어가서 따가웠지만 닦을 새도 없었다. 이를 너무 세게 꽉 물어 턱이 아파올 정도였다. 태형은 힐끗 뒤를 보고 그 자리에서 쓰러질 뻔 했다. 극한 공포심에 다리에 마비가 올 지경이었다. 진짜 이 정도면 제 정신력도 정상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태형은 다리를 더 빨리 움직였다. 살짝 뒤돌자마자 마주친 그 눈빛이 뇌리에 박혀 사라지지 않았다. 진심으로 무서워 뒤질 것 같았다. 귀신인가. 귀신일까. 저렇게 무서운 귀신은 전혀 본 적이 없었다. 이때까지 봐 온 귀신들은 그저 사람의 형태였다. 그래, 그냥 영혼을 보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지금 자신을 미친듯이 쫓아오는 저 존재는 그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보는 것 만으로도 온 몸의 힘을 쑥 빼놓을 정도의 공포심을 일깨웠다.

뭐지. 쟤는 뭔데 나를 이렇게까지 쫓아오는거지. 태형은 숨차다 못해 터질 것 같은 가슴께를 부여쥐고 절 입구에 확 들어갔다. 돌바닥이 깔린 넓은 마당이 보이고 그 뒤에 낡은 절이 보였다. 태형은 하아하아 숨만 몰아쉬며 멍하니 섰다. 태형은 터덜터덜 마당을 가로지르며 천천히 절 쪽으로 다가갔다. 이제는 내 눈이 미쳤나. 그렇지 않고서야 여기에 사람이 있을리가 없는데. 태형은 터덜터덜 움직이던 다리를 멈추고 마당 한가운데 우뚝 섰다. 절 안으로 들어가는 계단에 앉아있는 지민과 눈이 마주쳤다. 아니, 지민과 함께 있는 다른 사람들과도 눈이 마주쳤다. 머리가 아프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들의 연속에 그냥 멍해졌다. 지민아. 한숨 같이 나온 제 이름에 지민은 그 자리에 벌떡 일어섰다. 너 왜 여기있어! 지민의 외침과 동시에 뒤에서 엄청난 굉음과 함께 무언가의 파편들이 날라왔다. 와아아악!!! 씨발!!! 태형은 그 자리에 바로 엎드렸다. 저 미친 놈! 지민과 있던 다른 한명이 거의 튕겨나듯이 뛰쳐나와 재빨리 태형을 데리고 뒤로 물러났다. 그 움직임이 말도 안되게 빨라 태형은 멍하니 그의 얼굴만 쳐다봤다. 그 넓은 마당을 순식간에 가로질러 계단 앞까지 데려다주자 태형은 그대로 주저앉았다. 이제는 정말 다리에 힘이 없었다. 저 멀리 자신을 그렇게나 끈질기게 쫓아오던 그 존재가 있었다. 거대한 몸뚱아리가 마당 안에 반 이상은 들어와 있었다.


너 미쳤어?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와!

아니 저게 계속 쫓아와서!


태형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하는 말에 지민이 놀란 눈으로 고개를 홱 돌리자 같이 앉아있던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윤기형. 나직한 지민의 말에 윤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저 새끼 먼저 처리하고 온다. 윤기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앞으로 나서려는데 뒤에 앉아있던 남자가 한발 빨랐다. 어느새 다 내려와 윤기의 어깨를 눌러 앉히는 그의 행동에 윤기가 인상을 팍 찌푸리며 그를 올려다봤다. 형은 지금 파트너도 없으면서 괜히 나서지 마요. 그의 말에 금방이라도 튀어나갈 것 같던 윤기가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태형은 영문 몰라 눈만 데굴데굴 굴리며 그들을 번갈아 봤다. 남준아. 그의 말에 태형을 데려다 준 남자가 거침없이 앞으로 가기 시작했다. 잠깐 거긴! 태형이 벌떡 일어나 막으려 하자 지민도 재빨리 일어나 태형의 손목을 잡아 돌렸다. 넌 인간이 나서지 말고 있어. 지민의 단호한 말에 태형은 꾹 입을 다물었다. 참 나, 지는 무슨 인간이 아닌 것 처럼 얘기하네... 그러다 문득 그 날 밤의 일이 떠올랐다. 붉은 머리를 흩날리며, 거대한 낫을 들고, 달빛을 받으며. 

그 날의 일을 생각하며 멍해진 태형의 시선에 닿은 것은 거대한 그 존재를 한번에 베어버리는 남준이었다. 그가 위에서부터 내려오면서 그 존재를 베어내리는 행동이 그 때의 지민과 겹쳐보였다. 지민과 윤기는 입이 떡 벌어져 그대로 굳어버린 태형을 힐끔힐끔 쳐다봤다.

미친듯이 쫓아왔던 그 존재는 반으로 갈라져 그대로 소멸되었다. 무슨 일 있었냐는듯 평화로운 고요함만이 남았다. 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남준이라는 사람은 천천히 걸어왔다. 배 좀 부르냐. 윤기의 물음에 남준이 고개를 저었다. 기별도 안가요. 윤기는 픽 웃었다. 진짜 애송이었나보네.

지금 그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지 않아요? 팔짱을 끼며 하는 말에 태형이 그를 쳐다봤다. 그의 교복 명찰에 정호석 석자가 정갈하게 박혀 있었다. 계단에 앉아있던 윤기가 엉덩이를 손으로 탈탈 털며 일어났다. 정리하자, 일단 이 인간은 상황조차 모르니. 그의 말에 지민도 머리를 헝클이며 일어났다. 자신을 노려보는 듯한 느낌에 태형은 괜히 몸이 움츠러들었다. 야 인간. 윤기가 태형을 가리키며 말했다. 에, 저, 저요? 태형은 그의 기에 눌려 자기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아무런 감정이 보이지 않는 무심한 눈에서 뭔지 모를 포스가 느껴져서 찍소리도 못하겠다. 네 쌍의 눈이 모두 자신을 향하는 그 상황이 어쩐지 무서워 태형은 자꾸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이상한 괴물한테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기껏 도망쳐 왔더니 이런 반응만 돌아온다. 태형은 어쩐지 서러워졌다.

너 얘 알지. 지민을 턱짓을 가리키며 묻는 말에 태형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반 친구인데요. 윤기는 미간을 미간을 꾹꾹 눌렀다. 그런 겉모습 말고, 인마. 태형은 마른침을 삼켰다. 주먹 쥐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까부터 쥐고 있던 구슬이 느껴졌다. 땀이 차는 기분이다. 문득 할머니가 어렸을 때 이 팔찌를 주시면서 하신 말씀이 떠올랐다. 태형은 자신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 말을 듣고도, 크면서도 딱히 그 말을 주위깊게 생각하지 않았었는데 이제서야 그 말이 바늘처럼 제 가슴을 쿡쿡 찔렀다. 부적은 잘 차고 있지? 그거 없으면 네 인생이 지옥불로 떨어지는 것이야. 할머니를 만날 때마다 그렇게나 확인을 하던 그 팔찌가 지금은 산산히 흩어져 몇 알만이 제 손에 남아있다. 할머니가 말한 그 지옥불이 이런 것이었어? 태형은 혼란스러웠다. 어떻게 말을 해야할지 감이 안 와 지민만 힐끗 쳐다봤다. 눈이 마주친 지민은 시선을 살짝 피했다.


거짓말 칠 거 없어. 어차피 우린 다 아니까. 정확히 네가 뭘 봤는지만 말해주면 돼.

아...

너 지민이 봤다며, 밤에. 오늘도 뭔가가 쫓아왔다며.

......

야 네가 정확히 어떤 앤지 알아야 우리도 대처를 하지.

그 쪽 사람 아니죠. 정체가 뭐야. 귀신이야?


허. 윤기가 헛웃음을 뱉었다. 인간, 내가 한낱 그런 잡 것으로 보여? 감정 없는 두 눈이 흉흉해지는 듯한 느낌에 태형은 재빨리 눈을 내리깔았다. 지민이 후 한숨을 내쉬었다. 형 됐어요, 얘는 진짜 아니에요. 야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이미 그거까지 봤는데. 남준이 재빨리 대꾸했다. 형이 계속 협박해서 지금 애 겁먹었잖아요. 호석의 난데없는 말에 윤기의 눈이 커졌다. 그의 두 눈에서 어이 없음이 느껴졌다. 야 내가 무슨 협박을 했다고 그래! 억울함에 목소리가 저절로 커졌다. 이거 봐요, 애 무서워서 주먹까지 쥐고 있는 거. 호석은 태형의 손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 이건 제가 뭐 들고 있는게 있어서 그래요. 태형이 재빨리 팔을 들고 손을 폈다. 태형의 손에 들린 것을 본 그들이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서로의 시선이 얽혔다. 태형이 다시 주먹쥐고 내리려 하자 지민이 그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태형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민을 바라봤다. 너 이거 누구한테 받았어. 지민의 목소리가 차갑기 그지 없어, 태형은 흠칫 놀랐다. 그걸 알아서 뭐하게. 태형의 말에 남준이 눈을 문질렀다.


인간, 너 지금 그런 자존심 세울 때 아니야. 우린 지금 너 지켜주려고 그러는거야.

그럼 먼저 사실대로 얘기해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저,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하나도 모르겠거든요. 갑자기 난생 처음 보는 괴물한테 생명의 위협을 당한 것도 무서워 죽겠는데 이렇게 네 명한테 둘러싸여 취조 당하듯이 있는 것도 무섭고, 뭐가 뭔지를 모르겠으니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요.

김태형, 이거 어디서 났냐고.


지민이 태형의 손목을 살짝 흔들었다. 이거 그냥 할머니한테 받은거야! 태형이 거칠게 손을 빼내었다. 지민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할머니가 이런 걸 어떻게 아는데. 태형은 말 없이 지민을 쳐다봤다. 자신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과 질문들에 태형은 정신이 없었다. 말도 안되는 상황에 휘말린 것도 머리 아파 죽겠는데 난생 처음 보는 사람들은 자신을 몰아붙이고 있다. 입술만 잘근잘근 씹던 태형이 결국 입을 열었다.


우리 할머니, 무당이었어. 그래서 부적으로 받은거야. 

허, 우습지도 않네. 감히 인간 따위가 운명에 손도 대고.

뭐?

너 그 구슬이 무슨 의미인지는 알기나 해?


지민이 턱짓을 태형의 손을 가리켰다. 태형은 주먹 쥔 손에 힘을 더 주었다. 그냥 건강하라고 준거겠지. 말 하면서도 입가가 부르르 떨리는게 느껴졌다. 태형은 이미 직감했다. 할머니가 왜 그렇게 당부에 당부를 했는지, 제 팔찌를 보자마자 그들이 왜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 단순한 팔찌는 아닐거라고 생각했다. 다만, 이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인지는 감이 오지 않았다.


모르는게 당연하지. 잘 들어. 그건 인간이 관여할 팔찌가 아니야. 너희 할머니는 그 얄팍한 팔찌로 감히 네 운명을 거스르려 했어. 그게 얼마나 큰 일인지 너는 감도 안오겠지.

......

여태까지 그 팔찌가 살아있는 것도 신기하다. 네 영력, 그 팔찌가 감당할 수준이 아니거든. 

영력?


그 할머니는 설명도 제대로 안해줬구먼. 태형의 반응에 윤기가 중얼거렸다. 얘기 하겠어요, 사신에게 묶이는게 싫어서 팔찌까지 채웠는데. 호석이 윤기의 말에 대꾸했다.


어쨌든 너를 보호해줬던 그 팔찌는 이제 없어졌으니 선택권도 없지.

... 무슨 선택.

내가 처음에 너한테 말했었지.

......

내 옆에 오면 명줄 짧아진다고.


순간 오싹함이 온 몸에 퍼졌다. 태형은 잔뜩 굳은 얼굴로 지민을 바라봤다. 지금 나 협박 하는거야? 태형의 물음에 지민이 피식 웃었다. 한낱 인간한테 내가 왜 협박을 하니. 그의 말에 순간 욱한 태형이 빽 소리를 질렀다. 아까부터 계속 인간 인간 그러는데 그럼 너는 대체 얼마나 대단한 존재시길래 그딴식으로 말하는데?

나? 지민이 차가운 눈으로 태형을 바라봤다. 무언가 보이지 않는 힘이 태형의 몸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숨 쉬기가 힘들어졌다. 태형은 지민을 쳐다봤다. 자신은 눈치 없는 사람이 아니다. 대충 지민이 어떤 애인지 본능적으로 감이 왔다. 믿을 수 없는 일을 너무 많이 봤다. 그럼에도 믿고 싶지 않았다.


사신(死神).


허. 태형은 허탈한듯 탁 숨을 놓았다. 손에 힘이 빠지면서 구슬들이 바닥에 투두둑 떨어져 사방으로 튀었다. 그 날 봤던 것은 꿈이 아니다. 오늘 본 것도 환상은 아니다. 모든게 현실이었고 사실이었다. 팔찌로 가린 얇은 장벽 너머에는 이토록 말도 안되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태형은 혼란스러운 눈으로 그들을 천천히 바라봤다. 누구하나 장난스러운 기색이 없었다. 진지한 그들의 얼굴을 본 태형은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다. 자자,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양 겁 주지 말고. 호석이 자연스레 태형의 어깨를 감쌌다. 얘는 나나 석진이 형 케이스가 아니니까 처음부터 설명해줘야 한다고요. 호석이 윤기를 보면서 말하자 윤기가 자신을 턱을 쓰다듬었다. 이유 모를 두려움에 몸을 잘게 떨고 있는 태형을 보자니 영 못미더워 윤기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지민은 태형의 앞에 다가가 섰다. 나랑 계약 해. 뜬금없는 지민의 말에 태형이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무슨... 계약.

내가 너를 보호해줄게. 대신 너는 나한테 힘을 빌려주면 돼.

... 무슨 개소리야.

넌 나 없으면 앞으로 끊임없이 아까 그 존재한테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될거야. 너를 보호해주던 팔찌가 부서져서 힘이 드러나버렸어. 걔보다 훨씬 더 사악하고, 무서운 애들이 네 힘을 가지려고 점점 몰려오겠지. 이번에는 운 좋게 살아남았다고 해도 언제까지 그렇게 네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지 아무도 몰라.

그게 무슨 소리냐고.

그게 네 운명이라고. 그 얄팍한 팔찌를 만들면서까지 부정하고 싶어했던 운명. 보기 좋게 실패했지. 한낱 인간이 바꿀 수 있는 운명이 아니야. 네 할머니가 어리석었어. 차라리 어렸을 때부터 만났더라면 네 몸 하나 지킬 수 있는 능력 정도는 생겼을텐데.

이상한 괴물한테 쫓기는게 무슨 운명이야!


태형이 악을 지르자 지민이 꾹 입을 다물었다. 하. 윤기가 작게 한숨을 쉬며 호석을 바라봤다. 호석은 살짝 어깨를 으쓱였다. 이 팔찌가 내 운명을 바꾼다고? 존나 웃기지도 않네. 태형은 발 밑에 굴러다니는 구슬을 세게 밟았다. 단단해 보이던 구슬은 생각보다 쉽게 바스라졌다. 태형의 눈에도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지민은 그 부서진 구슬 사이에서 맑은 기운이 퍼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고작 이런 기운을 모아놓은 걸로 저 엄청난 힘을 숨기려 했다니, 어리석기 그지 없다.


웃기지마. 나 여태까지 영혼을 봤으면 봤지, 그딴 이상한 것들에게 목숨 위협 받은 적 한번도 없었거든? 네가 뭔데 내 운명 운운하면서 계약 하니 마니 하는건데. 계약? 웃기고 자빠졌네. 정확히 그게 뭔지도 모르는데 내가 덥썩 하자고 하겠냐?

야. 네가 뭐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

넌 선택권이 없어. 이 계약에는.


태형은 할 말을 잃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납득이 가지 않았다. 애초에 명줄 짧아진다는 소리가... 이거였어? 태형의 작게 떨리는 목소리에 지민은 잠시 그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 때는 팔찌에 가려 너를 제대로 못봤을 때고, 지금의 넌...


나한테 묶인 운명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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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사실 판타지도 좋아합니다

사신인 지민이가 보고 싶어서 쓰는 글

되게 여러가지가 짬뽕 되어 있어서

엔딩을 보기는 힘들듯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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