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살의 태형은 할머니 집 마당에서 그 팔찌를 받고있다. 알겠니 태형아? 절대 이 팔찌를 빼내면 안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빼면 안돼. 이 팔찌가 너를 지켜 줄 것이야. 팔찌를 빼는 순간 네 운명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 명심해라, 태형아 넌 그냥 인간이 아니다.
태형은 그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게 뭐라구 나를 지켜줘, 할무이? 난 왜 그냥 인간이 아니야?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은 기억나지 않는다.
할머니가 태형을 혼내고 있다. 너는 그렇게 사람을 볼 줄 모르는 것이냐? 내가 그렇게 묶었는데 너는 대체 어떻게 된 애가 힘이 묶이지를 않는 것이야. 모르는 척 해. 너에게 아무 이유 없이 오는 사람들은 모른 척 하라고. 안돼. 네 스스로 구분 할 수 있을 때까지 그냥 아무하고도 엮이지 말거라.
할머니는 엄하셨고 태형은 그런 할머니를 무서워했다. 주위에 몇 없던 친구들까지 할머니는 쫓아내버리며 역정을 내신다. 감히 근본 없는 것들이 우리 손자한테 접근을 해? 영원히 구천을 떠돌고 싶나보지?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섬뜩한 표정을 짓는 할머니는 무서웠다. 할머니는 자신을 자주 나무랐고, 태형은 본인이 왜 혼이 나는지 이유도 모른채 그 꾸중을 다 듣고 있다.
초등학교에 들어간 태형은 인간과 인간이 아닌 존재를 구분하지 못해 결국 입을 다물었다. 저 구석에서 친구들끼리 놀고 있는 모습을 보기만 했다. 재밌겠다. 그런데 또 사람이 아니면 어떡하지. 외로움과 쓸쓸함, 부러움과 같은 감정들이 마구 뒤섞였다.
중학교 들어갈 때 즈음 되어서야 인간의 것과 아닌 것들이 구분이 되기 시작한다. 태형은 자신의 비밀을 숨겼고 친구들이 다가왔다.
주위가 온통 새까맣다. 자신은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있다. 제 앞에는 누군가의 뒷모습이 보였다. 어쩐지 익숙한 뒷모습이다. 천천히 다가갔다. 손을 뻗었다. 손가락 끝이 그의 등에 닿으려 할 때 즈음, 그가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리면서 살짝 휘날리는 머리카락이 순식간에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마주친 두 눈동자가 먹처럼 새까매서 오히려 반짝였다. 그의 등 뒤에 달빛이 내렸다. 어두컴컴한 주위에 그만 빛났다. 그의 붉은색이 눈에 띄었다. 어느새 그의 옷은 교복이 아니라 온통 새까만 옷으로 변해 있었다. 눈 아리는 햇빛이 아님에도 눈이 부셔서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누구야? 태형이 작게 속삭이듯 물었다. 미묘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웃는 듯한 모습이 보였다. 얼굴이 점점 보이기 시작한다. 아.
아아악!!!!! 태형은 마치 악몽을 꾼 사람처럼 깜짝 놀라며 벌떡 일어났다. 하아... 식은땀이 난 듯한 느낌에 태형은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무슨 꿈이 내 인생을 다 보여주냐... 딱히 무서운 꿈은 아니었지만 왠지 기분이 안좋았다.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느낌이 오히려 기분 나쁘게 만들달까. 특히 마지막은 마치 현실처럼 생생하게 기억에 남았다. 너무 생생해서 정말 그게 현실인 줄 알았다. 꿈에 나온 그 애는 분명 지민이었다.
지민이 생각나니 또 머리가 아파지는 기분이다. 아직도 어제의 일을 잊을 수 없다. 사실 아직까지도 그게 정확히 어떤 일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너무 정신이 없었고 새로운 사실들에 머리가 과부화 걸린데다가 평화롭던 제 일상들이 순식간에 호러 스릴러로 변했다는 것까지 알아버려서 혼란스럽기만 하다. 푸르스름한 새벽 빛이 창을 타고 들어왔다. 동이 트기 시작하는지 어둠이 서서히 물러나고 있었다. 일어날까 좀 더 고민하다가 결국 침대에서 일어났다. 17년 동안 차고 있던 팔찌가 갑자기 없어져서 허전함만 느껴졌다. 괜히 팔찌를 차고 있던 부분만 감싸 잡아보았다.
별 다를 것 없는 등굣길이었다. 여전히 평화로웠고, 제 옆을 지나치는 학생들은 여전히 똑같았다. 그런데 왜. 왜 이렇게 오늘따라 다르게 느껴지는 건지. 태형은 제 왼쪽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을 더 주었다. 그 때 바닥에 흩어졌던 구슬들을 모아 작은 유리병 안에 넣어뒀었다. 구슬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이 사라지고 부서졌다. 그런 거 모아봤자 도움 안돼. 지민의 말에 그를 째려봤었다. 애들이 지민이한테 다가가지 않았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귀신을 보기 때문이 아니다. 그냥 싸가지 없어서 가까이 안가는 거야. 태형은 확신했다.
너 어제 되게 큰 일 있었다며.
말도 마. 별 미친...
태형은 아무 생각 없이 말하려다 입을 꾹 다물었다. 자기한테 말을 건 저 애는 분명히 사람이 아니었다. 두어걸음 앞서 나가 자신을 보고 있는 그 얼굴이 비싯비싯 웃고 있는게 보였다. 태형은 무시하고 그를 지나쳤다. 뒤에서 따라오면서 계속 쫑알거렸다. 알만하다, 그러게 왜 사신을 건들이니 한낱 인간이. 마지막에 그가 하는 말에 태형은 욱해서 홱 뒤돌아봤다.
네가 뭘 안다고 쫑알거려! 내가 그 애를 건든게 아니라, 그 애가 나를 건들였어!
태형은 자신이 소리치고 자신이 놀랐다. 주위에 등교 하고 있던 애들이 힐끔힐끔 태형을 보면서 자신을 피하는 것이 느껴졌다. 이마를 짚었다. 귀신이랑 말 섞어봤자 자신에게 이익이 오는 것은 없다. 미친놈 취급만 받지, 무시하는게 상책이다.
사신이 왜 인간을 건들이는데? 아무 이유 없이 그럴리가 없잖아. 그들은 인간의 일에 관여하면 안될텐데. 너 그냥 인간 아니야? 제 뒤에서 쫑알쫑알 거리는 존재에 결국 태형은 구석진 골목으로 몸을 돌렸다. 그가 따라왔다. 이래서 말을 거는게 아니었는데. 태형은 속으로 한숨을 쉬면서 그를 쳐다봤다. 야.
안그래도 어제 일 때문에 나도 머리 아파 죽을 것 같거든. 너까지 그렇게 하지마라 진짜. 나도 몰라. 나도 지금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하나도 모르겠으니까 따라오지마. 나, 너 성불 안시켜. 내 옆에 있어봤자 너한테 도움 될 거 하나도 없어.
성불 어려운 일 아니야. 내 모습만 보이면 분명히 할 수 있어.
그러니까 안한다고. 나, 너희 같은 존재랑 존나 상종하기 싫거든? 나 그냥 평범한 사람이고 싶다고. 알아들어? 너희 일에 끼어들 생각, 절대 없어. 이제 이상한 괴물까지 보이기 시작해서 안그래도 빡치는데.
태형은 제 머리를 쓸어넘겼다. 너, 팔찌 없어졌네. 그의 말에 태형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어제 부서졌는데. 태형이 말하자 그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너 정말...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구나.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뭐?
내가 잘못 찾아왔네. 그 팔찌 때문에 몰랐어. 그렇게까지 거부하면 너 탈난다.
뭐가.
태형의 물음에 그는 답을 해주지 않고 그대로 사라졌다. 야. 야! 끝까지 말은 해줘야 할 거 아니야!!! 태형의 큰 소리만 울려퍼졌다. 씨발 도대체 뭐야... 어제부터 알 수 없는 일 투성이라 머리가 다 아파왔다.
직감적으로 예감했다. 어제 이후로 제 삶은 180도 변할 것이라는 것을. 제 인생은 귀신을 보기 시작할 때부터 평범한 생활을 꿈 꿀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어야 했다.
태형은 옥상에서 지민과 마주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왠지 모를 동질감에 친해지고 싶었지만 동질감은 개뿔, 자신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였다. 더 이상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목숨의 위협을 받으면서 살고 싶지 않았다. 생각해봤어? 지민의 물음에 태형은 헛웃음을 뱉었다. 생각해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언제는 내 운명이 너한테 묶였다며. 선택권도 없다며.
응, 없지.
뭘 더 생각해보라는거야.
언제 계약할까.
뭐?
너 마음의 준비는 해야할 거 아니야. 뭐, 빨리 계약할수록 서로에게 좋긴 하지만.
나 오늘도 귀신한테 이상한 소리를 들었어. 자기가 잘못 찾아왔대. 팔찌 때문에 몰랐대. 계속 거부하면 탈난대.
잡귀가 잘 가르쳐 줬네.
그게 무슨 뜻이야. 정확히 내가 뭘 하면 되는거고 그 계약은 뭘 의미하는 건데. 그 계약을 하면 내 목숨 지켜줄 수 있어?
너 되게 목숨에 목숨건다. 지민의 말에 태형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야, 죽고 싶지 않은 건 누구나 당연한 거 아니야? 나 하루아침에 뭔지 모를 괴물한테 죽을 뻔 했어. 음 모르겠네. 지민의 대답에 태형은 순간 그의 머리를 때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그래 사신이 인간의 마음을 어떻게 알겠어, 그치? 어쩐지 잔뜩 비꼬는 듯한 태형의 말에 지민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너 나 놀리냐?
헹. 한낱 인간이 감히 사신님한테 놀려서 어쩌게요? 제 목숨은 두 개가 아니라서 말이죠.
야, 너 비꼬는거지.
그렇게 들렸다면 제가 다 죄송하네요. 그 고귀한 사신님 심기를 거슬리게 만들었다니.
그만해라, 진짜. 죽여버린다.
어쩐지 지민은 정말로 자신을 죽일 수 있을 것 같아서 입을 다물었다. 아 머리야. 지민은 인상을 찌푸리며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참 나 머리 아픈게 누군데. 태형은 그를 노려봤다. 내가 너 때문에 내 인생이 다 꼬였어, 알아? 지민이 이어서 하는 말에 태형은 진심으로 어이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야, 지금 누구 때문에 내 인생이 다 꼬였는데!
뭐야, 그게 나 때문이라는 거야 지금?
그럼 너 때문이지 누구 때문이야! 너만 없었으면 난 귀신을 볼지언정 그런 목숨의 위협을 받을 일은 없었어.
어이가 없네. 그게 네 원래 운명이야, 내가 그런게 아니고. 그러게 누가 그렇게 태어나래?
네 멋대로 내 운명을 정하지마!
지민은 결국 입을 꾹 다물었다. 태형은 씩씩 거리며 지민을 노려봤다. 네가 어떻게 알아, 사신은 뭐 인간의 생사에 그렇게 마음대로 관여해도 되는거야? 운명? 그럼 씨발 내가 당장에 죽으면 그것도 운명인거냐? 어? 말해봐, 사신. 아 그래, 너는 사신이니까 사람이 언제 죽는지도 알겠네. 말해보라고, 내가 언제 죽는지!
태형의 윽박에 지민은 입술만 잘근잘근 씹었다. 우리, 더 이상 엮이지 말자 너나 나나 그게 더 나은 것 같으니까. 태형은 거칠게 옥상문을 열고 나갔다. 철문은 큰 소리를 내며 닫혔다. 조금의 틈도 없이 굳게 닫힌 철문만 멍하니 보던 지민은 아으으 작게 앓는 소리를 내며 천천히 쭈그려 앉았다. 두 팔을 모아 그대로 얼굴을 묻었다. 지민은 한동안 그 자세로 움직이지 않았다.
씨발 씨발 씨발! 태형은 재빨리 계단을 밟고 내려왔다. 기분이 더러워졌다. 오늘 박지민을 만나는 것이 아니었다. 이미 그 애는 제 삶에 관여를 했고, 더 깊이 들어오려고 했다. 사양이다, 자신은 더 이상 그런 말도 안되는 존재들에게 목숨을 위협 받고 싶지 않았다. 뭔지는 몰라도 그와 가까이 있으면 안된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사신? 그래 내가 본게 있어서 그건 믿는다고 쳐도 내가 왜 자기를 도와줘야해. 이때까지 17년 동안이나 잘 살았다. 팔찌만 어떻게 복구하면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교실이 있는 3층에 다다른 태형은 복도 쪽으로 나가려다 바로 보이는 얼굴에 식겁하며 몸을 숨겼다. 이미 들켰는데. 천천히 제 앞으로 다가오는 그를 보자 태형은 결국 체념의 한숨을 뱉었다. 저는 그 쪽 이름도 모르거든요. 민윤기. 태형의 말에 윤기는 바로 제 이름을 뱉었다.
사신도 이름은 있나보죠.
너 지민이한테 지민이라고 부르잖아.
......
언제는 좋다고 지민이 뒤 졸졸 쫓아다녔으면서 이제와서 그렇게 바로 쌩까냐? 너도 인간이 참 못됐다.
지금 누가 할 소린데요. 지금 제가 뒷통수 맞은 상황이거든요? 처음으로 마음 맞는 친구 사귀나 했는데 난데없이 사신을 보고 내가 하루 아침에 골로 갈 뻔 했는데, 그럼 안 피하고 베겨요?
굳이 따지자면 하루 아침에 골로 갈 뻔 한건 우리 책임이 아니지만.
더 이상 그 쪽 존재들이랑 엮이고 싶지 않아요.
너 어제부터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데.
어쩐지 낮게 착 가라앉은듯한 그의 목소리에 태형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음칫 떨었다. 제 앞에 있는 사람이 사신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인지는 몰라도 그는 되게 사람 소름 돋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유난히 하얀 얼굴도, 차분하게 내려 앉은 검은색의 머리도, 셔츠 단추를 다 잠그고 바지 안에 집어 넣어 단정하게 입은 교복도, 별 다를 것 없는 사람인데도 그가 하는 행동들은 어쩐지 낯설었다. 아, 사람이 아니었지. 태형은 그를 유심히 봤다. 감정 없는 눈은 태형을 보고 있는건지, 아니면 다른 어딘가를 보고 있는건지 알 수 없었다.
네가 그렇게 태어난게 잘못인거지. 이때까지 그 팔찌에 기대어 운명을 거부하고 있어서 네가 평범한 인간이라 착각 하는 모양인데, 너 어차피 그냥 사람처럼 살 수가 없어. 왜? 넌 그냥 사람이 아니니까.
우리 할머니도 무당이셨어. 귀신을 봤다고. 세상에 그런 영적인 존재들을 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 그러면 그런 사람들은 전부 이런 말도 안되는 운명인가?
아니지. 그 사람들은 우리를 볼 수 없지.
......
너는 우리를 볼 수 있고.
윤기는 손가락으로 태형을 가리키고 자신을 가리켰다. 제일 큰 차이는 그거지, 사신을 볼 수 있냐 없냐. 태형은 살짝 떨리는 듯한 제 입술을 감쳐물었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그에게서 조금씩 조금씩 멀어졌다. 17년동안 피했으면서, 또 피하는거야? 그의 목소리에 태형은 두 귀를 꾹 막았다. 피식하고 그가 헛웃음 짓는 표정이 보였다. 어쩌나, 아예 몰랐으면 또 몰라 이미 마주해버린 네 운명에서 더 이상 벗어날 수 있을까. 그의 목소리가 꾹 막고 있는 두 손을 뚫고 귓가에 웅웅거렸다. 태형의 두 눈이 불안으로 흔들리는 것을 본 윤기는 헛웃음을 뱉었다. 마음에 안든다. 옛날부터 지민의 파트너랍시고 나온 인간들은 하나 같이 마음에 안든다. 태형은 무섭도록 차가워진 윤기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다 결국 뒤돌아 바로 뛰쳐갔다. 사람이 지나다니지 않아 한산한 복도에서 윤기 혼자 덩그러니 서 있다 피식 웃었다. 약해 빠져가지고는. 윤기의 혼잣말은 아무에게도 닿지 못한 채 공중에 흩어졌다.
태형은 비과학적인 일을 믿지 않았다. 제일 비과학적인 존재를 보고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하물며 운명을 받아들이라니. 너무나도 뜬구름 잡는 이야기였다. 허. 태형은 공부시간에도 생각나는 그들의 말도 안되는 소리에 자꾸 헛웃음이 나왔다. 하필 국어시간인 지금도 운명 따위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너희들은 운명이 있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들어온 선생님의 질문에 턱을 괴고 있던 태형이 아니요!! 소리쳤다. 교실에 있던 모든 아이들의 시선이 태형에게 꽂혔다. 왜 그렇게 생각해? 선생님의 물음에 태형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말도 안되잖아요, 내 인생이 한 길로 정해져 있다는게. 제 옆자리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지지만 태형은 애써 무시했다.
여러갈래로, 여러형태로, 그렇게 여러가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제 운명이 알고보니 한가지 길 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저는 더 이상 살 가치를 못 느낄 것 같은데요, 전 그 삶을 원하지 않았거든요. 가볍게 던진 질문이었는데 무게가 느껴지는 대답이 돌아온 탓에 선생님은 당황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선생님은 애써 웃어보이며 말했다. 그 삶이 너한테 어떤 삶인지는 아직 잘 모르지 않을까? 그녀의 말은 태형의 굳은 얼굴을 풀기에 역부족이었다. 자,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볼까. 선생님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도저히 공부를 할 상황이 아니었다. 태형은 결국 자리에 엎드려 버렸다. 끈질기게 닿아왔던 한 시선이 그제서야 물러나는 것을 느꼈다.
머리를 식히고 곰곰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었다. 계속 피하기만 해서는 되는게 아니었다. 같은 학교 같은반, 심지어 옆자리기 때문에 피할 수 있는게 아니었다. 제 팔찌가 갑자기 끊기면서 이상한 괴물을 만났고, 박지민 주위 사람들이 그 괴물을 처리해 주었다. 정확히 그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은 확실히 사신이다. 박지민은 계약을 하자고 했다. 하지만 정확히 무엇을 계약 하는지 알 수 없다. 힘을 빌려달라고 했는데 그 힘이 정확히 뭔지도 모른다. 대신 저를 보호해 준다고 했다. 힘을 빌려주는 것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보호를 해준다는 것이 정확히 어떻게 보호해 준다는 것인지, 그 계약을 통해서 얻는 것과 잃는 것은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야 했다. 어쩌면 목숨이 달린 일이었다. 그냥 사람도 아니고 사신과의 계약인데 함부로 할 수는 없었다.
생각해보면 계약이라는 말도 웃긴다. 사신한테 묶인 운명으로 태어나 선택권도 없다면서 그것을 계약이라 칭한다. 계약이 아니라 목숨을 인질로 한 협박 아닌가. 태형은 상체를 일으켰다. 고개를 돌려 지민을 바라봤다. 책을 내려다 보고 있던 지민이 고개를 돌려 태형과 시선을 마주했다. 검은 머리카락이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 아, 아니다. 그 밤에 봤던 지민과 겹쳐 보였던 것이다. 그 때의 지민이 어지간히도 강렬했는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떠나기는 커녕 지금의 지민에게서 딱 붙어 계속 겹쳐 보였다. 뭐. 지민이 작게 속삭였다. 에이. 태형은 못볼 것을 봤다는 듯 혀를 쯧 차며 다시 앞을 바라봤다.
어, 어제 그 친구네. 태형은 앞에서 딱 마주친 그들을 보자마자 얼굴을 확 굳히며 뒤돌아 돌아갔다. 더 이상 그들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 잠깐만 친구야! 한 명이 후다닥 뛰어와 태형의 어깨를 턱 잡았다. 태형은 바로 그의 손을 쳐내고 그를 노려봤다. 호석이었다. 뒤에 있던 남준이 빠른걸음으로 다가와 호석의 손을 잡고 살짝 물러났다. 다들 나한테 왜이래 진짜! 태형의 윽박에 호석의 눈이 커졌다.
내가 그쪽들한테 뭐 죄진 거 있어요? 왜 이렇게 나를 못잡아 먹어 안달이야?
아니 난... 그냥 너랑 대화를 하고 싶어서 그러지.
저 아는 척 하지마요. 나를 언제 봤다고 아는 척이에요.
하지만...
호석은 무어라 더 말하려다 그의 살벌한 눈빛에 결국 입을 다물고 말았다. 엄청나게 싫은가보네... 호석은 멋쩍음에 머리만 만지막 거렸다. 우리 앞으로 만나지 말아요. 태형은 차갑게 뒤돌아섰다. 멀어지는 그의 등만 멍하니 보던 호석은 한숨을 후 쉬었다. 이번에도 영 느낌이 안좋지 않냐. 어쩐지 풀이 죽은듯한 호석의 말투에 남준은 그를 가만히 내려다 보다가 쓱쓱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무 갑작스럽고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그럴거야.
태형은 발걸음을 더욱 빨리 했다. 그 이후로 그 쪽 사람들이랑 이상할 정도로 자주 만나는 느낌이었다. 그들이 일부러 자신을 찾아오는 것인지 우연히 그렇게 만나는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태형의 입장에서는 달갑지 않았다. 알고 보니까 어째 더 많이 보이는 것 같냐. 태형은 짜증스럽게 머리를 쓸어넘겼다. 으이씨, 빨리 집에나 가야지. 하고 생각하는 순간, 갈림길이 나왔다.
어떤 갈림길이든지 그 앞에 서면 망설여진다. 오른쪽으로 갈까, 왼쪽으로 갈까. 오른쪽으로 가면 결국 지날 수 밖에 없는 그 폐건물이 신경쓰이긴 하다. 그 때도 거기서 처음 사신의 모습이었던 지민을 만나지 않았는가. 아, 그 때 그런 지민의 모습을 보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까. 지금 후회해도 소용 없다. 지름길이라는 유혹에 걸려든 건, 결국 본인이었다.
태형은 결국 오른쪽 길을 택했다. 20분 거리의 길을 10분 가까이 단축할 수 있다는 것은 큰 유혹이었다. 이 동네 사람들은 잘 지나다니지 않는 길이었다. 여러가지고 음슴한 기운이 감도는 골목이었기 때문에. 그러고보니 지민이가 집을 갈 때 이 길로 갔었지. 문득 든 생각에 태형은 아차 싶어 머리를 부웅부웅 휘저었다. 그 애 생각은 하지 말자.
여전히 가로등은 별로 없어 깜깜하고 알 수 없는 기운이 감도는 길이었다. 사실 깜깜한 밤에는 이 길을 잘 지나다니지 않았다. 이건 겁이 없고 말고를 떠나서, 태형은 본인이 귀신을 볼 수 있기 때문에 피하는 길이기는 했다. 이 길, 은근 귀신들 많이 다닌단 말이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정말 그 폐건물이 아지트로 쓰이고 있는지 유난히 그 주위에 많이 떠돌아 다니기는 했다. 태형은 최대한 폐건물 쪽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고 최대한 빨리 그 자리를 벗어나려고 했다.
갑자기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바람 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자연스러운 바람 소리가 아니라 마치 무언가가 인공적으로 바람을 가르는 듯한 소리였다. 아, 씨발. 태형은 저절로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다. 이래서 사람들이 학습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건가. 그 때도 여기로 왔다가 낭패 봤으면서 왜 또 여기로 들어왔을까. 그깟 지름길이 뭐라고. 10분 빨리 집에 들어가려고 목숨 거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됐잖아. 태형은 제 머리를 아프지 않게 콩콩 때렸다.
태형은 그 자리에서 멈추어섰다. 괜히 섣불리 움직였다가 또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몰랐다. 피부에 닿는 바람의 촉감과 어디선가 스산하게 들려오는 소리에 청각을 곤두세웠다. 무언가 바닥을 기는 소리 같기도 하고 길다란 천 같은 것이 바닥에 쓸리는 소리 같기도 했다. 그 소리가 어디서 들리는지 알 수 없이 그 주위에서 울리듯이 들렸다. 온 몸이 마비가 걸린듯 움직이기 힘들었다. 제대로 고개도 돌리기 무서워 큰 눈만 굴리며 주위를 살폈다. 아무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제 주위를 떠돌아 다니던 그들은 오늘따라 다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나 참 진짜 인생에 도움이 안돼... 태형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노래 들을까? 갑자기 엄습해온 불안감과 공포감 때문에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해 태형은 혼잣말로 중얼거리면서 주머니에서 폰을 꺼냈다. 이어폰을 찾으려다 귀에 꽂고 가는게 더 무서울 것 같아 결국 바로 음악 어플을 누르는 순간, 몸이 붕 뜨는 느낌이 들었다. 순식간이었다. 굉장히 단단한 무언가가 제 허리를 홱 감고 바로 공중으로 들어올렸다. 폰은 손에서 떨어져 바닥에 툭 떨어졌다. 어, 하는 순간 몸이 날라갔다. 아무런 장치 없이 공중을 나는 기분은 이런 기분인가. 머리는 새하얘져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지도 모르겠다. 날라가는 그 순간이 슬로우모션처럼 느리게 흘러가는 느낌이었다. 밤공기를 가르며 날라간 태형은 옆에 있던 폐건물로 쑥 들어가 바닥에 철퍼덕 엎어졌다. 날린 힘에 의해 바닥에 떨어지고도 뒤로 밀려갔다. 흙먼지가 일어나 태형의 몸 위를 덮었다. 목이 매워 잔기침이 났다. 아오 씹...발! 아파!!! 태형은 잔뜩 쓸린 팔을 부여 잡고 상체를 일으켰다. 폐건물 깊숙히까지 날라온 태형은 제 앞에 보이는 말도 안되는 괴물에 꿍얼거리던 입도 멈추고 잔뜩 굳은 채 멍하니 바라봤다.
원래 창문을 달아놓을 생각이었는지 뻥 뚫린 벽 만큼 바깥이 보였다. 그 중 반은 시꺼먼 무언가로 시야가 막혔다. 그 때 봤던 그 괴물이랑 비슷하게 생겼다. 절망감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막연한 공포심에 이가 딱딱 부딪쳤다. 한쪽 팔을 부여잡고 있는 손에 힘을 꾹 주었다. 쓰라렸다. 마찰로 인한 화상인지, 단순히 긁힌건지 모르겠다.
자신이 운명을 거부한다고 했다. 운명에게서 벗어나려고 한다고 했다. 지랄. 태형은 그럴려던 것이 아니었다. 이미 귀신을 보면서 살고 있다는 것 자체가 기구한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평범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도 최대한 그들을 무시하고 살면 남들처럼 평범한 척은 할 수 있지 않을까 했다. 하지만 이래서는, 괴물에게 목숨의 위협을 받고 사신에게 협박 당하는 인생은 평범한 척도 할 수는 없는 거잖아.
눈물이 났다. 아 씨발 진짜 나한테 왜 이러는데... 서러워졌다. 쓰라린 팔을 붙잡고 울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숨 죽이고 울던 것이, 제 울음소리에 서러워져 더 커지기 시작했다. 저 앞에 보이는 괴물에 제 소리에 반응을 하든 말든, 이제는 좆도 신경 안쓴다. 평생 이러고 살 바에는 그냥 죽고 말지. 이제는 해탈했다. 애초에 말도 안되는 인생이었으니, 죽음도 말이 안되어 봐야 이야기라도 되지. 태형은 다가오는 괴물의 기척을 느끼고 눈을 감은 채 고개를 푹 숙였다.
이 미친 새끼야!!!
껌껌한 눈 속 세계에서 눈부신 푸른빛이 마구 비집고 들어왔다. 태형은 제 귀로 때려박는 익숙한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눈을 떴다. 키아아악!!!! 매우 거슬리는 괴성에 태형은 두 귀를 막았다. 바로 앞에 시꺼먼 옷을 입고 있는 남자가 서 있었다. 여전히 머리는 붉었다. 그가 들고 있는 커다란 대낫은 그 때처럼 예리하기 그지 없었다. 밑에서 올려다 보는 그는 매우 커 보였다. 원래 이렇게 큰 애가 아니었는데. 나보다 작았는데. 곧게 뻗은 다리도, 그의 등도, 대낫을 굳게 쥐고 있는 손도. 그의 존재도 오늘따라 왜 이렇게 커 보이는지. 태형은 멍한 표정으로 그의 뒷모습만 올려다 봤다.
너 이 씨발 미쳤어?! 그가 뒤 돌아 태형을 보자마자 윽박 질렀다. 태형은 놀라 히끅 딸꾹질까지 했다. 분노로 가득 찬 지민의 표정은 말도 아니었다. 순간적으로 아까 그 괴물보다 무섭게 생겼다고, 태형은 생각했다. 지민은 거칠게 제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빛이 거의 없는 폐건물에, 그의 붉은빛 머리만이 빛이 있는듯 존재감을 드러냈다. 마지막 내가 처리한다? 어디선가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지민은 대낫을 바닥에 내팽개치고 태형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태형은 힘 없이 끌려 올라왔다.
너 미쳤어! 왜 안 도망 가고 거기서 그러고 있었는데!
......
바보짓도 정도껏 해! 네가 이런다고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아?
그 말에 태형은 거칠게 그의 손을 쳐냈다. 잔뜩 구겨진 셔츠를 잡아 당겨 핀 태형은 지민을 노려봤다. 아 씨발, 눈물이 눈치 없이 또 나오려고 한다. 서럽다. 그냥 이 상황이 다 서러웠다. 태형은 애써 마음을 추스리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격양된 목소리는 감출 수 없었다.
그럼 씨발 나보고 어쩌라는건데! 내 맘대로 죽지도 못해? 내가 이러고 싶어서 태어난 거 아니잖아! 그래서 내 마음대로 이 연 끊겠다는데 네가 무슨 상관인데!
어, 너 맘대로 못 죽어. 너 나한테 묶였다고 내가 말했지. 네 힘, 네 영혼 다 내거야. 내가 너 해방시켜 준대? 씨발 착각하지마.
씨발, 미친새끼. 내가 왜 네 거야.
너야말로 내 생 말아먹게 하지마. 이제는 존나 짜증나려고 하니까.
네가 내 인생 말아먹고 있잖아, 지금!!!
흐어엉, 씨바아알!!!! 지금 누구 때문에 내가 죽을 위기를 몇 번이나 넘고 있는데!!! 태형은 거의 악을 지르다시피 하며 눈물을 터뜨렸다. 아예 제자리에 쭈그려 앉아 얼굴을 무릎에 파묻었다. 지민은 그제서야 태형의 상태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잔뜩 헝클어진 머리와 옷에는 흙먼지 때문에 더러워져 있었고 팔과 다리에는 쓸려서 울긋불긋해져 있었다. 지민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지민은 어찌 할 바 몰라 손만 우왕좌왕 했다. 손이 민망하게 허공만 맴돌았다.
네 친구는 괜찮아?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지민은 뒤돌았다. 뒷처리를 한 남준과 호석이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지민은 옆머리만 긁적였다. 호석이 고개를 살짝 옆으로 빼니, 지민에게 가려 보이지 않던 태형이 그제서야 보였다. 친구야, 죽을뻔 했는데 다행이야, 진짜 나이스 타이밍이었어. 호석의 말에 태형이 고개를 홱 들어 호석을 노려봤다. 그새 얼마나 울었는지 시뻘게진 눈과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본 호석이 흠칫 놀랐다. 지금 이게 다행이라고?! 격양된 태형의 목소리가 폐건물을 울렸다.
그냥 죽게 놔두지 그랬어!
야!
왜 살렸어? 어차피 평범하게 살지도 못하는데 그냥 죽게 놔두면 어디가 덧나냐?! 왜 이렇게 남의 인생에 참견이야, 진짜!!
지민은 태형의 말에 또 소리를 지르려던 것을 참고 인내심을 가지고 심호흡을 했다. 뒤에서 호석과 남준이 어정쩡한 거리에서 다가가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하다... 호석의 중얼거림에 남준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싫어. 다 싫다고. 뭔 힘을 빌려주고 나를 지켜주고 자시고 그냥 다 지긋지긋하니까 이렇게 마음 조리고 살 바에 인생 끊기로 마음 먹었어. 근데 그것 마저도 너희들이 지금 방해하잖아. 나보고 어쩌라고. 씨발, 진짜 서러워서...
너 못 죽어.
하, 씨발 진짜. 평범하게 살고 싶은 것도 죄냐? 평범한 척도 못해?
네 운명대로 사는게 평범한 인생이야, 병신아.
지민의 말에 태형은 입을 꾹 다물었다. 머리가 아팠다. 팔도 다리도 쓰라렸다.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몸도 근질거렸다. 그런데 이게 평범한 인생이란다. 허. 헛웃음만 나왔다. 지민은 그 자리에 쭈그려 앉아 태형과 시선을 마주했다. 지민은 잔뜩 엉망인 된 태형의 얼굴을 보고 살짝 인상을 찌푸리더니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마구 태형의 얼굴을 닦았다. 아, 아프다고! 태형이 마구 고개를 휘저었다. 끈질기게 따라붙던 그의 손길은 얼추 태형의 얼굴을 거의 다 닦고 나서야 물러났다. 인상을 찌푸린 채 딱딱하기만 한 지민과는 다르게 그가 들고 있는 손수건은 너무 안어울리게 귀여워 태형은 피식 웃어버렸다. 지민은 그의 웃음에 움찔해서는 괜히 민망해 손수건을 주머니에 대충 쑤셔넣었다.
뭐냐, 그 병아리는. 존나 안어울리네.
뭐, 씨발. 내가 산 거 아니야.
뭐, 고딩 때의 너랑은 좀 어울리는 거 같네.
아 내가 산 거 아니라고.
지민은 다리를 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만약에 너랑 계약 하면 난 어떻게 되는건데. 태형의 물음에 지민은 조용히 그를 내려다봤다. 태형도 자리에서 일어나 지민을 쳐다봤다. 그 때, 너 나 구해준다고 했잖아. 태형의 말에 지민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 어떻게 구해주는건데.
아까처럼. 그 괴물들을 죽여주는거지. 정확히 말하면 악령이지만.
악령? 그 괴물이 악령이라고?
자세히 말하면 복잡한데. 어쨌든. 대신 내가 그 괴물들을 죽이려면 힘이 필요해. 그런데 그 힘을 네가 가지고 있어. 그래서 네 힘을 나한테 줘야해. 그게 계약 내용이야.
... 어떻게?
너, 지금 계약할거야?
아니. 이야기 들어보고 생각 좀 해보고.
그럼 말 못하지.
그런게 어딨어!
안할거면 나 간다. 망설임 없이 홱 뒤돌아 가버리는 지민을 잡아세운 것은 남준이었다. 그는 지민의 귀에 무어라 속삭이더니 지민의 인상이 확 찌푸려졌다. 그러더니 고개를 홱 돌려 태형을 노려봤다. 후. 그의 입에서 작게 한숨이 나왔다. 너는 아는지 모르겠는데. 지민이 입을 열었다.
너 지금 힘이 개방 될 대로 개방 되어서 너무 위험해. 특히 이 주위는 령들이 득실거리고.
...뭐야. 갑자기 무섭게.
나도 이제는 한계치고, 이대로 가다가는 둘 다 망해서 어쩔 수 없다.
알 수 없는 말만 중얼거린 지민은 태형의 앞으로 다가갔다. 어느새 그의 손에 거대한 낫이 들려 있어 태형은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대낫과 지민을 번갈아 봤다. 야 시간 끌지 말고 빨리 해. 뒤에서 호석의 목소리가 들렸다. 형들 볼거예요? 지민의 말에 남준과 호석은 어깨만 으쓱했다. 왜, 어차피 피 보고 끝낼 거 아니야? 남준의 말에 태형이 억 소리를 냈다.
피요? 피를 본다고요? 뭔데 피를 보는데!
금방 끝나.
뭐가!!
지민은 대답 하지 않은 채 거대한 대낫을 들어 바로 태형의 심장부근에 정확히 찔러 넣었다. 날이 등을 관통하고 지나가는 느낌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크헉!! 태형은 놀라 앞에 보이는 대낫 막대를 두 손으로 쥐었다. 등 뒤로 통과된 예리한 날이 시뻘게지기 시작했다. 숨쉬기 힘들었다. 이, 허, 헉, 미친, 새끼. 태형이 말을 할 때마다 뚝뚝 끊겨 나왔다. 뒤에서 보고 있던 호석은 자신이 다 아프다는 듯 인상을 팍 찌푸린 채 보고 있었다. 나도 저랬어? 호석의 물음에 남준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지민이가 좀 잔인하긴 하지.
죽을 것 같았다. 거짓말 아니고 진심으로 죽을 것 같았다. 느낌이 너무 이상했다. 가슴, 심장, 등까지 다 관통했는데 피는 나오지 않았다. 대신 숨이 턱턱 막혔다. 숨을 쉬려고 할때마다 심장부근이 욱씬거렸다. 이게 뭐야 씨발 이게 뭐냐고! 태형은 제 손으로 빼고 싶어도 무서워서 이도 저도 못했다. 지민을 죽일듯이 노려봤다. 그 와중에도 태평한 지민의 표정에 이가 부득 갈렸다. 태형이 잡고 있는 막대가 점점 붉어지기 시작하면서 어느 순간 거대한 낫이 전부 붉어졌다. 이거 분명이 내 피 때문이야. 이제 태형은 식은땀까지 나기 시작했다. 여태까지 느껴본 적 없는 생경한 고통이었다. 뻐근한 것 같기도 하고 숨쉴 때마다 가시로 따끔따끔 찌르는 것 같기도 했다. 누군가가 폐를 압축시켜 놓은 것처럼 숨도 제대로 못쉬었다. 김태형. 지민이 불렀다. 자꾸만 눈이 감기려는 것을 억지로 떠 간신히 지민을 바라봤다. 정신 놓지 마. 지민의 말이 머릿속에서 웅웅 거리듯 들렸다.
계약한다. 지민의 말이 다시 들렸다. 아니 씨, 발, 빨리 빼! 태형이 숨을 긁어 모아 간신히 말했다. 지민이 막대를 잡은 부분에서 푸른빛이 나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그 빛이 크게 퍼지면서 팍 사라졌다. 지민과 태형을 중심으로 거센 바람이 일었다. 어느순간 그들을 잇고 있던 대낫은 사라지고 없었다. 태형이 정신을 잃고 쓰러진 것은 그때 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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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는 판타지입니다
사신 얘기 귀신 얘기 1도 모르고
그냥 다 제가 지어낸 거예요
사후세계나 그런 거 다 모릅니다
그리고 유치합니닼ㅋㅋㅋㅋ
그리고 다음화가 언제 나오는지도 모릅니다
아 그래도 제목은 지어줘야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