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뷔민 무제 4



하루가 아무리 좆같이 굴러가도 아침은 항상 오고 세상은 아무렇지 않게 돌아간다. 그러니까, 내가 인생에 어떤 풍파를 겪어도 세상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으며 내가 순식간에 이 세상에 사라져도 세상은 여전히 평화롭게 아침을 맞이 한다는거지.

태형은 눈을 뜨고 커다란 창으로 밝게 들어오는 햇살을 느끼자마자 제 머리를 쥐어뜯었다. 당장 어제 그런 엄청난 일을 겪었는데 마치 아무 일 없었던 양, 평화롭기만 한 아침이 어젯밤과 너무 큰 괴리감이 느껴졌다. 멍하니 침대에 누워 눈만 끔뻑이다가 문득 깨달음에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근데 여기 어디야.




















無在





주위를 둘러봐도 난생 처음 보는 방이다. 태형은 순간 전에 없던 소름을 느꼈다. 씨발 대체 여긴 어디야. 머리가 복잡해져 시야를 가리고 있는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온 몸을 방망이로 두들겨 맞은 것처럼 욱씬거렸다. 아으으... 결국 다시 침대에 누웠다. 팔 하나 들 힘도 없다. 멍하니 하얀 천장만 바라보던 태형은 문득 떠오른 기억에 다급히 제 가슴팍을 더듬거렸다. 어제와 같은 통증은 없었지만 무서웠다. 설마 혈흔으로 딱딱하게 굳은 옷자락을 만지게 되지 않을까, 말도 안되는 크기의 낫에 관통당한 가슴의 구멍에 손이 닿이지는 않을까. 머릿속에는 이런저런 두려움으로 복잡하게 얽혀 당장이라도 머리가 터질 것 같았지만, 겉으로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했다. 아니, 과부화로 열이 오르는 머리와는 다르게 속은 이상할 정도로 차게 식어 침착함을 넘어 냉정한 느낌마저 들었다. 손이 살짝 떨리는 것이 스스로도 느껴졌다. 심장부부근을 더듬거리다 그 주위로 점차 넓혔다. 가슴부근을 다 거친 손은 길을 잃어 방황하는 듯 여기저기 슥슥 만지기 시작했다. 어디를 만져도 그저 매끈하기만 한 제 몸을 느낀 태형은 다시 한 번 상체를 벌떡 일으켜 웃옷을 팍 올려 맨 몸을 보기 시작했다. 어디에도 그 대낫이 관통한 자국이 없었다.

태형은 재빨리 침대에서 나와 방에 붙어 있는 화장실로 달려갔다. 급하게 내려오느라 힘이 빠진 다리 때문에 순간 휘청이긴 했지만 금방 중심 잡고 뛰쳐갔다. 두 다리에 엉켜있던 이불이 태형 따라 침대에 떨어졌다. 반쯤 열린 화장실 문을 거칠게 열어 문이 벽에 부딪쳐 꽝 소리가 났다. 거의 폭죽 터지는 소리와 맞먹는 데시벨에 깜짝 놀랄만도 하건만, 태형은 지금 '대낫이 관통한 자국'에 정신이 팔려 그런 소리 따위에 시선을 돌릴 시간이 없었다.

벽 한 쪽에 커다랗게 붙어있는 거울을 바라봤다가 제 처참한 몰골을 보고 기함을 했다. 대체 어떻게 뒹굴었으면 이렇게 엉망진창일 수가 있을까. 태형은 재빨리 물을 틀어 대충 세수하고 머리를 정리했다. 거지꼴이 따로 없었다. 제가 입고 있는 누구의 것인지 모를 잠옷만 깔끔했다.

이제야 좀 진정이 된 태형은 뒤늦게 빡침이 올라왔다. 태형은 뭐라도 다 때려부술듯한 표정으로 화장실을 나와 방문을 거칠게 열고 나갔다. 박지미이인!!! 우레와 같은 그의 목소리가 온 집에 울렸다. 낯설기만 한 집이지만 두 눈이 분노에 가린 태형에게는 그 어느 것도 보이지 않았다. 눈에 팍 힘을 준 채 집 안 곳곳을 다닌 태형은 저 멀리 보이는 익숙한 뒷모습에 망설임 없이 다가가 바로 멱살을 잡아챘다. 아침댓바람부터 멱살 잡힌 지민은 당혹스러움에 숨도 헙 들이키며 그를 바라봤다.


너 이새끼야 나한테 뭔 짓 했어!!!

버, 벌써 일어났어?

벌써 일어났어? 버얼써 일어났어어?? 그게 지금 나한테 할 소리냐?

아니, 아직 몸이 좀 아플텐데.

그래 씨발 네가 나 자는새에 신나게 방망이질을 했는지 아주 그냥 온 관절이 끊어질 것 같고 욱신거려 죽겠다. 이게 네가 원하는 거냐? 네가 원하는 거냐고!


어, 말해보라고!! 아예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들어대는 통에 지민은 정신을 못차리고 태형에게 휘둘렸다. 자, 잠시만! 지민은 그에게 흔들려 정신 없는 와중에도 그를 진정 시킨답시고 태형의 팔뚝을 탁탁 쳤다. 잠시만이고 나발이고 빨리 어떻게 되는건지 설명이나 해!! 분노로 앞이 먼 태형은 진정이고 자시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지금 겪고 있는 이 상황이 황당하고 어이가 없고 말도 안되 기가 찰 뿐이었다. 지민이 힘을 주어 그를 세게 밀쳐내고 나서야 태형이 잡고 있던 멱살을 놓고 두어걸음 물러났다. 어후 씨발 갑자기 어디서 이런 힘이 난거야. 지민은 제 목을 잡은 채 잔기침을 몇 번이나 했다.

좀 진정이 된 태형은 그제서야 주위를 둘러봤다. 기다란 식탁에 나란히 앉아있던 사람들이 전부다 하던 행동을 멈추고 벙한 표정으로 태형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나같이 입을 떡 벌리고 있는 것이, 어지간히도 놀란 듯 싶다. 태형은 그들과 눈이 마주치자 바로 고개를 숙여 인사하며 슬금슬금 게걸음으로 지민의 옆에 붙었다. 아, 안녕하세요... 갑자기 기어들어가는 듯한 태형의 인사에, 그들도 대충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들의 얼굴이 제대로 보였다. 분명 박지민과 연관이 있고 자신을 보러왔던 사람들이었다. 태형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아침댓바람부터 모이는 것이 참 대단하다 싶었다. 아침 먹을래? 그 중 한명이 시리얼을 푼 숟가락을 든 채 물었다. 태형은 어색하게 웃어보이기만 했다. 남자는 그대로 제 입에 넣고 무어라 물었다. 입 안에 시리얼이 잔뜩 들어간 상태라 약간 어버버거렸다.


너 근데 몸 아프지 않아? 괜찮아?

아파요.

대단하다. 원래 하루만에 막 걸을 수 없을텐데.

... 예?


태형은 그의 말에 순간 불안감이 확 끼쳐왔다. 원래 하루만에 걸을 수 없다고? 그럼 난 그런 고통을 참으면서까지 이렇게 서 있는건가. 원래 이 정도로 아프면 못움직이는 건가. 태형이 갈피를 못잡고 동공지진 일어나는 것을 끝까지 본 남자가 푸핫 웃음을 터뜨렸다. 너 진짜 웃긴다, 내가 그렇게 말했다고 애써 아프려 하는 건 뭐야. 남자의 말에 태형이 그를 째려봤다. 저 지금 엄청 심각하거든요.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지 알지.


나도 잘 알아.

뭘 잘 알아요. 사람도 아니면서.

나도 사람이야.

예?!


태형은 거짓말 안하고 사람이 놀라서 눈이 튀어나올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눈 튀어나올 정도로 놀란 적도 거의 없었던 것 같다. 남자는 태형의 반응에 깔깔깔 웃으며 거의 뒤로 넘어갔다. 옆에 있던 다른 남자가 그를 잡아주지 았았더라면 분명 그는 당장에라도 뒤로 넘어갔을 것이다. 남자는 간신히 숨을 고르며 말을 이었다.


나는 정호석. 보다시피 나도 인간이고.

보다시피...

그래. 나 그래도 사람 같지 않아?


태형은 구태여 그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분명 저를 포함해서 5명이 있는 자리에 사신인 박지민 하나 뿐인 것은 아닐테고 태형은 아닌 척 하면서 그 커다란 눈을 대굴대굴 굴리며 남은 사신이 누구일까 스캔 하기 시작했다. 그의 눈빛을 단박에 알아차린 호석이 피식 웃었다. 그렇게 경계 할 필요 없어, 우린 다 같은 편이니까. 그의 말에 태형은 순간 헛웃음이 나왔다. 같은 편이라니. 이제는 꼼짝없이 그들에게 묶였다고 생각하니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허무감만 들어찼다.

허허. 감정 없는 웃음만 내뱉으며 쓰러지듯 의자에 앉았다. 그냥 머리가 아팠다. 머리도 아프고 온 몸도 쑤시고 그 와중에 내가 왜 이런 고통을 느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이유 모를 회의감마저 들었다. 태형은 이마를 짚었다. 그들이 있는 부엌이 조용해졌다. 이 와중에 또 자신을 배려하겠답시고 찍소리 하나 내지 않는 그들 때문에 태형은 자신이 대체 어떤한 감정으로 바라봐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이제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조차 모르겠다. 화는 나는데 이제는 그 화가 누구에게 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만큼 태형은 이 상황에 적응이 안되었고, 여전히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 했으며, 여전히 혼란스러워 했다.


나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건데...


한참 뒤에 한마디 툭 나온 태형의 말에, 식탁에 앉아 있던 그들이 태형을 힐끔 돌아봤다. 고개를 숙인 채 이마만 짚고 있던 태형이 후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어 그들을 바라봤다. 아침에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어서인지, 어제 겪은 그 일의 후유증이 너무 커서인지 그의 얼굴이 초췌해 보였다. 간신히 내뱉은 듯 목소리에도 느껴지는 괴로움에 그들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섣불리 말을 꺼내지 않았다. 내가... 태형은 목이 매이는 듯 잠시 말을 멈추고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대체 뭘 해야 하는 건데.

그는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에 수긍한 것이 아니었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 막막함이 온전히 묻어나왔다. 하아. 지민도 작게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제 파트너는 항상 이래왔기 때문에 이제는 별스럽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아무렇지도 않은 것은 아니었다. 매 번 만날 때마다 운명을 거부하고 자신을 거부해 온 파트너 때문에 이제는 지친 것도 사실이었다. 분위기는 가라앉을 때로 가라앉았다. 새로 시작하게 된 사신 파트너는 여전히 제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고, 그런 그와 계약을 맺은 지민은 어찌 되었든 그와 함께 해야한다. 둘 다 좋지 않은 표정에 다른 사람들이 차마 끼어들지도 못하고 그저 분위기만 보면서 힐끔힐끔 눈치 볼 뿐이었다.


인간.


식탁 끝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전부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팔꿈치를 식탁에 대고 손바닥으로 관자놀이 부근을 받친 채 태형을 보고 있던 윤기였다. 저 형은 또 무슨 말 하려고. 호석이 옆에 앉아있는 남준의 귀에다 작게 속삭였다. 남준은 그러지 말라며 호석의 어깨를 토닥였지만 내심 그도 속으로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저 형은 인간의 감정이라곤 요만큼도 이해 못하는 존재니까. 지금도 태형이 뭐 때문에 저렇게 혼란스러워 하고 화를 내고 거부하는지 조금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태형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윤기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불안한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윤기는 삐딱하게 기울이고 있던 머리를 들어 제대로 태형을 쳐다보았다.


언제까지 그렇게 투정만 부리고 있을래. 너만 지금 인생 꼬였어? 쟤도 너랑 상황 똑같았던 건 마찬가지야.


윤기가 턱짓으로 호석을 가리켰다. 갑자기 자신에게 시선이 쏠려 호석은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태형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태형 본인도 잘 알고 있었다. 이 이상 자신이 처한 상황을 거부하는 것은 말도 안되는 투정일 뿐이었다. 그래서 더욱 혼란스러웠다. 목숨에 위협을 느끼고 같은 반 학생이 사실은 사람이 아니었던 데다가, 그가 들고 다니는 커다란 대낫에 가슴을 관통 당하고 이제 파트너니까 함께 해야한다는 말을 듣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런 비현실적인 일들을 전부 이해하고 수긍하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태형은 제 자신이 답답했다. 어떻게 해야할까 갈피를 잡지 못했다. 여러 복잡한 생각과 심정이 머릿속과 마음속을 마구 헤집었다. 태형은 짜증스러움에 결국 두 손으로 머리를 마구 헝클이더니 쾅 식탁을 내려치며 쭉 앉아있는 그들을 바라봤다. 잔뜩 헝클어져 정신없는 머리는 신경쓰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되는건데.


아까와는 달리 결연한 말투였다.










태형은 마루에 걸터앉아 멍하니 정원만 바라봤다. 정신 없어서 여기가 어딘지 제대로 알지 못했는데 알고보니 그들이 사는 곳이었다. 사신들은 돈도 잘 버나보지, 이런 으리으리한데서 다 살고. 태형은 두 손으로 턱을 괸 채 무심한 표정으로 일관했다. 정원은 꽤나 넓었다. 아니, 정원뿐만이 아니라 이 집 자체가 굉장히 넓었다. 한국에 이런 곳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아직 많이 혼란스럽지? 위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태형이 고개를 들었다. 호석이 그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를 따라 천천히 시선을 내린 태형은 그가 자리에 앉는 것을 보고 다시 정원으로 고개를 돌렸다. 둘 사이에는 잠시 말이 없었다. 태형은 물어보고 싶은게 많았지만 무엇부터 어떻게 물어봐야 할지 몰라 고민했다. 호석은 그런 태형의 마음을 다 이해한다는 듯 살풋 웃어보였다.


윤기형이 아까 한 말 있잖아.

윤기형?... 아아... 그 사람...

그래, 그 사람. 좀 차갑다고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원래 그런 사람은 아니니까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마.

그 사람 말이 틀린 건 아니니까...


태형은 말 끝을 흐리며 마른세수를 했다. 결국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마음 먹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아니었다. 아직 모르는 것과 납득이 안되는 것 투성이었다. 이제는 어제의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 때의 고통을 잊은 것도 아니었다. 심장 부근에 숨이 턱 막히는 듯한 욱신거림이 남아있는 것 같았다. 태형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께로 손이 올라가 입고 있는 옷을 움켜쥐었다. 호석은 그런 미세한 움직임도 슬쩍 다 보고 있었다.


각성한 거 많이 아팠어?

각성?

지민이 무기를 네 몸에 꽂아 넣은 거 말이야. 좀 무자비한 방법이긴 하지만 그게 제대로 먹히긴 해서.

... 그 방법 말고 다른게 있어요?

......

박지민 이 새끼 어딨어.


호석은 바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태형의 다리를 부여잡았다. 지민이한테는 그게 최선이어서 그랬어!! 무슨 최선? 나 얼마나 아팠는지 알기나 해요? 지금도 막 온 몸이 욱신거린다고요! 태형은 다리를 탈탈 털었지만 호석은 끈질기게 붙어왔다. 네가 너무 거부해서 지민이가 어쩔 수 없이 그런거야! 호석의 말에 태형은 씩씩거리며 호석을 내려봤다. 일단 진정하고 앉아봐. 제 옆자리를 탁탁 치면서 말하는 호석에, 태형은 말 없이 호석을 내려보다가 결국 자리에 앉았다. 호석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또 격분한 태형이가 지민이를 찾으러 갔다가 얼마나 또 둘이 왕왕거릴지 안봐도 뻔했다. 둘의 싸움은 옆에서 지켜보는 쪽이 더 곤욕이다.


형은 어떻게 각성했는데요?


태형의 물음에 호석의 얼굴이 와자작 굳었다. 바로 풀어지긴 했지만 순간적으로 굳어진 얼굴을 태형이 보았다. 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던 호석이 입을 열었다.


어쨌든 너희들이 할 수 있는 방법은 아니야.

뭔데요.

그냥... 기를 공유하는 거야.

무슨 기?


호석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어떻게 기를 공유하는데요? 꼬치꼬치 캐묻는 태형에 식은땀까지 삐질삐질 나는 기분이었다. 누가봐도 당화스러워 하는 기색이 역력한 호석의 표정에 태형은 의문만 늘어갔다. 아니 대체 어떻게 했길래 저렇게 말하기를 꺼려하는거지.


어차피 이미 각성 했는데 다른 방법이 궁금해 할 필요가 뭐가 있어.

형이 그렇게 빼니까 더 궁금한데요?

그냥 네가 한 각성이 제일 확실하고 강해.

아 또 그런게 차이가 있어요?

기를 공유하는 거 보다 피를 공유하는게 네가 봐도 확실해 보이지 않냐?

아...


태형은 무의식적으로 제 가슴팍을 쓸었다. 이제는 가슴의 통증도 없고 말끔했지만 어제의 기억이 어지간히도 충격적이었던지 아직도 잊지 못하는 듯 했다. 근데요, 사신이 세 명이면 사람도 세 명이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태형의 물음에 호석은 또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윤기 형 파트너가 있긴 한데 지금 냉전 중이라.

예?

둘이 싸웠거든. 그래서 파트너가 집을 나갔어.

... 어떻게 위로를 해줘야 할지 모르겠네요.

뭐 또 금방 들어올거야. 둘이 죽네 사네 해도 기본적으로 상성이 끝내주게 잘 맞는데다가 사실 서로 없으면 또 못살아.

아... 네...

지민이가 말해줬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신이랑 파트너랑 오래 떨어져 있으면 안되거든. 뭐 그 둘은 굳이 그런 거 아니더라도 원래 떨어져 있으면 금방 서로를 찾는 사람들이지만.


호석은 푸핫 웃으며 말했다. 둘이 싸우는 거 보면 진짜 유치하다니까. 형 처음에 각성 했을 때 기분 어땠어요? 태형의 물음에 호석은 웃고 있던 표정을 풀고 진지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사실, 나는 그런 것에 대해서는 너한테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어.


... 왜요?

너랑 상황이 달랐다고 해야하나. 나는 남준이가 필요했어, 절박했고. 애초에 너처럼 뭐가 이상한지 구분 할 정도로 머리가 자란 것도 아니었고.


호석아! 집 안 쪽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호석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안, 궁금한게 더 많을텐데 나머지는 지민이한테 물어봐. 호석은 태형의 어깨를 두어번 두들기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형! 태형은 몸을 돌려 애처롭게 그를 불렀지만 호석은 이미 집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호석이 가고 언제 와있었는지, 팔짱을 낀 채 문틀에 기대어 있는 지민과 눈이 마주친 태형은 안본 척 슬쩍 몸을 제자리로 돌려 다시 정원을 바라봤다. 아이고야, 집 진짜 좋다. 괜히 혼잣말을 하며 아닌 척 해보지만 지민은 이미 마루로 나와 태형의 옆자리에 앉았다. 많이 이야기 했어? 항상 듣던 목소리와는 다르게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태형은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지민을 바라봤다. 태형을 돌아본 지민은 태형의 표정을 보고 인상을 팍 찌푸렸다. 뭐야, 그 표정은. 다시 돌아온 까칠한 지민의 목소리에 태형의 표정이 질리다는 듯 풀어졌다. 그럼 그렇지.

태형은 턱을 괸 채 가만히 지민을 바라봤다. 노란색 맨투맨을 입고 있는 지민은 학교에서 보던 것과 같이 흑발이었다. 입만 안열면 애가 참 순해 보이고 좋은데.


뭘 그렇게 봐.

에이씨, 진짜. 너는 그냥 입을 열지마.


틱틱대는 지민의 말에 태형이 팍 짜증을 냈다. 진짜 이 새끼는 입만 열면 성격 파탄이야. 서로 기분만 상해 둘 다 홱 정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둘 사이에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가끔 지저귀는 새소리만 어디선가 들려올 뿐이었다. 이제 바빠질거야. 지민이 한마디 툭 던졌다. 태형은 안그런 척 하면서 귀 기울여 들었다. 그의 귀가 쫑긋쫑긋 움직였다.


각성을 좀 성급히 한 것은 인정해. 너도 나도 급해서 그런거니까.

......

그... 미안하다.


태형이 놀라 두 눈이 동그랗게 떠지며 고개를 홱 돌려 지민을 바라봤다. 지민은 힐끗힐끗 태형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아주 미세한 움직임이었지만 태형의 눈에 잘 띄었다. 네가 사과를 할 줄도 아네. 태형이 멍한 표정으로 혼잣말 하듯 중얼거리자 지민이 욱했다. 야, 나도 양심이 있고 죄책감이라는게 있거든?


아아, 하도 인간인간 거리길래 사신은 그런게 없는 줄 알았지.

진짜 죽고 싶냐?

너는 정말 예쁜 말 하는 법부터 배워야겠다.

누가 할 소리를. 잘해주려고 해도 꼭 초를 쳐요.

......

왜. 계속 왜 그렇게 보는데.

야.

뭐.

우리 화해하자.


태형은 세운 무릎에 얼굴을 기댄 채 손을 내밀었다. 지민은 멍한 표정으로 그가 내민 손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태형을 바라봤다. 들어보니까 파트너랑 사신은 오래 떨어져 있으면 안된다던데. 지민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호석이 형이 가르쳐 주었나보다. 가만히 제 손만 내려다 보고 있는 지민에, 태형은 손을 한 번 흔들었다. 얼른. 태형의 재촉에 지민은 천천히 그의 손을 맞잡았다. 악수한다고 잡은 손이 태형의 손에 덮혀 거의 가려지자 태형이 큭 웃었다. 웃지마. 지민은 괜히 어색해서 한소리 했다. 어쨌든 계약한 입장인데 잘해보자. 손을 자연스럽게 빼며 하는 말에 지민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태형은 다시 정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 연못도 있었네. 태형이 작게 혼잣말 하는 것을 가만히 듣고만 있던 지민이 입술을 달싹였다. 야. 지민이 작게 불렀다. 태형은 지민을 살짝 바라봤다. 


너무 그렇게 억지로 노력 안해도 돼.

... 어?

아무렇지 않은 척 해도 어차피 이해 못 할 일이란 거, 알고 있으니까.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된다고.

......

네가 뭘 걱정하고 있는지, 뭘 불안해 하고 있는지 알아. 어쨌든 끌어들인 건 나니까 지켜줄게. 너 안 죽어.


지민의 말에 태형이 헛웃음을 뱉으며 마른세수를 했다. 너 계속 그거 신경쓰고 있었냐? 태형의 물음에도 지민은 대답이 없었다. 입 꾹 다문 채 앞만 보고 있는 지민의 표정을 가만히 보던 태형이 살짝 한숨을 쉬며 머리를 쓸어넘겼다. 보면 볼수록 지민을 모르겠다. 지민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에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솔직히 아직 겁 나는 거 맞아.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니까 네가 신경 써주는 것도 알아. 근데 너도 나 필요한 거 아니야? 네말대로 나를 끌어들인 건 내가 필요하니까 그런 거일텐데 나도 뭔가 도움은 되야 할 거 아니야.

......

너 혼자 다 짊어질 생각 하지마. 우리 일이야. 적어도 내 몸 지킬 수 있도록 강해질게.

......

아 그래도 아직은 무서우니까 나 좀 도와줘...


결연한 표정으로 강하게 말하던 태형이 마지막에 애교부리듯 풀어지는 말에, 지민도 결국 피식 웃었다. 










***










이번에는 괜찮냐.


문틀에 기대 서 있던 윤기가 지민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지민은 마루에서 두 무릎을 세워 앉아 있었다. 무릎 위에 가볍게 얹은 머리가 살짝 옆으로 기울어졌다. 살짝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하다.


적어도 옛날보다는 낫겠죠.

그래, 애가 겁은 많아도 깡은 있어보이더라.

모르죠. 또 이러다 나중에 안한다고 도망갈지.

그러면 죽여야지 뭐.


지민이 무슨 말을 그렇게 햐냐는 듯 인상을 팍 찌푸리며 윤기를 돌아봤다. 그의 표정을 본 윤기가 따라 인상을 찌푸렸다. 나 더 이상 너 미련맞을 짓 하는 거 못 봐. 윤기의 목소리에는 장난기라곤 없었다. 단호하기 그지 없는 그의 말에 지민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윤기는 웅크려 앉은 지민의 뒷모습을 가만히 내려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항상 걱정하고 있어.

내가 앤가.

애지. 너 전정국보다 애야.

인간이랑 비교하지 마요.

김석진이랑 정호석도 엄청 걱정하고 있어. 인간 주제에.

형은 석진이 형이랑 빨리 화해나 해요.

싸운 적 없어.

웃겨. 석진이 형이 일주일이나 안들어 오는 거보면 각 나오는데.


윤기는 입술을 감춰물었다. 할 말 없죠? 지민이 고개를 돌려 윤기를 바라보며 말했다. 윤기가 미간을 살풋 찌푸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안 싸웠어, 걔가 지멋대로 나간거라니까. 끝까지 부정하는 윤기를 보던 지민이 에휴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나지만 석진이 형도 진짜 파트너 운 없어요. 윤기의 어깨를 토닥이곤 집 안으로 들어가는 지민의 뒷모습만 멍하니 바라보던 윤기가 별안간 빽 소리를 질렀다. 야, 너 그거 무슨 뜻이야! 내가 별로라는 거야?!

네 파트너 갔어? 거실에서 티비를 보던 호석이 지민을 발견하고 물었다. 지민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부엌으로 들어갔다. 근데 아직 각성한지도 얼마 안됐는데 떨어져도 되는거야? 호석의 물음에 지민은 물을 따르던 손을 우뚝 멈추었다. 이제서야 자신의 상황을 조금씩 받아들이고 있는데, 거기에 또 초 치는 건 좀 아니다 싶어서요. 지민의 대답에 호석이 지민이 있는 곳을 힐끗 쳐다봤다.


그래도 그런 건 바로 이야기 해야 하지 않을까. 앞으로 있을 일에 대비해서도 그렇고.

어떻게 바로 여기서 살라고 그래요. 아직 자기가 뭔지 정확히 알지도 못하는데.

나중에 일 터지면 너무 늦어, 지민아. 피를 공유한 상황에 지금 태형이가 얼마나 위험한지 뻔히 알면서.

......

네 맘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지민이는 너무 과거에 매여 있는 것 같아.

......

벌써부터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두려워 하지마.


지민은 떨리기 시작한 손을 애써 무시하며 천천히 들고 있던 컵을 식탁에 내려놓았다. 호석의 말은 구구절절 다 맞는 말이었다. 어쨌든 책임을 지겠다고 이야기를 한 상황에 이 집에서 나가는 것을 막지 않은 것은 잘못된 일이었다. 떨리는 두 손을 천천히 올려 얼굴을 묻었다. 태형은 아마 모르겠지만 지민도 태형만큼이나 지금까지의 상황들이 혼란스럽기만 했다. 호석의 말마따나 과거에 얽매여 있었다. 지민은 여전히 무언가에 도피중이었다.

호석아, 이거 이상해!! 멀리서 들리는 남준의 목소리에 호석이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우당탕탕 남준에게 달려갔다. 너 내가 아무거나 건들이지 말라 그랬지!! 호석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거실은 어떤 소음도 없이 조용해졌다. 지민은 천천히 손을 내렸다.










술렁술렁거리는 목소리가 너무 크게 들려 태형은 결국 이어폰 볼륨을 더 높혔다. 그런 일이 있어도 귀신 보는 건 여전하구나. 태형은 괜히 음악목록을 내리면서 생각했다. 귀신들의 잡담을 듣고 싶어서 들은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계속 들렸다. 이 동네 귀신은 요새 자신이 화제거리인지 보이는 귀신마다 자신을 보고 놀라며 쑥덕거린다. 나 참 무슨 구경났냐고요. 태형은 괜히 인상을 팍 찌푸렸다. 눈이 마주친 귀신이 황급히 시선을 내리깠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자기 괴롭히면서 이야기 들어달라고 하던 것들이 사신이랑 인연 좀 닿았다고 이렇게 달라지나 싶다.

그런데 왜 혼자 다닌데? 아이고야 목숨줄이 두렵지 않은갑지. 파트너 있다고 그러는거지 뭐. 긴가민가 했는데 정말 그거였네. 어쩐지 기가 심상치 않더라니까. 저렇게 단독행동 하는 그것도 처음 봤네. 사신이랑 어지간히도 안친한가 보지.

여전히 음악을 헤치며 파고드는 그들의 목소리에 태형은 결국 짜증스럽게 이어폰을 빼냈다. 뒤에서 쑥덕거리지 말고 할 말 있으면 앞에서 하지? 아무도 보이지 않는 삭막한 골목에 태형의 목소리만 울렸다. 씨익씨익 거리며 주위를 홱홱 둘러보던 태형은 온 몸으로 짜증을 내며 거칠게 걸음을 옮겼다. 너 그렇게 혼자 다니면 위험하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귓속에 팍 꽂혔다. 태형은 다시 주위를 둘러봤다. 아무도 없었다. 아니 모습이라도 보여야 할 거 아니야.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머리를 헝클였다.

갑자기 이유 모를 공포감이 엄습했다. 아 씨발 진짜... 태형은 자꾸 그 이상한 괴물을 만났던 일이 떠오르자 마음이 급해졌다. 귀신들이 자꾸 쓸데없는 말을 해서 더 그렇다. 얘네들은 사람 가지고 장난 치는 걸 좋아하는 애들이다. 분명 자신이 겁을 먹고 벌벌 떠는게 재밌어서 더 그러는 것이다.

사신한테 묶였으면 인간도 아니었네. 귓가를 스치는 조용한 목소리에 걸음을 빨리 하던 태형이 우뚝 멈추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전히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당연하지, 인간이 어떻게 사신한테 묶여.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깔깔깔깔 소름끼치는 웃음소리가 사방팔방으로 퍼졌다. 태형은 한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휘청였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간신히 중심을 잡은 태형이 천천히 머리에서 손을 뗐다. 무재네. 어디서 나는지 모를 목소리가 웅웅 울렸다. 무재였어. 무재라니. 이제 깨달은거야? 각성한지 얼마 안됐나보지? 피 냄새가 진동을 하네. 어린 무재네.

무재가... 뭐야. 태형의 중얼거림에 머리가 아플 정도로 속닥거리던 목소리가 한순간에 사라졌다. 무언가 제 머리를 꾹꾹 누르는 것 같던 압박감이 한순간에 사라져, 태형은 후 숨을 크게 내쉬었다. 속이 안좋아 비틀거리며 담벼락에 턱 기대었다. 점점 가라앉던 해는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하늘이 점점 진하게 물들고 있었다.


한낱 잡귀들이 떠들어대는 소리 듣지마.


익숙한 목소리에 태형은 숙이고 있던 고개를 팍 들었다. 익숙한 얼굴이 보이자 어쩐지 마음이 편안해지는 기분에 태형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민은 눈썹 한 쪽을 꿈틀했다. 아 다행이다, 너라도 있어서. 태형은 삐딱하게 기대고 있던 몸을 바로했다.


잡귀들이 떠들어대는 거 하나하나 상대해 주지 말라고.

알았다고. 근데 너 왜 나왔냐.

......

나 데려다 주려고?

... 몰라 새끼야. 빨리 집에나 가.

뭐야, 온 목적이 있을 거 아니야.

아 네가 또 밤길 무서워 벌벌 떨고 있을까봐 왔다, 됐냐?

뭐? 야 나 그렇게 찌질이 아니야! 그래도 애기 때부터 온갖 귀신은 다 봤었는데.

내 앞에서 질질 짜던 애가 누군데.

사람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일인데 그럴수도 있지.

빨리 앞장이나 서.


지민이 손을 휘휘 저으며 하는 말에 태형이 입술만 달싹이다 결국 발을 뗐다. 여전히 고요하기만 한 골목길이었지만 아까보다 한결 마음이 편해져 태형은 작게 허밍까지 했다. 지민은 그런 태형을 힐끗힐끗 쳐다봤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는데 계속 곁눈질로 힐끗힐끗거리는 시선이 느껴져 태형은 결국 아아! 소리치며 지민을 봤다. 갑작스런 그의 괴성에 흠칫 놀란 지민은 곧 인상을 팍 찌푸리며 태형을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왜왜왜 뭐 왜 뭐. 뭔 말이 하고 싶은 건데.

아니...

그럼 그렇게 남 눈치를 보지 말던가. 뭐하는거야.

... 티났어?

지금 나랑 장난치냐.


지민은 괜히 머리를 만지작 거리고 흠흠 헛기침을 하는 등 답지 않게 머뭇거리자, 태형은 의아해져 고개만 갸웃거렸다. 야 진짜 너 답지 않게 왜그래. 태형이 지민을 툭툭 건들며 말했다. 대체 얘는 자신을 어떻게 보고 있었던건지 지민은 헛웃음만 나와 피식거렸다.


사실 너한테 말 못한게 있어.

그게 한 두개겠냐.

......

뭔데.

같이 살자.

우와아악!!!


태형은 그 말을 듣자마자 양 팔을 거세게 문지르며 온 몸을 베베 꼬았다. 지민은 자신이 말해놓고 쪽팔림에 얼굴이 시뻘게졌다. 미동도 않고 꿋꿋히 서 있는 지민과는 다르게 태형은 마구 움직이며 몸을 비틀어댔다. 제정신이야? 태형이 훅 다가와 지민의 이마에 손을 갖다대었다. 큼지막한 손이 지민의 눈까지 다 덮었다. 눈을 가린 손을 치우자 그의 얼굴이 바로 앞에 보였다. 나 제정신이야. 지민은 자신도 부끄러운 걸 아는지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태형은 그제서야 얼굴을 뒤로 빼며 살짝 굽혔던 허리를 폈다.


프로포즈가 저돌적이네.

빨리 대답이나 해. 답은 응 밖에 없어.

넌 진짜 볼때마다 사람을 놀래켜. 뭐가 진짜 너인지 모르겠어.

나랑 같이 살아야 널 지켜줄 수가 있어.

목숨으로 협박하는거야?

협박이 아니라 사실을 얘기 해주는거야.


흐응. 태형은 지민은 가만히 내려다 보았다. 말은 술술 잘하면서 눈은 못마주친다. 어둑한 저녁빛 사이에서도 그의 홍조 오른 볼이 보였다. 엄청 부끄러워 하네.

사실 태형의 입장에서는 거절 할 이유가 없었다. 물론 부모님의 허락도 받아야 하겠지만 지금 당장에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언제 어디서 그런 괴물을 만날지도 모르고, 아직 많은 것이 불안정 하기 때문에 여러모로 그 집에 있는 것이 훨씬 더 나았다. 아까도, 집에 나오자마자 잡귀들이 못살게 굴지 않았던가. 지민을 만나자마자 거짓말처럼 사라진 그것들에 내심 안도했던 것도 있었다. 어쨌든 아직 태형은 지민이 없으면 안되었다. 이것도 계약인거지. 태형의 물음에 지민은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태형은 손을 내밀었다. 이번에 지민은 망설임 없이 그의 손을 맞잡았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태형이 고개를 숙이며 말하자 지민도 어설프게 따라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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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만에 제목을 지어봤어요
앞에 적혀 있다시피 無在입니다!
무제와 똑같은 음인 무재죠ㅋㅋㅋ
아마 5화가 나온다면 무재 5로 나올 것 같습니다
아직 갈 길이 한참 먼 무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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뷔민 이런 거 보고 싶다



시점은 현재가 아니라 좀 많이 미래. 태형이 의사고 지민이가 고등학생. 근데 지민이는 난치병을 앓고 있어서 학교를 안다님. 주치의인 태형이랑 같이 살면서 태형이가 케어해주고 지민이는 병을 치료중. 둘이 나름 알콩달콩 잘 살음. 사귀고 있거나 사귀는 건 아닌데 그 썸 같은 그런 묘한 분위기.

지민이 병은 사실 불치병이었음. 약도 없고 치료법도 없는. 부모님은 지민이를 꼭 살리고 싶었음. 가지고 있는 것은 돈 뿐이고 지민이는 힘들게 힘들게 얻은 외동아들임. 이대로 가다가는 이 병의 원인이 뭔지도 모르고 아들을 잃게 생기니까 부모님은 강수를 둠. 치료법을 찾을때까지 아이를 재우자. 부모님이 엉엉 울면서 지민이 손 잡고 그런 얘기를 하니까 지민이도 거절을 못하겠는거임. 자신도 그렇게 일찍 죽고 싶지 않고. 그래서 수많은 고민 끝에 결국 부모님의 말을 따르기로 함. 자신이 자고 있다가 병의 치료법이 발견되면 그 때 깨우기로. 지민이는 제일 친했던 친구한테 이 사실을 알림. 나 잠깐만 자고 올게. 자고 와서 내 병이 완치되고 건강해지면 그 때 다시 네 앞에 설게. 그 친구는 당일, 지민이한테 와서 펑펑 움. 내가 의사가 되서 방법을 찾겠다고 꼭 너를 다시 깨우겠다고. 너를 위해서 꼭 의사가 되겠다고. 지민이는 고개를 끄덕임. 꼭 깨워줘. 그리고 기한없는 잠을 잠.

지민이는 기억이 거의 없음. 자신이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다는 사실도 모름. 그냥 수술 때문에 마취하고 일어난줄 앎. 몸도 정신도 그 상태에 머물러 있음. 몇십년이 지났는데도. 거의 없는 기억에 생각나는 건 친구 한명 밖에 없음. 내가 친구가 한명 밖에 없었는데 이름이 아저씨랑 똑같았어요, 김태형이라고. 아저씨, 옛날에 태형이랑~. 이거 태형이가 맨날 해줬었어요. 옛날에 태형이랑 뭐 했었는데. 태형은 지민이가 말하는 태형의 이야기를 들을때마다 머리를 쓰다듬음. 그랬니? 그 친구는 어떤 친군데? 그 친구 보고 싶어? 이렇게 질문도 하면서.

어느날 지민은 태형이 잠시 외출한 사이에 청소한다고 온 집안을 헤집다가 우연히 태형의 방에서 낡은 상자를 발견함. 그 안에 공책이 많았음. 낡은 것부터 산지 얼마 안된 것 까지. 안에 내용 보니까 일기임. 지민은 제일 최근 일기를 봄. 어제 일기임. 흥미로워서 제일 낡은 공책을 봤는데 날짜가 꽤 옛날임. 날짜 세어보니 아저씨가 고등학생때. 이러면 안되는걸 알지만 지민은 너무 궁금해서 중간 중간 넘기면서 다 훑어봄. 그리고 모든 것을 알게 됨.

태형이는 고등학생 때부터 지민이를 좋아했음. 그래서 지민이가 잠든다고 했을때 울면서 다짐한 거 지키려고 정말 이 악물고 공부했음. 그 전에는 공부에 전혀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죽을듯이 공부해서 의사가 된거임.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고, 목표도 하나밖에 없었음. 지민이를 다시 깨우기 위해. 지민이를 깨워서 완치시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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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생각해뒀던 소재
하지만 허접한 내 글재주로는
평생 쓸 일 없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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슙민 도깨비 조각글



지민은 몇걸음 앞에 서 있는 남자를 쳐다봤다. 초롱초롱한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거렸다. 아저씨. 지민이 말했다. 남자는 조금의 미동도 없이 지민을 쳐다보기만 했다. 묘하게 풀린 듯한 그 눈은 이상하게 사람을 홀리는 듯 했다.


아저씨 좀 이상해요.


지민의 말에 남자가 피식 웃었다. 왜? 남자의 물음에 지민이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음... 사람 안같아요. 지민의 말에 남자의 표정이 묘하게 굳었다.  어디가 이상한가? 남자가 물었다. 지민은 고개를 다른 쪽으로 갸웃했다. 음... 말투도 이상해요. 참으로 순수하고 솔직한 아이의 말들에 남자는 결국 피식 웃었다.


꼬마 김서방은 참으로 솔직하군.

저 박지민이에요.

음?

저 김씨 아니구 박씨예요.


남자는 빵터졌는지 커다란 손으로 입을 가리고 끅끅거리며 웃었다. 접힌 눈이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와아. 지민은 반짝반짝한 눈으로 그 남자를 올려다 봤다.


아저씨는 웃으니까 더 예뻐요.

응?

아저씨는 웃고 다녀야겠다.

김서방은 앙큼하기 그지 없군.

김서방 아니라니까요.


지민의 입이 불퉁하게 튀어나왔다. 통통한 볼이 씰룩씰룩 움직였다. 미안하네, 내 버릇이라. 남자는 머쓱함에 머리를 긁적였다. 근데 아저씨 왜 우리 집 앞에 있어요? 지민의 말에 남자는 엄지만 들어 기대고 있던 담벼락을 가리켰다. 이곳이 그대의 집인가? 지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배가 고파서 그러네만 혹시 허기를 채울 것이 있는가.

음...

부탁하네.


따라오세요. 지민은 망설이다 결국 집으로 남자를 들였다. 할아부지가 곤경에 처한 사람은 도와줘야 한다고 했으니까. 근데 우리집에 뭐 먹을 거 있는지 잘 몰라요. 지민의 말에 남자는 상관 없다 말했다. 지민은 제 뒤를 따르는 남자를 힐끗 쳐다봤다. 아저씨한테는 뭔가 알 수 없는 느낌이 났다. 뭐지? 뭘까. 7살짜리 꼬마가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딱 마음에 드는 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지민의 집은 대대로 내려오는 커다란 한옥집이었다. 첫째만 대대로 물려 받는 한옥집은 지금 친할아버지의 소유였고 그 이후에는 지민의 아버지가 물려받게 될 예정이었다. 오래된 집인만큼 가보와 같은 소중한 것과 장소가 많았다. 남자는 으리으리한 기와집을 두리번거리며 힐끗힐끗 집구경을 했다. 기... 아니, 꼬마 박서방은 양반이었구먼. 남자의 말에 지민은 뒤돌아 그를 쳐다봤다. 양반은 옛날 사람 아니에요? 눈을 끔뻑이며 말하는 그의 표정은 순수하기만 했다. 남자는 어떻게 말을 해야하나 고민하다 결국 고개만 저었다. 아니다.

여기 앉으세요. 지민이 식탁 의자를 꺼내며 하는 말에 남자는 식탁에 앉았다. 제가 냉장고를 자주 열지 않아서 뭐가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말 끝을 흐리며 냉장고 문을 연 지민이 우뚝 선 채 멍하니 냉장고만 바라봤다. 지민이 냉장고 문 틈으로 얼굴을 빼꼼 내밀어 남자를 바라봤다. 남자는 턱을 괸 채 지민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훔쳐보다 걸린 사람마냥 화들짝 놀란 지민이 후다닥 고개를 돌려 냉장고를 바라봤다.


아저씨.

그래.

저어기... 진짜 먹을게 없어서...

거기 묵이 있지 않느냐.

아, 이거요? 이건 진짜 아무 맛도 없는데...


지민은 냉장고 깊숙히 놓여 있는 묵 한 사발을 꺼내다 흠칫 놀라며 다시 남자를 바라봤다. 남자는 여전히 턱을 괸 채 아무런 움직임을 않고 지민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저씨 어떻게 알았어요? 지민의 물음에도 남자는 어깨만 으쓱였다. 배고픈데 그거라도 주지 않겠는가. 남자의 말에 지민은 망설이다 결국 묵을 꺼냈다. 근데요, 이거 진짜 맛없어요. 남자의 앞에 묵을 올려둔 지민이 무슨 엄청난 비밀인양 얼굴을 가까이 해 남자의 귓가에 소근거렸다.


소시지라도 있으면 좋은데. 제가 소시지를 좋아해서요.

그것은 맛나는가보지?

그럼요. 그것만 있으면 밥 한그릇 그냥 먹어요.

나는 이걸로도 충분하네.


지민은 젓가락과 간장 종지도 챙겨 남자의 앞에 가지런히 두었다. 남자의 맞은편에 앉은 지민은 두 손으로 제 턱을 받친 채 땡글땡글한 눈으로 남자을 얌전히 쳐다보기만 했다. 남자는 한젓갈 두젓갈 묵을 먹기 시작했다. 지민은 그가 먹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든 생각에 아차했다. 앞에서 입을 두 손으로 막은 채 안절부절 못하는 지민에, 남자는 결국 그를 쳐다보았다. 갑자기 왜 그러는가,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남자의 말에 지민은 두 손을 축 내리고 곤란한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봤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닌게 아닌데.

진짜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저씨는 그것만 맛있게 드시면 돼요.

......


남자는 다시 젓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민은 점점 그의 입 속에서 사라지는 묵을 멍하니 보기만 했다. 그래... 묵은 또 사면 되니까... 할아부지가 곤경에 처한 사람은 도와주어야 한다고 했으니까... 저 사람이 저렇게 맛있게 먹는데 어떻게 도로 뺏어... 여러 생각이 그 조그만 머리 속에 다 스쳐 지나갔다.

사실 그 묵은 제사음식 같은 거였다. 일년에 몇번씩 집 뒷쪽에 있는 작은 사당에서 제사를 하는데 남자가 먹은 것이 그 제사에 올릴 메밀묵이었다. 그러고보니 3일 뒤에 제사인데 그걸 위해 사놓은 듯 했다. 에잇, 몰라. 지민은 머리의 잡생각을 떨치고 남자가 먹는 모습만 바라봤다.


근데 그거 맛있어요?

음...

나는 그거 아무 맛도 안나던데.

나는 좋아하네만.

정말요?

그럼.

그럼 다행이네요.


턱을 괸 채로 다리를 살랑살랑 흔들던 지민이 생긋 웃었다. 남자는 지민을 보다가 마지막 묵 한입을 입 안에 넣었다.


근데 아저씨는 왜 옛날 말투를 써요?

옛날 말투?

막 계속 뭐했네. 뭐 했는가 이렇게 쓰잖아요.

아 버릇이 되어서 그만. 다음에 김서방을 만난다면 고치도록 하겠네.

아 그리고 저 김서방 아니예요. 나 박지민인데.

그래, 박서방 내 그것도 기억하도록 하겠네.

서방이 아니라. 지민이.

그래, 지민.


기어코 남자의 입에서 제 이름이 나와서야 지민은 히히 웃어보였다.










---

지민의 집은 도깨비터였다. 아주 오랜 조상 때부터 도깨비를 모시며 터를 다스려오면서 대대손손 그 터를 이어왔다. 도깨비 터는 흉 아니면 길이라더니 옛날 조상님이 어지간히도 잘 다스렸던지, 지금까지 그 부를 유지할 수 있었다. 어쨌든 지민은 그 부를 누렸고, 자신이 그 터를 이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도깨비 이야기와 터를 다스리는 법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던 지민은, 그저 옛날부터 내려오는 하나의 전래동화처럼 치부했다. 지금이 무슨 옛날 옛적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도 아니고, 도깨비라니. 21세기에서 살고 있는 지민에게는 대대로 내려오고 있다는 그 이야기가 고리타분 할 뿐이었다.

애초에 말도 안되는 일이다. 도깨비는 그냥 저어기 서양의 좀비처럼 누군가 만든 존재일뿐, 실제일리가 없었다. 지민은 여태까지 그런 생각을 해왔다.



오늘은 집안에 제사가 있어 야자를 뺐다. 거의 한 두달에 한 번 있는 제사라 그때마다 빠져야 했는데 그 일 때문에 할아버지가 직접 학교까지 찾아와 선생님과 신경전을 벌였다. 이제 고등학생인데 집안 행사도 중요하지만 공부도 중요하지 않겠냐는 선생님과, 우리 집안은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이 있기 때문에 그 전통을 따라야 한다는 할아버지의 신경전은 그 당시 학교 애들이 다 찾아와 보러오기까지 했었다. 교무실 앞에서 평온한 목소리로 맞받아치는 선생님과 할아버지의 말솜씨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덕분에 중간에 낀 지민만 죽을 맛이었다. 결국 할아버지가 승을 거두셔서 지민은 한달에 한 번, 제삿날에 야자를 뺄 수 있었다. 이 사건 이후, 지민은 유서 깊은 종갓집 도련님이라는 루머가 돌기까지 했다. 제 집이 종갓집은 아니지만 지민은 굳이 그 소문을 해명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딱히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지민의 집을 실제로 본 적이 있던 몇 친구들의 증언까지 힘을 실어 그 루머는 정말 사실인 것처럼 퍼졌지만. 아무렴 어때. 지민은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집으로 향하는 길에 노을져서 하늘이 붉었다. 제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내 키도 저만큼 늘었으면 좋으련만. 지민이 혼잣말로 중얼거리다 피식 웃었다. 늘어진 그림자를 벗 삼아 그림자를 보며 걷다 머리 끝과 맞닿은 또 다른 그림자에, 지민은 고개를 들었다.

제 집 담벼락에 누군가 옆으로 기댄 채 팔짱을 끼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온통 붉은 하늘 때문에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지민은 눈을 가늘게 뜨며 천천히 다가갔다. 그와 가까워지면서 얼굴이 보이자 지민은 우뚝 자리에 멈추었다. 되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마치 어제처럼 기억이 선명했다. 참 옛날부터 이상한 사람이라고, 지민은 생각했다.


꼬마 김서방.

......

아니, 이제 꼬마가 아니군 그래.

김서방도 아니라니까요.

그렇지. 아... 그러니까...

......

지민아.


그의 입에서 나온 제 이름이 부드럽게 퍼졌다. 한번도 그런 느낌을 받은 적 없었는데 어쩐지 제 귓가를 간질이듯 낯간지러워 지민은 괜히 제 귀를 긁었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에 지민은 입을 열었다.


아저씨 오늘도 배고파서 왔어요?

그건 아니고.

그럼요?

... 그리움에 사무쳐 왔다.

...네?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지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표정은 아무런 변화가 없는데 그가 뱉은 말에는 알 수 없는 쓸쓸함이 잔뜩 묻어 나왔다. 제 속이 다 공허할 정도로, 그의 말에 그리움이 흘러 넘치는 듯 했다. 아저씨는 늙지를 않네요. 지민은 바로 주제를 돌렸다. 그의 그리움을 파헤치고 싶지 않았다.


제가 어렸을 때 봤던 그 얼굴 그대로인 것 같은데.

나와 그대의 시간은 다르게 흐르기 때문이다.

......


이쯤되니 점점 그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어렸을때부터 그렇게 느꼈었다. 이제 두번째 보는 그를, 너무 친근하게 대하는 제 자신도 의문스러웠다. 거의 남과 다름이 없는데, 어째서 그렇게 몇 년은 만난 사람처럼 편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거지? 그래, 너무 익숙했다. 한두번 만난 사이가 아니라 이전부터 쭉 시간을 공유한 사이처럼, 그가 너무 익숙했다. 이상해, 난 저 아저씨의 이름도 모르는데. 자연스럽게 든 생각에 지민은 또 놀랐다. 그래, 이름도 모르는데 어떻게.


아저씨 이름은 뭐예요?


그래서 물었다. 원래는 처음 만나서 물어봐야 할 질문을, 이제서 물어봤다. 남자는 지민의 물음에 살짝 벌어져 있던 입을 꾹 다물었다. 어쩐지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의 표정이 미묘했다. 뭔가 회상하는 듯 한 표정이었다. 아련한 추억을 좇는, 그런 분위기였다. 그리고 씁쓸해 보였다. 보는 사람이 더 안타까울 정도로, 그는 묘한 씁쓸함을 보였다.


내 이름은 윤기다.

......

민윤기.


아. 지민은 갑자기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제 눈물이 당황스러워 양손으로 재빨리 눈가를 닦았다.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답답해, 가슴께를 퍽퍽쳤다. 아까 아저씨의 표정이 너무 슬퍼 보여서 그런거라고, 제멋대로 생각했다. 미안해요. 지민은 이유 모를 사과를 하며 남자를 지나쳐 집 안으로 들어갔다. 남자는 몸을 돌려 집 안으로 들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다, 지민이 들어가고 텅 빈 골목과 집 대문만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남자의 눈 앞에는 여전히 아련하게 지민의 잔상이 남아있었다. 해가 완전히 저물고 하늘이 점점 어두워지고, 골목에 하나 둘 불이 켜질 때 즈음 되어서야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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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제가 좋아하는 곳입니다.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온다. 바람길따라 노란빛 꽃들이 살랑살랑 흔들린다. 꽃내음이 온 곳에 퍼진다. 그는 쭈그려 앉아 있는 지민을 바라봤다. 해맑게 웃으며 제와 닮은 꽃을 보고 있는 지민을 보자니 절로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도 가벼히 나는 웃음을 굳이 가리지는 않았다.

아 그러고보니 여태 대감의 호를 알지 못했네요. 지민의 말에 그는 흠칫 놀랐다. 아... 그가 생각지도 못한 말에 우물쭈물 하는 새에 지민이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 지민의 눈이 반짝반짝 빛이 났다. 매번 도깨비 대감이라 부를 수 없는 노릇이잖습니까. 점점 붙어오는 지민에, 그가 한걸음 두걸음 뒤로 물러났다.


제가 대감을 어떻게 부르면 좋을까요?

......

호도, 이름도 알지 못하니.

그대가 지어주지 않겠는가?

네?

그대가 내 이름을 지어주게.


그의 말에 지민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지민을 가만히 내려다 보던 그가 피식 웃으며 그가 쓰고 있는 복건의 끝을 만지막거렸다.


제가 감히 대감의 호칭을 정해도 되는 것입니까?

아무렴.

음... 윤기.


윤기는 어때요? 지민의 말에 그가 살풋 웃었다. 그의 웃음에 지민도 따라 웃었다. 대감은 웃는 모습이 예쁩니다. 지민의 말에 윤기가 바로 웃음을 지웠다.


사내한테 예쁘다고 하는 거 아니다.

아무렴 어떻습니까. 뭇 사람이라면 전부 예쁜 법입니다.

그렇군. 자네 말이 맞다.









사내도 그리 예쁠 수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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뷔민 무제 3



5살의 태형은 할머니 집 마당에서 그 팔찌를 받고있다. 알겠니 태형아? 절대 이 팔찌를 빼내면 안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빼면 안돼. 이 팔찌가 너를 지켜 줄 것이야. 팔찌를 빼는 순간 네 운명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 명심해라, 태형아 넌 그냥 인간이 아니다.

태형은 그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게 뭐라구 나를 지켜줘, 할무이? 난 왜 그냥 인간이 아니야?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은 기억나지 않는다.

할머니가 태형을 혼내고 있다. 너는 그렇게 사람을 볼 줄 모르는 것이냐? 내가 그렇게 묶었는데 너는 대체 어떻게 된 애가 힘이 묶이지를 않는 것이야. 모르는 척 해. 너에게 아무 이유 없이 오는 사람들은 모른 척 하라고. 안돼. 네 스스로 구분 할 수 있을 때까지 그냥 아무하고도 엮이지 말거라.

할머니는 엄하셨고 태형은 그런 할머니를 무서워했다. 주위에 몇 없던 친구들까지 할머니는 쫓아내버리며 역정을 내신다. 감히 근본 없는 것들이 우리 손자한테 접근을 해? 영원히 구천을 떠돌고 싶나보지?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섬뜩한 표정을 짓는 할머니는 무서웠다. 할머니는 자신을 자주 나무랐고, 태형은 본인이 왜 혼이 나는지 이유도 모른채 그 꾸중을 다 듣고 있다.

초등학교에 들어간 태형은 인간과 인간이 아닌 존재를 구분하지 못해 결국 입을 다물었다. 저 구석에서 친구들끼리 놀고 있는 모습을 보기만 했다. 재밌겠다. 그런데 또 사람이 아니면 어떡하지. 외로움과 쓸쓸함, 부러움과 같은 감정들이 마구 뒤섞였다.

중학교 들어갈 때 즈음 되어서야 인간의 것과 아닌 것들이 구분이 되기 시작한다. 태형은 자신의 비밀을 숨겼고 친구들이 다가왔다.

주위가 온통 새까맣다. 자신은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있다. 제 앞에는 누군가의 뒷모습이 보였다. 어쩐지 익숙한 뒷모습이다. 천천히 다가갔다. 손을 뻗었다. 손가락 끝이 그의 등에 닿으려 할 때 즈음, 그가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리면서 살짝 휘날리는 머리카락이 순식간에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마주친 두 눈동자가 먹처럼 새까매서 오히려 반짝였다. 그의 등 뒤에 달빛이 내렸다. 어두컴컴한 주위에 그만 빛났다. 그의 붉은색이 눈에 띄었다. 어느새 그의 옷은 교복이 아니라 온통 새까만 옷으로 변해 있었다. 눈 아리는 햇빛이 아님에도 눈이 부셔서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누구야? 태형이 작게 속삭이듯 물었다. 미묘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웃는 듯한 모습이 보였다. 얼굴이 점점 보이기 시작한다. 아.










아아악!!!!! 태형은 마치 악몽을 꾼 사람처럼 깜짝 놀라며 벌떡 일어났다. 하아... 식은땀이 난 듯한 느낌에 태형은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무슨 꿈이 내 인생을 다 보여주냐... 딱히 무서운 꿈은 아니었지만 왠지 기분이 안좋았다.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느낌이 오히려 기분 나쁘게 만들달까. 특히 마지막은 마치 현실처럼 생생하게 기억에 남았다. 너무 생생해서 정말 그게 현실인 줄 알았다. 꿈에 나온 그 애는 분명 지민이었다.

지민이 생각나니 또 머리가 아파지는 기분이다. 아직도 어제의 일을 잊을 수 없다. 사실 아직까지도 그게 정확히 어떤 일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너무 정신이 없었고 새로운 사실들에 머리가 과부화 걸린데다가 평화롭던 제 일상들이 순식간에 호러 스릴러로 변했다는 것까지 알아버려서 혼란스럽기만 하다. 푸르스름한 새벽 빛이 창을 타고 들어왔다. 동이 트기 시작하는지 어둠이 서서히 물러나고 있었다. 일어날까 좀 더 고민하다가 결국 침대에서 일어났다. 17년 동안 차고 있던 팔찌가 갑자기 없어져서 허전함만 느껴졌다. 괜히 팔찌를 차고 있던 부분만 감싸 잡아보았다.

별 다를 것 없는 등굣길이었다. 여전히 평화로웠고, 제 옆을 지나치는 학생들은 여전히 똑같았다. 그런데 왜. 왜 이렇게 오늘따라 다르게 느껴지는 건지. 태형은 제 왼쪽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을 더 주었다. 그 때 바닥에 흩어졌던 구슬들을 모아 작은 유리병 안에 넣어뒀었다. 구슬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이 사라지고 부서졌다. 그런 거 모아봤자 도움 안돼. 지민의 말에 그를 째려봤었다. 애들이 지민이한테 다가가지 않았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귀신을 보기 때문이 아니다. 그냥 싸가지 없어서 가까이 안가는 거야. 태형은 확신했다.


너 어제 되게 큰 일 있었다며.

말도 마. 별 미친...


태형은 아무 생각 없이 말하려다 입을 꾹 다물었다. 자기한테 말을 건 저 애는 분명히 사람이 아니었다. 두어걸음 앞서 나가 자신을 보고 있는 그 얼굴이 비싯비싯 웃고 있는게 보였다. 태형은 무시하고 그를 지나쳤다. 뒤에서 따라오면서 계속 쫑알거렸다. 알만하다, 그러게 왜 사신을 건들이니 한낱 인간이. 마지막에 그가 하는 말에 태형은 욱해서 홱 뒤돌아봤다.


네가 뭘 안다고 쫑알거려! 내가 그 애를 건든게 아니라, 그 애가 나를 건들였어!


태형은 자신이 소리치고 자신이 놀랐다. 주위에 등교 하고 있던 애들이 힐끔힐끔 태형을 보면서 자신을 피하는 것이 느껴졌다. 이마를 짚었다. 귀신이랑 말 섞어봤자 자신에게 이익이 오는 것은 없다. 미친놈 취급만 받지, 무시하는게 상책이다.

사신이 왜 인간을 건들이는데? 아무 이유 없이 그럴리가 없잖아. 그들은 인간의 일에 관여하면 안될텐데. 너 그냥 인간 아니야? 제 뒤에서 쫑알쫑알 거리는 존재에 결국 태형은 구석진 골목으로 몸을 돌렸다. 그가 따라왔다. 이래서 말을 거는게 아니었는데. 태형은 속으로 한숨을 쉬면서 그를 쳐다봤다. 야.


안그래도 어제 일 때문에 나도 머리 아파 죽을 것 같거든. 너까지 그렇게 하지마라 진짜. 나도 몰라. 나도 지금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하나도 모르겠으니까 따라오지마. 나, 너 성불 안시켜. 내 옆에 있어봤자 너한테 도움 될 거 하나도 없어.

성불 어려운 일 아니야. 내 모습만 보이면 분명히 할 수 있어.

그러니까 안한다고. 나, 너희 같은 존재랑 존나 상종하기 싫거든? 나 그냥 평범한 사람이고 싶다고. 알아들어? 너희 일에 끼어들 생각, 절대 없어. 이제 이상한 괴물까지 보이기 시작해서 안그래도 빡치는데.


태형은 제 머리를 쓸어넘겼다. 너, 팔찌 없어졌네. 그의 말에 태형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어제 부서졌는데. 태형이 말하자 그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너 정말...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구나.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뭐?

내가 잘못 찾아왔네. 그 팔찌 때문에 몰랐어. 그렇게까지 거부하면 너 탈난다.

뭐가.


태형의 물음에 그는 답을 해주지 않고 그대로 사라졌다. 야. 야! 끝까지 말은 해줘야 할 거 아니야!!! 태형의 큰 소리만 울려퍼졌다. 씨발 도대체 뭐야... 어제부터 알 수 없는 일 투성이라 머리가 다 아파왔다.





직감적으로 예감했다. 어제 이후로 제 삶은 180도 변할 것이라는 것을. 제 인생은 귀신을 보기 시작할 때부터 평범한 생활을 꿈 꿀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어야 했다.

태형은 옥상에서 지민과 마주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왠지 모를 동질감에 친해지고 싶었지만 동질감은 개뿔, 자신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였다. 더 이상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목숨의 위협을 받으면서 살고 싶지 않았다. 생각해봤어? 지민의 물음에 태형은 헛웃음을 뱉었다. 생각해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언제는 내 운명이 너한테 묶였다며. 선택권도 없다며.

응, 없지.

뭘 더 생각해보라는거야.

언제 계약할까.

뭐?

너 마음의 준비는 해야할 거 아니야. 뭐, 빨리 계약할수록 서로에게 좋긴 하지만.

나 오늘도 귀신한테 이상한 소리를 들었어. 자기가 잘못 찾아왔대. 팔찌 때문에 몰랐대. 계속 거부하면 탈난대.

잡귀가 잘 가르쳐 줬네.

그게 무슨 뜻이야. 정확히 내가 뭘 하면 되는거고 그 계약은 뭘 의미하는 건데. 그 계약을 하면 내 목숨 지켜줄 수 있어?


너 되게 목숨에 목숨건다. 지민의 말에 태형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야, 죽고 싶지 않은 건 누구나 당연한 거 아니야? 나 하루아침에 뭔지 모를 괴물한테 죽을 뻔 했어. 음 모르겠네. 지민의 대답에 태형은 순간 그의 머리를 때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그래 사신이 인간의 마음을 어떻게 알겠어, 그치? 어쩐지 잔뜩 비꼬는 듯한 태형의 말에 지민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너 나 놀리냐?

헹. 한낱 인간이 감히 사신님한테 놀려서 어쩌게요? 제 목숨은 두 개가 아니라서 말이죠.

야, 너 비꼬는거지.

그렇게 들렸다면 제가 다 죄송하네요. 그 고귀한 사신님 심기를 거슬리게 만들었다니.

그만해라, 진짜. 죽여버린다.


어쩐지 지민은 정말로 자신을 죽일 수 있을 것 같아서 입을 다물었다. 아 머리야. 지민은 인상을 찌푸리며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참 나 머리 아픈게 누군데. 태형은 그를 노려봤다. 내가 너 때문에 내 인생이 다 꼬였어, 알아? 지민이 이어서 하는 말에 태형은 진심으로 어이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야, 지금 누구 때문에 내 인생이 다 꼬였는데! 


뭐야, 그게 나 때문이라는 거야 지금?

그럼 너 때문이지 누구 때문이야! 너만 없었으면 난 귀신을 볼지언정 그런 목숨의 위협을 받을 일은 없었어.

어이가 없네. 그게 네 원래 운명이야, 내가 그런게 아니고. 그러게 누가 그렇게 태어나래?

네 멋대로 내 운명을 정하지마!


지민은 결국 입을 꾹 다물었다. 태형은 씩씩 거리며 지민을 노려봤다. 네가 어떻게 알아, 사신은 뭐 인간의 생사에 그렇게 마음대로 관여해도 되는거야? 운명? 그럼 씨발 내가 당장에 죽으면 그것도 운명인거냐? 어? 말해봐, 사신. 아 그래, 너는 사신이니까 사람이 언제 죽는지도 알겠네. 말해보라고, 내가 언제 죽는지!

태형의 윽박에 지민은 입술만 잘근잘근 씹었다. 우리, 더 이상 엮이지 말자 너나 나나 그게 더 나은 것 같으니까. 태형은 거칠게 옥상문을 열고 나갔다. 철문은 큰 소리를 내며 닫혔다. 조금의 틈도 없이 굳게 닫힌 철문만 멍하니 보던 지민은 아으으 작게 앓는 소리를 내며 천천히 쭈그려 앉았다. 두 팔을 모아 그대로 얼굴을 묻었다. 지민은 한동안 그 자세로 움직이지 않았다.



씨발 씨발 씨발! 태형은 재빨리 계단을 밟고 내려왔다. 기분이 더러워졌다. 오늘 박지민을 만나는 것이 아니었다. 이미 그 애는 제 삶에 관여를 했고, 더 깊이 들어오려고 했다. 사양이다, 자신은 더 이상 그런 말도 안되는 존재들에게 목숨을 위협 받고 싶지 않았다. 뭔지는 몰라도 그와 가까이 있으면 안된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사신? 그래 내가 본게 있어서 그건 믿는다고 쳐도 내가 왜 자기를 도와줘야해. 이때까지 17년 동안이나 잘 살았다. 팔찌만 어떻게 복구하면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교실이 있는 3층에 다다른 태형은 복도 쪽으로 나가려다 바로 보이는 얼굴에 식겁하며 몸을 숨겼다. 이미 들켰는데. 천천히 제 앞으로 다가오는 그를 보자 태형은 결국 체념의 한숨을 뱉었다. 저는 그 쪽 이름도 모르거든요. 민윤기. 태형의 말에 윤기는 바로 제 이름을 뱉었다.


사신도 이름은 있나보죠.

너 지민이한테 지민이라고 부르잖아.

......

언제는 좋다고 지민이 뒤 졸졸 쫓아다녔으면서 이제와서 그렇게 바로 쌩까냐? 너도 인간이 참 못됐다.

지금 누가 할 소린데요. 지금 제가 뒷통수 맞은 상황이거든요? 처음으로 마음 맞는 친구 사귀나 했는데 난데없이 사신을 보고 내가 하루 아침에 골로 갈 뻔 했는데, 그럼 안 피하고 베겨요?

굳이 따지자면 하루 아침에 골로 갈 뻔 한건 우리 책임이 아니지만.

더 이상 그 쪽 존재들이랑 엮이고 싶지 않아요.

너 어제부터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데.


어쩐지 낮게 착 가라앉은듯한 그의 목소리에 태형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음칫 떨었다. 제 앞에 있는 사람이 사신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인지는 몰라도 그는 되게 사람 소름 돋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유난히 하얀 얼굴도, 차분하게 내려 앉은 검은색의 머리도, 셔츠 단추를 다 잠그고 바지 안에 집어 넣어 단정하게 입은 교복도, 별 다를 것 없는 사람인데도 그가 하는 행동들은 어쩐지 낯설었다. 아, 사람이 아니었지. 태형은 그를 유심히 봤다. 감정 없는 눈은 태형을 보고 있는건지, 아니면 다른 어딘가를 보고 있는건지 알 수 없었다.


네가 그렇게 태어난게 잘못인거지. 이때까지 그 팔찌에 기대어 운명을 거부하고 있어서 네가 평범한 인간이라 착각 하는 모양인데, 너 어차피 그냥 사람처럼 살 수가 없어. 왜? 넌 그냥 사람이 아니니까.

우리 할머니도 무당이셨어. 귀신을 봤다고. 세상에 그런 영적인 존재들을 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 그러면 그런 사람들은 전부 이런 말도 안되는 운명인가?

아니지. 그 사람들은 우리를 볼 수 없지.

......

너는 우리를 볼 수 있고.


윤기는 손가락으로 태형을 가리키고 자신을 가리켰다. 제일 큰 차이는 그거지, 사신을 볼 수 있냐 없냐. 태형은 살짝 떨리는 듯한 제 입술을 감쳐물었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그에게서 조금씩 조금씩 멀어졌다. 17년동안 피했으면서, 또 피하는거야? 그의 목소리에 태형은 두 귀를 꾹 막았다. 피식하고 그가 헛웃음 짓는 표정이 보였다. 어쩌나, 아예 몰랐으면 또 몰라 이미 마주해버린 네 운명에서 더 이상 벗어날 수 있을까. 그의 목소리가 꾹 막고 있는 두 손을 뚫고 귓가에 웅웅거렸다. 태형의 두 눈이 불안으로 흔들리는 것을 본 윤기는 헛웃음을 뱉었다. 마음에 안든다. 옛날부터 지민의 파트너랍시고 나온 인간들은 하나 같이 마음에 안든다. 태형은 무섭도록 차가워진 윤기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다 결국 뒤돌아 바로 뛰쳐갔다. 사람이 지나다니지 않아 한산한 복도에서 윤기 혼자 덩그러니 서 있다 피식 웃었다. 약해 빠져가지고는. 윤기의 혼잣말은 아무에게도 닿지 못한 채 공중에 흩어졌다.



태형은 비과학적인 일을 믿지 않았다. 제일 비과학적인 존재를 보고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하물며 운명을 받아들이라니. 너무나도 뜬구름 잡는 이야기였다. 허. 태형은 공부시간에도 생각나는 그들의 말도 안되는 소리에 자꾸 헛웃음이 나왔다. 하필 국어시간인 지금도 운명 따위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너희들은 운명이 있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들어온 선생님의 질문에 턱을 괴고 있던 태형이 아니요!! 소리쳤다. 교실에 있던 모든 아이들의 시선이 태형에게 꽂혔다. 왜 그렇게 생각해? 선생님의 물음에 태형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말도 안되잖아요, 내 인생이 한 길로 정해져 있다는게. 제 옆자리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지지만 태형은 애써 무시했다.

여러갈래로, 여러형태로, 그렇게 여러가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제 운명이 알고보니 한가지 길 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저는 더 이상 살 가치를 못 느낄 것 같은데요, 전 그 삶을 원하지 않았거든요. 가볍게 던진 질문이었는데 무게가 느껴지는 대답이 돌아온 탓에 선생님은 당황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선생님은 애써 웃어보이며 말했다. 그 삶이 너한테 어떤 삶인지는 아직 잘 모르지 않을까? 그녀의 말은 태형의 굳은 얼굴을 풀기에 역부족이었다. 자,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볼까. 선생님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도저히 공부를 할 상황이 아니었다. 태형은 결국 자리에 엎드려 버렸다. 끈질기게 닿아왔던 한 시선이 그제서야 물러나는 것을 느꼈다.

머리를 식히고 곰곰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었다. 계속 피하기만 해서는 되는게 아니었다. 같은 학교 같은반, 심지어 옆자리기 때문에 피할 수 있는게 아니었다. 제 팔찌가 갑자기 끊기면서 이상한 괴물을 만났고, 박지민 주위 사람들이 그 괴물을 처리해 주었다. 정확히 그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은 확실히 사신이다. 박지민은 계약을 하자고 했다. 하지만 정확히 무엇을 계약 하는지 알 수 없다. 힘을 빌려달라고 했는데 그 힘이 정확히 뭔지도 모른다. 대신 저를 보호해 준다고 했다. 힘을 빌려주는 것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보호를 해준다는 것이 정확히 어떻게 보호해 준다는 것인지, 그 계약을 통해서 얻는 것과 잃는 것은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야 했다. 어쩌면 목숨이 달린 일이었다. 그냥 사람도 아니고 사신과의 계약인데 함부로 할 수는 없었다.

생각해보면 계약이라는 말도 웃긴다. 사신한테 묶인 운명으로 태어나 선택권도 없다면서 그것을 계약이라 칭한다. 계약이 아니라 목숨을 인질로 한 협박 아닌가. 태형은 상체를 일으켰다. 고개를 돌려 지민을 바라봤다. 책을 내려다 보고 있던 지민이 고개를 돌려 태형과 시선을 마주했다. 검은 머리카락이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 아, 아니다. 그 밤에 봤던 지민과 겹쳐 보였던 것이다. 그 때의 지민이 어지간히도 강렬했는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떠나기는 커녕 지금의 지민에게서 딱 붙어 계속 겹쳐 보였다. 뭐. 지민이 작게 속삭였다. 에이. 태형은 못볼 것을 봤다는 듯 혀를 쯧 차며 다시 앞을 바라봤다.





어, 어제 그 친구네. 태형은 앞에서 딱 마주친 그들을 보자마자 얼굴을 확 굳히며 뒤돌아 돌아갔다. 더 이상 그들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 잠깐만 친구야! 한 명이 후다닥 뛰어와 태형의 어깨를 턱 잡았다. 태형은 바로 그의 손을 쳐내고 그를 노려봤다. 호석이었다. 뒤에 있던 남준이 빠른걸음으로 다가와 호석의 손을 잡고 살짝 물러났다. 다들 나한테 왜이래 진짜! 태형의 윽박에 호석의 눈이 커졌다.


내가 그쪽들한테 뭐 죄진 거 있어요? 왜 이렇게 나를 못잡아 먹어 안달이야?

아니 난... 그냥 너랑 대화를 하고 싶어서 그러지.

저 아는 척 하지마요. 나를 언제 봤다고 아는 척이에요.

하지만...


호석은 무어라 더 말하려다 그의 살벌한 눈빛에 결국 입을 다물고 말았다. 엄청나게 싫은가보네... 호석은 멋쩍음에 머리만 만지막 거렸다. 우리 앞으로 만나지 말아요. 태형은 차갑게 뒤돌아섰다. 멀어지는 그의 등만 멍하니 보던 호석은 한숨을 후 쉬었다. 이번에도 영 느낌이 안좋지 않냐. 어쩐지 풀이 죽은듯한 호석의 말투에 남준은 그를 가만히 내려다 보다가 쓱쓱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무 갑작스럽고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그럴거야.



태형은 발걸음을 더욱 빨리 했다. 그 이후로 그 쪽 사람들이랑 이상할 정도로 자주 만나는 느낌이었다. 그들이 일부러 자신을 찾아오는 것인지 우연히 그렇게 만나는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태형의 입장에서는 달갑지 않았다. 알고 보니까 어째 더 많이 보이는 것 같냐. 태형은 짜증스럽게 머리를 쓸어넘겼다. 으이씨, 빨리 집에나 가야지. 하고 생각하는 순간, 갈림길이 나왔다.

어떤 갈림길이든지 그 앞에 서면 망설여진다. 오른쪽으로 갈까, 왼쪽으로 갈까. 오른쪽으로 가면 결국 지날 수 밖에 없는 그 폐건물이 신경쓰이긴 하다. 그 때도 거기서 처음 사신의 모습이었던 지민을 만나지 않았는가. 아, 그 때 그런 지민의 모습을 보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까. 지금 후회해도 소용 없다. 지름길이라는 유혹에 걸려든 건, 결국 본인이었다.

태형은 결국 오른쪽 길을 택했다. 20분 거리의 길을 10분 가까이 단축할 수 있다는 것은 큰 유혹이었다. 이 동네 사람들은 잘 지나다니지 않는 길이었다. 여러가지고 음슴한 기운이 감도는 골목이었기 때문에. 그러고보니 지민이가 집을 갈 때 이 길로 갔었지. 문득 든 생각에 태형은 아차 싶어 머리를 부웅부웅 휘저었다. 그 애 생각은 하지 말자.

여전히 가로등은 별로 없어 깜깜하고 알 수 없는 기운이 감도는 길이었다. 사실 깜깜한 밤에는 이 길을 잘 지나다니지 않았다. 이건 겁이 없고 말고를 떠나서, 태형은 본인이 귀신을 볼 수 있기 때문에 피하는 길이기는 했다. 이 길, 은근 귀신들 많이 다닌단 말이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정말 그 폐건물이 아지트로 쓰이고 있는지 유난히 그 주위에 많이 떠돌아 다니기는 했다. 태형은 최대한 폐건물 쪽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고 최대한 빨리 그 자리를 벗어나려고 했다.

갑자기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바람 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자연스러운 바람 소리가 아니라 마치 무언가가 인공적으로 바람을 가르는 듯한 소리였다. 아, 씨발. 태형은 저절로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다. 이래서 사람들이 학습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건가. 그 때도 여기로 왔다가 낭패 봤으면서 왜 또 여기로 들어왔을까. 그깟 지름길이 뭐라고. 10분 빨리 집에 들어가려고 목숨 거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됐잖아. 태형은 제 머리를 아프지 않게 콩콩 때렸다.

태형은 그 자리에서 멈추어섰다. 괜히 섣불리 움직였다가 또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몰랐다. 피부에 닿는 바람의 촉감과 어디선가 스산하게 들려오는 소리에 청각을 곤두세웠다. 무언가 바닥을 기는 소리 같기도 하고 길다란 천 같은 것이 바닥에 쓸리는 소리 같기도 했다. 그 소리가 어디서 들리는지 알 수 없이 그 주위에서 울리듯이 들렸다. 온 몸이 마비가 걸린듯 움직이기 힘들었다. 제대로 고개도 돌리기 무서워 큰 눈만 굴리며 주위를 살폈다. 아무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제 주위를 떠돌아 다니던 그들은 오늘따라 다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나 참 진짜 인생에 도움이 안돼... 태형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노래 들을까? 갑자기 엄습해온 불안감과 공포감 때문에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해 태형은 혼잣말로 중얼거리면서 주머니에서 폰을 꺼냈다. 이어폰을 찾으려다 귀에 꽂고 가는게 더 무서울 것 같아 결국 바로 음악 어플을 누르는 순간, 몸이 붕 뜨는 느낌이 들었다. 순식간이었다. 굉장히 단단한 무언가가 제 허리를 홱 감고 바로 공중으로 들어올렸다. 폰은 손에서 떨어져 바닥에 툭 떨어졌다. 어, 하는 순간 몸이 날라갔다. 아무런 장치 없이 공중을 나는 기분은 이런 기분인가. 머리는 새하얘져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지도 모르겠다. 날라가는 그 순간이 슬로우모션처럼 느리게 흘러가는 느낌이었다. 밤공기를 가르며 날라간 태형은 옆에 있던 폐건물로 쑥 들어가 바닥에 철퍼덕 엎어졌다. 날린 힘에 의해 바닥에 떨어지고도 뒤로 밀려갔다. 흙먼지가 일어나 태형의 몸 위를 덮었다. 목이 매워 잔기침이 났다. 아오 씹...발! 아파!!! 태형은 잔뜩 쓸린 팔을 부여 잡고 상체를 일으켰다. 폐건물 깊숙히까지 날라온 태형은 제 앞에 보이는 말도 안되는 괴물에 꿍얼거리던 입도 멈추고 잔뜩 굳은 채 멍하니 바라봤다.

원래 창문을 달아놓을 생각이었는지 뻥 뚫린 벽 만큼 바깥이 보였다. 그 중 반은 시꺼먼 무언가로 시야가 막혔다. 그 때 봤던 그 괴물이랑 비슷하게 생겼다. 절망감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막연한 공포심에 이가 딱딱 부딪쳤다. 한쪽 팔을 부여잡고 있는 손에 힘을 꾹 주었다. 쓰라렸다. 마찰로 인한 화상인지, 단순히 긁힌건지 모르겠다.

자신이 운명을 거부한다고 했다. 운명에게서 벗어나려고 한다고 했다. 지랄. 태형은 그럴려던 것이 아니었다. 이미 귀신을 보면서 살고 있다는 것 자체가 기구한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평범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도 최대한 그들을 무시하고 살면 남들처럼 평범한 척은 할 수 있지 않을까 했다. 하지만 이래서는, 괴물에게 목숨의 위협을 받고 사신에게 협박 당하는 인생은 평범한 척도 할 수는 없는 거잖아.

눈물이 났다. 아 씨발 진짜 나한테 왜 이러는데... 서러워졌다. 쓰라린 팔을 붙잡고 울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숨 죽이고 울던 것이, 제 울음소리에 서러워져 더 커지기 시작했다. 저 앞에 보이는 괴물에 제 소리에 반응을 하든 말든, 이제는 좆도 신경 안쓴다. 평생 이러고 살 바에는 그냥 죽고 말지. 이제는 해탈했다. 애초에 말도 안되는 인생이었으니, 죽음도 말이 안되어 봐야 이야기라도 되지. 태형은 다가오는 괴물의 기척을 느끼고 눈을 감은 채 고개를 푹 숙였다.


이 미친 새끼야!!!


껌껌한 눈 속 세계에서 눈부신 푸른빛이 마구 비집고 들어왔다. 태형은 제 귀로 때려박는 익숙한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눈을 떴다. 키아아악!!!! 매우 거슬리는 괴성에 태형은 두 귀를 막았다. 바로 앞에 시꺼먼 옷을 입고 있는 남자가 서 있었다. 여전히 머리는 붉었다. 그가 들고 있는 커다란 대낫은 그 때처럼 예리하기 그지 없었다. 밑에서 올려다 보는 그는 매우 커 보였다. 원래 이렇게 큰 애가 아니었는데. 나보다 작았는데. 곧게 뻗은 다리도, 그의 등도, 대낫을 굳게 쥐고 있는 손도. 그의 존재도 오늘따라 왜 이렇게 커 보이는지. 태형은 멍한 표정으로 그의 뒷모습만 올려다 봤다.

너 이 씨발 미쳤어?! 그가 뒤 돌아 태형을 보자마자 윽박 질렀다. 태형은 놀라 히끅 딸꾹질까지 했다. 분노로 가득 찬 지민의 표정은 말도 아니었다. 순간적으로 아까 그 괴물보다 무섭게 생겼다고, 태형은 생각했다. 지민은 거칠게 제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빛이 거의 없는 폐건물에, 그의 붉은빛 머리만이 빛이 있는듯 존재감을 드러냈다. 마지막 내가 처리한다? 어디선가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지민은 대낫을 바닥에 내팽개치고 태형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태형은 힘 없이 끌려 올라왔다.


너 미쳤어! 왜 안 도망 가고 거기서 그러고 있었는데!

......

바보짓도 정도껏 해! 네가 이런다고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아?


그 말에 태형은 거칠게 그의 손을 쳐냈다. 잔뜩 구겨진 셔츠를 잡아 당겨 핀 태형은 지민을 노려봤다. 아 씨발, 눈물이 눈치 없이 또 나오려고 한다. 서럽다. 그냥 이 상황이 다 서러웠다. 태형은 애써 마음을 추스리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격양된 목소리는 감출 수 없었다.


그럼 씨발 나보고 어쩌라는건데! 내 맘대로 죽지도 못해? 내가 이러고 싶어서 태어난 거 아니잖아! 그래서 내 마음대로 이 연 끊겠다는데 네가 무슨 상관인데!

어, 너 맘대로 못 죽어. 너 나한테 묶였다고 내가 말했지. 네 힘, 네 영혼 다 내거야. 내가 너 해방시켜 준대? 씨발 착각하지마.

씨발, 미친새끼. 내가 왜 네 거야.

너야말로 내 생 말아먹게 하지마. 이제는 존나 짜증나려고 하니까.

네가 내 인생 말아먹고 있잖아, 지금!!!


흐어엉, 씨바아알!!!! 지금 누구 때문에 내가 죽을 위기를 몇 번이나 넘고 있는데!!! 태형은 거의 악을 지르다시피 하며 눈물을 터뜨렸다. 아예 제자리에 쭈그려 앉아 얼굴을 무릎에 파묻었다. 지민은 그제서야 태형의 상태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잔뜩 헝클어진 머리와 옷에는 흙먼지 때문에 더러워져 있었고 팔과 다리에는 쓸려서 울긋불긋해져 있었다. 지민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지민은 어찌 할 바 몰라 손만 우왕좌왕 했다. 손이 민망하게 허공만 맴돌았다. 

네 친구는 괜찮아?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지민은 뒤돌았다. 뒷처리를 한 남준과 호석이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지민은 옆머리만 긁적였다. 호석이 고개를 살짝 옆으로 빼니, 지민에게 가려 보이지 않던 태형이 그제서야 보였다. 친구야, 죽을뻔 했는데 다행이야, 진짜 나이스 타이밍이었어. 호석의 말에 태형이 고개를 홱 들어 호석을 노려봤다. 그새 얼마나 울었는지 시뻘게진 눈과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본 호석이 흠칫 놀랐다. 지금 이게 다행이라고?! 격양된 태형의 목소리가 폐건물을 울렸다.


그냥 죽게 놔두지 그랬어!

야!

왜 살렸어? 어차피 평범하게 살지도 못하는데 그냥 죽게 놔두면 어디가 덧나냐?! 왜 이렇게 남의 인생에 참견이야, 진짜!!


지민은 태형의 말에 또 소리를 지르려던 것을 참고 인내심을 가지고 심호흡을 했다. 뒤에서 호석과 남준이 어정쩡한 거리에서 다가가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하다... 호석의 중얼거림에 남준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싫어. 다 싫다고. 뭔 힘을 빌려주고 나를 지켜주고 자시고 그냥 다 지긋지긋하니까 이렇게 마음 조리고 살 바에 인생 끊기로 마음 먹었어. 근데 그것 마저도 너희들이 지금 방해하잖아. 나보고 어쩌라고. 씨발, 진짜 서러워서...

너 못 죽어.

하, 씨발 진짜. 평범하게 살고 싶은 것도 죄냐? 평범한 척도 못해?

네 운명대로 사는게 평범한 인생이야, 병신아.


지민의 말에 태형은 입을 꾹 다물었다. 머리가 아팠다. 팔도 다리도 쓰라렸다.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몸도 근질거렸다. 그런데 이게 평범한 인생이란다. 허. 헛웃음만 나왔다. 지민은 그 자리에 쭈그려 앉아 태형과 시선을 마주했다. 지민은 잔뜩 엉망인 된 태형의 얼굴을 보고 살짝 인상을 찌푸리더니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마구 태형의 얼굴을 닦았다. 아, 아프다고! 태형이 마구 고개를 휘저었다. 끈질기게 따라붙던 그의 손길은 얼추 태형의 얼굴을 거의 다 닦고 나서야 물러났다. 인상을 찌푸린 채 딱딱하기만 한 지민과는 다르게 그가 들고 있는 손수건은 너무 안어울리게 귀여워 태형은 피식 웃어버렸다. 지민은 그의 웃음에 움찔해서는 괜히 민망해 손수건을 주머니에 대충 쑤셔넣었다.


뭐냐, 그 병아리는. 존나 안어울리네.

뭐, 씨발. 내가 산 거 아니야.

뭐, 고딩 때의 너랑은 좀 어울리는 거 같네.

아 내가 산 거 아니라고.


지민은 다리를 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만약에 너랑 계약 하면 난 어떻게 되는건데. 태형의 물음에 지민은 조용히 그를 내려다봤다. 태형도 자리에서 일어나 지민을 쳐다봤다. 그 때, 너 나 구해준다고 했잖아. 태형의 말에 지민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 어떻게 구해주는건데.

아까처럼. 그 괴물들을 죽여주는거지. 정확히 말하면 악령이지만.

악령? 그 괴물이 악령이라고?

자세히 말하면 복잡한데. 어쨌든. 대신 내가 그 괴물들을 죽이려면 힘이 필요해. 그런데 그 힘을 네가 가지고 있어. 그래서 네 힘을 나한테 줘야해. 그게 계약 내용이야.

... 어떻게?

너, 지금 계약할거야?

아니. 이야기 들어보고 생각 좀 해보고.

그럼 말 못하지.

그런게 어딨어!


안할거면 나 간다. 망설임 없이 홱 뒤돌아 가버리는 지민을 잡아세운 것은 남준이었다. 그는 지민의 귀에 무어라 속삭이더니 지민의 인상이 확 찌푸려졌다. 그러더니 고개를 홱 돌려 태형을 노려봤다. 후. 그의 입에서 작게 한숨이 나왔다. 너는 아는지 모르겠는데. 지민이 입을 열었다.


너 지금 힘이 개방 될 대로 개방 되어서 너무 위험해. 특히 이 주위는 령들이 득실거리고.

...뭐야. 갑자기 무섭게.

나도 이제는 한계치고, 이대로 가다가는 둘 다 망해서 어쩔 수 없다.


알 수 없는 말만 중얼거린 지민은 태형의 앞으로 다가갔다. 어느새 그의 손에 거대한 낫이 들려 있어 태형은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대낫과 지민을 번갈아 봤다. 야 시간 끌지 말고 빨리 해. 뒤에서 호석의 목소리가 들렸다. 형들 볼거예요? 지민의 말에 남준과 호석은 어깨만 으쓱했다. 왜, 어차피 피 보고 끝낼 거 아니야? 남준의 말에 태형이 억 소리를 냈다.


피요? 피를 본다고요? 뭔데 피를 보는데!

금방 끝나.

뭐가!!


지민은 대답 하지 않은 채 거대한 대낫을 들어 바로 태형의 심장부근에 정확히 찔러 넣었다. 날이 등을 관통하고 지나가는 느낌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크헉!! 태형은 놀라 앞에 보이는 대낫 막대를 두 손으로 쥐었다. 등 뒤로 통과된 예리한 날이 시뻘게지기 시작했다. 숨쉬기 힘들었다. 이, 허, 헉, 미친, 새끼. 태형이 말을 할 때마다 뚝뚝 끊겨 나왔다. 뒤에서 보고 있던 호석은 자신이 다 아프다는 듯 인상을 팍 찌푸린 채 보고 있었다. 나도 저랬어? 호석의 물음에 남준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지민이가 좀 잔인하긴 하지.

죽을 것 같았다. 거짓말 아니고 진심으로 죽을 것 같았다. 느낌이 너무 이상했다. 가슴, 심장, 등까지 다 관통했는데 피는 나오지 않았다. 대신 숨이 턱턱 막혔다. 숨을 쉬려고 할때마다 심장부근이 욱씬거렸다. 이게 뭐야 씨발 이게 뭐냐고! 태형은 제 손으로 빼고 싶어도 무서워서 이도 저도 못했다. 지민을 죽일듯이 노려봤다. 그 와중에도 태평한 지민의 표정에 이가 부득 갈렸다. 태형이 잡고 있는 막대가 점점 붉어지기 시작하면서 어느 순간 거대한 낫이 전부 붉어졌다. 이거 분명이 내 피 때문이야. 이제 태형은 식은땀까지 나기 시작했다. 여태까지 느껴본 적 없는 생경한 고통이었다. 뻐근한 것 같기도 하고 숨쉴 때마다 가시로 따끔따끔 찌르는 것 같기도 했다. 누군가가 폐를 압축시켜 놓은 것처럼 숨도 제대로 못쉬었다. 김태형. 지민이 불렀다. 자꾸만 눈이 감기려는 것을 억지로 떠 간신히 지민을 바라봤다. 정신 놓지 마. 지민의 말이 머릿속에서 웅웅 거리듯 들렸다.

계약한다. 지민의 말이 다시 들렸다. 아니 씨, 발, 빨리 빼! 태형이 숨을 긁어 모아 간신히 말했다. 지민이 막대를 잡은 부분에서 푸른빛이 나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그 빛이 크게 퍼지면서 팍 사라졌다. 지민과 태형을 중심으로 거센 바람이 일었다. 어느순간 그들을 잇고 있던 대낫은 사라지고 없었다. 태형이 정신을 잃고 쓰러진 것은 그때 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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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는 판타지입니다

사신 얘기 귀신 얘기 1도 모르고

그냥 다 제가 지어낸 거예요

사후세계나 그런 거 다 모릅니다

그리고 유치합니닼ㅋㅋㅋㅋ

그리고 다음화가 언제 나오는지도 모릅니다

아 그래도 제목은 지어줘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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뷔민 무제 2



지민은 문 앞에서 들어가길 망설였다. 후 한숨을 쉬었다가 문에 손을 댔다 뗐다 부산을 떨어댔다. 아 얼굴 어떻게 보냐... 결국 지민은 문에 머리를 콩 박았다.

박지민? 갑자기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지민이 제자리에서 펄쩍 뛰며 고개 돌려봤다. 제일 얼굴 보기 불편한 사람과 마주쳤다. 태형은 지민을 쭉 쳐다봤다. 흑색의 머리와 새까만 눈동자. 단정하게 입은 교복. 첫 날 봤던 지민과 다를게 없었다. 하지만 어제는 분명. 태형은 어제의 지민을 잊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점점 더 생생하게 기억이 났다. 달빛을 머금고 빛나던 붉은색의 머리와, 더 하얘 보이던 피부, 지금처럼 반짝이는 검은색 눈동자와 그것보다 더 칠흑같던 검은 옷. 머리와 피부를 제외하면 거의 분간이 안갈 정도로 검기 그지 없었다. 그런 그는 자신의 키를 훌쩍 넘는 거대한 낫을 들고 있었다. 날 끝이 달빛에 번뜩였다. 조금만 스쳐도 살이 저밀 것 같이 날카로웠다. 그 날 선 예리함을 잊을리 없었다.

지민이 눈에 띄게 당황하는 모습에 오히려 태형이 더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지민은 주춤주춤 거리다가 결국 뒤돌아 홱 도망갔다. 지민아 어디가! 태형이 그를 불렀지만 왼쪽으로 꺾은 지민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지민은 헐레벌떡 3층으로 올라갔다. 3층 제일 첫번째에 있는 교실문을 벌컥 열어젖힌 지민은 자신한테 쏠리는 시선은 신경도 안쓰고 교실 안을 둘러봤다. 네가 이 시간에 웬일이야? 뒤에서 의아한 표정을 자신을 바라보며 말하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지민은 그에게 달려갔다. 호석이 형!!!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제 앞에 온 지민을 의아한 표정으로 보던 호석은 헥헥거리는 그의 어깨를 도닥여줄 뿐이었다. 혀, 혀, 형 어떡, 어떡하지, 진짜 어떡하지. 머릿속이 정리가 안되는지 제대로 말도 못하는 지민에, 호석은 그의 등을 쓸어주었다. 진정하고 천천히 말해봐.

어, 박지민 네가 우리 교실까지 웬일이야?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지민이 뒤돌아봤다. 남준이 교복바지에 손을 닦으며 교실에 들어왔다. 형 나 어떡해, 진짜? 지민의 말에 남준도 의아해 고개를 갸웃하며 그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인데? 남준의 물음에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대던 지민이 결국 입을 열었다.


나... 들킨 것 같아.

......

......

무슨 말이라도 좀 해봐!


지민의 큰 소리에도 호석과 남준은 눈 빠지게 놀란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아니, 너무 당황스러워서 뭐라고 해야할지... 남준의 답지 않게 당황스러워 하는 모습을 본 지민은 아예 사색이 되었다. 들키면 어떡해...? 조심스러운 지민의 물음에 호석과 남준은 답하기 힘들었다. 내 인생 살면서 이런 일은 처음이라..아악!! 아니야! 그렇게 큰 일은 아닐거야, 지민아. 자신 없게 대답하다 지민 몰래 호석에게 등을 꼬집힌 남준이 급하게 말을 바꾸었다. 그러나 이미 남준의 말을 제대로 들은 지민은 표정이 말이 아니었다. 남준은 곤란함에 눈썹만 문질렀다. 잠시 셋 사이에 말이 없었다. 그때 아침 자습 시간 종이 울렸다. 일단 지민아 교실 가 있어 나중에 다 같이 모여서 이야기 나누자. 무슨 이야기요! 문까지 제 등을 밀며 가는 남준에, 다리에 억지로 힘을 주며 안 가려고 뻐팅기던 지민이 결국 그의 힘에 인해 문 밖에 튕겨나갔다. 단호하게 닫힌 문을 멍하니 보던 지민은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하 씨발 인생... 진짜 어떡하지... 지민은 계단 앞에서 고민하다 결국 천천히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문을 닫고 제자리에 앉은 남준을 바라보던 호석이 입을 열었다. 그게 가능해? 그의 물음에도 남준은 답할 수 있는게 없었다. 뭐... 정확히 무슨 상황인지를 모르니까 그냥 우연히 허공을 보고 있던 어떤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남준의 말에 호석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너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남준은 어깨를 으쓱였다. 제발 그러기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형한테 말해야 할 것 같은데... 남준의 말에 윽 호석이 낮게 소리냈다. 지민이가 우리한테 먼저 온 이유가 형한테는 이야기 하고 싶지 않아서 그런 거 아니야? 호석의 말에 남준은 더더욱 심각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정확히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 채 형의 귀에 들어가면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감도 제대로 안잡혔다. 형도 이런 일은 겪어 본 적 없을 것 같은데... 남준의 말에 호석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박지민 너 어디야]

지민은 날라온 문자를 곱씹다 결국 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아씨 남준이 형 고새 큰 형한테 이르냐... 지민은 짜증스레 머리를 헝클였다. 불어오는 바람따라 머리카락이 살짝 휘날렸다. 문득 그 날 일이 떠올랐다. 온 동네를 채우던 빛과 소음도 잠이 든 밤, 달빛만이 어둠을 밝히던 그 폐건물에서 태형과 시선이 맞닿았던 그 날. 착각이었다고 믿고 싶었지만 그럴 일은 없었다. 고개를 살짝 들어 자신을 보며 놀라던 그 얼굴을 잊을 수 없었다. 하 씨발... 지민은 머리를 쓸어올리며 옥상 난간에 기대었다.

박지민. 갑자기 옥상 철문이 열리면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입구 쪽을 바라봤다. 아 형, 잠시만요. 살벌한 그의 표정에 지민은 두 손을 저으며 천천히 뒷걸음질쳤다. 그가 뒷걸음질 치는 만큼 그가 다가왔다. 순식간에 지민의 바로 앞에 다가온 그에, 지민은 빽 소리를 질렀다.


내가 귀신이냐.

귀신도 잡잖아요.

이게 뭘 잘했다고.

아! 아파요!

아프라고 때렸다.


씨이... 지민은 입을 툭 내밀며 맞은 곳을 문질렀다. 윤기형. 지민이 툭 내뱉었다. 왜. 윤기가 대꾸 했다. 지민은 잠시 생각 하는 듯 입술을 꾹 깨물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이때까지 이런 적 있었어요?

아니.

... 그럼 저 어떻게 되는 거예요?

글쎄.

뭔가 해결책을 좀 달라고요!


지민이 울멍울멍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윤기의 표정에 짜증이 살짝 어렸다. 야, 네가 잘못했는데 내가 수습해야 하냐? 윤기의 지민은 할 말이 없어 다시 입을 꾹 다물고 난간에 팔을 올리고 얼굴을 얹었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윤기의 뜬금없는 말에 지민이 팍 얼굴을 들어 윤기를 바라봤다.


방법이 있어요?

가장 마음에 드는 거 골라봐.

아 세상에. 심지어 여러개야.

첫번째는 그냥 생까.

......

어차피 걔도 긴가민가 할 거 아니야.

형 농담이죠?

내 인생 살면서 제일 진지해.


지민은 한숨을 쉬었다. 형 저 지금 웃을 기분 아니예요. 나도 너 웃길 생각 없어. 지민의 말에 윤기가 대꾸했다. 윤기의 표정에 웃음기라고는 하나도 없이 진지했다. 지민은 제 눈썹을 문질렀다. 다른건요. 다시 입을 열었다.


근데 너 정확히 어떤 모습을들킨건데.

소멸시키는 모습이요.

아, 그럼 두번째는 안되겠군.

뭐였는데요.

코스프레.

아, 형! 저 지금 존나 심각하다고요!

알아 나도. 그러게 왜 들키냐고 들키기를.

제가 들킬 줄 알았겠어요?! 한낱 인간이 저 보고 그렇게 놀라는데 저도 너무 놀라서 그 자리에서 넘어졌다니까요?

그거 때문에 말인데.

...에?

애초에 인간이 우리가 보이지 않는데 걔가 봤다는 거잖아.

... 예.

마지막 방법.


마지막 방법을 들은 지민의 표정이 멍해졌다. 막상 말을 한 윤기는 평온하기 그지 없는 표정이었다. 그래도 돼요? 윤기가 어깨를 으쓱였다. 몰라 근데 그것 밖에는 답이 없잖아. 하아. 윤기의 말을 들은 지민이 한숨을 쉬었다. 내가 죽일 놈이지 뭐, 그러게 왜 들켜가지고... 지민이 두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았다. 윤기가 어색한 손길로 지민의 어깨를 도닥였다. 잘해봐, 어차피 너 아직 없잖아. 윤기의 마지막 말에 지민은 허탈한 웃음만 냈다.



어디 갔었어? 3교시에 교실로 들어온 지민에게 태형이 물었다. 다른 아이들은 힐끔 지민을 보고 다시 제 일 하기 바빴다. 후 속으로 한숨을 쉰 지민이 말 없이 자리에 앉았다. 짝이었던 태형이 끈질기게 물어왔다. 여태까지 받아본 적 없는 관심이 너무 부담스러웠다. 지민은 4교시 책을 꺼냈다. 태형은 아예 지민 쪽으로 몸을 돌려 지민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지민은 애써 무시하려다 따가운 그의 시선에 결국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봤다. 아, 드디어 봤다. 그의 태형한 소리에 지민은 제 속이 다 터질 것 같았다.


뭐야. 도대체 왜 계속 그렇게 보는건데.

어디 갔었어? 들어오시는 선생님마다 물어보셔서 내가 얼마나 난감했는데.

너 원래 그렇게 오지랖 쩔어? 그냥 신경 꺼.

어떻게 그래. 난 네가 좋은데.


아, 노답이다. 지민은 입을 꾹 다물고 다시 앞을 쳐다봤다. 태형은 아예 턱을 괴고 지민을 쳐다봤다. 우리 그래도 나름 같은처지잖아. 태형의 말에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같은 처지? 뭐가? 귀신 보는 거? 뭣도 모르면서 함부로 말하지마.

알겠다.

......

너 정말 평범한 사람은 아니구나.


지민은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의자가 뒤로 넘어가면서 큰 소리가 났다. 반 아이들이 전부 뒤를 돌아봤다가 지민과 눈이 마주치자 바로 고개를 돌렸다. 몸이 절로 떨렸다. 지민은 태형을 노려봤다. 태형은 여전히 태연한 표정이었다. 그 표정이 더 짜증났다. 난생 처음 겪는 일에 너무 혼란스럽기만 했다. 이렇게 무작정 다가오는 애한테는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전혀 모르겠다. 대체 왜그래. 지민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그제서야 태형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나한테 원하는게 도대체 뭐야.

딱히 그런건 없고. 그냥 친하게 지내자고.

......

같은 처지인 사람끼리.

야. 너 뭐 착각하고 있는데. 나 너 같은 사람 아니야.

......

그리고 진심으로 경고하는데. 너 내 옆에 계속 그렇게 붙어다니면 너 명 짧아져.


태형은 입을 꾹 다물었다. 지민은 의자를 세워 앉았다. 철벽이 철옹성이네. 태형을 쩝 입을 다시며 생각했다.










이 학교에서 가장 좋은 점을 뽑으라고 한다면 꽤나 긴 점심시간과, 학교 뒷편에 가볍게 오를 수 있는 낮은 산이 있다는 것이다. 태형은 밥을 먹은 후에 자주 그 뒷산에 오르고는 했다. 뒷산에 있는 절은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 딱히 종교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왠지 그곳에 가면 귀신들이 보이지 않았다. 버려진 절이라 해도 잡귀를 막는 힘은 있나보다 싶다. 태형은 재빨리 밥을 먹고 천천히 학교 뒷편으로 가기 시작했다. 본관 건물과 신관 건물 사이 길로 들어서는 순간 팔목을 감고 있는 팔찌가 툭 소리를 내며 끊겼다. 순식간에 줄에 꿰여있던 구슬이 바닥으로 떨어져 사방으로 튀었다. 투두둑 하고 바닥과 구슬이 맞닿는 소리가 들렸다. 헐 뭐야. 태형은 당황해서 제자리에 쭈그려 앉아 하나하나 구슬을 줍기 시작했다. 크고 작은 구슬들이 다 어디로 튀었는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아씨 이게 뭐야. 태형은 괜히 짜증내며 바닥 곳곳을 유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갑자기 바닥에 그림자가 졌다. 이상할 정도로 거대한 그림자에 태형은 멈칫했다. 뭐야. 아무 생각없이 뒤돈 태형은 그대로 다리에 힘이 풀려 스르륵 주저앉았다. 두 팔과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본능적으로 빨리 도망가야 한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몸이 제멋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뭐지. 뭐지. 머릿속이 어지러웠다가 백짓장처럼 새하얘졌다. 두려움과 공포심만이 가득 찼다.

섬뜩한 눈이 천천히 밑으로 내려가면서 태형과 눈이 마주쳤다. 그 눈과 시선이 맞닿은 순간 머리 끝까지 소름이 쫙 올라왔다. 태형은 바닥을 짚고 있는 손에 힘을 주어 꽉 주먹쥐었다. 입술을 꾹 깨물었다. 기회는 한번 뿐이다. 그대로 그 커다란 눈에 줍고 있었던 구슬을 던졌다.

끄아아악!!!! 뭔지 알 수 없는 그 '존재'는 구슬을 맞고 괴로움에 몸부림 쳤다. 그 틈을 타 태형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무조건 학교 뒷쪽으로 미친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다리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아 몇번이나 휘청거렸다. 이 악물고 달렸다. 저게 뭔지는 몰라도 본능적으로 저 '존재'를 피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주먹을 꽉 쥔 손에 땀이 차기 시작했다. 다른 한 손에 여전히 남아 있는 팔찌 구슬들의 감촉이 느껴졌다. 뒷산을 미친듯이 뛰어 올라갔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다리는 금방이라도 쓰러질듯 아팠지만 그따위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발가락이 아파왔다. 아오 씨발 발톱 빠질 것 같아! 피가 나올 것 같은 아픔을 참고 올랐다. 땀이 미친듯이 쏟아졌다. 땀이 눈 안에 들어가서 따가웠지만 닦을 새도 없었다. 이를 너무 세게 꽉 물어 턱이 아파올 정도였다. 태형은 힐끗 뒤를 보고 그 자리에서 쓰러질 뻔 했다. 극한 공포심에 다리에 마비가 올 지경이었다. 진짜 이 정도면 제 정신력도 정상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태형은 다리를 더 빨리 움직였다. 살짝 뒤돌자마자 마주친 그 눈빛이 뇌리에 박혀 사라지지 않았다. 진심으로 무서워 뒤질 것 같았다. 귀신인가. 귀신일까. 저렇게 무서운 귀신은 전혀 본 적이 없었다. 이때까지 봐 온 귀신들은 그저 사람의 형태였다. 그래, 그냥 영혼을 보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지금 자신을 미친듯이 쫓아오는 저 존재는 그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보는 것 만으로도 온 몸의 힘을 쑥 빼놓을 정도의 공포심을 일깨웠다.

뭐지. 쟤는 뭔데 나를 이렇게까지 쫓아오는거지. 태형은 숨차다 못해 터질 것 같은 가슴께를 부여쥐고 절 입구에 확 들어갔다. 돌바닥이 깔린 넓은 마당이 보이고 그 뒤에 낡은 절이 보였다. 태형은 하아하아 숨만 몰아쉬며 멍하니 섰다. 태형은 터덜터덜 마당을 가로지르며 천천히 절 쪽으로 다가갔다. 이제는 내 눈이 미쳤나. 그렇지 않고서야 여기에 사람이 있을리가 없는데. 태형은 터덜터덜 움직이던 다리를 멈추고 마당 한가운데 우뚝 섰다. 절 안으로 들어가는 계단에 앉아있는 지민과 눈이 마주쳤다. 아니, 지민과 함께 있는 다른 사람들과도 눈이 마주쳤다. 머리가 아프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들의 연속에 그냥 멍해졌다. 지민아. 한숨 같이 나온 제 이름에 지민은 그 자리에 벌떡 일어섰다. 너 왜 여기있어! 지민의 외침과 동시에 뒤에서 엄청난 굉음과 함께 무언가의 파편들이 날라왔다. 와아아악!!! 씨발!!! 태형은 그 자리에 바로 엎드렸다. 저 미친 놈! 지민과 있던 다른 한명이 거의 튕겨나듯이 뛰쳐나와 재빨리 태형을 데리고 뒤로 물러났다. 그 움직임이 말도 안되게 빨라 태형은 멍하니 그의 얼굴만 쳐다봤다. 그 넓은 마당을 순식간에 가로질러 계단 앞까지 데려다주자 태형은 그대로 주저앉았다. 이제는 정말 다리에 힘이 없었다. 저 멀리 자신을 그렇게나 끈질기게 쫓아오던 그 존재가 있었다. 거대한 몸뚱아리가 마당 안에 반 이상은 들어와 있었다.


너 미쳤어?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와!

아니 저게 계속 쫓아와서!


태형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하는 말에 지민이 놀란 눈으로 고개를 홱 돌리자 같이 앉아있던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윤기형. 나직한 지민의 말에 윤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저 새끼 먼저 처리하고 온다. 윤기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앞으로 나서려는데 뒤에 앉아있던 남자가 한발 빨랐다. 어느새 다 내려와 윤기의 어깨를 눌러 앉히는 그의 행동에 윤기가 인상을 팍 찌푸리며 그를 올려다봤다. 형은 지금 파트너도 없으면서 괜히 나서지 마요. 그의 말에 금방이라도 튀어나갈 것 같던 윤기가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태형은 영문 몰라 눈만 데굴데굴 굴리며 그들을 번갈아 봤다. 남준아. 그의 말에 태형을 데려다 준 남자가 거침없이 앞으로 가기 시작했다. 잠깐 거긴! 태형이 벌떡 일어나 막으려 하자 지민도 재빨리 일어나 태형의 손목을 잡아 돌렸다. 넌 인간이 나서지 말고 있어. 지민의 단호한 말에 태형은 꾹 입을 다물었다. 참 나, 지는 무슨 인간이 아닌 것 처럼 얘기하네... 그러다 문득 그 날 밤의 일이 떠올랐다. 붉은 머리를 흩날리며, 거대한 낫을 들고, 달빛을 받으며. 

그 날의 일을 생각하며 멍해진 태형의 시선에 닿은 것은 거대한 그 존재를 한번에 베어버리는 남준이었다. 그가 위에서부터 내려오면서 그 존재를 베어내리는 행동이 그 때의 지민과 겹쳐보였다. 지민과 윤기는 입이 떡 벌어져 그대로 굳어버린 태형을 힐끔힐끔 쳐다봤다.

미친듯이 쫓아왔던 그 존재는 반으로 갈라져 그대로 소멸되었다. 무슨 일 있었냐는듯 평화로운 고요함만이 남았다. 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남준이라는 사람은 천천히 걸어왔다. 배 좀 부르냐. 윤기의 물음에 남준이 고개를 저었다. 기별도 안가요. 윤기는 픽 웃었다. 진짜 애송이었나보네.

지금 그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지 않아요? 팔짱을 끼며 하는 말에 태형이 그를 쳐다봤다. 그의 교복 명찰에 정호석 석자가 정갈하게 박혀 있었다. 계단에 앉아있던 윤기가 엉덩이를 손으로 탈탈 털며 일어났다. 정리하자, 일단 이 인간은 상황조차 모르니. 그의 말에 지민도 머리를 헝클이며 일어났다. 자신을 노려보는 듯한 느낌에 태형은 괜히 몸이 움츠러들었다. 야 인간. 윤기가 태형을 가리키며 말했다. 에, 저, 저요? 태형은 그의 기에 눌려 자기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아무런 감정이 보이지 않는 무심한 눈에서 뭔지 모를 포스가 느껴져서 찍소리도 못하겠다. 네 쌍의 눈이 모두 자신을 향하는 그 상황이 어쩐지 무서워 태형은 자꾸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이상한 괴물한테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기껏 도망쳐 왔더니 이런 반응만 돌아온다. 태형은 어쩐지 서러워졌다.

너 얘 알지. 지민을 턱짓을 가리키며 묻는 말에 태형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반 친구인데요. 윤기는 미간을 미간을 꾹꾹 눌렀다. 그런 겉모습 말고, 인마. 태형은 마른침을 삼켰다. 주먹 쥐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까부터 쥐고 있던 구슬이 느껴졌다. 땀이 차는 기분이다. 문득 할머니가 어렸을 때 이 팔찌를 주시면서 하신 말씀이 떠올랐다. 태형은 자신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 말을 듣고도, 크면서도 딱히 그 말을 주위깊게 생각하지 않았었는데 이제서야 그 말이 바늘처럼 제 가슴을 쿡쿡 찔렀다. 부적은 잘 차고 있지? 그거 없으면 네 인생이 지옥불로 떨어지는 것이야. 할머니를 만날 때마다 그렇게나 확인을 하던 그 팔찌가 지금은 산산히 흩어져 몇 알만이 제 손에 남아있다. 할머니가 말한 그 지옥불이 이런 것이었어? 태형은 혼란스러웠다. 어떻게 말을 해야할지 감이 안 와 지민만 힐끗 쳐다봤다. 눈이 마주친 지민은 시선을 살짝 피했다.


거짓말 칠 거 없어. 어차피 우린 다 아니까. 정확히 네가 뭘 봤는지만 말해주면 돼.

아...

너 지민이 봤다며, 밤에. 오늘도 뭔가가 쫓아왔다며.

......

야 네가 정확히 어떤 앤지 알아야 우리도 대처를 하지.

그 쪽 사람 아니죠. 정체가 뭐야. 귀신이야?


허. 윤기가 헛웃음을 뱉었다. 인간, 내가 한낱 그런 잡 것으로 보여? 감정 없는 두 눈이 흉흉해지는 듯한 느낌에 태형은 재빨리 눈을 내리깔았다. 지민이 후 한숨을 내쉬었다. 형 됐어요, 얘는 진짜 아니에요. 야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이미 그거까지 봤는데. 남준이 재빨리 대꾸했다. 형이 계속 협박해서 지금 애 겁먹었잖아요. 호석의 난데없는 말에 윤기의 눈이 커졌다. 그의 두 눈에서 어이 없음이 느껴졌다. 야 내가 무슨 협박을 했다고 그래! 억울함에 목소리가 저절로 커졌다. 이거 봐요, 애 무서워서 주먹까지 쥐고 있는 거. 호석은 태형의 손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 이건 제가 뭐 들고 있는게 있어서 그래요. 태형이 재빨리 팔을 들고 손을 폈다. 태형의 손에 들린 것을 본 그들이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서로의 시선이 얽혔다. 태형이 다시 주먹쥐고 내리려 하자 지민이 그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태형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민을 바라봤다. 너 이거 누구한테 받았어. 지민의 목소리가 차갑기 그지 없어, 태형은 흠칫 놀랐다. 그걸 알아서 뭐하게. 태형의 말에 남준이 눈을 문질렀다.


인간, 너 지금 그런 자존심 세울 때 아니야. 우린 지금 너 지켜주려고 그러는거야.

그럼 먼저 사실대로 얘기해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저,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하나도 모르겠거든요. 갑자기 난생 처음 보는 괴물한테 생명의 위협을 당한 것도 무서워 죽겠는데 이렇게 네 명한테 둘러싸여 취조 당하듯이 있는 것도 무섭고, 뭐가 뭔지를 모르겠으니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요.

김태형, 이거 어디서 났냐고.


지민이 태형의 손목을 살짝 흔들었다. 이거 그냥 할머니한테 받은거야! 태형이 거칠게 손을 빼내었다. 지민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할머니가 이런 걸 어떻게 아는데. 태형은 말 없이 지민을 쳐다봤다. 자신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과 질문들에 태형은 정신이 없었다. 말도 안되는 상황에 휘말린 것도 머리 아파 죽겠는데 난생 처음 보는 사람들은 자신을 몰아붙이고 있다. 입술만 잘근잘근 씹던 태형이 결국 입을 열었다.


우리 할머니, 무당이었어. 그래서 부적으로 받은거야. 

허, 우습지도 않네. 감히 인간 따위가 운명에 손도 대고.

뭐?

너 그 구슬이 무슨 의미인지는 알기나 해?


지민이 턱짓을 태형의 손을 가리켰다. 태형은 주먹 쥔 손에 힘을 더 주었다. 그냥 건강하라고 준거겠지. 말 하면서도 입가가 부르르 떨리는게 느껴졌다. 태형은 이미 직감했다. 할머니가 왜 그렇게 당부에 당부를 했는지, 제 팔찌를 보자마자 그들이 왜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 단순한 팔찌는 아닐거라고 생각했다. 다만, 이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인지는 감이 오지 않았다.


모르는게 당연하지. 잘 들어. 그건 인간이 관여할 팔찌가 아니야. 너희 할머니는 그 얄팍한 팔찌로 감히 네 운명을 거스르려 했어. 그게 얼마나 큰 일인지 너는 감도 안오겠지.

......

여태까지 그 팔찌가 살아있는 것도 신기하다. 네 영력, 그 팔찌가 감당할 수준이 아니거든. 

영력?


그 할머니는 설명도 제대로 안해줬구먼. 태형의 반응에 윤기가 중얼거렸다. 얘기 하겠어요, 사신에게 묶이는게 싫어서 팔찌까지 채웠는데. 호석이 윤기의 말에 대꾸했다.


어쨌든 너를 보호해줬던 그 팔찌는 이제 없어졌으니 선택권도 없지.

... 무슨 선택.

내가 처음에 너한테 말했었지.

......

내 옆에 오면 명줄 짧아진다고.


순간 오싹함이 온 몸에 퍼졌다. 태형은 잔뜩 굳은 얼굴로 지민을 바라봤다. 지금 나 협박 하는거야? 태형의 물음에 지민이 피식 웃었다. 한낱 인간한테 내가 왜 협박을 하니. 그의 말에 순간 욱한 태형이 빽 소리를 질렀다. 아까부터 계속 인간 인간 그러는데 그럼 너는 대체 얼마나 대단한 존재시길래 그딴식으로 말하는데?

나? 지민이 차가운 눈으로 태형을 바라봤다. 무언가 보이지 않는 힘이 태형의 몸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숨 쉬기가 힘들어졌다. 태형은 지민을 쳐다봤다. 자신은 눈치 없는 사람이 아니다. 대충 지민이 어떤 애인지 본능적으로 감이 왔다. 믿을 수 없는 일을 너무 많이 봤다. 그럼에도 믿고 싶지 않았다.


사신(死神).


허. 태형은 허탈한듯 탁 숨을 놓았다. 손에 힘이 빠지면서 구슬들이 바닥에 투두둑 떨어져 사방으로 튀었다. 그 날 봤던 것은 꿈이 아니다. 오늘 본 것도 환상은 아니다. 모든게 현실이었고 사실이었다. 팔찌로 가린 얇은 장벽 너머에는 이토록 말도 안되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태형은 혼란스러운 눈으로 그들을 천천히 바라봤다. 누구하나 장난스러운 기색이 없었다. 진지한 그들의 얼굴을 본 태형은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다. 자자,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양 겁 주지 말고. 호석이 자연스레 태형의 어깨를 감쌌다. 얘는 나나 석진이 형 케이스가 아니니까 처음부터 설명해줘야 한다고요. 호석이 윤기를 보면서 말하자 윤기가 자신을 턱을 쓰다듬었다. 이유 모를 두려움에 몸을 잘게 떨고 있는 태형을 보자니 영 못미더워 윤기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지민은 태형의 앞에 다가가 섰다. 나랑 계약 해. 뜬금없는 지민의 말에 태형이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무슨... 계약.

내가 너를 보호해줄게. 대신 너는 나한테 힘을 빌려주면 돼.

... 무슨 개소리야.

넌 나 없으면 앞으로 끊임없이 아까 그 존재한테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될거야. 너를 보호해주던 팔찌가 부서져서 힘이 드러나버렸어. 걔보다 훨씬 더 사악하고, 무서운 애들이 네 힘을 가지려고 점점 몰려오겠지. 이번에는 운 좋게 살아남았다고 해도 언제까지 그렇게 네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지 아무도 몰라.

그게 무슨 소리냐고.

그게 네 운명이라고. 그 얄팍한 팔찌를 만들면서까지 부정하고 싶어했던 운명. 보기 좋게 실패했지. 한낱 인간이 바꿀 수 있는 운명이 아니야. 네 할머니가 어리석었어. 차라리 어렸을 때부터 만났더라면 네 몸 하나 지킬 수 있는 능력 정도는 생겼을텐데.

이상한 괴물한테 쫓기는게 무슨 운명이야!


태형이 악을 지르자 지민이 꾹 입을 다물었다. 하. 윤기가 작게 한숨을 쉬며 호석을 바라봤다. 호석은 살짝 어깨를 으쓱였다. 이 팔찌가 내 운명을 바꾼다고? 존나 웃기지도 않네. 태형은 발 밑에 굴러다니는 구슬을 세게 밟았다. 단단해 보이던 구슬은 생각보다 쉽게 바스라졌다. 태형의 눈에도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지민은 그 부서진 구슬 사이에서 맑은 기운이 퍼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고작 이런 기운을 모아놓은 걸로 저 엄청난 힘을 숨기려 했다니, 어리석기 그지 없다.


웃기지마. 나 여태까지 영혼을 봤으면 봤지, 그딴 이상한 것들에게 목숨 위협 받은 적 한번도 없었거든? 네가 뭔데 내 운명 운운하면서 계약 하니 마니 하는건데. 계약? 웃기고 자빠졌네. 정확히 그게 뭔지도 모르는데 내가 덥썩 하자고 하겠냐?

야. 네가 뭐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

넌 선택권이 없어. 이 계약에는.


태형은 할 말을 잃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납득이 가지 않았다. 애초에 명줄 짧아진다는 소리가... 이거였어? 태형의 작게 떨리는 목소리에 지민은 잠시 그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 때는 팔찌에 가려 너를 제대로 못봤을 때고, 지금의 넌...


나한테 묶인 운명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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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사실 판타지도 좋아합니다

사신인 지민이가 보고 싶어서 쓰는 글

되게 여러가지가 짬뽕 되어 있어서

엔딩을 보기는 힘들듯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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뷔민 무제



야 김태형, 쟤 귀신본대.


제 친구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하는 말에 태형은 살짝 얼굴을 빼 가리키는 곳을 봤다. 자신보다 몇사람 앞에 서 있는 아이는 평범하기 그지 없었다. 쟤가? 안그래 보이는데? 태형의 말에 친구는 살짝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쟤가 옆동네에서 왔는데 귀신 보는 애로 그렇게 유명했대. 그래서 처음에는 애들이 장난식으로 떠봤는데 막 뒤에 귀신 있다는 둥, 넌 붙어있는 귀신 때문에 명이 짧다는 둥, 그런 소리 해대서 애들이 가까이 안간다나봐.


흐응. 태형은 감흥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무당 아니냐. 태형의 반응에 친구는 답답한듯 가슴까지 팍팍 쳐댔다. 쟤 모르는 애 너 밖에 없을거다, 어쨌든 가까이 가지 말라고. 친구가 쫑알쫑알 떠들어대는 것을 듣는둥 마는둥 하는 태형의 시선은 그의 뒷통수에 꽂혔다.


운동장에서 실시한 입학식이 끝이나고, 모두들 자신의 반으로 들어가기 위해 우르르 학교 입구로 몰렸다. 멀찍이 서 있던 태형은 학생들이 다 들어갔을 때 즈음 느즈막히 들어갔다. 사람들 틈에 끼여서 정신없이 들어가는 것은 질색이다. 학교 안은 새학기의 설렘으로 복작복작했다. 1학년... 4반. 문 위에 달려있는 문패를 힐끗 올려다 본 후 교실 안을 보니, 이미 같은 반 아이들은 각자 자리에 앉아 있었다. 김태, 너 왜 이렇게 늦게 와! 제 친구가 옆자리를 비워놓은 채 손을 흔들었다. 태형은 자연스레 그쪽으로 발을 옮기려다 문득 걸린 시선에 우뚝 멈추었다. 제일 끝 자리에 혼자 앉아있는 아이. 본 것이라곤 뒷통수 밖에 없었지만 분명 그 애가 맞다고, 태형은 생각했다. 목 끝까지 채운 셔츠에 꽉 묶여있는 타이, 단정하게 입은 조끼와 마이. 턱을 괸 채 창 밖만 보고 있는 그의 머리가 천천히 돌아 태형과 눈이 마주쳤다. 부드러워 보이는 흑색 머리와 같은 새까만 눈동자. 태형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쭉 다가와 그의 옆 책상에 가방을 턱 올려두었다. 헉하고 급하게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교실 여기저기서 들렸다. 어느새 시끄럽게 교실을 울리고 있던 소음들이 사라졌다. 모든 시선이 교실 뒷편, 태형과 그 아이에게 쏠렸다.


여기 자리 없지? 태형은 답도 듣지 않고 털썩 앉았다. 태형은 슬쩍 그 아이를 봤으나, 그는 아무런 표정을 짓지 않았다. 감흥없는 무표정을 태형을 쓱 본 후 다시 창문 밖으로 시선을 돌릴 뿐이었다. 태형의 잘리에서 두번째 앞에 앉은 친구는 손짓과 입모양만으로 태형에게 무언가를 말을 했다. 대충 보니 왜 자신의 옆에 앉지 않고, 그런 음산한 애 옆에 앉느냐는 것 같았다. 태형은 가볍게 무시했다.



이름 뭐야?


......


박지민? 난 김태형.



태형은 그의 교복에 달린 명찰을 힐끗 보고, 자신의 명찰을 굳이 잡아당기면서 보여주었다. 지민은 아무 말 없이 태형을 봤다. 어디 살아? 나는 이 동네 사는데. 어느 중 나왔어? 난 태은중 나왔어. 이 학교는 입학 첫 날부터 야자할까? 야자 안하고 싶은데 야자 뺄 수는 없나. 오늘은 야자 안했으면 좋겠다. 너도 알지는 모르겠지만 이 학교 매점 존나 유명하거든, 나중에 같이 갈래? 태형만 이야기 하고 지민은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 아니, 듣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턱을 괸 채 태형을 멍하니 보기는 하는데, 답이 없다. 아무렴 좋았다. 태형은 눈을 마주치고 있다는 것 만으로 제 이야기를 듣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태형은 불굴의 의지로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주위 애들이 힐끗힐끗 태형을 쳐다보며 속닥거렸다. 쉬는시간 종이 치자 친구가 빠른 속도로 다가와 태형의 팔을 잡고 무작정 교실 밖을 나왔다. 야, 야! 왜이래! 태형은 이유도 모른 채 그저 끌려갈 뿐이었다. 너 미쳤어?! 교실과는 조금 떨어진 로비에서 갑자기 빽 소리를 지르는 친구에, 태형은 영문을 몰라 눈만 끔뻑거렸다.



갑자기 그 자리에 털썩 앉는것도 모자라 입까지 나불대냐!


아 그럼 옆에 앉았는데 궁금하잖아.


그 애랑 친하게 지내지 말라고. 그러다 부정 타면 어떡해!


무슨 부정. 보니까 그렇게 나쁜 애 안 같아. 그냥 네가 착각하고 있는 거 아니야?


아니야. 걔 맞아. 박지민. 귀신 보는 애. 생긴것도 존나 음침하게 생겼잖아.


에에? 눈이 어떻게 됐냐? 존나 순딩순딩하게 생겼던데?



태형의 말에 친구는 손으로 얼굴을 부여잡았다. 하여튼 이 새끼 이상한데 고집 오진다니까. 혀를 쯧 찬 친구는 태형을 봤다.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듯 순진해 빠진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니, 자신이 나쁜길로 유혹하는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래, 네 알아서 해라. 친구는 한숨이 섞인 말을 뱉었다. 며칠동안 지켜봐, 다른 애들이 그 애를 어떻게 대하는지, 왜 그렇게 대하는지 잘 생각해봐.




태형은 거의 하루온종일 지민의 뒤를 졸졸 쫓아다녔다. 너 따라오지마. 처음에 지민이 그 말을 뱉었을 때, 태형은 감격스러운 표정을 했다. 세상에 지민이가 드디어 말을 했어! 그러면 지민은 한숨을 쉬며 또 입을 꾹 다물었다. 이동수업이 있을때나, 밥 먹을 때나 어디든지 지민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입을 움직였다. 지민이 거의 뛰는 속도로 태형을 피해다니지만 태형은 끈질겼다. 너 왜 계속 쫓아오는데? 지민이 격앙된 목소리로 태형에게 쏘아붙이면 태형은 똑같은 대답만 했다. 너랑 친해지고 싶어. 지민은 이해할 수 없었다. 다른 애들은 다 나를 피하는데 왜 얘는 이렇게 끈질기게 붙어오는거지, 내 소문 못들었나.


입학한지 일주일 정도 지났을 때, 태형은 제 친구가 한 말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일단 지민의 주위에는 아무도 오지 않는다. 아주 가끔 자신 혼자 있을 때 애들이 다가와 지민의 옆에 있지 말라는 소리만 한다. 지민은 항상 혼자 다닌다. 그가 혼자 다니는 것을 본인도, 주위도 신경 쓰지 않는다. 그렇다고 다른 애들이 지민이를 따돌리는 것도 아니다. 그들이 지민을 보는 눈은 항상 비슷하다. 약간의 꺼림, 공포심. 그게 친구가 말한 귀신을 본다는 소문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태형은 끈질기게 그의 옆에 붙었지만 딱히 재수없다고 생각되는 일은 일어난 적이 없었다. 그가 귀신을 본다는 것도 모르겠고, 그냥 평범한 17살 남학생일 뿐이었다. 도대체 어쩌다 그런 소문이 도는지는 모르겠지만 딱히 꺼릴 이유가 없는데 그를 피하는 것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태형은 진심으로 지민과 친해지고 싶었다. 왜 그런 마음이 들었는지 이유는모르겠지만 교실에 들어온 첫 날, 딱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민은 부지런히 움직이던 다리를 결국 멈추고 뒤돌았다. 제 뒤에는 태형이 따라오고 있었다. 자신이 멈추자 태형도 걸음을 멈추었다. 다섯걸음 정도의 거리. 태형과 지민은 학교에서부터 지금까지 그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속에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크로스백 끈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지민은 결국 입을 열었다. 아까부터 왜 계속 따라와. 나도 우리집 이 근처야. 태형이 받아쳤다.



거짓말 치지마. 너 이 길로 다닌 적 없잖아.


진짠데. 우리집, 여기로 가도 나와.


......


같이 가자.


너 왜 이렇게 자꾸 나 따라다녀? 나랑 같이 있어봤자 좋을 거 없어.


왜?


......

친구랑 같이 있는데 왜 좋을게 없는데.



끈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후. 지민의 입에서 다시 한숨이 나왔다. 내가 진짜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고개를 살짝 숙인 채 혼잣말 하듯 중얼거린 지민이 고개를 들어 태형을 바라봤다. 눈이 마주쳤다. 야자 끝난 후 어둠이 내려앉은 골목에서, 마주친 지민의 눈이 반짝반짝 거렸다. 되게 오묘한 눈이라고, 태형은 순간 생각했다. 까만데 반짝거리네. 밤하늘처럼.



나, 사실.


......


귀신 봐.


......


이건 진짜야. 그냥 떠도는 헛소문이 아니라.


...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네.


그리고 나랑 같이 있으면 명줄 짧아져.


괜찮아. 나 명줄 존나 두껍고 길거든. 하늘에서 내려온 동앗줄 수준이야.


그건 뭐야.


햇님달님 몰라? 사람 두명은 살릴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해.



허. 지민의 입에서 나온 웃음에 태형도 따라 씨익 웃었다. 너 아까 진심으로 웃었지. 아닌데. 태형의 말에 지민이 급정색 했다. 나 너 웃은 거 처음 봐. 태형은 지민의 말을 무시했다.



나 웃은 거 아니라니까.


네 광대가 위로 살짝 솟아오르는 거 봤어.


아니야.


그래, 아니라고 칠게.


......


너 그거 비밀이야?



태형의 뜬금없는 물음에 지민은 말 없이 태형을 쳐다봤다. 귀신 본다는 거, 비밀이었냐고. 태형이 다시 물었다. 아... 뭐. 지민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나도 하나 말해줄게, 내 비밀. 뜬금없는 말에 지민은 당황스러웠다. 첫만남 때부터 태형은 당황스러움의 연속이었다. 갑자기 제 옆에 앉은 것부터 해서, 대답도 없는데 계속해서 말 거는 것, 주위 사람들의 시선과 만류에도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것. 그가 한 행동 하나하나 다 뜬금없었고 이때까지 겪어본 적 없던 경험이라 지민은 그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너도 나한테 비밀 알려줬으니까 나도 너한테 비밀 알려줄게.


... 뭔데.


나도 귀신봐.



야, 나 장난 아니야. 지민은 인상을 팍 굳혔다. 매번 장난스러운 미소를 가지고 있던 태형은 지민의 말을 듣자마자 따라 얼굴을 굳혔다. 나도 장난으로 한 말 아닌데. 태형의 목소리에는 장난기라고는 하나도 담겨있지 않아 지민은 오히려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나 이때까지 너한테 거짓말 한 적 없어. 앞으로도 거짓말 할 생각 없고. 나, 진짜로 귀신 봐.


......


그러니까 친구 할래?



태형은 손을 내밀었다. 다섯걸음 정도의 거리에서 악수랍시고 뻗은 손에 지민은 헛웃음을 뱉었다. 미안한데, 나 너 부담스러워. 지민의 말에 태형이 뻗었던 손을 그대로 제 바지 주머니에 넣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안부담스럽게 천천히 다가가지 뭐. 태형이 한걸음 다가갔다. 지민은 그만큼 한걸음 멀어졌다. 그리고 나. 지민의 다시 입을 열었다.



다른 사람이랑 친구 할 생각 없어.


......


난 혼자가 편하고 앞으로도 혼자 있을거야. 그러니까 더 이상 말 걸지마.



태형은 아까부터 입을 꾹 다문 채 말이 없었다. 이 정도면 알아들었겠지. 지민은 그대로 돌아서 멀어졌다. 태형은 가만히 그의 뒷모습만을 바라봤다. 깜깜한 거리에 가로등만이 길을 밝혀주었다. 지민은 가로등의 범위를 지나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철벽 개쩌네. 태형은 문득 생각했다.











그렇게 쫓아다니더니 하루만에 포기야?


친구의 말에 태형은 대꾸없이 빨대로 우유를 쭉 빨아들였다. 난간에 두 팔을 기대어 저 멀리 보이는 산 어딘가 즈음에 멍한 시선을 두었다. 잘근잘근 빨대를 씹었다. 내가 아는 김태형이 이렇게 포기가 빠른 애가 아닌데. 친구의 말에 태형이 푸스스 숨이 섞인 웃음을 뱉었다. 그렇지, 이렇게 포기할 김태형이 아니지. 태형이 중얼거렸다.


오늘 지민과는 한마디도 섞지 않았다. 태형 나름대로 지민의 말을 존중해주는 중이었다. 그런데 내가 다가가지 않겠다고는 안했거든. 태형은 아무 생각 없는 듯 멍 때리는 것 처럼 보여도 지금 머릿속 톱니바퀴는 바쁘게 돌아가고 있는 중이다. 평생 안쓰던 나노단위 톱니바퀴까지 굴리고 있는 중이니까 기다려라. 태형은 또 잘근잘근 빨대를 씹어댔다.


근데 너 왜 이렇게 걔를 신경쓰냐? 친구의 말에 위아래로 움직이던 턱이 움찔 멈추었다. 태형은 생각지도 못한 물음에 멍해져 입까지 살짝 벌어졌다. 그러게. 한참 후에 탁 내뱉듯 나온 말에 친구가 헛웃음을 지었다. 아무 이유 없이 다가가기에는 그 애가 너무 위험하지 않냐. 친구의 말에 한번도 그를 본 적 없던 태형이 오늘 처음으로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 애랑 나랑 비슷한 점이 많아. 그래서 끌리나봐.


허, 어이가 없네. 뭐가 비슷한데. 그 애랑 너랑 접점이 1도 없어.


아니, 있어.


뭔데.



친구의 말에 태형의 표정이 한층 진지해졌다. 친구는 태형의 표정 따라 자신도 진지한 표정으로 태형의 입가를 주시했다. 비-밀. 갑자기 활짝 웃으며 해맑게 말한 태형에, 친구는 뒷통수 얻어맞은듯 멍해졌다가 빽 소리를 질렀다. 개새끼야!!!




지민은 많은 것이 미지인 애였다. 애초에 같이 다니는 친구가 없어서 그런지 그에 대한 어떠한 것이라도 아는 애들이 한명도 없었다. 그 흔한 카톡 단톡방에도 그는 없었다. 그렇다고 폰이 없는 것은 아니다. 모두가 그의 번호를 알려고 하지 않았고, 그가 먼저 번호를 가르쳐 주지도 않았다. 애초에 다가가기를 꺼려하는데 그 애에 대해 아는 것이 있을리 만무했다. 어차피 서로 엮이기 싫은데 굳이 다가가서 뭐해, 너도 괜히 걔 근처 돌다가 화 입지 말고 그냥 떨어져. 모든 아이들이 태형에게 그렇게 말했다. 중학교 때도 그를 가까이 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고 한다. 설사 친근하게 다가가도 그쪽에서 철벽을 치니 질려서 떠나간 것도 없지 않아 있었다고 했다. 어쨌든 진짜 귀신 보는지 어떤지는 모르는데 좀 무섭기는해. 친구들의 대화 내용을 들으면서도 태형은 의아했다. 지민이가 어딜 봐서 무서워 보인다는건지, 어떻게 봐야 애가 소름돋게 생겼다는 건지, 태형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체육시간, 서너명이서 옹기종기 모여서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 지민은 저 멀리 스탠드에서 앉아서 멀거니 바라볼 뿐이었다. 무리에 섞여 있던 태형은 힐끔힐끔 지민을 바라봤다. 무릎에 팔을 받치고 양 손으로 턱을 괸 지민과 눈이 마주쳤다. 지민은 자연스럽게 태형의 눈을 피했다. 야, 김태형 너 수비로 들어가. 한 친구의 말에 태형은 어어, 대충 대답하며 다시 지민을 바라봤다. 이제 지민은 아예 고개를 숙여 땅을 바라보고 있었다.



박지민은 체육 안 해?


아 걔 몸 아프다고 중학교 때부터 체육 안했어.


진짜? 어디가 아픈데?


몰라. 걔에 대해서 우리가 뭘 알겠냐.


정신이 아픈 거 아니야? 그래서 귀신 보는 거 아니야.



그들끼리 깔깔 거리면서 하는 말에 태형은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그의 시선은 자꾸만 지민 쪽으로 향했다. 이제는 가져온 책을 보고 있었다. 등나무로 만든 천장 아래 스탠드에 앉아있는 지민은 혼자만 다른 세계에 있는 사람 같았다.



쟤 가끔 보면 진짜 혼자 동떨어져 있는 느낌 들지 않냐?


아오 씨, 깜짝이야!!



태형은 갑자기 제 옆에서 말을 거는 친구에, 화들짝 놀라며 두어걸음 뒷걸음질까지 쳤다. 존나 마음이라도 읽은 줄 알았네. 태형은 속으로 말을 삼키며 친구를 봤다. 내가 무슨 귀신이냐, 존나 놀라네. 친구의 빈정거림에 태형은 후 숨을 내쉬었다.



가끔보면 뭐라고 해야하지... 사람이 아닌 것 같아.


뭐?


혼자 있을 때... 아 언어 딸려서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하여튼 그래. 가끔 우리랑 다른 세계에 있는 것 같아.


......


쟤 귀신 본다더니 알고보면 지가 귀신인 거 아니야?



태형은 아 짜증을 내며 친구를 노려봤다. 농담도 재밌어야 농담이지, 존나 화 나는 말이었다. 태형의 말에 친구가 넉살 좋게 웃었다. 야 말도 안되는 거니까 농담이라고 하는거지. 태형은 다시 힐끗 지민 쪽을 바라봤다. 넓고 기다란 스탠드에 덩그러니 혼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을 보니 어쩐지 넋이 빠져나가는 느낌이라 태형은 괜히 눈을 부릅 뜨며 정신을 다잡았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게 아니었구나. 저런 모습을 보면 전부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문득 깨달았다. 박지민은 정말로, 자신과는 다른 사람 같았다.






갑자기 비가 내렸다. 하필 하교 시간에 맞춰서 비가 오냐. 태형은 입구에 서서 쯧 혀를 찼다. 소나기였으면 좋겠지만 빗줄기를 보니 금방 그칠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태형은 비 오는 날을 싫어했다. 축축하고 습한 것은 질색이었다. 무엇보다...



아 씨발 또 눈 마주칠 뻔 했어.



태형은 작게 중얼거리며 습관적으로 왼쪽에 차고 있던 팔찌를 만지작 거렸다. 이미 닳을대로 닳아버린 낡은 팔찌였지만 태형에게는 꽤나 소중한 팔찌였다. 어떤 불안한 일이 있어도 이 팔찌를 만지면 조금 나아졌다. 실제로 그런 효험이 있다기 보다는 그냥 기분이었다. 할머니가 어렸을 때 채워주신 팔찌였다. 다른 건 기억이 안나도 할머니가 이 팔찌를 주신 날은 어제 일어난 일 처럼 생생했다. 팔찌를 제 손목에 채워주면서 몇번이나 당부하시던 말씀을 잊을 수 없다. 절대로 빼서는 안된다고. 태형이를 지켜주는 부적이니까 언제나 차고 있으라고. 그래서 태형은 십몇년 째 팔찌를 차고 다녔다.


축축하고 습기가 많은 날에는 그만큼 귀신들이 많았다. 아니, 귀신인가. 알 수 없다. 그냥 일반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의 존재가 많이 돌아다녔다. 태형은 그들이 사람만큼 익숙했다. 지금은 절대 기억나지 않지만 만약 아기 때 기억이 남아있더라면, 갓 태어난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이 의사와 엄마, 아빠, 그리고 그들이었을 거라고 태형은 가끔 생각하곤 했다. 왜 보이는지는 알 수 없다. 그냥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 어렸을 적 때부터 그들이 눈에 보였다. 그들의 존재를 인식하기 전에는 그들과 자주 놀고는 했었다. 그것은 생생히 기억한다. 분명히 5명이서 술래잡기를 하고 있었는데 엄마는 그 모습을 보더니 소리를 질렀다. 혼자서 술래잡기를 하고 있다고 했다. 태형은 자신의 옆에 쪼르르 서 있는 네명의 친구를 부정당했다. 그리고 할머니가 그 팔찌를 주셨다. 부적이라고 한 팔찌. 사실 태형은 그 팔찌가 정말로 부적의 효능을 하고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그 팔찌를 찼다고 해서 그 존재들이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봐, 지금도. 눈 앞에 있잖아.


그냥 맞으면서 가야겠다. 태형은 천천히 빗 속으로 걸어갔다. 순식간에 온 몸이 젖었다. 아무렴 상관은 없었다. 가끔 아무 이유 없이 비를 맞으면 그것도 재밌긴 하지. 태형은 천천히 걸었다. 제 옆에서 우산을 든 채 급히 지나가는 사람, 작은 우산을 억지로 두명이서 쓰고 가는 사람들. 자신처럼 우산을 미처 챙겨오지 못해 잔뜩 맞으며 허둥지둥 뛰어가는 사람. 다양한 사람들이 태형을 스쳐갔다. 사람이 아닌 존재도 태형을 스쳐갔다. 그들을 지나칠때마다 약간의 오한이 들었다. 그 오한이 크게 느껴질수록 상대를 하면 안되는 존재였다.


집까지는 걸어서 20분 정도 걸리는 곳에 있었다. 내가 도착하기 전에 비가 그칠까. 태형이 그런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빗줄기가 점점 얇아지기 시작했다. 미친듯이 퍼부어도 결국 소나기였다. 야자까지 다 끝나고 집에 돌아가는 길이라 주위는 깜깜하기 그지 없었다. 그냥 깜깜한 수준이 아니었다. 하늘에 누가 먹물이라도 퍼부은 마냥 흑 그 자체였다. 몸이 서늘했다. 자꾸만 오한이 들었다. 아, 진짜 이사가자니까... 태형은 괜히 투정을 부리며 발걸음을 더욱 빨리 했다. 태형이 살고 있는 동네는 이상하게 그 존재들이 많았다. 묘하게 소름끼치는 이 오한을 자주 느끼는 것이 너무 싫었다. 동네 자체가 오래된 동네인데다가 주택가여서 골목골목이 많아서 더 그런듯 했다.


갈림길이 나왔다. 왼쪽으로 가면 비교적 밝은 골목길이지만 집에 갈 때 조금 돌아서 가야한다. 오른쪽으로 가면 집 가는 시간의 거의 반은 줄어들지만 가로등이 거의 없는데다가 왠지 으스스한 폐건물을 지나야 한다. 잠시 고민한 태형은 결국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비를 쫄딱 맞아서인지 추워지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꼼짝없이 감기에 걸리고 말 것이다.


아까부터 계속 자신을 도와달라는 소리가 들려 태형은 아예 두 귀를 막았다. 수근수근 거리는 소리가 듣기 싫었다. 아 왜 맨날 나한테 도와달래 짜증나게. 태형은 거의 경보하듯 발걸음을 빨리 했다. 옛날부터 한낱 인간한테 도대체 무엇을 바라고 도와달라고 하는지 알 수가 없다. 나보다 훨씬 더 뛰어난 존재들이 뭐가 부족해서 인간한테 도움을 바랍니까, 예?! 언젠가 한번 태형이 화가나서 소리를 빽 지른적이 있었다. 어디선가 태형의 목소리를 들은 그 존재들이 여기저기서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때서야 태형은 깨달았다. 저 새끼들의 이야기를 절대로 들어주면 안된다는걸.


폐건물이 가까워지자 알 수 없는 기운이 느껴졌다. 태형은 자신도 모르게 속도를 늦추었다. 뭐지, 뭐지 이 긴장감은. 태형은 큰 눈만 도륵도륵 굴리면서 오른쪽에 있는 폐건물을 천천히 지나쳤다. 그리고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바로 오른쪽에 폐건물 입구가 있었다. 안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전혀 보이지 않는 칠흑이었다. 마른침을 삼켰다. 지나가고 싶은데 어떤 중압감 때문에 도저히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발목을 잡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중력이 제 발바닥에서 끌어당기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몸 위에서 내리누르는 것 같기도 했다. 숨쉬기가 힘들었다. 몸이 뻣뻣하게 굳는 것 같기도 했다. 살면서 이런 느낌은 처음이라 어찌 할 바를 모르겠다. 극도의 긴장감에 온 몸에 힘이 들어가서 그런가. 태형은 심호흡을 하면 한걸음 옮겼다. 힐끗 옮긴 시선의 끝은 폐건물의 입구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미지(未知)가 이상하게 태형을 끌어당겼다. 새까만 어둠이 호기심을 자극했다. 이 호기심은 자신의 속에서 나오는 것인지 무언가의 존재가 그렇게 자신을 유혹하고 있는건지 분간도 가지 않았다. 아 씨발, 그냥 왼쪽으로 갈걸. 이제와서야 후회해봐도 돌이킬 수가 없었다. 물을 잔뜩 먹은 옷마저도 무겁게 느껴졌다. 태형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그렇게 천천히 미지의 어둠 속으로 깊숙히 들어갔다.


이 폐건물은 일종의 아지트 같은 곳이었다. 태형은 한번도 이 건물 안에 들어와본 적이 없지만 흔히 말하는 양아치들의 아지트로 이용된다고 들었다. 그래도 이 늦은 시간까지 여기서 놀고 있지는 않겠지. 태형은 방 같이 나누어진 곳을 슬쩍 보며 생각했다. 건물 짓는 자재물들만 쌓여있고 그저 잘 다듬어진 콘크리트일 뿐인 이 곳에 왜 발을 들여는지 제 자신도 이해가 안갔다. 아 설마... 문득 든 생각에 짜증스레 머리를 헤집었다. 제 호기심은 아무리 생각해도 절대 아닌 것 같은 당한건가. 태형은 후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불러들이고 또 제 이야기 들어달라고 그러겠지. 알만한 상황에 태형은 헛웃음만 났다. 시간을 봤다. 11시 40분.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빨리 집에나 가야지 싶어서 몸을 돌리는 순간 바로 위층에서 엄청난 소리가 났다. 뭐야! 태형은 바로 겁을 먹으면서도 거의 반사적으로 소리가 난 곳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전혀 달갑지 않은 상황인데다가 끌리지도 않는데 이상하게 몸이 폐건물 쪽으로 왔었다. 누군가의 장난에 의해서 거의 무의식적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 이 상황에 놓이게 하기 위해서. 누가 꼭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 같았다.


태형은 자신과 시선이 마주친 지민을 보며 동공이 확장되었다. 온 하늘을 뒤덮던 구름은 다 어디로 갔는지 어느새 달빛이 옥상에 닿고 있었다. 그 달빛 아래 지민의 표정이 그대로 드러났다. 지민도 자신을 보고 거의 경악에 가깝게 놀란듯 했다. 태형은 충격에 제대로 말도 나오지 않았다. 아니, 이게 무슨... 어버버 거리는 태형을 보며 지민은 당혹스러웠지만 지금은 그런 태형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태형은 제 눈 앞에 보이는 광경이 정녕 현실인지 분간이 안갔다. 아, 이거 꿈 아니야 혹시? 그렇지 않고서야 지민이가 공중에 있을 수가 없잖아. 누군가 자신을 툭 치면 그 자리에서 바로 쓰러질 수도 있을 정도로 태형에게 지금 이 상황은 충격 그 자체였다. 공중에 있던 지민은 그대로 떨어지면서 들고 있던 거대한 낫을 휘둘렀다. 새파란 빛이 사방으로 퍼져서 순간적으로 주위가 밝아졌다가 바로 어두워졌다. 지민은 당혹스러움에 착지를 제대로 못해 발을 삐끗하고 휘청이며 쓰러졌다. 그 충격에 지민이 들고 있던 대낫이 쿠당탕 큰 소리를 내며 널브러졌다. 아... 지민이 작게 앓는 소리가 들리자 퍼뜩 정신을 차린 태형이 그에게 다가가려 했다. 오지마! 지민의 큰 소리에 금방이라도 뛰쳐나가려던 태형이 우뚝 멈추었다.


지민은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여러가지 생각이 마구 뒤엉킨 채 날뛰었다. 태형도 마찬가지였다. 제 머릿속에서 규칙적으로 움직이던 톱니바퀴가 어긋나 제멋대로 뒤틀려버렸다. 그러니까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엉망진창이었다. 혼돈의 카오스였다. 넓은 옥상에 각 끄트머리에 서서 서로를 쳐다보며 생각을 정리하려 애썼다. 그래봤자 정리 되는 것은 없었다. 애초에 말도 안되는 일이 일어나버렸으니 정리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너... 두사람 사이의 정적 끝에 지민의 목소리가 작게 튀어나왔다. 태형은 말 없이 지민을 바라봤다. 가로등 불빛도 미치지 않는 이 곳에 유일한 빛이라고는 은은하게 닿는 달빛 밖에 없었다. 태형은 문득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너... 내가 보여?


... 뭐?



지민의 물음에 순간적으로 헛웃음이 나왔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물음에 말문이 막혔다. 지민은 잔뜩 경직되어 있었다. 옆으로 쓰러진 자세 그대로 상체만 들어 태형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무슨. 태형이 입을 열었다.



너 그 말 진심이야? 나 장님 아니야.


내가 보인다고?


야, 너 왜그래.


어떻게 내 모습이 보인다는 거야!


지민아.



... 일단 너 발목부터 어떻게 하자. 태형은 아까부터 신경쓰였던 발목을 보며 지민에게 다가갔다. 혼란스럽기는 태형도 마찬가지였다. 분명이 지민이가 공중에 있었지. 저 이상한 대낫을 들고. 태형이 힐끗 대낫을 보는것을 알아차린 지민이 재빨리 손을 뻗어 대를 잡아 바로 옥상에서 뛰어내렸다. 박지민! 태형이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며 옥상 밑을 내려봤다. 아무도 없었다.


그저 흙만 보이는 바닥을 보자마자 발끝에서부터 쭉 타고 올라오는 소름에 태형은 천천히 몸을 뒤로 물렸다. 뭐야. 태형은 멍하니 있다, 문득 지민이 이상하다고 생각한 이유가 떠올랐다.


달빛을 받은 지민의 머리색은 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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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질러버렸다.

지금 쓰고 있는 것도 많으면서

결국 또 하나 써버리고 말았다

와 근데 제목을 뭐라고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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뷔민 사투리 쓰는 청게가 보고 싶어서 쓰는 썰



여기 나오는 청춘들이 아마 그대가 생각하는 청춘은 아니겠지만. 욕설 많음 주의, 성적인 용어 주의. 그런 거 1도 보기 싫다 하시는 분들은 그냥 뒤로가기 누르세여.






-----



지민이.


왜.


좋아한디.


또 시작이다.



지민은 이제 익숙하다 못해 지겨운 레퍼토리에 아무렇지 않게 무시할 수 있는 경지에 올랐다. 참 저새끼도 지극정성이다, 웬만하면 받아줘라. 정국의 말에 지민이 끔찍하다는 듯 인상을 팍 찌푸리며 정국을 이상하게 쳐다봤다.



니는 남 얘기라고 함부로 나불대지 마라. 니가 받아주든가.


미칬나.


야 내도 니한테는 관심 없다, 섀꺄.



정국이 학을 떼며 하는 말에, 태형이 가운데 손가락을 올렸다.











전정국. 박지민. 김태형. 셋은 일명 불알친구였다. 한 동네에 태어나서 같은 골목을 쏘다니며 코찔찔이 시절 때부터 함께했다. 야, 씨발 세상 사람이 우리를 다 지랄 쌩까도 우리는 서로를 쌩까면 안된디, 알았제. 존나 다른 애들은 몰라도 우리는 영혼이 묶였다고. 살면서 인생 친구 한 두 놈은 있어야지.


골목 한가운데서 서로의 새끼 손가락을 걸고 약속을 한게 4년 전이다. 그리고 지금, 먼저 쌩까면 안된다느니 소울메이트라느니 온갖 있어보이는 말은 다 갖다붙이면서 평생 친구를 약속하자던 김태형이 그 약속을 제일 먼저 깨려 하고 있었다. 별 다른 건 아니었다. 김태형은 평생 친구를 약속한 두 놈 중 한 놈에게 그 이상의 감정을 느꼈을 뿐이었다. 태형이 그런 감정을 느낀 것이 이제 1년을 넘어가고 있었다. 짧다고는 할 수 없는 시간이다.


태형은 자신의 감정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알아차린 계기도 그닥 평범하지는 않았다. 태형은 정국과는 목욕탕에 간 적이 수도 없이 많았는데 이상하게 지민에게는 목욕탕 가자는 소리가 안나왔다. 지민이 체육복 갈아입는답시고 셔츠를 벗을 때마다 이상하게 자신이 열 오르는 기분에 슬쩍 눈을 내리깐 적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헐렁한 셔츠 사이로 목덜미나 허리께가 보이면 절로 헉소리가 나왔다. 그러기를 수개월, 현생에서는 모자랐는지 지민이 꿈에서까지 나오기 시작했다. 황홀한 악몽이 아닐 수 없었다. 새벽 내내 꿈 속에서 허우적 대다 꿈에서 깨자마자 몰려오는 현타에 태형은 한시간을 멍때렸다. 현타 수준이 아니었다. 온갖 죄책감이란 죄책감은 똘똘 뭉쳐져 제 몸에 덕지덕지 붙었다. 와 씨발 돌았다 김태형. 우짜노 씨발 이제 짐니 얼굴 다 봤다. 와 미친 니가 사람이가, 친구랑 그 짓 하는 꿈까지 꾸다니. 와 존나 우짜지 아 학교 몬가겠는데. 아, 짐니 얼굴 어떻게 보노... 세상 잃은 표정으로 침대에 널브러져 있던 태형은 띠링- 문자 오는 소리에, 썩은 동태 눈깔 같은 눈으로 감흥없이 문자 내용을 봤다.



[태태 오늘 7시 반까지디 진짜 늦으면 직인다 니 제 시간에 온나]



어허어엉으흫읗. 태형은 괴성을 내며 좌절했다. 문자만 봐도 죄책감이 쓰나미처럼 밀려와 무자비하게 태형을 몰아붙였다. 어뜩하지, 진짜 학교 몬가겠는데. 태형은 힘이 다 빠진 두 손으로 간신히 문자를 쳐서 보냈다.



[니네 먼저 가라 내 일 있어서 난주 가께]


[뭔 일 구라치지 마라 니가 뭔 일이 있는데 니 또 늦잠잤제 이젠 아주 막나가는기가]


[그런 거 아니다 아 그냥 니네 먼저 가라 내가 알아서 가께]



그 이후로 오는 문자는 없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태형은 그대로 엄지손톱을 잘근잘근 깨물면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일단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게 제일 중요했다. 그래, 제일 중요하다. 그리고, 그리고... 전정국이랑 몰래 만나야 했다. 전정국한테 상담을 좀 받아봐야겠다. 물론 박지민 몰래.


박지민은 고1 때 야자를 신청했고 태형과 정국은 신청하지 않았다. 야자를 빼야 하는 확실한 이유가 있어야만 빼주겠다는 담임의 말에 태형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병 때문에 병원을 가야 한다고 말했고, 정국은 아버지가 도장을 운영하시는데 그 도장을 물려 받기 위한 훈련을 초등학교 때부터 하고 있다고 말했다. 도대체가 말도 안되는 이유였지만 이상하게 담임은 야자를 빼주셨다 (항간에는 그 둘의 얼굴이 담임을 관대하게 만들었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 그리고 그것은 왠지 사실 같았다).  어쨌든 그 덕에 태형은 정국에게 상담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 태형은 그 상담을 위해 기어코 집에 가겠다는 정국을 억지로 햄버거집으로 데려갔다. 햄버거 싫다며 니나 많이 쳐무라며 지랄 지랄하던 정국은 막상 제 앞에 햄버거가 나오자 한 입 베어먹으며 그래서 뭐 때문이라고? 태형에게 물었다. 태형은 테이블을 제 검지로 탁탁탁 두들기며 정국이 그 말 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야 내가 이상한 꿈을 꿨는데.


니가 이상한 꿈을 꿨다고?


어.


니한테 이상한 꿈이면 존나 이상한 꿈이겠는데.


어 존나 이상한 꿈인데... 내 말 듣고 있제.


어.


입에 들은 건 다 삼키고 말하든가.



감자튀김까지 한움큼 입에 넣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정국이 영 못미덥지만 그래도 이런 얘기를 터놓을 수 있는 사람이 정국 밖에 없어, 태형은 참을인을 마음에 새기며 콜라 한 입 들이켰다. 근데 니는 햄버거 안먹나. 정국의 물음에 태형은 그를 흘겨봤다. 존나 빨리도 물어본다.



아 그런 거 먹을 여유 없다고.


뭔데 니. 김태형 맞제.


시비 거는기가.


니가 햄버거를 마다한다고?


내 얘기를 들어보면 다 이해된다.


...해봐.



정국은 시선을 태형에게 둔 채 다시 햄버거를 한 입 베어먹었다. 태형은 다시금 그 기다란 검지를 테이블에 톡톡 두들기며 마음을 다잡았다. 있다이가...



......


있다이가.


그래 있다. 김태형이 있는데. 뭐.


내가 야한 꿈을 꿨는데.



정국은 태형의 말을 듣자마자 햄버거를 던지듯 내려놓으며 태형을 못마땅하게 쳐다봤다. 그게 이상한 꿈이가, 그게 이상한 꿈이면 나는 씨발 살면서 이상한 꿈만 꿔왔네.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고. 태형이 손을 저으며 하는 말에 정국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은 채 다시 햄버거를 집어 들었다.



박지민이 나왔거든.


이야 각 나온다. 왜 뭐 니 앞에서 박지민이 존나 니 취향인 여자랑 섹스 하드나.


아니.


그럼 뭐지. 니가 박지민 앞에서 섹스 하는 꿈?


어어어.


뭔데 그럼. 섹스가 아닌가?


맞는데.


씨발 뭔데 그럼. 존나 니 앞에서 박지민이 그 짓 하는 것 보다 이상한 꿈이 있나.


내랑 박지민이랑 하는 꿈 꿈.



푸훕. 태형의 말이 끝나자마자 정국의 입에서 햄버거와 감자튀김의 잔해들이 빠짐없이 분출되어 태형쪽 테이블과 그의 얼굴을 빛냈다. 햄버거를 다 뒤집어 쓴 김태형보다 더 충격을 먹은 정국은 계속해서 기침을 했다. 사레가 제대로 걸렸다. 아 씨발... 김태형은 작게 읊조리며 옆에 있는 냅킨으로 천천히 닦았다. 정국이 먹은 충격이 어느정도인지 아주 잘 알기 때문에 그를 욕할 수는 없었다. 이번만큼은 뭘 하든 이해를 해야했다. 간신히 진정이 된 정국은 기침의 여파로 눈가에 눈물까지 매단 채 천천히 되짚었다.



그러니까 니 말은 지금, 니랑 박지민이랑 섹스를 했다고?


어...


진짜 그 짓을 했다고?


어... 아니, 진짜로 한 게 아니라 꿈 속에서.


그러니까. 꿈 속에서 진짜 그 짓을 했다고.


....어.



뭔가 이상한 기분에 태형은 고개를 갸웃 하긴 했지만 어쨌든 인정했다. 헐. 정국은 제 콜라를 한입 마셨다. 와 씨발 대체 뭔 꿈이지. 정국의 말에 태형이 격하게 동감을 했다. 그니까 내가 깨어나서 존나 현타왔다니까, 씨발 우짜지 걔 얼굴을 몬보겠다. 태형의 말에 정국은 그제서야 오늘 하루종일 이상했던 태형의 상태가 이해가 되었다. 오늘 박지민 좆빠지게 피해다니긴 했지. 하다하다 박지민이 빡쳐서 복도 한가운데서 '그래 씨발 보지마라 썅! 니랑 내랑 끝이라고 씨발 섀꺄!' 하고 소리치기까지 했으니 말 다했다.



야 내 우짜지... 진짜로 박지민 몬보겠다....


... 그냥 니만 입 다물고 있으면 된다이가.


그게 안된다고 씨발. 걔 볼때마다 그 꿈이 생각나는데 우짜노.



아 씨발. 정국은 바로 썩어들어간 얼굴로 다시 콜라를 한 입 물었다. 아니 그게 왜 안되는데, 어차피 걍 개꿈 아이가 이자뿌라. 정국의 말에 후 태형이 한숨을 쉬었다. 이 새끼 왜 이렇게 단순하게 생각하지. 태형은 갑자기 후회가 되기 시작했다. 상담사를 잘못 골랐나.



야 니는 대가리 뒀다가 얻다 써먹을라고 거 들고 다니는데! 내가 그렇게 걍 쉽게 이자뿔 수 있으면 진작에 그라고 박지민이랑 어깨동무 하고 다녔겠지!


그래서 씨발! 지금 내 잘못이가 이게! 얻다대고 지랄이고 지랄은. 지가 그딴 꿈 꿔놓고 이상한데서 지랄이네.


아 우짜냐고. 내가 지금 니를 믿고 있어서 이런 수치스러운 꿈까지 다 털어놨다이가.


니가 수치스럽나. 박지민이 수치스럽지.


아 걔한테는 얘기하면 안되지. 내가 니한테만 이래 은밀하게 얘기하는 의미가 없다이가.


그래서. 뭘 원해서 내한테 얘기하는데.


어?



태형은 순간 머리를 얻어맞은 것 처럼 멍해졌다. 뭘 원하냐고? 그러고 보니 내 왜 전정국이한테 이런 걸 얘기 할라고 했지. 딱 봐도 혼란스러워 보이는 태형의 표정에 후 한숨을 쉰 정국이 다 먹은 햄버거 종이를 둥글게 구겨서 앞에 있는 트레이로 던졌다. 트레이 위로 툭 떨어진 종이 뭉치를 태형이 멍하니 쳐다봤다. 쪼르륵. 거의 안남은 콜라를 기어코 마셔댄 정국은 컵을 탁 소리 나게 내려 놓으며 태형을 바라봤다.



니 박지민 보는 눈 이상한 거 알제.


어? 맞나.


니 내 볼 때랑 박지민 볼 때랑 다르다이가. 솔직히.


모르겠는데.


지랄. 내는 니가 박지민 볼때마다 토가 쏠린다. 씨발 눈깔에 설탕을 쳐발랐어요 아주 그냥.


.....


박지민이 그걸 모르는 것도 용하다, 용해. 너거 둘이 존나 대단하다고.


뭔 말인데.


니 솔직히 박지민이 좋아한다이가.



뭐래 씨발, 와 참 나, 허 참 나, 니가 지금 뭔 말 한건 줄 아나? 태형은 두 팔을 벌리며 진심으로 어이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정국은 아예 태형의 콜라를 끌어와 마시기 시작했다. 현실부정도 적당히 해야 재밌지. 정국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태형을 쳐다봤다.



불알 친구 다 필요없다니까. 불알은 두개인데, 맞제. 니네 둘이 붙어댕기면 되겠네.


야 니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데.


그래서. 이제 어쩔긴데.



정국의 말에 태형은 또 헙 입을 다물었다. 혼란스럽겠지. 정국은 에휴 한숨을 쉬었다. 그런 꿈까지 꿨으면서도 제 마음 하나 못 알아차린 태형이 순진한건지 바보인건지도 이제는 모르겠다.



진짜 우짜지. 이대로 가면 진짜 박지민이 내 안볼라 할텐데.


그냥 다 덮고 없던 일로 하던가, 고백 하던가.


고백?!



빽 소리를 지르는 태형에, 정국이 놀래서 그를 쳐다봤다. 아, 아니... 고백까지는 무슨, 내가 아직 걔를 진짜 좋아하는지 아닌지도 모르는데... 아니 애가 가끔 귀엽기도 하고 막 하는짓이 존나 음 좀 그렇긴 한데... 동공지진을 일으키며 횡설수설 하는 태형을 감흥 없는 눈으로 보던 정국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어떻게 한다고?



내가 알아서 할게.


그래. 그래야지


근데 니 개안나.


뭐가.


친구 둘이 그래 돼도 개안나.


알 바가.



새끼, 존나 쿨하디. 태형은 괜히 정국의 팔뚝을 퍽 쳤다.






이게 무려 1년 전의 일이었다. 태형은 그 다음 날 지민에게 무작정 구애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태형의 변화는 지민을 진심으로 걱정하게 만들었다. 와 이라노, 니 어데 아프나, 니 어데 가나, 왜 이렇게 계속 어데 갈 것 처럼 얘기 하노. 좋아한다고 말하는 태형과, 그런 태형을 안아주면서 걱정하는 지민을 보는 것은 코미디였다. 정국은 그 둘이 하는 콩트를 멀리서 지켜보면서 킬킬 댔다. 지민의 입장에서는 갑자기 변한 태형이 이상하기 그지 없었고, 죽을 때가 다 되어서 하지 못한 말을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 짓도 한두번이어야지, 몇개월 넘어가니까 익숙해지다 못해 질려갔다. 이제는 좋아한다는 태형의 말을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 있는 경지에까지 올랐다. 참 이래 보면 김태형도 존나 불쌍하다. 정국은 멀리서 태형에게 심심한 위로를 속으로 보냈다.




봄이었다. 그래봤자 고등학교 2학년인 사내새끼들이 봄에 어떠한 의의를 두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 마음 속에서도 털 한가닥 만큼의 낭만이라던가 로망 같은 것은 있었다. 지민은 예쁜 것을 좋아했다. 이를테면 벚꽃 같은 것. 옛날부터 다른 건 몰라도 지민이 벚꽃놀이 만큼은 환장할 정도로 챙겼다. 야 이 날에 벚꽃이 억수로 예쁘단다, 보러 갈거제. 지민이 그렇게 얘기를 하면 그 날 두 다리가 부러져서 휠체어를 타고 다닌다 하더라도 나와야 했다. 항상 주관이 확실한 태형과 정국에게 양보하던 지민이 무조건 양보 할 수 없는 한가지가 그것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어릴때의 이야기지, 고등학교 올라가고 야자라는 것을 하게 되면서 그런 날 하나 챙길 여유가 없었다. 공부는 벽돌에 스스로 시멘트질까지 하면서 담 쌓은 태형, 정국과는 다르게 지민은 나름 공부라는 것을 하긴 했다. 니는 어린 동생 보살피야 해서 집에 빨리 가야된다고 해라. 라고 직접 야자를 빼야 하는 이유를 만들어 준 태형과 정국의 선의를 마다하며 야자를 신청했다. 물론 수특 한 문제 풀고, 노래 3곡 듣다가, 또 한 문제 풀고, 들리는 가사 받아 적고, 잠이 좀 오니까 잠 좀 자주다가 쉬는시간 종 땡 치면 매점 미친듯이 달려가는 것이 대부분이긴 했지만 그래도 야자 하는게 어디야. 지민이 고등학교 올라오면 하고 싶은 것 리스트 중 하나인 야자를 나름 착실히 하고 있는 중이었다.


태형과 정국은 2학년 때도 여전히 야자를 하지 않았다. 이번 담임은 이유고 자시고 다 필요 없고 예체능 빼고 무조건 해야 한다는 사람이었다. 정국은 1학년 때 입이 닳도록 말했던 아버지 도장을 물려 받아 훈련을 받아야 한다는 개뼈따구 같은 소리를 그대로 해서 빠질 수 있었다. 태형은 거들떠 보지도 않던 요리에 관심이 생겼다며 요리학원을 끊었다. 자격증을 따야 한다는 그의 말에 담임은 흔쾌히 빼주셨다. 그를 기어다니기 시작할 때부터 봐 왔던 정국과 지민은 그 소리가 얼마나 개소리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요리는 씨발 니가 뭔 요리를 하는데, 구라를 쳐도 좀 믿음직스러운 구라를 쳐야지. 정국의 타박에도 태형은 진지했다. 뭐 씨발 내도 가끔 엄마한테 요리 배우거든. 태형의 말대로라면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의 어머니는 실제 요리 학원도 운영하고 계시는 한식 전문가셨다.


어쨌든 그 덕에 지민은 올해도 야자 마치고 혼자서 학교에 가야 했다. 그게 그렇게 심심하다던가 외롭다던가 하지는 않았다. 양쪽 귀에 이어폰 꽂고,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면서 집까지 걷는 길은 나름 괜찮았다. 특히 봄에는 벚꽃까지 피어 있으니까. 산 바로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는 학교였기 때문에 교문에서 나와 내리막길을 걸어야 헀다. 인도는 없이 차도만 있는학교 앞 길은 가드레일 바깥쪽에 양 옆으로 벚꽃나무가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벚꽃이 필때마다 이 거리는 끝내주게 예뻤다. 지민은 이 길을 정말 좋아했다. 특히 밤에 야자를 마치고 이 길을 내려가면 가끔 불어오는 바람에 벚꽃비가 내리는 것이, 그렇게 예쁠 수 없었다.


교문을 막 나온 지민은 저만치에 보이는 인영에 걸음을 멈추었다. 처음에는 순간 잘못 본 줄 알았다. 그러나 눈을 비비고 봐도 태형이 맞았다. 하기사 저런 이기적인 얼굴이 하늘 아래 두개일 수가 없다. 가드레일에 걸터 앉아 살짝 위를 바라보고 있는 태형은 같은 남자가 봐도 잘생기긴 했다. 나 참, 신이 이래 이기적이어도 되는기가. 지민은 혀를 쯧 차며 혼잣말을 했다. 그 순간, 태형이 고개를 돌려 지민을 바라봤다.


밤바람이 살짝 불었다. 나무들은 서로 부대끼며 너도나도 벚꽃비를 날렸다. 태형의 머리가 바람따라 휘날렸다. 지민은 제 시야를 방해하는 자신의 앞머리를 살짝 옆으로 넘겨 잡았다. 태형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왔다. 태형이 지민의 앞에 딱 서서 손을 내밀었다. 아나. 태형이 살짝 제 주먹쥔 손을 흔들었다. 이게 뭔데. 지민이 물었다.



손 피봐.


왜.


아, 좀 해라 할 때 바로 딱딱 하면 어디가 덧나나.



살짝 짜증을 내는 태형에, 지민은 입을 삐죽이며 손을 내밀었다. 말고, 손바닥 내밀어봐. 그의 말에 지민은 손을 뒤집었다. 태형이 그의 손 위에 무언가를 두었다. 태형의 큰 손이 빠지자 지민의 통통한 손바닥에 벚꽃잎이 두어개 나타났다. 뜬금 없는 벚꽃잎에 지민은 순간 피식 웃었다.



이게 뭐꼬. 앙증맞고로.


떨어지는 벚꽃 잡으면 첫사랑 이루어진다드라.


니 그런 것도 믿었었나. 안그렇게 생기가꼬 은근 그런 거 잘 믿는디.


원래는 안믿었었는데. 이젠 믿어볼라고.



지민은 제 손에 두던 시선을 위로 올려 태형을 바라봤다. 왜 좋아하는 사람 생깄나. 지민의 물음에 태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금 바람이 불어왔다. 지민은 재빨리 주먹을 쥐어 벚꽃잎이 날아가지 않도록 꽉 잡았다. 그의 행동에 태형은 살풋 웃으며 지민의 머리를 살짝 헝클였다. 귀여운 짓만 하노. 태형은 입 안에 맴돌던 그 말을 애써 삼켰다.



그래 그 얼굴 작작 썩힐 때도 됐다. 눈데.


......


우리 학교 여신?


우리 학교에 여신도 있나.


그 왜 8반에 있다이가. 애들 다 걔 예쁘다고 난리드만.


아이다.


그럼?


니.


아 장난치지 말고.


장난 아이다.



지민은 살짝 놀란 눈으로 태형을 바라봤다. 태형은 웃음기 하나 없는 표정으로 자신을 지그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들 주위를 서성이고 있던 소음들이 순식간에 사라진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와 이리 조용하노. 지민은 묘한 정적이 주는 이 알 수 없는 기분이 너무 낯설었다. 태형을 바라보면서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태태 니 갑자기 와 그라는데. 지민의 조용조용한 목소리가 태형의 귓가에 팍팍 박혔다. 태형은 얼굴을 작게 구겼다.



니 좋아한다고.


야.


내가 맨날 얘기했다이가.


그건 장난,


난 니 가지고 장난 친 적 없는데.


......


내 마음 가지고 장난 친 적도 없다.


......


장난으로 넘긴건 니였지.



지민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지민 자신도 당황해서 주먹쥔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래봤자 다 보이는데. 두 귀가 타오르는 것도 작은 손 너머로 미처 가리지 못한 볼이 불그스름 한 것도, 태형은 다 봤다. 그의 얼굴이 붉어진 것은 어떤 의미인지는 모르겠다. 태형은 한발짝 다가가 제 얼굴을 가린 손목을 살짝 잡았다. 지민이 화들짝 놀라며 한발짝 물러나 태형을 바라봤다. 그의 붉은 얼굴이 한 눈에 드러났다. 니 빨갛다. 워, 원래 홍조 있거든! 태형의 말에 지민이 빽 소리를 질렀다. 그래, 홍조네. 태형은 아닌 걸 알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지민이.


......


니가 들고 있는 거, 그거 내가 처음으로 잡은 벚꽃이다.


......


좋아한다.



태형의 목소리가 낮고도 잔잔히, 지민의 귓가를 울렸다. 지민은 들고 있던 팔을 천천히 내렸다. 지민은 어색하게나마 남아있던 웃음을 지웠다. 태형은 진심이었다. 진심인 사람 앞에서 장난을 칠만큼 지민은 경솔하지 않았다. 제 주먹에는 아직 벚꽃 두 잎이 꽉 잡혀 있었다. 태형의 진심이었다. 벚꽃처럼 작을지언정 그 분홍빛만큼은 결코 거짓이 아닌.


첫사랑이었다.





















---


사실 나도 경상도 사람이지만

손으로 쓰는 사투리는...(말잇못)

애들 말은 소리 전달을 위해 맞춤법에 좀 안맞음


섀끼 - 오타 아님. 정확한 발음 알고 싶으면 아허라 정국이 섀파랗게 영상ㄱㄱ

개안나 - 괜찮나인데 솔직히 개안나가 더 리얼 사투리 말투

어어어 - 어→어↗어↘

아나 - 자. 여기. 뭐 별 다른 뜻 없이 뭐 건낼 때 쓰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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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뷔민국] 지민이를 사이에 두고 기싸움 쩌는 썰



기싸움이 막 엄청난 기싸움이 아니라 그냥 누가 더 지민이를 아끼나, 누가 더 지민이를 좋아하나 이런 거. 좋아하는 것도 이성적인 마음 보다는 그 친한 정도? 쯤으로.

일단 태형이랑 지민이는 중학교 때부터 친하게 지낸 사이. 고등학교도 같은 학교 다녔고 서로의 집에 엄청 들락날락 거리고 엄청 친했음. 고2때 태형이가 길거리 캐스팅으로 잠깐 어떤 드라마 아역을 맡게 됐는데 그게 엄청 대박이 나면서 태형이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배우로 데뷔하게 됨.

정국이는 대학 후배인데 유난히 지민이를 잘 따르고 지민이한테 철썩 붙어있는 애. 지민이도 정국이가 자기 동생 같고 그래서 엄청 아끼고 잘 챙겨줌. 둘이 같이 알바 하는데 태형이 틈만 나면 그 알바하는데 옴. 지민은 태형이 올때마다 머리가 지끈거림. 정국이랑 태형이랑 만나면 이상하게 둘이 엄청 왕왕 거려서.


야, 너 좀 떨어져라. 무슨 알바 하는데 그렇게 붙어있냐.

그러는 형이야 말로 안 바빠요? 뭔 허구헌 날 여기 온데? 돈 존나 벌었나봐, 그렇게 여유로운 거 보면.

어엉. 적어도 너보단 많이 벌었지.


그러고 눈싸움. 눈도 안아픈지 맨날 서로 노려봄. 중간에 끼인 지민은 질린다는 표정으로 카운터 문을 거칠게 열고 나가 바닥 청소함. 으이구 으이구, 저 새끼들은 허구허어언 날 싸우고 지랄들이야.

말싸움도 시답잖음. 저번에는 누가 더 지민이를 많이 아나로 엄청 싸워댐. 지민이는 항상 중간에서 어이 없다는 표정으로 어디까지 가나 보는 거임.


야 인마 그래도 내가 우리 지민이 중학교 때부터 알았어 짜샤.

언제 처음 알았냐가 중요한가. 어차피 지금 연예인이라서 형이랑 같이 보내는 시간도 없으면서. 저요, 대학 입학하고 한번도 지민이 형을 떠난 적 없거든요.

하이고! 잘나셨어요, 그래. 너 학창시절에 짐니가 얼마나 귀여웠는지 아냐? 볼은 이렇-게 통통해가지고는, 어? 태태- 이러고 불렀어.

나 참, 저도 맨날 꾹이, 우리 꾹이, 이렇게 부르거든요? 그리고 지민이 형은 지금도 귀여워요. 아, 물론 형은 시간이 없어서 많이 못봤겠지만.

뭘 많이 못 봐! 지금도 이렇게 버젓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보고 있구먼!


태형은 안그래도 큰 눈 더 크게 뜨면서 지민을 바라봄. 지민은 그런 태형이 어이가 없어서 허. 헛웃음 침. 야 너 진짜 안바빠? 지민이 말하면 태형은 언제 도끼눈 했냐는듯이 사르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임. 괜찮아, 괜찮아 나 아직 신인이라서 막 그렇게 바쁜 사람 아니야.

신인은 무슨, 이제 데뷔 5년차임. 나오는 드라마 마다 대박을 침. 눈도 깜짝 안하고 구라 치는 태형을 어이 없게 바라보다가 결국 고개를 절레절레 저음. 그래, 너 알아서 해라.


너 우리 짐니 춤 겁나 잘 추는 건 알고 있냐? 얼마나 잘 추는지, 막 크루 형들이 제바알- 제발 자기한테 오라고 막 사정 사정을 했었다니까.

형은 지민이 형이 술 마시면 얼마나 귀여운지 모르죠? 하긴 형은 술에 꼴아박을때까지 못 마시니까. 취하면 양 볼 잡고 우리 쩡구기- 하면서 뽀뽀,

뽀뽀? 야 박지민! 뽀뽀라니! 너 외간남자한테 막 그렇게 입술 내주는게 어딨어! 나는!

뽀뽀 안했어! 전정국 너 이상한 소리 할래?

전 분명히 받았는데요.

아씨, 나는! 나도 해줘!


지민은 들이대는 태형을 밀어냄. 쓸데없는 소리 하지마, 제발. 이제는 막 지민이 사정함.


그리고 지민이 형이랑 저랑 같은 고향이라서 같이 기차 타고 내려가고 그래요.

헹, 너 지민이 사투리도 못 들어봤으면서. 짐니가 어디 고향 내려가서 사투리 쓰디? 난 중학교때 처음 서울에서 짐니 만났을때 얼마나 끈끈한 동료애를 느꼈는지.


중학교 때 태형이는 대구에서, 지민이는 부산에서 올라와서 사투리 쓰는 사람이 둘 밖에 없었음. 태형의 말을 듣자마자 정국이가 지민이를 봄. 왜, 왜... 지민이는 정국이 눈빛에 살짝 쫄았음.


그러게. 형은 고향이 부산이면서 어떻게 사투리를 한번 안써요?

내가 여기 올라온지가 몇년인데. 다 까먹었어.

저도 해줘요. 아니 왜 저 형한테는 해주면서 나한테는 안해줘요?

이게 다 만난 세월의 차이인기라.


태형은 잔뜩 거만한 목소리로 사투리 한번 쏴 줌. 지민은 이마를 짚음. 아, 김태형 나가면 전정국 또 졸라대겠네. 벌써부터 머리 아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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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이렇게 귀엽게 투닥대는 거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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슙민슈짐 썰2



윤기쌤 첫사랑 이야기가 시들해질 무렵, 윤기랑 엄청 친한 국어쌤의 입에서 나온 발언 때문에 또 한번 학교가 뒤집어짐.


어? 너희 몰랐어? 윤기쌤 애인 있는데.


이 한마디에 그 반 학생들 멘붕. 쉬는시간 종 울리자마자 그 소문이 온 학교에 다 퍼진 시간은 불과 3분. 수업 끝나고 교실 나오자마자 우르르 달려와 제 앞을 가로막으며 무어라 왕왕대는 여학생들 때문에 윤기는 어리둥절. 저 멀리서 국어쌤은 무언가 찔린다는 듯, 미안하다는 듯, 난처한 듯, 되게 복잡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손 흔들어주고 있음. 애들한테 밀리면서도 저 자식 저건 무슨 뜻이지 하는 생각만 듦.

윤기는 그 다음 시간이 되어서야 왜 갑자기 애들이 미친듯이 자신에게 달려왔는지 알게 됨. 수업 종 땡 치자마자 교실문을 연 윤기가 한 발 교실 안에 들이자마자 학생들이 쌤 애인 있다면서요! 무슨 합창 하듯 동시다발적으로 소리침. 윤기는 깜짝 놀라면서 동공지진. 갑자기 국어쌤이 자신을 향해 손 흔들던 것이 생각남. 아씨... 윤기는 속으로 막 욕하면서 교탁 앞에 섬. 책펴라. 쌤 진짜 애인 있다는 거 맞아요? 자신의 말은 들리지도 않는지 애인 이야기만 하는 애들에, 윤기는 결국 한숨 쉼. 김남준 그 자식 입을 쳐버려야 해. 윤기 입에서 나온 국어쌤 이름에 다들 빵 터짐. 남준은 윤기와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였음. 윤기의 연애사를 다 아는 유일한 사람. 윤기가 처음 반한 그 사진을 보여준 사람이 남준이. 학생들 사이에서도 유명함 둘이 친하다고. 그래, 그래서 걔 어디까지 얘기했냐. 윤기의 말에 아이들의 말이 봇물 터지듯 나옴.

쌤이 애인 겁나게 아낀다고요. 안그렇게 보이는데 엄청 팔불출이라던데요. 쌤 지금 애인이랑 오래 사귀었다면서요. 쌤 막 애인한테 전화오면 입꼬리가 내려 갈 생각을 안한다던데요. 쌤 갤러리에 순 애인 사진 밖에 없다고 했어요. 막 애인분 번호 애칭으로 저장 해 놓았다고. 쌤 진짜 그렇게 안보였는데 되게 의외네요. 막 애인 이름도 그냥 심플하게 이름 두 자로 저장하고 그럴 줄 알았는데. 쌤 주말마다 애인이랑만 만난다고 그랬어요. 평일에는 시간이 안나니까 주말 방해하지 말라고 그런다고. 애인 사진 새로 찍은 거 있으면 보여준다고 그랬어요. 솔로 앞에서 염장 대놓고 지른다고 짜증나 죽겠다고 그랬어요. 진짜 확 헤어지라고 하고 싶은데 너무 예쁘게 사귀어서 그런 말도 안나오게 한다고요. 걔네는 사귄지가 몇년인데 무슨 아직도 사귄지 한 100일 된 사람들 처럼 지낸다고 그랬어요. 쌤이 애인 관련된 일이면 오버 개쩐다고 그랬어요. 너무 과보호 하는 것 같다고도 그랬어요. 너무 오냐오냐 해줘서 그 애인이 점점 버릇이 안좋아지면 어떡하냐고도 그랬어요. 남준쌤이랑도 아는 사람이라던데요.

김남준 쓸데 없는 말 많이 했네. 윤기는 왠지 모를 부끄러움에 고개를 못들겠음. 두 팔꿈치를 교탁에 올리고 얼굴을 가림. 야, 쪽팔려서 오늘 수업 못하겠다. 윤기의 말에 애들 또 빵터짐. 윤기가 거짓말은 아닌듯 귀가 진짜 터질듯 붉어져 있음. 내가 저번에 얘기 해줬었잖아. 애들은 어이가 없음. 쌤이 언제 이야기 해줬어요! 첫사랑 밖에 얘기 안해줬잖아요!

그래 그거. 윤기의 단답에 순간 교실이 정적이었다가 우워어어! 애들이 막 소리 지름. 뭐예요, 쌤 대박이다! 그 첫사랑이랑 지금까지 사귀고 있던 거였어요? 뭔데 겁나 설렌다! 쌤 사귄지 얼마나 됐어요? 4 5년 됐나. 오 뭐야 우리는 가망도 없었네. 아 쌤 진짜 좋아했는데 완전 나 혼자 사랑하고 나 혼자 차인 기분이야. 애들의 수근거림이 커지자 윤기가 조용히 시킴. 자 이제 됐지 수업한다.

아아ㅏ아아아 쌤 애인 이야기 더 해주세요. 애인분 아직도 처음 그 때처럼 좋아요? 겁나 좋은데, 매일매일이 새로운데. 헐 미친 진짜 윤기쌤 맞아요? 뭐냐 그 말은. 쌤 애인한테도 무뚝뚝해요? 미쳤냐, 걔 무뚝뚝한 거 엄청 싫어해 옛날에는 지금보다 더 무뚝뚝 했었는데 애인이 너무 싫어하고 서운해 해서 지금 그나마 많이 나아진거야. 와 쌤 그 사람 엄청 좋아하나봐요 성격 바꾸기 쉽지 않은데. 어 엄청 좋아해 매일 얼굴 볼때마다 미칠 것 같다, 그러니까 이제 책 펴.

이 일은 또 수업이 끝나자마자 온 학교에 급속도로 퍼지기 시작함. 막 애들이 윤기한테 달려와 진짜냐고. 진짜 애인 있었냐고 난리도 아님. 나 졸업하면 쌤이랑 사귀려고 했는데! 결혼하려고 했는데! 5년이나 사귀었는데 아직도 얼굴 볼때마다 미칠 것 같대. 미친 진짜 엄청 좋아하나보다. 와 그 사람 대체 어떻게 생겼으면 쌤이 그렇게까지 말하지. 저번에 쌤 이야기 했을 때 엄청엄청 귀엽게 생겼대. 얼굴도 하얗고 볼도 분홍분홍 하고 애교도 엄청 많고. 아 맞아 남준쌤도 애인분 아는데 하얗고 볼살 좀 있고 귀엽게 생기긴 했다고 그랬어. 야 제3자가 그렇게 말하면 그냥 게임 끝이야. 귀엽다는 것도 말이 귀엽다지 기본적으로 예쁘게 생겼을걸. 몸매도 개 좋을걸. 같은 학교라며 공부도 겁나 잘했겠네 쌤 존나 좋은 대학이잖아.

윤기쌤의 애인에 대한 소문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시작함. 그래서 나온 결론이 윤기쌤 애인은 겁나 여신급으로 예쁘고 하얀데 볼이 분홍분홍 하고 볼살이 좀 있어서 귀여운 편이고 애교도 많아서 하는 행동 자체가 귀엽고 몸매도 겁나 좋고 춤도 잘 추고 공부도 잘 하고 집도 좀 사는 완벽한 사람임. 남준은 그런 소문을 듣고 그냥 웃겨서 자지러짐. 민윤기는 째려봄. 왜 아예 틀린 말도 아닌 것 같구먼.





어느 날, 학교가 또 한번 술렁임. 저녁시간 때 즈음에 학교 정문에 한 남자가 벽에 기대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 서 있는데 누군지는 몰라도 겁나 귀엽게 생긴거임. 옷도 잘 입어가지고 겁나 훈훈함. 여자애들 다 창문에 붙어가지고 누군지 보고 있고, 지나가는 애들도 힐끔힐끔 쳐다볼 정도. 그 남자는 그 시선이 민망한지 고개만 숙이고 있고. 그러다가 여자애들이 다가와서 뭐라 말하면 대답같은 거 해주고. 막 살짝 웃어주는데 그게 또 귀여워서 다른 애들이 또 오고, 또 오고 그래서 무슨 연예인 온 것 처럼 그 사람 주위에 애들이 바글바글함. 누구 오빠인가? 남친인가? 추측이 난무함. 빠른 애들은 벌써 통성명까지 다 함. 오빠 잘생겼어요! 고마워요. 여기 왜 오셨어요? 누구 기다려요? 아 네 여기에 아는 분이 일하고 있어서요 오랜만에 같이 집 가려고요. 오빠 무슨 연습생이에요? 네? 아뇨 전 그냥 대학생이에요. 오빠 인기 많죠. 아니요 제가 뭐라고요. 헐 아니예요 오빠 웃는 거 보니까 진짜 대박인데? 오빠 막 인기많은 과 선배 스타일인데? 애들 얘기에 또 쑥쓰러워가지고 손으로 얼굴 가리고 웃음. 근데 그게 또 엄청 귀여운거임. 애들 난리남. 막 번호 따면서 오빠 다니는 대학에 갈거라고. 그래서 남자가 오시라고 환영이라고. 오빠 무슨 대학교 다녀요? 아 저 ㅇㅇ대학교 다녀요. 하는데 겁나 명문대인 거. 그래서 애들이 어색하게 웃으면서 노력은 해보겠다고.

그러다 야자 전 예비종 울려서 애들 다 야자 하러 교실 올라감. 창문 밖에서 보는데 윤기쌤이 나오더니 그 오빠한테 다가가는 거임. 윤기쌤이랑 오빠랑 뭐라뭐라 얘기 나누다가 갑자기 오빠가 막 웃더니 윤기쌤을 살짝 안고 윤기쌤은 머리를 헝클이는 거임. 아 저 오빠가 기다린다는 사람이 윤기쌤이었어? 헐 대박 윤기쌤이 안되면 저 오빠 소개 시켜 달라고 해야겠다. 그 장면을 본 여학생들은 다 그 생각함. 진짜 윤기쌤 어떻게 그런 훈남 오빠를 다 아냐고.





그 다음 날, 윤기쌤이 아침조회 하러 교실에 들어오자마자 어제 교문 앞에 서 있었던 오빠 폰번 딴 사람 다 나오라고 함. 애들 막 어리둥절 해 있으니까 윤기쌤 직접 한명 한명 돌아다니면서 폰 확인까지 함. 야, 아무리 걔가 멋있어도 인간적으로 임자 있는 사람은 건들지 말아야 하는 거 아니냐? 골키퍼 있다고 골 안들어가냐고 한 사람 나와, 이 자식들이 건들여도 걔를 건들여? 빨리 지워 인마. 애들은 설마 설마 하는 생각으로 물어봄. 쌤 혹시 어제 그 오빠... 오빠? 야 초면에 무슨 오빠야, 안되겠네 진짜 뭐 얼마나 얘기 했다고 오빠는 뭔 오빠냐. 그 분 쌤 애인이에요? 그래 내 애인이다, 어이가 없네 진짜 어제 물어보니까 이름에 대학에 폰번까지 물어보고 어쭈 나랑 해보자는 거냐 지금. 곧이 곧대로 다 얘기 해 주고 폰번 준 걔도 어이가 없어.




























슙민슈짐 썰1



윤기는 고등학교 수학 선생님임. 윤기는 이 고등학교에서 제일 젊은 남자 쌤인데다가 수업도 잘 하고 재미있고 대화도 잘 통하는 편이라 학교에서 진짜 인기 많았음.

왜 학교에 꼭 그런 쌤 있잖음. 처음에 수업 들어오시는 쌤 아닌데 오다가다 보거나 우연찮게 만나게 되거나 할 때 보면 겁나 무서운 쌤. 막 지나다니는데 겁나 무표정이라서 무섭고 하필 인성부 쌤이라서 무섭고 가끔 복도 같은데서 학생들 혼내고 있는 거 보면 개 무섭고 막 어찌어찌 들은 소문들이 겁나 살벌해서 웬만하면 그 쌤이랑 마주치지 말자 그 쌤 눈 밖에 나지 말자 했는데 2학년 올라가서 보니 수학 쌤이 그 쌤이라 와 진짜 어떡하냐고 안그래도 수학 시간 많은데 망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수업 듣고 하다보니까 무뚝뚝하긴 해도 말 하는게 존나 재밌고 막 그렇게 꽉 막힌 사람도 아닌 거.

윤기는 항상 2학년 문과 수학을 맡았음. 그래서 지금 올라간 3학년은 윤기의 진면모를 알아보고 겁나 인기 많음. 2학년은 이제 알아가고 있어서 인기몰이 중. 1학년만 이게 고등학교의 차이인가 싶어서 윤기만 보면 아무 잘못한 거 없으면서 오금이 저림.

항상 학교에 한명씩은 인기 많은 쌤이 있음. 그게 윤기인데 어느정도냐면, 입학식 때 선생님 소개한다고 2학년 문과 수학 담당 민윤기 선생님 하면 2 3학년 애들이 막 박수 치면서 미친듯이 소리를 지르면서 열광함. 1학년은 뭣도 모르면서 아 저 쌤이 그렇게 인기 많구나 하면서 보는데 얼굴만 보면 인기 많은 이유를 알 것 같은 정도. 윤기는 그 함성 들으면서 익숙하다는 듯 무슨 선거 나가는 것 마냥 손을 들어 가볍게 오른쪽 한번 왼쪽 한번 작게 손 흔들어줌. 매일 수업 들어가면 꼭 듣는게 자기 졸업하면 자기랑 사귀자는거랑 졸업하자마자 고백 할거라는 거랑 졸업하고 결혼하자는 소리임. 그럴때마다 윤기는 웃기지 말라면서 대학 들어가면 다 너희 나이만한 어린 남자한테 눈 돌아갈거라고 함.

윤기가 기본적인 능력치가 좋음. 문과였으면서 수능접수를 이과로 내가지고 학교를 전부 멘붕파티로 만들어놓고 수학교육으로 들어감. 대학에서 힙합에 물들어 잠깐 음악 했는데 생각보다 엄청 유명함. 윤기는 그냥 흑역사 좀 생성해줬다고 말하는데 공연도 꽤 크게 몇번 하고 그때 윤기가 쓰던 예명 검색어에 치면 나올 정도. 공연 영상도 유튭에 많이 돌아다니고 관련 글도 엄청 많고 하여튼 활동을 꽤 크게 했었음. 학교 축제에서 쌤들도 무대 하는데 거기서 랩 좀 했다가 애들한테 더 큰 인기를 모음. 그리고 체육대회때 한발짝도 안움직이는 사람이 막상 운동 한다 하면 꽤 잘하고 막 고등학생때까지 농구선수였다 그러고 하여튼 인생을 보람차게 보낸게 느껴짐. 겉도 속도 뭐 하나 빠짐없이 잘난게 딱 봐도 느껴져서 인기가 많을 수 밖에 없음.

이런 쌤들한테 궁금한게 연애 이야기. 애들이 가끔씩 윤기한테 여친 있냐고 물어봄. 그때마다 무표정으로 진도 나가거나 애들이 좋아 죽는 입동굴을 드러내며 웃기만 하는데 환장할 것 같음. 긴가민가 함. 아 애인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고. 딱히 커플 아이템으로 느껴지는 무언가를 하고 온 적이 한번도 없는 걸 보면 없는 것 같기도 한데 저 나이에 저 스펙이면 없는게 더 이상한 것 같기도 하고.

또 하나 궁금한게 첫사랑 이야기. 애들이 첫사랑 이야기 할때마다 윤기는 설레게 웃음. 아 내 첫사랑? 뭔가 그 말투가 아련한 듯 하면서도 아직까지도 그 감정을 기억하고 있는 듯 설레어 하는 그 표정에, 보는 사람이 다 설렐 정도임. 애들이 진도 나가기 싫다거나 놀고 싶을 때 첫사랑 이야기 해달라고 하면 가끔 윤기가 첫사랑 이야기 해줌.

쌤 옛날에도 인기 엄청 많았을 것 같아요 하면 고개를 저으면서 자기 엄청 귀차니즘 심해서 막 인간관계가 너무 협소 했다면서 그래서 나도 뭐 여자 만난다거나 그쪽에서도 나를 만나고 싶다거나 그런거는 딱히 없었다고. 언제한번 친구가 단체사진 같은 거 보여주면서 여기서 마음에 드는 사람 있으면 소개 시켜준다고 연애 좀 하라고 막 그런식으로 얘기해서 보는데 사진 보고 한 눈에 반했다면서 그런식으로 말함.

진짜 사진만 봐도 내 자신이 반한게 느껴지는데 실제로 보면 어떻겠냐? 우연히 학교 안에서 봤는데 진짜 그 자리에서 숨이 막혀서 쓰러질 뻔 했다.

그렇게 말하면서 짓는 표정에, 학생들은 벌써부터 차인 느낌 뿜뿜임. 쌤 첫사랑이랑 사귀었어요? 뭐지 그 질문은 사귀었으니까 말했겠지 짝사랑으로 끝냈으면 맘 아파서 입도 벙긋 안했다 첫사랑 말 나오기도 전에 너희 입 쳐버릴거야 인마.

어떻게 사귀었어요? 다른 물음에 또 추억 회상하는 특유의 표정이 나옴.


내가 지금 생각하면 겁나 찌질이었는데 그때 당시에는 세상 진지했지. 나 좀 알아봐달라고 괜히 많이 알짱대고 알게 모르게 챙겨 주고 그랬는데 사귀고 나서 물어보니까 하나도 모르더라. 그냥 나 혼자 뻘짓 한거지. 너무 모르게 해서 아무도 몰라. 어쨌든 그렇게 한 1년 가까이 뻘짓 하다가 나 음악 했던 거 알지? 내가 연말 무대를 하게 됐는데 내 친구가 또 그 애를 알았던거야. 걔는 좀 인맥이 이상하게 넓었어. 하여튼 내 친구가 그 애를 데리고 공연을 보러 와 준 거지. 난 처음에 걔가 나 그 애 좋아하는 거 아는 줄 알고 진짜 그 자리에서 기절 할 뻔 했다. 어쨌든 그렇게 뒷풀이에 그 둘이 데려가고 그러다 그 애 번호 땄어. 내 인생에 그렇게 떨린 적은 처음이다. 수능 점수 볼때나 대학 합격 보기 직전에도 그렇게 떨리진 않았는데.

그렇게 처음에는 친한 친구처럼 지내다가, 아 참고로 그 애가 나보다 두살이 어렸어. 처음 만났을 때가 24.99살이었다. 12월 31일에 공연이었으니까. 어쨌든 친구로 지내다가 3월 말이었나 4월이었나 벚꽃 구경 가다가 그 상황이 너무 좋아서 나도 모르게 툭 나왔어. 네가 좋다고. 그 말 뱉자마자 머릿속이 갑자기 새하얘지는 거야. 막 내 자신한테 욕이 다 나오더라. 헐 민윤기 이 미친 새끼 뭐하는거야. 개또라이 아니야 지금 여기서 왜 고백을 해 미친놈아. 별의 별 생각이 다 들더라. 내가 생각한 고백은 훨씬 더 먼 날에, 제대로 각 잡고, 끝내주게 좋은 날에, 완벽하게 준비된 상태에서, 진지하게 내 마음을 다 말하는 거였거든. 아 애초에 고백할 생각도 없었어. 얘랑 하는 연애는 그냥 꿈일 뿐이라고 생각했었거든. 이렇게 그냥 놀러갔다가 좋다 한마디 할 생각은 전혀 없었어. 너무 뜬금 없기도 하고 그냥 진짜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인 것 같아서. 그 와중에도 장난으로 들었으면 어쩌나 걱정 되기도 하면서 아 솔직히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장난으로 밖에 안들린다는 생각도 들고 그냥 완전히 멘붕.

그 애는 말이 없었어. 아 내가 좀 병신 같았던게 그렇게 내뱉은 이상 계속 어필 했어야 했는데 나도 너무 정신이 없어서 그 이후로 말이 안나오더라. 그 애는 그냥 그렇게 집에 가버렸어. 그리고 연락이 안됐었어. 피말리는게 이런 기분이구나 그 때 처음 느꼈다. 아 그러고 보니까 걔 때문에 처음 느껴본 감정이 많네. 어쨌든 바싹 마른 오징어가 이런 기분일까 싶을 정도로 내 몸에 물이란 물은 다 증발해서 빠짝빠짝 마르는 기분이었어. 그 날 이후로 집 밖을 못나가겠더라. 그냥 아 이게 차인거구나 싶어서 막 멍해지다가 눈물 나다가 허탈감에 웃음이 나오다가 그냥 미친놈이었어. 그딴식으로 허무하게 관계가 끝난것도 그냥 코미디 같고.

그러다 문득 너무 억울한거야. 내가 그 애 때문에 앓았던 내 마음이 너무 억울했어. 내가 이렇게나 오랫동안 품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끝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바로 씻고 좀 정돈하고 나름 괜찮은 옷 골라서 좀 정상적으로 보이게 하고 나갔어. 그 애를 만나서 진짜 쫑나든 어떻든 마음이나 던져놓고 가자 싶어서. 이제는 내 마음 나 조차도 감당하기 너무 무거워서 그냥 그 애 앞에 던져 놓고 가자, 그 마음 어차피 너 밖에 들어있지 않으니 너 알아서 해라. 싶은 심정으로. 많이 이기적이긴 했지만 그때는 그런 거 하나도 생각 안났어. 와 지금 생각해보니까 진짜 나 쓰레기였구나. 애한테 완전 부담주는 꼴 아니야. 여하튼 그런 거 하나도 생각 못할 정도로 나는 그냥 미쳤었고 음, 사람 꼴이 아니었어.

문자만 하고 그냥 하염없이 기다렸어. 그렇게 통보하면 결국 이 애가 나올 것이란 걸 알았거든. 그 애는 착했어. 결국 그 문자 거절 못하고 나올 것이란 걸 아주 잘 알았어. 그 애는 결국 나왔더라. 알고 그랬는지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좋아 죽는 옷 입고 왔었어. 그 와중에 또 그 애가 너무 이쁘니까 주체를 못하겠더라. 내 마음이 내 마음 같지가 않아. 아 너희 이거 명심해라. 진짜 미친듯이 좋아하는 누군가가 생기면 그냥 내가 내가 아니게 되더라.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난 나의 모든것이 그 애한테 맞추어지게 되었어.

그 애 집 앞에서 고백했어. 지금 생각하면 진짜 멋 없었는데. 아 이야기 하다 보니까 나 왜 이렇게 찌질한 짓만 했지? 그 애가 사귀어준게 용한데? 아니 무슨 사귀기 전부터 온갖 정 떨어지는 짓은 다 한 것 같아. 어쨌든 그때는 5월쯤이었던 것 같다. 거의 한달 반 만에 만났었어. 조금 더웠고. 밤이라서 가로등만 켜져 있고 주위에 아무도 없었지. 걔가 주택에 살았거든. 좀 좋은 주택. 애가 제 집 담벼락에 기대어 나를 봤어. 나를 바라보는 그 눈에도 숨이 턱 막히더라. 말 할 거 정리해 왔었는데 머릿속이 새하얘져서 기억이 하나도 안 나는 거야. 일단 마음을 가다듬고 그 애 이름을 부르는데 갑자기 목이 콱 매이면서 눈물이 나왔어. 진짜 또르르 이거 아니고 막 주륵주륵. 아 그냥 울었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입술을 막 깨물어서 소리는 새어나오지는 않았는데. 내가 성인이 되고 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운 날이었다.


헐. 윤기가 울었다고 하자 학생들이 겁나 놀람. 저 쌤이 울었다니 도저히 상상이 안됨. 쌤이 울었다고요? 누군가 되물어봄. 그래 인마 난 사람 아니냐? 나도 눈물 있다고. 쌤 아까 사귀었다고 했으니까 그 사람이 고백 받아준거겠네요? 다른 애 물음에 또 특유의 사람 설레게 하는 웃음이 나옴.


내가 온갖 찌질이 짓은 다 했다고 했지? 그 애 앞에서 울면서 고백했어. 지나고 나니까 쪽팔리긴 하더라. 어쨌든 미안하다고 내가 너 좋아해서 미안하다고, 친구 하나 잃게 만들어서 미안하다고. 그렇게 말했어. 근데 아직도 좋아한다고. 그때 했던 그 말 허언도 아니고, 착각한 것고 아니고, 그냥 정말 네가 좋다고. 나도 수십번 생각해보다가 그냥 내 마음 제대로라도 전하자 싶어서 왔다고. 이것도 미안하다고 괜히 너한테 부담주는 것도 싫었는데, 내가 참 속 좁은 인간이라서 솔직히 네 마음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고.

그 애가 가만히 듣고만 있다가 다가오더니 나를 꽉 안아주었어. 처음엔 혼란스러웠어. 이게 무슨 의미일까. 그냥 동정인가. 이렇게 하고 끝내자는건가. 나도 안아도 되는건가. 막 고민한다고 손도 어찌할 바 모르고 그냥 축 늘어뜨린 채 있었지. 근데 진짜 거짓말 같게도 걔도 고백을 하는거야. 자기도 좋아했다고. 그 때 내가 고백했을 때 심장 터지는 줄 알았다고. 근데 내가 말한 그 의미가 뭔지 몰라서, 헷갈려서, 그래서 도망치듯 돌아간거였다고. 오늘 또 이렇게 와서 그렇게 말해주니까 너무 고맙다고. 사실 자기도 오늘 무작정 우리 집으로 와서 이야기 할 생각이었다고 얘기하더라. 천만다행이지. 만약 걔가 나와 같은 마음이 아니었으면 나 완전 쓰레기에 구질구질한 남자로 남을 뻔 했어.


우우 새드엔딩이다. 아이들의 장난기 어린 야유에 윤기는 피식 웃음. 야들아, 그러니까 지금은 열심히 공부하고 원하는 대학 붙어서 좋은 애인 만나야지. 윤기의 말에 야유가 더 심해짐. 왜 이야기가 거기로 튀어요! 꼭 열심히 공부해야 좋은 애인 만나요?!  윤기는 아이들의 말에 더욱 진하게 웃으며 말을 이음. 미안하다 내가 말을 잘못 했네, 뭘 하든 너희들이 하고 싶은 걸 열심히 해 그리고 좋은 애인 만나.

쌤 그 첫사랑 예뻤어요? 한 학생의 물음에 윤기는 살짝 고개를 숙여 얼굴을 가림. 아, 죄송해요... 애가 살짝 의기소침해져서 사과하니까 윤기가 손을 저음. 아니 그게 아니라 그 애 얘기만 하면 아직도 표정관리가 안돼서. 그래도 명색의 선생님인데 너희 앞에서 사적인 감정 막 드러내고 다니면 좀 그렇잖아. 큼큼 윤기는 절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내림.

내 첫사랑 겁나 예쁘지. 솔직히 나도 조오금 작은 편이긴 한데 걔도 작은편이었어. 그리고 좀 하얀 편이었고. 애가 말랐는데 이상하게 볼은 좀 통통해서 찹쌀떡 같았어. 아 그리고 홍조가 있어서 볼이 불그스름 할 때가 있었는데 겁나 귀여웠지. 애가 성격도 막 자기는 애교 없다고 하면서 기본적으로 애교가 장착되어 있는 애였어. 엄청 귀여운짓 많이 한다니까. 본인은 그걸 모르지만. 그냥 애 성격 자체가, 본래 타고나기를 그렇게 타고 난거야. 춤을 되게 잘 췄어. 그래서 댄스 동아리 하고 그랬다. 인기가 너무 많아서 나 대놓고 걔한테 다가오는 애들 쳐내고 그랬어. 그 애는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사람이 오면 좋다고 헤헤. 진짜 그럴때는 좀 힘들긴 했는데. 뭐 어쩌겠냐. 원래 더 좋아하는 사람이 지는거라고.

이 날 이후로 온 학교가 난리남. 윤기쌤 첫사랑 대박이라더라. 윤기쌤 그렇게 웃는 거 처음 봤다. 무슨 어제 1일이었던 것 처럼 말하더라니까? 진짜 내가 들은 첫사랑 이야기 중에 역대급이었다. 운게가 들어가는 반마다 첫사랑 이야기가 끊이질 않음. 쌤! 쌤 반 애들한테 첫사랑 이야기 해줬다면서요! 첫사랑이 그렇게 예쁘다면서요! 저희한테도 이야기 해주세요! 그럼 윤기는 단호하게 말함. 한 번 입 밖에 꺼낸 이야기는 다시 하지 않는다. 치사하다고 막 난리나도 윤기는 입도 벙긋 안 함. 다음에 다른 얘기 할 기회 있으면 할게. 그러고 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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