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뷔민 말도 안되는 육아물 썰15

길/육아물


제발 한번만 부탁한다고 사정사정 하는 태형을 거절할 수 없어, 지민은 결국 승낙했다. 고마워 지민아, 나중에 꼭 갚을게! 태형이 발랄하게 소리치며 나가고 나니, 그 넓은 집에 고요한 적막만 돌았다. 갑자기 찾아온 고요가 익숙하지 않아 지민은 멋쩍게 뒷목만 긁적이다 집으로 들어갔다. 거실은 시계 침 움직이는 소리만 들렸다. 소파에 앉아 집을 쭉 둘러봤다. 제 집처럼 드나들어 익숙할 대로 익숙해져버린 집인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어색하게 느껴지는 건지. 이런 집에 혼자 살았을 태형의 심정이 이해는 갔다.

 

거실과 가까운 방에 아기가 자고 있다. 아이가 잠에서 깨기 전까지는 이 고요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지민은 두 눈을 가만히 감았다. 사실 지민은 아직도 아기가 미웠다. 태형이 아기를 키우면 주위의 시선이 곱지만은 않을 것이다. 온전한 사랑을 받지 못해 외로운 아이가 또 좋지 않은 시선을 받으며 아기를 키울 생각을 하니, 지민은 제 눈앞이 다 캄캄했다. 외로운 아이가 아기에게 사랑을 주고받는 법을 가르칠 수가 있을지. 어찌 보면 그 아기는 태형의 욕심이었다. 외로움에 사무쳐 사랑을 갈구했던 자신에게, 자신과 같은 처지의 아기가 툭 나타났으니 강하게 끌림을 느꼈던 거겠지. 지민은 그것이 못내 마음에 안 들었다.

 

자신이 아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면서 맡기고 가다니 참 얄미웠다. 그만큼 내가 제 말을 들어줄 거라고 생각했는지. 사실 지민도 할 말은 없었다. 정말 태형이 부탁한 것들을 다 들어주었기 때문에. 너무 오냐오냐 해줬어. 지민은 작게 쯧 혀를 찼다.

 

 

 

 

 

태형은 오늘 본가에 들려야 한다고 했다. 큰 행사가 있는데 꼭 참석을 해야 한다고 했다. 참 우스웠다. 평생 아들 취급 해준 적 없으면서 그들의 위신을 지켜야 하는 곳이면 아끼지 않고 태형을 이용했다. 태형은 그곳에서 해본 적 없는 아들 노릇을 하면서 하루 종일 웃고 있어야 했다. 행사가 끝나면 그들의 따뜻한 시선 한 번 받지 못하고 쫓겨나듯 그 행사장을 떠나야 했다. 지민은 태형이 그런 행사를 나갈 때마다 그가 돌아올 때까지 그의 집에 있었다. 그 차가운 곳에서 돌아올 때, 또 넓기만 한 집의 삭막함만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아서. 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갈 때 느껴지는 한기와 외로움을 온 몸으로 맞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렇게 계속 홀로 절벽 끝으로 밀리는 그를 꼭 안아주고 싶어서. 떨어지더라도 둘이서, 외롭지 않게, 춥지 않게.

 

으차차. 지민은 기지개를 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녁 먹기 전에는 온다고 했으니까 저녁이라도 미리 만들어 놓아야겠다. 그럼 조금이라도 더 사람 사는 집 냄새가 나지 않을까.

 

베란다로 가서 쌓인 빨래를 돌리고 싱크대에 쌓인 그릇들을 설거지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그릇들은 애기 이유식 그릇, 분유병, 애기 숟가락 등등이 다수고 태형이 먹었을 듯한 것은 배달음식용 일회용품 밖에 없었다. 그것들을 보니 또 한숨이 나왔다. 밥은 제대로 먹어야지 이게 뭐야, 진짜 속상하게... 중얼중얼 혼잣말을 하면서도 한숨을 푹푹 쉬었다. 애기 키우면서 나름 책임감 같은 것이 있다 하더라도 남이 보기에는 태형 역시 여전히 애였다. 애가 무슨 애를 혼자 키우겠다고... 애기 그릇과 분유병을 소독기에 넣은 지민은 그제야 한숨 덜 수 있었다.

 

설거지를 다 하고 나니 또 집에 정적이 돌았다. 뭘 해야 할지 몰라 뒷목만 긁적이며 나온 지민은 텅텅 빈 거실 한가운데 멀뚱히 서 있었다. 정적이라도 줄여보자 티비를 틀었다. 한 케이블 채널에 틀어져 있던 티비는 그 소리가 매우 작아서 대화 소리만 간신히 들릴 정도였다. 난리 났네. 지민은 중얼거리며 바닥에 앉았다. 거실 바닥에는 애기를 위한 매트가 깔려 있었다. 지민은 손으로 대충 슥슥 쓸어봤다. 두툼한 매트가 손바닥에 부드럽게 닿았다. 같이 산지 3개월이 지난 지금, 집 안 곳곳에 아이 용품이 넘쳐났다. 지극정성이다, 지극정성이야. 지민은 탐탁지 않은 듯한 말투로 중얼거리면서도 여기저기 널브러진 물건들을 깨끗이 정리했다. 아이 키우는 게 예삿일은 아니니 집 청소 할 시간도 없겠지. 그래서 지민이 태형의 집에 놀러오면 항상 청소 담당을 했었다. 지금은 태형이도 없고 아기도 자고 있으니 딱 좋은 시간이다.

 

티비는 계속 혼자서 떠들어댔다. 원래 티비를 즐겨 보지 않는 지민이라, 결국 티비를 끄고 문제집을 폈다. 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그 꿈을 이루려면 지금보다 더 열심히 공부를 해야 했다. 주위에서 그렇게 공부를 잘 한다고, 똑똑하다고들 하지만 사실 아직 턱 없이 부족했다.

 

한참을 집중해서 공부하던 지민은, 어디선가 들리는 웅얼거리는 소리에 집중력이 깨져 고개를 들었다. 시간을 보니 벌써 저녁때가 다 되어갔다. , 빨리 장 보고 저녁 만들어야 하는데. 지민은 급하게 지갑만 챙겨 밖을 나왔다. 바로 근처에 대형마트가 있는 게 다행이었다. 오늘 저녁을 뭐뭐 만들지 이미 생각해둔 것이 있기 때문에 재빨리 재료만 딱딱 넣었다. 그러다 문득 아기 이유식이 생각 나, 고민 하다가 야채를 좀 더 넣었다. 이유식 만드는 법은 나보다 김태형이 더 잘 알겠지.

 

양 손 가득 바리바리 들고 온 지민은 현관 앞에서부터 들리는 아기 울음소리에 화들짝 놀라 급하게 문을 열었다. 집 안에 들어서자마자 들고 있던 봉지를 내팽개치고 달려갔다. 방문을 열자마자 이상하게 훅 끼쳐오는 열기에 지민은 순간 심장이 쿵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불안함에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정신이 없었다. 아기 침대에 가자마자 아이를 안아들었다. 온 몸의 열이 양 팔과 가슴팍에 닿았다. 당황스러움에 사고회로가 정지되어 그저 아이를 안은 채 우뚝 멈추었다. 아기는 목이 쉬도록 울고 있었다. 지민은 바로 뛰쳐나가 미친 듯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눈물이 툭 터져 나왔다. 이 모든 게 제 탓인 것 같았다. 어떡해... 어떡해... 아기를 꼭 안아주었다.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을 톡톡 소매 끝으로 닦아주었다. 이놈의 집은 왜 하필 꼭대기 층에 있어서. 지민은 급히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1층에 오자마자 문이 다 열리기도 전에 뛰쳐나가 발길이 닿는 대로 뛰어갔다. 앞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눈물 때문인지 아니면 정신이 너무 없어 시야도 가릴 정도인지 분간이 안 갔다. 대충 큰 도로로 나가 손을 마구 휘저었다. 앞에 멈추는 택시에 타자마자 울음이 팍 터져 나왔다. 끅끅거리며 제일 가까운 큰 병원을 말했다. 아저씨는 열이 펄펄 끓는 채로 앓고 있는 아기를 보자마자 빠른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지민은 아기를 안고 펑펑 울며 계속 중얼거렸다. 아프지 마... 아가 아프지 마.. 내가 미안해... 놔두고 가서 미안해. 아프지마.

 

아기는 끙끙거리며 울면서도 무어라 말하려는 듯 입을 벙긋거렸다. .. 마마... 마마... 손까지 뻗어 잼잼 거리면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지민은 거의 오열을 했다. 죄책감이 온 몸을 휘감았다. 아기가 이 지경이 되도록 뭐 하고 있었는지 제 자신이 한심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나 무심했었나, 미안함에 눈물이 자꾸 나왔다.

 

병원 앞에 선 택시에, 지민은 대충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주며 급히 내렸다. 병원에 들어가자마자 접수처로 달려갔다. 엉엉 울며 아기만 꾹 안았다. 지민은 지금 자신이 어떤 꼴인지,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간호사는 대충 상황을 짐작하고 바로 응급실로 옮겨주었다. 아기를 침대에 눕히고 간단한 처방을 하고 나서야 지민은 좀 진정이 됐는지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울음의 여파 때문인지 딸꾹질이 나오고 울음소리가 자꾸 새어나왔다. 두 손으로 얼굴을 파묻었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하려다, 이대로는 말도 제대로 못할 것 같아 문자를 쳤다. 손이 덜덜 떨려 오타가 난무하는 문자를 보내고 힘이 다 빠진 몸으로 간신히 침대 옆에 앉아 아기를 내려다보았다. 아기를 볼 때마다 울음이 새어나와 결국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또 어깨가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혹여나 아기가 잘못되면 어떡하지. 자꾸 안 좋은 쪽으로 생각이 튀자 진정하기도 힘들었다. 가끔씩 누군가 자신의 어깨를 건들며 무어라 말을 하는 듯 했지만 지민은 정신이 없어 그들이 어떤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했다. 그저 자그마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아기가 아픔을 잘 견뎌내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뒤에서 누군가 살짝 안아오는 느낌에, 지민은 화들짝 놀라 손을 떼어 뒤돌아보았다. 태형이 지민의 품에서 살짝 떨어져 그를 바라보자, 지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심하게 운데다 갑자기 일어나서 그런지, 휘청거리는 그를 뒤에서 안듯이 잡아준 태형이 걱정스럽다는 표정으로 지민의 볼을 살살 쓸어내렸다. 지민은 태형을 보자마자 또 눈물이 차올랐다. 태형아. 이름만 불렀을 뿐인데 목소리에 어린 물기에, 태형은 다 안다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눈가를 어루만졌다. 어찌나 울었는지 두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너 지금 완전 못생겼어. 장난기 어린 태형의 목소리에 지민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의 어깨를 팍 내리쳤다. 너 지금 이 상황에 그런 말이 나와? 지민의 목소리가 잔뜩 갈라져 나왔다. 태형은 결국 그런 지민을 꽉 안아주었다. 어깨 부근에 머리를 얹고 등을 쓸어내려주면서 그를 위로했다.

 

 

다 괜찮아, 지민아. 네 덕분에 도하가 별 탈이 없대. 심각한 병도 아니고 그냥 링거 저것만 다 맞고 약만 먹으면 된다고 하네?

 

......

 

... 걱정됐어?

 

... 나 때문에 진짜 잘못되면 어쩌나...

 

......

 

내가 애를 데리고 갔어야 했는데... 진짜 슈퍼 바로 앞이라고 아무 생각 없이 나가서... ...

 

 

태형은 또 울먹거리기 시작하는 지민을 꾹 안아주며 등을 토닥이기 시작했다. 지민은 몸을 바르작거리며 편하게 자세를 잡았다. 어깨에 머리를 살짝 기대었다. 그의 심장소리가 일정하게 두근거려 마음이 좀 평안해지는 것 같았다. 울음 때문에 불규칙하게 내쉬던 호흡이 점점 돌아오기 시작했다.

 

지민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얼굴도 눈물범벅에 눈도 붓고 볼도 텄다. 아까보다는 덜하지만 몸도 잘게 떨었었다. 신발은 슬리퍼로 심지어 짝짝이다. 발은 흙투성이였다. 어디 찔리거나 한 건 아닌가 걱정이 되었지만 피가 보이지 않는 걸 보니 그건 아닌 것 같아 다행이었다. 항상 단정히 다니던 그 답지 않게 옷도 잔뜩 흐트러져 있었다. 머리도 헝클어져 있고. 그가 얼마나 정신이 없었는지 제대로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태형은 그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그 위에 턱을 얹었다.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문자를 딱 받았을 때, 오타가 난무한 그 문자를 보자마자 심장이 덜컹거리는 느낌과 함께, 손이 부들부들 떨려 핸드폰을 떨구기까지 했다. 아기가 아프다는 그 한마디는 모든 사고회로를 정지 시켰고, 몸이 와자작 굳어 어떤 행동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자신이 아기를 키우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제 가족들 앞에서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몰라 이가 덜덜 떨렸다. 갑자기 식은땀을 흘리며 안절부절 못하는 태형에, 엄마라는 사람은 웃으며 귓가에 살짝 읊조렸다. 오늘 제대로 하기로 했잖아, 수작 부리지마. 태형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태형은 여전히 그 집안에 발이 묶여있는 상황이었다.

 

걱정되어 죽을 것 같았다. 아들이 지금은 어떤지, 병원은 갔는지, 어떤 병인지, 심각한 것은 아닌지, 물어볼 것투성이였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이 거지같은 집구석을 단호하게 내치지도 못하고 이렇게 묶여있는 것도 한심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지민 밖에 없었다

 

그렇게 행사가 끝나자마자 집과 가까운 병원을 다 뒤지고 나서야 찾은 것이었다. 침대에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아들과 그 옆에서 얼굴을 파묻은 채 꼼짝도 않는 지민을 보자마자 안도감에 몸에 힘이 탁 풀려 휘청거리기까지 했었다.

 

 

 

마실 거라도 사올게. 태형의 말에 지민이 기운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러다 네가 쓰러지겠어. 태형의 말에 지민이 힘없이 웃었다. 나 이런 걸로 안 쓰러져. 표정이나 몸에 힘도 없으면서 강단 있는 목소리에 태형도 살풋 웃으며 자리에 일어났다. 잠시 후 나타난 태형의 얼굴에는 장난스러운 미소가 어려 있었다. 차가운 캔 이온음료를 지민의 볼에 갖다 대자 어느새 꾸벅꾸벅 졸고 있던 지민이 파드득 온 몸을 떨며 놀랬다. 아 깜짝아! 지민이 태형의 배를 퍽 쳤다. 태형이 급히 배를 감싸 쥐며 아파하면서도 그 웃음은 지우지 않았다. 지민은 그를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그의 손에 들린 캔을 확 채갔다. 뭐야, 왜 그렇게 봐. 지민의 물음에도 태형은 으흐흫 콧소리를 내며 웃다가 그를 확 껴안았다.

 

 

짐나!

 

우왓!! 뭐야, 갑자기 왜 이래!

 

진짜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너 뿐이야.

 

...갑자기 뭐냐고.

 

 

지민은 갑작스런 태형의 말에 쑥쓰러운듯 그를 밀어냈다. 소심한 그 손짓조차 귀여워 태형은 자꾸 웃음이 새어나왔다.

 

우연히 들었다. 아기를 꽉 안고 들어온 한 남자애가 우리 도하 살려달라며 엉엉 울었다고 했다. 우리 아가 없으면 안 된다고, 우리 아들 이렇게 아픈 적 없었는데 어떡 하냐고, 누가 봐도 서럽게 울었다고 했다. 다행히 가벼운 열병이라서 링거 맞고 가면 된다고 침대에 눕혔을 때도 불안한지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고 했다. 누가 봐도 학생인 남자가 아기를 안고 들어와 서럽게 울어대니, 어쩐지 측은해져 울지 않아도 된다며 위로 차 어깨를 살짝 감싸주기도 했지만 눈치도 못 챈 것 같다고 했다.

 

아닌 척 해도 지민은 정 많은 아이였다. 탐탁치 않아 했어도 결국 그것이 다 저와 도하를 위한 것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평소에는 그렇게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어도 이미 그를 김도하로, 아들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도하 우리 아들이지?

 

 

그를 품 안에 꼭 두며 넌지시 물었다. 그럼 누구 아들이야. 지민이 이온음료를 마시며 대답했다. 그런 대수롭지 않음이 오히려 좋았다. 나 사실 여기 오기 전까지는 기분이 너무 안 좋았는데. 태형의 나직한 말에 지민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태형은 수트 차림이다. 고등학생에게는 다소 어색한, 조금은 과하게 격식을 차린 차림. 오늘 행사가 있었지. 그들만 만나면 며칠간은 기분이 안 좋은 태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웬만하면 말을 안 하고 묵묵히 옆에 있어주며 온기를 나누어 주곤 했다. 지민의 위로 방식이었다.

 

 

그래도 지민이가 있으니까 좋다.

 

... 뭐래. 갑자기 왜 이래, 이상하게.

 

 

흐흫. 지민의 말에도 태형은 기분 좋은 웃음만 흘릴 뿐이었다.

 

 

 

 

 

잠든 도하를 업고 천천히 걸었다. 지민은 연신 미안한지 축 처진 도하의 손을 꼭 잡았다.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 탈 때도 지민은 도하의 손을 놓지 않았다. 오늘 수고했어. 태형의 말에 지민이 고개를 저었다.

 

 

오늘 행사만 없었어도 너한테 왔을 텐데.

 

내가 애를 잘 보고 있었어야 했는데... 아 너무 미안해서...

 

 

지민은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태형은 그의 손을 가져와 꼭 깍지를 꼈다. 미안해 하지 마, 네 탓이 아니야.

 

집 문을 열자마자 내팽겨 쳐진 봉지 두 개가 보였다. 지민은 순간 당황해 하면서 얼른 들어가 봉지를 수습했다. 그게 뭐야? 태형이 들어오면서 물었다. 지민은 두 봉지를 들고 부엌으로 종종걸음 했다.

 

 

그게 장 보고 왔는데 도하 우는 소리를 들어서.

 

...

 

하필 왜 오늘 장 본다고 해서는... 도하랑 같이 갔어야 했는데.

 

지민아. 네 탓이 아니라니까.

 

......

 

근데 뭐 하려고 장을 봤어?

 

너 거기서 돌아오니까. 저녁 만들어 놓으려고 했지.

 

 

지민의 말에 방으로 들어가려던 태형이 우뚝 걸음을 멈추고 부엌에 있는 지민을 바라봤다.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멍해졌다. 그리고 점점 웃음이 새어나왔다. 사람들은 이래서 결혼을 하고 가족을 꾸리는 건가. 물론 지민과 결혼을 한 건 아니지만. 언제나 무슨 일이 있어도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이 이런 느낌인가. 내가 의지할 수 있고 언제나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이런 것인가.

 

등에 업혀 있는 도하 덕인지 등이 따스했다. 넓고 황량하기만 했던 집이었는데 지금은 도하와 지민의 물건으로 가득 차있다. 도하의 장난감이 널브러져 있고, 소파에는 지민이 읽고 있는 책과 문제집이 놓여 있다. 태형은 집을 쭉 둘러보다가 도하의 방으로 들어갔다. 저와 지민이 사준 것들로 가득한 도하의 방 침대에 조심히 그를 눕혔다.

 

 

배고프지. 지금이라도 저녁 해먹을까?

 

 

밖에서 들리는 지민의 물음에 태형은 밖으로 나와 부엌에 갔다. 어느새 냉장고 정리를 마친 지민이 식탁에 앉아있었다. 많이 피곤한지 얼굴이 초췌해 보였다. 태형은 천천히 다가와 뒤에서 그를 꽉 안아주었다. 지민이 푸스스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으흐흫. 태형도 따라 웃었다. 지민은 손을 들어 자신을 안고 있는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

 

 

치킨 시켜 먹을까?

 

좋지.

 

네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 갑자기 왜.

 

그냥. 도하도 너도 내 옆에 있는게 너무 좋다.

 

......

 

계속 있어줄거야?

 

......

 

계속 있어줄거지?

 

너는 무슨...

 

 

지민은 그를 잡은 손에 힘을 꽉 주었다. 그것만으로도 괜찮았다.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에는 아직 서툰 지민이, 제 손을 단단히 잡아주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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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하 10개월, 많이 아팠던 날

지민이가 완전히 도하를 받아들인 날

 

 

 

원래 이 글은 지우려고 했는데

그냥 올립니다

 

 

 

 

뷔민 말도 안되는 육아물 썰14

길/육아물



새벽, 깜깜한 방에 갑자기 눈 시린 빛이 터졌다. 지민은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제 옆에 있는 폰을 집어 들었다. [지민아 자?] 제 앞으로 온 문자 하나에 잠이 확 달아나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앞뒤 생각도 않고 무작정 방문을 열고 밖을 나갔다.

제 집 앞 담벼락에 기대어 쪼그려 앉아있는 태형을 발견한 지민은 후 한숨을 쉬며 다가갔다. 인기척을 느낀 태형이 고개를 들어 지민을 발견하자 헤 웃어보였다. 지민은 그런 표정을 짓는 태형이 못내 속상했다. 얼굴 다 쥐어 터져 가지고는 뭐가 좋아서 웃는 건데. 지민은 태형의 앞에 쭈그려 앉아 괜히 틱틱 거렸다. 안 그런 척 해도 그의 말 속에 속상함이 잔뜩 묻어 있어 태형은 씁쓸하게 웃었다. 들어와. 지민은 자리에 일어나 태형에게 손을 뻗었다. 태형은 제 앞에 내밀어진 손을 가만히 올려다보다가 손을 잡고 일어났다

 

거실에 무드등만 켜놓은 채 태형을 소파에 앉히고 약통을 찾기 시작했다. 태형은 가만히 분주한 지민의 뒷모습만 바라봤다. 서랍을 열어 약통을 꺼낸 지민은 조심스레 태형에게 다가갔다.  너 얻어터지고 오지 말라고 했지. 지민의 화난 목소리에도 태형은 생글생글 거리기만 했다. 연고를 짜서 면봉에 묻힌 지민이 가만히 태형을 올려다봤다. 입가는 터지고 눈 주위와 볼에 생채기가 나 있다. 지민은 인상을 찌푸리며 터진 부위에 살살 연고를 바르기 시작했다. 아으... 아프겠다. 시시각각 변하는 지민의 표정에 태형은 결국 피식 웃어버렸다. 지민이 찌릿 태형을 노려봤다.

 

 

뭘 잘했다고 웃어. 너 지금 이게 웃겨? ? 이렇게 얻어터지고서 지금 웃음이 나오냐고.

 

왜 네가 더 아파해.

 

그럼 아프지, ? 친구가 매번 이렇게 얻어터져서 오는데.

 

......

 

맞고 다니지 말라고. 네가 뭐가 아쉬워서 그딴 새끼한테 맞고 다녀.

 

그딴 새끼라고 하지 마. 우리 형이야.

 

뭐래, 너는 그런 쌍놈한테 아직도 우리 형이라는 말이 나와? 그리고 네 형이지, 내 형이냐? 나한테는 내 소중한 사람 이유도 없이 패는 개새끼일 뿐이야.

 

......

 

나 지금 엄청 화났으니까 내 앞에서 한번만 더 그 사람 감싸면 진짜 너 팰거야.

 

 

도끼눈 뜨고 보는 지민을 물끄러미 보던 태형이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그의 입가에 면봉으로 약을 살살 발라주던 지민은 갑작스런 그의 온기에 손을 멈칫했다. 눈을 살짝 들어 태형을 바라봤다. 두 시선이 맞닿은 순간 지민은 속에서 무언가 울컥 올라오는 느낌을 받았다. 지민은 그 울컥함을 숨기지 않고 느끼는 그대로를 쏟아냈다. 지민은 태형의 두 어깨에 손을 올리고 그에게 기대었다. 태형은 순간 당황했지만 이윽고 작게 들리는 지민의 흐느끼는 소리에, 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가늘게 흐느끼던 소리가 점점 커졌다. 태형은 아예 두 팔로 지민을 꽉 안았다. 태형은 울지 않았다. 지민은 태형의 그런 점까지 안타까웠다. 그는 우는 방법조차 알지 못하는 아이였다. , 지금도. 너 때문에 울고 있는 나를 위로하는 것 밖에 못하잖아.

 

 

 

 

 

지민은 태형의 집안을 증오했다. 태형의 집안이 알아주는 명문가 집안이든 재벌이든 그런 건 상관없었다. 지민에게 있어서 그들은 자신의 가장 소중한 친구의 존재를 부정하고 없애려는 악마일 뿐이었다. 어렸을 때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게 좋은 집에서 살면서 왜 태형은 한 번도 웃지를 않았고, 행복한 표정을 짓지 않는지. 왜 그는 자신의 가정을 그렇게 필사적으로 숨기려 했는지. 지민은 그와 친해지게 되면서, 머리가 크면서 서서히 알게 되었다. 태형은 그 집안에서 철저히 외면당하고 있었고, 약하기만 한 태형은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들을 향한 증오마저 하지 못하는 여린 태형 대신 지민이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것이 못내 슬펐다. 태형만큼 지민 자신도 어리기만 한 고등학생이라서, 너무 화가 났다.

 

 

나 오늘 너희 집에서 자고 가면 안돼?

 

 

그의 품에 기대어 듣는 그의 목소리는 낮고도 잔잔히 울렸다. 지민은 대충 눈가를 훔치고 고개를 들어 태형을 마주봤다. 당연히 되지. 지민은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뻗었다. 태형은 그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같이 자자. 지민은 그를 이끌며 말했다. 태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분명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태형의 방에 비하면 지민의 방은 훨씬 작았고 침대도 제 방 침대의 반도 안되는 크기지만, 태형은 그 어느 곳보다 편안한 곳이었다. 공허하고 차갑기만 한 제 방과는 달리 따뜻하고 포근했다. 같이 붙어서 잘 때의 그 온기가 좋았다. 태형은 옆으로 누워, 정면을 보고 잠이 든 지민은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어스름한 새벽빛에 그의 얼굴이 어렴풋이 보였다. 그가 가끔씩 내쉬는 숨소리가 고요한 새벽과 잘 어울렸다. 고요했다. 하루하루 지옥과도 같은 그곳에서 벗어나 이곳으로 오면 항상 평화로웠고 고요했다. 태형은 살짝 눈을 감았다. 오늘은 불안에 잠을 설치지 않아도 되었다.

 

 

 

아침에 지민이 타 준 시리얼을 먹으며 잠을 쫓으려 애를 썼다. 지민은 부모님과 전화 통화 중이었다. 지민의 부모님은 정확히 어떤 일을 하시는지 태형은 잘 모르지만 세계 곳곳을 다니는 일인 것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집에 있는 일이 거의 드물었다. 밥 제 때 챙겨 먹고 있어요. 제가 어린애인가요 뭐. 나도 이제 고등학생이에요. 그래, 엄마 아들 벌써 고등학생이야. 아니 태형이랑 같이 있어요.

 

태형은 갑자기 나온 제 이름에 고개를 들어 지민을 바라봤다. 지민은 태형을 힐끔힐끔 보면서 전화 통화를 이어나갔다. , 나도 사랑해요. 거실에서 전화 통화를 한 지민이 전화를 끊고 부엌으로 들어왔다. 태형이 의문 가득한 눈을 한 채 지민을 올려다보자, 지민이 별 일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으며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엄마가 누구랑 같이 있냐고 물어 보길래. 아아. 태형은 다시 시리얼을 먹기 시작했다. 지민은 찬찬히 태형의 얼굴을 뜯어봤다. 아 입가는 그렇다 치고 눈가에 상처 흉 질 것 같은데. 볼에 멍 봐 진짜, 애를 대체 어떻게 때렸으면... 태형은 얼굴에 느껴지는 뜨거운 시선에 슬쩍 눈만 굴려 지민을 쳐다봤다. 지민은 자신이 더 아픈 얼굴을 하며 태형의 상처를 하나하나 보고 있었다.

 

 

그만 봐. 체하겠다.

 

너 학교에서 또 쓸데 없는 소리 들을 것 같아서 너무 걱정돼.

 

내가 알아서 할게.

 

또 패싸움 했다고 그러게?

 

몰라.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는 듯 꾹 입을 다문 태형의 표정에 단호함까지 보여 지민은 더 이상 그에게 무어라 말할 수 없었다. 지민은 괜히 제 두 손가락으로 장난만 치며 힐끗힐끗 태형의 눈치를 보다 결국 입을 열었다.

 

 

솔직히 내가 너한테 이런 오지랖까지 부려도 되는지는 모르겠는데.

 

괜찮아.

 

그냥...

 

.

 

그냥... 그 집 나오면 안돼?

 

 

 

 

 

 

 

 

 

 

***

 

 

 

 

 

 

 

 

 

 

뭔가가 꼬물꼬물 품속에 파고드는 느낌이 들어 태형은 살짝 몸부림치며 눈을 떴다.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뜨니 검은 무언가가 시야에 훅 나타났다. 파파? 언제 들어도 귀여운 목소리가 들리자 태형은 절로 웃음이 나왔다. 푸스스 숨이 새어나오는 웃음소리에 도하도 꺄르르 웃으며 태형의 품을 더욱 파고들었다. 태형도 바로 팔을 들어 도하를 안아주었다. 어린아이다운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엄마는? 태형은 잠긴 목소리로 물어봤다. 얼마나 깊게 잠이 들었는지, 목소리가 갈라지기까지 했다. 도하는 몸을 꿈틀거리며 웅얼거렸다. 뭐라고? 태형이 다시 묻자 안방 문이 열리면서 기대 서 있던 지민이 보였다. 도하야 아빠 깨... . 지민은 눈이 팅팅 부은 태형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태형은 아직도 멍한 눈으로 지민을 쳐다봤다.

 

 

일어났으면 빨리 나올 것이지.

 

금방 일어났어.

 

아침 먹어. 도하도 얼른 나와서 같이 아침 먹어요.

 

.

 

 

도하는 꾸물꾸물 태형의 품에서 나와 침대에 폴짝 뛰어내렸다. 마마 오늘 아침 머에요? 고개를 확 치켜들고 물어보는 도하에, 지민은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도하가 좋아하는 오므라이스 해봤어요. 오므라이스! 지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부엌으로 다다다 달려가는 도하의 뒷모습을 흐뭇하게 보던 지민이 고개를 돌려 다시 태형을 바라봤다. 조금은 정신이 드는지 눈에 생기가 도는 태형에게 손짓했다. 너도 빨리 나와. 태형은 꼼짝 않고 손짓했다. ? 지민이 태형에게 다가갔다. 침대 바로 앞까지 다가온 지민의 손목을 확 잡아당긴 태형은 엎어지는 지민을 꽉 안고 침대에 뒹굴뒹굴 거렸다. 아 깜짝아 진짜!! 지민이 등짝을 퍽퍽 때려도 뭐가 좋다고 킬킬 대며 뒹굴던 태형은 지민을 눕히고 그를 내려다 봤다. 뭐야. 지민이 당황한 기색을 보이며 태형을 올려다봤다. 으흐흫. 태형은 작게 웃으며 지민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아침부터 왜 이래. 지민은 태형을 밀어내는 듯하면서도 기분 좋은지 거부하지는 않았다. 태형은 이마에, 양 볼에, 코에, 입술에 마구마구 뽀뽀를 퍼부었다. 지민은 태형의 양 볼을 감싸 잡으며 눈을 감았다

 

도하두 뽀뽀!

 

방문 앞에서 들리는 소리에 둘은 화들짝 놀라 문 쪽을 바라봤다. 숟가락을 들고 있는 도하가 다다다 뛰어와 침대위로 폴짝 뛰어올랐다. 나두 마마 뽀뽀. 도하가 지민의 입술에 쪽 뽀뽀하자 지민이 눈까지 접어 으하핳 웃었다. 아들 아빠한테는. 태형이 고개를 도하 쪽으로 돌리고 눈을 감자, 도하가 태형의 입술에도 쪽 뽀뽀를 해주었다. 아침 먹자. 지민이 태형을 살짝 밀어내며 하는 말에 태형이 자연스레 자리를 비켜주었다. 도하를 안은 채 자리에 일어나 방을 나서는 지민의 뒤를 따르던 태형은, 그가 하고 있는 앞치마의 두 끈을 잡았다. 지민이 살짝 놀라며 고개만 돌려 태형을 바라봤다. 살짝 미소 지은 태형이 앞치마를 묶기 시작했다.

 

 

앞치마 끈이 풀려서.

 

아아..

 

 

앞치마 끈을 묶던 태형은 지민의 품에 안겨 어깨에 얼굴을 얹고 있던 도하와 눈이 마주쳤다. 태형은 싱긋 웃어주었다. . 도하도 제 아빠 따라 웃었다.

 

 

 

 

 

태형은 요즘 사진에 푹 파졌다. 그저 도하나 지민과의 추억을 담기 위한 수단만이 아닌 전문적인 사진 기술을 배우고 싶어 했다. 처음에 태형이 지민에게 그 이야기를 했을 때, 지민은 박수까지 치며 너무 좋아했다. 하고 싶은 일이 생겨서 너무 기쁘다며, 하고 싶은 대로 하라며 등을 토닥여줬었다. 태형은 마치 자기 일처럼 좋아하는 지민을 보고 어쩐지 코가 찡해져 그를 팍 안았었다.

 

아마 태형이 사진에 더 빠지게 된 계기는 도하의 화보 촬영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 날, 키즈 모델 제의를 받고 한 번 가본 적 있다. 도하는 워낙 사진 찍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사진 찍는 것 자체는 문제가 없었지만, 촬영 분위기 자체를 너무 낯설어 해서 애를 먹었다. 도하는 모델이랑 맞지 않는 것 같아 그 이후로 촬영은 하지 않았지만 태형은 그 날 나온 사진을 너무 좋아했다. 우리 아들 이렇게 잘 생겼다고, 제대로 각 잡고 찍으니까 누구 아들인지 벌써부터 태가 난다고.

 

거실에 모로 누워 티비를 보고 있는 지민과 도하를 저 멀리 식탁에 앉아 찍는 태형의 표정은 프로처럼 진지했다. 찰칵 소리가 나자 둘 다 똑같은 자세로 자신을 보는 것이 웃겨서 태형은 푸핫 웃음을 터뜨렸다. 야 넌 뭘 이런 걸 찍냐. 지민의 불퉁한 소리에 태형은 소리 없이 웃기만 했다. 잘 나왔어, 이뻐. 방금 찍은 사진을 확인하며 말하는 태형에, 지민은 바로 자리에 일어나 태형에게 다가갔다. 태형을 재빨리 카메라를 몸 쪽으로 숨기며 방어태세를 취했다.

 

 

아니 사진만 보자고.

 

너 또 마음에 안 든다고 다 지울 거잖아.

 

네가 별 이상한 거 다 찍으니까 그러는 거 아니야.

 

뭐가 이상한거야. 예쁘기만 한데.

 

파파 도하 찍어조.

 

그래, 우리 아들.

 

 

도하가 거실에서 자세를 취하자 태형이 바로 카메라를 들었다. 지민은 살짝 옆으로 나와 도하를 바라봤다. 이리저리 포즈를 취하는 모습이 수준급이다. 지민은 피실피실 웃으며 제 폰도 들어 찰칵찰칵 도하를 찍기 시작했다.

 

진지한 표정을 찍은 사진들을 확인하는 태형의 뒤에 가 섰다. 카메라 화면에 방금 찍은 도하가 보였다. . 지민은 감탄을 하며 엄지손가락을 들어보였다.

 

 

너 제대로 사진 배워봐.

 

...

 

사진 좋아하잖아. 전문적으로 배워도 취미로 할 수 있는 거고. 너 솔직히 돈 벌 욕심은 없잖아.

 

없지. 근데 도하 좀 더 크면 하려고. 도하가 더 커서 친구들과 있는 시간이 더 길어질 때. 그 때부터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

 

 

지민은 무안함에 머리를 긁적였다. 지민은 자신이 인식 못하는 새에 태형이 말도 안 되게 성장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옛날에도 생각이 깊은 편이었지만 여러 이유로 갈피를 잡지 못하고 그저 방황만 하던 때가 있었다. 그때마다 지민이 그를 잡아줬었다. 사실 잡아주었다 하기도 뭣했다. 그 때의 지민도 태형과 같은 아이였다. 그저 태형이 힘들어 할 때마다, 방황을 할 때마다, 옆에 있어주는 것뿐이었다.

 

도하를 키우기 시작한 후부터 태형은 많은 것이 변했다매일을 방황하던 태형은 이제 없었다. 도하를 끌어안고 처음으로 행복하다는 말을 한 태형을 보고, 지민은 한참을 울었었다. 어찌 보면 일상에 흔하게 느낄 그 행복이십몇 년이 지난 지금 처음으로 깨달았을 그 감정에, 지민은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밀물처럼 밀려와 그대로 밖으로 쏟아내었다태형은 오열을 하는 지민을 한참 바라봤었다. 태형은 그런 지민을 보면서도 느꼈다.  한 명을 위해 울어주는 사람이 있어서, 나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구나.

 

태형의 삶은 항상 치열했다. 자신을 바닥끝까지 떨어뜨려 버리는, 제 모든 것을 천천히 어둠에 잠식 시키는 그들에게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그는 매 순간을 많은 것들과 싸웠다. 좋아하는 일이나 하고 싶은 일 따위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내일을 살아가기 위해 매 번 치열했던 자신에게 지민과 도하는 더 이상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태형에게 지민과 도하는 그의 전부였다.

 

 

 

세 가족은 매 주 주말마다 가까운 공원에 산책을 갔다. 중요한 일이 없으면 주말만큼은 무조건 가족이랑 보내자는 규칙을 만들었고, 그들은 최대한 그 규칙을 지키려 했다.

 

도하, 옷 갈아입고 오세요. 지민의 말에 도하가 방에 다다다 달려갔다. 마마 모 입어? 도하 마음에 드는 옷 입으면 되죠. 도하는 제 옷장을 열어 옷을 마구 헤집어 자신이 좋아하는 동물 귀 후드티와 청멜빵바지를 가지고 나왔다. 도하 양말도 가지고 나와야죠. 지민의 말에 도하는 다시 방에 들어갔다가 흰 양말을 들고 나왔다. 도하가 옷 입을 수 있죠? 지민의 말에 옷을 한아름 품고 있던 도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도하는 거실 소파에 걸터앉아 후드티로 갈아입고 멜빵바지를 입었다. 멀리서 도하를 가만히 바라보던 지민은 도하가 다 입은 것을 보고 나서야 제 방으로 들어갔다. 아직 어리기 때문에 바지 갈아입다가 중심 못 잡고 휘청거리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나름의 방법으로 잘 입는 것을 보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민과 태형도 준비를 다 하고 나서 거실로 나왔다. 소파에 앉아 다리를 달랑거리던 도하는 그들이 나오자 폴짝 뛰어내려와 현관으로 달려갔다. 이제는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신발을 꺼내 신는다. 뿅뿅이! 도하는 흰색 신발을 꺼내어 바닥에 앉아 천천히 신발을 발에 끼웠다. 도하는 걸을 때마다 뿅뿅 소리가 나는 그 신발을 좋아했다. 도하가 좋아하는 병아리 그림이 그려져 있어서 더 그랬다. 이고 마마 이고 도하. 언젠가 신발을 사면서 그려진 병아리 두 마리를 가리키며 얘기하는 도하에, 태형은 왜 아빠가 없냐고 했었다. 그 다음날 도하의 신발에 닭이 생겼다.

 

지민은 가만히 도하가 신발 신는 것을 보다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설사 도하가 들을까 조용히. 도하, 신발 잘 신었어요? 지민의 물음에 네에 도하가 대답했다.

 

 

어디 불편한 거 없어요?

 

... 엄는데...

 

삐약이가 안에 있는데요?

 

.

 

 

도하는 다시 자리에 앉아 신발을 바꿔 신었다. 아직 왼쪽 오른쪽 구분을 못하는 게 왜 이렇게 귀여운지 모르겠다. 지민은 쭈그려 앉아 도하의 볼에 쪽 뽀뽀했다. 도하가 꺄르르 웃었다. 아 뭐야, 뽀뽀 할 거면 미리 말하라고 했잖아. 카메라 챙긴다며 다시 방에 들어갔다가 나온 태형이 투정부리듯 말했다. 아니 무슨 이것까지 너한테 일일이 다 보고해. 지민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사진 찍어야해. 다시 해봐.

 

뭘 다시 해. 나중에 나중에.

 

배경 예쁜데서 해줘.

 

알았다니까.

 

 

빨리 나갈 준비나 해. 지민의 말에 태형이 해맑게 웃으며 신발을 신었다. 파파 안아주. 도하의 말에 태형이 도하를 안아들었다. 우리 아들, 아직도 아빠랑 같이 있고 싶구나? 지민이 대신 태형의 카메라를 들고 밖을 나갔다. 햇살이 적당히 따뜻하고 바람이 적당히 불며 하늘이 푸르고 구름이 적당히 있는, 산책하기 좋은 날이었다. 이런 날이면 태형의 사진사랑은 더욱 커진다.

 

옛날에는 폰을 들고 다니며 사진을 찍었다면 이제는 카메라를 들고 다녔다자세를 잡고 저 멀리서 자유롭게 놀고 있는 지민과 도하를 찍었다. 어떠한 요구나 의도 없이 그저 움직이는 로 나오는 자연스러운 모습이 제일 예뻤다. 도하가 점점 크는 모습, 지민이와 함께 있는 모습, 보기만 해도 흐뭇해지는 그들을 사진에 담다보니 용량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아졌긴 하지만 절대 지우거나 하지 않는다. 그저 그들을 보면서 느꼈던 감정을 담은 사진을, 남들이 보면서 자신과 똑같은 감정을 느꼈으면 했다. 그들에게서 얻은 위로, 사랑, 행복 등등. 남들도 그런 따뜻한 마음을 느끼고 자신의 사진을 좋아하는 것을 알기에.

 

손을 잡고 길을 걷는 모습을 담았다. 도하가 길가를 다른 손으로 가리키더니 그 쪽으로 다가갔다. 둘 다 똑같은 자세로 쭈그려 아 무언가를 내려다봤다. 태형은 조용히 그들의 곁으로 다가갔다. 노오란 작은 들꽃을 보고 있었다. 뭐라 뭐라 소곤소곤 대화하는 것이 들렸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또 한 번 카메라에 담았다. 둘이서 비밀 대화를 하듯 속닥속닥 거리다 도하가 해맑게 웃었다. 지민도 도하 따라 웃다가 쭈그려 앉은 자세 그대로 도하의 입술에 쪽 뽀뽀했다. 헐 씨발. 태형은 놓치지 않고 바로 셔터를 누고 급히 화면을 봤다. 하씨, 성공했어. 너무 예쁘게 나온 그림에 태형은 눈가를 문질렀다. 아 너무 귀여워서 눈물 날 것 같아... 다른 건 몰라도 이건 꼭 인스타에 올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지민의 뽀뽀를 받은 도하가 꺄르르 웃더니 자리에 일어나 지민의 두 볼을 잡고 또 쪽 뽀뽀했다. 으갸걐걍앜 태형은 바로 셔터를 촤라락 눌렀다. 이번에도 제대로 잘 찍혔다. 어허헣ㅎ허헣 어떡해, 너무 예뻐. 예뻐서 숨이 턱턱 막힌다는 게 이런 기분일까. 저렇게 귀여운 걸 보면 원래 이렇게 숨이 넘어갈 것 같나. 태형은 으헝 우는 소리를 내며 찍은 사진들을 하나씩 돌려봤다. 솔직히 내가 객관적일 수는 없겠지만 객관적으로 너무 예쁘다.

 

지민은 멀지 않은 곳에서 가만히 서서 카메라만 내려다보고 있는 태형을 발견했다. 태형아. 나긋한 지민의 목소리에 태형이 고개를 들었다. 이리로 와. 천천히 손을 까딱이며 하는 말에 태형은 결국 그들에게 뛰어갔다.

 

 

 

 

 

지민아, 나 이 사진 인스타에 올려도 돼?

 

태형의 물음에 설거지를 하고 있던 지민이 제 앞으로 내밀어진 핸드폰을 봤다. 이건 또 언제 찍었데? 지민은 자신이 봐도 잘 나왔다고 생각했는지 마음에 드는 표정이었다. 그의 표정을 보니 태형은 더욱 뿌듯해졌다. 오늘 하늘도 예쁘고 너랑 도하도 예뻐서 사진이 잘 나왔어. 자신이 그린 그림을 보여주는 어린 아들처럼 칭찬해달라는 듯 사진을 보여주는 모습에, 지민은 절로 웃음이 나왔다. 어디 보자. 지민은 아예 고무장갑까지 벗어서 폰을 잡고 제대로 보기 시작했다.

 

 

내가 봤을 때 너 정말 사진에 소질이 있는 것 같아.

 

나는 그냥 보이는 대로 찍는 것뿐인데 뭐.

 

예쁘네.

 

그럼, 예쁘지. 지민이랑 도하는 항상 예뻐.

 

... 가끔 그렇게 대놓고 이야기를 하면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태형은 얼굴이 붉어져 쑥스러워 어쩔 줄 몰라 하는 지민을 보는 것을 좋아했다. 귀엽잖아. 저 때문에 안 그래도 홍조 있는 볼이 더욱 불그스름해지면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었다. 사랑스럽다는 것은 지민이 같은 사람을 보고 만든 것이 분명했다. 올려도 돼? 태형이 다시 물었다. 지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 딱히 많이 안 나와서 뭐... 에잇, 혹여나 들키면 뭐 어때. 내가 못할 짓 하는 것도 아닌데. 아직 진짜 선생님인 것도 아니고. 진짜 선생님 된다고 해도 그게 나쁜 것도 아니고.

 

정말 괜찮아?

 

너 올리고 싶은 대로 올려도 돼. 우리 가족 자랑 많이 해. 우리 이렇게 산다고.

 

그래!

 

 

누가 봐도 기쁜 표정으로 폰을 만지는 모습을 본 지민은 살풋 웃으며 다시 장갑을 끼고 설거지를 하기 시작했다. 근데 나 빈말 아니고 나중에라도 진짜 사진 공부해봐. 지민의 옆에서 싱크대에 기대 서 있던 태형이 지민을 바라봤다. 지민은 계속 설거지 하면서 말을 이었다.

 

 

제대로 배우면 더 좋을 것 같아서. 너도 재밌어 하는 것 같고.

 

.

 

네가 도하 더 크고 여유 생기면 한다고 하니까 더 말은 안하는데. 난 솔직히 아까워. 너 아직 어리고,

 

어린 게 아니라 젊은 거지.

 

그래, 아직 많이 젊고 뭘 해도 되는 때인데. 좀 아깝잖아. 나도 나 하고 싶은 거 찾아서 하는데 태형이 너도 하고 싶은 거 찾아서 해도 늦지 않으니까.

 

지민이가 무슨 말 하고 싶어 하는지 알아.

 

......

 

근데 나 정말로 지금 이렇게 사는 거 진짜 행복하거든. 사실 내일 같은 거 생각 안 해. 도하랑 너랑 이렇게 사는 거 충분히 재밌고 행복해. 너나 도하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 거 못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지금도 너무 분에 넘치는 생활을 하고 있다는 말이야.

 

......

 

사진은 정말 도하가 혼자서도 잘할 수 있는 나이가 오면. 그 때. 내가 하고 싶은 거 할 거야. 이것도 정말이야. 나 생각해둔 거 있거든. 나 이제 정말로 잘할 수 있으니까. 나 믿어줘 지민아.

 

......

 

아 근데 지민이 네가 없으면 안 돼. 알지?

 

 

깜찍하게 윙크까지 하면서 말하는 태형을 더 이상 이길 수 없다. 지민은 헛웃음을 치며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넌 이때까지 잘해왔으니까 앞으로도 잘해 올 거야. 지민이 말에 태형은 여전히 햇살 같은 미소로 폰을 보여주었다. 지민과 도하가 뽀뽀하는 사진과 함께 여러 해시태그가 적혀있는 인스타가 보였다.

 

#우리 #아들 #도하 #내새끼 #그리고 #내사람 #뽀뽀 #예뻐 #귀여워 #세젤귀 #사랑 #일상 #산책 #언제나 #함께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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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이에요...

특히나 육아물은 정말 오랜만이네요...

면목이 없습니당 어디론가 숨고 싶네

육아물은 오래오래 하고 싶은데

생각나는 소재가 나노단위라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나가야 할지 힘드네요.

너무 오랜만이라 재미는 보장 못합니다...ㅎ 죄송해요ㅠㅠ

현생이 바빠서 자주 못 오는게 너무 한이네요

그래도 꾸준히 창고 채우겠습니다ㅎㅎ

 

사실 음지 블로그에서 양지 이야기는 최대한 자제하려 했지만

오늘 애들 컴포가 뜨기도 했으니까요

너무 예쁘네요 애들은 언제나 예뻤지만ㅋㅋㅋㅋ

 

 

 

 


뷔민 말도 안되는 육아물 썰13

길/육아물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깜깜함 어둠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이 공간에는 자신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고개를 돌려보아도 다를 것 없는 이곳은 어둠의 끝이 어디인지도 보이지 않았다.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지민아? 불러봤지만 제 목소리마저 어둠에 잡아먹힌 듯 울림도 없이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지민아! 박지민! 도하야! 크게 외쳐 봐도 똑같았다. 여전히 어둠은 물러나지 않았고, 제 말에 답해 주는 이 하나 없었다.

뛰었다. 끝이 어딘지도 모를, 그저 앞만 향해서 뛰었다. 어디선가 웅성웅성 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걸음을 멈추었다. 귓가를 파고드는 알 수 없는 소리가 이상하게 거슬렸다.

왜하필생겨가지고는.없는듯이죽은듯이살아.우리집안에피해주지마.가문의수치.너같은건.한때의실수였어.아직도너를낳은것을후회한다.넌내아들이아니야.복받은새끼.부모잘만나먹고놀기만할줄알지.너같은새끼는얼굴만봐도역겹다.꺼져내눈에띄지마.

괴로웠다. 험한 말들이 한 번에 쏟아져 제 몸 여기저기를 난장판으로 쑤시기 시작했다. 태형은 주저앉아 두 귀를 꾹 막았다. 손틈 새로 악담이 비집고 들어왔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싫다. 이런 건 싫어. 여기서 빠져나가고 싶다. 더 이상 이런 어둠에 묻히고 싶지는 않아. 제 힘으로는 이곳에서 나갈 수 없다. 길도 이정표도 없는 막막한 어둠 속에서 혼자 빠져 나갈 수 있는 방법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몸이 점점 더 수그러졌다. 자신을 향한 악담과 욕설은 더욱 심해졌다. 지겹게 들어왔던 말임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면역력은 없었다. 몸에서 피가 철철철 흐르는 기분이었다. 끔찍했다. 이제는 몸도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들의 말소리는 점점 커졌다. 귀를 더욱 꾹 막았다. 손톱이 귀 뒤쪽을 파고들 정도로 세게 막았다. 지민아. 지민아. 어디 있어. 지민아. 내 목소리를 들어줘.





김태형!

태형은 눈을 확 떴다. 눈 뜨자마자 보이는 것은 잔뜩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는 지민이었다. 괜찮아? 아까부터 계속 끙끙 거리고 막 식은땀 나. 지민은 태형의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이마를 짚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온 몸에 땀으로 젖었는지 찝찝함이 느껴졌다. 태형은 제 이마를 덮고 있는 지민의 손목을 잡고 몸을 틀어 자세를 바꾸었다. 갑자기 침대에 푹 몸이 눕혀진 지민이 당황할 새도 없이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푹 묻었다. 지민은 어정쩡하게 있는 손을 그대로 태형의 머리로 가져가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들었어. 뜬금없는 지민의 말에 태형이 살짝 고개를 들어 지민을 바라봤다. 나 불렀던 거, 네 목소리, 들었다고. 지민이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그대로 내려 태형의 볼을 살짝 감쌌다. 태형의 표정이 살짝 어그러졌다. 악몽 꿨구나, 우리 태형이. 지민의 말에 태형은 얼굴을 폭 묻은 채 그를 더욱 꽉 껴안았다.



태형은 악몽을 꽤나 자주 꾼다. 지민은 그가 꾸는 악몽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 내용은 얼핏 예상이 갔다. 그가 지금 꾸고 있는 악몽들은 아마 과거의 현실이었을 거다. 태형은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태형이 악몽을 꿀 때면 그 날은 아기처럼 착 달라붙어 떨어질 생각을 않는다. 뭐가 그리 불안한지 제 눈에 보이지 않으면 졸졸졸 따라와 기어코 제 시야에 담는다. 태형은 그런 사람이었다. 아직 누군가에게 애정을 가르쳐 주기에는, 태형도 애정이 부족했다.

지민은 뒤에 태형을 매단 채 아침을 준비했다. 오늘이 주말이어서 다행이었다. 만약 평일이었으면 학교 가는데 또 애를 먹었을 것이다. 태형은 지민의 온기를 조금이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허리를 꽉 감싸 안고 목덜미 부근에 머리를 부빗거리기도 하고 쪽쪽 입술을 맞대기도 했다. 민소매 티를 입은 지민은 목덜미도 훤히 드러나 있어서 더 그랬다. , 간지러워 야 나 칼 들고 있어. 지민은 그만두라고 말 하면서도 차마 그를 밀쳐내지는 못했다.


도하 크기 전에는 그 애기 같은 버릇 고쳐야 할 텐데.

......

애가 둘이나 생겨서 어쩌지.

내가 애냐.

지금 이렇게 딱 붙어서 안 떨어지는데 그럼 애지 뭐야.

네가 없었어.

......

그곳에는 네가 없어. 도하도 없고. 나 혼자야.


태형아. 지민은 결국 칼을 내려놓고 뒤돌아 태형을 바라봤다. 뭐가 그리 불안한지 잘게 흔들리는 눈동자가 애처로울 지경이다.


무서워, 그런 거. 더 이상 그런 거 겪고 싶지 않아.

나 어디 안 가. 진짜로. 여기 있을 거야.

......

난 네 목소리 들려. 내가 너 찾으면 되잖아


그건 그냥 꿈일 뿐이니까 다 잊으세요. 지민은 태형의 이마에 살짝 꿀밤을 놓고 다시 뒤돌았다. 태형의 팔이 다시 지민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흐흫. 지민이 낮게 웃음을 흘렸다.

아 그러고 보니 종이 갈 때 됐는데. 지민은 문득 생각나 말했다. 아 종이. 태형도 생각났다는 듯 지민의 뒷목에 푹 기대고 있던 볼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요새 도하는 그림 그리기에 빠졌다. 문제는 스케치북이 아니라 벽에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다. 그걸 하지 말라고 말릴 수도 없고 그래서 생각한 게 벽 한 편에 커다란 도화지를 붙이는 것이었다. 거실 소파 쪽 벽에 커다란 도화지 한 장, 옆 쪽 벽에 도화지 두 장 이어서 붙이고, 도하 방 벽에도 도화지를 붙여놓았었다. 도하의 상상력은 너무 풍부해 도화지는 금방 알록달록한 색으로 채워지곤 했다. 이제는 하얀 부분이 없으면 바꿔달라고 먼저 찡찡댄다.

아이고, 우리 아들 화가해도 되겠다! 언제 한 번, 태형은 온갖 색으로 가득 채워진 도화지를 들고 그런 말을 했다. 도하가 아장아장 걸어와 물었다. 하가가 무야? 그러면 태형은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화가란 말이지, 우리 아들처럼 그림을 엄청엄청 잘 그리는 사람을 말하는 거야. 그러면 도하는 꺄르르 웃었다. 도하 하가! 하가!

태형아 종이 좀 갈아줘. 지민의 말에도 움직일 생각을 않는 태형에 지민은 고개를 살짝 돌렸다. 태형의 머리가 보였다. 종이 좀 갈아달라니까? 태형이 입술을 목덜미에 묻은 채 웅얼거렸다. 간지러운지 지민의 몸이 작게 들썩거렸다.


오늘은 지민이한테 안 떨어질 거야.

? 하루 종일 그렇게 있겠다고?

지민이 어디 못가 게 내가 딱 붙잡고 있을거야.

나 어디 안 간다니까.

알아. 그래도.


흐음. 지민은 작게 한숨을 쉬며 결국 칼을 내려놓았다. 지민이 걸음을 옮기면 태형은 어정쩡한 자세로 뒤뚱뒤뚱 걸었다. 너 전에 도화지 갈고 어디 뒀어? 아 그러게 창고에 놔뒀었나. 지민은 창고 쪽으로 몸을 옮겼다. 세로 길이만 얼추 허리 부근까지 오는 거대한 도화지 뭉치를 두 손을 낑낑 들고 나오는데 방에서 도하가 눈을 비비며 나왔다. 아 우리 아들 일어났어? 태형이가 지민의 뒤에서 얼굴을 빼꼼 내밀며 인사했다. ! 도화지를 발견한 도하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아장아장 걸어왔다. 도하 그리래! 도하 하가! 도화지를 꽉 껴안은 도하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준 지민은 도하의 손을 잡아 살짝 떼어내었다. 이거 무거우니까 엄마가 옮겨줄게? 도하는 알아들었는지 뒤로 물러났다.

거실 한가운데 서서 도화지의 끝 부분에 붙여 놓은 테이프를 떼어냈다. 돌돌 말린 도화지 뭉치 중 네 장을 빼내어 반대로 말아 쫙 펴냈다. 커다란 도화지가 넓은 거실을 채울 듯 펴진 것을 본 도하가 꺄! 소리를 지르며 도화지 위에 누워 데굴데굴 굴렀다. 도하 기분 좋아? 지민의 물음에 응! 도하가 대답했다. 도하 그림! 도하의 말에 지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앞치마랑 토시 가져오세요. 지민의 말에 도하가 방으로 들어가 제 앞치마랑 토시를 들고 왔다.

옷에 잘 안 묻는 색연필이나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리는 거면 몰라, 도하는 물감으로도 그림을 그리기 때문에 앞치마와 토시는 꼭 필요했다. 아들, 아빠랑 같이 그림 그릴까? 태형의 말에 도하는 세게 고개를 끄덕였다. 파파도 이거 해. 도하가 앞치마랑 토시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알았어. 태형은 키득키득 웃으며 말했다. 점심 만들고 있을 테니까 둘이 잘 놀고 있어. 지민이 제 허리를 감싸 안고 있는 태형의 손을 살짝 빼내려 하자 태형은 손에 힘을 더 꽉 주어 안아 지민의 볼에 재빨리 뽀뽀 했다. . 지민이 놀라며  손을 볼에 갖다 대었다. 씨익 웃은 태형이 허리를 감은 손을 쓱 빼고 방에 들어갔다. 마마. 도하가 바지를 잡아당기자 지민은 어어 하며 정신 차리고 도하를 안았다. 왜 그래요? 도하의 몸을 퉁퉁 튕기며 묻자 도하도 갑자기 지민의 볼에 쪽 뽀뽀했다. 지민의 표정이 멍해졌다. 아까 태형이 뽀뽀한 자리였다. 이게 뭐야아? 지민은 푸스스 웃으며 말꼬리를 늘였다. 이힣. 지민을 따라 웃는 도하의 표정이 여간 깜찍한 게 아니다. 지민은 그의 볼에 몇 번이나 뽀뽀를 했다.

뭐야아아! 왜 도하한테만 해줘!! 방에서 나오던 태형이 둘의 모습을 보자마자 다급히 뛰어왔다. 그의 모습을 본 지민이 도하를 내려주자마자, 태형이 지민을 팍 안았다. 아 나도 해줘어! 태형의 앙탈에 지민은 픽 웃으며 그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자 다 뽀뽀했으니까 둘이 놀고 있어. . 지민의 말에 태형은 쭈그려 앉아 도하에게 앞치마를 매주기 시작했다.

아이고, 우리 아들 이거 입으니까 진짜 화가 같네. 토시까지 끼워준 태형은 바로 휴대폰을 들어 도하를 찍기 시작했다. 아들, 이쁜 자세. 태형의 요구에 도하는 자세를 잡기 시작했다. 옳지! 아구 잘한다! 와 기깔 난다 진짜! 누구 아들인데 이렇게 멋져? 완전 모델이다, 모델! 표정 쥑인다! 태형이 한 컷 찍을 때마다 터져 나오는 칭찬에 도하가 꺄르르 웃어댔다. 지민은 찌개를 끓이면서 들리는 목소리에 피식피식 웃어댔다. 언제나 생각하는 거지만 다른 곳에서 저 부자들 노는 소리를 들으면 그렇게 재밌는 게 없다. 아주 둘이서 꺄르르 꺄르르 좋아 죽는다. 또 사진 찍는데 여념이 없겠지. 지민은 다 끓여진 찌개를 한입 맛보았다. , 잘 끓였다.

밥 다됐으니까 부엌 오세요. 지민의 크게 부르며 식탁에 세팅했다. 밥 다됐다니까? 아무도 올 기미가 보이지 않자 지민이 한 번 더 불렀다. 대답도 안 들리고 올 낌새도 보이지 않자 지민이 거실로 나갔다.


밥 다 됐다는데 왜 안 나와!

?


동시에 꽂히는 땡글땡글한 눈에 지민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똑같은 앞치마를 매고 마주보고 엎드려서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 모습이 붕어빵처럼 똑같아 지민은 결국 웃음을 풉 터뜨렸다. 너희 완전 쌍둥이 같아. 쌍둥이? 태형이 몸을 일으켜 앉았다. 도하도 꾸물꾸물 몸을 일으켜 앉았다.


지민아. 우리가 그린 그림 볼래?

일단 밥 먼저 먹... 야 너 손이 왜 그래!


지민은 순간적으로 보인 태형의 손바닥에 경악을 하며 달려왔다. 태형이 놀라서 손을 숨기기도 전에 지민이 손목을 확 잡아당겼다. 손바닥 전체가 시뻘건 태형의 손을 본 순간 욱한 지민이 뭐라 한마디 하려다 입을 꾹 다물었다. 거대한 도화지 곳곳에 알록달록한 손바닥이 꾹꾹 찍혀 있었다. 도하 손바닥 보자. 지민의 말에 도하가 두 손을 뻗었다. 노란색과 초록색이 손바닥 전체에 꼼꼼히 발려져 있는 것을 본 지민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둘이 손 씻고 와, 빨리 밥 먹게. 지민의 말에 둘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쪼르르 화장실로 들어갔다. 지민은 덩그러니 남겨진 도화지를 내려 봤다. 참 알록달록하게도 찍었네. 지민은 도화지를 들어 거실 벽에 붙였다.

근데 너희 대체 뭐 그리려고 손바닥 찍은 거야? 지민이 다소 큰 소리로 한 말에 태형이 화장실 안에서 대답했다. 손바닥 동물원! 아하. 지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손바닥 동물원은 요즘 도하가 빠진 동화책이었다. 그 동화책 그림은 전부 손바닥을 찍고 사인펜 같은 것으로 추가적으로 그려서 동물로 만든 것들이었다. 귀엽기는. 지민은 중얼거리며 먼저 부엌으로 들어갔다.





마마, 밥 다 먹구 노리터 가두 대? 도하가 밥을 냠냠 씹으며 묻는 말에 지민이 젓가락질을 멈추고 도하를 바라봤다. 그럼 당연히 되지. 지민의 말에 도하가 베시시 웃으며 밥을 빨리 먹기 시작했다. 천천히 먹어, 안 그럼 나중에 도하 배 아야 한다. 그제야 도하는 밥을 꼭꼭 씹어 먹기 시작했다.

그럼 나도 따라가야 하나? 그들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던 태형이 입을 열었다. 그제야 지민은 도하가 전에 한 말이 생각났다. , 그건 그렇네. 지민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어떤 누나가 다가와서 말 걸었다는 것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진짜 아이가 예뻐서 말을 걸었을 수도 있지만 요즘 사회가 그렇다보니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럼 밥 먹고 아빠랑 갔다 올래? 지민의 말에 도하의 입이 불퉁하게 나왔다. 그 입은 뭐야, 아들. 태형은 내심 서운하다는 투로 말했다.


파파도 좋은데에... 노리터에서는 칭구들이랑 놀구 시픈데 파파가 계속 도하랑 놀구 시퍼 하니까...


도하의 말에 빵 터진 지민이 옆에 앉아 있는 태형을 퍽퍽 때렸다. , 아파! 태형은 지민의 손을 홱 치우고 맞은 데를 슥슥 문질렀다. 그럼 엄마랑 아빠랑 같이 갈 테니까 도하는 친구랑 놀고 엄마는 아빠랑 놀면 어때? 죠아! 지민의 말에 한결 표정이 밝아진 도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거실에 어질러 놓은 건 다 치우고 놀러가야 해. 지민의 말에 도하가 바로 자리에 일어났다. 밥은 다 먹고! 다 머거써! 뒤도 안 돌아보고 가는 도하의 뒷모습만 보던 지민이 피식 웃으면서 도하의 밥그릇을 치웠다. 싱크대에 두고 오던 지민은 태형의 설레 하는 표정을 보고 웃음이 더욱 진해졌다. 뭐가 그렇게 신났어? 지민의 물음에 태형은 고개만 저었다.


놀이터 데이트.

?

와 놀이터 데이트 하니까 뭔가 고등학생 같애. 놀이터 정자에 앉아서 이야기 하고. 완전 풋풋해.

우리가 풋풋해 하기에는 너무 오래되지 않았냐? 애까지 있는데.

무슨 상관이야. 마음이 그대로면 됐지. 난 아직도 막 설레고 그러는데.


넌 아니야? 태형의 물음에 지민은 고개를 저었다. 나도 여전히 좋아.

마마 다 치워써! 거실에서 들리는 도하의 목소리에 지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탁 좀 치워줄래? 그의 부탁에 태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하 이 닦고, 옷 입고 해야지 그러면. 태형은 지민이 부엌을 나서는 모습을 좇다, 그가 더 이상 보이지 않고 나서야 자리에 일어나 식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식탁 정리를 마치고 거실로 나올 때 즈음 지민과 도하도 방에서 나왔다. 헐 우리 아들 완전히 복숭아 됐네. 태형은 또 주섬주섬 핸드폰을 꺼내들기 시작했다. 베이비 핑크색의 후드티에 멜빵이 있는 연청바지를 입고 노란 병아리가 그려져 있는 흰 양말을 신고 나온 도하는 귀엽기 그지없었다. 내 새끼 이렇게 분홍색이 잘 어울리다니, 역시 내 안목은 틀리지 않았어. 폰에서 찰칵찰칵 소리가 나자 도하는 기가 막히게 알아차리고 포즈를 잡기 시작했다. 지민은 슬쩍 몸을 피해 프레임 밖으로 벗어났다. 왜 피해. 안 돼, 나 지금 좀 못생겼어. 뭔 소리야,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도하 옆에 붙어.


아 진짜 아니야. 얼굴도 좀 부었고.

어디가? 너 얼굴 원래 그렇게 통통했잖아.

!


태형은 키킥거리며 도하 옆에 붙으라고 손짓했다. 지민은 입을 불퉁하게 내밀며 도하 옆에 붙었다. 어떻게 저런 표정은 도하랑 지민이랑 똑같냐. 태형은 문득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폰을 들었다. 마마 나 안아주. 도히가 팔을 뻗자 지민은 도하를 안아 들었다. , 도하 브이. 도하는 브이 한 손으로 제 눈가에 갖다 대었다. 찰칵. 셔터 음이 경쾌하게 울렸다. 빠리 가자! 도하의 재촉에 지민과 태형이 후다닥 안방에 들어갔다. 미안해 도하야, 옷 빨리 갈아입고 나올게!



왼손은 엄마 손, 오른손은 아빠 손을 잡은 도하가 신나서 폴짝폴짝 뛰었다. 마마 파파 하늘그네! 도하의 말에 지민과 태형이 동시에 팔에 힘을 주어 도하를 들어올렸다. 도하의 몸이 붕 뜨면서 앞으로 후웅 갔다. 꺄아!! 도하가 재밌는 듯 마구 웃어댔다. 한 번 더! 도하의 말에 한 번 더 하늘그네를 해주었다. 도하가 꺄르르 넘어갔다.

, 얘드라!! 저 앞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친구들을 발견한 도하는 두 손을 놓고 후다닥 달려갔다. 도하야 그러다 넘어져! 지민의 걱정 어린 외침은 들리지도 않는지 도하는 기어코 뛰어가 친구들 사이에 꼈다.

태형과 지민은 천천히 걸어가 놀이터 근처에 있는 정자에 나란히 앉았다. 바람이 선선하게 불었다. 그래도 아직 완전히 여름이 온 건 아닌가보다. 태형의 말에 지민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 멀리 도하가 친구들이랑 놀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래도 도하가 친구들이랑 잘 놀고 있어서 다행이다.

도하 친구 많아. 맨날 놀이터에 가면 친구들한테 인기 많은데?

어린이집이고 유치원이고 보낸 적이 없어서 걱정했는데.

그걸 왜 걱정해. 우리 아들은 언제 어디서나 인기 많아. 맨날 친구들이 있어.


태형이 뿌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민은 그의 표정을 보다가 푸흐 웃었다. 그러게, 누구 아들이길래 이렇게 친화력이 좋을까. 태형은 그대로 지민의 팔을 감싸 팔짱을 끼고 머리를 부빗거렸다. 왜 이래. 지민은 태형을 밀어내는 듯하다 결국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주었다. 태형은 제 얼굴을 지민의 어깨 부근에 파묻었다. 오늘. 태형의 나직한 목소리에, 그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던 손길을 멈추었다. . 지민이 작게 대답했다.


꿈을 꿨었잖아.

.

... 아무도 없었다고 했잖아. 어두컴컴한 그곳에 너도, 도하도 없이 나 혼자 덩그러니.

......

거기서 그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었어. 요즘 그런 꿈을 자주 꿔.

태형아.

어쩌지. 내가 너무 행복해서 그런가. 내가 행복한 게 싫어서 계속 나오는 건가? 계속 그런 말 하는 건가?

김태형.

지민아. ...


지민이 다급히 몸을 돌려 두 손으로 태형의 볼을 잡았다. 어느새 태형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갑자기 오른 열 때문인지 눈가가 벌겠다. 지민은 울컥함에 입술을 살짝 깨물며 엄지로 그의 눈가를 살살 쓸어 눈물을 닦아냈다. 왜 자꾸 그런 생각 하는 건데. 지민은 애써 단호하게 말했다.

 

 

그거 그냥 꿈이야. 개꿈이라고. 너 이제 그 사람들이랑 완전히 정리했잖아. 왜 계속 연연하는 건데. 태형아. 이제 너 그 사람들이랑 완전히 남이야.

 

지민아.

 

네 가족이 여기 있잖아! 네 아들도, 나도. 여기 네 옆에!

 

 

태형은 제 볼을 감싸 안고 있는 지민의 손목을 감싸 쥐었다. 살포시 눈을 감자 결국 눈물이 떨어졌다. . 지민은 속상함에 자꾸 한숨이 나왔다. 미웠다. 태형이를 평생 놔주지 않을 것 같은 그 족쇄를 만든 가족들이 너무 끔찍했다. 아니, 이제는 가족도 아니었다. 정말로 태형에게 가족은 지민과 도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매정하게 잘랐으면서, 왜 계속 태형이의 꿈에서 나오는 건지. 대체 태형이가 왜 그들에게 지금까지 그런 소리를 들어야 하는 건지. 지민은 결국 태형이를 와락 안았다. 태형이 자연스레 팔을 지민의 목에 둘렀다. 태형아, 더 이상 두려워하지 마. 귓가에 지민의 목소리가 들린다. 끔찍한 그들의 목소리 위로 지민의 목소리가 덮인다. 이제 너 혼자가 아니잖아, 그러니까 더 이상 그 사람들을 무서워하지 마. 지민은 천천히 얼굴을 떼고 태형을 바라봤다. 너 옛날로 돌아갈 일, 절대 없어. 똑같이 눈물을 달고 있는 주제에 그렇게 말하는 표정은 단단하다. 태형은 지민의 눈가를 살짝 훔쳤다. 너는 왜 우냐. 태형의 말에 지민이 흠칫 놀라 다급히 팔로 제 눈가를 닦았다. 몰라 나도, 갑자기 눈물이 났겠지. 민망한 듯 살짝 몸을 내뺀 지민을 보던 태형이 그의 허리에 손을 감아 확 당겼다. , 깜짝아! 갑자기 몸이 끌리며 태형에게 폭싹 안긴 지민은 태형의 배를 툭 쳤다. 살짝 누운 듯한 자세에 지민은 살짝 고개를 들어 태형을 바라봤다.

 

 

지민아. 나 잘 하고 있어?

 

?

나 좋은 아빠야?

 

 

그의 물음에 약간의 떨림이 느껴졌다. , 잘하고 있어. 지민은 바로 대답했다. 당연하다는 듯한 그의 말투에 태형이 피식 웃었다. 너 도하한테 정말 좋은 아빠야. 지민은 확인 사살하듯 좋은 아빠에 힘을 주어 말했다. 넌 앞으로도 좋은 아빠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지민의 확신에 가득 찬 말에 태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민은 아예 태형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마, 진짜로. 태형은 말없이 지민의 앞머리를 살살 넘겼다.

 

, 저거 뭐야. 지민이 갑자기 상체를 확 일으키며 말하자 태형이 화들짝 놀라며 놀이터 쪽을 바라봤다. 둘 다 동시에 자리에 벌떡 일어나 도하가 있는 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김도하! 갑자기 들린 제 이름에 도하가 뒤돌아보기 무섭게 몸이 확 들려졌다. 파파? 도하는 어느새 자신을 안고 있는 태형을 바라봤다. 당신 뭐예요, 우리 애한테 무슨 볼 일이에요. 지민은 확 굳은 얼굴로 도하의 앞에 쭈그려 앉아 있던 여자에게 물었다. 여자는 당황한듯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

 

 

, 안녕하세요.

 

당신 누구냐구요! 저번에도 우리 도하한테 왔었다고 들었는데 무슨 볼 일이에요, 우리 애한테!

 

죄송합니다. 악의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여자는 고개를 몇 번이나 숙이며 사과 했다. 도하야 저 사람이 너한테 뭐 말 한 거 없어? 태형이 도하에게 슬쩍 물었지만 도하는 고개만 저었다. 저 누나 사진 찡는 사람이래. 도하의 대답에 태형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진? 지민도 도하의 말을 듣자 얼굴이 더 딱딱하게 굳었다. 태형은 아무 생각 없이 지민을 바라봤다가 바로 홱 고개를 돌렸다. 누가 봐도 빡친 모습이다. 어휴, 쟤 빡치면 진짜 무서운데. 태형은 작게 혀를 찼다.

 

 

사진 찍는 사람이라고요?

 

저 절대로 이상한 거 찍는 사람 아니고요! 죄송합니다. 아이가 너무 예뻐서 그만... , 일단 전 이런 사람입니다.

 

 

여자는 황급히 명함을 건네었다. 지민은 씩씩 거리면서 명함을 내려다봤다. 뭔데? 태형도 얼굴을 힐끗 들이밀며 봤다. 제가 지금 키즈 모델을 구하고 있는 중인데 아드님이 너무 눈에 띄어서요. 여자의 부연 설명에 지민이 어벙한 표정으로 여자를 바라봤다. 모델? 태형이 놀라서 되물었다. 모델? 도하가 태형의 말을 따라 했다.

 

 

. 우연히 인스타를 봤는데 저희가 찾고 있는 이미지와 딱 맞아떨어져서요. 혹시 관심이 있으시면 꼭 좀 와주세요.

 

... 너무 갑작스러워서...

 

꼭 좀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힘든 것도 아니고요. 아기들한테 힘든 일을 시키는 것도 아닙니다. 굉장히 편안한 환경에서 촬영하고, 부모님도 다 오셔서 보고 그러는 거라서 괜찮습니다

 

...

 

항상 인스타만 보다가 이렇게 실물로 뵙는 것은 처음인데 역시 아버님 닮아서 도하가 그렇게 예쁜가봐요.

 

 

여자는 태형을 보면서 말했다. ... 감사합니다. 태형이 어색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파파 나 내려조. 도하의 말에 태형은 또 어어 얼빠진 표정으로 대답하며 도하를 내려주었다. 아직도 이 상황이 얼떨떨하기만 하다. 인스타 보고 찾아왔다니. 정말 인스타 보는 사람이 많기는 한가보네. 태형은 머리를 긁적이며 그런 생각을 했다. 도하는 아장아장 걸어가 지민의 다리를 안았다. 지민이 슬쩍 도하를 내려다 봤다. 마마, 사진 찡는 고야? 도하의 물음에 지민은 쭈그려 앉아 도하와 시선을 맞추며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이 누나가 도하가 너어무 예뻐서 도하를 찍고 싶다고 하네. 지민의 말에 흐음... 도하는 검지로 제 옆머리를 콕 찍으며 골똘히 생각하는 자세를 취했다.

 

앞에 있는 여자는 그들의 관계를 파악 하느라 머리가 핑핑 돌아갔다. 일단 아빠는 저 남자일테고, 이 남자는 그래봤자 아빠의 친구일 줄로만 알았는데 마마라니 머리가 복잡해진다. 게다가 실물로 봤던 것 보다 훨씬 더 젊어 보인다. 아니, 젊은 수준이 아니라 그냥 어려 보였다. 많이 해봤자 20대 중반으로 보이는데. 아무리 봐도 자신보다 어려보이는 남정네 둘 사이에 6살 된 아이라니 참 묘한 관계다 싶다.

 

 

지금 당장 답 안주셔도 되니까, 언제라도 마음이 생겼거나 이 쪽 일이 궁금하시면 그 번호로 언제든지 전화주세요. 정말 언제라도 괜찮으니까요, 꼭 부탁드립니다!

 

아아, ...

 

 

허리 숙여 인사하는 여자를 보고 얼떨결에 따라 인사한 지민은 그렇게 후다닥 가버리는 여자의 뒷모습만 멍하니 보다가 천천히 명함을 내려다보았다. 이야, 우리 아들 이쁜 건 알아가지고. 태형도 옆에서 명함을 힐끗 보며 말했다. 그러게. 지민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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뷔민 말도 안되는 육아물 썰12

길/육아물


아이고, 지민아!!! 나 이제 어떡해 지민아!! 아이고, 아이고 내 가슴 찢어진다아아아!!!!

 

집에 들어가기 무섭게 들리는 태형의 악에, 지민은 두 귀를 꾹 막고 천천히 거실로 갔다. 거실 한복판에 대자로 누워 온 몸을 펄떡거리며 오열을 하는 태형이 보니 기가 막혀 말도 안 나왔다. 지민은 미간을 꾹꾹 누르며 애써 분노를 삭였다. 왜 그러는데. 지민의 말에 태형이 힐끗 지민을 올려다봤다. 지미나... 말꼬리를 늘이며 불쌍한 목소리로 입을 여는 태형에, 지민은 팔짱을 끼고 그를 내려다봤다.

 

 

아들이... 유치원 가고 싶대.

 

......

 

이제 아빠랑 놀기 싫은가봐...

 

. 안그래도 오늘 힘들어 죽겠는데 너까지 사람 힘 빠지게 만들지 마라.

 

? ? 오늘 무슨 안좋은 일 있었어?

 

 

지민의 말에 태형이 바로 벌떡 일어나 지민에게 다가갔다. 학교에서 누가 너 괴롭혀? 선배가 괴롭히나? 아님 후배수업이 힘들어? 어깨에 팔을 올려 꽉 끌어안은 태형에, 지민은 자연스레 그의 가슴팍에 기대었다. 몸에 힘을 살짝 빼도 태형이 단단하게 받쳐주니 괜찮았다. 아 몰라, 진짜... 그대로 입을 닫아 버리는 지민에, 태형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소파에 앉았다. 지민도 그의 옆에 앉히고 머리를 살짝 눌러 어깨에 기대기 편하게 해주었다. 지민은 그의 팔을 감싸 안고 머리를 살짝 부빗거리며 더 편한 자세를 만들었다. 오늘도 수고했어. 태형이 지민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근데 유치원은 무슨 말이야.

 

, 지민아... 이제 우리 아들이 나한테서 떨어지고 싶나봐...

 

도하가 유치원 가고 싶대?

 

자기랑 같이 노는 애들 다 유치원 다닌데.

 

유치원 보내야지. 이제 곧 7살인데.

 

...

 

뭐야 그 반응은. 그럼 유치원 안 보내려고 했어?

 

 

지민의 머리를 확 들어 태형을 보며 소리쳤다. 태형은 다시 그의 머리를 살짝 눌러 제 어깨에 기대도록 했다. 아니이... 그건 아닌데... 지민이 그의 손길을 피해 다시 고개를 팍 들어 태형을 바라봤다.

 

 

너 그 때 나랑 얘기했었지. 도하가 유치원 가고 싶어 하면 보내주기로.

 

... 아는데... 그래도...

 

그래도는 무슨 그래도야. 네 아들 또래 친구들이랑 잘 지내는 법도 배워야지. 언제까지 아빠가 싸고 돌거야.

 

나 혼자 집에서 외로워서 어떡하지...

 

 

그게 문제냐... 이제는 반대로 지민이 태형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난 아직도 도하가 막 옹알이 하고 기어 다닐 것 같은데 벌써 아빠 품을 떠나 유치원에 갈 나이가 되다니... 공허한 거실을 보며 아련하게 말하는 태형에, 지민이 아프지 않게 꿀밤을 때렸다. 야 무슨 유치원 가지고 청승이야 진짜.

 

 

그러다 나중에 도하가 다 커서 결혼할 여자 데려오면 아주 오열을 하겠네, 오열을 하겠어.

 

헐 어떡해... 진짜 우리 아들이 결혼한다고 여자 데리고 오면 어떡하지.

 

뭘 어떡해. 좋은 애면 허락하고 안 좋은 애면 반대 해야지. 아니 그것보다 지금 도하가 몇살이나 됐다고 벌써부터 결혼 이야기야.

 

난 매일을 도하가 교복 입고, 대학교 가고, 군대 가고, 취직 하고, 결혼하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빨리 가는지 생각하는데.

 

그럴 시간도 있어서 좋겠다.

 

그러게 내가 학교 가지 말라고 했잖아.

 

 

지민은 어이없다는 눈으로 태형을 쳐다봤다. , 나는 너처럼 그렇게 돈이 매 월 솟아나는 사람이 아니야. 흐흫. 지민의 말에 태형은 그저 웃어넘겼다.

 

 

 

 

 

 

 

 

 

 

마마! 도하는 집에 오자마자 보이는 지민에 후다닥 뛰어와 폴짝 안겼다. 지민은 익숙하게 그를 안아주었다. 잘 놀다 왔어요? 지민의 물음에 도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 노리터 놀다 와써여. 지민은 도하를 안은 채 화장실 앞까지 데려다 주었다. 밖에서 놀다 왔으니까 손, 발 씻고 얼굴 씻고 오면 엄마가 간식 만들어 줄게요. 지민의 말에 도하는 바로 화장실로 들어갔다.

 

아오, 깜짝이야!! 화장실 문을 닫고 뒤돌자마자 보이는 태형에 지민은 화들짝 놀라며 소리를 질렀다. 너 왜 거기 있어! 지민이 아프지 않게 태형의 가슴팍을 퍽 때렸다. 나도 간식. 태형의 말에 어이없다는 듯 올려다봤다. 갑자기 왜이래? 지민이 태형을 살짝 밀어내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나도 간식 줘, 아들은 맨날 쿠키 만들어주고. 태형의 말에 지민이 몸을 돌려 그를 바라봤다.

 

 

너도 먹으면 되잖아.

 

내가 못 먹는 것만 만들잖아. 나도 먹을 수 있는 걸로 만들어 줘. 나도 만들어 줘.

 

왜 못 먹어. 그러니까 내가 편식 하지 말랬지. 도하도 안하는 편식을 왜 하는데.

 

그래도 호박쿠키는 좀 아니잖아.

 

뭐가 아니야, 얼마나 맛있는데.

 

 

태형의 입이 불퉁하게 나왔다. 입 내밀지마, 그렇게 해도 안 바꿀 거야. 지민이 단호하게 말하며 부엌으로 쏙 들어갔다. 아아, 지미나아아 태형이 말꼬리를 늘이며 따라 들어갔다. 지민이 싱크대에 기대어 팔짱을 낀 채 태형을 바라봤다. 태형이 푸스스 웃으며 지민에게 다가왔다. 지민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폭 그를 안은 태형이 양 옆으로 몸을 흔들흔들 움직였다. , 잠깐만지민은 품 사이에 끼인 팔을 빼내 자연스럽게 그의 등을 감싸 안았다. 태형이 지민의 머리 위에 제 머리를 얹었다. , 무거워, 아파. 지민의 말에 태형은 일부러 더 힘을 주었다. , 아프다니까? 지민이 그의 등에 있는 손으로 등짝을 퍽퍽 때렸다.

 

 

지민아.

 

.

 

고맙다.

 

뭐야, 갑자기. 혹시 뭐 나한테 잘못한 거 있어?

 

아니.

 

뭐 숨기는 거 있어?

 

푸흐... 아니. 그냥.

 

뭔데 갑자기 불안하게.

 

같이 있어줘서 고맙다고.

 

... 뭐야 새삼스럽게.

 

 

지민은 자연스럽게 태형의 품에서 빠져나와 뒤돌았다. 나 도하 간식 만들어야 하니까 저어기 가 있어. 지민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만 그의 두 귀는 숨길 수 없었다. 벌게진 두 귀를 본 태형은 숨죽여 웃으며 뒤로 물러났다. 나 여기 식탁에 있을게, 식탁에서 너 보고 있을게. 태형의 말에 지민은 고개만 끄덕였다.

 

 

 

오느을, 노리터에서 칭구들이랑 놀구 이썼는데에... 도하는 커다란 호박쿠키를 오물오물 먹으며 이야기를 했다. 맞은편에 나란히 앉은 지민과 태형이 그런 도하를 바라봤다. 태형의 투정에 지민이 수제 햄버거를 만들어 줘서 태형은 햄버거를 두 손으로 쥐고 있었다. 어떤 누나가 와써. 도하의 말에 턱을 괴고 있던 지민이 천천히 자세를 바로 했다. 누나? 지민의 물음에 도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누나가 나한테 자꾸 머 무러 봐써.

 

뭐를 물어봤는데?

 

이름이랑, ... 나한테 이쁘다고 해조써.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도하에 지민과 태형은 순간 심장이 철렁하는 기분을 느꼈다. 그래서 이름 가르쳐 줬어? 태형이 물었다. 도하는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파파랑 마마가 모르는 사람한테 아무 꺼도 말해주지 마라고 해짜나. 그의 말에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그들이다. 지민은 생각할수록 머리가 아찔해졌다. 태형을 슬쩍 보니 태형의 표정도 심각해져 있었다. 아들. 태형이 입을 열었다.

 

 

다음부터는 아빠랑 같이 놀이터 갈까?

 

... 근데 아빠랑 가며언, 아빠랑만 노라야 대자나. 막 맨날 아빠랑 놀아 달라구 그러구.

 

 

지민은 태형을 흘겨봤다. 너는 도하를 키우는 게 아니라 같이 자라는 거지? 지민의 말에 태형이 빵 터져서 얼굴을 묻고 끅끅거렸다. 넌 놀아주는 게 아니라 같이 노는 거야, 분명. 지민이 덧붙여 말했다. 아아, 웃기다. 태형은 숨을 고르고 햄버거를 한 입 물었다.

 

 

아들이 친구들이랑 놀고 싶다 하면 그냥 벤치에 앉아서 아들 노는 거 구경만 할게.

 

... 구래.

 

 

도하는 쿠키를 입 안에 잔뜩 넣었다. 태형과 지민은 서로 시선을 맞추었다. 도하는 볼이 빵빵해진 채 입을 오물오물 거렸다. 아 헐 맞다! 태형이 햄버거를 후다닥 내려놓고 폰을 꺼내어 재빨리 도하를 찍었다. 아이고, 누구 아들인데 이렇게 귀엽니. 태형은 찍은 사진을 보고 신나서 어깨를 들썩였다. 어디 어디 나도 봐. 지민이 몸을 쭉 빼고 태형의 폰을 내려다 봤다. 도하두 볼래! 도하가 의자에서 내려와 후다닥 태형에게 다가왔다. 태형은 도하를 안아들어 제 허벅지 위에 앉혔다. 지민은 옆으로 슥 밀었다. 다른 도하의 사진이 나왔다. 한 번 더 넘겼다. 지민의 사진이 나왔다. , 이건 또 언제 찍었어! 지민 자신도 모르는 사진들이었다. 옆으로 넘길 때마다 도하와 지민의 사진이 나왔다. 아 뭐야 이거 못나왔잖아, 지워! 지민이 사진을 지우려고 하자 홱 폰을 치웠다. 아 왜 내가 찍은 거야! 태형이 지민을 노려봤다. 파파, 도하 애기 때도 이써? 도하의 물음에 태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태형은 사진을 쭉 내려서 도하의 아기 시절 사진을 보여주었다. 우와, 이거 도하야? 초롱초롱한 눈이 자신을 올려다보자 태형은 흐뭇하게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럼, 우리 아들이지 벌써 이만큼이나 자라주어서 얼마나 대견한지 몰라. 도하는 다시 폰을 내려다보았다.

 

 

언제 한 번 네 폰 검사를 해야겠어.

 

, .

 

이상한 사진도 있잖아! 자는 사진은 대체 왜 찍은 거야, 진짜.

 

찍고 싶어서 찍었다! 내 폰 건들기만 해 봐.

 

웃겨, 어차피 갤러리 잠금도 내가 만든 비밀번호일 텐데.

 

, 아니거든

 

아니면 내 생일이나 도하 생일이겠지 뭐.

 

......

 

 

단순하기는. 지민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휴대폰을 꼭 쥐고 자신을 노려본다. 그렇게 눈 빠져라 노려봐도 소용없어. 그 말에 태형이 눈에 힘을 풀었다. 오늘의 도하는 이걸로 해야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폰으로 이리저리 만지는 태형에, 지민은 또 힐긋 태형의 폰을 봤다. 뭐야, 너 인스타도 했었어? ,  됐는데. 지민이 깜짝 놀라며 물어보자 태형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우리 이쁜 아들 자랑 하기에는 이게 제일 좋아. 태형의 말에 지민은 헛웃음을 뱉었다.

 

 

야 대박. 난 너 인스타 있는지도 몰랐는데 보자.

 

나 이것만 올리고. 오늘의 도하.

 

오늘의 도하?

 

그냥 내가 지은 거야. 매일 도하 사진 하나씩 올려서 오늘의 도하.

 

 

태형은 잔뜩 부풀어 오른 볼을 한 채 입을 오물거리고 있는 도하의 사진을 올렸다. 해시태그를 보니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다. #우리 #아가 #아들 #도하 #세젤귀 #간식 #호박쿠키 #냠냠 #귀여워 #내새끼 #일상 #아들바보

 

볼래? 태형이 건넨 폰에 지민은 태형이 이때까지 올렸던 사진들을 쭉 보기 시작했다. 근데 도하 사진이나 둘이 셀카 밖에 없네? 지민의 말에 태형이 머쓱한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너 사진도 올리고 싶긴 한데 너 나중에 선생님 될 거니까. 혹시나 나중에 이런 것들로 잘못되면 안 되잖아.

 

......

 

, 뭐 괜한 걱정일수도 있는데, 그래도. 이런 거 타고 타고 들어가면 되게 다양하게 많이 나와. 혹시나 아기 좋아하는 네 학생이 내 인스타에 들어오면 어떡해.

 

......

 

...  서운해 할까봐 이야기 안했었어. 미안해.

 

아니 그게 아니라. ... 놀랐어. 처음에는 살짝 서운할 뻔 했는데, 내가 되게 생각이 짧았구나 싶고.

 

... 뒷모습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가끔 아들이랑 둘이 손잡고 걸어가는 모습이 너무 예뻐서 찍은 게 많아. 태형은 제 폰을 가져가 바쁘게 찾다가 사진을 하나 보여주었다. 뭐야, 언제야 이런 적도 있었어? 지민은 언제인지도 기억이 안 나는 어느 날이었다. 아마 내 폰 안에 있는 사진은 모두 언제인지 잘 모를걸. 태형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네가 너무 재밌게 아들이랑 놀거나 네 일에 집중할 때, 너무나 당연한 일상만 찍어서.

 

도하두 볼래. 맞은편에 앉아서 하는 말에 태형은 도하에게도 보여줬다. 우와 이뽀 이뽀! 파파 짱! 그치? 태형은 도하를 보며 웃어주었다. 만개한 벚꽃길을 손 꼭 잡고 걷고 있는 사진이었다. 떨어진 벚꽃들이 바닥을 분홍색으로 물들였다. 바람이 불어 벚꽃이 휘날리는 것이 보였다. 그들의 뒤로 끝없이 이어진 분홍빛 길이 보였다. 하늘은 푸르렀다. 그 정도야 뭐, 얼굴도 안 보이는데. 지민의 말에 태형이 헤 웃었다. 그럼 올린다.

 

 

근데 이런 일상 사진은 왜 찍는 거야?

 

행복하잖아.

 

?

 

도하가 있고, 네가 있고. 행복하니까. 이런 일상을 오래토록 보고 싶어서.

 

......

 

있지. 나 요즘 너무 행복해서 미칠 것 같아. 이런 적 처음이야. 매일 눈을 뜨면 너무 행복해. 방 문 너머에는 도하가 있고, 내 옆에는 네가 있고. 매일 매일이 재밌고. 그래서 간직하고 싶었어하루하루를. 이 날도 있잖아우리 꽃놀이 하러 갔을 때야. 가족끼리 꽃놀이 간 적 처음이었거든. 너무 좋아서. 내 눈 앞에 있는 너희들이 너무 예뻐서 찍었어.

 

파파. 도하 이뻐?

 

그럼 예쁘지 우리 아들. 매일매일 점점 더 이렇게 사랑스러워지면 어떡하지?

 

 

태형은 손을 뻗어 도하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주었다. 지민아, 이런 게 가족인가? 태형이 물었다. 지민은 가만히 태형만 바라보다 살짝 그의 손 위에 제 손을 덮어 잡았다. 네가 우리랑 있는 게 행복하고 편안하다면, 가족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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뷔민 말도 안되는 육아물 썰11

길/육아물


요즘 태형은 도하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조금만 시선을 돌리면 순식간에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니 그 때마다 심장이 철렁철렁 하는 것이다. 제일 처음에는 잠시 물 좀 마신다고 부엌 갔다가 돌아오니 거실에 얌전히 앉아서 잘 놀고 있던 애가 사라져 심장이 철렁했다. 아들? 거실에 덩그러니 서서 도하를 불렀지만 제 목소리만 살짝 울릴 뿐 돌아오는 것은 없었다. 집 안에 있다는 걸 알면서도 불안한 마음을 숨길 수는 없었다. 현관문과 중문은 제대로 닫혀 있는지, 베란다 문은 잘 닫혀 있는지 확인 한 후 집안 구석구석 살펴보기 시작했다. 아들! 자신이 부른다고 대답해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태형은 계속해서 불러댔다. 거실, 화장실, 서재, 아가 방, 자신의 방, 옷 방까지 다 뒤져 봤는데도 보이지 않자 갑자기 숨까지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분명히 집 안에 있을 텐데, 그 애가 밖에 나갈 수가 없는 것을 잘 알면서도 머릿속에는 벌써 최악의 상황까지 만들어냈다. 속이 울컥울컥했다. 집은 왜 또 이렇게 넓은지. 괜히 애꿎은 집만 욕하며 마구 뒤졌다.

 

없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점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어떡하지? 진짜 어디로 갔지. 그 잠깐 새에 이렇게 바로 사라졌을 리가 없는데. 집 안에 있는 걸 알면서도 괜한 불안감에 계속 눈물이 비집고 나올 것 같았다. 그러다 눈에 띈 계단에 설마 해서 다다다 올라가봤다. 2층 거실 한가운데 앉아 좋아하는 인형을 바닥에 탕탕 내려치고 있는 도하의 뒷모습을 보자마자 태형은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스르륵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흐으... 꾹 참았는데 아이의 동글동글한 뒤통수와 앙증맞은 등을 보자마자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났다. 제 눈물을 주체할 수 없어 결국 다 쏟아냈다. 목 안쪽에서부터 끅끅거리는 소리가 났다.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도하가 뒤돌아 제 아빠를 봤다. 빠빠! 도하가 다다다 기어와 태형의 허벅지를 짚고 태형에게 안겼다. 태형은 도하를 꾹 안았다. 빠빠. 도하는 얼굴이 벌게져 눈물을 뚝뚝 떨구는 태형을 보며 점점 자신도 얼굴을 일그러뜨리더니 따라 울기 시작했다. 으에에엥!!!! 빠빠!!! 으이잉!!! 태형은 자신보다 더 서럽게 우는 도하의 몸을 둥둥 거리며 달래면서도 제 눈물을 달래지는 못했다.

 

 

 

 

 

그 날 이후로 도저히 도하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겠는 것이다. 도하가 기는 속도는 웬만한 성인이 걷는 속도 못지않은 것 같았다. 어찌나 빨리 기어 다니는지 혀를 내두를 정도다. 그 덕에 태형은 꼭 해야 하는 일이 있으면 도하를 업거나 안게 되었다. 지민에게는 그 날 일을 굳이 말하지 않았다. 애 제대로 안보고 뭐했냐고 화를 내기도 하겠지만, 왠지 자신이 말하다 울 것 같아서 그러기도 했다. 지민에게는 계속 당부했다. 애가 기어 다니는 속도가 우사인 볼트 급이라고. 지민이 오버하지 말라고 핀잔을 줬었다.

 

지민은 주말마다 집에 왔다. 여기 계속 있어도 된다는 태형의 말에 지민은 단호히 거절했다. 이제 고3인데 자기도 공부해야 한다는 게 이유였다. 태형은 지민이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 잘 알아서 공부를 해야 한다는 지민을 붙잡고 떼를 쓸 수 없었다. 게다가 애초에 지민은 도하를 같이 키울 이유조차 없었다. 엄마 보고 싶다고 칭얼거릴 때는 참 난감했다. 도하는 이제 제 엄마가 자주 없다는 사실을 점점 깨닫고 있었다. 그래서 도어락을 해제하는 소리만 들리면 현관 앞까지 다다다 기어가곤 했다. 지민은 그런 도하를 매번 안고 집 안에 들어오곤 했다.

 

도하가 자라면서 궁금한 것이 많아졌다. 집 안 곳곳 이리저리 쏘다니기를 좋아했다. 지민과 태형은 그럴 때마다 씰룩거리는 통통한 엉덩이만 보면서 어디 부딪치지는 않을까, 어디 다치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저번에 빠른 속도로 기어가다 그만 식탁다리에 머리를 찧어 집 떠나가라 울어대던 도하를 생각하면 아직도 심장이 철렁했다. 애 키우다가 내가 심장마비로 먼저 돌아가시겠다. 저번에 지민이 한 말에 태형도 동의 했었다.

 

 

도하가 걸어 다니면 좀 더 좋은데 데려갈 수 있을텐데.

 

좋은데 어디?

 

많지. 당장에 집 앞 놀이터 가도 되고.

 

 

지민의 말에 태형은 도하를 유심히 보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들. 한 손에 인형을 잡은 채 거의 인형을 뭉개며 이리저리 기어 다니는 도하를 뒤에서 불렀다. 도하야. 태형이 이름을 부르자 그제야 도하는 엉덩이를 붙여 앉은 후 머리만 돌려 태형을 바라봤다. 아 잠깐만 이건 소장감이야. 태형은 주머니에 넣어두던 폰을 꺼내 바로 도하를 찍어댔다. 도하는 찰칵찰칵 들리는 소리에 꺄르르 웃어보였다. 태형은 도하의 웃음에 따라 웃었다. 태형이 웃을때마다 네모로 변하는 입은 언제 봐도 신기했다. 네가 하도 찍어 대서 이제 도하가 저 소리만 나면 자기 찍는 줄을 알아. 지민의 말에 태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 휴대폰에 지민은 평생 모를 그의 사진과 도하의 사진이 엄청 많았다. 태형의 보물이었다.

 

인형을 손으로 마구 뭉개던 도하는 갑자기 엎드리더니 제 방으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옛날에는 딱히 안 그랬는데 요즘은 도하가 기기 시작하면 긴장된다. 태형과 지민은 숨까지 죽여 가며 매의 눈으로 도하를 봤다. 아 진심 안 되겠다, 보호 장비를 사거나 모서리마다 스펀지를 사던가 해야지. 지민의 말에 태형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 방에 들어간 도하는 인형을 제 등에 업은 채 이리저리 기어 다니기 시작했다. 이 넓은 집 안 곳곳을 다다다 기어 다니는 모습을 태형은 전부 동영상 안에 담아냈다. 도하야. 지민이 부르자 태형의 방에서 빼꼼 나온 도하가 기어와 바닥에 앉아있는 지민의 품에 안겼다. 마마! 미나, 미나! 도하가 눈을 휘어 웃으며 하는 말까지 영상 속에 다 담아낸 태형은 저장 버튼을 누른 후에야 바닥을 치며 웃었다. 미나래, 미나. 지민은 도하를 안은 채 엎드려서 이제는 꺼이꺼이 우는 태형을 노려봤다.

 

도하는 지민과 태형이 하는 말을 다 따라 하기 시작했다. 애가 배우는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지민은 도하 앞에서 대화를 나눌 때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했다. 도하가 요새 꽂힌 단어는 미나였다. 태형이가 지민을 부르는 것을 듣고 도하가 따라 하는 것이었다. 처음에 도하가 자신을 보고 미나라고 불렀을 때 너무 놀라 말도 안 나왔다. 제 팔을 톡톡 치며 미나! 미나! 거리는 도하가 너무 사랑스러워 꽉 안아줬었다. 그 이후로 도하가 마마랑 미나를 번갈아 쓰는 것이다. 엄마 해봐 엄마. 엄마! 지민의 말에 도하가 따라서 엄마 엄마 외쳤다. 그래봤자 그 때만 잠깐 쓰고 곧 마마나 미나로 돌아오지만. 반대로 태형한테는 파파 아니면 태태라고 했다. 지민이 평소에 태형을 태태라고 부르는 것을 듣고서 따라 하는 것이었다. 지민이 화나서 김태형! 소리치면 그의 밑에서 다리 쭉 뻗고 앉아 태혀이! 따라 소리치는 도하를 볼 때면 태형은 절로 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았다. 둘 다 복숭아 색으로 물들인 통통한 볼을 움직이며 말하는 모습이 귀여워서 몸부림이 다 쳐졌다.

 

 

 

우리 도하, 서볼까요? 지민은 도하의 두 허리를 잡고 자리에 세웠다. 도하는 허공에서 발을 움직였다. 마치 자전거를 타는 모양새에 태형은 그것도 영상으로 담아내기 시작했다. 너는 그것 좀 작작 찍어. 지민의 말에도 태형은 아랑곳 안했다. 나중에 남는 게 사진이야. 지민은 작게 쯧 혀를 차곤 다시 도하에게 집중하기 시작했다.

 

 

도하야, 소파 잡아봐 소파.

 

으으응! 미나! 앙대!

 

... 안 돼는 또 어디서 배운 거야.

 

 

지민은 고사리 같은 손으로 소파를 팡팡 내려치면서 앙대 앙대 외치는 도하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아이고, 우리 아들 왜 이렇게 말을 잘해, ? 우리 아들 천재 아니야? 태형은 호들갑 떨면서 폰을 도하 가까이 들이댔다.

 

 

아들, 아빠 이름 뭐야. 아빠 이름.

 

태태! 태태! 앙대 태태, 앙대.

 

대박, 지민아 우리 아들 언어에 머리가 트였나봐.

 

미나 이뽀 이뽀!

 

헐 세상에 예뻐까지 알다니, 우리 아들 누구 아들인데 이렇게 이쁜말만 골라서 하지?

 

너는 안 돼가 이쁜 말이냐?

 

아들, 또 얘기해봐.

 

 

태형은 지민의 말은 들리지도 않는지 신나서 폰을 들이대며 도하를 부추겼다. 도하는 두 손을 소파에 떼자마자 바닥에 콩 엉덩방아를 찧었다 도하야! 지민이 깜짝 놀라 도하를 안아들었지만 도하는 괜찮은지 박수만 짝짝 쳐댔다. 아직 다리 힘이 부족한가... 지민은 속으로 생각하며 도하의 두 다리를 주물주물거렸다. 이뽀 도하 이뽀. 도하가 박수를 치며 웅얼거리듯 하는 말에 태형은 아예 뒤로 넘어갔다. ... 좋은 세상이었다... 태형의 리액션에 도하는 꺄르르 웃어댔다.

 

 

도하 예뻐요?

 

도하 이뽀.

 

엄마 예뻐요?

 

미나 이뽀! 이뽀!

 

아빠는? 아빠 예뻐요?

 

태태 이뽀 이뽀!

 

 

지민의 물음에 도하가 엉덩이를 들썩이며 대답했다. 태형은 도하의 대답에 웃음을 터뜨린 지민까지 동영상으로 찍고 나서야 폰을 넣었다. 오늘도 엄청난 수확이야. 태형은 오늘 찍은 영상들을 외장하드에 옮길 생각을 하며 도하를 바라봤다. 도하는 다시 지민의 무릎에서 내려와 천천히 어디론가 기어가기 시작했다. 지민은 천천히 도하의 뒤를 따라갔다. 부엌으로 향하는 도하에 지민이 바로 도하를 안아들었다. 앙대! 도하가 지민의 품에서 버둥거렸지만 지민은 그런 도하를 꽉 안았다. 이렇게 또 서랍 열어서 안에 다 꺼내려고? 지민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도하는 푹 지민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하고 싶은 거 하라고 해. 거실로 오자 자신을 올려다보며 말하는 태형에, 지민은 도하 몰래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보였다. 네가 치울 거 아니면 조용히 해. 지민의 말에 태형은 입을 다물었다. 사실, 청소는 태형도 할 수 있었다. 다만, 깔끔하게 정리를 잘 못해서 항상 지민이 다시 정리 하고는 했다. 태형은 그때마다 지민의 뒤에 안절부절 못하면서 지민아 내가 할게. 같은 말을 꺼냈지만 넌 그냥 정리에는 손 안대는 게 도와주는 거야라는 말을 들은 이후로 태형은 얌전히 청소만 했다.

 

 

아니, 장난감 많은데 왜 서랍 안에 들은 걸 다 꺼내는지 모르겠네.

 

그게 더 재미있나보지.

 

위험하잖아. 특히 부엌은 깨 같은 거 쏟아지면 노답이고, 칼 떨어지면 위험한데.

 

부엌에 아예 문을 달아놓을까.

 

뭐야, 그건.

 

슬라이딩 도어 달면 되지. 잠글 수 있는 걸로.

 

 

지민은 생각지도 못한 태형의 말에 푸핫 웃었다. 제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던 도하가 빼꼼 고개를 들어 지민을 바라보다 따라 웃었다. 아들 재밌어? 태형의 말에 도하가 태형 쪽으로 고개를 돌려 꺄르르 웃었다. 어쨌든, 우리 도하 부엌은 가면 안돼요. 지민의 말을 아는지 모르는지 손가락만 쭉쭉 빠는 도하에, 태형이 살짝 그의 손을 빼내었다. 솔직히 얘 다 알아듣는다. 지민의 말에 태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복숭아, 걷는 것 보다 말을 더 빨리 배우네.

 

 

근데 도하 말 진짜 빨리 배우는 건가.

 

몰라. 이맘때 즈음이면 다 엄마 아빠는 하지 않나. 나머지는 그냥 우리가 자주 하는 말 따라 하는 수준이고.

 

아 주위에 애가 없으니까 뭐 제대로 크고 있는 건지를 모르겠네.

 

 

우으응..으브! 도하가 갑자기 버둥대자 지민이 그를 살짝 바닥에 내려주었다. 도하는 또 빠르게 기어 다니기 시작했다. 아들 걸어 다니기 시작하면 더 힘들겠는데? 도하를 멍하니 바라보던 태형이 말했다. 지금도 집 안 곳곳을 매일 돌아다니는데 걸어 다니기 시작하고 밖에 나가면 얼마나 더 그러겠어. 태형의 말도 일리 있었다. 진짜 한눈팔면 안 된다, 너 매번 말하는 거지만 진짜 도하 두고 화장실도 가지 마 알았어? 지민의 말에 태형은 괜히 찔려 어색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저번에 도하 사라진 줄 알고 울면서 찾았던 그 날 일을 지민이 알 리가 없는데 왠지 다 알고 있을 것 같은 기분에 태형은 괜히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나만 입 다물면 돼, 나만. 태형은 몇 번이나 다짐했다.

 

 

 

나 저녁 준비 할 테니까 도하 부엌으로 안 오도록 해줘. 지민의 말에 태형은 티비에 시선을 고정한 채 대충 고개만 끄덕였다. 지민은 멀뚱히 서서 그런 태형을 보다 성큼성큼 다가와 태형의 엉덩이를 퍽 내려쳤다. , 아파!! 태형이 짜증내면서 상체를 일으켜 앉아 지민을 올려다봤다. 그런 모습까지 얄미워 지민은 입술만 잘근잘근 씹었다.

 

 

내가 진짜 누구 때문에 여기서 시간 죽이고 있는지 알지?

 

... 미안.

 

진짜 마음에 안들면 바로 집에 가버릴 거니까 알아서 몸 사려라.

 

.

 

도하 보고 있어.

 

 

지민의 말에 태형은 바로 티비를 끄고 도하를 찾기 시작했다. 도하야. 아들. 우리 복숭아. 어디 갔어? 태형의 부름에 어디선가 입에 인형을 문 채 도하가 기어 나왔다. 아들, 이거 입에 무는 거 아니라고 했지. 태형이 재빨리 그에게 달려가 인형을 입에서 빼내고 줄줄 흐르는 침을 거즈수건으로 닦았다. 미나! 미나! 태형의 손길을 피하면서 엄마를 부르는 도하에, 태형은 도하를 아예 안아서 둥둥 몸을 튕겨주었다. 엄마 지금 맘마 만들어, 맘마 다 만들 때까지 아빠랑 놀자. 그럼에도 도하는 자꾸 발버둥 치며 태형의 품에서 벗어나려 했다. 으이잉!! 조그만 손으로 퍽퍽 태형을 때리기까지 하는 통에 태형은 결국 소파에 살포시 도하를 내려놓았다. 우으응... 뭐가 계속 마음에 안 드는지 투정만 부리는 도하 앞에 인형을 흔들어 보기도 하고, 도하가 좋아하는 까꿍 놀이도 해보고, 카메라도 들이대 봤는데 그의 표정은 펴질 생각을 안 한다. 마마! 마마! 손을 뻗으며 자꾸 엄마만 찾는 도하에, 태형은 난감함에 머리만 긁적였다.

 

 

아빠도 엄마 보여주고 싶지만 아들이 부엌으로 가기에는 너무 위험해.

 

으브으!

 

무슨 말인지 알겠어, 김도하?

 

아브브! 으브...!

 

, 알겠냐고요. 복숭아씨.

 

 

태형은 도하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몰랑몰랑한 감촉에 손에 느껴지자 태형이 작게 키득거렸다. 진짜 지민이 볼 만지는 것 같아. 태형이 제 볼을 검지로 콕콕 찌르자 도하는 큰 눈만 끔뻑이다가 제 고사리 같은 손으로 똑같이 제 볼을 콕콕 찔렀다. 아이고!!! 귀여워 죽겠네!!! 태형은 결국 도하를 꼭 안고 거실 바닥을 굴렀다.

 

멀리서 들리는 태형의 앓는 소리에 지민은 작게 웃었다. 저렇게도 좋을까. 처음 도하를 키운다 했을 때는 걱정 밖에 안됐는데 도하 키우는 거 보면 괜한 걱정이 아니었나 싶다. 아직 서툰 부분이 있긴 해도 나름 꼼꼼하게 챙길 거 다 챙기고 잘 키우는 거 보면 좋은 아빠다. 예전보다 많이 밝아지고 웃음도 많아졌다. 지민은 그 점이 제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덕에 육아에 일절 관여를 하지 않겠다고 했던 자신이 결국 도하를 같이 키우게 되었지만.

 

오늘은 자고 내일 집에 갈까. 파를 썰면서 의미 없는 생각을 하던 지민은 갑자기 거실에서 들리는 태형의 괴성에 인상을 찌푸렸다. 우와아아아!!!!! 지민아!!!!! 제 이름을 크게 부르면서 다다다 달려오는 태형에, 결국 지민은 칼을 내려놓고 태형을 돌아봤다.

 

 

야 내가 그렇게 크게,

 

, 도하가!! 도하가!

 

도하?

 

빨리 와 봐!

 

 

갑자기 제 손을 확 잡아당기는 태형에 지민은 순간 휘청거렸다. 빨리빨리빨리!!! 태형이 잔뜩 흥분하며 지민을 질질 끌고 갔다. 잠깐, 잠깐만 내가 갈게! 지민은 정신없이 태형의 손에 이끌려 거실에 나갔다가 보이는 광경에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빽 질렀다. 도하야!!!

 

도하가 두 다리로 선 채 고개만 돌려 지민을 바라봤다. 지민의 얼굴이 보이자마자 꺄르르 웃으며 몇 발자국 내딛는 도하에 태형은 결국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마마! 몇 걸음 걷다가 쿵 엉덩방아를 찧은 도하에, 지민이 깜짝 놀라 후다닥 도하에게 달려가 그를 안아주었다. 도하는 아프지도 않은지 여전히 방실방실 웃고 있었다. 미나! 미나! 도하가 웅얼거리며 지민의 두 볼에 손을 갖다 대었다. 어떡해, 우리 복숭아 진짜 걸어. 지민은 감격스러움에 뒤돌아 태형을 바라봤다가 기겁을 했다. 너 왜 울어! 지민이 도하를 안은 채 태형의 앞에 마주 앉았다. 흐으... 우리, , 우리 아들이... 태형은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팔을 뻗었다. 지민은 도하를 안겨주었다. 아이고, 우리 도하가!! 태형은 도하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도하는 태형의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우리 아들이 벌써 걷기 시작하다니...

 

......

 

이러다 나중에는 뛰기 시작하고, 말하기 시작하고, 학교 다니기 시작하고, 여친 생겨서 오고, 취직 하고, 결혼 하겠지...

 

야 아직 2살 밖에 안됐어.

 

기어 다니기만 할 것 같았던 우리 복숭아가... 아 너무 감격스러워.

 

눈물이나 닦아.

 

 

태형은 그제야 한 손을 들어 눈물을 닦았다. 태형의 얼굴을 멍하니 보던 도하가 제 손을 태형의 눈 밑에 갖다 대고 슥슥 닦기 시작했다. 빠빠.. 웅얼거리면서 부르는 도하에 태형은 다시 도하를 꾹 안았다. 아들아 제발 천천히 커줘...

 

말하기 시작하면 아주 오열을 하겠네. 지민은 그 생각을 하며 폰을 꺼내 영상을 찍기 시작했다. 여전히 얼굴에 눈물을 가득 묻힌 채 도하를 안고 있는 태형을 찍으며 말했다. 아들 걷는 거 안 찍을 거야? 아 맞아. 태형은 그제야 도하를 바닥에 내려주었다. 도하는 멀뚱히 앉아 태형을 바라보며 눈을 끔뻑거렸다. 태형은 그대로 조금 떨어져 앉았다. 아들, 아빠한테 와봐. 태형의 말에 도하가 기어갔다. 아니, 도하야 일어나야지. 태형은 도하에게 다가가 다시 멀리 앉히고 뒤로 갔다. 태형이 움직일 때마다 도하가 기어서 졸졸 쫓아갔다. ! ! 아빠 이름을 부르면서 졸졸 따라다니는 도하에 태형은 금세 목적을 잊고 헤벌쭉한 얼굴을 하고선 거실을 이리저리 배회했다. 그때마다 얼굴을 높게 치켜들고 따라오는 도하가 귀엽기만 하다.

 

지민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결국 들고 있던 폰을 내려놓았다. 너 도하 걷는 거 영상으로 안 찍을 거야아 맞다. 태형은 다시 정신을 차리고 도하의 앞에 앉아, 그의 허리를 두 손으로 잡고 일으켰다. 도하가 허공에 발길질을 하기 시작했다. 태형이 살짝 세워주자 그대로 바닥에 쿵 주저앉았다. 태형은 머리를 긁적였다. 분명 스스로 일어나서 걸었는데. 지민은 결국 카메라를 껐다. 기분 내키면 걷나보다. 지민의 말에 태형의 표정이 살짝 시무룩해졌다. 아들 처음 걸었을 때 찍었어야 했는데... 지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저녁 하러 간다, 부엌에 애 오게 하지 마. 지민의 말에 태형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하는 고개를 들어 지민을 올려다보더니 지민의 바지를 꾹 부여잡고 제 힘으로 서기 시작했다. 헐 지민아! 지민아! 태형의 호들갑에 지민도 깜짝 놀라 내려다 봤다. 미나, 으브! 도하가 두 발로 선 채 지민을 올려다봤다. 태형이 급하게 손을 뻗어 제 폰을 들고 영상을 찍기 시작했다. 아들. 태형의 부름에 도하가 태형을 돌아봤다. 도하가 두 발로 선 채 카메라를 향해 꺄 웃는 모습이 제대로 찍혔다. 아 너무 감격이야. 태형은 또 울컥해서 한 손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지민은 도하가 붙잡은 발을 한걸음 뗐다. 그만큼 도하가 아장아장 걸었다. 그 모든 행동들이 태형의 폰에 찍히고 있었다. 또 한 걸음 움직이자 그만큼 아장아장 따라왔다. 태형아 이거 봐, 너무 귀엽다. 지민이 눈을 접어 웃으며 태형을 향해 웃었다. 태형은 그의 웃음도 카메라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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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하 10개월

지민이 태형이 19

어느 주말

 

 

 

 

 

아 현생 진짜 욕나온다

빨리 방학이 왔으면

 

 

 

 

뷔민 말도 안되는 육아물 썰10

길/육아물


미쳤어!

 

지민의 윽박에 태형은 할 말 없어 소파에 구겨져있었다. 으아아앙!!!!! 지민의 큰 소리에 거실에 덩그러니 앉아있던 아기가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울지 마 아가... 울지 마. 태형은 눈치를 보며 천천히 소파에서 내려와 아기를 안아 달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지민은 짜증스레 머리를 쓸어 올리며 결국 헛웃음을 뱉었다. 어이가 없다 진짜. 지민의 말에도 태형은 입을 꾹 다물 뿐이었다.

 

 

 

 

 

지민은 또 주말 내내 늘어져 있을 태형이 눈앞에 훤해 아침 일찍 그의 집으로 향했다가 거실에서 자고있는 아기를 보고 진심으로 기절할 뻔 했다그대로 넘어가 뇌진탕 걸리는 상상까지 했버렸으니 아직도 그 생각만 하면 뒤통수가 괜히 아리는 느낌이다. 자지러지게 울어대는 아기와 그 아기 하나 제대로 달래지 못해 서툴게나마 안아서 진땀만 뻘뻘 흘리는 모습에 기가 찼다.

 

태형은 중학교 때부터 사고를 많이 쳤다. 주위에서 잡아주는 사람이 없으니 말 그대로 고삐 풀린 말 새끼였다. 지민은 처음에 그 결과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생각하려 해도 김태형은 그럴 애가 아니었다. 정말 팔은 안으로 굽어서 그런 게 아니었다. 태형은 여자랑 노는 취미 없었고, 설사 있었다고 해도 사리분별 못하고 아랫도리 놀리는 애는 아니었다. 물론 처음에는 빽 소리를 지르며 등짝을 미친 듯이 때렸다. 아무리 네가 망나니짓을 하고 다녀도 그러려니 했는데 이 미친 새끼가!! 네가 지금 몇 살인데 네 새끼를 싸질러! 태형은 필사적으로 날라 오는 지민의 손을 피해 다녔지만 결국 제대로 잡혀 얻어맞았다. 아 아파! 아파! 아 진짜 내 아기 아니라고!!! 태형은 그의 불같은 손에 결국 사실을 고하고 말았다.

 

후에 자신의 아이가 맞다고 우겨도 지민은 들은 척도 안했다. 정말 목석처럼 그 자리에 서서 태형의 말에 안 돼만 외쳐댔다. 로봇이 따로 없었다. 무슨 안 돼 로봇이냐고. 태형은 거의 울상이 되었다. 태형은 지민이 그런 제 표정에 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만은 예외였다. 장화신은 고양이 같은 눈빛을 보내도 그 앞에 방패라도 있는 것처럼 족족 다 튕겨냈다. 실로 놀라운 쉴드가 아닐 수 없었다.

 

 

그 엄마도 미친년 아니야, 왜 자기 자식을 남의 집 앞에다가 버리냐고 버리기를!

 

내 애라니까.

 

구라치지 마, 새끼야. 거짓말은 하나도 못하는 놈이 어디서 지금 감히 내 앞에서 거짓말 할 생각을 하지? 앙큼하게.

 

 

태형은 금방이라도 레이저가 나올 것 같은 지민의 눈을 살짝 피했다. 태형이 돌린 시선의 끝에 아이가 있었다. 아이는 곤히 잘 자다가 갑자기 끔뻑 눈을 떴다. 지민과 태형은 동시에 헉 숨을 들이켰다. 잠시 넓은 거실에 정적이 돌았다. 아기는 울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잠투정을 부리더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둘 다 어찌할 바 몰라 안절부절 하는 새에 아이는 잠이 가득한 표정으로 우뚝 자리에 앉았다. 낯선 곳임을 알아차렸는지 주위를 둘러보더니 태형과 눈이 마주쳤다. 태형은 잔뜩 굳은 몸으로 끔뻑끔뻑 아기만 내려다보았다. 꺄으! 아기가 방긋 웃었다. 태형의 표정이 풀리면서 헤 웃었다. 멍청한 웃음 짓기는. 지민의 눈에는 지금 태형이 무슨 짓을 해도 미워 보였다.

 

 

내가 키울 거야.

 

?

 

우리 집 앞에 애가 있는 이유가 있겠지.

 

돌았어? 너 정신 어떻게 됐냐?

 

나 멀쩡해.

 

근데 네가 키운다고? 정신 차려 미친 새끼야. 네가 뭔데 생판 모르는 사람 애를 키우냐고.

 

......

 

. 그 애가 안쓰러워? 너 같아? 동질감 느껴져? 그럼 더더욱 네가 키우면 안 되지.

 

.

 

정신 차려. 18살이야. 18살이 대체 뭘 믿고 애를 키운다는 건데? 제 배 아파 낳은 새끼도 힘든 게 육아야. 근데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 새끼를 네가 어떻게 무슨 수로 키워. 정으로 키워? 존나 위험한 생각이야 그거.

 

키울 수 있어. 내가 키울 거야.

 

미쳤어!

 

 

결국 지민의 폭발과 함께 아기의 울음. 태형은 눈치만 보며 아이를 달랬다. 제 눈치를 보면서도 기어코 꾹 다문 입술에 태형의 결연함이 느껴져 지민도 후 분노가 담긴 한숨을 뱉으며 자꾸 머리를 쓸어 올렸다. 아이는 잠시 후 울음을 그치고 자연스레 태형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었다. 태형은 여전히 어색한 손길로 아기의 등을 쓸어내렸다. 허 참. 아까부터 헛웃음 밖에 안 나왔다. 지민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매번 사고만 치고 다녔던 태형이 한 일들 중에 단연코 제일 큰일이라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다하다 이제는 피 한 방울 안 섞인 생판 넘의 집 애를 키운다니. 그냥 어이가 없다. 그 애가 왜 버려졌는지, 어쩌다 버려졌는지, 부모는 누구인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제 집 앞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덜컥 데리고 왔다니. 지민은 태형을 노려봤다. 너 생각 없는 놈인 건 알고 있었지만 진짜 생각 없다. 지민의 말에 태형이 힐끗 지민을 쳐다봤다.

 

 

요즘은 착하면 호구야. 너 호구라고. 아니 그건 착한 것도 아니지. 그냥 돌은 거지. 정에 끌려 애를 키운다는 그 발상이 존나 돌은 거라고.

 

그만해.

 

어떻게 그만해. 나중에 네가 어떤 삶을 살게 될지 존나 훤한데 어떻게 그만하냐고. 너 걔 때문에 하고 싶은 거 다 포기하면서 살아야 할지도 몰라. 그 근본도 모르는 애 하나 때문에. 왜 자꾸 너 스스로 네 인생 못 말아먹어 안달이야.

 

적당히 해, 진짜.

 

내가 지금 너 욕하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알아?

 

 

지민은 아무 말 없는 태형에 결국 입을 다물었다. 마마. 애 입에서 나온 소리에 지민은 아이를 노려봤다. 마마... ... 아기는 자꾸 지민 쪽을 보면서 자꾸 입을 오물거렸다. 나 네 엄마 아니야. 지민이 툭 내뱉은 말은 본인이 느끼기에도 냉담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아이는 개의치 않고 마마를 불러댔다. 태형은 자기가 더 당황하며 아이의 몸을 둥둥 흔들어주었다. 엄마 아니야, 아가 저 사람은 엄마가 아니야. 아이를 달래는 꼴을 보기도 힘들다. 지민은 화가 느껴지는 걸음걸이로 태형의 방에 들어가 꽝 소리 날 정도로 세게 문을 닫았다. 으아아앙!!!! 아기가 또 울기 시작했다. 태형은 빨리 아기를 달래면서도 힐끗힐끗 제 방을 쳐다봤다.

 

자신이 막무가내인 것은 태형도 잘 알고 있었다. 지민의 마음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다. 확실히 이 나이 먹고 애를 키운다는 것이 힘든 일인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태형은 안고 있는 아기를 내려다보았다. 아기는 자신을 보면서 어느새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착하네, 처음 보는 사람한테도 잘 안 울고. 낯선 곳인데도 잘 안 울고. 태형은 아기의 볼을 살짝 만져보았다. 보들보들 하면서도 말랑말랑한 아기의 볼에 태형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내가 아빠 할 테니까 같이 살자? 아이는 태형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꺄으! 눈을 휘며 웃었다.

 

 

 

지민이 방 문 열고 거실로 나왔다. 힐끗 시계를 보니 12시 반이었다. 거의 3시간 가까이 방에 있었던 것 같다. 태형은 부둥부둥하던 아기를 살짝 꽉 안았다. 지민은 그런 모습에 또 어이가 없는 듯 헛웃음을 뱉었다. . 한숨을 쉰 지민이 태형의 옆에 털썩 앉았다. 조용한 거실에서 커다란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있는데 이렇게 어색한 적도 없었다. 태형은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그냥 아기만 안고 있었다. 지민은 한동안 말없이 꺼져 있는 티비만 바라보았다. 내가 생각해봤는데. 잠시 후 입을 뗀 지민에 태형이 지민을 쳐다봤다.

 

 

솔직히 아직도 내 머리로는 이해가 안 된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그 애를 시설에 보내고 싶은 심정이야. 그런데 너는 이미 정을 준 것 같고. 게다가 넌 내 말은 곧 죽어도 안 듣지.

 

......

 

네가 그렇게 하겠다고 정했으니 내가 더 이상 왈가왈부 하는 것도 웃겨. 아니 생각해보니까 애초에 네 일에 내가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는 것도 웃기고. 니 마음대로 해.

 

......

 

대신 네가 키운다고 했으니까 제대로 키워. 힘들다 어쩐다 찡찡대지 말고 애 잘 키워. 예쁘게 키워. 어디 가서 애가 못된 소리 듣고 오지 않도록. 누가 봐도 사랑 많이 받고 자랐다는 생각이 들도록. 네가 미자든 성인이든 그런 건 상관없어. 오늘부로 너는 그냥 애 아빠가 되는 거야. 그러니까 애 아빠답게 처신 잘 하라고. 또 망나니짓 하지 말고.

 

.

 

, 진짜. 어쩌다가...

 

 

지민은 혼란스러움이 가득 담긴 한숨을 뱉으며 태형과 아이를 번갈아 봤다. 아이가 지민과 눈이 마주치자 몸을 꼼지락 거렸다. 마마! 아이의 옹알이에 지민의 미간에 작게 구겨졌다. 근데 얘는 왜 아까부터 나한테 마마라고 하는 것 같지. 지민의 말에 태형이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네가 얘 진짜 엄마랑 닮았는가보지. 태형의 말에 지민이 그를 노려봤다. 아가 아빠 해봐, 아빠. 태형은 그런 시선을 못 느낀 척 아기를 잡고 말을 거렸다. 아빠 해보세요. 지민은 그런 태형과 아이를 번갈아 보다가 결국 피식 웃었다. 애가 이쁘긴 하네, 어쩐지 김태형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아이를 가만히 보다가 문득 든 생각에 입을 열었다.

 

 

근데 진짜 이 애 어쩌다가 네 집 앞에 있었지.

 

아무 집 앞에 버렸나보지.

 

꼭대기 층에?

 

......

 

......

 

그럴 수도 있지.

 

. 너 또 숨기는 거 있지.

 

아니.

 

너 거짓말인 거 들키면 진짜 뒤진다.

 

 

지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거실 구석에 있던 상자로 거침없이 다가갔다. 지민아! 태형은 아이를 소파에 두고 다급히 지민을 따라가 그의 팔을 잡았지만 지민은 바로 태형의 손을 뿌리치고 상자 앞에 앉았다. 지민아 내가 다 설명할게. 태형이 따라 앉으려다 지민에게 밀려 벌러덩 넘어졌다. 상자 안에는 각종 아기 용품이 있었다. 존나 계획적이네. 지민은 상자 안에 들은 물건을 마구 꺼내기 시작했다. 태형은 필사적으로 지민을 막으려 했으나 지민은 어디서 그런 힘이 갑자기 났는지 족족 태형을 밀쳐댔다. 너 이러니까 더 수상해. 지민의 말에 태형은 식은땀만 났다. 기어코 바닥에 깔린 어떤 수첩을 발견한 지민은 그 수첩을 꺼냈다. 지민아, 내가 얘기할게. 태형은 그 수첩을 뺏으려고 손을 뻗었으나 지민이 더 빨랐다. 수첩에 끼여 있는 종이를 펴서 본 지민에, 태형이 재빨리 그 종이를 찢어버렸다. 양 손으로 찢어진 종이를 멍하니 보고 있던 지민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태형을 바라봤다. 젠장. 태형은 제 커다란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멍한 지민의 표정에는 이미 편지를 다 읽어버렸다고 써져 있었다. 태형은 제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결국 고개 떨구었다. 둘 사이에 아무 말이 없었다. . 지민이 헛웃음을 뱉었다. 찢어진 편지를 잡고 있는 두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 지민의 목소리도 정처 없이 흔들렸다.

 

 

... 결국 이거 때문에....

 

아니야. 그냥 내가 키우고 싶었어. 우리 집 앞에 있었으니까, 아 운명이구나 했다고.

 

그래, 씨발. 일부러 놔둔 거지 쟤 엄마가. 운명인 것처럼.

 

......

 

대체 그 자식은 뭐 하는 놈이야.

 

......

 

너는 왜 아직까지 그 자식 손에서 놀아나는 거냐고!

 

 

지민은 제 손에 들린 편지를 바로 구겨서 던져버렸다. 종이는 베란다 창을 맞고 툭 떨어졌다. 배알도 좋다지민의 목소리에 태형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지민의 얼굴을 볼 낯이 없다.

 

 

존나 착한 놈이네 어? 너무 착해서 눈물이 다 난다. 그 새끼한테 그렇게 당해놓고도 그 새끼 아들을 거둬 줄 생각을 하다니 배알도 좋아.

 

......

 

씨발 그래서 지금 삼촌이라고 거둬주는 거야? 저 애를?

 

......

 

그 새끼가 이때까지 너한테 무슨 짓을 했는데! 그 새끼도 끈질기다. 죽고 나서도 그렇게 네 인생 못 말아먹어 안달이냐? 소름이 다 돋는다. 어떻게 죽어서까지 동생한테 그러냐고...

 

 

결국에는 살짝 떨리는 목소리에, 태형은 팍 고개를 들어 지민을 바라봤다. 지민은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그의 어깨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태형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지민아. 태형의 부름에 지민은 고개를 들어 홱 태형을 노려봤다. 지민은 그새 눈물이 번진 채 눈이 붉게 충혈 되어 있었다. 울지 마. 태형의 말에 지민은 또 한 번 왈칵 눈물을 흘렸다. 태형아. 지민의 목소리에 그의 감정이 흘러넘쳤다. 난 더 이상 네가 그 사람한테 휘둘리지 않았으면 좋겠어. 지민의 말에 태형은 바로 지민을 안아 등을 쓸어내려주었다. , 알아.

 

 

네 인생에 그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어.

 

.

 

그 사람한테서 이제 좀 벗어났으면 좋겠어.

 

그래, 지민아.

 

그 사람 때문에 더 이상 네가 추락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

 

태형아. 저 아이는 네 발목을 잡는 애가 될 수도 있어. 결국 그 사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거라고.

 

지민아.

 

 

태형은 지민을 좀 더 세게 끌어안았다. 지민은 아예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힘들다. 당사자가 아닌 나도 힘든데 태형이는 얼마나 더 힘들었을까. 또 눈물이 나려는 것을 지민은 애써 참아냈지만 미처 들어가지 못한 눈물이 불을 타고 흘러내렸다. 죽어서까지 태형의 인생에 멍을 남기려는 그 사람이 소름끼칠 정도였다. 그는 태형을 잘 알고 있었다. 절대 자신의 말을 거역하지 못할 것을, 그는 태형을 너무 잘 아는 사람이었다. 지민아. 지민의 머리에 살짝 턱을 얹은 태형이 나직이 그를 불렀다. 지민은 구태여 대답하지 않았지만 태형은 알았다. 자신이 그의 이름을 부르면, 그는 언제 어디서든 제 말에 귀 기울여 줄 것이라고.

 

 

나는 아가를 형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 편지 때문에 키우려던 게 아니야. 동질감인 것 같아. 혼자 남겨진 그 애가 안쓰러워서, 그래서 그러는 거 맞는 것 같아. 아니, 맞아.

 

......

 

그래서 사랑을 주고 싶었어. 내가 직접. 내가 사랑을 받진 못했어도.

 

그런 말 하지 마.

 

그래서 이 아가는 사랑을 주고받는 법을 알았으면 했어.

 

......

 

가족이 필요했나봐. 나는.

 

 

지민아, 나는 아가를 키우는 것을 절대 가볍게 보지 않아. 단지 내가 받을 수 있는 손해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을 얻고 싶었던 거야. 태형의 조곤조곤한 말에 지민은 그의 품에 더욱 파고들었다. 많이 외로운 아이였다. 그 외로움이 저 아가를 본 거라고, 같은 처지에 있던 그 아기에게 어떠한 유대감을 느낀 거라고. 지민은 생각했다. 태형은 지민을 안은 채 그의 귓가에 작게 속삭이듯 말했다. 지민아, 이런 나를 이해해줘. 너만 나를 알아준다면, 난 다 괜찮아.

 

지민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옛날부터 지민은, 태형을 이길 수 없었다

 

 

 

 

 

 

 

 

 

 

 

 

 

 

 

 

 

 

 

 

 

---

 

태형이와 지민이

그리고 도하가 처음 만난 날.

그리 예쁘지만은 않은.

그러나 곧 예뻐질.

뷔민이들 사귀는 건 아님

그러나 끈끈함

서로가 필요하다는 것을

너무 잘 알았기 때문에.

 

 

 

 


뷔민 말도 안되는 육아물 썰 (보너스)

길/육아물



파파! 선물 요정 이써?


갑자기 우다다 방에서 뛰어나와 태형의 다리를 부여잡고 물어오는 도하에, 태형은 순간 당황했지만 애써 표정관리를 하며 도하를 내려봤다. 왜 아들, 선물요정 보고 싶어? 태형의 물음에 도하는 제 얼굴을 다리에 부빗거렸다. 아니... 도하 내이일... 도하 생일인데... 말꼬리를 늘이며 말하는 도하가 귀여워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태형은 결국 그를 들어 꼭 끌어안았다. 끄아아 누구 아들이길래 이렇게 귀엽냐! 파파, 도하 숨마켜!! 도하가 결국 태형의 팔뚝을 퍽퍽 치고 나서야 그를 놓아주었다.


생일에 선물 주는 사람이 선물 요정인 것 같아?

웅! 아까 책에서 봤는데 선물 주는 요정도 있다구 해써.

그래. 그럼 또 아들이 편지 쓰면 되겠네. 뭐 갖고 싶은지 요정한테 편지 써.

편지?

응. 저번에 이빨 요정한테 편지 쓴 것 처럼.

아 마따!


도하는 후다닥 제 방에 들어갔다가 공책이랑 색연필을 들고 나왔다. 태형은 거실 한켠에 있는 도하 책상을 가운데로 끌고 왔다. 거실 테이블은 대충 발로 밀었다. 나중에 지민이 보면 또 책상 옮겼냐고 기함 할테지만 뭐, 지민이 알기 전에 빨리 치우면 되지. 도하는 제 책상에 앉아 색연필을 들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태형도 옆에서 반무릎으로 앉아 도하 책상에 얼굴을 받친 채 두 눈을 끔뻑이며 도하를 바라봤다.


아들은 무슨 선물이 갖고 싶어?

움... 메카드.

메카드? 그 자동차?

응!


도하의 말에 태형은 자신의 폰을 들어 재빨리 지민에게 카톡을 보내기 시작했다. [야 메카드] 지민은 카톡을 바로 확인한듯 순식간에 1이 사라졌다. 도하는 초록색 색연필을 들어 한 자, 한 자 정성들여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선..물...요정님. 내일 도..하 생일... 이에요. 입으로 말하며 써내려가는 도하가 귀엽기만 해, 태형은 조용히 그가 써내려가는 편지만 내려다 보고 있다가 갑자기 울리는 알람에 흠칫 놀라며 폰을 확인했다.


[메카드? 자동차?]

[어 그거.]

[차 종류 되게 많지 않아?]

[아 대충 아무거나 하나 사 와.]

[하나면 돼?]


지민의 마지막 말에 태형은 고민하기 시작했다. 도하는 여전히 심혈을 기울여 한 자 한 자 마음을 담아 꾹꾹 눌러 써내려갔다. 얼굴만 보면 서예가 저리 가라다. 태형은 도하 눈치를 보다 입을 열었다. 아들, 그거 몇 개 가지고 싶어? 태형의 물음에 도하가 고개를 팍 들어 태형을 바라봤다. 요정은 얼마나 가져올 쑤 있대? 태형은 얼굴은 웃고 있지만 머리는 굉장한 속도로 굴러가고 있었다. 글쎄... 요정은 작아서 많이 못들고 오니까 한 5개 정도? 태형의 말에 도하의 표정은 더욱 심각해졌다. 파파 그러며언... 딱 5개 해두 대? 도하의 말에 태형은 무작정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엄! 우리 아들이 그렇게 가지고 싶어 하는데, 요정도 이해해 줄거야. 태형의 손가락이 자연적으로 빨라졌다. [다섯개 사와]

공책 한 장을 거의 다 채우다시피 길게 쓰던 도하는 갑자기 손을 우뚝 멈추고 또 태형을 바라봤다. 파파. 태형은 도하를 바라보았다. 응 그래, 아들. 도하 가지구 싶은 거 하나 더 이써. 도하의 말에 태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들, 뭐든지 말해봐.


셀카폰.

... 셀카폰?

웅. 노리터에서 애들이 막 그거가지구 노는 거 봐써.

친구들이 폰을 가지고 논다고?

웅. 그거로 막 게임두 할 쑤 있구 애들끼리 대화도 할 쑤 있대써.


태형은 대놓고 당황했다. 와씨 요즘 애들은 무슨 폰을 장난감처럼 쓰나. 태형은 그것만큼은 도하에게 흔쾌히 가능하다고 말해 줄 수 없었다. 애한테 폰 사주자고 했다가 진심으로 지민에게 쳐맞을지도 몰랐다. 너는 7살짜리 밖에 안된 애한테 폰을 사주고 싶냐고, 마음 같아서는 중학교 들어가서도 사줄까 말까 하는데 애 교육 한번 잘 시킨다고 왕왕댈 지민이 벌써부터 눈 앞에 선했다. 태형은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글쎄, 한번에 너무 그렇게 욕심내면 요정이 화나서 선물 안줄 수도 있어, 저번에 엄마도 말했었지? 모든 것을 다 가질수는 없다고. 도하는 살짝 시무룩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태형은 대신 도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야 미친 요즘 장난감 왜 이렇게 비싸 5개 사면 거의 십만원 돈이야.]

[도하 벌써 편지 쓰고 완전 기대에 부풀었어]

[무슨 컬렉션 있는데 이걸로 하면 안되나?]

[걍 아무거나 사 와. 뭔들 그냥 머리맡에 있으면 다 좋아해 안그래도 지금 셀카폰 타령까지 해서 심란하구먼]

[셀카폰?]

[요즘 애들은 폰 들고 노나봐 놀이터에서 봤대]

[셀카폰 이거 말하는건가] [사진]


태형은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 지를 뻔 했다. 옴마야, 세상에. 마치 산삼을 발견한 사람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몸을 베베 꼬며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파파 왜그래? 도하가 이상하게 쳐다봤다. 태형은 간신히 이성을 되찾고 도하에게 물었다. 아들 혹시 네가 말하는 셀카폰이 분홍색 공주 셀카폰 말하는거야? 태형의 물음에 도하가 눈을 반짝였다. 응!


그럼 일단 아들이 가지고 싶은 거 목록을 다 쓰고 요정이 마음에 드는 걸로 가져와달라고 하면 되겠다, 그치?

응!


도하는 신나서 다 쓴 편지 밑에 내용을 추가해서 적기 시작했다. 또 한 자, 한 자 공들여서 꾹꾹 눌러 쓰는 걸 보니 웃음이 나왔다.










마마 언제 와? 잠옷까지 다 갈아입고 잘 준비까지 다 한 도하가 소파에 몸을 깊숙히 파묻은 채 태형에게 물었다. 엄마 좀 늦게 온다고 했어, 아들 먼저 자. 태형의 말에도 도하는 고개를 저었다. 마마 오는 거 보고 잘래. 눈이 감기고 하품도 계속 하면서 저 똥고집은 진짜 누굴 닮았는지, 태형만 안절부절 못했다. 지금도 무음으로 바꿔 놓은 폰에서는 카톡이 계속해서 왔다. [아 그냥 빨리 재우고 나오라고] [김태형] [ㅡㅡ] [아 존나 그냥 재워 침대에 눞혀] 미리보기로 뜨는 메시지를 보면서 태형은 손톱만 잘근잘근 깨물다 결국 폰을 내려놓고 도하를 안아들었다. 읏차, 우리 아들 엄마가 오늘 너무 늦게 오네 내일 일찍 일어나려면 지금 자야해. 도하는 태형의 목에 제 팔을 감았다. 우으응... 마마 보고 시퍼... 목소리에 잠이 가득 묻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안자겠다며 태형에게 딱 붙어 있는 도하에, 태형은 이도 저도 못하고 당황스럽기만 했다. 그럼 침대에 누워있기만 하자, 안자고 아빠랑 같이 침대에 누워 있자. 태형은 제 몸에 딱 붙어서 안떨어지는 도하의 엉덩이를 받치고 그대로 도하의 침대에 누웠다. 마마 언제와? 도하의 물음에 태형은 눈을 가린 도하의 앞머리를 살짝 쓸어넘기며 말했다. 엄마는 도하 생일날 선물처럼 올거야. 도하는 태형의 말을 다 듣지 못하고 잠들었다.



야 이 바보야, 그냥 재우면 되지 뭘 그렇게 오래 끌어! 집 밖을 나오자마자 한소리 들은 태형은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만 긁적였다. 지민은 팔짱을 낀 채 발만 동동거렸다. 포근한 봄이지만 밤은 아직 완연한 봄이 아니었다. 제법 쌀쌀한 바람에 지민의 홍조가 더욱 도드라졌다. 아흐, 빨리 가자 나 춥다. 지민은 몸을 웅크리며 먼저 걸음을 옮겼다. 태형이 바로 따라붙어 그대로 지민을 뒤에서 안았다. 아이고, 어떡해 우리 지민이 몸이 차갑네. 태형의 말에 지민은 고개를 돌려 태형을 노려봤다. 너 때문이잖아 이 자식아. 태형은 푸흐흐 웃으면서 지민을 더 꽉 안아주었다.

시간이 없었다. 제과점에서 제과점에서 케이크를 산 후 대형마트에서 선물을 살 계획이었다. 태형이 차고에서 차를 꺼내오자 지민이 바로 올라탔다. 케이크는 그냥 캐릭터 케이크 아니면 초코 케이크 사, 지금 케이크가 문제가 아니라 선물이 문제야. 지민의 말에 태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 선물 좀 찾아봤어? 지민이 태형을 돌아 보며 말하자 태형은 헤 웃기만 했다. 안찾아봤네. 지민의 말에 아니라고 당당히 말 할 수 없었다. 최대한 빠른속도로 도착한 대형마트에 주저 없이 장난감 코너로 간 둘은 엄청난 종류의 장난감에 당화스럽기까지 했다. 와 진짜... 뭔 놈의 장난감이 이렇게 많아. 태형이 당황하며 쭉 둘러봤다. 아무리 봐도 다른 걸 모르겠는데 이게 다 다른 차란 말이지...


봐, 내가 못 고르겠다고 했잖아.

그 낮에 네가 말하던 컬렉션은 뭐야.

이건데...


지민은 박스 하나를 꺼내 보여주었다. 태형은 머리만 긁적였다. 뭐가 좋은지 알 수가 있었야지. 사실 지민은 아까 전에 마트에 갔다가 결국 못사고 돌아왔었다. 태형은 그래도 도하와 함께 있는 시간이 훨씬 더 많으니 도하가 뭐를 좋아하는지 알 것 같아서 같이 온 것이다. 태형은 도하와 같이 만화를 자주 봤다. 도하가 보니까 옆에 앉아서 자연스럽게 같이 보게 됐는데 보다보니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헐 대박 나 얘 좋아해. 태형은 상자 하나를 꺼내들었다. 나 이거 사주면 안돼? 얘 되게 멋있는데. 지민은 태형을 노려봤다. 지금 네 장난감 사러 왔어? 지민의 말에 태형은 상자를 내려놓았다.

헐 지민아 나 이 레고 사면 안돼? 이거 집에 전시하면 되게 멋있을 것 같지 않아? 대박 나 이 배 조립해서 서랍 위에 올려 놓으면 되게 멋있을 것 같은데. 헐 지민아 나 이거 갖고 싶어. 지민은 자꾸 상자를 꺼내 들어 보이는 태형의 손을 찰싹 때렸다. 지금 네 장난감 사러 왔어? 네 장난감 사러 왔냐고! 으이구 진짜 대체 누가 아빠인지를 모르겠네! 지민의 타박에 태형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상자를 내려놓았다. 그래도 지민아, 이거는 나 진짜 잘 만들 수 있는데. 결국 지민은 손을 절레절레 저었다. 태형은 해맑게 웃으며 상자 하나를 카트에 실었다.

오늘도 요정 얘기 하더라. 태형의 말에 지민이 피식 웃었다. 그 놈의 요정은 작년이나 지금이나 변하지를 않네. 태형은 푸스스 웃었다.


요정한테 편지 썼어. 선물 달라고.

뭐라고 썼는데?

뭐 그거 선물해달라고 그랬지.


태형은 턱짓으로 지민이 안고 있는 봉지를 가리켰다. 안에는 포장까지 정성스레 되어 있는 도하의 생일선물이었다. 가만히 창 밖을 보고 있던 지민이 갑자기 푸핫 웃었다. 왜? 태형은 지민을 힐끔힐끔 보며 그의 웃음에 따라 웃었다. 갑자기 왜 그러는데. 도저히 웃음을 멈출 생각을 않는 지민의 모습이 웃겨 태형도 계속 따라 웃었다. 아이고 갑자기 진짜 웃기네. 지민은 눈물까지 찔끔 흘린 것 같아 손가락으로 눈가를 훔치며 숨을 골랐다.


도하 한명 때문에 매 번 이런 거 하는 우리도 너무 웃겨서.

뭐가?

요정 얘기 받아주면서 애 동심 안 깨뜨리려고 요정 발바닥 그리고 그랬잖아.

아 맞다 발바닥. 집에 가면 또 그려야지. 이번에는 다른 색으로.

그 쪼끄만 애 한명이 성인 두 명을 이렇게까지 움직이게 만드는구나 싶어서.

도하라서 그래.

그래. 도하라서 그래.

......

진짜 마냥 애 같은데 그 애도 우리처럼 크겠지.

아, 도하 고등학생 되면 잘하면 너랑 같은 학교 다닐수도 있겠네?

와 벌써부터 머리 아파.

왜, 아들이랑 같은 학교 다니면 재밌겠네.

제에발 착하게만 자라줬으면 좋겠다. 사고치지 말고. 사춘기 격하게 안보내고.

우리 아들은 괜찮아.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태형에, 지민은 그를 보다가 결국 살풋 웃었다. 그래, 누구 아들인데 엄청 착하지.










꺄아!! 아침 일찍 도하의 기분좋은 비명이 들리더니 곧 그의 방 문이 벌컥 열렸다. 마마! 방 문을 열자마자 케이크를 들고 있는 지민이 보이자 도하는 아예 쪼끄마한 두 손으로 제 입을 가렸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 합니다! 사랑하는 우리 아들! 생일 축하 합니다! 태형이 옆에서 고깔모자를 쓰고 케이크와 촛불 그림이 장식된 선글라스를 끼고 노래를 불렀다. 팡! 폭죽까지 터뜨리고 나서야 지민이 살짝 앉아 도하에게 케이크를 내밀었다. 소원 빌고 촛불 꺼야죠. 지민의 말에 도하가 두 눈 꼭 감고 손을 모았다. 파파랑 마마랑 도하랑 맨날 행복하게 살게 해주세요오... 입을 오물오물 거리며 소원을 빈 도하가 후 촛불을 껐다. 우리 도하 이제 7살이네? 태형이 도하를 안아들었다. 파파 나도 이거! 도하가 태형이 쓴 선글라스를 빼 자신이 썼다. 커다란 선글라스가 도하 얼굴의 반을 가렸다. 사진 찍어줄까? 지민이 카메라를 들고서 하는 말에 태형이 고개를 저었다. 같이 찍어야지. 지민은 푸스스 웃었다. 타임 맞출게.

마마, 이번에도 요정이 발자국 남겨써! 도하는 제 머리맡에 있던 선물상자를 뜯어보며 말했다. 그를 제 무릎에 앉힌 채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주던 지민이 맞장구 쳐주었다. 그랬어요? 그럼 이제 우리 도하 협탁에는 요정 발자국이 두개나 찍혀있네요? 웅! 도하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칭구들한테 자랑할거야, 우리집에 요정이 두번이나 왔다갔다구! 도하는 포장지를 확 벗기자마자 나온 선물에 꺄아! 소리를 질렀다. 맞은편에 앉아 도하와 지민을 계속해서 찍고 있던 태형이 결국 푸핫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좋아, 아들? 태형의 말에 도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요정도 우리 도하 태어나줘서 고맙다고 선물 줬네요. 지민은 도하의 볼에 뽀뽀하며 말했다. 태형은 그 장면을 카메라에 담았다. 해맑게 웃는 도하와, 그의 볼에 가볍게 뽀뽀하는 지민의 모습이 따뜻하기 그지 없었다.

아들, 아빠랑 엄마가 주는 선물이야. 태형은 옆 의자에서 선물을 꺼내 도하에게 건넸다. 도하거야? 도하의 물음에 태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엄마 아빠가 아들 태어나줘서 고맙다고 주는 선물. 태형의 말에 도하는 폴짝 뛰어내려 태형에게 다가갔다. 태형은 의아한 표정으로 도하를 안아 올렸다. 도하는 태형의 허벅지를 밟고 올라서서 그의 볼에 쪽 뽀뽀했다. 태형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도하를 꽉 안아 양 볼에 뽀뽀했다. 꺄으! 도하가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냈다. 태형이 준 선물을 받고 도하는 지민에게 다가가 똑같이 지민에게 뽀뽀했다. 누구 아들이길래 이렇게 사랑스러워, 응? 지민이 웃으며 도하를 꽉 안았다. 파파 마마 아들! 도하가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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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하 7살
지민이 태형이 24살.
오늘은 도하 생일.
저번 화에 살짝 언급했었는데
오늘 문득 생각나서 급하게 써 봄.
오늘은 식목일이기도 하죠.
그래서 일부러 도하 생일을 4월 5일이라고 했음.
그리고 내일은 개강 (오열)






뷔민 말도 안되는 육아물 썰9

길/육아물



사람들의 시선이 한 곳으로 쏠렸다. 후드티에 청멜빵을 입고 튀는 색의 신발을 입은 남자 한명과 아기 한 명은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특히 남자는 빨간 머리라 더더욱 눈에 띄었다. 아이는 후드티 모자에 달린 토끼 귀를 마구 휘날리며 다다다다 뛰어갔다가 돌아오다 뛰어가기를 반복했다. 처음에 너무 잘생겼다고 한번 말 걸어볼까 다가가려던 사람들은 주위에 아이가 있는 걸 눈치 채고 멈칫했다. 그러다 남자의 얼굴이 도저히 저만한 애가 있을만한 나이는 아닌지라 조카이겠거니 하지만, 아이 입에서 파파라는 말이 나오자 결국 포기를 하는 사람이 많았다.

태형은 여전히 주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아니, 그냥 아무 생각이 없었다. 가끔 너랑 다니면 사람들이 전부 이쪽을 봐서 좀 부담스러워 라고 하던 지민의 말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태형은 무감각했다. 지금도 사람들이 몰려 수근거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태형과 도하는 마치 다른 세상인 양 자기 갈 길 바빴다.

넓은 잔디밭을 아장아장 뛰어다니다 온 도하는 힘든지 태형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축 처졌다. 태형은 낄낄대며 도하를 안아들었다. 엄마 학교 오니까 어때. 태형의 물음에 어깨에 고개를 파묻고 있던 도하가 팍 얼굴을 들어 태형을 봤다.


하꾜?

. 학교.

마마 여기 이써여?

. 여기서 엄마가 공부해.

마마보고 시퍼여.

아빠도 엄마가 보고 싶어. 우리 엄마 찾으러 갈까?


태형의 말에 도하가 파닥거렸다. 그 모습에 태형은 피식 웃으면서 도하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었다. 내가 가끄야. 태형은 도하를 천천히 내려주었다. 아들이 엄마 어디에 있는지 찾아볼래? 태형의 말에 도하는 아장아장 앞에 보이는 건물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태형은 두어 발짝 뒤에서 그럼 도하를 따랐다. 도하는 잘 걷다가 갑자기 우뚝 멈추더니 그대로 쭈그려 앉아 옆에 있는 잔디밭을 보기 시작했다. 파파 이고 모예여? 도하의 물음에 태형도 옆에 와 똑같이 쭈그려 앉았다.


이건 꽃이야.

?

. .

이고 마마 달마써여.

엄마 닮았어?


태형은 고개를 무릎에 파묻고 킥킥거렸다. 노란 민들레가 조그맣게 피어 있었다. 왜 엄마 닮았어? 태형의 물음에 움... 도하가 고민했다.

마마느은~ 노래여!

엄마가 노랗다고?

! 삐약이 가타여.


태형은 빵터져 마구 웃으며 도하를 팍 끌어안았다. 도하도 꺄르르 웃으며 태형의 품에 파고 들었다. 아빠도 엄마가 삐약이 같다고 생각해. 태형의 말에 도하가 얼굴을 빼꼼 들어 태형을 바라봤다.


마마가 나보고두 삐약이라구 해써여.

맞아. 아들도 삐약이지.

그럼 파파느은?

아빠는 꼬꼬지.

꼬꼬?

. 아빠 머리도 빨갛잖아. 꼬꼬 머리 빨간 거 알지?

.

아들도 크면 아빠처럼 멋진 꼬꼬가 될 수 있어.


오오오오. 도하가 눈을 반짝이며 태형을 올려다봤다. 그 모습이 퍽 귀여워 태형은 피식 웃으며 도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이제 엄마 찾으러 가자. 태형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도하도 다리를 피고 일어났다.

태형은 제 앞에서 씩씩하게 걸어가는 도하를 보며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가지를 않았다. 대학생들이 지나가다 도하를 보며 어머, 귀여워라. 하는 소리를 들으면 제 어깨가 하늘로 솟구쳤다. 그쵸 귀엽죠, 이 아이가 바로 우리 아이랍니다 아하핳. 세상에 누구 새끼인지 어쩜 저렇게 귀엽고 잘생기고 다 할까요. 세상 사람들 전부 우리 아들을 좀 봐야 해. 간혹 도하 가까이 와서 인사를 하면 태형은 정말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간혹 자신에게 말 걸고 싶어서 다가오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아들 자랑 하느라 눈치 못 채는 경우도 많았다. 지민은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네가 눈치 없는 게 너한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알 수가 없다고 말했다.

요긴가아? 도하는 커다란 건물에 들어가면서 말했다. 태형은 조용히 도하가 가는 대로 따라 갈 뿐이었다. 도하는 이따금 제 아빠가 잘 따라오는지 뒤 돌아 확인했다. 그러면 태형은 가까운 거리에서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하곤 했다.

건물 안에 들어서면 또 수많은 문과 사람들 때문에 결국 도하는 뒤돌아 태형에게 다가가 푹 그의 다리에 몸을 묻었다. 허헣. 태형은 웃으며 살짝 무릎을 굽혀 도하를 안아들었다. 마마 모찾게써여... 도하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하는 말에 태형도 덩달아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엄마 못 찾겠어? 아빠가 찾아볼까? 도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으쌰. 태형은 도하를 고쳐 안고 건물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사실 태형은 전에 지민을 보러 학교에 온 적이 몇 번 있었기 때문에 그가 있을 만한 곳은 거의 알고 있었다. 과방에 가볼까. 태형은 그렇게 생각하며 천천히 과방이 있는 건물로 걸음을 옮겼다.

도하는 태형의 어깨 부근에 얼굴을 묻었다. 태형은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도하가 작은 팔로 태형의 목을 끌어안았다. 어쩐지 평소와 다른 도하의 모습에 태형은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래, 아들? 도하는 고개만 저었다. 오늘따라 왜 이러지. 태형은 도하의 등을 토닥였다.

파파.

.

사람이 마나여.

그럼. 대학교에 사람이 많지.

...


도하는 더 깊이 태형의 품을 파고들었다. 왜 이러지... 태형은 갑자기 변한 도하에 살짝 당황했다. 빨리 지민이 만나서 물어봐야겠다. 태형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지민아. 제 부름에 책을 읽고 있던 지민이 고개를 들었다. 문 쪽에 여자선배가 서서 지민을 보고 있었다. , 왜요? 지민의 물음에 여자는 살짝 머뭇거리다 말했다. 그때 왔던 네 친구가 왔는데... 친구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지민의 인상이 살짝 찌푸려졌다. 아니 오늘은 빨리 간다니까 뭐가 그리 급해서는! 지민이 자리에 벌떡 일어나 성큼성큼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때 옆에서 쪼그만 무언가가 푱 튀어나왔다. 마마! 팔을 벌리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도하를 본 지민은 두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도하야! 지민은 거의 반사작용 수준으로 도하에게 다가가 그를 안아들었다. 꺄으! 도하가 기분 좋은 듯 지민의 품에 파고들었다. 지민은 어리둥절해서는 도하를 안은 채 멍하니 서 있었다. 그때 태형이 자연스럽게 들어오려다 문 앞에 지민이 있는 것을 보고 흠칫 놀라 뒤로 주춤했다. , 뭐야 깜짝아 너 왜 여기 서 있어. 뻔뻔한 태형의 말에 지민이 헛웃음을 뱉었다.

 

 

깜짝아? 지금 깜짝 놀라야 할 사람이 누군데. 누가 보면 이 학교 학생이신 줄 알겠어요?

 

학생인 척 하려면 할 수 있지.

 

이번에는 도하까지 데리고 여긴 왜 왔어. 나 오늘 빨리 간다고 했잖아.

 

날 좋아서 산책 겸, 도하도 엄마 보고 싶다고 해서.

 

그래도 그렇지!

 

 

그렇게 튀는 머리에 둘 다 똑같은 옷을 입고 자연스럽게 대학교를 활보하면 다른 사람들이 무슨 생각 하겠냐... 지민은 결국 입을 꾹 다물었다. 말해봤자 김태형은 못 알아듣는다. 지민은 제 품에 안긴 도하만 둥둥해줄 뿐이었다. 도하는 지민의 어깨너머로 과방을 쭉 둘러보았다. 마마 여기가 하꾜에여? 도하의 물음에 지민이 푸흐 웃었다. , 엄마 학교예요.

 

옆에 서 있던 선배는 상황파악이 안되어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태형과 지민, 도하를 번갈아 보았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선배의 혼란스러운 표정을 본 지민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 그게 말이죠 선배.

 

 

저와 지민이 아들이에요, 누나.

 

?

 

한번 안아보실래요?

 

 

지민이 설명 해주려 입을 여는 순간, 끼어든 태형의 말에 선배는 물론이고 지민이도 놀라서 태형이를 쳐다봤다. 태형은 자신이 지금 무슨 짓을 질렀는지도 모르는지 지민이 안고 있던 도하를 대신 안아들었다. 아들, 일로 와. 도하는 자연스레 태형에게 안겼다. 지민은 머리가 둔해져 멍청히 서 있었다. 쟤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더 혼란스러운 건 선배였다. 그저 저 멀리서 지민의 친구와 웬 아기가 같이 걸어 오길래 말해준 것뿐인데 어쩐지 되게 무거운 사실을 깨달은 것만 같았다. 아들, 인사해. 태형이 선배 쪽으로 도하를 돌려 보여주었다. 안녀하세여. 도하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어어, 안녕... 선배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인사를 받아주었다. 자세히 본 도하의 얼굴이 어쩐지 태형과 지민을 묘하게 닮은 느낌이라 더욱 당황스러웠다. 선배는 지민을 힐끗힐끗 쳐다봤다. 혹시... 설마...

 

 

지민아.

 

?

 

너 혹시... 여자였니?

 

아니 무슨 말씀 하시는 거예요!

 

 

지민은 얼굴까지 시뻘게지며 빽 소리를 질렀다. 태형이 빵터져 도하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끅끅거렸다. 선배는 바로 사과했다. 아 정말 미안, 아니 근데 애기 때문에... 선배는 힐끔힐끔 도하를 쳐다보았다. 도하는 땡그란 눈을 끔뻑거리며 선배를 쳐다봤다. 태형도 그런 도하를 보다 선배를 쳐다봤다. 똑같이 생긴 두 눈이 동시에 자신을 향하자 선배는 어찌할 바 몰랐다. 지민은 벌써부터 지끈거리는 머리에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선배, 제가 천천히 다 설명해드릴게요 일단 앉으실래요? 지민의 말에 선배는 몸을 움직이려는 순간, 과방 앞이 왁자지껄 해지면서 문이 확 열렸다. 엇 태형이! 오늘도 왔구나! 헐 그 애기는 뭐야, 존나 귀엽다! 둘이 옷 맞춰 입은 거야? 헐 대박 조카야? 우르르 들어오는 사람들에 지민은 거의 기절 직전이었다. 한명씩 들어오는 것을 보던 도하는 결국 태형의 품으로 얼굴을 묻었다. 태형은 그런 도하를 힐끗 보더니 천천히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모랑 삼촌한테 인사. 태형이 도하를 땅에 내려다 주면서 말하자, 도하는 쭈뼛거리다가 배꼽인사를 했다. 안녀하세여. 도하의 인사에 과 사람들의 얼굴에 웃음이 퍼졌다. 아이고 귀엽다. 아가는 이름이 뭐야? 한 선배의 물음에 도하가 슬쩍 태형을 올려다봤다. 얘기해드려야지. 태형이 쭈그려 앉아 도하의 양 어깨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도하에여.

 

도하? 아이고 이름도 예쁘다.

 

성은 뭐야, 도하야?

 

!

 

김도하? 아이고 예쁘네. 누가 지어주신 이름이야?

 

파파여.

 

파파?

 

 

도하는 손가락으로 태형을 가리켰다. 순간 과방에는 알 수 없는 정적이 흘렀다가 동시다발적으로 왁! 소리 질렀다. 뭐야, 김태형 애 있었어? 와 대박이다 진짜. 네 나이에 저만한 애 보려면 몇 살에 애 낳아야 하냐. 너 대학교 안다니는 이유가 애 때문이야?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질문폭격에 태형은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지민은 아예 구석에 있었다. 아 일이 점점 커지는 기분이야... 지민은 도대체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난감했다.

 

애기 얼굴이 벌써 완성형이네. 김태형 빼다 박았네. 이야 아빠가 얼굴이 사니까 애기도 얼굴이 사네. 너도나도 한마디씩 하면서 도하를 더 가까이서 보려고 몰려들었다. 도하는 뒤로 주춤 거리다 결국 몸을 돌려 태형의 무릎을 부여잡고 고개를 파묻었다. 왜 그래, 아들. 태형은 도하를 안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민아, 도하가 아까부터 이래. 태형은 걱정스러움에 도하를 안은 채 지민에게 다가갔다. 지민은 순간 걱정하던 것은 다 잊고 도하에게 다가갔다. 왜 그래, 우리 도하. 지민은 도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도하를 바라봤다. 도하는 고개만 절레절레 저었다. 낯가리나? 지민의 말에 태형이 아 탄식했다.

 

 

더 애기 때는 괜찮길래 낯 안 가리는 줄 알았더니.

 

더 크니까 그런가봐. 아니면 사람이 너무 많았나.

 

아 어쩐지 올 때도 잘 놀다가 갑자기 사람이 많아지니까 나한테 오더라고.

 

갑자기 낯선 사람을 한 번에 봐서 그런가. 자기한테 몰려오는 게 익숙지 않았나봐.

 

아들, 괜찮아. 엄마 친구들이야.

 

 

태형의 말에 도하는 태형의 품에 파묻고 있던 얼굴을 들었다. 태형의 어깨 너머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태형은 헝클어진 도하의 앞머리를 살살 만졌다. 도하는 그대로 태형의 어깨에 기대었다. 통통한 볼 살이 눌려 눈 한쪽을 가렸다. 과 사람들은 어쩐지 묘한 표정으로 지민과 태형을 번갈아 봤다. 애기가 원래는 안 그랬는데 낯선 곳에 낯선 사람이다 보니까 낯가리나 봐요. 태형이 어색하게 웃으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과 사람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머뭇거리더니 그 중 한명이 입을 열었다. 지민이가 엄마야그의 물음에 지민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어떻게 설명해주어야 하나. 태형이와, 자신과, 도하의 관계를.

 

 

말하자면 복잡한데... , . 저희 둘이 키우고 있으니까요.

 

너희 둘이 키운다고?

 

. 도하 이름도 저희가 지어준거예요. 7개월 때부터 키웠어요.

 

......

 

이상하게 보일 거 알아요. 무슨 생각 하고 있는 건지도 다 알고요. 근데 아마 선배님들이 생각하는 그런 일은 아닐 거예요. 저희들도 나름대로 다 사정이 있거든요. 그리고 우리 도하 엄청 잘 키우고 있어요. 금전적으로도 다른 무엇으로도 어려움 없이 잘 살고 있어요.

 

 

지민은 마지막 말을 마치고 입을 꾹 다물었다. 과대는 지민과 태형을 번갈아 보다가 크게 박수를 짝 쳤다. 조용한 과방에 그의 박수소리가 생각보다 크게 울려, 근처에 앉아있던 다른 과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 과대를 쳐다봤다. 그래. 과대가 입을 열었다.

 

 

솔직히 그건 너희들 사정이고 우리야 너희들 사정 일일이 다 알 필요도 없지우리 과 공식귀염둥이가 사실은 애가 있었다는 게 놀랍긴 하다.

 

, 선배 그건!

 

 

지민은 힐끗 태형을 눈치 보며 소리 질렀다. 과대는 호탕하게 웃어넘겼다. 그런 의미에서 나 도하 좀 안아 봐도 되냐?

 

 

 

 

 

도하는 금방 과 사람들과 친해졌다. 마구 재롱부리면서 옹알거리며 노래도 부르고 앙증맞게 춤도 췄다. 도하가 조금만 움직여도 그들은 자지러졌다. 아이고, 도하 왜 이렇게 예뻐, 이모가 까까 사줄까? 이모가 용돈 줄게 까까 사먹어? 돈을 멜빵바지 주머니 안에 직접 넣어주면 또 도하는 배꼽인사를 했다. 감사함미다. 꾸벅 인사하는 도하가 또 사랑스러워 다들 엄마미소를 짓는다. 태형은 살짝 뒤에서 그런 도하의 모습을 잔뜩 찍어댔다. 아들 아빠 봐봐. 아빠한테 브이 해 줘. 태형이 가끔 무언가를 요구하면 도하는 또 깜찍하게 웃으며 태형의 말대로 해주었다. 태형은 아까부터 바보 같은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지민은 더 멀리서 그런 모습들을 보고 있었다.

 

아들이 너 닮아서 귀엽네.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지민이 살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과대가 지민의 옆에 서서 도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 닮았긴요. 지민이 대답했다.

 

 

도하가 저 친구 아들이라고 했지?

 

... .

 

, 친구 사이에 이간질 시키려고 그러는 건 아니고. 진짜 네 자식도 아닌데 굳이 어린 나이에 친구와 같이 아이를 키운다는 게 조금 이해가 안돼서.

 

......

 

아까는 많은 사람들 앞이라서 그렇게 넘겼는데. 너희들 사정이 있어서 아이를 키우는 거겠지만. 생각해보면 말이 안 되거든 너희들.

 

......

 

사실 일반 친구 사이에 남의 애까지 키워주는 거, 말도 안 되잖아. 그게 아니면... 너희 둘이 혹시 사귀어?

 

아니요.

 

난 그런 거 전혀 개의치 않아 하니까 사실대로 말해도 괜찮아.

 

진짜 사귀는 건 아니에요.

 

그러면 더 말이 안 되잖아. 사귀는 사이도 아니고 그냥 친구 사인데 저 친구 아들을 둘이서 같이 키운다는 게.

 

......

 

널 아끼는 형의 입장에서 나중 일이 걱정 돼서 그러는 거야. 둘이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엄마라고 부르면서 클 저 아이 생각도 해줘야지. 너희들이 무언가 확실한 관계인 것도 아니고. 친구라는 거 지금이야 영원한 친구로 남을 것 같아도 한번 틀어지면 끝인 거잖아. 게다가 너희들 같이 어린놈들이 아이 데리고 다니는 것도 아직 사회적으로 좋은 시선은 아니고.

 

선배. 우리, 도하 가벼운 마음으로 키우는 거 아니에요. 특히 태형이는 도하한테 엄청 애착을 가지고 있고요.

 

그거야 당연히 자기 아들이니까.

 

친아들 아니에요.

 

 

과대는 입을 다물었다. 사정이 있다고 해서 당연히 사고 쳐서 나았다거나, 둘이 사귀는 사이여서 키운다거나 그런 종류일 줄 알았는데. 자신이 생각한 것 보다 훨씬 더 복잡한 사정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비밀로 해주세요. 우리, 도하가 커서 물어봐도 입 다물려고 했었거든요.

 

......

 

태형이가 사고 쳐서 낳은 아들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엄청 닮았죠? 저도 보고 놀랐어요. 너무 닮아서.

 

......

 

근데 태형이 보기에 날라리 같이 보여도 엄청 착하거든요. 마음도 여리고 사랑을 주고 싶어 하는 사람이에요.

 

정말 보기와 다르네. 머리도 시뻘건게 진짜 놀게 생겼는데. 학교도 안다니고.

 

대학교 포기한 거죠. 도하 키운다고. 도하를 그냥 둘 수 없었던 거예요. 그래서 키운 게 된 거예요.

 

......

 

저도 말하자면 엄청 길고 복잡하지만. 아까도 말했다시피 우리 진짜 잘 살고 있거든요. 선배 말도 다 맞아요. 미래 생각 못했어요. 당장에 친구 관계 무너질 수도 있는데 둘이서 애 키운다는 거 진짜 말도 안 되죠. 그런데 저희 그냥 친구 아니거든요.

 

 

태형을 보고 있던 지민은 그가 고개를 돌리면서 눈이 마주쳤다. 태형은 웃으면서 지민도 한 컷 찍었다. , 저거 또 못나왔을 것 같은데 나중에 지워야겠다. 지민이 중얼거렸다. 과대는 그런 지민을 가만히 봤다.

 

 

아까 사귀는 사이냐고 물어봤잖아요.

 

......

 

저희 사귀는 사이는 아니에요. 누구 하나 먼저 사귀자고 말한 적은 없거든요.

 

......

 

근데 서로 엄청 사랑해요. 태형이도, 나도.

 

 

그렇게 말하는 지민의 표정은 어딘가 행복해 보였다. 이제는 아예 태형이 쪽으로 돌아서서 하트를 날리며 춤추는 도하와, 그런 도하를 찍으면서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태형을 바라보더니 결국 소리 내어 웃었다. 김태형 웃는 거 완전 바보 같아. 지민의 말에 태형이 지민을 돌아봤다. 아들 바보라면 인정할게. 태형이 말했다.

 

, 선배 정말로 비밀로 해주세요. 문득 든 생각에 지민이 과대를 바라보며 다급히 말했다. 이야 솔로 서러워서 어디 살겠나. 그렇게 말하는 과대의 표정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내 앞에서 염장이나 지르지 마라. 그의 말에 지민은 결국 웃었다.

 

 

 

 

 

 

 

 

 

 

매번 혼자 돌아가던 하굣길이었는데 태형과 도하랑 같이 가니 기분이 묘했다. 지민은 태형을 힐끗 쳐다봤다. 태형은 지쳐 잠이 든 도하를 안은 채 후드 모자를 씌워주고 있었다. 태형아. 지민이 작게 불렀다. . 태형의 대답이 곧장 날라 왔다.

 

 

먼 미래에, 도하가 왜 자기는 엄마가 없냐고 물어보면 어떡하지.

 

엄마가 왜 없어. 여기 있는데.

 

진짜 엄마 아빠는 어디 있냐고 물어보면 어떡해? 사실대로 말해줘야 하나?

 

그래, 사실대로 말해줘.

 

......

 

네 엄마 아빠는 여기 네 눈앞에 있다고.

 

......

 

지민아. 낳아줬다고 진짜 부모님은 아니더라.

 

 

지민은 고개를 돌려 태형을 바라봤다. 태형은 언제부터인지 지민을 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니 태형이 살짝 웃어보였다. 어쩐지 그 웃음에 씁쓸함이 느껴져 지민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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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말도 안되는 육아물' 인 이유

이제 슬슬 과거를 풀까 싶어서 좀 던져 봤음

마냥 달달하기만 한 현재와는 다른.

 

 

 

 

 


뷔민 말도 안되는 육아물 썰8

길/육아물



지민은 거의 오열하듯 우는 도하를 달래주느라 힘을 다 빼고 있었다. 도하는 뭐가 그리 서러운지 딸꾹질까지 하면서 지민에게 울분을 토했다.


파파가...흐으... 파파가아아...어허어엉...

그래 그래 우리 도하 많이 아파요?

파파가아아아... 흐윽... 내 이빨 확 해써!!


으아아아앙!! 말하면서 더 서러워졌는지 더 크게 우는 도하를 꽉 안아주면서 애써 웃음을 삼켰다. 소파에 찌그러져 있던 태형은 지민의 웃음에 따라 웃었다. 헤 웃는 태형은 천진난만하기 그지없었다. 지민은 도하의 등을 토닥이며 제 맞은편에 있는 태형에게 말했다.


이는 어딨어?

여기 있어.


태형은 실에 대롱대롱 매달린 이를 보여주었다. 도하가 슬쩍 보다가 제 이를 확인하고 또 울먹이기 시작했다. 아이구, 누구 닮아서 이렇게 겁이 많아? 지민이 등을 어루만지면서 몸을 통통 튕겨주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약 한 시간 전, 태형이 도하의 입 안을 보면서 시작되었다. 티비를 보고 있던 태형은 도하를 불렀다. 아들 여기 와 봐. 태형의 부름에 방에서 따로 책을 읽고 있던 도하가 거실로 총총총 걸어 나왔다. 왜에? 거실 한가운데 서서 말을 늘이며 묻는 도하에, 태형이 소파에 일어나 그의 앞에 양반다리 하고 앉았다. 도하의 손목을 잡고 살짝 내리자 도하도 태형의 앞에 앉았다. 아들 아- 해 봐. 도하는 뜬금없는 제 아빠의 요구에 고개를 갸웃 하면서도 입을 벌렸다. 아앙-. 태형은 도하의 입 속을 꼼꼼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 나이 대 아이들이 충치가 많이 생긴다는 내용의 프로그램을 보다보니 걱정되기는 했다. 그러나 도하에게는 충치 말고 다른 문제가 있었다.


아들. 이거 언제부터 흔들렸었어.

?

이거 말이야.


태형이 아랫니를 살짝 흔들었다. 으어엉! 도하가 깜짝 놀라 머리를 뒤로 빼자 태형이 확 뒤통수를 잡았다. 마아! 아아앙! 도하가 다급하게 소리를 지르자 부엌에 있던 지민이 후다닥 거실로 뛰쳐나왔다. 왜 우리 도하! 지민은 거실 광경을 보자마자 깜짝 놀라 태형의 등을 퍽퍽 때렸다. 지금 아가 입에 손 넣고 뭐하는 거야!! , 아 아프다고 진짜!! 태형은 도하를 잡고 있던 두 손을 빼서 바로 지민의 두 손목을 잡았다.


도하 이 흔들려.

? 우리 도하 벌써 그럴 때가 됐어요?


지민은 바로 도하의 입 안을 살펴봤다. 아아 나 애아하. 도하는 입을 크게 벌린 채 잔뜩 새는 발음으로 말했다. 지민이 입가를 잡고 있던 손을 뺐다. 마마, 나 갠차나. 도하의 말에도 지민은 심각한 표정을 풀지 않았다. 태형이 살짝 지민의 옆에 붙어 귓속말로 소근 거렸다. 뺀찌 소독할까? 그의 말에 지민이 태형을 째려봤다.


미쳤냐, 애 겁 먹이려고 작정했어?

실은? 나 어렸을 때 실로 뺐는데.

그게 더 낫긴 한데, 야 태형아!


지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벌떡 일어난 태형이 티비 밑 서랍을 활짝 열었다. 파파 머해? 도하의 물음에도 대답을 않는 태형은 상자를 빼 실타래를 꺼냈다. 태형은 뒤돌아 도하를 보며 환히 웃었다. 아들, 우리 재밌는 거 할까?

? 도하의 물음에 태형은 무릎걸음으로 도하 앞에 걸어왔다. 도하는 실타래를 멍하니 보고 있었다. 지민아 가서 가위 좀 가져와줘. 지민은 재빨리 자리에 일어나서 후다닥 가위를 가져왔다. 아들 요정 보고 싶다고 했지. 태형의 말에 흥미를 잃어 가라앉아 있던 도하의 눈이 초롱초롱 빛나기 시작했다.

최근 도하가 제대로 빠진 동화책이 한 권 있었다. 그 동화에는 매우 예쁘게 생긴 요정이 나왔다. 도하는 그 요정에 완전히 빠져서 뭐만 하면 요정 요정 노래를 불렀다. 그 덕에 지민과 태형은 도하에게 요정 이야기를 듣는 일이 잦아졌다. 우리 아들 누굴 닮아서 이쁜 거를 이렇게 좋아해? 요정이 나오는 책을 읽고 있는 도하를 볼 때면 태형이 그렇게 말하고는 했었다.


요정?

, 요정. 아들 이거 흔들리는 거 있잖아. 이게 사실...


태형은 일부러 과장해서 주위를 둘러보는 척 하면서 입가를 손으로 가리고 도하에게 귓속말 했다. 요정이 도하 몰래 숨긴 보물이야. 태형의 말에 도하가 헉 깜짝 놀라며 앙증맞은 두 손으로 제 입을 가렸다. 지짜? 태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 뭔데. 태형의 말을 듣지 못한 지민이 엉금엉금 태형에게 바짝 붙었다. 아씨, 깜짝아! 태형은 지민의 머리를 살짝 콩 때리고는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 보물을 빼서 베개 밑에 두고 자면 요정이 자기 보물 가져가고 대신 아들 선물을 두고 간대.

지짜야, 마마?


도하가 고개를 들어 지민을 바라봤다. 지민은 순간 당황했지만 곧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엄마도 아빠도 요정한테 보물 주고 선물 받았지. 도하는 지민의 말에 꺄 기쁜 듯 소리 질렀다. 그럼, 요정 보 쑤 이써? 도하의 물음에 태형과 지민이 순간 당황했다.


, 요정 보고 싶어?

! 마마 요정 본 적 이써?

... 엄마는 맨날 잠들어서 요정을 못 봤네.

파파는 요정 본 적 이써?

, 아빠도 본 적 없는데... . 요정은 아들이 자지 않으면 오지 않아. 요정은 사람들한테 보이는 것을 정말 싫어하거든.

왜에?

... 그러니까...

왜 시러해?

... 그러게. 아빠는 요정이 아니라서 모르겠네...


태형은 맑은 도하의 눈을 살짝 피하며 말했다. 지민은 태형을 흘겨봤다. 그러게 잘 하지도 못하는 거짓말을 왜 하냐. 마마 왜 시러해? 도하는 그 초롱초롱한 눈빛을 그대로 지민에게 돌려 물었다. 지민의 표정에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 글쎄 엄마도 요정이 아니라서...


왜 못 바?

, 도하가 안자면 볼 수 있을 거야.

지짜?

그러엄. 아빠가 거짓말 한 적 있어?


나 요정 보고 시퍼! 요정! 요정! 잔뜩 신이 난 도하를 보며 태형과 지민은 쓴웃음을 지었다. 어쩐지 일이 커진 것 같다.



태형은 실을 알맞은 크기로 잘랐다. 도하야 입 벌려봐. 도하는 아- 입을 벌렸다. 태형이 꼼꼼히 실을 묶기 시작했다. 아바 어해? 어어, 괜찮아 아들 보물 뽑아야지. 도하가 실을 묶고 있는 태형의 팔을 잡자, 태형이 그의 조그만 손을 감싸 덮었다. 지민이 입가를 손으로 가리고 태형에게 귓속말 했다


태형아 근데 너 실로 이 뽑을 수 있어?

나 실로 이 뽑아 본 적 있어.

말고 바보야. 네가 해본 적이 있어야지.

아니 그건 한 번도 없는데.

야 그럼 어떡해?

아빠 이거 모야?


도하는 제 이에 묶여 늘어진 실을 들었다. 어 잠깐만 아들. 태형은 도하에게 웃어 보였다. 야 그게 별거냐, 그냥 뽑으면 되지. 태형의 말에도 지민은 걱정이 되는지 표정이 살짝 어두웠다. 태형은 아랑곳 않고 도하의 이를 묶은 실을 잡았다. 파파 무셔어... 도하가 무언가를 느꼈는지 태형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어어 괜찮아 괜찮아 아들. 태형은 도하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파파 모해? 아픈 고 안니야?

아픈 거 아니야. 도하는 씩씩해서 이런 거 하나도 안 아파.

도하 안 씨씨케! 안 씨씨케서 아파!

아니야, 아픈 거 아니야. 아들 아빠 말 못 믿어?

마마!


도하는 두려움에 옆에 있는 지민의 허리께를 감싸 안았다. 지민은 푸스스 웃으며 도하의 등을 토닥여 주면서도 걱정 어린 표정을 지우지는 않았다. 태형은 그런 지민을 보다, 미간을 살짝 눌렀다.


인상 펴. 네가 겁먹으면 애가 더 무서워하잖아.

그냥 치과 가면 안 돼?

어차피 많이 흔들려서 조금만 힘 줘도 바로 빠져.

....


아들 여기로 와봐. 태형은 가까이 있는 방으로 가서 도하를 불렀다. 많이 무서운지 눈가가 촉촉해진 도하는 끔뻑끔뻑 눈만 깜빡이며 태형을 바라보다 자리에 일어나 총총총 다가갔다. 태형은 길게 늘어진 실을 문고리에 걸어 묶기 시작했다.


지민아 방 안에 들어가.

, 나 진짜 못하겠어.

그래? 그럼 내가 들어간다.


태형은 망설임 없이 들어가 문을 닫았다. 영문 모른 채 멀뚱멀뚱 서 있던 도하는 고개만 뒤로 돌려 지민을 바라봤다. 파파 모 해? 지민은 쭈그려 앉아, 도하의 눈가를 살짝 훔쳐 눈물을 닦아 주었다. 우리 도하 요정 만나게 해주려는 거예요.

아들, 아빠 보고 싶으면 불러. 방 안에 들리는 태형의 목소리에 도하가 고개를 갸웃했다. 파파 지금 보고 시퍼. 도하는 멀뚱히 서서 말하자마자 문이 팍 열렸다. 도하의 이가 순식간에 뽁 뽑혀 실 따라 대롱대롱 흔들렸다. ! 태형이 두 손바닥을 펴 보이며 헤 웃었다. 도하는 갑자기 일어난 일에 멍한 표정으로 태형을 보다가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우으응... 도하의 눈동자에 눈물이 잔뜩 고이면서 목소리가 울망울망 해지기 시작했다. 왜 울어요, 우리 도하. 지민이 깜짝 놀라 뒤에서 도하를 안았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도화선이 되었는지, 도하는 어깨까지 들썩이며 울기 시작했다. 태형은 뻘쭘함에 쫙 펴보였던 손을 천천히 접어, 문고리에 달아놓은 실을 뺐다. 실 끝에는 조그만 도하의 이가 매달려 있었다.


흐이이잉... 우으으...으아아아앙!!!!

아이고 우리 도하, 많이 아파요?


지민은 아예 도하를 돌려세워 꽉 안은 채 등을 쓸어주었다. 태형은 소파에 털썩 앉았다. 지민은 서럽게 엉엉 우는 도하의 입 안을 살펴봤다. 이가 많이 흔들렸었기 때문인지 피가 나지는 않았다. 지민의 품에 꼭 안긴 채 울음을 멈추지 않는 도하를 보던 태형이,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도하 앞에 양반다리로 앉았다. 도하는 힐끗 태형을 보다 홱 고개를 돌려 지민의 배에 얼굴을 묻었다.


아들, 아빠 안 볼거야?

파파가 나한테 거짓말 해써!

아빠가 언제 거짓말 했어.

파파가, , 안 아프다구 핸는데.

아들 요정 안 볼거야?


태형의 마지막 말에 숨 막힐 정도로 얼굴을 파묻고 있던 도하가 슬쩍 태형을 봤다. 태형은 이를 들어보였다.


이제 이거를 아들 베개 밑에 넣어놓고 자면 다음날 요정이 선물 두고 간다니까?

...지짜야?

진짜라니까. 아들 뭐 가지고 싶은 거 있어?

...히리스.

...?

히리스.


태형은 영문 모를 표정으로 지민을 바라봤다. 그거, 바퀴달린 신발.


아 그거 이름이 히리스였어?

힐리스. 요즘 애들 그거 타고 다닌다고 난리야. 조금만 밖에 나가도 애들 다 그거 신고 다니고.

도하 그거 가지고 싶어? 요정한테 부탁해볼까?

부탁 하 쑤 이써?


이제는 아예 지민의 품에서 얼굴을 완전히 떼고 태형을 바라본 도하가 아직 울음기 남은 목소리로 물었다. 지민이 눈초리 끝에 매달린 눈물을 살짝 닦아주었다. 태형이 자리에서 일어나 도하의 방에서 스케치북과 크레파스를 가져왔다. 아들이 요정한테 편지 써볼래?


편지?

요정한테 보물 베개 밑에 넣어놨으니까 선물 주세요- 하고 편지 써봐.

그럼 히리스 조?

도하가 원하는 거면 주지.


도하는 제 작은 팔뚝으로 눈가를 닦아낸 후 거실에 있는 제 책상에 앉았다. 태형이 스케치북과 크레파스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도하는 크레파스 색 하나 고르는데도 고심에 고심을 했다. 결국 연두색을 고른 도하는 천천히 크레파스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요정님 도하 히리쓰 가꼬 시퍼요 보물 배개 미테 놨둬쓰니까 도하 히리쓰 주세요]

 

 

머리까지 부여잡으면서 진지하게 편지를 쓴 도하는 잘 접어서 다다다 제 방으로 달려가 침대 옆에 있는 협탁에 고이 편지를 두었다. 다시 다다다 방 밖으로 나온 도하는 지민의 다리를 안고 고개를 들어 지민을 바라봤다. 마마, 그러엄 내일 도하 히리스 이써? 지민은 도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럼, 요정은 항상 약속을 잘 지킨단다.

 

 

 

 

 

 

 

 

 

 

***

 

 

 

 

 

 

 

 

 

 

지민은 지금 당장이라도 뒷목 잡고 쓰러질 것 같았다. 힐리스라니, 힐리스라니! 지민은 백화점으로 가 좌르륵 진열되어 있는 힐리스를 불태워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태형은 누가 봐도 기분 안 좋아 보이는 지민에, 괜시리 눈치만 봤다. . 지민이 깊게 숨을 내쉴 때마다 태형의 어깨가 잘게 떨렸다.

 

 

내가 이런 식으로 힐리스를 살줄은 몰랐는데.

 

......

 

-주 신박했어, 김태형. 요정의 선물이라니. -주 그럴듯해서 나도 믿을 뻔 했네.

 

, 그래도 도하가 그렇게 가지고 싶어 하는데.

 

 

하아. 지민은 대답 없이 한숨만 쉰 채 바로 앞에 있는 힐리스 한 짝을 들어 유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사실 도하가 힐리스 가지고 싶다고 말한 것은 몇 주 전부터였다. 어디서 그런 신발을 보고 왔는지 집에 들어오자마자 힐리스 힐리스 노래를 부르는 도하에, 지민은 순간 그게 뭔가 싶었다. 도하가 말하는 힐리스가 자신이 요만한 나이였을 때 유행하던 바퀴 달린 신발이란 것을 깨달았을 때는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게 또 유행이야? 뭐 또 어디 티비에서 그거 신고 나온 사람이 있나. 아 하긴 유행은 돌고 돈다더니 그게 또 유행을 하는 건가. , 나도 어렸을 때 그거 가지고 싶었는데. 어렸을 때 그거 없는 애들이 없었지. 아 애들 그것 때문에 엄청 다쳤었는데. 잠깐만 도하가 그거 타다가 많이 넘어지면 어떡하지. 우리 애 무릎에 흉 지면 어떡하지. 그거 되게 위험한 신발이잖아. 하고 생각이 생각을 물고 끝도 없이 이어졌었다. 결국 결론은 도하가 다치니까 그 신발을 사주면 안 된다, 였다. 확실히 부모의 입장이 되어보니 생각하는 것이 달랐다. 자신도 옛날에 힐리스 사달라고 떼를 썼던 지난날을 생각하면 참 몹쓸 짓이었다.

 

여하튼 그걸로 지민과 도하는 자주 싸웠다. 아니 어른과 아이 사이에 싸웠다라고 말하기는 힘들고, 도하가 떼를 쓰고 지민은 단호했다. 그런 위험한 운동화는 절대 사줄 수 없다는 게 지민의 생각이었고, 자기 친구들은 다 있는데 자신만 없다는 게 도하의 입장이었다. 지민은 부러 태형에게 말하지 않았다. 태형에게 말하면 앞뒤 안 재고 그 자리에서 도하 손잡고 백화점 갈 사람이었다. 도하도 어찌 된 일인지 태형에게 사달라고 조르지는 않았다. 이제 자신이 원하는 물건을 사는데 있어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사람이 지민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아빠한테 사달라고 해도 엄마가 안 된다 하면 결국 안 사준다는 것을 알아차린 거지.

 

한동안 힐리스 얘기를 안 꺼내길래 포기한 줄 알았는데 이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힐리스 얘기가 나왔으니, 지민은 결국 항복했다. 도하 보고 싶다고 난리인 친한 형한테 도하를 맡기고 태형과 백화점을 와서 힐리스를 사러 온 것이다. 이왕이면 더 좋고, 더 안전한 것으로. 지민은 눈에 불을 켜고 힐리스를 찾아다녔다. , 그래도 바퀴 달린 신발이 다 거기서 거기 아니겠냐. 태형의 말에 지민은 태형을 째려봤다. 그래도 우리 도하는 더 좋고 더 안전하고 더 예쁜 걸 신겨야지.

 

 

 

 

 

예쁘게 포장한 선물을 잘 숨겨놓고 도하를 데려왔다. 자기는 안 잘 거라고, 요정 볼 거라고 온갖 떼를 쓰는 도하를 어르고 얼러 재웠다. 와 진짜 누구 닮아서 저렇게 고집이 오지냐. 지민은 방에서 나오면서 중얼거렸다. 너 아니면 나겠지, 누굴 닮았겠냐. 태형의 말에 지민이 헛웃음을 뱉었다. 하긴, 그런 성격이 어디 뱃속에서 나고 태어나겠냐, 환경 탓이 크겠지.

 

그들은 재빨리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어찌됐든 자신들이 벌인 일이었다. 한번 입 밖에 뱉었으니 도하를 실망시키는 일은 없어야 했다. 태형은 백화점에서 산 붓과 포스트 물감을 꺼냈다. , 근데 그거 왜 샀어? 지민은 선물상자를 꺼내오며 물었다. 태형은 씨익 웃었다.

 

 

내가 아까 검색해봤거든. 외국에서는 요정 발자국을 그려놓기도 한다더라.

 

, 진짜

 

그래서 협탁에 엄청 작은 발바닥 좀 그리려고. , 지민아. 너는 편지 좀 써줘.

 

? 무슨 편지?

 

요정한테서 온 편지 말이야. 애 저렇게 잔뜩 설레게 해 놓았으니까 제대로 해야 할 거 아니야. 요정이 왔다간다고 편지 써.

 

...

 

 

지민은 바람 빠진 웃음을 지으며 도하 책상에 널브러져 있는 스케치북을 한 장 부욱 찢었다. 이왕 하는 거 제대로 라지만 정말 제대로다. 지민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크레파스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혹시나 도하가 제 글씨체를 알아볼 수도 있으니 일부러 글씨도 다르게 썼다.

 

 

[보물 잘 간직해 줘서 고마워. 도하가 가지고 싶었던 선물 두고 갈게. 예쁘게 잘 쓰렴! -이빨 요정-]

 

 

이거면 됐지? 지민이 종이를 건네자 태형이 근처에 굴러다니는 포스트잇 하나를 떼서 주었다. , 글씨 작게 해야지 이건 누가 봐도 사람이 쓴 거잖아. . 지민은 그럴듯하다며 다시 조그마한 글씨체로 쓰기 시작했다. 태형은 도하의 방에 숨죽이고 들어가 협탁 앞에 조심히 앉았다. 숨도 거의 참은 채 작은 붓으로 협탁에 발바닥 모양을 그리기 시작했다. 핸드폰 불빛으로 비춰가며 열중해서 그리는 뒷모습을 지민이 몰래 찍었다. 진짜 저런 집중력으로 공부 했으면 진즉 서울대 갔겠다. 뒤에서 작게 들리는 지민의 목소리에 태형이 푸스스 웃었다. 야 내가 대학교 못 갔냐, 안 갔지. 태형이 속삭이듯 하는 말에 지민이 풉 웃었다. 그래 그래.

 

몇 발자국 끝에 선물을 둔 태형은 도하의 베개 밑에 살짝 손을 넣어서 이를 뺀 후 후다닥 방을 나왔다. 방문을 닫고 나서야 후, 숨을 제대로 몰아쉰 태형이 뿌듯한 표정으로 이를 내밀었다. 수고했어. 지민이 그의 어깨를 두들겨주었다.

 

 

 

 

 

우와아아아아!!!!

 

 

난데없는 함성에 늘어지게 자고 있던 태형과 지민은 화들짝 놀라며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파파! 도하는 커다란 상자를 품에 안은 채 방 문을 열고 침대로 뛰어왔다. 어어, 조심 조심! 지민이 팔을 벌려 몸을 날리는 도하를 안아주었다. 마마 이거 바, 선물 선물! 잔뜩 흥분한 채 말을 잇던 도하는 지민의 배에 등을 기대고 선물 포장지를 마구잡이로 뜯기 시작했다. 태형은 부스스한 머리를 대충 손으로 누르다가 부어 있는 지민의 눈을 보고 뒤로 넘어가며 웃었다. 너 오늘따라 왜 이렇게 부었냐. 태형의 말에 지민은 그의 배를 퍽 내리쳤다. 놀리지 마.

 

 

마마... 이거 지짜 내꼬야?

 

그럼. 요정이 직접 도하한테 준 거잖아.

 

마마 이거 지짜 나 써두 대?

 

당연하지. 우리 도하 좋겠네. 요정한테 힐리스도 받고.

 

꺄아!

 

 

도하는 소리를 지르며 침대에서 내려와 바로 운동화를 신기 시작했다. 마마 이거 지짜 이뽀, 칭구들 중에서 내가 제일 이뽀! 운동화를 신은 채 발을 구르며 하는 소리에 지민은 결국 웃어보였다. 우리 도하는 뭘 신어도 예뻐, 대신 집 안에서는 신발 신는 거 아니라고 했죠? 지민의 말에 도하는 후다닥 신발을 벗었다. 파파 빠리 밥 해조, 나 이거 신고 놀러 갈래! 도하의 재촉에 아직 제대로 눈을 못 뜬 태형이 주섬주섬 이불을 젖히고 침대 밖을 나왔다. 방 밖을 나가는 태형의 뒤로 도하가 쫄래쫄래 따라갔다. 파파 이고 바 지짜 요정이 선물 조써! 막막 침대 옆에 요정 발모양도 이써써! 요정은 발모양이 노란색이야! 파파 내 방 와바! 도하의 목소리가 방 밖까지 크게 들려왔다. 침대에 멍하니 앉아있던 지민은 결국 풋 웃고 말았다. 누구 아들이길래 저렇게 귀엽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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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분량조절 실패
도하 7
태형 지민 24

도하 이 빠진 날


뷔민 말도 안되는 육아물 썰7

길/육아물


지민아! 지민아!

 

 

현관에서부터 들리는 태형의 호들갑에 지민은 방에서 나왔다. 방에서 나오자마자 보이는 태형과 손에 들린 쇼핑백에 저절로 얼굴 먼저 구겨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너 또 뭐 사왔어! 지민이 후다닥 태형에게 달려가 쇼핑백을 빼앗았다. 신발과 옷이 잔뜩 들어있는 것을 본 지민은 홱 태형을 노려봤다.

 

 

야 작작 좀 사와 진짜! 하루에 하나씩만 입혀도 다 못 입히겠네.

 

그러면 하루에 하나씩 입히면 되지?

 

이게! 말이면! 단 줄! 아나!

 

아씨! ! 아파 진짜아아악!!!

 

 

결국 지민에게 등짝을 여러 번 맞은 태형이 그의 손을 피하면서 소리를 빽 질렀다. 씨이... 씨이... 지민은 금세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며 태형을 노려봤다. 아씨, 손도 작은 게 더럽게 매워요. 태형은 닿지도 않는 부분에 애써 손을 대가며 똑같이 지민을 노려봤다. 지민은 들고 있던 쇼핑백을 소파에 던지듯 놔두었다.

 

 

, 정신 차려 진짜. 지금부터라도 돈 모아놔야지. 너 돈 많다고 허세 부리다가 진짜 애 크는 만큼 돈이 사라진다.

 

괜찮아. 애 대학 보낼 때까지 돈은 있어.

 

웃기지마. 돈 얼마나 들어가는지 너 모르잖아. 당장에 몇 년 뒤 유치원 갈 때부터가 진짜야.

 

지민아. 오빠가 애 키울 만큼의 능력도 안 되는 줄 알아?

 

오빠는 씨발, 그렇게 부르지 말랬지.

 

, 알았어! 알았어! 때리지 말라고!

 

 

또 높이 치켜드는 손에 태형은 두 팔로 머리를 가리며 외쳤다. . 지민은 손을 내리고 쇼핑백 안에 든 옷을 하나하나 꺼내보기 시작했다. 그거 색깔 이쁘지 않아? 아 그거 딱 보자마자 완전 아들 거라 생각했다니까. 아 그거 너무 귀여워서 샀어. 그거 왠지 너 같아서 샀어.

 

 

나 같은 건 뭐냐.

 

그거 동물 귀 달린 거. 왠지 너 생각나서 샀어. 아가한테 입히면 겁나 이쁠 것 같지 않아?

 

야 이런 건 사오지 좀 마. 딱 봐도 훨씬 커 보이잖아.

 

아 애 커서 입히면 되지.

 

그때 되면 더 예쁜 옷 많이 나올 텐데?

 

그럼 그것도 사면되지 뭐.

 

 

. 지민은 제 시선에 맞추어 들어 보고 있던 옷을 툭 놔두고 태형을 봤다. 자신이 지금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모르는 눈빛이다. 저 순진무구한 표정 좀 봐지민은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태형아. 돈이 지금 있다고 해서 그렇게 막 쓰는 거 아니야. 당장 내일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하물며 애가 컸을 때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 나 진심으로 걱정돼서 하는 말이야. 정말로 아이 하나 키우는데 들어가는 돈이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이라고.

 

야 내가 돈을 쓰면 어디다 쓴다고 그러냐. 그냥 옷 몇 벌 신발 몇 켤레 사는 것뿐인데.

 

그 커다란 애 옷장에 옷 놔둘 곳이 없다, 새끼야!

 

 

지민은 결국 또 빽 소리를 질렀다. 이 새끼는 진짜 좋은 말로 할라 해도 꼭. 머리가 울리는 기분에 지민은 결국 한숨을 쉬었다. 와중에 이쁜 것만 고르긴 했네. 지민은 쌓인 옷을 뒤적거리며 생각했다. 그의 행동을 유심히 보던 태형이 헤 웃었다. 지민의 속은 얼굴에, 행동에 다 드러났다. 애기 옷 만지작거리면서 유심히 보는 것은 그래도 마음에 든다는 뜻이었다. 이쁘지. 태형의 말에 지민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너 옷보는 눈은 있으니까.

 

내가 진짜 예쁜 것들 중에서 뛰어나게 예쁜 것만 탁 탁 탁 골라왔지.

 

 

엄지와 검지로 잡아 올리는 시늉까지 하며 말하는 태형에, 지민은 결국 피식 웃어버렸다. 저렇게 뿌듯하게 웃으며 말하는데 어떻게 더 화를 내냐. 지민은 다른 쇼핑백에서 신발을 다 꺼냈다. 하나같이 앙증맞고 귀여운 것투성이였다.

 

 

이건 여자 애기 거 아니야?

 

야 요즘 여자 남자 것이 어딨어. 예쁘고 어울릴 것 같으면 다 입히는 거지 뭐.

 

근데 아가 아직 못 걸어.

 

그럼 걷기 시작할 때 신기면 되겠네.

 

그때 되면 또 예쁜 신발 있다고 사올 거면서?

 

내 마음에 쏙 들면 사오겠지.

 

 

그래, 네 알아서 해라. 지민은 거의 포기하는 심정으로 들고 있던 신발은 조심히 내려놓았다. 근데 이제 진짜 놔둘 곳이 없어... 지민이 눈가를 문지르며 곤란한 듯한 말투로 하는 말에 태형도 팔짱을 낀 채 잠시 고민했다. 홱홱 거실도 쭉 둘러보았다. 그러면 그냥 이런데 진열해놓지 뭐. 티비 옆을 가리키며 하는 말에, 지민은 잠시 고민하다 결국 신발을 들고 티비 쪽으로 다가가 하나씩 놓기 시작했다.

 

 

이제 진짜 사오지마. 지금도 충분히 예쁜 거 많으니까.

 

알았다고 진짜. 아가는 어딨어?

 

방에. 애 자고 있으니까 깨우지 마.

 

낮잠?

 

. 참 그러고 보면 이렇게 시끄럽게 해도 잘 자, 아가. 그치?

 

 

지민의 말에 태형이가 피식 웃었다. 너 닮아서 아가가 엄청 순한 갑다, 그치? 태형의 말에 지민이 장난스레 그의 어깨를 퍽 쳤다. 뭘 날 닮아.

 

 

아가 깨어나면 쇼핑 하러 나갈까?

 

또 무슨 쇼핑. 또 뭐 사려고. 너 진짜 요즘 돈지랄 난 것 같애.

 

아아.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너 사주고 싶어서 그러지. 네 옷도 사고 신발도 사고.

 

됐어. 괜찮아. 고딩이 옷이 뭐가 다 필요해. 맨날 교복만 입고 다니는데.

 

에이, 뭐 넌 주말에도 교복 입고 다니냐?

 

 

가자 가자, 아가 코에 바람 좀 넣어주자. 아예 두 손으로 팔을 잡고 흔들면서 하는 말에 지민은 거절할 수 없었다. 여기서 더 안 간다 그러면 떼쓰기 시작할거다. 제 팔 잡고 흔드는 것부터 딱 각 나오지. 지민은 태형의 큰 손 위에 제 손을 덮어 잡아 그대로 그의 손을 떨어뜨렸다. 알겠으니까 진정해.

 

 

 

 

 

 

 

 

 

 

내가 아기띠 맬게!

 

 

태형의 말에 칭얼거리는 아이를 달래고 있던 지민이 뒤돌아 태형을 바라봤다. 그러라 말하지도 않았는데 진작 매고 있다. 아기는 눈초리에 자그마한 눈물을 매단 채 칭얼거리다 아기 띠가 보이자 뚝 울음을 그쳤다. 외출 하는 건 기가 막히게 알아차린다니까.

 

 

그럼 백화점 가서 저녁까지 먹고 올까?

 

그러면 아가 밥 챙겨야 하지 않아?

 

분유 챙겨야지. 태형아 분유 좀 타와 줘. 나 그동안 얘 옷 좀 입히고 있을게.

 

알았어. 오늘 사온 걸로 입혀봐.

 

 

태형은 아기 띠를 두른 채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의 뒷모습이 영락없는 애 아빠 모습이라 지민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오늘은 무슨 옷 입을까요? 지민이 더 신나서 허밍까지 하며 아기 옷장 문을 열었다. 아기가 다다다 기어왔다. 요즘 들어 기어오는 속도가 좀 빨라진 느낌이다. 지민의 앞까지 기어온 아가는 지민의 발목을 잡고 알아서 앉기까지 했다. 너도 옷보고 싶어요? 지민은 애를 안아들어 옷장 안을 보여주었다. 아이는 옹알이를 하며 두 손을 뻗어 잼잼 거렸다. 이거? 이거 입고 싶어? 지민은 하나씩 짚어주며 하나하나 물어봤다. 지민아! 분유 어디다 둬? 부엌에서 부르는 목소리에 지민이 크게 외쳤다. 거실에 둔 가방 안에 두고 다른 애기 용품도 좀 챙겨줘!

 

이 옷 입을까요? 지민은 멜빵바지를 꺼내들었다. 아가들은 멜빵바지 입는 게 그렇게 귀엽더라는 지민의 말을 들은 태형이 한 때 멜빵바지만 주야장천 사온 적이 있었다. 멜빵바지 종류가 이렇게 많구나를 그 때 처음 느꼈었다. 지민은 그에 어울리는 상의와 모자, 잠바까지 꺼내들었다. 바닥에 앉아 옷과 아가를 내려놓자 제 옷을 주섬주섬 잡기 시작했다. 마음에 들어요? 지민이 웃으면서 상의를 들어 그에게 입히기 시작했다.

 

그 옷 이쁘지. 멀리서 들리는 목소리에 지민이 고개만 돌려 봤다. 태형이 문가에 기대어 지민을 보고 있었다. 챙길 거 다 챙겼어? 지민의 물음에 태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만 준비하면 돼. 태형의 말에 지민의 손이 좀 더 빨라졌다. 태형아 애 양말이랑 신발도 좀 어울리는 걸로 꺼내줘. 멜빵바지를 입히면서 말하는 지민에, 태형도 다가와 신발을 찬찬히 둘러보기 시작했다. 어찌나 옷과 신발이 많은지, 아가 방이 옷 방 수준이었다. 좋아, 너로 정했어! 태형은 파란색 신발을 가져와 지민의 앞에 살짝 두었다. 지민은 막 토끼 귀가 달린 모자를 씌우고 있었다.

 

 

아이고, 세상에 누구 아들인데 이렇게 예뻐?

 

빠빠! 빠브브으...

 

태형아, 그냥 우주복 입힐까? 워머 하고?

 

지금 완전 한낮이라서 괜찮지 않아? 어차피 실내에만 있을 건데.

 

그냥 패딩만 입힐까.

 

아니면 우주복 입히고 나중에 백화점에서 벗으면 되니까.

 

 

태형의 말이 끝나자마자 지민은 다시 옷장을 뒤져 우주복을 찾기 시작했다. 털이 복실복실 달린 토끼 우주복. 지민은 동물 귀와 꼬리가 달린 옷을 좋아했는데 유난히 토끼를 좋아했다. 그걸 유심히 본 태형이 어느 날 지민에게 토끼모양 동물잠옷을 사다 준적도 있었다. 지민은 그 잠옷을 보고 경악 했지만. 결국 한 번도 입어보지 못하고 지민의 옷장 구석에 처박혀 있다.

 

다행히 날씨는 겨울치고는 따뜻했다. 겨울바람 안 불고 햇살이 따스하면 반은 성공이다. 태형이 아이를 안으면서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지민이 멀리서 태형을 찍었다. 요즘 그는 태형과 아이를 찍기에 맛 들렸다. 언제 한번 인터넷에서 반도의 흔한 유부남.jpg로 올라온 글을 보고 다짐했다. 그 사진 속에는 훈훈한 아빠와 아이의 사진이 누가 봐도 흐뭇한 웃음을 지을 정도로 잘 나와 있었다. 자신도 태형과 아기를 그렇게 예쁘게 찍고 싶었다. 모델들은 이미 완벽히 준비가 되었다. 저런 얼굴들은 갤러리에 저장해 놓고 길이길이 간직해야지, .

 

백화점에 도착하고 더운지 자꾸 칭얼대는 아기에, 결국 지민이 우주복을 벗겨주었다. 우주복을 벗기자 앙증맞은 토끼 멜빵바지가 나왔다. 참 아무리 생각해도 이 옷은 잘 샀어. 태형의 얼굴에 뿌듯함이 대놓고 보였다. 태형아 힘들면 말해, 내가 안아도 되니까. 지민의 말에도 태형은 고개를 저었다. 하나도 안 힘들어.

 

본격적으로 쇼핑을 시작하는데 가는 데마다 시선집중이다. 지민은 신경 안 쓸래야 안 쓸 수가 없었다. 여기저기서 자신들을 향한 시선이 너무나도 잘 느껴졌다. , 부담스러워... 지민은 제 자신이 점점 고개가 숙여지는 것을 느꼈다. 태형을 그런 지민을 아는지 모르는지 옷 고르는데 여념이 없었다. 헐 지민아 이거 봐, 진심 너를 위한 옷이야. 태형이 니트 하나 꺼내 지민에게 대보았다. 지민은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생각해보면 시선이 모일 수밖에 없는 조합이기는 했다. 누가 봐도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남자 두 명이 백화점에 쇼핑을 하러 왔는데 한명은 아이를 안고 있다. 근데 그 한명이 겁나게 잘생겼단 말이지. 감히 그들의 관계를 쉬이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끽해야 친구와 늦둥이 동생 정도로 생각하겠지. 어찌됐든 지민은 그런 시선을 받는데 익숙하지 못했다. 김태형은 날 때부터 잘났으니 자신한테 날라 오는 시선들이 익숙하기 그지없겠지만 자신은 아니란 말이다. 지민은 한 번도 아이를 데리고 혼자서 외출한 적 없으니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태형이 이런 시선을 많이 받고 다녔다는 생각이 들자 어쩐지 안타까워졌다.

 

 

지민아 대박! 이거 완전 네 옷이야!

 

 

아니, 당사자는 그냥 아무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아이를 데리고 다니면 느끼는 것이, 말을 걸어오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대부분이 아기가 귀엽다며, 예쁘다며 말을 걸어온다. 아무리 낯선 사람이 다가와 제 얼굴을 보고 손을 만져봐도 아이는 얼굴 한번 피하지 않고 사람을 그 초롱초롱한 눈으로 쳐다보던가, 꺄르르 웃고는 했다. 그러면 사람들은 아이를 더욱 더 귀여워하는 것이다. 내 새끼, 나를 닮아서 친화력 끝내주네. 태형이 아가를 통통 튕기면서 말했다. 요즘 태형은 제 아들을 남한테 못 보여줘 안달이었다. 이렇게 예쁜 우리 아들을 세상 사람이 다 알아야 해! 태형의 모토였다. 아이가 조금만 더 컸으면 연예인 시킨다고 했을 것이다.

 

 

우브브.. 우으응..빠바! !

 

, 그래 우리 아들. 이게 마음에 들어?

 

 

아이가 몸까지 쭉 빼며 가리키는 옷에 태형이 맞장구 쳐주었다. 아이고 내새 끼, 아빠 닮아 그런가 안목이 엄청나네. 태형의 말에 지민이 풉 웃었다. 아이를 키운 지 이제 한 달이 넘었다. 한 달 뒤 고3 되는 애들이 알면 뭐 얼마나 안다고, 애 키우는데 아직 서툰 것투성이지만 나름 둘이서 잘 해내고 있었다. 태형은 아들, 아빠 소리가 자연스럽게 나오는 수준까지 되었다

 

 

지민아 이거 입어봐.

 

, ? 이거 아가가 고른 거잖아. 네가 입어야지.

 

아니야. 이거 완전 네 옷이야. 아들이 너 입으라고 고른 거지.

 

마마! 으브브...

 

봐봐. 엄마거래.

 

 

내가 왜 엄마야. 지민은 틱틱 대면서도 옷을 받아들고 피팅룸에 들어갔다. 다 입고 나와 봐! 알았다니까! 태형의 말에 피팅룸 안에서 지민의 대답이 들렸다. 태형은 아이의 몸을 이따금 통통 튕겨주면서 다른 옷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 아들 우리 또 엄마 옷 골라볼까?

 

뭐 찾으시는 거 있으세요? 태형이 한창 옷을 보고 있을 때 한 직원이 물어왔다. , 그냥 옷 좀 보고 있어요. 태형은 시선도 돌리지 않은 채 옷을 뒤적였다 빼서 한번 보고를 반복했다. 바브브으- 아이가 직원 쪽으로 손을 뻗었다. 어머, 아이가 엄청 예쁘네요. 직원의 말에 태형이 고개를 홱 돌려 직원을 바라봤다.

 

 

그쵸? 우리 애 지나갈 때마다 사람들이 그렇게 예쁘다고 칭찬에 칭찬을 아주 그냥.

 

동생인가 봐요.

 

아뇨. 제 아들인데요.

 

 

표정을 확 굳히면서 단호히 말하는 태형에 직원은 살짝 당황한 듯 했지만 애써 다시 웃어보였다. 죄송합니다, 너무 젊어 보이셔서 제가 착각을 했네요. 그녀의 말에 태형은 웃으며 다시 아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괜찮아요, 그런 소리 많이 들어요. 아이가 계속 고개를 돌려 직원을 바라봤다. 낯선 사람이 자신을 바라봐 줄 때마다 아이도 그들을 보며 웃고는 했었다. 태형은 아이가 더 잘 보이도록 몸을 살짝 틀었다. 꺄으! 아이가 방글방글 웃었다. 태형은 흐뭇하게 웃으며 그가 쓴 모자의 귀 끝을 만지작거렸다.

 

사실 태형과 지민이 처음 들어올 때부터 직원들끼리는 난리가 났었다. 정확히는 태형 때문에 난리가 났었다. 모르긴 몰라도 겁나게 잘생긴 남자가 귀여운 아이를 안고 들어오는데 시선이 안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조합도 신선하단 말이지. 아기 띠를 매고 들어온 그 남자는 자신이 그러고 다니는 게 굉장히 익숙한 듯 보였다. 그런데 아빠라 하기에는 나이가 굉장히 젊다 못해 어려 보였다. 늦둥이 동생인가. 그럼 그 옆에 있는 남자는? 친구인가. 다들 자연스럽게 그렇게 생각을 했다. 태형에게 다가온 직원은 가위바위보에서 이긴 승자였다. 가까이서 보니까 더 잘생겼네. 직원은 속을 숨기며 더욱 친절하게 웃어보였다. 알고 보니 아들이었다는 게 조금 충격적이긴 했지만.

 

태형은 옷을 하나씩 넘기며 보다가 후드 하나를 집었다. 교복 위에 입으면 예쁘겠네. 태형은 교복을 입은 지민의 모습을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빠바! 바브으... 아이도 마음에 드는지 옷을 잡으려고 자꾸 손을 뻗었다. 앙증맞은 팔이 왔다갔다 거리는 모습에 태형은 또 피식 웃어버렸다. 아들도 보고 싶어? 직원은 이때다 싶어 옷에 대해 막 설명하기 시작했다. 조용히 쇼핑 하는 것을 좋아하는 태형은 옆에 직원이 졸졸 쫓아다니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내색 하지는 않았다. 원단은 어떻고 소매는 어떻고 설명해주는 것을 고개를 끄덕이면서 듣고만 있었다.

 

 

이거 사이즈 아까 피팅룸에 들어간 애한테 맞을까요?

 

네 그럼요. 친구 분이세요?

, ...

 

 

태형은 말끝을 흐리며 괜히 다른 옷을 뒤졌다. 그런데 고객님이 사 줄 옷 치고는 가격대가 좀 있어서요. 직원의 말에 태형이 표정을 싹 굳혔다가 이내 비릿하게 웃어보였다. 괜찮아요, 이 매장 살 정도의 돈은 있거든요. 태형의 말에 그제야 제 말실수를 알아차린 직원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 숙여 사죄했다. 아직도 여기에 어린 사람 무시하는 직원도 있네. 태형은 혀를 쯧 차며 지민이 들고 들어간 니트를 손가락으로 튕기듯 건들었다. 이 니트 계산해주세요. 때마침 지민이 피팅룸에서 나왔다. 지민은 새 니트를 입은 채 쭈뼛대며 태형에게 다가갔다. 태형은 엄지를 척 들어올렸다. 꺄으! 마마으! 지민이 눈에 보이자 아이가 지민에게 가려고 몸을 뒤척였다. 태형은 아이가 혹시나 떨어질까 꽉 안았다. 이 니트 빨리 계산해주세요, 이 후드랑요. 태형이 한 손에 든 후드를 건네며 하는 말에 직원은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인 채 후드를 받아들고 지민의 옷에 달려 있는 택을 떼어내 계산대로 가져갔다. 다른 직원들은 태형 눈치 보기 바빴다. 너도 후드 하나 사게? 지민의 물음에 태형이 고개를 저었다.

 

 

저거 네 건데.

 

? , 나 필요 없어. 이거면 돼.

 

내가 사주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아니 그래도...

 

 

지민은 무어라 더 말하려다 태형이 쓰읍 짐짓 엄한 표정을 지어 보이기에 결국 입을 다물었다. 그냥 뇌물 받는 셈 쳐, 나랑 우리 아들 잘 부탁한다는 의미로. 태형의 말에 지민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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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하 8개월.

태형 지민 18.

12월의 어느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