뷔민 말도 안되는 육아물 썰15
길/육아물
제발 한번만 부탁한다고 사정사정 하는 태형을 거절할 수 없어, 지민은 결국 승낙했다. 고마워 지민아, 나중에 꼭 갚을게! 태형이 발랄하게 소리치며 나가고 나니, 그 넓은 집에 고요한 적막만 돌았다. 갑자기 찾아온 고요가 익숙하지 않아 지민은 멋쩍게 뒷목만 긁적이다 집으로 들어갔다. 거실은 시계 침 움직이는 소리만 들렸다. 소파에 앉아 집을 쭉 둘러봤다. 제 집처럼 드나들어 익숙할 대로 익숙해져버린 집인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어색하게 느껴지는 건지. 이런 집에 혼자 살았을 태형의 심정이 이해는 갔다.
거실과 가까운 방에 아기가 자고 있다. 아이가 잠에서 깨기 전까지는 이 고요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지민은 두 눈을 가만히 감았다. 사실 지민은 아직도 아기가 미웠다. 태형이 아기를 키우면 주위의 시선이 곱지만은 않을 것이다. 온전한 사랑을 받지 못해 외로운 아이가 또 좋지 않은 시선을 받으며 아기를 키울 생각을 하니, 지민은 제 눈앞이 다 캄캄했다. 외로운 아이가 아기에게 사랑을 주고받는 법을 가르칠 수가 있을지. 어찌 보면 그 아기는 태형의 욕심이었다. 외로움에 사무쳐 사랑을 갈구했던 자신에게, 자신과 같은 처지의 아기가 툭 나타났으니 강하게 끌림을 느꼈던 거겠지. 지민은 그것이 못내 마음에 안 들었다.
자신이 아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면서 맡기고 가다니 참 얄미웠다. 그만큼 내가 제 말을 들어줄 거라고 생각했는지. 사실 지민도 할 말은 없었다. 정말 태형이 부탁한 것들을 다 들어주었기 때문에. 너무 오냐오냐 해줬어. 지민은 작게 쯧 혀를 찼다.
태형은 오늘 본가에 들려야 한다고 했다. 큰 행사가 있는데 꼭 참석을 해야 한다고 했다. 참 우스웠다. 평생 아들 취급 해준 적 없으면서 그들의 위신을 지켜야 하는 곳이면 아끼지 않고 태형을 이용했다. 태형은 그곳에서 해본 적 없는 아들 노릇을 하면서 하루 종일 웃고 있어야 했다. 행사가 끝나면 그들의 따뜻한 시선 한 번 받지 못하고 쫓겨나듯 그 행사장을 떠나야 했다. 지민은 태형이 그런 행사를 나갈 때마다 그가 돌아올 때까지 그의 집에 있었다. 그 차가운 곳에서 돌아올 때, 또 넓기만 한 집의 삭막함만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아서. 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갈 때 느껴지는 한기와 외로움을 온 몸으로 맞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렇게 계속 홀로 절벽 끝으로 밀리는 그를 꼭 안아주고 싶어서. 떨어지더라도 둘이서, 외롭지 않게, 춥지 않게.
으차차. 지민은 기지개를 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녁 먹기 전에는 온다고 했으니까 저녁이라도 미리 만들어 놓아야겠다. 그럼 조금이라도 더 사람 사는 집 냄새가 나지 않을까.
베란다로 가서 쌓인 빨래를 돌리고 싱크대에 쌓인 그릇들을 설거지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그릇들은 애기 이유식 그릇, 분유병, 애기 숟가락 등등이 다수고 태형이 먹었을 듯한 것은 배달음식용 일회용품 밖에 없었다. 그것들을 보니 또 한숨이 나왔다. 밥은 제대로 먹어야지 이게 뭐야, 진짜 속상하게... 중얼중얼 혼잣말을 하면서도 한숨을 푹푹 쉬었다. 애기 키우면서 나름 책임감 같은 것이 있다 하더라도 남이 보기에는 태형 역시 여전히 애였다. 애가 무슨 애를 혼자 키우겠다고... 애기 그릇과 분유병을 소독기에 넣은 지민은 그제야 한숨 덜 수 있었다.
설거지를 다 하고 나니 또 집에 정적이 돌았다. 뭘 해야 할지 몰라 뒷목만 긁적이며 나온 지민은 텅텅 빈 거실 한가운데 멀뚱히 서 있었다. 정적이라도 줄여보자 티비를 틀었다. 한 케이블 채널에 틀어져 있던 티비는 그 소리가 매우 작아서 대화 소리만 간신히 들릴 정도였다. 난리 났네. 지민은 중얼거리며 바닥에 앉았다. 거실 바닥에는 애기를 위한 매트가 깔려 있었다. 지민은 손으로 대충 슥슥 쓸어봤다. 두툼한 매트가 손바닥에 부드럽게 닿았다. 같이 산지 3개월이 지난 지금, 집 안 곳곳에 아이 용품이 넘쳐났다. 지극정성이다, 지극정성이야. 지민은 탐탁지 않은 듯한 말투로 중얼거리면서도 여기저기 널브러진 물건들을 깨끗이 정리했다. 아이 키우는 게 예삿일은 아니니 집 청소 할 시간도 없겠지. 그래서 지민이 태형의 집에 놀러오면 항상 청소 담당을 했었다. 지금은 태형이도 없고 아기도 자고 있으니 딱 좋은 시간이다.
티비는 계속 혼자서 떠들어댔다. 원래 티비를 즐겨 보지 않는 지민이라, 결국 티비를 끄고 문제집을 폈다. 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그 꿈을 이루려면 지금보다 더 열심히 공부를 해야 했다. 주위에서 그렇게 공부를 잘 한다고, 똑똑하다고들 하지만 사실 아직 턱 없이 부족했다.
한참을 집중해서 공부하던 지민은, 어디선가 들리는 웅얼거리는 소리에 집중력이 깨져 고개를 들었다. 시간을 보니 벌써 저녁때가 다 되어갔다. 헐, 빨리 장 보고 저녁 만들어야 하는데. 지민은 급하게 지갑만 챙겨 밖을 나왔다. 바로 근처에 대형마트가 있는 게 다행이었다. 오늘 저녁을 뭐뭐 만들지 이미 생각해둔 것이 있기 때문에 재빨리 재료만 딱딱 넣었다. 그러다 문득 아기 이유식이 생각 나, 고민 하다가 야채를 좀 더 넣었다. 이유식 만드는 법은 나보다 김태형이 더 잘 알겠지.
양 손 가득 바리바리 들고 온 지민은 현관 앞에서부터 들리는 아기 울음소리에 화들짝 놀라 급하게 문을 열었다. 집 안에 들어서자마자 들고 있던 봉지를 내팽개치고 달려갔다. 방문을 열자마자 이상하게 훅 끼쳐오는 열기에 지민은 순간 심장이 쿵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불안함에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정신이 없었다. 아기 침대에 가자마자 아이를 안아들었다. 온 몸의 열이 양 팔과 가슴팍에 닿았다. 당황스러움에 사고회로가 정지되어 그저 아이를 안은 채 우뚝 멈추었다. 아기는 목이 쉬도록 울고 있었다. 지민은 바로 뛰쳐나가 미친 듯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눈물이 툭 터져 나왔다. 이 모든 게 제 탓인 것 같았다. 어떡해... 어떡해... 아기를 꼭 안아주었다.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을 톡톡 소매 끝으로 닦아주었다. 이놈의 집은 왜 하필 꼭대기 층에 있어서. 지민은 급히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1층에 오자마자 문이 다 열리기도 전에 뛰쳐나가 발길이 닿는 대로 뛰어갔다. 앞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눈물 때문인지 아니면 정신이 너무 없어 시야도 가릴 정도인지 분간이 안 갔다. 대충 큰 도로로 나가 손을 마구 휘저었다. 앞에 멈추는 택시에 타자마자 울음이 팍 터져 나왔다. 끅끅거리며 제일 가까운 큰 병원을 말했다. 아저씨는 열이 펄펄 끓는 채로 앓고 있는 아기를 보자마자 빠른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지민은 아기를 안고 펑펑 울며 계속 중얼거렸다. 아프지 마... 아가 아프지 마.. 내가 미안해... 놔두고 가서 미안해. 아프지마.
아기는 끙끙거리며 울면서도 무어라 말하려는 듯 입을 벙긋거렸다. 파.. 마마... 마마... 손까지 뻗어 잼잼 거리면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지민은 거의 오열을 했다. 죄책감이 온 몸을 휘감았다. 아기가 이 지경이 되도록 뭐 하고 있었는지 제 자신이 한심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나 무심했었나, 미안함에 눈물이 자꾸 나왔다.
병원 앞에 선 택시에, 지민은 대충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주며 급히 내렸다. 병원에 들어가자마자 접수처로 달려갔다. 엉엉 울며 아기만 꾹 안았다. 지민은 지금 자신이 어떤 꼴인지,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간호사는 대충 상황을 짐작하고 바로 응급실로 옮겨주었다. 아기를 침대에 눕히고 간단한 처방을 하고 나서야 지민은 좀 진정이 됐는지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울음의 여파 때문인지 딸꾹질이 나오고 울음소리가 자꾸 새어나왔다. 두 손으로 얼굴을 파묻었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하려다, 이대로는 말도 제대로 못할 것 같아 문자를 쳤다. 손이 덜덜 떨려 오타가 난무하는 문자를 보내고 힘이 다 빠진 몸으로 간신히 침대 옆에 앉아 아기를 내려다보았다. 아기를 볼 때마다 울음이 새어나와 결국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또 어깨가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혹여나 아기가 잘못되면 어떡하지. 자꾸 안 좋은 쪽으로 생각이 튀자 진정하기도 힘들었다. 가끔씩 누군가 자신의 어깨를 건들며 무어라 말을 하는 듯 했지만 지민은 정신이 없어 그들이 어떤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했다. 그저 자그마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아기가 아픔을 잘 견뎌내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뒤에서 누군가 살짝 안아오는 느낌에, 지민은 화들짝 놀라 손을 떼어 뒤돌아보았다. 태형이 지민의 품에서 살짝 떨어져 그를 바라보자, 지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심하게 운데다 갑자기 일어나서 그런지, 휘청거리는 그를 뒤에서 안듯이 잡아준 태형이 걱정스럽다는 표정으로 지민의 볼을 살살 쓸어내렸다. 지민은 태형을 보자마자 또 눈물이 차올랐다. 태형아. 이름만 불렀을 뿐인데 목소리에 어린 물기에, 태형은 다 안다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눈가를 어루만졌다. 어찌나 울었는지 두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너 지금 완전 못생겼어. 장난기 어린 태형의 목소리에 지민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의 어깨를 팍 내리쳤다. 너 지금 이 상황에 그런 말이 나와? 지민의 목소리가 잔뜩 갈라져 나왔다. 태형은 결국 그런 지민을 꽉 안아주었다. 어깨 부근에 머리를 얹고 등을 쓸어내려주면서 그를 위로했다.
다 괜찮아, 지민아. 네 덕분에 도하가 별 탈이 없대. 심각한 병도 아니고 그냥 링거 저것만 다 맞고 약만 먹으면 된다고 하네?
......
... 걱정됐어?
... 나 때문에 진짜 잘못되면 어쩌나...
......
내가 애를 데리고 갔어야 했는데... 진짜 슈퍼 바로 앞이라고 아무 생각 없이 나가서... 하...
태형은 또 울먹거리기 시작하는 지민을 꾹 안아주며 등을 토닥이기 시작했다. 지민은 몸을 바르작거리며 편하게 자세를 잡았다. 어깨에 머리를 살짝 기대었다. 그의 심장소리가 일정하게 두근거려 마음이 좀 평안해지는 것 같았다. 울음 때문에 불규칙하게 내쉬던 호흡이 점점 돌아오기 시작했다.
지민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얼굴도 눈물범벅에 눈도 붓고 볼도 텄다. 아까보다는 덜하지만 몸도 잘게 떨었었다. 신발은 슬리퍼로 심지어 짝짝이다. 발은 흙투성이였다. 어디 찔리거나 한 건 아닌가 걱정이 되었지만 피가 보이지 않는 걸 보니 그건 아닌 것 같아 다행이었다. 항상 단정히 다니던 그 답지 않게 옷도 잔뜩 흐트러져 있었다. 머리도 헝클어져 있고. 그가 얼마나 정신이 없었는지 제대로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태형은 그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그 위에 턱을 얹었다.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문자를 딱 받았을 때, 오타가 난무한 그 문자를 보자마자 심장이 덜컹거리는 느낌과 함께, 손이 부들부들 떨려 핸드폰을 떨구기까지 했다. 아기가 아프다는 그 한마디는 모든 사고회로를 정지 시켰고, 몸이 와자작 굳어 어떤 행동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자신이 아기를 키우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제 가족들 앞에서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몰라 이가 덜덜 떨렸다. 갑자기 식은땀을 흘리며 안절부절 못하는 태형에, 엄마라는 사람은 웃으며 귓가에 살짝 읊조렸다. 오늘 제대로 하기로 했잖아, 수작 부리지마. 태형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태형은 여전히 그 집안에 발이 묶여있는 상황이었다.
걱정되어 죽을 것 같았다. 아들이 지금은 어떤지, 병원은 갔는지, 어떤 병인지, 심각한 것은 아닌지, 물어볼 것투성이였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이 거지같은 집구석을 단호하게 내치지도 못하고 이렇게 묶여있는 것도 한심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지민 밖에 없었다.
그렇게 행사가 끝나자마자 집과 가까운 병원을 다 뒤지고 나서야 찾은 것이었다. 침대에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아들과 그 옆에서 얼굴을 파묻은 채 꼼짝도 않는 지민을 보자마자 안도감에 몸에 힘이 탁 풀려 휘청거리기까지 했었다.
마실 거라도 사올게. 태형의 말에 지민이 기운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러다 네가 쓰러지겠어. 태형의 말에 지민이 힘없이 웃었다. 나 이런 걸로 안 쓰러져. 표정이나 몸에 힘도 없으면서 강단 있는 목소리에 태형도 살풋 웃으며 자리에 일어났다. 잠시 후 나타난 태형의 얼굴에는 장난스러운 미소가 어려 있었다. 차가운 캔 이온음료를 지민의 볼에 갖다 대자 어느새 꾸벅꾸벅 졸고 있던 지민이 파드득 온 몸을 떨며 놀랬다. 아 깜짝아! 지민이 태형의 배를 퍽 쳤다. 태형이 급히 배를 감싸 쥐며 아파하면서도 그 웃음은 지우지 않았다. 지민은 그를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그의 손에 들린 캔을 확 채갔다. 뭐야, 왜 그렇게 봐. 지민의 물음에도 태형은 으흐흫 콧소리를 내며 웃다가 그를 확 껴안았다.
짐나!
우왓!! 뭐야, 갑자기 왜 이래!
진짜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너 뿐이야.
...갑자기 뭐냐고.
지민은 갑작스런 태형의 말에 쑥쓰러운듯 그를 밀어냈다. 소심한 그 손짓조차 귀여워 태형은 자꾸 웃음이 새어나왔다.
우연히 들었다. 아기를 꽉 안고 들어온 한 남자애가 우리 도하 살려달라며 엉엉 울었다고 했다. 우리 아가 없으면 안 된다고, 우리 아들 이렇게 아픈 적 없었는데 어떡 하냐고, 누가 봐도 서럽게 울었다고 했다. 다행히 가벼운 열병이라서 링거 맞고 가면 된다고 침대에 눕혔을 때도 불안한지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고 했다. 누가 봐도 학생인 남자가 아기를 안고 들어와 서럽게 울어대니, 어쩐지 측은해져 울지 않아도 된다며 위로 차 어깨를 살짝 감싸주기도 했지만 눈치도 못 챈 것 같다고 했다.
아닌 척 해도 지민은 정 많은 아이였다. 탐탁치 않아 했어도 결국 그것이 다 저와 도하를 위한 것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평소에는 그렇게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어도 이미 그를 김도하로, 아들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도하 우리 아들이지?
그를 품 안에 꼭 두며 넌지시 물었다. 그럼 누구 아들이야. 지민이 이온음료를 마시며 대답했다. 그런 대수롭지 않음이 오히려 좋았다. 나 사실 여기 오기 전까지는 기분이 너무 안 좋았는데. 태형의 나직한 말에 지민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태형은 수트 차림이다. 고등학생에게는 다소 어색한, 조금은 과하게 격식을 차린 차림. 오늘 행사가 있었지. 그들만 만나면 며칠간은 기분이 안 좋은 태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웬만하면 말을 안 하고 묵묵히 옆에 있어주며 온기를 나누어 주곤 했다. 지민의 위로 방식이었다.
그래도 지민이가 있으니까 좋다.
... 뭐래. 갑자기 왜 이래, 이상하게.
흐흫. 지민의 말에도 태형은 기분 좋은 웃음만 흘릴 뿐이었다.
잠든 도하를 업고 천천히 걸었다. 지민은 연신 미안한지 축 처진 도하의 손을 꼭 잡았다.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 탈 때도 지민은 도하의 손을 놓지 않았다. 오늘 수고했어. 태형의 말에 지민이 고개를 저었다.
오늘 행사만 없었어도 너한테 왔을 텐데.
내가 애를 잘 보고 있었어야 했는데... 아 너무 미안해서...
지민은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태형은 그의 손을 가져와 꼭 깍지를 꼈다. 미안해 하지 마, 네 탓이 아니야.
집 문을 열자마자 내팽겨 쳐진 봉지 두 개가 보였다. 지민은 순간 당황해 하면서 얼른 들어가 봉지를 수습했다. 그게 뭐야? 태형이 들어오면서 물었다. 지민은 두 봉지를 들고 부엌으로 종종걸음 했다.
그게 장 보고 왔는데 도하 우는 소리를 들어서.
아...
하필 왜 오늘 장 본다고 해서는... 도하랑 같이 갔어야 했는데.
지민아. 네 탓이 아니라니까.
......
근데 뭐 하려고 장을 봤어?
너 거기서 돌아오니까. 저녁 만들어 놓으려고 했지.
지민의 말에 방으로 들어가려던 태형이 우뚝 걸음을 멈추고 부엌에 있는 지민을 바라봤다.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멍해졌다. 그리고 점점 웃음이 새어나왔다. 사람들은 이래서 결혼을 하고 가족을 꾸리는 건가. 물론 지민과 결혼을 한 건 아니지만. 언제나 무슨 일이 있어도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이 이런 느낌인가. 내가 의지할 수 있고 언제나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이런 것인가.
등에 업혀 있는 도하 덕인지 등이 따스했다. 넓고 황량하기만 했던 집이었는데 지금은 도하와 지민의 물건으로 가득 차있다. 도하의 장난감이 널브러져 있고, 소파에는 지민이 읽고 있는 책과 문제집이 놓여 있다. 태형은 집을 쭉 둘러보다가 도하의 방으로 들어갔다. 저와 지민이 사준 것들로 가득한 도하의 방 침대에 조심히 그를 눕혔다.
배고프지. 지금이라도 저녁 해먹을까?
밖에서 들리는 지민의 물음에 태형은 밖으로 나와 부엌에 갔다. 어느새 냉장고 정리를 마친 지민이 식탁에 앉아있었다. 많이 피곤한지 얼굴이 초췌해 보였다. 태형은 천천히 다가와 뒤에서 그를 꽉 안아주었다. 지민이 푸스스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으흐흫. 태형도 따라 웃었다. 지민은 손을 들어 자신을 안고 있는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
치킨 시켜 먹을까?
좋지.
네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 갑자기 왜.
그냥. 도하도 너도 내 옆에 있는게 너무 좋다.
......
계속 있어줄거야?
......
계속 있어줄거지?
너는 무슨...
지민은 그를 잡은 손에 힘을 꽉 주었다. 그것만으로도 괜찮았다.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에는 아직 서툰 지민이, 제 손을 단단히 잡아주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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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하 10개월, 많이 아팠던 날
지민이가 완전히 도하를 받아들인 날
원래 이 글은 지우려고 했는데
그냥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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