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창고

'길/사랑옵다'에 해당되는 글 9건

  1. [랩홉] 사랑옵다 9 7
  2. [랩홉] 사랑옵다 8 2
  3. [랩홉] 사랑옵다 7 4
  4. [랩홉] 사랑옵다 6 2
  5. [랩홉] 사랑옵다 5 2
  6. [랩홉] 사랑옵다 4
  7. [랩홉] 사랑옵다 3
  8. [랩홉] 사랑옵다 2 1
  9. [랩홉] 사랑옵다 3

[랩홉] 사랑옵다 9

길/사랑옵다


선풍기가 탈탈탈 돌아가는 소리만 났다. 호석은 책상에 얼굴을 뉘었다. 볼 한 쪽이 책상에 눌렸다. 책상은 시원하네. 호석은 영양가 없는 생각만 하며 반대쪽에 있는 남준을 바라봤다. 남준은 두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공부에 열중하고 있었다. 마음속으로 무어라 중얼거리는지 입이 뻐끔뻐끔 거린다. 남준은 아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공부할 때 입으로 중얼거리는 버릇이 있었다. 소리는 나지 않지만 입만 뻐끔거리는 모습을 보면 웃길 때가 있다. 덥지도 않나. 호석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의 자리가 더운 자리는 아니었다. 선풍기 바람도 바로 오는 곳이고, 창문 바로 옆자리라 바깥에서 가끔 불어오는 바람도 적당히 선선했다. 그래도, 이제 여름인데

 

교실에는 호석과 남준, 둘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조금 전, 선생님이 순찰 겸 이 교실을 지나다가 남준과 호석을 보고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남준이는 오늘도 남아있었구나, 근데 호석이는 뭐냐? 장난스러운 선생님의 말씀에 호석이 아 쌔애앰... 하고 말꼬리를 늘였다. 선생님은 호탕하게 웃으며 남아서 공부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며 열심히 하고 가라고 말씀하시곤 자리를 떴다.

 

오늘은 모의고사를 쳤기 때문에 공식적인 야자는 없었다. 하지만 남준은 매일 어떤 일이 있어도 교실에 남아서 똑같은 시간까지 공부를 했었고, 이번에도 이례 없이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야자를 했다. 호석은 왠지 가고 싶지 않았다. 그와 자신 둘만이 있는 시간은 거의 손에 꼽을 정도였다. 어떻게 보면 충동 같은 거였고, 또 어떻게 보면 이렇게라도 그와 함께 있고 싶은 알 수 없는 마음이었다. 저녁에 둘 만이 있는 교실에 있는 기분은 어떤 기분일까. 단순한 궁금증이기도 했다. 아니, 이것을 단순하다고 표현할 수 있는 건가. 호석은 얼굴을 들어 고개를 살짝 저었다. 오랫동안 중력에 눌린 볼이 발갛게 물들었지만 이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지금 호석은 제 마음이 갈피를 못 잡고 갈팡질팡 하는 이유가 더 중요했다.

 

고등학생의 흔한 사춘기인가. 이제 슬슬 3학년이라는 압박도 들어오기 시작하고 춤을 출 수 없다는 생각에 마음이 뒤숭숭해서 그런가. 아니면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새로운 문제인건가. 호석은 그마저도 답을 내리기 힘들었다. 전부 다인 것 같기도 했다. 그래, 어쨌든 제 속이 알 수 없이 요란하기만 한 이유 중 하나가 김남준 때문이라는 것은 잘 알겠다. 호석은 다시 슬쩍 고개를 돌려 남준을 바라봤다.

 

눈이 마주쳤다.

 

호석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바로 해 책상 서랍에 짚이는 책을 꺼냈다. 하필 제일 못하는 수학이다. 어쩔 수 있나. 호석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책을 펴고 필통에서 샤프를 꺼내 들었다. 얼굴이 홧홧해졌다. 아니 그냥 친구를 보는 건데 왜 얼굴이 홧홧해져? 호석은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쩐지 그와 눈이 마주쳤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부끄러웠다. 엄지를 이로 물고 눈은 수학책으로 가 있지만 도저히 책 내용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니 그러고 보니 내가 김남준 보려고 했을 때 걔가 이미 나를 보고 있었잖아. 왜 보고 있었지. 호석은 결국 그대로 허리를 숙였다. 이마가 책과 닿았다. 역시 자신은 머리를 굴리는 것에는 흥미가 없었다. 걔도 그냥 봤겠지 뭐가 있겠냐...

 

고개만 돌려 그를 바라봤다.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는지 그의 머리카락이 살짝 휘날렸다. 그는 여전히 열심히 공부 중이었다. 전교 1등은 다르네. 자신이 보던 그의 대부분의 모습은 공부하는 모습이었다. 그렇다고 다른 남자 고딩처럼 안 논다는 뜻은 아니지만, 그는 무언가 목표가 있는 사람처럼 공부에 매달렸다. 원하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는 거겠지. 계속 전교 1등을 할 정도로 공부를 하는 걸 보면 뭔가 대단한 꿈이 있을거야. 판사라던가. 남준은 참 신기한 사람이었다. 자신과 전혀 다른 세상 사람인 것 같으면서도 어떨 때 보면 언제나 옆에 있었던 것처럼 편하기 그지없었다. 이것도 남준의 능력이 아닐까. 우러러 볼 수도 없는 높은 사람들은 자신을 낮추는 법도 알기에.

 

고개를 반대로 돌렸다. 벽이 보였다. 갑자기 현타가 왔다. 나 진짜 왜 이러고 있지. 김남준이 뭐라고 얘 공부하는 걸 또 기다려주는 거냐고. 이때까지 친구들은 많았지만 이런 친구는 처음이었다. 아니 사실 친구인지도 모르겠다. 호석은 생각했다. 모르긴 몰라도 지금 자신이 남준에게 가지고 있는 이 감정은 단순한 우정은 아니었다. 아직 많이 혼란스럽고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건.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또 흠칫 놀라고 말았다. 그는 어느새 책상에 엎드려 얼굴의 반은 팔에 가려진 채 자신을 보고 있었다. 시선이 똑같은 위치에서 맞부딪쳤다. 이번에 호석은 피하지 않았다. 남준도 피하지 않았다. 한참을 바라만 봤다. 남준아. 호석이 작게 그를 불렀다. . 남준이 대답했다

 

 

넌 왜 공부해?

 

 

단순한 궁금증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모든 고등학생들의 순수한 의문이기도 했다. 남준은 한참 말이 없다가 입을 열었다

 

 

하고 싶은 게 없어서.

 

...?

 

하고 싶은 게 없으니까. 나중에 하고 싶은 게 있을 때 발목 잡히지 않으려고.

 

......

 

난 너처럼 확고하게 좋아하는 것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으니까. 공부라도 잘해야지.

 

......

 

네가 부럽다 호석아.

 

 

호석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머리가 멍해졌다. 남준도 호석이 따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시선은 서로를 향했다. 여전히 교실 안은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 밖에 나지 않았다. 장난치지 말라고 이야기 하려 했다. 하지만 진중하기만 한 그의 눈을 보니 그 말도 목구멍으로 쑥 들어가 버렸다. 그는 언제나 진심이었고 장난은 없었다.

 

여태까지 자신을 부러워했던 사람이 있었나. 주위 사람들은 멋있어 보인다고 좋아했다. 여자애들한테도 인기 많겠네. 나도 너처럼 춤추면 여자애들한테 인기 많아지냐? 그런 말을 많이 들었었다. 장난으로 하는 말이라는 것은 잘 알지만, 춤과 인기를 묶어서 이야기 할 때면 기분이 좋지 않았다. 자신은 인기를 얻기 위해서 춤을 춘 것이 아니었고, 춤을 추면서 인기를 바란 것도 아니었으며, 그런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친구들의 입에서 나오는 춤과 인기는 호석에게 부담일 뿐이었다.

 

 

춤이 좋아서 하는 거지?

 

 

남준이 물었다. 호석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너 춤추는 거 처음 봤을 때 그렇게 생각했어. 정말 좋아하는 걸 하면 저런 표정을 짓는구나. 저 애는 정말 행복해 하는구나. , 정말 부럽다.

 

......

 

다른 애들은 다들 나를 부럽다고 하지만 대상이 잘못됐어. 나는 정말 빈껍데기일 뿐인걸.

 

... 난 정말 네가 멋있다고 생각해. 진심이야.

 

공부를 잘해서?

 

......

 

......

 

나는... 그냥...

 

......

 

너 자체가 멋있다고 생각해. 이것도 진심이야.

 

?

 

 

남준의 물음에 호석은 그 답을 찾으려는 듯 입을 벙긋거렸지만 결국 두 입술이 꾹 맞물렸다. 왜 멋있을까. 이유를 모르겠고, 굳이 그 이유를 찾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 이유가 그렇게 중요한가 싶기도 했다. 처음에는 그의 명석함에 눈이 간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무렴 상관이 없었다. 김남준이 설사 하루하루를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놀아도, 공부를 잘 하지 못해도, 자신은 여전히 김남준을 멋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알 수 없는 끌림이었다. 도대체가 아무리 머리를 쥐어 짜내 보아도 왜 그에게 눈길이 가고 계속 끌리는지 잘 모르겠지만. 제 온 신경이 그에게 정처 없이 끌려가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이유가 있어야해?

 

 

한참 뒤에 호석이 되물었다. 이제는 남준이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괜히 손에 땀이 차는 기분에 호석은 대충 바지에 제 손을 슥슥 문질렀다. 한참 후, 남준이 입을 열었다.

 

 

아니.

 

......

 

이유가 없었으면 해.

 

 

그는 다시 엎드렸다. 살짝 웃는 그의 볼에 보조개가 움푹 들어갔다. 아직 한 번도 해보지 않았지만 움푹 들어간 그의 볼우물을 손가락으로 콕콕 찔러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없었다.

 

호석도 남준 따라 다시 엎드렸다. 둘 사이에 잠시 말이 없었다. 교실은 여전히 낡은 선풍기가 돌아가는 소리 밖에 나지 않았다. 그렇게 좁고 시끄럽다고 생각했던 교실이, 둘만 있으니 한적하기만 했다. 제일 뒤쪽 끝과 끝자리에서 이렇게 마주 볼 수 있는 것도 지금 이 시간밖에 없을 것이다.

 

 

다음에 짝 정할 때.

 

 

남준이 입을 열었다. 둘은 여전히 엎드린 채, 180도 돌아간 세상에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 옆자리가 너였으면 좋겠어.

 

 

호석은 순간 헙 숨을 들이켰다. 별 거 아닌 말이다. 학기 초부터 자신이 그와 친해지고 싶어 했던 것처럼, 그 역시 자신과 친해지고 싶어 했다. 이때까지 4번 정도 짝이 바뀌면서 그와는 짝 해본 적이 없으니까 이번에는 하고 싶다. 단순히 그것이었다. 그런데 왜 첫사랑한테 고백 받은 사람처럼 설레느냔 말이다. 호석은 이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김남준을 좋아하고 있다.

 

 

 

 

 

오늘따라 유난히 밤하늘이 깨끗했다. 평소에는 잘 보이지 않던 별이 오늘은 총총총 박혀 있는 것이 보였다. 아직 완연한 여름은 아니라 밤공기는 시원했다. 호석은 살짝 폰을 켜서 시간을 봤다. 10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오늘 모의고사 어땠어? 저보다 조금 앞서 걷고 있던 남준의 말에, 호석은 빠른 걸음으로 남준의 옆에 붙었다.

 

 

모의고사?

 

.

 

뭘 그런 걸 물어보고 그러냐. 그냥 보통이지, .

 

다른 애들이 그러던데. 너 공부 잘 한다고.

 

그냥 그래.

 

이런 거 물어보면 좀 실례이려나.

 

?

 

나중에. 대학교 갈 때, 어디로 갈 거야?

 

가고 싶은 곳이 있긴 해.

 

어디?

 

... 비밀이야.

 

 

? 말해줘. 남준이 고개를 돌려 호석을 바라봤다. 그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호석은 애써 고개를 저 멀리 어디에 두었다. 말하면 너 웃을 것 같아. 호석의 말에 남준이 세게 고개를 저었다. 내가 왜 웃어, 네가 가고 싶어 하는 덴데.

 

 

전교 1등 앞에서 내가 어떻게 말해.

 

그게 다 무슨 상관이야.

 

아 그냥 창피하니까 말 안하고 싶어.

 

......

 

너는?

 

나도 비밀이야.

 

그래도 제일 높은 대학교 가겠지.

 

 

남준은 말이 없었다. 호석은 언젠가 다가올 고등학교 졸업과 대학 입학을 생각했다. 중학교 졸업 했을 때만 해도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어차피 대부분은 다 자신과 같은 고등학교였고, 생활만 조금 달라질 뿐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고등학교는 3학년으로 올라가고, 대학 입시를 시작하면 많은 것이 달라지겠지. 그리고 고등학교 졸업하면 더 이상 보기 힘든 친구들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어쩐지 조금 우울해졌다. 먼 듯하면서도 멀지 않은 시간이었다.

 

 

남준아, 나중에 졸업하고 대학교 가서도 친하게 지내자.

 

당연하지.

 

너랑은 오래도록 알고 싶다.

 

그거 영광인데.

 

 

남준이 푸스스 웃으며 대답했다. 나 레알 진지함, 이런 말 하는 거 네가 처음이라고. 호석은 어쩐지 장난으로 받아들인 듯한 남준의 반응에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정말 영광이야. 남준은 영광이라는 단어에 힘주어 말했다.

 

 

나 사실 여태까지 이렇다 할 친구가 없어서.

 

진짜? 인기 많았을 것 같은데.

 

글쎄. 내가 친구로 지내기에는 되게 재미없긴 하지.

 

네가 어때서.

 

중학교 때 재수 없다는 소리도 많이 듣고. 애가 같이 놀지도 않고 맨날 책상에 앉아서 공부만 하니까.

 

......

 

정확히 말하면 놀 줄 몰랐지만.

 

노는게 별거냐.

 

가르쳐줘. 같이 놀아줘.

 

 

남준의 말에 호석이 푸핫 웃었다. 노는 건 가르쳐 주는 대로 열심히 하는 게 아니지, 제가 뭘 하든 정말 재밌게 즐긴다면 그게 노는 거야. 남준도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아파트 입구 앞에 멈추었다. 남준의 집은 이 아파트 단지 너머에 있는 주택단지에 있었기 때문에 더 가야했다. 그럼 내일 봐. 가볍게 인사를 하고 아파트에 들어가던 호석을 불러 세운 건 남준이었다.

 

 

호석아.

 

?

 

난 너랑 같은 대학교 가고 싶어.

 

......

 

아 그, 그러니까 이게 너보고 공부 하라는 소리가 아니라...

 

 

갑자기 당황해 쩔쩔매는 남준이 퍽 웃겨 호석은 피식 웃었다. 평소답지 않게 꽤나 당황하는 모습이 새로웠다. 그만큼 너랑 오래 보고 싶다는 소리야. 남준의 말에 호석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공부하자.

 

그래.

 

내일봐.

 

.

 

 

호석은 아파트에 들어가려다 또 할 말이 생각난 듯 다시 뒤돌았다. 남준은 여전히 손을 흔들며 서 있었다. 너는? 호석의 물음에 남준은 고개만 갸웃했다.

 

 

대학 같이 가고 싶고, 같이 공부 하자는 거. 다른 친구들한테도 그런 말 한 적 있어?

 

아니. 나도 이런 말 한 거 네가 처음이야.

 

좋네.

 

 

호석이 씨익 웃었다. 그의 눈이 유려하게 휘었다. 남준은 작게 흔들던 손을 우뚝 멈추었다. 그의 미소는 언제나 자신의 행동을 멈추게 만들었다. 어쩌면 숨까지도. 내일보자. 호석이 가볍게 말하며 들어갔다. 남준은 한동안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

 

 

 

 

 

 

 

 

 

 

아마 난 처음 너를 만났을 때부터 너한테 반했는지도 몰라. 뜬금없는 호석의 말에 남준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그건 왜? 남준의 물음에 호석은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꿈에 나왔어, 고등학생 때의 네가. 남준도 덩달아 비장한 표정과 비장한 어투로 말했다. 고등학생 때 나를 다시 본 느낌은?

 

 

어떤 느낌이긴. 확실히 지금보다 더 파릇파릇하고 풋풋하고 귀엽고 그렇지 뭐.

 

?

 

지금은 가끔 네가 정말 아저씨 같다는 생각이 든다니까. 능글능글 야한 짓도 좋아하고.

 

...

 

아마 넌 모르겠지만 고등학생 때의 너 나름 귀여웠어. 지금 생각해보니까 너 나 좋아하는 거 티 엄청 냈더라고. 그 때의 나도 참 멍청했지. 어떻게 그걸 몰라 볼 수가 있지?

 

그리고 내가 너 먼저 좋아했어.

 

2학년 때 너 처음 만나자마자 좋아했다니까?

 

그래. 난 너 처음 봤을 때, 그 때부터 반했었어.

 

... 2학년 때 아니야?

 

내 사랑은 너보다 길다, 인마.

 

 

남준이 피식 웃으며 하는 말에 호석은 멍해졌다. 언제? 호석의 물음에도 남준은 묵묵히 밥만 먹을 뿐 말해주지 않았다.

 

 

아 언제부터냐고.

 

그게 중요해?

 

궁금해.

 

나도 너 첫눈에 반했어. 솔직히 첫눈에 반한다느니 그런 거 다 거짓말이고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그런 게 있긴 하더라. 심지어 내가 남자한테 그렇게 반할 줄은 생각도 못했지.

 

그래서 언제부터인데.

 

넌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1학년 때, 너 무용실에서 춤 췄을 때.

 

그걸 봤어?

 

우리 눈도 마주쳤는데.

 

......

 

네가 웃어줬어.

 

 

젠장, 기억 안나. 호석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1학년 때 남준이에 대한 인상이 어땠더라. 같은 반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냥 전교 1등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심지어 얼굴도 몰랐는데 만난 적 있었다니. 분명 지나가는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했었을 것이다. ... 호석은 어지간히도 아쉬운 듯 입꼬리를 축 내렸다. 어쨌든 우리 지금 이렇게 만나고 있잖아. 남준의 말에도 호석의 기분은 풀릴 줄 몰랐다.

 

 

뭔가... 내가 그 때 너를 가볍게 넘기지 않았다면 우린 더 빨리 만날 수 있었을까.

 

...

 

더 빨리 사귀었을 수도 있었겠지?

 

그건 아니.

 

?

 

난 겁쟁이었으니까.

 

......

 

졸업식 날 고백했던 것도, 난 겁쟁이니까 고백했다가 차여도 다시 안볼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랬던 거야. 다행히 너를 다시는 못 볼일 안 생겼지만.

 

?! 같은 대학교까지 가자고 했으면서 어떻게!

 

과가 다르잖아. 정말 마음 먹고 안 볼 생각이었어. 간절한 마지막이었다고. 다시 말하지만 난 그 때 정말 공부 밖에 모르는 찌질이었고 겁쟁이었어. 알잖아.

 

참 나. 그래도 그렇지, 너무 한 거 아니야? 내가 만약 정말 거절했으면 진짜 다시는 안 볼 거였단 말이잖아. 나 지금 완전 소름 돋는데.

 

그런 생각으로 고백을 했긴 했지. 그래도 아마 나중에는 또 좋다고 너를 따라다녔겠지만. 어쨌든 처음엔 그랬어.

 

......

 

미안해. 그래도 친구한테 고백한다는게 나로써는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어. 그러고 싶진 않았는데 계속 최악의 결과만 생각이 나. 말했잖아, 나 정말 겁 많다고.

 

 

그러니까 그렇게 화내지마, 난 여전히 너한테 겁쟁이야. 우물쭈물 말하는 남준의 표정은 어찌할 바 몰라 쩔쩔 매는 표정이었다. 호석은 장난으로 축 내리던 입꼬리를 스윽 올렸다. 앞으로 마지막이라느니, 평생 안 볼 거라느니, 그런 말 하면 진짜 죽는다. 장난기 어린 호석의 말투에 진지했던 남준은 그제야 안도한 듯 미소를 흘렸다

 

 

 

 

 

너 면도해야겠다. 호석의 말에 그의 허벅지에 누워 책을 보고 있던 남준이 힐끗 호석을 올려다봤다. 호석은 그의 턱을 살살 쓸었다. 까슬까슬한 수염이 느껴졌다. 지금? 남준이 의문 가득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게 퍽 귀여워 호석은 푸스스 웃었다. 남준의 머리를 옆쪽으로 치우고 자리에서 일어난 호석이 안방으로 쏙 들어갔다. 멍하니 호석의 뒷모습만 보던 남준도 후다닥 책을 소파에 두고 일어나 호석의 뒤를 따랐다.

 

남준의 면도는 가끔 호석이 해주었다. 평소에는 남준이가 하지만 주말 같이 여유로운 날에는 거의 호석이 해주는 편이다. 남준이 면도를 하면 얼굴에 작은 생채기가 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호석은 되도록이면 자신이 하고 싶어 했다. 다행인지 뭔지 남준은 수염이 그렇게 빨리 자는 편이 아니었다.

 

우리 대형 멍뭉이 또 털 깎아줘야지. 혼잣말 하듯 중얼거리며 면도 준비를 하는 호석을 보며, 남준이 피식 웃었다. 왔으면 이리 와서 앉아. 호석이 욕조를 탁탁 두드리자 남준이 욕조에 걸터앉았다

 

선반에서 세이빙 폼과 면도기를 꺼내 뒤돌아봤다. 언제나 살짝 위를 향했던 시선이 지금은 아래로 향한다. 호석은 비싯비싯 새어나오는 웃음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가만히 호석을 올려다보던 남준은 웃음기 가득한 호석의 얼굴에, 따라 웃었다. 왜 웃어. 남준이 물었다.

 

 

이제야 내가 너보다 키가 커서.

 

어쩌면 유일한 시간이기도 하지.

 

진짜 몇 센치 차이 안 나는데 키로 보면 은근 차이가 나더라. 내가 고개를 살짝 들 정도니까. , 지금은 내가 훨씬훨씬 더 크지만.

 

나 일어난다?

 

위에서 나를 내려 볼 때 이런 느낌이었어?

 

 

호석이 남준의 볼을 살짝 감싸 잡으며 물었다. 어떤 느낌인데? 남준이 나직이 되물었다. ... 호석이 엄지로 그의 볼을 살살 쓸었다.

 

 

네 눈이 오롯이 나를 향해 있고. 네 눈은 빛을 받아서 반짝거리고반짝거리는 눈 속에는 내가 있고. 나는 네 눈빛에 설레고.

 

 

남준은 호석의 손을 덮어 잡았다. 그를 올려다봤다. 지그시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이 좋아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나를 올려다 볼 때 이런 느낌이었어? 남준이 물었다. 호석이 푸스스 웃었다. 무슨 느낌인데?

 

 

네 시선이 유성우처럼 나한테 쏟아지는 느낌.

 

......

 

그만큼 나한테 집중하고 있구나, 하는 느낌.

 

그래?

 

그래서 좋아 정말 이 달달한 눈빛마저 내 것이구나 하는 느낌이라서. , 사랑 받는 게 느껴져서.

 

내가 할 소리.

 

 

호석은 고개를 숙여 그의 입술을 살짝 머금었다. 남준은 한 손을 들어 그의 목을 감싸고 더 깊숙이 그를 물었다. 너 빨리 면도해야겠다, 따가워. 호석이 입술을 떼면서 하는 말에 남준이 푸핫 웃음을 터뜨렸다. 호석은 옆에 두었던 세이빙 폼을 남준의 턱에 바르기 시작했다. 예쁘게 해주세요. 남준의 말에 호석이 싱긋 웃었다. 손님이 원하시는 대로.

 

호석은 자신과는 다르게 섬세하다. 길쭉길쭉하고 보드라운 손가락이 제 볼에 닿고, 야무지게 입을 다문 채 진지한 눈빛으로 천천히 면도를 하는 모습을 보며, 남준은 그렇게 생각했다. 호석의 얼굴을 가장 가까이서 보는 몇 안 되는 시간. 남준은 이 시간이 좋았다. 예쁘게 자리 잡은 속 쌍꺼풀과 쭉 뻗은 속눈썹, 그 아래 빛을 머금고 반짝거리는 흑색 눈동자. 호석의 어떤 점이든 다 예쁘고 좋았지만 굳이 그 중에서 꼭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수 시간의 고민 끝에 눈을 고를 것이다. 자신을 바라보고, 웃으며 휘어지는 눈. , 바라보는 것이 좋아서 눈이 좋은 건가. 뭐가 됐든 호석이라서 좋았다.

 

한창 집중하다 눈이 마주쳤다. 호석은 생긋 웃어주곤 다시 면도에 집중했다. 심장이 아파. 저 웃음은 반칙이다.

 

호석은 잠시 후 허리를 폈다. 다 됐어, 이제 씻어. 호석의 말에 남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수를 하고 거울을 봤다. 깔끔한 모습이 만족스러운지 남준의 얼굴에 연하게 미소가 어렸다.

 

모든 것이 완벽해 보이는 팀장님이 사실은 면도도 제대로 못하는 허당인 걸 알면 사원이 어떤 반응일까. 호석이 화장실 문틀에 기대어 거울 속 남준을 바라보며 말했다. 남준은 시선만 살짝 돌려 거울 속 호석을 바라봤다. 호석은 장난기 어린 미소를 띠고 있었다. 남준 역시 피식 웃으며 뒤돌아 진짜 호석을 바라봤다.

 

 

아니지. 면도도 못해서 남이 해주는 게 아니라. 면도도 해주는 멋진 애인이 있어서 부럽다지.

 

나 참.

 

모든 걸 긍정적으로 생각하셔야죠.

 

어쨌든 또 당분간 안해도 되겠지. 네가 수염이 엄청 늦게 자라는 편이니까.

 

뽀뽀해줘.

 

뭐야, 뜬금없이.

 

아까 너 따갑다고 빨리 끝냈잖아.

 

그걸 또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냐.

 

마음에 담아 뒀다기 보다는 그냥 아쉬워서.

 

 

호석이 손을 까딱였다. 남준이 다가가 바로 그의 목을 손으로 감싸고 입을 맞췄다.

 

 

 

 

 

 

 

 

 

 

 

 

 

 

 

 

 

 

 

 

---

별 거 없는 내용인데

매번 랩홉이들 보러와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 > 사랑옵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랩홉] 사랑옵다 8  (2) 2017.07.15
[랩홉] 사랑옵다 7  (4) 2017.05.25
[랩홉] 사랑옵다 6  (2) 2017.04.17
[랩홉] 사랑옵다 5  (2) 2017.04.13
[랩홉] 사랑옵다 4  (0) 2017.04.08

[랩홉] 사랑옵다 8

길/사랑옵다



호석은 항상 아침에 약했다. 특히 주말만 되면 그렇게 침대 밖에 나오기를 싫어했다. 평일이라면 어떻게든 어르고 달래서 깨웠을 테지만 주말이라 굳이 그러지 않았다. 남준은 옆으로 누워 자고 있는 호석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제 자고 있는 모습을 이렇게 오랫동안 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면 아마 뭘 자고 있는 모습도 보냐면서 한 소리 하겠지. 남준은 어쩐지 호석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작게 키득거렸다.

 

가지런히 내려앉은 속눈썹도, 이쁘게 뻗은 콧대도, 도톰한 입술도. 그의 얼굴을 찬찬히 보다가 간질간질한 느낌에 남준은 결국 호석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으응... 앓는 소리를 내며 작게 뒤척이는 호석에, 남준은 후다닥 고개를 받치고 있던 손을 내리고 누워 자는 척 했다. 별 다른 미동이 없자 슬쩍 고개를 들어 호석을 본 남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도둑뽀뽀는 들키고 싶지 않다. 깊게도 잔다. 남준은 작게 중얼 거리며 입가를 쿡 찔렀다. 호석이의 보조개가 들어가는 자리였다. 너는 여기도 예쁘면 어쩌자는 거냐. 아침이라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하던 남준은 이내 그를 폭 껴안았다. 호석의 온기가 그대로 남준에게 전해졌다. 따뜻하다.

 

뭐야... 호석이 작게 중얼거리며 남준의 품에 파고들었다. 남준은 호석의 머리에 제 턱을 댔다. 깼어? 남준의 물음에 호석은 작게 웃으며 잠이 덕지덕지 묻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그렇게 만지작거리는데 어떻게 안 깨. 그의 말에 어쩐지 멋쩍어져 남준은 턱만 부빗 거렸다. 더 잘 거야? 남준이 작게 속삭이듯 물었다. 으음... 고민하는 듯 앓는 소리를 내던 호석이 이내 고개를 저었다. 자는 건 아닌데, 그냥 누워 있을래.

 

 

요즘 따라 너 되게...

 

되게 뭐.

 

움직이기 싫어하는 것 같다.

 

진짜? 겨울이 다 와서 그런가.

 

겨울이랑 무슨 상관이야.

 

겨울 되면 이불 속이 너무 따뜻해서 침대 밖에 나오기 싫잖아.

 

 

흐흫. 호석은 낮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래, 너 따뜻한 거 좋아하지. 남준은 그를 더 꼭 안으며 말했다. 너 아까 나한테 뽀뽀 했지. 뜬금없는 호석의 물음에 남준은 턱으로 다시 그의 머리를 부빗 거렸다. 몰라.

 

 

안 했어? 뭔가 입술에 닿는 느낌이 들었는데.

 

......

 

꿈인가.

 

이렇게?

 

 

남준이 재빨리 그의 입술에 살짝 입 맞추었다. , 맞네! 호석이 몸을 바르작거렸다. 남준은 작게 웃었다. 호석의 반응은 언제나 재밌다. 남준은 호석의 코 끝을 콕콕 건들며 장난 쳤다. 앗 여기 우물이. 하고 속삭이며 그의 입가를 콕콕 건들기도 했다. 그러면 호석은 힘을 주어 볼우물을 만들었다. 슬슬 일어나야지. 남준의 말에 호석은 꾸물거리다 결국 이불을 젖히고 침대 밖을 나왔다. 오늘은 뭐 할까. 남준의 물음에 호석은 뒤돌아 침대에 상체만 일으켜 앉아있는 남준을 돌아봤다. 오늘은 대청소 할 거야.

 

 

 

 

 

그들의 집은 매우 넓었다. 둘이서 살기에는 적적하게 느껴질 정도로 넓었다. 이렇게 넓은 집을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능력 있는 애인을 둔 덕에 생긴 집이었다. , 사실은 남준이 집안이 능력이 있는 것이지만. 원래는 사람을 불러서 청소를 하지만 한 달에 한 번 이상은 꼭 직접 청소를 하고는 했다. 오늘은 그 대청소 날이다.

 

호석은 손으로 턱을 괴고 생각했다. 일단 오늘은 날 좋으니까 이불 빨래를 하고, 옷 방 정리도 좀 할까. 서재 정리도 좀 해야 할 것 같고. 거실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호석은 제 허리께를 감싸오는 손길에 움찔 몸을 떨었다. 간지러워. 호석의 말에 남준이 그의 허리를 살짝 간질였다.

 

 

오늘은 뭐 청소 할 거야?

 

일단 이불빨래부터 하자.

 

... 그냥 세탁기로 하면 안돼?

 

안돼. 이불 빨래는 직접 해야 마음이 편하단 말이야.

 

 

얼른 이불이랑 커버랑 아, 베개 커버도 다 벗겨와. 호석의 말에 남준은 느릿느릿 허리를 감고 있던 손을 빼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호석은 화장실로 들어가 욕조에 물을 받기 시작했다. 바지를 야무지게 접어 올리고 욕조에 걸터앉아 남준이 오기를 기다렸다.

 

, 여기. 남준이 두 손 한가득 들고 왔다. 호석은 이불을 받아들어 바로 욕조 안에 넣었다. 나 이불 빨고 있을 테니까 너는 옷 방에서 옷 정리 좀 하고 있을래? 호석의 말에 남준은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팔짱을 낀 채 문에 삐딱하게 기대어 섰다. 오늘 데이트 하고 싶었는데. 남준의 말에 욕조 안에 들어간 호석이 힐끔 남준을 바라봤다.

 

 

날씨도 좋은데 데이트 하러 가지.

 

날씨가 좋아서 이불 빨래하고 싶었단 말이야. 요즘 바빠서 청소도 못했고.

 

이불빨래만 하면 안돼?

옷 너무 많아서 정리 좀 해야하지 않을까? 특히나 옷 방이랑 서재는 사람들한테 맡길 수도 없는데.

 

 

또 입술 나왔네. 호석은 뚱한 표정의 남준을 보며 생각했다. 이렇게 노는 걸 좋아하면서 회사는 어떻게 다닌대. 호석은 작게 혀를 찼다. 어쨌든 난 오늘만큼은 양보 안 할거야. 호석의 말에 결국 남준이 미적미적 움직이기 시작했다. 호석은 세제를 풀어놓은 물에 조심히 발을 넣었다. 이불을 자근자근 밟을 때마다 늘어나는 거품들이 발을 몽글몽글 간질였다. 발가락 사이사이, 발목을 휘감는 이 몽글몽글한 부드러움이 기분 좋다. 남준이는 세제를 어떻게 믿고 그렇게 발을 담구냐고 타박하지만 확실히 이불 빨래는 직접 하는 게 마음 편하다.

 

음흠흠. 작게 허밍을 하며 천천히 밟던 호석은 어딘가 느껴지는 시선에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들었다가 거울을 통해 마주친 시선에 흠칫 놀랐다. 언제 왔는지 남준이 아까처럼 팔짱을 끼고 문에 기대 선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깜짝아... 호석은 작게 중얼거리면서 제 가슴을 슥 쓸어내렸다. 뭐야, 나 보고 놀란 거야? 남준의 말에 호석이 어색하게 웃었다.

 

 

나도 도울까?

 

아니 괜찮아. 이불 빨래야 뭐.

 

아니, 나 심심해서.

 

내가 하라는 거 다했어?

 

... 혼자서 하면 심심하잖아. 난 같이 하고 싶단 말이야.

 

 

투정어린 목소리에 호석은 결국 들어오라 손짓했다. 금세 해맑은 표정으로 화장실에 들어온 남준은 천천히 욕조 안에 발을 들였다. 몽실몽실한 거품이 발을 휘감았다. 생각보다 기분 좋은 느낌이었다. 미끄러져 넘어지면 안 돼. 호석의 말에 남준이 어이없다는 듯 혀를 찼다. 내가 그렇게 허술해 보여? 호석은 아무 말도 하진 않았다.

 

조용한 화장실에 물이 찰랑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가끔 호석의 발이 스칠 때마다 남준이 작게 웃었다. 왜 자꾸 웃어. 호석의 말에 아예 눈이 휘어진다. 아니 막 간질간질 거리네. 남준의 말에 호석이 그를 쳐다봤다. 호석아 손 잡아줘. 남준이 두 손을 내밀며 하는 말에 호석은 영문도 모른 채 두 손을 잡아주었다.  으흐흫. 아까와는 다르게 기분이 좋은지 자꾸 웃음을 흘리는 남준을 호석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너 좀 이상해. 호석이 결국 한마디 뱉었다.

 

 

?

아 뭔가. 자꾸 실실거리고. 뭐 청소 하면서 재밌는 거 봤어?

 

아니. 그건 아니고.

 

그럼 뭔데?

 

아니 그냥. 이러니까 뭔가.

 

뭔가.

 

뭔가 음... 신혼부부 같아.

 

 

참 나. 호석은 생각지도 못한 말에 아닌 척 하면서도 부끄러운지 귀 끝이 붉어졌다. 갑자기 남준의 목걸이가 눈에 띄었다. 내가 그 때 프로포즈 했으니까 신혼부부지. 호석이 확 고개를 들며 하는 말에 남준은 아예 소리 내어 웃었다. 신혼부부니까 더 달달하게 해줘. 남준이 허리를 살짝 숙여 시선을 맞추었다. 갑자기 가까워진 거리에 호석이 놀라며 고개를 살짝 뒤로 물렀다. 뭐야 갑자기, 당황스럽게. 작게 떨리는 목소리를 캐치한 남준이 볼을 들이밀었다. 빨리, 신혼부부처럼. 호석은 새초롬한 눈빛으로 남준을 바라봤다. 빨리. 잡은 두 손을 살짝 흔들면서 재촉하는 남준에, 호석이 결국 쪽 뽀뽀를 해주었다. 이쪽도.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린 남준에 그 쪽도 입을 맞추었다. 남준은 고개를 돌려 호석의 입술에 살짝 키스했다. 답례. 호석은 작게 속삭이듯 말하는 남준에못 말린다는 듯 피식 웃어버렸다.

 

 

목걸이, 잘 하고 다니네.

 

당연하지. 프로포즈 받은 목걸인데 맨날 하고 다녀야지. 너도 반지 맨날 하지?

 

나야 맨날 하고 다니지, 당연히.

 

아 맞아. 나 이거 회사 사람들이한테도 자랑했어. 내 애인이 해준 거라고.

 

 

약간 업 된 목소리로 회사 사람들 반응에 대해 막 말하는 남준의 표정이 한껏 상기되어 있었다. 호석은 그를 말없이 보다가 충동적으로 그를 확 껴안았다. 남준은 그 반동으로 뒤로 넘어갈 뻔 한 것을 간신히 중심 잡고 호석을 감싸 안았다. 아 깜짝아, 네 애인 머리 부딪칠 뻔 했다. 남준의 말에 호석은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채 키득거렸다. 아 호석이는 이렇게 안고 빨래하고 싶었구나. 남준은 장난스럽게 말하며 호석을 안은 채 이불을 밟기 시작했다. 자세 때문에 불편하기 그지없지만 떨어지지는 않았다. 너한테 막 찝쩍거리는 사람 없지? 호석의 물음에 남준이 그의 이마에 아프지 않게 딱밤을 때렸다. 아야! 호석은 놀라 이마를 문질렀다.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마. 남준의 말에 호석은 금방 시무룩해졌다. 남준은 항상 그런 반응이었다. 어쩔 때는 그런 반응이 더 서운할 때도 있었다. 물론 정말로 아무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옛날에 본 게 있으니 그냥 넘어가는 것도 찝찝한 거다. 너 자신을 알라. 진지한 표정을 진지하게 그 말을 뱉으니 남준이 피식 웃었다. 귀엽게 뭐하냐. 호석은 그런 남준의 반응이 얄미웠다. 내 말 허투루 듣지 말라고!

 

 

허투로 안 들어.

 

너 막 이상하게 입고 가. 막 멋있게 입지 말라고.

 

뭐야, 언제는 그렇게 입으라더니. 어제는 네가 입혀줬다.

 

아니야. 아저씨처럼 입어. 머리도 막 넘기지 마. 이제 너도 아저씨니까 아저씨처럼 입어.

 

그게 뭐야.

 

남자 눈에도 잘생겨 보이는데 여자 눈에는 오죽하겠어?

 

... 호석아 솔직히 너 콩깍지 아직 안 빠진 것 같다. 나야 좋지만.

 

 

나 개진지해 진짜야. 호석이 단호한 목소리로 뱉는 말에결국 남준이 푸핫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로 나한테 다가오는 사람도 없었지만 노력 할게. 남준의 입에서 기어코 그렇겠다는 답을 얻어내고 나서야 흡족한 미소를 짓는 호석이다. 뭐 좋은 게 좋은 거지. 남준도 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호석은 가끔 뭐가 그렇게 불안한지 어리광을 부리고는 했다. 누가 누구한테 할 소린지 원. 남준은 아직도 웬만하면 카페 자주 나가지 말라고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오늘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세탁기에 이불을 집어넣고 탈수로 돌리며 묻는 호석에, 서재에 있던 남준이 나왔다. 남준의 손에는 책 한권이 들려 있었다. 저녁? 남준의 물음에 베란다에서 나오던 호석이 응 하고 대답했다.

 

 

... 딱히 생각나는 게 없는데.

 

근데 그 책은 왜 들고 있는 거야?

 

, 이거. 서재 정리 하는데 추억 돋는 물건이라.

 

뭔데?

 

 

호석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가오자 남준이 입술을 불퉁하게 내밀었다. 뭔데 라니. 남준의 말에 호석은 아차 싶었다. 이거, 뭔진 몰라도 겁나게 중요한 거다. 슬쩍 책을 보니 제목이 없다. 그냥 하얀 책이고 앞에 일러스트가 그려져 있는 듯 했다. 제 눈치를 힐끔힐끔 보면서도 책을 유심히 보는 호석을 보니 남준은 쯧 작게 혀를 차며 호석에게 책을 내밀었다.

 

 

이거. 선물이야.

 

?

 

나 누군가를 위해서 선물을 골라본 적이 없어서 너에게 맞는 선물을 도저히 찾을 수가 없어서.

 

......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시 구절을 적은거야. 좋아할지는 모르겠지만.

 

......

 

너 생각하면서 쓴 건데. , 그러니까...

 

......

 

너도 좋아했으면 좋겠다.

 

 

그 때 그 날이 머릿속을 스쳤다. 호석은 절로 벌어지는 입을 두 손으로 막았다. 너무 놀라 눈동자도 커졌다. 내가 왜 이 날을 까먹고 있었지. 정말 멍청한 게 분명하다. 호석은 제 머리를 콩콩 때렸다. 그가 천천히 말을 잇자, 그 때의 장면이 바로 눈앞에 펼쳐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추운 겨울날, 둘 다 목도리를 칭칭 둘러매고, 코드를 입고, 눈이 고요히 내리는 어느 겨울 날, 그러니까 제 생일. 남준은 그 때도 똑같이 저런 말을 하면서 저 책을 건넸었다. 제 생에 이렇게 예쁘고 정성스러운 선물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남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호석은 그 선물이 정말 좋았고 의미 있는 선물이었다. 한 장 한 장 넘기기 아까워 몇 번이나 곱씹고, 직접 썼다는 그 글씨를 손으로 살살 만져보기도 하면서 새벽을 지새웠던 적도 많았다. 그 때는 아직 친구였을 때였는데 호석은 고백 받은 수줍은 고등학생처럼 굴었었다. 나중에 사귀고 나서 훨씬 뒤에 남준이 간접적으로나마 제 본 마음을 담아 보낸 선물이라고 하더라. 어쨌든 호석에게는 그 책이 너무 소중했다. 자신이 그렇게 느끼는 만큼 남준도 이 책이 굉장히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물건일 것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뻗치자 미치도록 미안해지기 시작했다. 미안한 마음이 너무 커서 표정관리도 안 된다. 울듯 말듯 일그러진 호석의 표정을 보자 남준이 피식 웃었다. 그렇게 웃는 모습마저 제 애인은 다정해서 호석은 더 미안해졌다. 미안하면 키스해줘. 남준의 말이 끝나자마자 호석은 그의 목에 팔을 둘러 확 끌어안고 바로 입을 맞추었다. 남준이 자연스레 그의 허리에 한 손을 감았다. 가볍게 입 안을 한 번 훑은 호석이 천천히 입을 떼더니 바로 입과 목덜미에 쪽쪽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여러 번 맞추었다. 난데없는 뽀뽀 폭격에 남준은 아예 두 손으로 호석의 허리를 꽉 감싸 안으며 웃음을 흘렸다. 입 안에 머무르는 웃음소리는 그의 목소리처럼 낮으면서도 다정했고, 진중했다.

 

 

솔직히 너 기억 못하고 있는 것 같아서 서운할 뻔.

 

미안해. 내가 이걸 어떻게 잊어. 내가 이걸 어떻게 대했는데.

 

어떻게 대했는데?

 

너한테 받고 나서 침대에 누워서 몇 번이나 곱씹어 보고. 손가락 끝으로 천천히 글씨도 만져보고. 네 글씨체도 유심히 보고.

 

......

 

좋아서 끌어안고 막 침대도 구르고. 특히나 마음에 드는 구절 형광펜으로 줄긋고. 손으로 꾹꾹 눌러썼는지 부분 부분 볼펜 잉크 많이 나온 거 보면서 아 정말 마음 담아서 썼나보다 그런 생각도 하고.

 

내 마음 다 담아서 쓰긴 했지.

 

내가 말 안 해줬었구나.

 

 

 

남준은 호석을 안은 채로 책을 폈다. 호석의 어깨에 얼굴을 얹은 채 책장을 스르르 넘겼다. 한 바닥에 시 한 구절씩. 잘 쓰지도 못하는 글씨 예쁘게 적어보겠다고 천천히 꾹꾹 눌러쓴 제 글씨들을 보니 제 마음도 괜히 몽글몽글해진다. 되게 풋풋했네. 남준의 말에 호석이 푸스스 웃으며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남자 고등학생이 제 친구한테 줄 선물 치고는 좀 과하긴 했지.

 

 

지금 보니까 시도 다 사랑 고백 시네. 너 처음에 받아 보고 좀 당황했겠다.

 

뭐래. 겁나 좋아했다니까.

 

......

 

처음에 깜짝 놀랐어. 절절한 사랑 고백만 잔뜩 써져 있어서 내 마음 알아차린 줄 알았다니까. 옛날에 말했었잖아. 네가 나를 좋아했던 그 기간만큼 나도 널 좋아했었어. 정말로.

 

......

 

우리 삽질 좀 오래 했잖냐.

 

 

호석의 말에 남준이 푸핫 웃으며 그를 안은 채 걸음을 옮겼다. 자연스레 거실로 향하는 남준의 발걸음을, 호석은 따랐다. 그래서, 네가 제일 마음에 들었던 구절은 뭔데? 남준이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그가 소파에 앉으니 호석은 자연히 그의 품에 안긴 채 무릎에 앉게 되었다. 안 무거워? 호석의 물음에 남준이 고개를 저었다. 별로.

 

 

마음에 드는 구절은 다 형광펜 쳐놨다니까. 나중에 찾아봐.

 

어디 보자.

 

아 지금 보지 마.

 

 

호석은 책을 펴려는 남준의 손을 다급히 잡으며 말했다. ? 라고 묻는 듯한 남준의 표정에 호석은 말을 잇지 못했다. 살풋 붉어진 듯한 호석의 얼굴을 눈치 챈 남준이 푸스스 웃으며 책을 소파에 내려놓았다. , 이게 뭐라고 부끄러워 해. 제 속을 직격으로 말한 남준에 호석의 얼굴이 눈에 띄게 붉어지면서 후다닥 남준의 품에서 떨어져 일어났다. , 뭐 만들어 먹을 거 있나 보고 올게. 후다닥 부엌으로 향하는 그의 뒷모습에서 '나 지금 엄청나게 부끄러움.'이 적혀 있는 듯 했다. 귀여워. 남준은 웃음을 가득 머금은 표정으로 중얼거리며 책을 폈다. 앞에서부터 스르륵 책을 넘기니 오래가지 않아 연한 하늘빛 형광펜이 보였다. 남준은 눈으로 그 구절을 읽었다. 어쩐지 그 시절, 스탠드만 켜 놓고 제 마음을 써낸 시를 따라 쓰던 그 때가 떠오르는 듯 했다.

 

 

 

 

 

내가 그다지 사랑하던 그대여

 

내 한평생에 차마 그대를 잊을 수 없소이다

 

내 차례에 평생 못 올 사람인 줄은 알면서도

 

나 혼자는 꾸준히 생각하리다

 

자 그러면 내내 어여쁘소서

 

 

 

 

 

 

 

 

 

 

 

 

 

 

 

 

 

 

 

 

---

 

마지막 시는 이상의 '이런 시' 중 일부입니다.

 

 

 

 

 

 

 

 

 

 

 

 

 

 

 

 

 

 

 

 

 

 

 

 

 

 

' > 사랑옵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랩홉] 사랑옵다 9  (7) 2017.10.07
[랩홉] 사랑옵다 7  (4) 2017.05.25
[랩홉] 사랑옵다 6  (2) 2017.04.17
[랩홉] 사랑옵다 5  (2) 2017.04.13
[랩홉] 사랑옵다 4  (0) 2017.04.08

[랩홉] 사랑옵다 7

길/사랑옵다



지민과 정국은 나란히 바 테이블에 팔을 올리고 턱을 괸 채 호석을 바라봤다. 호석은 어디가 불편한지 계속해서 허리를 비틀며 타자를 쳐댔다. 아무리 봐도 오늘따라 사장님 이상하지. 지민의 물음에 정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장님 어디 불편하세요? 지민의 물음에 호석은 화들짝 놀라 그들을 바라봤다. 어어, 아니 괜찮아. 호석은 애써 웃어보였다. 지민의 눈이 새초롬해졌다. 뭐 숨기고 있다. 지민의 중얼거림에 정국은 또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요, 사장님.

 

어어...

 

사장님은 뭐 커플템 같은 거 없어요?

 

 

지민의 물음에 호석이 바쁘게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힐끗 모니터 너머로 지민을 바라봤다. , 그러고 보니. 정국은 턱을 괴던 얼굴을 들고 허리를 폈다. 사장님이랑 그렇게 오래 사귀셨다면서 반지 하나 안보이네요. 정국의 말에 호석은 괜히 제 손가락을 쓱 쓸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 호석은 한숨을 쉬며 노트북을 탁 덮고 팔짱 꼈다. 어쩐지 얼굴에 심통함이 보여 지민과 정국은 힐끗 서로를 봤다. 뭔가... 잘못 이야기 꺼냈나.

 

 

내가 이야기 했었나. 김남준 거어어업나 덤벙거린다고.

 

, 이야기 했던 것 같기도 하고.

 

걔 성격 때문에 그런 악세서리를 선물 할 수가 없어. 옛날에 한번 반지 선물 해줬었는데 어디선가 잃어먹고 왔다니까. 내가 다시는 그 꼴 보고 싶지 않아서 그냥 안 사줘. 걔도 자기 성격 아니까 그런 거 선물 안 해주고. 그런 악세서리 말고 다른 걸로 커플 맞춰.

 

 

, 그러세요... 괜히 잘못 말을 꺼낸 듯한 느낌이 들어 지민은 쩝 입만 다셨다. 보통 뭘로 맞추는데요? 정국의 말에 호석이 잠시 생각했다. 별 건 아니고... ?

 

 

속옷? 지갑? 머리색? ... 잠옷? , 신발?

 

그만해요.

 

반지만 없는 거지 그냥 다 커플로 맞추네.

 

우리 데이트 갈 때도 막 드레스 코드 맞춰서 가는데.

 

. 정말 좋은 데이트네요.

 

그럼 목걸이는 괜찮지 않아요?

 

 

커플링 사서 목걸이로 걸고 다니면 괜찮을 것 같은데. 정국의 말에 호석은 멍하니 있다가 재빨리 노트북을 열어 재부팅시켰다. 아 왜 그걸 이제야 생각했지!! 호들갑 떨면서 갑자기 막 검색해보는 호석을 보던 지민이 작게 쯧 혀를 찼다. 커플링 엄청 하고 싶으셨나보네.

 

야 반지 어디가 제일 예쁘냐? 좀 심플하면서도 독특한데 없어? 남자 둘이서 끼기에는 확실히 뭐가 많이 박힌 게 별로긴 하겠지? 계속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듯한 호석에, 지민이 가만히 듣고만 있다가 입을 열었다. 지금 저희한테 말하는 거예요? 그럼 여기에 너희 말고 누가 있냐? 호석의 대답에 지민은 머쓱해져 머리만 긁적였다. 어디 봐요. 정국이 카운터에서 나와 호석에게 다가갔다.

 

 

근데 여태 커플링 같은 것도 없었으면 팀장님한테 다가오는 사람들이 많았지 않았을까요. 멀리서 들리는 지민의 목소리에 노트북만 보고 있던 호석이 고개를 빼어 지민을 노려봤다. 너 짜증나게 자꾸 그런 이야기 할래? 그의 윽박에 지민은 작게 어깨를 움츠렸다. 아니면 말고요... 호석은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아아주 많았지. 짜증날 정도로 많았지. 아름다운 꽃은 날파리가 너무 많아.

 

하는 거 보면 팀장님이 사장님을 더 단속하는 것 같던데.

 

자기한테 그만큼 오는 여자들이 많으니까 그러는 거 아니야. 웃기지도 않아. 내 주위에 사람이 다가오는 거 봤냐? 그냥 일 하는 거 외에는 없잖아. 근데 걔는 내가 볼 때마다 옆에 여자가 있다니까?

 

 

두 분 다 똑같은 생각 하고 있을 것 같은데요. 정국은 제 생각을 구태여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에휴 에휴 내가 걔 뭐가 이쁘다고 이런 걸 사주는지. 호석은 한탄을 하면서도 반지를 고르는 얼굴은 신중하기 그지없었다. 사장님 연애 하시는 거 보면 누구나 다 연애 하고 싶어질 것 같아요. 지민이 머그잔을 닦으면서 하는 말에 호석이 풉 웃었다. 우리가 뭘 했다고.

 

 

제가 본 커플들 중에 제일 이쁘게 연애하세요. 정말 주말에 사장님 여기에 안 올 때 보면 가관도 그런 가관이 없다니까요.

 

아 맞아, 저번 주 일요일에도 여기까지 와서 거하게 싸우고 헤어져! 하고 돌아간 커플이 두 쌍이나 있었어요.

 

오 내 카페에서도 그런 사람들이 있구나.

 

참 묘하죠분위기 좋다는 소문 듣고 찾아와서 고백하고, 여기서 처음을 시작했던 커플들이 결국 마지막도 이 카페에서 맞는다는 게.

 

뭐야, 그게. 무슨 전설도 아니고.

 

 

호석의 말에 지민이 푸스스 웃었다. 혹시 모르죠, 사장님도 모르는 사이에 사장님 카페에서 어떤 전설이 돌고 있을 수도 있잖아요. 지민의 말에 호석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여기서 사귄 커플들은 여기서 깨진다는 그런 전설이면 사양할래.

 

 

 

 

 

 

 

 

 

 

어서오세요... 팀장님?

 

지민은 인사를 하고 고개를 들면서 마주친 시선에 깜짝 놀랐다. 아니 이 시간에는 어쩐 일로... 지민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다 종국에는 끝을 맺지 못하고 바스라졌다. 남준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심플한 수트 차림으로 들어왔다. 점심시간이라 카페 내에는 사람이 꽤나 있었다. 고개를 휘휘 돌리며 내부를 둘러보던 남준이 카운테 앞에 있는 지민을 봤다.

 

 

호석이는요?

 

... 사장님은 잠시 일이 있으시다고...

 

걔가 이 시간에 일이 있다고요?

 

.

 

이상하네... 카톡도 안 보길래 카페 일이 바쁜가 했거든요.

 

 

남준은 다시 폰을 꺼내어 카톡을 확인했다. 호석이에게 보낸 문자는 여전히 1이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뭐야, 내가 모르는 일이 있을 리가 없는데. 남준은 결국 폰을 주머니 안에 넣었다. 어쩐지 시무룩해 보이는 남준의 표정에 지민은 애써 웃음을 참았다. 주문하시겠어요? 런치 주세요. 주문하는 목소리에도 힘이 없어 보였다.

 

 

제가 호석이 보려고 점심시간 되자마자 여기 달려왔거든요. 조금만 늦어도 자리가 없으니까.

 

그렇죠. 팀장님 매일 카페 앞에 급하게 주차하고 오시잖아요.

 

매일 여기 있으니까 오늘도 아무 생각 없이 있겠거니 하고 온건데.

 

운이 좋지 않았네요. 오랜만에 오셨는데.

 

그래서, 호석이는 어디로 갔는데요?

 

글쎄요.

 

 

런치 나왔습니다. 지민은 트레이를 건네었다. 남준은 지민을 유심히 봤다. 저를 그렇게 본다고 해서 나오는 거 없어요. 지민이 웃으면서 하는 말에 잔뜩 시무룩해진 남준이 트레이를 들고 터덜터덜 빈자리로 향했다. 그런 남준의 뒷모습을 보던 지민은 재빨리 카운터 밑에서 제 폰을 꺼내어 후다닥 카톡을 보내기 시작했다. [사장님 어떡해요 팀장님 오셨어요 아니 한동안 안 오시다가 왜 하필 오늘 오셨데?] [헐 진짜? 아니 걔는 왜 하필 와도 오늘 오냐고]

 

문자에서 호석의 목소리가 음성지원 되는 듯 했다. [일단 전 모른다고 했으니까 사장님이 알아서 다 수습하셔야 해요] [알았어 고마워] 지민은 마지막으로 답장을 받고 나서야 폰을 넣었다.

 

주문한 반지를 찾아가라는 연락을 받고 백화점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호석은 살짝 입술을 깨물며 차 속도를 좀 더 높였다. 카톡. 아까부터 카톡 알람이 울렸다. 카페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더욱 줄기차게 보내는 것 같았다. 미안해 준아. 서프라이즈를 위해서는 오늘 하루만은 연락을 줄여야 했다. 이러다 준이 화가 수습 안 될 정도로 화가 많이 나면 어쩌나 걱정되기도 하지만 설마 그렇게 될까 싶기도 하고.

 

호석이 백화점으로 간 그 사이에 정국은 죽을 맛이었다. 카운터와 제일 가까운 바 테이블에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제일 가까이 있는 정국만 주시하고 있는데, 커피를 내리면서도 그 시선이 따가워 정국은 손까지 덜덜 떨렸다. 그의 시선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아주 잘 알 것 같아서 더 죽을 맛이었다. 내가 모르는 호석이의 일이 없는데 말이죠. 남준이 입을 열자 정국은 말 안 해도 제 몸이 긴장으로 뻣뻣해졌음을 알 수 있었다. 제가 알면 안 되는 일인가요. 남준의 말에 정국은 작게 마른침을 삼키고 입을 열었다.

 

 

저는 진짜 잘 몰라요. 그냥 사장님이 잠시 일이 있다고 나가셨어요.

 

급해보였어요?

 

글쎄요.

 

누구 만나러 가는 것 같았어요?

 

그건 아닌 것 같은데요. 모르겠어요.

 

지금 다 짜고 저 놀리는 거죠.

 

저희가 왜 팀장님을 놀리겠어요.

 

 

남준은 미심쩍은 눈을 하고 정국을 쳐다봤다. 정국은 제 할 일 하면서 애써 그 시선을 무시했다. 사장님이랑 팀장님 중에 누가 먼저 고백했어요? 뜬금없는 정국의 물음에 살짝 놀란 남준이 이내 평소 모습으로 돌아와 덤덤히 말했다. 제가 먼저 고백했어요.

 

 

내가 먼저 호석이를 좋아했어요.

 

사장님이 먼저 좋아하셨으면 어쩌려고.

 

제가 호석이를 좋아하고 있었을 때 호석이는 제가 존재하고 있었는지 조차 몰랐을걸요.

 

... 놀랍네요.

 

정국씨 반응이 더 놀랍네요.

 

 

무덤덤한 표정으로 툭 내뱉는 정국이 웃겨, 남준은 피식 웃었다. 샌드위치 마지막 한 입을 입 안에 넣은 남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시게요? 어쩐지 그렇게 말하는 말투에 기뻐하는 듯한 감정이 느껴져 남준은 풉 웃었다. 제가 가는 게 그렇게 좋아요? 제가 너무 정국씨를 괴롭혔나 보네요. 남준의 말투에 정국은 제 얼굴이 벌게지는 느낌이었다. 좋네요, 감정에 솔직해서. 남준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빈 트레이를 넘겼다. 정국은 얼떨결에 그 트레이를 받았다. 나중에 호석이한테 제 말 좀 전해주세요, 납득 안 되는 이유면 집 밖에 못 나갈 줄 알라고. 싱긋 미소를 지으며 카페를 나가는 남준의 뒷모습만 멍하니 보던 정국은 싸악 올라오는 소름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렇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하는 말은 협박이다.

 

가셨어? 키친에서 나오던 지민은 홀로 멍하니 서 있는 정국을 보며 물었다. , 팀장님이 납득이 안 되는 이유면 집 밖에 못나갈 줄 알라고 그러시던데. 정국의 말을 듣던 지민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후다닥 폰을 꺼내 호석에게 카톡을 보내기 시작했다. [사장님 생각보다 좀 심각해진 것 같은데요] 잠시후 카톡이 왔다 [왜왜왜왜 남준이가 뭐라고 했어?] [아니 납득이 안 되는 이유면 집 밖에 못 나갈 줄 알라고 했다던데요 정국이한테] 그 이후로 한동안 카톡이 오지 않았다.

 

 

 

괜찮아... 남준이라면 이해해줄거야... 호석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불안한지 손가락으로 바닥을 톡톡톡 일정한 속도로 두드렸다. 이렇게 된 이상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 선물을 줘야했다. 이미 머릿속으로는 몇 번이나 시물레이션을 했다. 직원한테도 몇 번이나 물어봤다. 제 애인이 좋아할까요? 제 애인이 반지를 끼고 다니는 걸 힘들어 해서 목걸이 줄 단건데 괜찮을까요? 혹시 미연씨가 서프라이즈로 이거 받으면 어떨 것 같아요? 직원인 미연씨는 애써 당황한 기색을 숨기며 호석의 대답에 차근차근 대답을 해주었다. 고객님이 직접 마음을 담아 고른 것이니 분명 애인분께서도 좋아하실 겁니다. 그녀는 케이스를 내밀며 말했다. 호석은 천천히 케이스를 받았다. 조심히 열어 제 반지를 꺼내어 먼저 손에 끼웠다. 적당히 심플하면서도 예쁜 디자인이었다. 남준이한테 엄청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사기는 했는데... 호석은 케이스 뚜껑을 엄지로 살살 문질렀다. 프로포즈 꼭 성공하실 거예요. 매장을 나가면서 들은 말에 호석은 얼굴이 벌게졌다. 프로포즈? 끄아... 프로포즈... 몇걸음 걸어가다 결국 멈추어 서서 다시 케이스를 열었다. 결혼반지로 많이 맞춘다고 듣기는 했는데 이렇게 직접적으로 들으니 뭔가 부끄럽다. 자기도 모르게 실실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갑자기 감정이 마구 부풀어 올라 제 몸이 둥둥 떠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계속 부풀어 오르다 감당 못하면 감정이 팡 터지려나. 감정이 팡 하고 터지면 난 쓰러지려나. 그러면 준이가 받아주겠지 뭐. 엉뚱한 생각이 자꾸자꾸 떠올랐다

 

여러 매장을 지나면서 옷들이 자꾸 눈에 띄었다. , 남준이 스타일인데? 이거 준이한테 입히면 예쁘겠다. 와 대박, 이거 준이한테 입혀보고 싶다. 헐 이거 완전 남준이 옷이잖아. 호석은 결국 걸음을 멈추고 옷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고개를 돌리면 다 남준이를 위한 옷 같았다. 쇼핑을 그렇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남준이가 왜 그렇게 자신에게 옷을 사주려고 했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렇다고 이걸 다 살 수는 없으니... 심각하게 고민을 하고 있는 호석의 곁으로 직원이 다가왔다. 찾으시는 제품 있으십니까? 직원의 물음에도 심각하게 고민하느라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턱만 만지작거렸다. 키는 한 181 정도 되고요, 덩치는 저랑 비슷한가 좀 더 슬림하고... , 다리가 되게 길거든요 저보다 한 이만큼? 더 길고요, 어깨가 좀 있고 머리도 많이 작고... 그런 애한테 어떤 옷이 어울릴까요.

 

호석의 표정에 직원의 표정이 묘해졌다. 글쎄요... 그런 분이시라면 무엇을 입어도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만... 요즘은 롱코트가 많이 유행이니까 코트는 어떠세요? 아니면 카디건 같은 것도 괜찮고요. 직원의 말에 호석이는 또 고민하기 시작했다. 롱코트는 이미 집에 차고 넘치도록 많다. 호석은 카디건을 봤다. 뭐가 제일 예쁘려나... 아 물론 준이는 뭘 입어도 예쁘게 떨어지긴 하지만. 너무 심각하게 인상까지 찌푸리면서 고민하고 있는 호석의 틈을 비집고 말을 걸 용기가 안 나는 직원은 그저 어정쩡한 거리에 뻘쭘하게 서서 보기만 했다. 친구 선물이신가 봐요. 아뇨, 친구는 아니고... 간신히 입을 뗀 직원에게 딱 잘라 답한 호석이 이제는 두 개를 가지고 고민했다. 집에 이거랑 비슷한 카디건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 근데 이건 너무 오버핏인가, 애가 너무 말라가지고... 아 살 좀 찌워야 해 걔는.

 

호석은 혼자서 이리저리 생각하다 결국 하나를 골라 직원에게 건넸다. 이거 계산해주세요, 선물이라서 포장 되면... 호석의 말에 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됩니다, 고객님, 포장해드리겠습니다. 카드를 꺼내는 호석의 표정에는 미소가 완연했다.

 

 

 

 

 

고층 건물을 올려다 본 호석이 작게 심호흡을 했다. 조금 있으면 남준의 퇴근 시간이다. 앞에서 기다릴까 그냥 남준이를 찾아갈까 고민을 하다가 결국 안으로 들어갔다. 남준이가 항상 카페로 왔었지, 자신이 그를 직접 찾아온 것은 처음이었다. 위엄 넘치는 건물 크기에 호석은 입구에서 안절부절 못하다 결국 회전문을 돌아 들어갔다. 평생 회사를 다녀본 적 없으니 모든 게 신세계였다. 바깥에서 보는 것 보다 훨씬 더 어마어마한 크기의 회사에 호석은 눈만 도르륵 굴리다가 프론트 앞에 갔다. 저어기... 사람 찾으러 왔는데요...

 

1층 로비에 있는 카페에 앉아 있다가 엘리베이터에서 남준이 내리는 모습이 보이자 호석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호석을 발견한 남준은 빠른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준아? 호석이 인사도 하기 전에 그의 손목을 잡고 급히 회사를 나가는 남준의 행동에 호석은 눈만 끔뻑이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끌려갔다. 회사 근처에 세워 놓은 호석의 차로 거침없이 간 남준은 조수석 문을 열어 호석을 태웠다. 그의 손길이 거칠어 거의 구겨지듯 조수석에 들어간 호석은 차 앞으로 가로질러 오는 남준만 멍하니 쳐다봤다. 운전석 문이 열리고 남준이 타자마자 호석은 무어라 말할 새도 없이 남준에게 멱살 부근이 잡혀 그대로 끌려갔다. 잠깐, ! 다급한 호석의 말은 채 다 나오기도 전에 남준의 입술에 먹혔다. 오늘따라 거칠고 숨이 찼다. 뭐에 쫓기듯 다급한 그의 입맞춤을 받아내기 버거워 호석은 자꾸 억눌린 신음만 나왔다. 참다못한 호석이 그의 가슴팍을 세게 치고 나서야 남준은 입을 뗐다. 호석은 숨을 몰아쉬며 남준을 쳐다봤다.

 

 

뭐야, 갑자기?

 

......

 

하아. 진짜 깜짝 놀랐네. 왜 이렇게 안하던 짓을 하지?

너 오늘 점심시간에 어디 갔어?

 

 

너 오늘 무슨 일 있다고 나한테 말한 거 없잖아.

 

, 그냥. 갑자기 생긴 거라서...

 

나한테 말 못하는 거야?

 

 

무언가 평소와 다른 듯한 남준의 행동에 호석이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오늘따라... 호석은 제 손을 주물주물 거리고 있는 남준의 손을 내려다 봤다. 손을 봤다가, 호석을 힐끗 봤다가, 어쩐지 제 눈치를 보는 것 같은 남준의 행동에 호석은 멍하니 그의 얼굴만 보다가 풉 웃음을 터뜨렸다. 남준은 그의 웃음에 욱했다. , 나 지금 웃을 기분 아니야. 호석은 애써 웃음을 삼키며 다른 손을 들어 남준의 옆머리에 손을 얹고 살살 쓰다듬었다. 머리를 차분하게 내리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끔뻑끔뻑 거리는 것이, 꼭 대형견 같았다.

 

 

우리 강아지, 주인님 보고 싶었어?

 

야아... 말 돌리지 말고.

 

준아.

 

 

자신을 불러 놓고 아무 말 없는 호석을 가만히 기다려주는 남준을 보고 호석은 내심 기분 좋아 또 푸스스 웃었다. 호석의 웃음을 본 남준이 따라 웃었다. 너 내가 왜 웃는 줄은 아냐. 아니. 호석의 물음에 남준이 답했다.

 

 

근데 왜 웃어.

 

네가 웃으니까 웃지. 너는 왜 웃었는데.

 

좋아서 웃었지.

 

나도 너 좋아서 웃었어.

 

준아.

 

?

키스해줘.

 

 

호석의 말에 남준은 바로 그의 뒷목을 잡고 입을 맞추었다. 아까보다는 부드럽게 들어오는 남준에, 호석은 두 팔을 들어 그의 목을 감았다. , 차 안이라서 아쉽다. 딱 붙어서 안을 수 없으니 불편하기 그지없다. 호석은 입맞춤이 더 진해지기 전에 입술을 떼었다. 아쉬운 듯 계속 맞닿아 오는 남준의 입술에, 호석은 피식 웃으며 가볍게 뽀뽀 두어 번 해주고 완전히 물러났다. 아쉬움이 가득한 남준의 표정에 호석은 부러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손가락으로 그의 입술을 살짝 훑었다.

 

 

너 이제 나한테 완전히 묶였어.

 

?

 

너 목에.

 

 

턱짓으로 목을 가리키는 호석에 남준은 바로 목 부근에 손을 갖다 대었다. 무언가 걸리는 느낌에 잡아 올려 봤다. 이거 뭐야, 호석아? 어쩐지 벙한 남준의 표정에 호석은 꺄르르 넘어갔다. 표정 완전 바보 같았어. 마구 웃으며 하는 말에 남준은 밉지 않게 그를 노려보며 팔뚝을 찰싹 때렸다.

 

 

나 오늘 다른 거 없었어?

 

다른 거?

 

, 너무한 거 아니냐? 내 손까지 쪼물딱 댔으면서.

 

 

호석이 왼손을 들어 보이며 하는 말에 여전히 벙한 표정이었던 남준의 눈이 점점 커졌다. . 잔뜩 놀란 표정을 해보이며 두 손으로 입가를 가렸지만, 그의 입꼬리가 잔뜩 올라와 있는 것이 다 보였다. 표정에서 벅차오른 것이 보여 호석은 괜시리 뿌듯해졌다.

 

 

뭐야, 진짜?

 

뭐긴 뭐야. 수갑이야, 수갑. 절대로 안 풀어줄 거야.

 

아니 진짜... 언제 준비했는데...

 

주문한 건 좀 됐는데 오늘 들어왔다고 해서.

 

... ...

 

 

남준은 갑자기 핸들을 부여잡고 고개를 묻었다. 왜 그래? 호서기 그의 등을 쓸어내리며 남준을 향해 몸을 살짝 기울였다. 남준은 고개만 살짝 들어 호석을 바라봤다. 잔뜩 상기되어 있는 그의 얼굴이 볼만하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완전 질투만 잔뜩 했잖아.

 

, 그랬어? , 좋네. 질투 좀 해.

 

이미 차고 넘칠 정도로 하고 있는 중이야. 여기서 더 질투하면 진짜...

 

... 진짜 뭐.

 

너 감당 못해.

 

내가 말했잖아. 너 수갑 채운 거라니까. 내가 다 감당해야지 뭐 어쩌겠어.

 

아 진짜... 오늘 무슨 날이야? 아 너무... , 말이 다 안 나오네.

 

좋아서? 아니면,

 

당연히 좋아서지! 미쳐 진짜, 날라 갈 것 같아. 아 너무 예뻐.

 

 

남준은 상체를 일으켜 다시 목걸이를 바라봤다. 이거 커플링에 목걸이 줄 단거지? 남준의 말에 호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반지에 눈을 떼지 못하고 조심히 만지작거리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호석은 어쩐지 부끄러워져 시선을 살짝 돌려 헛기침만 흠흠 했다.

 

 

그러고 보니 너도 너무하다. 그렇게 손 쪼물딱 거렸으면서 어떻게 반지 하나 눈치 못채냐.

 

아니이... 나는 네가 그냥 패션반지로 낀 줄 알았지.

 

왼손 약지에?

 

패션반지 치고는 뭔가 겁나 고급져 보이긴 했는데.

 

......

 

야 그렇다고 설마 나 놔두고 커플링 했다고 생각하겠냐. 당연히 그냥 낀 반지인 줄 알았지.

 

 

, 오늘은 기분 좋으니까 그냥 넘어간다. 호석이 새침하게 받아쳤다. 남준은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말 없이 호석을 바라봤다. 아 그리고 이건 그냥 너랑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샀어. 뒷좌석에서 손을 뻗어 꺼낸 것은 중간크기의 상자였다. 한가운데 깔끔하게 박혀있는 브랜드 로고에 남준은 눈이 휘둥그레져 호석을 바라봤다.

 

 

뭐야, 이게? 오늘 뭔 날이야생일도 아니고 기념일도 아닌데. 혹시 사귄지 몇 천일 그런 건가? 아닌데?

 

그냥 기분전환 겸. 지나가다가 예뻐서 산거야, 진짜로. 별 거 아니고.  그냥 선물도 못 해?

 

 

호석의 말에 남준은 고개를 저으며 상자를 열었다. 반듯하게 들어있는 카디건을 보고 남준은 입이 떡 벌어진 채 말도 않고 멍하니 카디건만 바라봤다. 호석은 남준의 표정을 유심히 쳐다봤다. 괜히 긴장이 된다. 이렇다 할 반응이 없자 호석이 상자를 잡았다. 별 마음에 안 들면 그냥 내가, 호석의 말이 채 다 끝나기도 전에 남준이 상자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호석의 손에서 상자가 쏙 빠져나갔다.

 

 

야 내가 언제 마음에 안 든다고 했냐.

 

아무 말 없길래.

 

너무 좋아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생각한다고 그래.

 

 

카디건을 펴서 꼼꼼히 살펴보는 남준의 표정에 설렘이 가득했다. 호석은 그의 모습만 멍하니 보다가 괜히 흠흠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 준아.

 

?

 

그 반지 말이야.

 

.

 

뭐 같아?

 

뭐 같냐니?

 

 

남준은 카디건을 내려놓고 다시 반지를 들어 봤다. 심플한 듯하지만 일반 커플링은 아닌 것 같다. 그냥 커플링이라기에는 엄청나게 비싸 보이지. 그러다 문득 든 생각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호석을 바라봤다. 굉장히 쑥스러워 하는 듯한 호석의 표정에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그거 결혼할 때 많이 맞추는 반지야.

 

......

 

내가 지금 너한테 프로포즈하는 거라고.

 

 

호석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또 맞닿은 그의 입술에 호석은 부드럽게 받아들였다. 불편한 자세는 신경도 안 썼다. 제 볼을 감싼 남준의 손이 따뜻했다. 살짝 입술을 떼고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호석을 바라봤다. 서로의 숨결이 섞였다. 나 진짜 미쳤나봐. 남준이 작게 속삭였다. ? 호석도 따라 속삭였다. 아직도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데?  

 

 

 

 

 

 

 

 

 

 

 

 

 

 

 

 

 

 

 

 

---


' > 사랑옵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랩홉] 사랑옵다 9  (7) 2017.10.07
[랩홉] 사랑옵다 8  (2) 2017.07.15
[랩홉] 사랑옵다 6  (2) 2017.04.17
[랩홉] 사랑옵다 5  (2) 2017.04.13
[랩홉] 사랑옵다 4  (0) 2017.04.08

[랩홉] 사랑옵다 6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내용을 보시려면 비밀번호를 입력하세요.

[랩홉] 사랑옵다 5

길/사랑옵다



호석은 저절로 잠이 깨 천천히 눈을 떴다. 일어났어?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호석은 그대로 고개만 돌려 남준을 바라봤다.

남준은 팔로 머리를 받친 채 옆으로 누워 있었다. 언제 깼어? 호석은 잔뜩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 1시간 전? 생각보다 훨씬 더 긴 시간에 호석은 화들짝 놀랐다. 한 시간? 그러면 나 깨우지! 호석의 작은 투정에 피식 웃은 남준은 다른 한 손으로 호석의 콧대를 천천히 쓸었다. 네가 자는데 어떻게 깨워. 호석은 푸스스 웃었다.

침대는 아늑하고 이불은 푹신하고 이불속은 따뜻하다. 호석은 좀 더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남준이 호석을 안아주었다. 아 진짜 일어나기 싫다... 호석의 말에 남준은 그를 더 꼭 껴안았다. 그럼 오늘은 하루 종일 뒹굴까? 남준의 말에 호석은 푸핫 웃었다.

오늘은 뭐할까. 침대에 옆으로 누운 채 말하는 호석에 남준은 그의 목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나 하루 종일 침대에 있어도 되는데. 낮게 울리는 그의 숨결이 뒷목에 닿아 호석은 살짝 움츠리더니 몸을 잉차잉차 돌려 남준을 바라봤다. 남준은 그의 입술에 살짝 베이비키스를 했다.


침대에 하루 종일 있겠다는 건 무슨 의미야.

그대가 생각하는 대로.

...

오늘따라 섹시해 보이네.

아 너 변태인 거 잊지 말았어야 했는데.


남준이 푸스스 웃으며 이번에는 호석의 코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아 일어나야겠다. 호석은 결국 상체를 일으켜 침대를 나오려다 재빨리 남준의 입술에 가볍게 입 맞추고 일어났다. 새벽에 셔츠만 입히고 재운 터라 호석의 다리가 그대로 드러났다. 남준은 휘파람을 한 번 불었다. 한번쯤 그렇게 다니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남준의 말에 호석이 헛웃음을 뱉었다. 적당히 놀리고 그만 일어나시죠? 호석의 말에 그제야 남준이 상체를 일으켰다.



아 맞아, 오늘 장 봐야 해. 남준이 입 앞까지 갖다 준 사과를 아삭 베어 문 호석이 문득 생각나서 말했다. ? 남준은 호석이 베어 문 사과의 반대쪽을 베어 먹었다. 아 오늘 저녁에 먹을 거 있나? 호석이 후다닥 부엌으로 달려갔다. 남준이 그의 뒤를 느릿느릿 따라갔다.

커다란 냉장고 문에 가려서 보이지는 않지만 그 앞에 쭈그려 앉아 고민하고 있는 호석의 모습이 눈앞에 선해 남준은 낮게 웃었다. 한참을 냉장고 속만 보던 호석은 결국 문을 닫고 남준을 돌아봤다. 준아, 장 보러 가자.

남준은 잠시 말이 없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쇼핑 갈래?

 

 

 

 

 

남준은 쇼핑을 좋아했다. 그리고 옷을 좋아했다. 호석은 그리 패션에 그리 의의를 두지 않는 편이었다. 그러니까 굳이 따지자면 관심이 없는 편이었다. 그래도 호석은 남준의 취미를 존중했다. 아니, 존중이랄 것도 없다. 그냥 남준이 좋으니까 좋은 거다. 남준이 제일 좋아하는 취미는 호석한테 옷 사주는 것이었다. 쇼핑하러 가면 8할은 호석이 옷 사기 위해서다. 남준은 호석이가 자신이 사주는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그렇게 좋아했다. 솔직히 호석은 그게 왜 좋은지 잘 모르겠지만 남준이 자신에게 이상한 옷을 입히는 것도 아니고, 패션 감각이 뛰어난 그라서 오히려 호석의 입장에서는 땡큐였다. 매일 아침마다 남준이 꺼내주는 옷만 입고 출근하면 되니까.

 

오늘의 컨셉은 도깨비였다. 어떤 옷을 입혀도 다 받아줬었는데 이번은 아닌 것 같다면서 빼는 호석에게 사정 사정을 하면서 남준이 기어코 호석에게 목티와 롱코트를 입혔다. 남준이 그 드라마를 너무 감명 깊게 본 나머지 롱코트를 사재낀 적이 있었다. 남준의 드레스 룸을 보면서 하루에 하나씩만 입어도 한 달은 입겠네 생각했는데, 그 중 하나를 입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던 호석이었다.

 

야 이건 진짜 아닌 것 같애... 옷을 다 입으면서도 제 팔을 잡고 찡찡대는 호석이 퍽 귀여워 남준은 가볍게 입 맞추었다. , 뽀뽀만 하지 말고 진짜. 호석이 남준의 팔을 아프지 않게 찰싹 때렸다.

 

 

왜 이쁘기만 하구먼. 누구 애인인데 이렇게 이뻐, ?

 

......

 

진심으로. 나 진짜 맹세코. 진심으로 예뻐. 이런 옷을 소화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호석이가 다하네.

 

... 나 참.

 

 

호석은 결국 피식 웃어버렸다. 사랑하는 사람이 저런 눈으로 저런 말만 하는데 혹여 빈 말이라 해도 넘어갈 수밖에 없다. 호석은 남준의 손을 끌어와 꼭 잡았다. 남준의 따뜻한 온기가 호석의 손을 덮었다. 준아. 호석의 나직한 부름에 남준은 조용히 호석을 바라봤다. 혹여 네가 하는 말이 정말 거짓인 날이 온다 하더라도, 난 너를 사랑하고 있을 거야.

 

? 남준의 물음에 호석은 말없이 고개만 저었다. 아니, 아무것도. 호석은 살풋 웃어보였다. 남준이 따라 웃었다

 

 

 

 

 

 

 

 

 

 

남준이 심각한 표정으로 옷을 하나하나 세심하게 보고 있으면 호석은 두어 발짝 뒤에 서서 가만히 그런 남준을 보고 있었다. 호석아 이건 어때? 조금 크려나? 남준이 호석에게 옷을 대 보며 거의 혼잣말 같이 물어볼 때마다 호석은 같은 대답만 해주었다. 조금 커도 너랑 같이 입으면 되지, .

 

뭐 찾으시는 것 있으세요? 직원의 물음에도 남준은 옷 고르는데 온 집중을 다 하는 탓에 그의 귓속까지 말이 닿지 못했다. 호석은 직원한테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그냥 구경만... 호석의 말에 직원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주위를 서성거렸다. 남준은 그런 직원이 보이지도 않는지 옷 고르기에 여념이 없었지만, 호석은 자꾸 직원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저 멀리서 속닥거리는 서너 명의 직원도 거슬리고 근처에서 눈을 반짝이며 서 있는 직원도 거슬린다.

 

남준과 같이 다니면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대놓고 다가와서 폰 번호 달라고 한 적도 많고 힐끗힐끗 이쪽을 쳐다보며 멋있다며 다가가볼까 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많다. 호석은 그때마다 불편한 감정을 숨길 수 없었다. 그 옆에 있는 나는 완전 열외라는 거지. 현실을 알면서도 씁쓸한 건 어쩔 수 없다.

 

호석아, 혹시 뭐 입고 싶은 건 없어? 남준의 물음에 호석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어, 어디 보자. 재빨리 옷을 보려던 호석은 남준의 팔에 걸쳐진 옷 무더기에 기함했다. 이게 다 뭐야. 호석의 물음에 남준은 해맑게 웃어보였다.

 

 

호석아, 이거 너한테 진짜 잘 어울릴 것 같아.

 

그래도 그렇지 너무 많잖아. 드레스 룸도 거의 다 찼는데.

 

새 드레스 룸 만들면 되지.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너무 과해.

 

네가 입었으면 좋겠는데.

 

 

아쉬움이 가득한 눈길로 옷을 내려다보는 남준에 호석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알았어, 대신 당분간 쇼핑은 안 돼. 그래. 호석의 말에 금방 또 기분 좋은 웃음을 뱉으며 고개를 끄덕인 남준이 옷을 더 보기 시작했다. 손님, 제가 들어드리겠습니다. 앞에 서성이던 직원의 말에 남준은 부드럽게 웃으며 거절했다. 괜찮습니다, 무거워요. 호석은 남준의 말에 얼굴이 살짝 붉어지며 살풋 웃는 직원을 제대로 봤다. 뭐지 이 엿 같은 기분은. 호석의 표정이 단번에 굳었다. 호석아 이것 좀 입어볼... 남준은 호석을 돌아보며 말하다 입을 다물었다. 알았어. 딱딱하게 대답한 호석은 남준의 손에 들고 있는 옷을 하나 집어 그대로 피팅룸에 들어갔다. 남준은 머리를 긁적였다. 큰일 났네...

 

호석과 남준은 질투가 심한 편이었다. 다만 그 질투를 표현하는 것은 달랐다. 남준은 자신의 질투를 스킨십으로 표현하는 편이었다. 호석에게 유난히 더 붙어있거나, 뒤에서 안거나, 뽀뽀도 서슴지 않았다. 호석은 불쾌함을 행동이나 표정에 드러났다. 아무 말 하지 않지만 유난히 틱틱 대는 행동이라던가 정색하고 있는 그의 표정을 보면 남준이 달래주거나 그에게 스킨십을 함으로써 호석은 위안을 얻고는 했다. 호석이가 오늘 기분이 안 좋나보네. 남준은 그가 들어간 피팅룸을 보며 제 팔뚝에 걸쳐진 옷만 만지작거렸다. 잠시 후 문이 살짝 열리면서 호석이 얼굴만 빼꼼 내밀었다. 준아... 호석의 부름에 남준이 재빨리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이 옷 나랑 좀 안 어울리지 않아?

 

아냐. 뭘 입어도 예뻐.

 

진짜?

 

진짜로. 이것도 입어보라고 하고 싶은데, 너 힘드니까 여기 빨리 나가자.

 

?

 

얼른 나와.

 

그거 안 입어 봐도 돼?

 

어차피 다 예쁠텐데. 사이즈도 다 알고. 괜찮아. 얼른.

 

 

호석은 남준의 말에 살풋 웃으며 피팅룸에서 나왔다. 그들의 대화를 들은 직원들의 표정이 묘해졌다.

 

 

 

매장을 나온 남준은 호석의 머리를 헝클였다. 왜이래? 호석은 고개를 들어 남준을 바라봤다. 남준은 진하게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의 의미를 알아차린 호석은 살짝 붉어진 얼굴을 애써 모른 척 시선을 돌려 앞을 봤다. 귀여워. 남준은 속으로 생각하며 키득댔다. 그의 웃음소리를 들은 호석의 표정은 민망한 듯 해보였다. 그래서. 남준이 입을 열었다.

 

 

오늘은 뭐 때문에 그렇게 심통이 났어요?

 

심통 안 났어요.

 

애인한테 거짓말 치는 거 아니에요.

 

 

호석은 말없이 남준의 앞에 서서 쭉 남준을 훑어봤다. 쇼핑백을 들고 있는 남준은 호석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눈만 끔뻑였다. 이씨... 호석의 입꼬리가 살짝 내려갔다. 남준은 그에게 다가가 양손으로 입꼬리를 올렸다. 왜 그래. 남준의 물음에 호석은 남준을 노려봤다. 잘 알면서 일부러 묻는 게 얄밉기만 하다. 그의 표정에 담긴 의미를 알아차린 남준은 푸핫 결국 소리 내면서 웃었다. 아 짜증나. 호석은 남준의 팔을 탁 쳐서 떼어냈다. 남준은 아예 호석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미안, 미안해 호석아. 사과를 하는 말에도 웃음기가 담겨 있었다.

 

왜 이렇게 잘난 거야... 호석은 남준의 품에 안긴 채 입만 삐죽거렸다. 같은 남자가 봐도 잘났는데 여자는 오죽할까 싶다. 남자도 반해서 이렇게 허우적거리는데 여자는 더 안 그렇겠냐고... 입만 삐죽이는 호석을 본 남준은 그의 입을 아프지 않게 잡았다. 우브읍! 호석은 그의 손목을 잡으며 노려봤다. 낄낄거리는 남준이 얄밉기만 하다. 질투하는 거야? 남준이 물었다.

 

 

그래, 질투한다. 마음 같아서는 거적데기만 입고 다니라고 하고 싶은 심정이야.

 

그게 뭐야.

 

 

남준은 부드럽게 웃으며 대꾸했다. 오늘따라 저 웃음도 왜 그렇게 멋있어 보이는지... 오늘따라 옷은 또 왜 이렇게 예쁘게 입고 온 거야... 불안해 죽겠다. 도저히 풀리지 않는 듯한 호석의 표정에, 남준은 결국 제 턱을 만지작거리며 호석을 내려다보았다. 오늘 밖에 나올 기분이 아니야? 남준의 물음에 호석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날씨도 좋고 기분도 물론 좋았다. 이건 그냥 제 스스로의 문제였다. 만난지 얼마나 오래 됐는데 아직도 그런 거에 질투를 하고 그러냐. 아니, 오래 만났기 때문에 불안한 건가. 사실 자신도 잘 모르겠다. 그냥 오늘따라 잘나 보이는 남준에 괜히 불안해졌을 뿐이다. 호석은 다시 남준을 올려다보았다. 남준은 여전히 자신을 보며 웃고 있었다. 살짝 들어간 보조개가 그를 더욱 매력적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오늘따라 너 왜 이렇게 잘났어.

 

?

 

뭔가 짜증나 진짜. 아까도 저 옷가게에서 너만 쳐다보는 거 봤어?

 

 

입을 삐죽 내민 채 웅얼웅얼 자신의 불만을 계속해서 얘기하는 호석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남준은 불시에 촉 그의 입을 맞췄다. 굉장히 놀라며 커다란 눈으로 남준을 쳐다 본 호석은 결국 그의 팔을 찰싹 때렸다. 맞아도 좋다고 흐흐거리는 남준을 밉지 않게 노려 본 호석이 입을 열었다. 너 내가 밖에서는 스킨십 하지 말라고 했잖아. 남준은 호석의 말에도 배째라였다. 아 몰라, 내가 하고 싶으면 하는 거지 어차피 다들 다시는 안 만날 사이야.

 

 

, 좋다.

 

뭐가, 나는 지금 기분 안 좋은데.

 

내가 매번 카페에서 너를 보는 기분이 그랬어.

 

......

 

너는 서비스업이랍시고 막 손님들한테 웃어주는 거 볼 때마다 속이 뒤집어지는 느낌이야.

 

......

 

나만 그렇게 느끼면 어떡하나 조금 우울했었는데. , 나 네 말대로 변태 맞나봐.

 

뭐가.

 

네가 막 질투하는 거 보면 왜 이렇게 좋지.

 

 

남준의 말에 잠시 멍하니 그의 말을 곱씹던 호석이 그대로 몸을 돌려 빠른 걸음으로 가버리기 시작했다. 아 미안해 호석아, 미안해! 남준이 재빨리 그의 뒤를 따랐지만 호석은 멈추지 않았다. 미안해! 남준이 재빨리 호석의 손목을 잡아 돌렸다. 씩씩 거리는 호석의 표정이 담겼다. 남준은 웃음이 나왔지만 애써 그 웃음을 숨긴 채 호석에게 계속 사과를 했다. 내가 나쁜 뜻으로 그런 건 아니야, 정말로. 호석의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아아... 호석아... 작게 앙탈을 부린 남준이 결국 호석을 팍 안아주었다. 오뚜기 처럼 오른쪽 왼쪽 왔다갔다 거리며 화난 호석을 풀어주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의 품에 얼굴을 묻은 호석은 콩콩콩 그의 어깨부근에 머리를 서너 번 찍었다. 못된 놈. 중얼거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숨과 섞인 남준의 웃음소리가 호석의 귓가를 간질였다. 어깨에 손을 대고 고개를 들어 남준을 바라봤다. 진심으로 사과를 해도 웃음기 가득한 표정은 숨길 수 없나보다. 얄미워 죽겠네 진짜. 호석은 남준을 노려봤다.

 

 

다음부터는 그러지마 진짜. 완전 짜증나니까.

 

안 그럴게.

 

나 질투 엄청 많은 사람이라서 너 그러는 거 또 눈에 띄면 어떻게 될지 몰라.

 

. 미안해. 절대 그럴 일 없을 거야.

 

그리고...

 

.

 

그만 좀 멋있어져라, 진짜.

 

 

곧 서른인데 아저씨가 밑도 끝도 없으면 어쩌자는 거야. 그저 우스갯소리인줄로만 알았는데 진지하기 그지없는 호석의 표정에 결국 남준은 허리까지 접어 웃기 시작했다. 야 나 지금 완전 진지해, 여자들이 뭣 모르고 다가온다니까. 호석의 말은 이미 들리지 않는다. 아 진짜 어떡하면 좋지. 남준은 결국 또 한 번 호석을 꽉 안아주었다. 저야말로 곧 서른인데 아저씨가 밑도 끝도 없이 귀엽다





















' > 사랑옵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랩홉] 사랑옵다 7  (4) 2017.05.25
[랩홉] 사랑옵다 6  (2) 2017.04.17
[랩홉] 사랑옵다 4  (0) 2017.04.08
[랩홉] 사랑옵다 3  (0) 2017.03.23
[랩홉] 사랑옵다 2  (1) 2017.03.07

[랩홉] 사랑옵다 4

길/사랑옵다



네가 우리 학교 전교 1등이라며? 진짜 멋있다!

 

좋아하는 연예인을 실제로 만나 자신에게 말을 걸면 이런 기분일까. 남준은 제 앞자리에 자신 쪽으로 돌아앉아 말을 꺼낸 호석을 보며 얼은 채 눈만 도륵도륵 굴렸었다. 너 볼 때마다 공부하고 있더라고. 호석은 턱을 괸 채 남준의 책상에 널브러져 있는 문제집과 공책을 봤다. 남준은 괜히 헛기침만 흠흠 했다. 나를 보고 있었나. 남준은 굳이 거울을 보지 않아도 제 얼굴이 벌게졌을 거라 생각했다. 남준과 호석의 첫 만남이었다.

 

 

 

 

 

호석은 남준을 이 반에서 처음 보는 것이겠지만, 남준은 그 전부터 호석을 알고 있었다. 아니, 이 학교에 다닌다면 아마 대부분이 호석을 알고 있을 것이다. 남준은 호석을 좋아했다. 이성적으로 좋아한다는 것이 아니라 정호석이라는 사람을 좋아했다. 사람이 저럴 수도 있구나 하는 동경심에 가까웠다. 남준에게 있어서 호석은 자신과 다른, 새로운 세계의 사람이었다. 마냥 칙칙하기만 회색빛 제 세상과는 달리 그의 세상은 알록달록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자신은 아무 특징 없는 물이라면 그는 상큼하고 달달한 오렌지 주스였다. 그냥 달랐다. 도저히 어울릴 수 있는 무리가 아니었다. 그래서 더욱 끌렸는지도 몰랐다. 그토록 원하던 제 이상(理想)이 호석이라서.

 

남준은 호석을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 봤다. 고등학교 올라왔을 때부터 호석은 나름 유명했다. 춤을 춘다고 했다. 제 옆에서 이야기 하는 것을 얼결에 들었을 때만 해도 남준은 그저 그렇게 넘겼다. 춤은 관심도 없을 뿐더러, 그저 자신과는 다른 세계 이야기였다. 그 당시 남준은 외고에 떨어지고 온 곳이 이 고등학교였다. 마음에 들었을 리 없었다. 학교나 친구들이 마음에 안 든다는 뜻이 아니었다. 제 자신에게 너무 짜증이 나고 비참했다. 제 형들과 누나는 아무렇지 않게 들어간 그 과학고를, 자신은 안간힘을 쓰고 노력해도 결국 떨어졌다. 어쩔 수 없는 재능의 차이에 남준은 줄곧 집안에서 비교 당했다. 모든 게 다 마음에 안 들었다. 이 고등학교에 오면서 좀 쉬고 싶은데 쉬는 방법도 몰랐고, 놀고 싶어도 노는 방법을 몰랐다. 쳇바퀴마냥 단조롭기만 한 제 생활을 깨달은 남준은 허망함에 무릎을 감싸 안고 고개를 파묻었다. 난 이제 어떡하지.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문제의 답만 풀 줄 알았던 남준은 자신의 문제에 답을 내릴 줄 몰랐다.

 

정처 없이 방황하던 남준은 어느 날 호석을 봤다. 그날따라 점심을 먹은 후에 바로 교실을 들어가기가 싫어서 학교를 정처 없이 걷고 있을 때였다. 우연히 지나가고 있던 무용실에서 노래가 흘러나오는 것을 들은 남준은 아무 생각 없이 문에 있는 창으로 힐끗 쳐다봤다. 무용실 안에서는 호석이 곡에 맞추어 춤을 추고 있었다. 되게 말라 보이는데 춤 동작 하나하나에 힘을 실어서 추는 것이 박력 있었다. 길쭉길쭉한 팔과 다리로 저렇게까지 예쁜 춤 선이 나올 수도 있구나. 남준은 호석의 동작 하나하나를 눈에 다 담았다. 한껏 진지한 표정과 꾹 다문 입술이 그의 분위기를 더욱 깊게 만들었다. 나도 몰래 시선이 뺏긴다는 게 이런 느낌인가. 남준은 멍하니 호석을 보면서 생각했다.

 

한 곡이 끝나고 다른 곡이 나왔다. 호석은 무릎에 손을 얹은 채 숨을 골랐다. 바닥에 땀이 한두 방울씩 떨어졌다. 후 숨을 몰아쉰 호석이 몸을 일으키다 무용실 거울을 통해 남준과 눈이 마주쳤다. 순간 당황한 남준이 우물쭈물하는데 호석이 살짝 웃어보였다. 부산스러웠던 남준의 움직임이 우뚝 멈추었다. 아까 춤을 췄을 때의 분위기와는 전혀 다르게 웃을 때 휘어지는 그 눈이 부드럽기 그지없었다. , 예쁘네. 남준은 문득 그렇게 생각했다.

 

남준은 그 때 무용실에서 춤을 추던 호석이 궁금해졌다. 남준은 그의 이름도 몰랐다. 열정적으로 춤을 추던 그 모습과, 마지막에 웃어주던 그 표정만이 머릿속에서 부유했다. 그 때 잠깐 보기만 해도 춤에 대한 열정이 느껴졌다. 공부 외에 다른 어떤 것에 대해 그렇게 열정을 가진다는 게 대단해 보였다. 그리고 멋있었다.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춤을 췄는지는 모르겠지만, 연습 하나 혹은 취미 하나라도 어영부영 장난처럼 하지 않고 땀을 흘려가며 한 동작 한 동작 힘을 실어 춤을 추는 그 모습이 너무 멋있었다. 그를 다시 만나고 싶었다.

 

체육대회를 했다. 5월이었지만 쨍하니 내리쬐는 햇빛은 여름처럼 덥기만 했다. 오전시간이 끝나고 점심을 먹는데 친구들이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영문 모를 남준은 숟가락만 쥔 채 그들을 멍하니 보기만 했다. 뭐해 새끼야 빨리 먹어. 옆 친구의 타박에도 남준은 상황파악이 안돼, 눈만 끔뻑끔뻑 거렸다. 오후 첫 타임이 댄동이라고. 다른 친구의 말에 남준은 아직도 뭐가 뭔지는 모르지만 그들의 말대로 빨리 밥을 먹기 시작했다.

 

남준이 다니는 고등학교는 댄스동아리가 이 지역에서 유명한 편이었다. 전국 댄스대회에서 몇 번 상도 탄 적 있었고 지역축제에 초청 받은 적도 많았다. 학교 학생들은 댄스동아리를 좋아했다. 이런 학교 행사 때 춤을 추는 그들을 보기 위해 자리싸움까지 날 정도였다. 이 모든 것을 남준은 몰랐다. 또 한 번 실감했다. 내 세계에서 한발자국만 벗어나도 이렇게 다른 세상이 나오는구나. 난 정말 우물 안 개구리였구나. 지겹기만 하다고 생각했던 학교생활이 사실은 지겨웠던 것이 아니었다. 제 세상이 재미가 없던 것이었다. 제 세상 밖은 다채로웠다.

 

친구 따라 앞자리를 차지한 남준은 운동장 한가운데서 대열을 맞추고 있는 그들을 바라보다 어, 하고 놀랐다. 야 저기 저 남자 누구야? 남준은 제 옆에 앉은 친구의 어깨를 툭툭 치며 물었다. , 쟤 정호석 우리랑 동갑. 남준은 그때서야 무용실에서 봤던 남자의 이름을 알 수 있었다. 야 근데 네가 웬일이냐, 다른 사람의 이름을 다 묻고. 친구의 말에 남준은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 쟤 춤을 본 적이 있어서. 남준의 말에 옆에 있는 친구는 물론 근처에 있던 친구들도 다 놀라 남준을 쳐다봤다.

 

 

대박, 김남준이 다른 거에 흥미를 가지다니.

 

존나 컬쳐쇼크다. 정호석이 진짜 춤을 잘 추기는 잘 추는가보다. 이 샌님도 알 정도면.

 

, 김남준이 알았으면 말 다했다. 전국의 고등학생이 정호석을 아는 거야.

 

와 근데 김남준 진짜 어떻게 봤냐?

 

 

남준은 친구들의 반응에 볼만 긁적였다. 그냥... 무용실에서. 우워어어어. 친구들이 놀랐다. 존나 학교에서도 단어장만 들여다보며 걷는 김남준의 시선을 뺏었다니 장난 아니다. 어때 김남준, 정호석 춤 장난 아니지? 친구들의 물음에 남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호석은 특히나 유명한 애라고 했다. 중학교 때부터 꾸준히 커버 댄스를 동영상 사이트에 올리면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이 학교에 정호석이 왔다는 소문이 돌았을 때는 학교가 술렁였을 정도라고. 많이 유명한 애였구나. 남준은 문득 생각했다. 하긴, 춤은 전혀 보는 눈이 없던 자신이 봐도 호석은 잘 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내가 그를 보고 느낀 만큼 다른 사람들도 그를 보며 그렇게 생각했겠구나. 다른 사람이 보는 그도 저렇게 반짝반짝할까. 남준은 점점 그를 알고 싶어졌다.

 

호석의 주위에는 항상 사람이 많았다. 비단 그가 유명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주위 사람들을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남준은 같은 반이 아니었음에도 그런 느낌을 받았다. 운동장에서, 분반 수업 때, 그 외 다른 곳에서. 그를 볼 때마다 남준은 자신도 모르게 제 시선이 그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 저 애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구나, 그래서 나도 저 애한테 이유도 모른 채 계속 끌리고 있구나. 문득 그런 생각을 했을 뿐이었다. 마냥 좋았다. 그 좋음의 이유는 모르겠지만 딱히 이유를 찾고 싶지도 않았다. 그 끌림의 종류가 무엇인지 조차도 모르겠지만 굳이 알 필요도 없을 것 같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연말 학교 축제에서 호석이 한 무대는 열광의 도가니였다. 모든 학생들이 정호석을 부르며 모두가 그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혼자서 오로지 춤으로만 그 무대를 채우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텐데 그는 아주 성공적으로 해내었다. 축제의 열기만큼은 웬만한 아이돌 저리가라였다. 춤을 추는 중간 중간 그의 표정에서 나오는 미소에 남준은 멍하니 바라봤다. 정말, 좋아하는구나. 춤을. 호석은 정말로 그 무대를 즐겼다. 모든 사람이 느껴질 정도로. 정말 좋아하는 것을 하면 저런 표정이 나오는구나.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아마 지금의 자신으로는 절대 느낄 수 없을 감정이었다. 남준은 호석이 부러워졌다.

 

2학년이 되었다. 새 학기가 시작되고 새로 배정받은 반에 들어간 남준은 제 눈앞에 보이는 호석에, 두 눈을 의심했다. 호석은 다른 친구 서너 명에게 둘러싸여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따금 허리를 젖혀가며 크게 웃어대는 호석을 남준은 저 뒤에서 멍하니 보기만 했다. 같은 반이구나. 도저히 현실감 없는 상황에 남준은 제 볼도 꼬집어 봤다. 현실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심장이 마구 요동쳤다. 손끝이 갑자기 저려왔다. 왜이래. 남준은 제 손을 꾹꾹 누르며 마사지를 했다.

 

호석은 여전히 밝았다. 주위는 알록달록 했고, 통통 튀었으며, 상큼했다. 곁에 있는 친구들도 그와 다를 바 없었다. 역시 호석이는 호석이 같은 친구들과 있는구나. 남준은 샤프 뒤를 찰칵찰칵 누르며 생각했다. 여전히 그와 자신과의 세계는 너무 달랐다. 그의 세계를 동경했지만 차마 그 쪽 세계로 발을 뻗기가 조심스러웠다. 저 친구들처럼 쉬는 시간마다 모여서 게임하고, 같이 밥을 먹고, 점심시간에는 축구도 하고, 주말에는 피씨방이나 노래방 같은 곳을 가면서 놀고 싶었지만 그들의 세계로 들어서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 떨어져버렸다고, 남준은 생각했다. 우울해졌다.

 

호석과 같은 반임에도 이야기 나누기는커녕, 마주보고 선적도 없었다. 그만큼 접점이 없었다. 남준은 크게 개의치는 않았다. 같은 반이니까 그의 사소한 것들을 더 알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3월이 지나고 4월이 되었다. 3월은 원하는 친구들과 앉게 해주었지만 4월부터는 제비뽑기로 자리를 정하겠다고 한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제비뽑기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남준의 앞에 호석이 앉게 되었다. 바뀐 자리에 앉자마자 호석은 몸을 돌려 남준을 마주봤다. 갑작스럽게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보게 된 호석의 얼굴에, 남준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헙 들이마셨다. 네가 우리 학교 전교 1등이라며? 진짜 멋있다! 호석이 남준에게 처음 건넨 말이었다. 남준은 그 말을 절대 잊을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또 손가락 끝이 저려오기 시작해 당황스러웠다. 온 몸에 전율이 이는 느낌이었다. 갑자기 제 몸이 왜 이러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남준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호석이 환하게 웃었다. 아 심장아. 남준은 두 손을 책상 밑으로 내려 제 바지를 잡으면서 꽉 주먹 쥐었다. 너 볼 때마다 공부 하고 있더라고. 호석은 남준의 책상에 팔을 올려놓고 턱을 괸 채 남준의 책상에 펴져 있는 문제집과 노트를 바라봤다. 너한테 꼭 부탁하고 싶은 게 있었어. 호석의 말에 남준은 의아한 표정으로 호석을 바라봤다. 호석은 남준과 눈이 마주치자 웃어보였다. 눈이 곱게 휘어졌다. 뭔데? 남준은 애써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며 물었다.

 

 

사실 내가 공부하는 법을 잘 몰라서.

 

...

 

1학년 때부터 너한테 공부 가르쳐 달라고 하고 싶었거든. 그래서 2학년 때 너랑 같은 반 된 거 알고 엄청 기뻤어.

 

.

 

근데 매번 볼 때마다 네가 너무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거야. 말 걸기 미안할 정도로. 그래서 타이밍만 재고 있었는데. 다행이다, 네 앞자리에 앉게 되어서.

 

다른 공부 잘 하는 친구들 있을 텐데...

 

 

남준은 생각 없이 그 말을 뱉다가 흡 입을 다물었다. 김남준 개자식아 지금 무슨 말을 하는 야. 이런 흔치 않은 기회를 네 손을 날릴 생각이냐. 호석은 남준을 보다가 푸핫 웃음을 터뜨렸다. 바보야, 너랑 친해지고 싶었다는 말이라고.

 

 

 

 

 

 

 

 

 

 

 

 

 

 

 

 

 

 

 

 

우리 처음 만난 날 아직도 기억해.

 

뜬금없는 남준의 말에 요리하고 있던 호석이 뒤돌아 남준을 봤다. 남준은 식탁에 앉아 호석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이 왠지 부끄러워 호석은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프라이팬을 봤다. 갑자기 웬 과거 이야기? 호석의 물음에 남준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냥. 갑자기 생각나서.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이 왜 갑자기 생각났데.

 

몰랐어? 난 너를 처음 만난 날이 매번 이렇게 문득문득 떠올라.

 

?

 

......

 

다른 많은 날을 놔두고 왜 처음 만난 날이 떠오르는 건데?

 

 

호석은 다시 남준을 보며 눈을 휘었다. , 눈부시다. 남준은 문득 생각했다. 그의 눈웃음은 그 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제 마음을 두들겼다. 매번 말하는 거지만. 남준은 그런 호석을 빤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내 빛이었어.

 

......

 

그 때도, 지금도.

 

, 오글거리게 그런 말 하지마.

 

 

호석은 홱 고개를 돌려 프라이팬만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의 빨간 두 귀를 숨길 수는 없었다. 남준이 바람 새는 듯한 웃음소리를 내자 호석의 목덜미까지 점점 열이 오르는 게 보였다. 남준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호석에게 다가갔다. 호석이 놀라지 않게 슬며시 그의 허리를 감아 팔에 힘을 주었다. 경계 없이 서 있던 호석은 남준의 힘에 그의 품에 안겼다. 남준은 그대로 목덜미에 제 입술을 묻었다. 따뜻한 호석의 체온이 그대로 느껴졌다. 남준이 입을 떼면서 다소 부끄러운 소리가 부엌에 살짝 울렸다. 불 앞에서 위험하게 장난치는 거 아니야. 호석의 말에 남준이 여전히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 푸스스 웃었다. 온 몸으로 퍼지는 간지러움에 호석이 살짝 몸을 비틀었다. 남준은 그를 안은 팔에 더 힘을 주었다. 남준은 호석과의 첫 만남을 절대 잊을 수 없었다. 남준은 운명을 믿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 만남은 그렇게 밖에 설명할 수 없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우울한 잿빛으로만 가득 찬 제 세상에 빛으로 들어온 그와의 첫 만남을. 이렇게 한 사람을 오랫동안 좋아할 수 있는 것도, 그 때 우연히 무용실을 지나쳤던 것도, 어쩌면. 문득 무용실 거울을 통해 보았던 그의 웃음이 생각났다. 지금과 같지만 다른 분위기의 그 웃음. 그때 예쁘다고 생각했던 건 어쩌면 그에게서 빛이 보였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고.




















' > 사랑옵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랩홉] 사랑옵다 6  (2) 2017.04.17
[랩홉] 사랑옵다 5  (2) 2017.04.13
[랩홉] 사랑옵다 3  (0) 2017.03.23
[랩홉] 사랑옵다 2  (1) 2017.03.07
[랩홉] 사랑옵다  (3) 2017.02.16

[랩홉] 사랑옵다 3

길/사랑옵다



원래 호석은 주말에 카페를 가지 않았다. 남준이 주말 밖에 시간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말은 오로지 알바한테 맡기고 둘은 주말을 즐기곤 했다. 그랬는데...

남준은 잔뜩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 이불로 몸을 둘둘 말아 앉은 채 옷을 입고 있는 호석을 멍하니 바라봤다. 방금 잠에서 깨어나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지 파악 안됐다. 호석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바지에 다리를 끼웠다. 양말까지 다 신은 호석이 남준에게 다가와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머리를 정리했다. 남준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려 잠이 가득한 눈만 끔뻑였다.


준아 진짜 미안해. 오늘은 카페 나가봐야 할 것 같아.

... ?!


잠이 확 깬다. 두 눈이 커다랗게 떠지며 호석을 바라보는 남준에, 호석은 괜시리 더 미안했다. 왜 나가? 남준의 목소리가 잔뜩 잠겨있었다.


오늘 신메뉴를 좀 내볼까 해. 근데 그걸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나 밖에 없어.

그걸 오늘 꼭 해야 해?

주말이잖아. 손님들이 많이 와.


눈에 띄게 시무룩해 하는 남준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던 호석은 살짝 허리를 숙여 남준을 안아 등을 토닥였다. 나갔다 올게. 호석의 말에 남준이 급하게 그의 손목을 잡았다. 그럼 나 너희 카페 가도 돼? 남준의 물음에 호석이 환하게 웃었다. 당연하지.

호석을 먼저 보내고 남준은 재빨리 화장실로 달려가 씻기 시작했다. 호석이랑 다른 데이트를 못하는 것은 좀 아쉽지만 카페 데이트도 나쁘지 않지. 준비하는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어서오세- 팀장님?

 

종소리에 맞추어 인사를 하던 지민은 익숙한 얼굴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테이블을 정리하고 있던 정국도 고개를 들어 입구에 서 있는 남준을 봤다. 팀장님이 이 시간엔 어쩐 일이세요? 그들의 물음에 남준은 어쩐지 멋쩍어 볼만 긁적였다. 와 팀장님 대박이다! 지민이 그대로 다다다 남준의 앞까지 튀어나왔다. 팀장님 사복 입은 거 처음 봤어요. 아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지민의 말에 남준이 맞장구쳤다. 항상 퇴근 하고 오는 곳이라 거의 정장 차림이었다. 완전한 사복을 입고 카페에 온 것은 처음이었다. 팀장님 진짜 옷 잘 입으시네요, 완전 멋있어요 그냥 모델인데지민이 양 손으로 엄지를 치켜세우며 하는 말에 남준이 피식 웃었다. 고마워요, 지민씨도 항상 멋있어요.

 

어이, 지금 내 애인한테 작업 거는 거냐. 갑자기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지민이 뒤돌아 호석을 보며 웃었다. 그럴 리가요. 호석은 남준에게로 다가왔다.

 

 

너는 그리고 네 애인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이 카페 안에 버젓이 숨 쉬고 있는데, ?

 

내가 너 말고 누구한테 눈 돌리냐?

 

말이나 못하면.

 

그거나 줘. 내가 매줄게.

 

 

남준이 호석에게 바짝 붙어 그의 손에 들린 에이프런을 가져갔다. 살짝 그를 안은 채 리본을 묶는 남준을 멀뚱히 쳐다보던 호석이 살짝 그의 어깨에 기대었다. 남준이 피식 웃는 게 느껴졌다. 다 묶은 남준은 그대로 호석의 목에 살짝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호석이 놀라 손으로 목 부근을 가렸다. 야 뭐하는 거야, 일터에서. 호석의 타박에 남준은 어깨만 으쓱였다. 아직 오픈도 안했는데, . 지민은 두 눈을 가리며 뒤돌았다. 아 사장님, 사장님 때문에 커플만 보면 온 몸이 간지러운 병에 걸릴 것 같아요.

 

그럼 오늘은 팀장님도 일일 알바 하시는 거예요? 정국이 직원실에서 나오면서 하는 말에 호석이 기겁을 하며 양 손을 저었다. 안 돼, 절대 안 돼 준이한테 뭐 하나 시키지 마. 너무도 단호히 말하는 호석에, 남준은 괜히 머쓱해져 입만 삐죽였다. 아이 사장님, 애인 너무 아끼는 거 아닙니까? 정국이 카운터로 들어가며 장난스레 말했다. 야 말도 마. 호석은 손을 저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혹여나 일손이 부족하다고 해도 절대 준이는 시키지 마.

 

왜요?

 

되게 단호하게 말하시네요?

 

왜 호석아. 나 잘할 수 있어.

 

 

남준의 말에 호석이 남준을 째려봤다. 준아, 다른 건 몰라도 너한테 카페 일은 시킬 수 없어. 남준은 제 성격을 아주 잘 알고, 호석도 무슨 이유로 그렇게 반대를 하는지도 매우 잘 알아서 무어라 반박할 수도 없었다. 왜요, 왜 그러는데요. 호석이 유난히 단호하게 반대의사를 보이는 것이 어딘가 미심쩍어 지민이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맞아요, 하필 오늘 주말이라서 손님이 안 그래도 많이 오시는데. 정국도 오픈 준비를 하면서 은근슬쩍 붙었다. 호석은 살짝 한숨을 쉬었다. 그의 한숨을 들은 남준은 괜히 호석의 손가락만 만지작거렸다.

 

 

너희한테 준이가 어떻게 비춰지는지는 모르겠지만 얘 알고 보면 엄청 허당이야.

 

진짜요?

 

안 돼 안 돼 절대 안 돼. 얘한테 집안일 시키면 절대 안돼.

 

 

고개까지 절레절레 저어가며 반대하는 호석에 결국 지민과 정국은 웃음을 터뜨렸다. 남준은 고개만 숙인 채 호석의 손만 계속 주물 거렸다. 안할게. 어쩐지 풀이 죽은 목소리에 호석은 남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카운터 안에 들어가던지 테이블에 앉아 있어. 호석의 말에 남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1인 테이블에 가는 남준의 뒷모습을 보던 지민이 호석의 옆에 서서 입을 가린 채 살짝 물었다. 대체 얼마나 허당이면 사장님이 그렇게 기겁을 해요. 호석은 쯧 혀를 찼다.

 

 

말도 마. 설거지 시키면 무조건 접시 하나는 깬다니까. 쟤한테 테이블 닦으라 하면 테이블 부러질걸.

 

헐 진짜요?

 

물건 다루는데 조심성이 없어서 안 돼. 옛날부터 집안일이든 카페든 도와주고 싶어 하는데 본인도 자기를 아니까 섣불리 말 못 하는 거지.

 

진짜 모든 게 다 완벽해 보이시는데.

 

그런 거라도 허당스러워야 인간미 있지. 자자, 이제 오픈 한다.

 

 

호석의 말에 정국은 밖으로 가 팻말을 돌렸다. OPEN.

 

 

 

 

 

호석의 카페는 항상 사람이 많았다. 오전에는 그나마 널널한 편이지만 오후만 되면 어디서 사람이 그렇게들 오는지 세명이서 거의 정신을 놓는다. 제발 알바 좀 더 뽑자는 두 알바생들의 하소연에도 호석은 단호했다. 난 아무 알바나 안 뽑아. 실제로 지민과 정국 본인들은 그냥 이력서 보고 일손 부족해 뽑힌 줄 알고 있지만 호석의 그 깐깐한 기준에 당당히 합격한 아이들이었다. 이 카페는 호석의 모든 것이 담겨 있는 곳이었다. 아주 소중한 공간이었다. 이런 소중한 공간에 소중한 인연을 만들고 싶은 것이지, 단순히 돈을 주고 인력을 쓰고 싶지 않았다. 그런 소중한 인연을 아무렇게나 뽑고 싶지도 않았다. 또한 제 카페는 모든 메뉴를 직접 만드는 핸드메이드 카페였다. 모든 디저트, 커피, 샌드위치 등을 직접 만드는 만큼 그런 것에 일가견이 있어야 했다. 이런저런 기준들에 지원 하는 사람은 있겠냐고 남준이 타박 했지만, 예상을 깨고 상당한 수의 이력서가 들어왔었다. 지민과 정국은 그렇게 심사숙고 해서 뽑힌 소중한 인연들이었다.

 

호석은 아메리카노와 조각 케이크 하나를 남준의 테이블에 두었다. 이게 이번에 선보일 신상이야? 남준의 물음에 호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너 제일 먼저 주려고 지민이랑 정국이한테도 안줬으니까 먹고 심사평 좀. 호석의 말에 남준은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나 진짜 솔직히 말한다.

 

바라던 바야.

 

막 진짜 맛없으면 맛없다고 한다.

 

알겠다니까.

 

 

남준은 제 앞에 놓인 케이크를 유심히 봤다. 아니 그것보다 나 블루베리 별로 안 좋아하는 거 알면서 굳이 블루베리를 주냐... 남준은 속으로 작게 투정하며 한입크기로 잘라 입 안에 넣었다. ...

 

 

호석아.

 

.

 

나 진짜 솔직히.

 

.

 

완전 맛있어. 대박이야.

 

진짜야?

 

진짜라니까. 네가 만든 것 중에 안 맛있는 게 어디 있냐.

 

......

 

... 솔직히 내가 객관적일 수는 없겠지만 객관적으로 맛있어.

 

 

호석은 말없이 테이블 위의 케이크를 카운터로 가져갔다. 엇 호석아, 나 먹을 수 있는데, 호석아? 남준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포크를 든 채 그의 뒤를 따랐다. 지민과 정국이 있는 곳까지 온 호석이 케이크를 내밀었다. 너희가 먹어보는 것이 훨씬 더 빠르겠다.

 

 

저희가 먹어봐도 돼요?

 

안될 건 또 뭐 있어. 너희들도 여기서 일하는데. 남준이는 못 믿겠어.

 

아니, 호석아. 이번에는 진짜 너라서 그런 거 아니고 정말 맛있어.

 

얘가 이런 말을 한 게 한두 번이 아니라서.

 

 

먹어먹어. 호석이 손을 내밀며 하는 말에 지민과 정국은 포크를 가져와 한 입씩 입에 담았다. 헐 대박. 지민이 깜짝 놀라며 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 정국도 두 눈이 동그래진 채 입을 오물오물 씹으며 호석을 바라봤다.

 

 

사장님, 진짜 맛있어요. 대박.

 

그래?

 

거 봐, 맛있다니까 진짜.

 

 

살짝 투정 부리는 듯 한 남준의 말에 호석은 푸스스 웃으며 그의 엉덩이를 토닥였다. 미안해. 남준은 휘어진 호석의 눈을 보곤 그의 머리를 헝클였다.

 

 

 

 

 

턱을 괸 채 카페를 쭉 둘러본다. 다섯 테이블 정도의 사람들이 있었다. 커피 향이 카페 안을 채우고, 분위기 있는 노래가 잔잔히 들려온다. 간혹 사람들의 말소리가 크게 들리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조용한 분위기이다. 오전에는 이렇게 평화롭구나. 남준은 라떼를 한 모금 머금으며 생각했다. 항상 왔던 시간이 7시에서 9시 사이라, 평소 호석의 카페는 어떤지 전혀 몰랐다. 오후와 저녁때만 되면 항상 손님들이 바글바글 하고 미친 듯이 주문해서 정신을 놓을 정도라고 하던데 아직 실감이 나지는 않았다. 그렇게 손님이 많나. 생각에 잠긴 남준은 문득 든 생각에 인상을 찌푸렸다. 카페에서 일하는 게 제일 위험하다던데... 애인 사귀려면 카페 알바 하라는 말도 있고... 아 잠깐만 호석이 카페 하면서 한번도 대쉬 안 받아 본 적은 없을 거 아냐. 한번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니 이것저것 하나하나 다 거슬리기 시작했다. 아니 알바 두 명이나 있는데 왜 굳이 자기가 카운터에 있는 거야. 입술이 불퉁하니 나왔을 때 즈음, 딸랑이는 종소리와 함께 여자 둘이 들어왔다.

 

남준은 두 눈에 힘을 줬다. 여자가 무어라 말했다. 호석은 웃으면서 포스기를 터치했다. 아니 왜 웃어줘. 남준의 입이 더 나왔다. 그 때 지민이 트레이를 들고 왔다. 팀장님, 이거 사장님이 팀장님 주시라고 하셨어요. 남준은 바로 괴고 있던 턱을  빼고 웃어보였다. 고마워요. 트레이는 라떼 한 잔과 조각 케이크가 하나 있었다. 남준이 제일 좋아하는 치즈 케이크였다. 지민씨. 남준의 부름에 지민이 뒤돌아보았다.

 

 

평소에도 호석이가 카운터 봐요?

 

. 보통은 다 사장님이 보세요. 정국이가 커피 만들고 제가 디저트 만드니까요.

 

호석이 카운터 볼 때면 저렇게 막 웃고 그런가요?

 

... , 일단 서비스업이니까요.

 

...

 

 

머리로는 이해하는데 가슴으로는 이해 안 된다는 게 이런 느낌인가. 남준은 왠지 모를 불편함에 인상만 찌푸렸다. 당연히 손님한테는 친절해야 하고 일종의 서비스업이고 다 안다. 아는데 꼭 저렇게 환하게 웃어줘야 하나. 아는데 싫다. 남준은 눈웃음을 지으며 트레이를 내미는 호석을 조금도 놓치지 않고 뚫어져라 쳐다봤다. 손님을 보내고 시선을 살짝 돌린 호석은, 남준의 눈빛에 깜짝 놀랐다. 카운터에서 나와 남준에게 다가온 호석은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입 맛 없어? 왜 하나도 안 먹었어.

 

질투나.

 

?

 

웃어주지 마.

 

뭔 소리야.

 

그렇게 웃어주지 말라고. 꼭 그렇게 눈웃음까지 지어야겠냐?

 

 

. 호석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 와중에도 남준은 웃음기 하나 없는 진지한 얼굴로 호석을 쳐다봤다. 나 농담 아니야. 남준의 말에 호석은 손을 까딱였다. 알았어, 알았어.

 

 

나 일하는 거야. 너한테 하듯이 감정 섞인 거 아니야.

 

아 싫어. 싫다고.

 

뭐지. 오늘따라 왜 이렇게 투정 부리지?

 

너는 감정 없이 웃어줘도 남은 안 그렇게 볼 수도 있잖아.

 

아니야. 아무도 그렇게 안 봐.

 

내가 그렇게 봤었잖아. 너 웃는 거 보고 내가 반했잖아.

 

너는!...

 

 

호석은 말문이 막혔다. 갑자기 얼굴에 열이 오르는 느낌에 호석은 괜히 손부채질 했다. 봐봐, 너 할 말 없지. 남준은 여전히 진지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나도 그랬는데 여기 오는 100명 중에 한명이 나랑 똑같을지 어떻게 알아? 계속되는 남준의 말에 호석은 할 말을 잃었다. 그래, 내가 미안해. 결국 호석이 사과했다.

 

 

앞으로는 눈웃음 안 지을게.

 

......

 

왜 그렇게 봐.

 

...아니야.

 

 

남준은 문득 든 생각을 결국 말하지 않은 채 커피를 한모금 마셨다. 그냥 카페 안 나가면 안 되냐고 말하면 맞겠지. 남준은 괜한 욕심은 내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아직 안 바쁘면 나랑 놀아줘. 남준의 말에 호석은 주위를 둘러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심심하면 집에 가도 돼.

 

아니. 너 보는 거 별로 안심심해.

 

너무 뚫어지게 쳐다보지 마. 다 느껴져.

 

그렇게 뚫어지게 쳐다보지는 않았어.

 

네가 너무 노골적으로 바라보는 게 다 느껴져.

 

계속 쳐다봐야겠네. 다른 사람한테 한눈팔지 말라고.

 

내가 누구한테 한눈을 팔아. 너 아까부터 좀 이상하다?

 

 

호석은 팔짱까지 끼고 쭉 남준을 훑어봤다. 남준은 괜히 시선을 피하며 케이크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뭐야, 또 무슨 일인데. 호석의 말에 남준은 어깨만 으쓱해 보였다.

 

 

무슨 일은. 별 일 없어.

 

별 일 없는 게 아닌데? 아까부터 막 투정 부리고, 질투난다 그러고, 한눈 파니 어쩌니 그런 소리 하고. 이상하잖아.

 

여기 카페, 여자들 많이 오나?

 

여자? ... 일단은 카페니까. 확실히 여성 손님이 많긴 하지.

 

너 카운터 안보면 안 돼?

 

 

호석이 인상을 팍 찌푸리자 남준은 금방 또 시선을 회피하며 라떼를 한모금 마셨다. 너 내 일 방해할거면 그냥 가. 호석의 단호한 말에 남준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야 내가 무슨 일을 방해 하냐...

 

아 그냥 오지 말라 할걸. 호석은 아침에 자신이 한 말을 후회했다. 아니, 오지 말란다고 정말 안 올 애는 아니지만. 남준이라면 무작정 찾아오고도 남을 사람이기는 했다. 남준은 제 앞에 놓인 커피잔 끝을 만지작거리다가 호석을 쳐다봤다. 그럼 내가 카운터 보면 안 돼? 남준의 제안에 호석이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어차피 설거지 이런 거는 안 시킬 거니까. 카운터 정도는 내가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 그러면 그럴래? 어차피 너 여기 계속 앉아만 있으면 힘들기도 하고. 주문 받는 것 정도는.

 

어어. 내가 할게. 내가 할래.

 

그래 그럼.

 

 

호석은 자리에서 일어나 직원실로 향했다. 남준도 그를 따라나섰다. 호석이 직원실로 들어가자 남준도 재빨리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호석의 손목을 잡아 당겼다. 순간적인 힘에 앗 하는 순간 입을 맞춰 오는 남준에, 호석은 정신이 없었다. 부드럽게 들어오는 남준에게서 라떼 향이 났다. 호석이 남준의 목을 팔로 감자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점점 밀리는 힘에 뒷걸음질 치던 호석은 락커에 등이 닿았다. 남준은 그의 머리를 감쌌다.

 

남준은 버드키스로 가볍게 쪽 하고 나서야 완전히 입술을 뗐다. 살짝 숨을 몰아쉬던 호석이 그를 살짝 올려보다 팔뚝을 아프지 않게 쳤다. 뭐하는 거야. 남준은 그 손을 잡아 깍지까지 꼈다. 밖에서 할 수는 없잖아. 호석은 헛웃음을 지으며 락커 하나를 열어 에이프런을 꺼냈다. 네가 해주는 거야? 남준의 물음에 호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해줄게.

 

호석은 허리 쪽으로 손을 뻗어 리본을 매기 시작했다. 멀뚱히 보던 남준은 호석을 그대로 안았다. 호석이 피식 웃었다. 네가 안겨 오길래. 남준의 말에 호석은 아예 소리 내어 작게 웃었다. , 다 됐다. 호석이 손을 슥 빼자 안은 손에 더 힘을 준 남준이 그의 이마와 볼에 한번씩 입을 맞췄다. 가자. 아쉬운 듯 한 번 더 꽉 안은 남준이 호석의 등을 두어 번 토닥이며 떨어졌다.

 

 

 

 

 

점심 때 즈음 되니 사람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점점 손이 빨라지기는 하지만 아직 정신 놓을 정도는 아니었다. 이 정도는 할 만 한데? 남준은 속으로 생각하며 카페에 들어오는 손님께 인사했다. 이번에도 여성 두 분이다. 그들은 카운터에 서 있는 남준을 보더니 살짝 놀란 듯 보였다. 주문하시겠습니까? 남준의 물음에 그들은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놀라기만 했다. 남준은 영문 몰라 고개만 갸웃했다.

 

 

여기 일하시는 거예요?

 

아주 일 하는 건 아니고 오늘 하루만 돕는 겁니다.

 

여기 사장님이랑 아는 사이세요?

 

.

 

 

제 애인인데요. 남준은 하고 싶은 말을 꾹꾹 눌러 참았다. 여기 진짜 잘생긴 사람만 뽑나봐. 여자애들끼리 속닥거리며 하는 말에 남준은 괜시리 웃음이 나와 고개를 숙인 채 손으로 입을 살짝 가렸다. 호석이가 외모를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어떻게 뽑다보니 알바생 두 명의 얼굴이 여자들한테 인기 있는 얼굴인가보다.

 

 

사장님 친구분이세요?

 

... ... .

 

친구분도 되게 잘생겼네요.

 

... 감사합니다.

 

오늘 하루 왜 도와주시는 거예요?

 

? ... 원래 오늘 저랑 약속 있었는데 부득이하게 여기 일이 생겨서 그 김에 저도 돕는 거예요.

 

어머, 그럼 오늘 사장님 계세요?

 

 

, . 눈에 띄게 좋아하는 기색에 남준은 왠지 언짢아졌다. 뭐야, 자기가 왜 기뻐해. 안 그래도 아까부터 예민해져 있던 남준에게 그들의 표정 하나하나, 말 하나하나 다 거슬리기 시작했다. 친구가 이렇게 유명한 카페 사장님이면 정말 뿌듯하시겠어요. 한 여자의 말에 남준은 대충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 기분 좋기는 하죠. 인터넷에서도 몇 번 글 봤어요.

 

엄청 엄청 유명해요. 저희 여기 근처 ○○대학교 다니는데 거기 대학교 다니는 사람들 중에 여기 모르는 사람 없을 걸요? 여기 근처 회사원들도 많이 오고.

 

그 대학교에서 커피 마시러 오기에는 좀 멀지 않아요?

 

멀어도 감수하고 오는 거죠. 여기 케이크 진짜 맛있거든요. 사장님이랑 알바생도 잘생겼고.

 

 

아 예... 남준은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하긴 호석은 옛날부터 인기가 많았다. 그는 비단 외모 뿐 만이 아니라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어쩌면 자신이 그에게 반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에게 한없이 휩쓸리기만 했던. 호석은 죽어도 모르겠지만. 자신이 불안 해 하는 것에는 나름 이유가 있긴 했다. 호석은 절대 이해 못하겠지만. 너는 가만히 있기만 해도 사람들을 끌어당겨 네 옆에 다가왔고, 나 역시 그런 너에게 주체 없이 끌려 다니다 네 눈웃음에 반했는데. 다른 사람이라고 안 그런다는 보장이 없다. 호석을 못 믿는 게 아니었다. 그냥 그의 주위에 흑심을 가지고 다가올 다른 사람이 눈에 거슬릴 뿐이다.

 

 

사장님 혹시 애인 있어요?

 

. 있어요.

 

 

한 여자의 물음에 남준은 단호히 말했다. 여자는 아쉬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어쩐지 번호 물어봤을 때 어색하게 웃으면서 애인이 싫어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냥 거절의 의미인 줄 알았는데. 남준은 기가 차 속으로 헛웃음을 뱉었다. 벌써 번호까지 물어봤단 말이지. 이래놓고 아무도 그렇게 안본다고. 오늘 내가 카운터 보길 잘했네. 여러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쪽은 이름이 어떻게 돼요? 명찰이 없어서... 옆에 있던 다른 여자가 물었다.

 

 

, 김남준 입니다.

 

여기 자주 오세요?

 

네 그럼요. 거의 매일 옵니다.

 

아 그래요? 저희도 여기 되게 많이 오는데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요.

 

거의 마감할 때 즈음에 와서 그런가 봐요. 저 퇴근하고 오거든요.

 

나이 물어봐도 돼요?

 

저 나이 많아요. 전공서적 들고 계시는 두 분한테 나이 얘기하기 민망할 만큼.

 

그래도 30대 중반까지는 안가겠죠.

 

 

남준은 그녀의 말에 웃기만 했다. 정말 30대예요? 살짝 놀라서 묻는 말에 남준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직 30대는 아니에요. 그쪽은 애인 있어요? 당돌한 그녀의 물음에 남준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웃었다. 호석이 생각났다. 생각난 김에 보고 싶다. , 있어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남준에, 여자는 가볍게 웃었다. 좋은 사람은 역시 이미 애인이 있네요.

 

오랜만이에요, 오늘도 오셨네요? 갑자기 옆에 다가와서 인사하는 호석에  여자 둘은 살풋 웃으며 인사했다. 사장님 오늘 주말에 오셨다 해서 놀랐어요. 호석에게 관심을 보였던 여자의 말에 남준이 그녀를 힐끗 쳐다봤다. 호석은 웃으며 남준의 손목을 잡았다. 저희는 잠시 할 이야기 있어서 실례하겠습니다, 정국아 여기 주문 좀 받아줘! 정국에게 일을 맡긴 채 남준의 손목을 잡고 끌고 가는 호석의 행동에, 남준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끌려가기만 했다. 또 다시 직원실에 들어간 호석은 남준을 밀어놓고 문을 잠근 후 뒤돌아 남준을 봤다.

 

 

너는!

 

, !

 

 

동시에 나온 말에 둘 다 입을 꾹 다물었다. 잠시 정적이 돌았다. 먼저 얘기해. 남준이 먼저 양보했다.

 

 

너는 카운터 보라고 했지, 누가 손님이랑 잡담 하라고 했어?

 

...그건 미안. 그런데 계속 물어보잖아. 그리고 그 여자 너한테 관심 있더라? 막 엄청 친한 것 같던데.

 

단골이야. 자주 오는 분이니까 당연히 안면 트고 그러지. 이런 개인 카페에 단골손님이 얼마나 중요한데.

 

막 애인 있냐고 물어보고 전화번호도 물어봤다고 그러던데? 내가 이래서 걱정 했던 거야. 내가 넌 믿는데 네 주위에 오는 사람은 못 믿겠다고.

 

, 나 애인 있다고 했어. 그리고 너도 막 여자한테 웃어주고 그러더만! 웃겨 진짜.

 

나 그 사람보고 웃은 적 없어.

 

막 그 여자들이랑 대화하다가 눈웃음 날리고 보조개 패이도록 웃고 난리나더만.

 

몰라. 나 네 생각 하면서 웃은 기억 밖에 없어.

 

 

호석은 무어라 더 말하고 싶어도 말문이 막혀 결국 뾰로통한 표정으로 남준을 노려봤다. 그렇게 봐도 설렌다. 남준의 말에 호석이 헛웃음을 지었다. 네가 카운터 보겠다는 말, 그냥 도와주려고 한 말은 아니지. 호석의 말에 남준은 어깨를 으쓱였다.

 

 

나 솔직히 말해도 돼?

 

말해.

 

카페에서 알바를 하면 커플 생길 확률이 많아진대. 실제로 보면 카페 알바생한테 번호 물어보는 사람도 많고같이 일하다가 눈 맞는 경우도 많고.

 

그래서 지금 내가 그럴 것 같다는 거야?

 

나 질투 많은 거 알잖아, 호석아. 네가 그렇다는 게 아니라 너한테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과 마주한다는 것조차 나는 보기 불편하다는 거야.

 

, 나는 안 그런 줄 알아? 나도 너처럼 막 너 좋다고 그러고, 너 멋있다 그러고, 나한테 너 사귀는 사람 있냐고 물어보면 내가 얼마나 불안한 줄 아냐?

 

... 그런 사람이 있었어?

 

당연하지! 이씨, 생각하니까 또 열받네. 대학생 때부터 그것들 쳐내느라고 내가 진짜...

 

 

머리를 마구 헝클이며 짜증내는 호석을 멍하니 바라보던 남준은 결국 피식 웃으며 호석에게 다가갔다. 머리를 다시 차분하게 정리를 해준 남준은 이마에  맞추고 허리를 살짝 숙여 그와 시선을 맞췄다. 호석아. 남준의 부름에도 호석은 눈만 돌려 그의 시선을 피했다. 호석아. 다시 불렀다. 그의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에 여과 없이 흘러들어왔다. 그렇게 부르면 안볼 수가 없잖아. 호석은 여전히 뾰로통한 표정으로 남준을 힐끗 봤다.

 

 

미안해. 내가 너무 나만 생각했네.

 

......

 

에이, 미안해.

 

 

남준은 말꼬리를 늘이며 호석을 확 안아 좌우로 몸을 천천히 흔들었다. 그의 품에 꽉 안겨있던 호석은 결국 피식 웃었다. 아 김남준, 미워할 수가 없다. 호석의 말에 남준이 그의 볼에 쪽 가볍게 키스했다

 

 

 

 

 

 

 

 

 

 

***

 

 

 

 

 

 

 

 

 

 

오후에 한차례 폭풍이 지나가고 저녁 때 즈음 되니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남준은 정신없이 카운터를 보면서 혀를 내둘렀다. 매일을 이렇게 셋이서 카페를 봤었단 말이야? 작업량이 많은 남준도 놀랄 만큼 바쁘기 그지없었다. 준비해놓은 디저트가 다 빠질 때 즈음부터는 조금 여유롭다는 지민의 말은 사실이었는지 이제야 테이블에 좀 앉아 쉴 수 있었다. 많이 힘들었지, 괜히 나 때문에 쉬는 날 또 일하고. 호석은 미안한 표정으로 남준의 앞에 커피를 내려놓았다.

 

 

호석아. 진짜 알바 한 명이라도 더 들이면 안 돼? 너 이러다 과로사로 쓰러질 것 같아서 그래.

 

그 정도는 아니야. 우리보다 더 바쁜 데도 많은데.

 

조금이라도 힘들다 생각하면 꼭 알바 더 뽑아, 알았지?

 

알았다니까.

 

 

남준은 기어코 호석에게 답을 받고 나서야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여기서 좀 쉬어. 남준의 어깨를 두어 번 토닥이고 돌아가는 호석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던 남준은 문득 든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호석이 테이블 정리를 하고 있는 동안 정국에게 다가간 남준이 무언가를 부탁했다.

 

 

 

 

 

카운터 옆에 있는 바 테이블에 두 손으로 턱을 괸 채 가만히 앉아있던 호석은 갑자기 훅 나타난 남준에, 깜짝 놀라 몸을 순간적으로 뒤로 젖혔다. 아 깜짝이야. 가슴에 손을 얹은 채 안도의 한숨을 내쉰 호석은 의아한 표정으로 남준을 바라봤다. 뭐야 갑자기? 그의 물음에 남준은 살풋 웃으며 커피잔을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김남준 스페셜 라떼 한 잔 나왔습니다.

 

 

제 사랑도 가득 담았으니 따뜻할 때 드세요.

 

, 뭐야아. 아까워서 못 마시겠네.

 

 

호석은 라떼아트까지 그려져 있는 커피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말꼬리를 늘이는 걸 보니 부끄러운가보다. 남준은 제 앞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쑥스러워 하는 호석을 보고 웃으며 살짝 호석 쪽으로 더 밀었다.

 

 

와중에 또 라떼 아트까지 했네.

 

내가 할 줄 아는 게 이거 밖에 없어서.

 

흐흥. 이 하트가 네 사랑이야?

 

그럼요. 하트는 그대에게만 주는 거예요.

 

다른 사람한테 라떼아트는 해주나 봐?

 

정국씨랑 지민씨한테는 해줬지. 나뭇잎으로.

 

 

호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팀장님! 정국의 부름에 남준은 고개만 돌려 그를 쳐다봤다. 정국과 지민이 커피 잔을 들고 그들 쪽으로 다가왔다

 

 

팀장님 라떼아트 어떻게 배웠어요? 팀장님도 커피 내릴 줄 아세요?

 

아뇨. 라떼 밖에 못해요. 그것도 라떼아트 때문에 배운 거지, 저 사실 커피 같은 거 잘 몰라요.

 

근데 솜씨가 장난 아니에요. 이런 라떼아트 연습 되게 오래 하셨을 것 같은데.

 

제가 하고 싶어서 배운 거예요. 그래도 애인이 카페 하는데 라떼아트 정도는 해주고 싶어서.

 

 

뭘 그런 것까지 이야기 하냐. 호석은 아닌 척 하면서 기분 좋은 듯 표정에 다 드러났다. 남준은 그런 호석이 귀여운 듯 바라보았다. ... 정국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결국 잔을 바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뭐야, 그럼 팀장님 진짜 사장님한테 해주려고 그냥 라떼아트 배운 거예요? 지민의 물음에 남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티비에서 봤는데 라떼아트 너무 예뻐서 나도 해주고 싶다고 생각했었거든요.

 

 

나도 몰랐었어. 어느 날 갑자기 커피를 딱 내오는 거야. 그래서 뭔가 봤더니 라떼아트까지 예쁘게 되어있어서 깜짝 놀랐지. 아 그때도 이 모양이었던 것 같은데.

 

맞아. 하트는 변함없어.

 

그때도 너 커피 주면서 고백 했던 것 같은데.

 

내가 하는 말이 다 거기서 거기지, .

 

 

커플의 대화에 지민과 정국은 점점 짜게 식어갔다. , 괜히 물었나. 항상 남준이 오면 일터가 달달하다 못해 닭살스러워졌다. 당사자 둘은 그 사실을 모르는 듯 했지만. 참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팀장님 겁나 사랑꾼 아니냐. 지민의 말에 정국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가 10년 사귄 커플은 아니야.

 

 

 

 

 

 

 

 

 

 

 

 

 

 

 

 

 

 

 

 

---

 

분량 조절 실패...

쓰고 싶었던 장면 하나 때문에

이게 이렇게 길어질 줄이야...


' > 사랑옵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랩홉] 사랑옵다 6  (2) 2017.04.17
[랩홉] 사랑옵다 5  (2) 2017.04.13
[랩홉] 사랑옵다 4  (0) 2017.04.08
[랩홉] 사랑옵다 2  (1) 2017.03.07
[랩홉] 사랑옵다  (3) 2017.02.16

[랩홉] 사랑옵다 2

길/사랑옵다



남준은 괜찮다 괜찮다 손을 내저었지만 팀원들의 성화에 결국 가장 상석에 앉았다. 이번 프로젝트는 팀장님의 덕이 컸고 팀장님 덕분에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었다며 칭찬을 받는 것이 영 어색했다. 본인이 칭찬 하는 것은 잘하면서 칭찬 받는 것은 어색해 하는 남준이었다. 남준은 그 자리가 못내 불편했다. 능력에 맞는 자리에 앉는 것은 당연했지만 남준은 100% 본인의 능력으로 오른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번 일은 꽤나 까다로웠는데 여러분들 덕분에 일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할 수 있었습니다. 내일 출근 걱정은 잠시 접어두시고 오늘을 즐겨주세요.


남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환호와 함께 술잔이 부딪쳤다. 꽤나 분위기 좋은 회식이었다. 남준은 회식이 처음이라 낯선 느낌이 들긴 했지만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팀장님은 여기 입사한지 얼마나 되셨어요?


한창 분위기가 달아올랐을 무렵, 남준의 곁에 앉아있던 한 사원이 넌지시 물었다. 그냥 서로 대화 나누는 정도의 소리였기 때문에 근처에 있는 사람 외에는 그 목소리가 미치지 않았다. 끝 쪽 테이블에서는 이미 그쪽끼리 회식을 즐기고 있었다. 그의 물음을 들은 다른 사원들 역시 궁금한지 남준을 힐끔 쳐다보았다.


아 저 입사한지 좀 됐어요.

그래요?

이제 7년 정도 됐나.


남준의 말을 들은 몇 사람은 순간 헉 숨을 들이켰다. 회사 다닌 지 7년이나 되었으면 대체 지금 나이가 얼마라는 거지. 되게 젊은 팀장님 인줄 알았는데 날짜 계산 해보면 생각만큼 그리 젊은 나이가 나올 수 없다. 팀장님 아직 20대라고 들었는데... 사원들의 표정에서 혼란스러움이 드러났다. 남준은 그런 사원들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멀뚱히 앉아 그들만 끔뻑끔뻑 볼 뿐이다.


저희가 사실 팀장님 아직 30대 아닌 줄 알았거든요.

아 네. 내일모래 계란 한판이 되네요.

?

내년에는 저도 서른이네요.

...


사원들의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그럼 22살에 입사를 했다는 건가. 사원들의 복잡 미묘한 표정을 본 남준은 어색하게 웃으며 옆머리만 만졌다. 이래서 나이 얘기는 안했던 것이다. 이런 사소한 것이라도 혹여 뒷말이 나올까 조심스러웠다. 남준은 본인 모르는 뒷말이 나오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차라리 앞에서 불만을 얘기 했을 때 바꿀 수 있으면 바꾸고 거를 건 거를 수라도 있을 텐데. 사람 많이 모인 곳에서 뒷말 안 나오기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노력했다. 제 애인은 그런 거 하나하나 다 신경 쓰지 말라고 했지만 도저히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왜 네가 나서서 인생 피곤하게 사냐. 애인의 물음에 남준은 웃어 보이기만 했었다. 그러게.


팀장님이 가끔 사오시는 도넛이랑 커피가 정말 맛있더라고요.

그렇죠? 제가 정말 좋아하는 곳이에요.

저도 궁금해서 어디 있나 쳐봤는데 꽤나 유명하더라고요.

그래요?

사람들이 줄 서서 산다고 그랬어요.

맞아요. 맛있어요


남준의 미소에 여사원들은 남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그의 미소는 따라 웃게 되는 힘이 있었다.


그 카페 어디냐고 물어봐도 안 가르쳐 주시고.


막내 사원이 장난스럽게 투정부리듯 말하자 남준은 푸핫 웃었다. 예의 그 다정한 미소가 아닌 고개를 숙이면서 소리를 내어 웃는 남준에, 주위 사람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남준은 손을 내저었다. 미안해요,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는데 제가 질투가 좀 심해서요. 그의 말에 더욱 의아한 표정이 지어졌다. 아리송한 말이다.


사실 저희끼리 그 카페에 팀장님이 좋아하시는 분 있는 거 아니냐고 얘기한 적 있었거든요.

어떻게 아셨어요? 그 카페 제 애인이 하는 곳이에요.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이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남준의 대답에 여사원들은 제 귀를 의심했다. 애인? 방금 애인이라고 했지?


근데 정말 애인이라서 그런 거 아니고 진짜로 맛있어서 자주 사오는 거긴 해요. 근데 거기다 대고 또 제 애인이 만든 거예요 하기엔 좀 그래서본의 아니게 애인 없는 척 하게 된 건가요?


남준의 말에 아니라며 손을 내저으면서도 어쩐지 아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제가 따로 시간을 안내서 저를 알 수 있는 기회가 적긴 했네요. 혹시 저에 대해 궁금한 점 있으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괜찮으니까 물어보세요. 저는 정말 우리 팀 만큼은 서로 살가웠으면 했거든요. 안 그래도 애인한테 혼났어요, 사원들이 저를 너무 어려워하면 어떡하냐고. 살풋 웃으며 하는 말에 여사원들은 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그래... 저런 남자가 애인이 없을 리가 없지...

 

 

그럼 이때까지 팀장님은 애인분 때문에 일찍 퇴근하신 거예요?

 

애인 때문이라는 말은 좀 그렇고... 제가 빨리 보고 싶어서 그러는 거니까요. 최대한 일을 빨리 마무리 하고 가는 편이긴 하죠.

 

애인분이랑 얼마나 되셨어요?

 

... 알고지낸 건 12? 정도 됐고 사귄지는 10?

 

 

덤덤하게 말하지만 실로 어마어마한 기간에 입이 떡 벌어졌다. 그 정도면 그냥 결혼 생각 할 수준인데. 결혼 생각은 없으세요? 다른 사원의 물음에 남준은 누가봐도 설레어 하는 표정을 지으며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 결혼... 하고 싶네요.

 

 

애인분께는 말씀 드려본 적 없으세요? 은근 기다리고 계실수도 있죠.

 

그런가요? 결혼 할 수 있으면 하고 싶은데...

 

 

끝을 흐리는 남준에 사원들은 자신들이 더 애가 탔다. 10년 연애 했으면 결혼 안하는게 더 이상하지 딱 나이도 결혼 적령기인데. 여사원들은 마치 자신이 프로포즈 받는 것처럼 본인들이 더 설레발쳤다. 팀장님 정도면 프로포즈 하는데 안 받아줄 사람 없죠. 맞아요, 지금이 딱 때라니까요. 저 같으면 팀장님 프로포즈 기다리다 눈 빠졌을걸요. 한마디씩 거드는 사원들의 말에 남준은 웃었다. 고마워요, 용기 내 볼게요. 사원들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의 애인이 부러웠다. 와 세상에 전생에 뭔 일을 하면 이런 복을 얻는다냐.

 

 

 

 

 

 

 

 

 

 

팀장님이 좀 늦으시네요.

 

 

지민의 말에 창가자리에 있는 의자에 앉아 턱을 괸 채 바깥을 보고 있던 호석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아아, 오늘 회식 갔는데 내가 너희들한테 이야기 안해줬나?

 

 

? 팀장님이 회식을 갔다고요?

 

팀장님이 회식 갔다고요?

 

 

주방에 있던 정국도 헐레벌떡 뛰어나오며 소리쳤다. 호석은 흠칫 놀라 괴고 있던 턱을 살짝 떼며 그들을 봤다. 그게 너희들한테 그렇게 놀랄 일이냐?

 

 

당연히 놀라죠. 맨날 사장님 보고 싶다고 7시도 안돼서 오시는 분이시잖아요.

 

와 그 회사 회식도 있긴 있구나.

 

그럼 당연히 있지. 자기가 맨날 빠져서 그렇지. 회사 사람들은 상사가 같이 회식 하는 거 안 좋아한다는 핑계 대면서 맨날 빨리 온다니까. 그래서 오늘은 빠지지 말고 회식 다 하고 오라 그랬어.

 

그래서 사장님이 이 시간까지 있는 거구나.

 

 

전 두 분 싸운 줄 알았죠. 너무 해맑게 말하는 정국에, 호석은 어이가 없어 대꾸할 타이밍도 놓쳐버렸다. 우리가 뭐 언제 싸우는 거 봤냐. 싸우는 거 본 적 없으니까 오늘 싸운 줄 알았죠. 전혀 악의 없는 것은 알겠지만 왠지 모르게 기분이 이상해져 호석은 고개를 갸웃했다. 뭐지 이 묘한 기분 나쁨은.

 

 

사장님이랑 팀장님은 어떻게 만나셨어요?

, 내가 안말해줬나?

 

안말해줬었죠. 그냥 면접 때 동성애를 어떻게 생각하냐고만 물어봤었어요.

 

아 내가 그런것도 물어봤었어? 미안 미안, 사실 애초에 너희 뽑을 생각을 하고 있었어서 면접 어떻게 했는지 기억도 안나. 그냥 대충 막 물어봤었을걸.

 

어쩐지 질문들이 이상하게 성의가 없더라.

 

그래서 어떻게 만났는데요?

 

 

지민의 재촉에 호석이 잠깐 생각했다. 뭐 거창한 건 아니고 그냥 우리 고등학교때부터 같은 학교였어. 학교 친구? 뭐 그랬지. 헐 대박. 호석의 말에 지민은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놀랬다. 엄청 오래 사귀었네요. 정국의 말에 호석이 허허 널털 웃음을 지었다.

 

 

설마 고등학생 때부터 사귀었겠냐. 그때는 그냥 친구였어.

 

아 어쩐지. 그때부터 사귀었으면 대체 얼마나 사귄거지 싶었어요.

 

19살 겨울에 사귀었다. 수능 끝나고.

 

.

 

.

 

 

만만치 않은 세월에 정국과 지민의 동공이 동시에 확장 됐다. 사장님 지금 29살이잖아요. 아 나이 얘기 하지 마, 서른 다 되어가니까 나이에 예민해져.

 

 

한번도 깨진 적 없어요?

 

너는 말하는게 꼭 우리 언제 한번 막 끝장 보기를 바라는 것 같다?

 

에이 설마요. 전 사장님과 팀장님의 사랑을 응원 합니다.

 

 

주먹까지 불끈 쥐어 보이며 말하는 정국에 호석은 결국 푸학 웃어버렸다. 뭐 믿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한 번도 깨진 적은 없고. 호석의 말에 둘은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호석을 바라봤다. 그들의 표정을 읽은 호석은 손을 내저었다. 진짜야, 진짜 한 번도 깨진 적 없어.

 

 

아니 어떻게 10년동안 권태기 하나 없이 잘 살 수 있어요?

 

? 권태기가 없었던 건 아닌데.

 

?

 

, 권태기라 하기에는 좀 애매하고... ... 지금도 소수가 힘이 약하잖아. 옛날에는 더 그랬으니까한 번씩 그런 벽에 부딪히면서 힘들었던 적은 있었지. 그걸로 좀 다툰 적도 있고.

 

와 두 분 다투기도 하긴 하네요.

 

야 그럼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데 어떻게 한 번도 안 싸우냐.

 

전 맨날 팀장님이 사장님을 볼 때마다 무슨 사귄지 한 일주일 된 커플처럼 보길래 진짜 사귄지 얼마 안 된 줄 알았어요.

 

그건 뭐야.

 

 

지민의 말에 호석이 빵터져 큭큭 대며 웃었다. 사귄지 일주일 된 커플처럼 보는 건 어떻게 보는 건데. 호석의 물음에 지민은 곰곰이 생각했다. 왜 맨날 팀장님 눈빛이 겁나 꿀 떨어지는 눈빛? 사장님이 뭘 해도 하나도 안 놓치고 뚫어져라 보면서 가끔 막 웃기도 하고 그러던데요. 호석은 왠지 부끄러워져 괜시리 지민을 향하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10년이 지나도 여전히 그럴 정도면 팀장님은 사장님 엄청 좋아하나 봐요. 정국의 말에 호석은 고개를 돌려 정국을 봤다.

 

 

나는 준이 좋아하는 게 안 느껴져?

 

아니요 그렇다기 보다는... 팀장님은 엄청 그걸 드러내신다고 해야 하나...

 

맞아 맞아. 팀장님은 사장님 보는 눈빛부터가 다르니까요. 사장님이 뭔 말을 할 때마다 엄청 뚫어지게 쳐다보고 사장님 따로 카페 일볼 때도 사장님만 엄청 보잖아요. 항상 똑같은 눈으로.

 

뭘 또 그렇게 자세히 봤어.

 

우리가 보고 싶어서 본 게 아니라 그냥 우연히 볼 때마다 그러고 계시니까 그러죠.

 

 

호석은 어쩐지 열이 오르는 느낌에 손부채질 했다. 한 번도 의식해 본 적은 없는데 제 3자한테서 이런 말을 들으니까 상당히 부끄럽긴 하다. 준이가 나를 항상 그렇게 봤다고? 어쩐지 이 이후로 준이의 얼굴을 보기 부끄러울 것 같았다.

 

 

누가 먼저 고백해서 사귀었어요?

 

?... 준이.

 

그럴 것 같았어. 뭐 연인 사이에 그런 거 따지는 것도 웃기긴 한데 남이 보면 팀장님이 사장님을 더 좋아하는 것 같아요.

 

? 나도 준이 좋아해.

 

사장님이 그렇게 말하면 팀장님은 사랑한다고 말할걸요.

 

 

정국의 말에 지민이 큭큭 웃었다. 와 진짜 팀장님 그럴 것 같아. 호석의 입꼬리가 축 처져 표정이 뚱했다. 남이 그렇게 느낄 정도인가. 여태까지 딱히 그런 걸 신경 쓴 적 없었는데 남이 그렇게 얘기하니까 갑자기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내가 평소에 준이한테 사랑하다고 한 적이 없었나? 아니 내 행동에 좋아하는 게 안 느껴지나? 남한테 그렇게 보일 정도로 차이가 나나? 여러 가지 생각이 마구 머릿속을 휘저었다. 아이씨, 너네 때문에 괜히 신경 쓰이잖아! 난데없는 큰 소리에 지민과 정국이 흠칫 놀랐다. 우리가 뭘 잘못 말했나... 그들은 머리만 긁적였다. 할 일 없으면 정산이나 해. 호석의 말에 넵 순순히 카운터 금고를 열었다.

 

호석은 창밖을 바라봤다. 어두컴컴한 하늘에 네온사인 빛만 가득한 거리에서 사람들이 하염없이 왔다 갔다 했다. 드문드문 커플들이 보였다. 팔짱을 끼고 다니고 어깨동무 하고 다니고 여자에 맞추어 고개를 숙여 머리를 맞댄 채 무어라 이야기를 하며 다니고. 옛날에는 그런 커플을 보면 가끔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저 사람들은 저렇게 당당하게 다닐 수 있구나. 어떻게 보면 자격지심이었다. 하루하루가 견디기 힘들 정도로 자기혐오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그만큼 바닥에 처박혔던 때가 있었다. 제 인생의 암흑기였던 시간이 생각나자 호석은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끔찍했다. 그나마 남준이 있어서 떨쳐낼 수 있었던 거지, 남준이 없었으면 자신이 어떻게 됐을지 감히 상상도 안됐다

 

한창 사념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누군가 뒤에서 자신을 확 껴안았다. 동시에 한 손이 제 두 눈을 가리고 뒤로 살짝 당겼다. 단단한 품이 뒤통수에 닿았다. 금방 왔는지 코트에서는 아직 차가운 바람이 묻어 있었다. 그러나 제 배와 두 눈을 감싸고 있는 두 손은 따뜻했다. 호석은 몸에 힘을 다 풀어 아예 그에게 몸을 맡겼다. 흐흥. 그의 작은 웃음이 머리 위에서 들렸다. 작은 울림이 뒤통수에 느껴졌다. 그는 호석의 머리 위에 제 턱을 얹었다. 호석은 제 눈을 가리고 있는 그의 손목을 잡았다.

 

 

왜 눈은 가려.

 

나는 안 봐주고 바깥만 보는 게 질투 나서.

 

그게 뭐야.

 

 

호석은 작게 웃었다. 그가 따라 웃는 것이 느껴졌다. 잠시 둘 사이에는 말이 없었다. 카페의 온기 때문인지 그의 몸에 점점 찬 기운이 사라졌다.

 

 

나는 네 예쁜 눈으로 예쁜 것만 봤으면 좋겠어.

 

?

 

 

뜬금없는 말이었다. 호석은 되물었지만 남준은 그의 머리에 살짝 입을 맞추기만 했다. 손은 여전히 호석의 눈 위를 덮고 있었다. 이 손 좀 치워봐. 호석의 말에 남준은 그를 더욱 세게 껴안기만 할 뿐, 손은 치우지 않았다.

 

 

예쁜 것만 보면서 예쁜 생각만 했으면 좋겠어.

 

무슨 소리야.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아니야, 별로 안 늦었어.

 

너무 오래 네 옆을 비웠나.

 

그런 게 어딨어. 진짜 괜찮다니까.

 

 

호석은 아무렇지 않게 대꾸하다 문득 든 생각에 그의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너 또 이상한 생각했지. 호석이 물었다. 남준은 아무 말이 없었다.

 

 

네가 늦게 와서 또 내가 그런 생각 하게 됐다고 생각해?

 

......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준아.

 

......

 

나는 네가 내 표정을 신경 쓰고 미안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미안할 일이 아니야 이건. 이건... 내가 미안해해야 하는 거야.

 

호석아.

 

예쁜 것만 봤음 좋겠다며.

 

......

 

나 지금 네가 너무 보고 싶은데.

 

 

제 말이 끝나자마자, 눈앞이 환해지며 순식간에 몸이 돌려졌다. 참 힘도 좋다. 호석은 문득 생각했다. 바로 앞에 보고 싶었던 얼굴이 있었다. 호석이 씨익 웃었다. 마주보고 있던 그도 따라 웃었다. 호석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속 허리를 숙이고 있던 남준은 그제야 제대로 허리를 폈다. 남준이 자연스레 팔을 벌려 호석을 안았다. 호석도 익숙하게 그의 품에 안겼다. 신기하네, 회식 했는데 고기 냄새가 별로 안 나. 호석의 말에 남준이 푸스스 웃었다. 냄새 안 배게 엄청 노력했지.

 

 

사장님, 애정행각은 저희 보내주시고 하면 안될까요.

 

 

멀리서 들리는 지민의 목소리에 호석이 놀라 후다닥 남준의 품에서 떨어지며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국과 지민이 똑같이 뚱한 표정으로 카운터에 턱을 괸 채 바라보고 있었다. , 미안 미안 오늘은 내가 문 닫을게 너희는 먼저 가도 돼. 호석의 말에 그들은 바로 에이프런을 풀며 직원실로 들어갔다. 남준은 그들이 들어가는 것을 보다 호석에게 시선을 돌렸다.

 

 

애들은 괜찮아?

 

저 애들? , 착해. 일도 열심히 하고.

 

그래. 네가 뽑았으니 좋은 아이들이겠지.

 

오래 했으면 좋겠는데.

 

오래 할 거야. 내가 알바생이어도 이런 카페면 열심히 하겠다.

 

너는 사심이 담긴 거고.

 

... 부정은 못하겠다.

 

 

호석이 푸핫 웃었다. 남준은 그가 웃는 모습을 보고 따라 웃으며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저희 먼저 가보겠습니다! 직원실에서 나오면서 인사를 하는 지민과 정국에, 호석은 손을 흔들어 주었다. 내일 보자. 남준도 살짝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들도 고개 숙여 인사 한 후, 다소 요란하게 카페를 나섰다. 형 오늘 야식 먹고 들어가요. 사거리 포장마차까지 늦게 오는 사람이 쏘기. , 먼저 가는 게 어딨어요!

 

그들이 사라지고 카페는 포근한 정적만이 자리했다. 우리도 슬슬 갈까? 늦었는데. 남준의 말에 호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옷 갈아입고 올게. 호석의 말에 남준은 호석의 손목을 살짝 잡아 제 쪽으로 당기고는 허리춤에 묶여있는 리본을 당겨 풀었다. 에이프런이 그의 손에 들렸다. ? 호석이 고개를 들어 남준을 바라봤다. 너 이거 하고 있는 거 볼 때마다 생각 하는건데 내가 매주고 싶어. 엉뚱한 그의 말에 호석은 웃음을 터뜨렸다. 언제 한번 와서 네가 대신 매주면 되지, 아니 집에서 앞치마 매줘도 되고. 남준은 그게 뭐라고 미간까지 좁히면서 표정이 심각해졌다. . 호석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직원실로 향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호석은 문득 제 알바생들과 한 대화들이 생각났다. 나를 우울하게 만든 주범! 호석은 옆에서 운전하고 있는 남준을 힐끗 봤다. 무슨 할 말 있어? 그새 또 시선을 느꼈는지 남준이 바로 물었다. 호석은 괜히 안전벨트만 깨작깨작 긁다가 무언가 결심한 표정으로 남준을 봤다. 준아. ? 마침 신호에 걸려 차를 멈춘 남준이 호석을 봤다.

 

 

?

 

준아. 좋아해.

 

헐 잠깐만. , 그런 깜짝 고백은 심장에 무리 오는데.

 

 

남준은 심장을 부여잡으며 장난스레 웃었다. 좋아해, 정말로. 호석의 말에 남준은 그의 머리를 쓰다듬다 그대로 몸을 쭉 빼 그의 입술에 살짝 키스했다. , 나도 사랑해. 나직히 말한 남준은 몸을 원래대로 돌리고 차를 다시 출발시켰다.

 

'사장님이 그렇게 말하면 팀장님은 사랑한다고 말할걸요.' 정국의 말이 맞았다. 호석은 안전벨트를 두 손으로 꼭 잡고 차창으로 머리를 기대었다. 호석아, 그러다 잘못하면 머리 부딪쳐. 남준의 말에도 호석은 머리를 떼지 않았다. 차창이 시원해서 머리를 식히기 좋았다. 호석아. 남준이 다시 한 번 불렀다. 호석은 여전히 머리를 떼지 않았다. 차의 움직임이 더욱 조심스러워졌다.

 

차를 주차하고 호석이 먼저 내렸다. 남준도 따라 내리고 호석에게 다가갔다. 준아. 호석의 물음에 남준은 그를 내려다보았다. 무언가 결연한 표정의 그에, 남준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호석은 호석 나름대로 진지했다. 설마 그럴리는 없겠지만 혹시나 남준이 자신들 사이에 있어서 자신이 좀 더 을의 입장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 정말로 슬플 것 같았다.

 

 

준아.

 

.

 

내가 그동안 많이 표현을 안 한 것 같은데.

 

?

아니 내 착각이었으면 좋겠지만.

 

뭔데?

 

 

남준은 한 발짝 더 다가가 호석의 옆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내리고, 볼을 감싸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남준은 항상 마음 내킬 때마다 여기저기 입을 맞추고는 했다. 준아. 호석은 그의 셔츠 깃을 잡아 살짝 당겼다. 갑작스런 호석의 행동에 남준이 순간 당황한 듯 보였다.

 

 

사랑해.

 

 

남준은 잠시 멍해졌다가, 곧 입가를 손으로 가리며 피식 웃었다. 호석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나 진심이야. 호석의 말에 남준은 웃음기가 남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나도 사랑해. 진심으로 사랑해. 호석이 다시 말했다.

 

 

너 오늘 무슨 일 있었어?

 

?

아니... 평소와 좀 다른 것 같아서.

 

역시 너도 그래 보여?

 

 

호석은 안 그런척 해도 표정에서 시무룩한 것이 드러났다. 남준은 호석의 볼을 아프지 않게 꼬집었다. 므야. 호석이 잔뜩 새는 발음으로 말하자 남준이 푸핫 웃었다. 이씨... 내 마음도 모르면서. 호석은 제 속도 모르고 그저 웃기만 하는 남준이 얄미워 보여 새초롬히 쳐다봤다. 남준은 그런 호석의 머리를 헝클였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고백을 한데.

 

그래서. 싫으냐?

 

아니 그럴 리가. 너 사랑해라는 말 평상시에는 잘 안 해서 지금 나 유혹 하는 건가 싶었다니까.

 

내가 그렇게 표현이 박했어?

 

아니 그런 것 보다는... 잠깐, 너 진짜 몰라?

 

뭐가.

 

너 그 말 침대에서만 하잖아.

 

...?

 

할 때. 너 나 붙잡고 하는 말이잖아, 그거. 평소에는 좋아한다고 하고.

 

......

 

너 부끄러워서 그러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호석은 제 얼굴을 안 봐도 시뻘게졌을 거라 생각했다. 얼굴에 온 열이 다 몰린 기분이다. 귀가 화끈거린다. 이토록 깜깜한 밤이어도 벌게진 게 다 보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화끈거렸다. 괜찮아, 호석아? 남준이 제 얼굴에 손을 갖다 대려 하자 호석은 두어 발짝 뒤로 물러나 손을 뻗었다. , 가까이 오지 마봐. 더듬거리는 호석의 말에 남준은 알아차리고 짓궂게 웃어보였다. 그는 제자리에 팔짱을 끼고 살짝 짝다리로 서서 호석을 바라봤다.

 

맞아, 그랬어... 호석은 가장 최근 지새웠던 밤을 생각했다. 터져 나오는 신음을 참으며, 달뜬 숨을 뱉으며, 그를 확 끌어안으며 계속해서 사랑한다고 뱉었었다. ... 호석은 생각할수록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점점 고개가 숙여졌다. 그 전에도, 그 전에도, 밤을 지새울 때면 말버릇처럼 그 말이 밭은 숨과 함께 나왔었다. 이상하게 날짜만 다른 그 상황들이 제 머릿속에서 둥둥 떠올랐다. 미쳤네. 미쳤어, 정호석. 이게 다 지민이랑 정국이가 괜한 말을 해서 그렇다. 당장이라도 쥐구멍에 숨고 싶은 지경이었다.

 

호석은 그대로 뒤돌아 거의 뛰다시피 입구 쪽으로 갔다. 호석아. 남준이 그를 부르며 따라갔다. 이름을 부르는 그 목소리에서 웃음기가 서려 있는 게 느껴졌다. 준아 조금만 있다가 오면 안 될까, 제발. 호석은 그 말을 하며 입구 앞에 있는 도어락을 재빨리 쳤다. 정말 인생에서 손가락을 제일 빨리 움직인 순간이었다. 순식간에 문이 열리고 호석이 들어가자, 남준도 재빨리 들어와 그대로 호석의 뒤를 껴안았다. 아아가아앙강악아 호석은 속으로 미친 듯이 소리쳤다. 그냥 머릿속이 혼란스럽고 말 그대로 멘붕이었다. 아니 그냥 창피해... 거의 정신을 잃고 싶은 수준이었다. 남준이가 알아서 집까지 데려다 주겠지...

 

호석은 두 손으로 얼굴을 파묻은 채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남준은 훤히 보이는 호석의 뒷목만 보다가 피식 웃으며 그대로 엘리베이터까지 걸었다. 뒤뚱뒤뚱 걷는 게 펭귄 같다고 문득 생각한 남준이 큭큭 웃었다. 호석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남준은 그대로 뒷목에 살짝 입 맞추었다. 하지 마... 호석의 목소리가 옅게 퍼졌다. 뭐라고? 안 들려. 남준은 다 들었음에도 놀릴 심산으로 안 들리는 척 했다. 호석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엘리베이터에 타자마자 남준은 억지로 호석을 돌렸다. 호석은 바로 남준의 어깨 부근에 얼굴을 묻었다. 호석의 귀가 붉었다. 남준은 양 손으로 그의 귀를 살짝 감쌌다. 뜨거워. 남준의 말에 호석이 흠칫했다.

 

 

얼굴 좀 보여줘. 뭐야 이게. 아까부터 얼굴 한 번도 못 봤잖아.

 

안 돼 안 돼. 지금 얼굴 보면 완전 못생겼을걸.

 

네가 못생길 일이 뭐가 있냐.

 

안 돼. 진짜 안 돼. 나 지금 엄청 창피해.

 

뭐가. 사랑해가?

 

......

 

난 진짜로 네가 대놓고 나 유혹하는 줄 알았다, .

 

......

 

, 지금도.  숨이 자꾸 내 목에 닿아.

 

...변태야.

 

유혹을 하시는데 반응이 오는 건 당연하죠.

 

 

호석은 후 결심한 듯 얼굴을 들어 남준을 마주봤다. 앞머리가 살짝 헝클어진 채 잔뜩 붉어진 얼굴로 올려다보는 호석에, 남준은 시선을 살짝 돌렸다. 아 잠만, 생각보다 너무 자극적인데. ? 남준의 말에 호석이 고개를 갸웃했다. 남준은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살짝 호석을 바라봤다. 호석아. . 한번만 더 말해줘. ?

 

 

사랑해?

 

 

때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남준은 호석의 손을 잡고 급하게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 > 사랑옵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랩홉] 사랑옵다 6  (2) 2017.04.17
[랩홉] 사랑옵다 5  (2) 2017.04.13
[랩홉] 사랑옵다 4  (0) 2017.04.08
[랩홉] 사랑옵다 3  (0) 2017.03.23
[랩홉] 사랑옵다  (3) 2017.02.16

[랩홉] 사랑옵다

길/사랑옵다



수고하셨습니다.

6시가 되기 무섭게 가방을 싸들고 팀실을 나서는 남준에, 팀원들은 혀를 내둘렀다. 팀장님은 오늘도 칼퇴시네. 그들은 남준이 이미 나가고 없는 빈 팀장실만 바라보다 가방을 싸기 시작했다.

김남준 팀장. 최연소의 나이에 입사해, 초고속 승진으로 최연소 팀장을 맡고 있는 엘리트다. 엄청 머리가 좋지만 그 외에 밝혀진 것이 거의 없어, 그를 둘러싸고 많은 소문들이 있었다. 그 중 가장 많은 신임을 받고 있는 소문은 이 회사 회장의 손자라는 것. 그러니까 야근 한번 없이 매일 같이 칼퇴를 해도 압박이 없지.

그들이 다니고 있는 회사 특성상 야근이 없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팀장님이 일을 미루기 싫어하고 그 날 할 일을 최대한 빨리 끝내서 야근 없이 퇴근 한다고 해도, 부득이하게 야근을 해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을 텐데 여러모로 대단한 젊은 팀장님이시다.

덕분에 그의 팀 사원들은 매일매일 꿀 직장을 경험하며 별 다른 스트레스 없이 회사를 다니긴 하지만 궁금하긴 하다. 팀장님을 칼퇴 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무엇이길래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들을 다 해내시면서 칼퇴 까지 하시는 걸까.

그의 부서 사람들은 제 젊은 팀장님에 대해 궁금한 것이 너무 많았다. 의도한 건지 어떤 건지는 모르지만 그는 밝혀진 것이 전혀 없었다. 이름이 김남준인 것만 알지, 정확한 나이도 몰랐다. 회식도 카드만 던져주고 나오니, 알 수 있는 기회가 전혀 없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정말 좋은 팀장님이 아닌가 싶겠지만 막상 그의 팀원들은 그를 캐고 싶어 안달이었다.

여사원들은 한 회사, 같은 부서, 같은 팀으로서 자신의 팀장에 대한 나름대로의 로망들을 가지고 있었다. 아 한번쯤 저런 남자랑 연애 해보고 싶다 정도. 그는 팀장으로서도, 김남준이라는 사람으로서도, 남자로서도 굉장히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키가 크기만 할 뿐만 아니라 비율도 좋고 패션 감각이 뛰어나다. 외모는 말 할 것도 없다. 외적으로만 섹시 한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도 섹시하다. 이 회사에서 최연소 팀장으로 있으니 두뇌는 입증 되었다. 타고난 매너와 다정함은 철철 흘러넘치고 목소리마저 그렇게 달콤하고 매력적일 수 없다. 여자라면 그에게 한번쯤 시선을 뺏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만큼 완벽한 남자한테 궁금한 것이 많은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저렇게 매일 같이 칼퇴근 하는 걸 보면 역시 아내랑 자식들이 있는 거 아닐까.

언제 한번 한 남자사원의 말에 여사원들은 탄식을 뱉었었다. ... 없다고 해서 고백할 것도 아니지만 있을 것 같다는 말을 들으니 아쉽긴 하다. 하긴 그 정도의 일이 아닌 이상 굳이 열을 내가며 매일 칼퇴를 할 이유가 없다. 집에 기다리는 사람이 있으니까 그렇게 빨리 회사를 나가는 거겠지.

가끔 점심시간에도 어디론가 가버리시고 보이지 않는 팀장님 때문에 팀원들끼리 가벼운 점심 회식을 할 때도 있다. 그들끼리 모이면 대부분 이야기 주제는 팀장님. 그나마 팀에 오래 있었던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들은 그에 대한 소문을 이야기 해주지만 그 마저도 진짜인지 아닌지는 미지수다. 그럼에도 다른 사원들은 팀장님에 대한 새로운 사실이면 귀를 쫑긋 열고 듣는다.


팀장님 나이가 아직 30 안됐다 그러던데.

헐 진짜요? 그렇게 어려요?

팀장님이 엄청 사기캐이긴 하잖아. 우리보다 확실히 능력도 있고.

내 생각인데 팀장님이 굳이 나이를 밝히지 않는 건 자신의 자리 때문인 것 같긴 해. 여기에 자기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이 많으니까 혹여나 나이를 알게 되면 자기가 지시할 때 안 따라줄 수도 있으니까.

근데 팀장님은 가끔 점심마다 어디 가시는 거예요?

팀장님 자주 가시는 카페 있잖아. 가끔 점심 때 여유 있으면 그 카페 갈걸?

와 진짜 뭐 없는데 팀장님이 그러니까 있어 보인다.

그 카페에 팀장님 여친이나 뭐 좋아하는 사람 있는 거 아니야?


한 사람의 말에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지만 속으로는 모두 그럴 듯 하다고 느꼈다.

간혹 그는 커피나 컵케이크 같은 것들을 사와서 돌리고는 했다. 커피도 깔끔하고 컵케이크도 맛있어서 맛 좋다고 칭찬하면 그는 씨익 미소를 지으면서 제일 좋아하는 카페라고 말한다. 실제로 그가 들고 오는 상자들은 항상 똑같은 로고와 이름이 써져 있었다. 사원들이 어디에 있냐고 졸라도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절대 알려주지 않는다. 결국 상자에 써져 있는 이름으로 찾아봤더니 회사 근처에 있는 카페로, 꽤나 유명한 곳이었다. 그의 그런 반응으로 그 카페에 좋아하는 사람이나 여친, 혹은 아내가 있다는 가정이 거의 확실해졌다.

심증은 있는데 물증은 없단 말이지. 여사원들이 제일 궁금한 것이 그것이었다. 이 완벽한 팀장님한테 애인 혹은 부인이 있는가 없는가. 회사 다닐 나이에 그만한 스펙인 사람이 짝이 없는게 말이 되냐, 짝이 없으면 분명 어디 하나 문제가 있는 거다 라고 말은 하면서도 다들 마음속에 손톱만큼의 바람은 가지고 있었다. 오피스 내에서 완벽한 남자와의 로맨스를.









 

 

 

 

 

 

 

 

 


남준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카페 앞에 차를 댄 후 자연스레 들어갔다. 어서오세요. 알바생의 인사에 손을 살짝 들어 익숙하게 받았다. 사장님, 팀장님 오셨어요! 알바생의 부름에 후다닥 튀어나오는 제 애인에, 남준은 보조개가 음푹 패이도록 미소를 지었다.

준아! 폭싹 품에 안기는 그를 자연스레 안아 오뚝이처럼 살짝 몸을 좌우로 흔들었다. 잘 지냈어? 이마 부근에 살짝 입 맞추며 물어보는 남준에, 그가 푸스스 웃었다. 매일 똑같지 뭐.


우우우우! 솔로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애정행각이라니 배려 없다!

배려 없다!


두 알바생의 장난기 어린 항의에 그는 눈웃음을 지으며 남준의 품에서 떨어졌다.


준아, 잠시만 앉아서 기다려 줄래? 아직 마감 시간이 안돼서.

그래, 나 여기 앉아 있을게.

뭐 만들어 줄까?

아니 너 힘들게 안그래도 돼.

남은 거 남은 거.

지금 이 시간에 남은 게 있다고?


밉지 않게 흘겨보는 남준에 그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아메리카노는 쉬우니까 아메리카노 만들어줄게. 그의 말에 남준은 고개를 끄덕이고 항상 앉는 자리로 가 앉았다. 남준은 그 자리를 제일 좋아했다. 창가 옆 자리면서 동시에 카페가 한눈에 보이는 자리. 제 애인이 어디에 있어도 잘 보이는 자리. 턱을 괸 채 커피를 내리기 시작하는 애인을 지긋이 보기 시작했다. 자신의 일에 열중하는 모습이 예쁘다. 물론 가만히 있어도 예쁘지만.

갓 나온 아메리카노를 들고 조심히 온 그는 잔을 내려 놓으면서 살풋 웃었다. 주문하신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 그의 말에 남준은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하나 더 주문한게 있는데 그건 아직인가요? 남준의 말을 아주 잘 알아들은 그는 결국 푸핫 웃으며 남준의 어깨를 퍽 쳤다.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지금.


뽀뽀도 주문했는데요.

손님 여기는 카페지 집이 아닙니다.

원래 1아메 1뽀뽀가 원칙 아닌가요.

집에서 더 진하게 타드리겠습니다.

, 집에서는 웬만한 걸로 안될 텐데.

키스까지.

기다린 시간이 있는데 그걸 로는 부족할 것 같은데요.

만족 좀 할 줄 아세요.

같이 목욕까지가 좋을 것 같네요.

의도가 빤히 보여서 탈락.

해줘.


답지 않게 살짝 앙탈을 부리는 남준에, 그는 결국 남준의 목에 팔을 감아 볼에 살짝 뽀뽀했다. 반칙, 볼이 아니라 입이잖아. 남준의 말에 그는 남준의 입을 아프지 않게 살짝 때렸다. 카페에서 자꾸 요구사항이 늘어난다?

한마디 하며 카운터로 돌아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남준은 아직 열기가 식지 않은 커피를 한모금 입에 머금었다. 좋다.





카페 마감 시간은 9. 이 이후로 뒷정리는 알바생에게 맡기고 그들은 바로 퇴근을 한다. 차를 타고 5분 정도 가면 그들이 사는 오피스텔이 나온다. 남준이 일부러 그의 카페와 가까운 곳으로 찾은 집이었다. 어차피 카페와 회사와의 거리도 가까웠기 때문에 나쁘지 않은 위치였다. 사실 카페의 위치도 남준이 우기고 우겨서 정한 곳이었다. 원래 제 애인은 대학가 근처에 카페를 만들고 싶어 했지만 남준이 회사 근처에 카페를 만들어야 하는 이유를 PPT까지 만들면서 브리핑을 했고, 그의 노력이 가상하여 결국 한 발 뒤로 물러나 만든 카페가 지금의 카페였다. PPT만 보면 굉장히 설득력 있어 보이지만 사실, 남준의 사적인 감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대학생이 많이 오게 되면 질투도 날 것 같고, 애인을 못 믿는 건 아니지만 다른 사람을 못 믿겠으니 대시를 하면 어쩌나, 내가 자주 다닐 수 없는 거리에 있으면 보고 싶을 때 보러 오기 힘들기도 하고, 뭐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래도 나름 번화가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동인구가 많아 접근성이 좋은 곳이었다

전용 구역에 부드럽게 주차를 한 남준은 시동을 끄자마자 제 벨트를 풀어 옆자리에 앉은 제 애인의 입술을 부드럽게 물었다. 가벼운 키스 후 코가 살짝 맞닿을 정도의 거리에서 씨익 웃는 남준에, 그도 결국 피식 웃어버렸다. 남준이 쭉 뺐던 몸을 돌리자 어느새 풀어져 있던 그의 벨트가 자리를 찾아 돌아갔다.

나 내일은 좀 늦을 것 같아.

갑작스러운 남준의 말에 그가 고개를 들어 남준을 봤다. 그의 시선을 느낀 남준은 잡고 있는 손에 살짝 힘을 주며 마주 봤다.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그의 표정이 퍽 귀여워 남준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왜 이렇게 귀여워. 결국 또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춘다.


진짜 회식이라고?

난 너한테 거짓말 안해.

아니 잠깐만. 너무 갑작스러운데.

이때까지 회식 한번 안한 것도 용하긴 하지.

네가 항상 회식을 빠져서 진짜 상상도 못하고 있었어.

팀원들이 이번 회식에는 꼭 같이 하자고 해서... 이번에는 빼기가 좀 그랬어. 팀장이 그런데 끼면 불편해 할 줄 알았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닌가봐.

회식 하면 언제 오는데?

글쎄...


남준은 다른 손으로 눈썹을 문질렀다. 생각을 할 때나 무언가 곤란 했을 때마다 나오는 버릇 같은 거였다. 한번도 회식을 해본 적이 없어서 몇 시까지 하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그래도 너 카페 마감시간 전에는 오지 않을까? 남준의 말에 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위로 오르던 엘리베이터가 멈추었다. 남준이 먼저 내려 도어락을 해제했다. 여전히 마주잡고 있는 손은 놓지 않았다. 남준이 현관문을 열며 살짝 비켜주자 그가 자연스럽게 먼저 들어갔다.


그냥 나 가지말까?

안가면 안 되는 거 아니야?

그건 아니야.

그래도. 이때까지 안 갔는데 너 이미지 안 좋아지면 어떡해.

그 정도는 아니야.

나 때문에 그러는 거면 난 진짜 괜찮으니까 그냥 갔다 와.

아니 나 때문에 그러는 거야. 너 보고 싶어서 여태까지 빨리 온 거잖아.


한 치의 표정 변화 없이 진지하게 말하는 남준에, 그는 결국 피식 웃어버렸다. 뭐야, 괜히 그런 말 안 해도 돼. , 그냥 하는 말 아닌데 진짠데. 계속 되는 남준의 말에 그는 얼굴에 웃음기를 머금은 채 뒤돌아 그를 봤다. 그의 뒤를 따르던 남준은 갑자기 우뚝 멈추어 자신을 보는 그의 행동에 자신도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잡고 있는 손을 끌어 남준을 가까이 당기자마자 발을 살짝 들어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가 입술을 떼어 발이 땅에 닿자마자 남준은 그대로 그의 입술을 따라 고개를 숙여 더 깊게 입을 맞추었다. 잡고 있는 손을 떼어 그의 볼을 감쌌다. 다른 손은 그의 허리를 감았다.

입술을 뗀 남준은 엄지로 그의 입술을 살짝 닦아냈다. 네가 먼저 키스할 때도 있네. 남준의 말에 그가 눈을 휘며 웃었다. 몰라, 네가 기분 좋은 말해서 그냥 하고 싶었어. 그의 말에 남준은 허리를 감은 손에 힘을 주고 앞으로 밀었다. 갑작스러운 힘에 그는 한 두걸음 뒷걸음질로 걷다가 소파에 발이 걸려 풀썩 앉았다. 남준은 그대로 그의 위에 올라 그에게 무게를 실어 안았다. 그의 몸이 소파 등받이에 파묻혔다. 자연스레 남준의 머리를 감싸 안은 그는 꺄르르 웃었다. 아 간지러워. 그의 말에 목 부근에 얼굴을 묻고 있던 남준이 고개를 들어 그를 봤다. 살짝 헝클어진 앞머리를 그가 살살 정리를 해주었다.


내일 9시까지는 꼭 카페로 갈게.

.

가지 말아달라고 하면 안 돼?

이때까지 빠졌었는데 내가 어떻게 또 빠지라고 그래.

아아, 회식하면 늦게 오니까...

매번 그러는 것도 아니고. 이번 기회에 팀원들이랑 친해지면 되겠네.


푸흐. 남준은 숨을 몰아 뱉으며 다시 그의 목과 어깨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네가 올 때까지 카페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내일은 마감을 좀 늦게 하지 뭐. 그의 말에 남준은 고개만 끄덕였다. 자자 이제 일어나서 씻어. 그의 말에 남준은 얼굴을 들어 그를 봤다. 같이 씻어.


뭐지. 이 의미심장한 말은.

그냥 씻기만 하자는 거야.

아니. 뭔가 느낌이 그냥 씻기만 하자는 게 아닌 것 같아.


왜 이렇게 눈치만 늘었어.


너 되게 뭔가를 원할 때 네가 어떤지 모르지.


어떤데.


눈빛이 달라.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하는 말에 남준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내 욕망이 완전히 숨겨지지 않았나 보네. 남준의 말에 그가 빵터져서 웃었다. 무거워. 그의 말에 그제야 남준은 그의 위에서 일어나 옆으로 몸을 옮겼다. 먼저 씻어. 남준의 말에 그가 일어나 화장실로 갔다.

 

 

호석아.

 

 

남준의 부름에 그가 뒤돌았다. 하자. 남준의 말에 못 말린다는 듯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낸 그는 옆에 있는 벽에 살짝 기대어 팔짱을 꼈다.

 

 

오늘따라 되게 저돌적이시네.

 

오늘따라 네가 너무 예뻐서요.

 

그런 고백을 할 때마다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그래서, 대답은?

 

내가 하지 말자고 하면 안할 거야?

 

싫다는 사람 붙잡고 어떻게 하냐.

 

 

그는 기대어 있던 몸을 바로 하고 팔짱을 풀었다. 준아, 같이 씻자.

 

 

 

 

 

 

 

 

 

 

 

 

 

 

 

 

 

 

 

 



' > 사랑옵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랩홉] 사랑옵다 6  (2) 2017.04.17
[랩홉] 사랑옵다 5  (2) 2017.04.13
[랩홉] 사랑옵다 4  (0) 2017.04.08
[랩홉] 사랑옵다 3  (0) 2017.03.23
[랩홉] 사랑옵다 2  (1) 2017.0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