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랩홉] 사랑옵다 9
길/사랑옵다
선풍기가 탈탈탈 돌아가는 소리만 났다. 호석은 책상에 얼굴을 뉘었다. 볼 한 쪽이 책상에 눌렸다. 책상은 시원하네. 호석은 영양가 없는 생각만 하며 반대쪽에 있는 남준을 바라봤다. 남준은 두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공부에 열중하고 있었다. 마음속으로 무어라 중얼거리는지 입이 뻐끔뻐끔 거린다. 남준은 아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공부할 때 입으로 중얼거리는 버릇이 있었다. 소리는 나지 않지만 입만 뻐끔거리는 모습을 보면 웃길 때가 있다. 덥지도 않나. 호석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의 자리가 더운 자리는 아니었다. 선풍기 바람도 바로 오는 곳이고, 창문 바로 옆자리라 바깥에서 가끔 불어오는 바람도 적당히 선선했다. 그래도, 이제 여름인데.
교실에는 호석과 남준, 둘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조금 전, 선생님이 순찰 겸 이 교실을 지나다가 남준과 호석을 보고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남준이는 오늘도 남아있었구나, 근데 호석이는 뭐냐? 장난스러운 선생님의 말씀에 호석이 아 쌔애앰... 하고 말꼬리를 늘였다. 선생님은 호탕하게 웃으며 남아서 공부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며 열심히 하고 가라고 말씀하시곤 자리를 떴다.
오늘은 모의고사를 쳤기 때문에 공식적인 야자는 없었다. 하지만 남준은 매일 어떤 일이 있어도 교실에 남아서 똑같은 시간까지 공부를 했었고, 이번에도 이례 없이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야자를 했다. 호석은 왠지 가고 싶지 않았다. 그와 자신 둘만이 있는 시간은 거의 손에 꼽을 정도였다. 어떻게 보면 충동 같은 거였고, 또 어떻게 보면 이렇게라도 그와 함께 있고 싶은 알 수 없는 마음이었다. 저녁에 둘 만이 있는 교실에 있는 기분은 어떤 기분일까. 단순한 궁금증이기도 했다. 아니, 이것을 단순하다고 표현할 수 있는 건가. 호석은 얼굴을 들어 고개를 살짝 저었다. 오랫동안 중력에 눌린 볼이 발갛게 물들었지만 이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지금 호석은 제 마음이 갈피를 못 잡고 갈팡질팡 하는 이유가 더 중요했다.
고등학생의 흔한 사춘기인가. 이제 슬슬 3학년이라는 압박도 들어오기 시작하고 춤을 출 수 없다는 생각에 마음이 뒤숭숭해서 그런가. 아니면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새로운 문제인건가. 호석은 그마저도 답을 내리기 힘들었다. 전부 다인 것 같기도 했다. 그래, 어쨌든 제 속이 알 수 없이 요란하기만 한 이유 중 하나가 김남준 때문이라는 것은 잘 알겠다. 호석은 다시 슬쩍 고개를 돌려 남준을 바라봤다.
눈이 마주쳤다.
호석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바로 해 책상 서랍에 짚이는 책을 꺼냈다. 하필 제일 못하는 수학이다. 어쩔 수 있나. 호석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책을 펴고 필통에서 샤프를 꺼내 들었다. 얼굴이 홧홧해졌다. 아니 그냥 친구를 보는 건데 왜 얼굴이 홧홧해져? 호석은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쩐지 그와 눈이 마주쳤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부끄러웠다. 엄지를 이로 물고 눈은 수학책으로 가 있지만 도저히 책 내용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니 그러고 보니 내가 김남준 보려고 했을 때 걔가 이미 나를 보고 있었잖아. 왜 보고 있었지. 호석은 결국 그대로 허리를 숙였다. 이마가 책과 닿았다. 역시 자신은 머리를 굴리는 것에는 흥미가 없었다. 걔도 그냥 봤겠지 뭐가 있겠냐...
고개만 돌려 그를 바라봤다.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는지 그의 머리카락이 살짝 휘날렸다. 그는 여전히 열심히 공부 중이었다. 전교 1등은 다르네. 자신이 보던 그의 대부분의 모습은 공부하는 모습이었다. 그렇다고 다른 남자 고딩처럼 안 논다는 뜻은 아니지만, 그는 무언가 목표가 있는 사람처럼 공부에 매달렸다. 원하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는 거겠지. 계속 전교 1등을 할 정도로 공부를 하는 걸 보면 뭔가 대단한 꿈이 있을거야. 판사라던가. 남준은 참 신기한 사람이었다. 자신과 전혀 다른 세상 사람인 것 같으면서도 어떨 때 보면 언제나 옆에 있었던 것처럼 편하기 그지없었다. 이것도 남준의 능력이 아닐까. 우러러 볼 수도 없는 높은 사람들은 자신을 낮추는 법도 알기에.
고개를 반대로 돌렸다. 벽이 보였다. 갑자기 현타가 왔다. 나 진짜 왜 이러고 있지. 김남준이 뭐라고 얘 공부하는 걸 또 기다려주는 거냐고. 이때까지 친구들은 많았지만 이런 친구는 처음이었다. 아니 사실 친구인지도 모르겠다. 호석은 생각했다. 모르긴 몰라도 지금 자신이 남준에게 가지고 있는 이 감정은 단순한 우정은 아니었다. 아직 많이 혼란스럽고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건.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또 흠칫 놀라고 말았다. 그는 어느새 책상에 엎드려 얼굴의 반은 팔에 가려진 채 자신을 보고 있었다. 시선이 똑같은 위치에서 맞부딪쳤다. 이번에 호석은 피하지 않았다. 남준도 피하지 않았다. 한참을 바라만 봤다. 남준아. 호석이 작게 그를 불렀다. 응. 남준이 대답했다.
넌 왜 공부해?
단순한 궁금증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모든 고등학생들의 순수한 의문이기도 했다. 남준은 한참 말이 없다가 입을 열었다.
하고 싶은 게 없어서.
...어?
하고 싶은 게 없으니까. 나중에 하고 싶은 게 있을 때 발목 잡히지 않으려고.
......
난 너처럼 확고하게 좋아하는 것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으니까. 공부라도 잘해야지.
......
네가 부럽다 호석아.
호석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머리가 멍해졌다. 남준도 호석이 따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시선은 서로를 향했다. 여전히 교실 안은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 밖에 나지 않았다. 장난치지 말라고 이야기 하려 했다. 하지만 진중하기만 한 그의 눈을 보니 그 말도 목구멍으로 쑥 들어가 버렸다. 그는 언제나 진심이었고 장난은 없었다.
여태까지 자신을 부러워했던 사람이 있었나. 주위 사람들은 멋있어 보인다고 좋아했다. 여자애들한테도 인기 많겠네. 나도 너처럼 춤추면 여자애들한테 인기 많아지냐? 그런 말을 많이 들었었다. 장난으로 하는 말이라는 것은 잘 알지만, 춤과 인기를 묶어서 이야기 할 때면 기분이 좋지 않았다. 자신은 인기를 얻기 위해서 춤을 춘 것이 아니었고, 춤을 추면서 인기를 바란 것도 아니었으며, 그런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친구들의 입에서 나오는 춤과 인기는 호석에게 부담일 뿐이었다.
춤이 좋아서 하는 거지?
남준이 물었다. 호석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너 춤추는 거 처음 봤을 때 그렇게 생각했어. 정말 좋아하는 걸 하면 저런 표정을 짓는구나. 저 애는 정말 행복해 하는구나. 아, 정말 부럽다.
......
다른 애들은 다들 나를 부럽다고 하지만 대상이 잘못됐어. 나는 정말 빈껍데기일 뿐인걸.
... 난 정말 네가 멋있다고 생각해. 진심이야.
공부를 잘해서?
......
......
나는... 그냥...
......
너 자체가 멋있다고 생각해. 이것도 진심이야.
왜?
남준의 물음에 호석은 그 답을 찾으려는 듯 입을 벙긋거렸지만 결국 두 입술이 꾹 맞물렸다. 왜 멋있을까. 이유를 모르겠고, 굳이 그 이유를 찾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 이유가 그렇게 중요한가 싶기도 했다. 처음에는 그의 명석함에 눈이 간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무렴 상관이 없었다. 김남준이 설사 하루하루를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놀아도, 공부를 잘 하지 못해도, 자신은 여전히 김남준을 멋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알 수 없는 끌림이었다. 도대체가 아무리 머리를 쥐어 짜내 보아도 왜 그에게 눈길이 가고 계속 끌리는지 잘 모르겠지만. 제 온 신경이 그에게 정처 없이 끌려가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이유가 있어야해?
한참 뒤에 호석이 되물었다. 이제는 남준이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괜히 손에 땀이 차는 기분에 호석은 대충 바지에 제 손을 슥슥 문질렀다. 한참 후, 남준이 입을 열었다.
아니.
......
이유가 없었으면 해.
그는 다시 엎드렸다. 살짝 웃는 그의 볼에 보조개가 움푹 들어갔다. 아직 한 번도 해보지 않았지만 움푹 들어간 그의 볼우물을 손가락으로 콕콕 찔러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없었다.
호석도 남준 따라 다시 엎드렸다. 둘 사이에 잠시 말이 없었다. 교실은 여전히 낡은 선풍기가 돌아가는 소리 밖에 나지 않았다. 그렇게 좁고 시끄럽다고 생각했던 교실이, 둘만 있으니 한적하기만 했다. 제일 뒤쪽 끝과 끝자리에서 이렇게 마주 볼 수 있는 것도 지금 이 시간밖에 없을 것이다.
다음에 짝 정할 때.
남준이 입을 열었다. 둘은 여전히 엎드린 채, 180도 돌아간 세상에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 옆자리가 너였으면 좋겠어.
호석은 순간 헙 숨을 들이켰다. 별 거 아닌 말이다. 학기 초부터 자신이 그와 친해지고 싶어 했던 것처럼, 그 역시 자신과 친해지고 싶어 했다. 이때까지 4번 정도 짝이 바뀌면서 그와는 짝 해본 적이 없으니까 이번에는 하고 싶다. 단순히 그것이었다. 그런데 왜 첫사랑한테 고백 받은 사람처럼 설레느냔 말이다. 호석은 이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김남준을 좋아하고 있다.
오늘따라 유난히 밤하늘이 깨끗했다. 평소에는 잘 보이지 않던 별이 오늘은 총총총 박혀 있는 것이 보였다. 아직 완연한 여름은 아니라 밤공기는 시원했다. 호석은 살짝 폰을 켜서 시간을 봤다. 10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오늘 모의고사 어땠어? 저보다 조금 앞서 걷고 있던 남준의 말에, 호석은 빠른 걸음으로 남준의 옆에 붙었다.
모의고사?
응.
뭘 그런 걸 물어보고 그러냐. 그냥 보통이지, 뭐.
다른 애들이 그러던데. 너 공부 잘 한다고.
그냥 그래.
이런 거 물어보면 좀 실례이려나.
뭐?
나중에. 대학교 갈 때, 어디로 갈 거야?
가고 싶은 곳이 있긴 해.
어디?
... 비밀이야.
왜? 말해줘. 남준이 고개를 돌려 호석을 바라봤다. 그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호석은 애써 고개를 저 멀리 어디에 두었다. 말하면 너 웃을 것 같아. 호석의 말에 남준이 세게 고개를 저었다. 내가 왜 웃어, 네가 가고 싶어 하는 덴데.
전교 1등 앞에서 내가 어떻게 말해.
그게 다 무슨 상관이야.
아 그냥 창피하니까 말 안하고 싶어.
......
너는?
나도 비밀이야.
그래도 제일 높은 대학교 가겠지.
남준은 말이 없었다. 호석은 언젠가 다가올 고등학교 졸업과 대학 입학을 생각했다. 중학교 졸업 했을 때만 해도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어차피 대부분은 다 자신과 같은 고등학교였고, 생활만 조금 달라질 뿐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고등학교는 3학년으로 올라가고, 대학 입시를 시작하면 많은 것이 달라지겠지. 그리고 고등학교 졸업하면 더 이상 보기 힘든 친구들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어쩐지 조금 우울해졌다. 먼 듯하면서도 멀지 않은 시간이었다.
남준아, 나중에 졸업하고 대학교 가서도 친하게 지내자.
당연하지.
너랑은 오래도록 알고 싶다.
그거 영광인데.
남준이 푸스스 웃으며 대답했다. 나 레알 진지함, 이런 말 하는 거 네가 처음이라고. 호석은 어쩐지 장난으로 받아들인 듯한 남준의 반응에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정말 영광이야. 남준은 영광이라는 단어에 힘주어 말했다.
나 사실 여태까지 이렇다 할 친구가 없어서.
진짜? 인기 많았을 것 같은데.
글쎄. 내가 친구로 지내기에는 되게 재미없긴 하지.
네가 어때서.
중학교 때 재수 없다는 소리도 많이 듣고. 애가 같이 놀지도 않고 맨날 책상에 앉아서 공부만 하니까.
......
정확히 말하면 놀 줄 몰랐지만.
노는게 별거냐.
가르쳐줘. 같이 놀아줘.
남준의 말에 호석이 푸핫 웃었다. 노는 건 가르쳐 주는 대로 열심히 하는 게 아니지, 제가 뭘 하든 정말 재밌게 즐긴다면 그게 노는 거야. 남준도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아파트 입구 앞에 멈추었다. 남준의 집은 이 아파트 단지 너머에 있는 주택단지에 있었기 때문에 더 가야했다. 그럼 내일 봐. 가볍게 인사를 하고 아파트에 들어가던 호석을 불러 세운 건 남준이었다.
호석아.
어?
난 너랑 같은 대학교 가고 싶어.
......
아 그, 그러니까 이게 너보고 공부 하라는 소리가 아니라...
갑자기 당황해 쩔쩔매는 남준이 퍽 웃겨 호석은 피식 웃었다. 평소답지 않게 꽤나 당황하는 모습이 새로웠다. 그만큼 너랑 오래 보고 싶다는 소리야. 남준의 말에 호석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공부하자.
그래.
내일봐.
응.
호석은 아파트에 들어가려다 또 할 말이 생각난 듯 다시 뒤돌았다. 남준은 여전히 손을 흔들며 서 있었다. 너는? 호석의 물음에 남준은 고개만 갸웃했다.
대학 같이 가고 싶고, 같이 공부 하자는 거. 다른 친구들한테도 그런 말 한 적 있어?
아니. 나도 이런 말 한 거 네가 처음이야.
좋네.
호석이 씨익 웃었다. 그의 눈이 유려하게 휘었다. 남준은 작게 흔들던 손을 우뚝 멈추었다. 그의 미소는 언제나 자신의 행동을 멈추게 만들었다. 어쩌면 숨까지도. 내일보자. 호석이 가볍게 말하며 들어갔다. 남준은 한동안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
아마 난 처음 너를 만났을 때부터 너한테 반했는지도 몰라. 뜬금없는 호석의 말에 남준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그건 왜? 남준의 물음에 호석은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꿈에 나왔어, 고등학생 때의 네가. 남준도 덩달아 비장한 표정과 비장한 어투로 말했다. 고등학생 때 나를 다시 본 느낌은?
어떤 느낌이긴. 확실히 지금보다 더 파릇파릇하고 풋풋하고 귀엽고 그렇지 뭐.
뭐?
지금은 가끔 네가 정말 아저씨 같다는 생각이 든다니까. 능글능글 야한 짓도 좋아하고.
야...
아마 넌 모르겠지만 고등학생 때의 너 나름 귀여웠어. 지금 생각해보니까 너 나 좋아하는 거 티 엄청 냈더라고. 그 때의 나도 참 멍청했지. 어떻게 그걸 몰라 볼 수가 있지?
그리고 내가 너 먼저 좋아했어.
나 2학년 때 너 처음 만나자마자 좋아했다니까?
그래. 난 너 처음 봤을 때, 그 때부터 반했었어.
... 2학년 때 아니야?
내 사랑은 너보다 길다, 인마.
남준이 피식 웃으며 하는 말에 호석은 멍해졌다. 언제? 호석의 물음에도 남준은 묵묵히 밥만 먹을 뿐 말해주지 않았다.
아 언제부터냐고.
그게 중요해?
궁금해.
나도 너 첫눈에 반했어. 솔직히 첫눈에 반한다느니 그런 거 다 거짓말이고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그런 게 있긴 하더라. 심지어 내가 남자한테 그렇게 반할 줄은 생각도 못했지.
그래서 언제부터인데.
넌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1학년 때, 너 무용실에서 춤 췄을 때.
그걸 봤어?
우리 눈도 마주쳤는데.
......
네가 웃어줬어.
젠장, 기억 안나. 호석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1학년 때 남준이에 대한 인상이 어땠더라. 같은 반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냥 전교 1등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심지어 얼굴도 몰랐는데 만난 적 있었다니. 분명 지나가는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했었을 것이다. 힝... 호석은 어지간히도 아쉬운 듯 입꼬리를 축 내렸다. 어쨌든 우리 지금 이렇게 만나고 있잖아. 남준의 말에도 호석의 기분은 풀릴 줄 몰랐다.
뭔가... 내가 그 때 너를 가볍게 넘기지 않았다면 우린 더 빨리 만날 수 있었을까.
음...
더 빨리 사귀었을 수도 있었겠지?
그건 아니.
왜?
난 겁쟁이었으니까.
......
졸업식 날 고백했던 것도, 난 겁쟁이니까 고백했다가 차여도 다시 안볼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랬던 거야. 다행히 너를 다시는 못 볼일 안 생겼지만.
뭐?! 같은 대학교까지 가자고 했으면서 어떻게!
과가 다르잖아. 정말 마음 먹고 안 볼 생각이었어. 간절한 마지막이었다고. 다시 말하지만 난 그 때 정말 공부 밖에 모르는 찌질이었고 겁쟁이었어. 알잖아.
참 나. 그래도 그렇지, 너무 한 거 아니야? 내가 만약 정말 거절했으면 진짜 다시는 안 볼 거였단 말이잖아. 나 지금 완전 소름 돋는데.
그런 생각으로 고백을 했긴 했지. 그래도 아마 나중에는 또 좋다고 너를 따라다녔겠지만. 어쨌든 처음엔 그랬어.
......
미안해. 그래도 친구한테 고백한다는게 나로써는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어. 그러고 싶진 않았는데 계속 최악의 결과만 생각이 나. 말했잖아, 나 정말 겁 많다고.
그러니까 그렇게 화내지마, 난 여전히 너한테 겁쟁이야. 우물쭈물 말하는 남준의 표정은 어찌할 바 몰라 쩔쩔 매는 표정이었다. 호석은 장난으로 축 내리던 입꼬리를 스윽 올렸다. 앞으로 마지막이라느니, 평생 안 볼 거라느니, 그런 말 하면 진짜 죽는다. 장난기 어린 호석의 말투에 진지했던 남준은 그제야 안도한 듯 미소를 흘렸다.
너 면도해야겠다. 호석의 말에 그의 허벅지에 누워 책을 보고 있던 남준이 힐끗 호석을 올려다봤다. 호석은 그의 턱을 살살 쓸었다. 까슬까슬한 수염이 느껴졌다. 지금? 남준이 의문 가득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게 퍽 귀여워 호석은 푸스스 웃었다. 남준의 머리를 옆쪽으로 치우고 자리에서 일어난 호석이 안방으로 쏙 들어갔다. 멍하니 호석의 뒷모습만 보던 남준도 후다닥 책을 소파에 두고 일어나 호석의 뒤를 따랐다.
남준의 면도는 가끔 호석이 해주었다. 평소에는 남준이가 하지만 주말 같이 여유로운 날에는 거의 호석이 해주는 편이다. 남준이 면도를 하면 얼굴에 작은 생채기가 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호석은 되도록이면 자신이 하고 싶어 했다. 다행인지 뭔지 남준은 수염이 그렇게 빨리 자는 편이 아니었다.
우리 대형 멍뭉이 또 털 깎아줘야지. 혼잣말 하듯 중얼거리며 면도 준비를 하는 호석을 보며, 남준이 피식 웃었다. 왔으면 이리 와서 앉아. 호석이 욕조를 탁탁 두드리자 남준이 욕조에 걸터앉았다.
선반에서 세이빙 폼과 면도기를 꺼내 뒤돌아봤다. 언제나 살짝 위를 향했던 시선이 지금은 아래로 향한다. 호석은 비싯비싯 새어나오는 웃음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가만히 호석을 올려다보던 남준은 웃음기 가득한 호석의 얼굴에, 따라 웃었다. 왜 웃어. 남준이 물었다.
이제야 내가 너보다 키가 커서.
어쩌면 유일한 시간이기도 하지.
진짜 몇 센치 차이 안 나는데 키로 보면 은근 차이가 나더라. 내가 고개를 살짝 들 정도니까. 뭐, 지금은 내가 훨씬훨씬 더 크지만.
나 일어난다?
위에서 나를 내려 볼 때 이런 느낌이었어?
호석이 남준의 볼을 살짝 감싸 잡으며 물었다. 어떤 느낌인데? 남준이 나직이 되물었다. 음... 호석이 엄지로 그의 볼을 살살 쓸었다.
네 눈이 오롯이 나를 향해 있고. 네 눈은 빛을 받아서 반짝거리고. 반짝거리는 눈 속에는 내가 있고. 나는 네 눈빛에 설레고.
남준은 호석의 손을 덮어 잡았다. 그를 올려다봤다. 지그시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이 좋아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나를 올려다 볼 때 이런 느낌이었어? 남준이 물었다. 호석이 푸스스 웃었다. 무슨 느낌인데?
네 시선이 유성우처럼 나한테 쏟아지는 느낌.
......
그만큼 나한테 집중하고 있구나, 하는 느낌.
그래?
그래서 좋아 정말 이 달달한 눈빛마저 내 것이구나 하는 느낌이라서. 나, 사랑 받는 게 느껴져서.
내가 할 소리.
호석은 고개를 숙여 그의 입술을 살짝 머금었다. 남준은 한 손을 들어 그의 목을 감싸고 더 깊숙이 그를 물었다. 너 빨리 면도해야겠다, 따가워. 호석이 입술을 떼면서 하는 말에 남준이 푸핫 웃음을 터뜨렸다. 호석은 옆에 두었던 세이빙 폼을 남준의 턱에 바르기 시작했다. 예쁘게 해주세요. 남준의 말에 호석이 싱긋 웃었다. 손님이 원하시는 대로.
호석은 자신과는 다르게 섬세하다. 길쭉길쭉하고 보드라운 손가락이 제 볼에 닿고, 야무지게 입을 다문 채 진지한 눈빛으로 천천히 면도를 하는 모습을 보며, 남준은 그렇게 생각했다. 호석의 얼굴을 가장 가까이서 보는 몇 안 되는 시간. 남준은 이 시간이 좋았다. 예쁘게 자리 잡은 속 쌍꺼풀과 쭉 뻗은 속눈썹, 그 아래 빛을 머금고 반짝거리는 흑색 눈동자. 호석의 어떤 점이든 다 예쁘고 좋았지만 굳이 그 중에서 꼭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수 시간의 고민 끝에 눈을 고를 것이다. 자신을 바라보고, 웃으며 휘어지는 눈. 아, 바라보는 것이 좋아서 눈이 좋은 건가. 뭐가 됐든 호석이라서 좋았다.
한창 집중하다 눈이 마주쳤다. 호석은 생긋 웃어주곤 다시 면도에 집중했다. 심장이 아파. 저 웃음은 반칙이다.
호석은 잠시 후 허리를 폈다. 다 됐어, 이제 씻어. 호석의 말에 남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수를 하고 거울을 봤다. 깔끔한 모습이 만족스러운지 남준의 얼굴에 연하게 미소가 어렸다.
모든 것이 완벽해 보이는 팀장님이 사실은 면도도 제대로 못하는 허당인 걸 알면 사원이 어떤 반응일까. 호석이 화장실 문틀에 기대어 거울 속 남준을 바라보며 말했다. 남준은 시선만 살짝 돌려 거울 속 호석을 바라봤다. 호석은 장난기 어린 미소를 띠고 있었다. 남준 역시 피식 웃으며 뒤돌아 진짜 호석을 바라봤다.
아니지. 면도도 못해서 남이 해주는 게 아니라. 면도도 해주는 멋진 애인이 있어서 부럽다지.
나 참.
모든 걸 긍정적으로 생각하셔야죠.
어쨌든 또 당분간 안해도 되겠지. 네가 수염이 엄청 늦게 자라는 편이니까.
뽀뽀해줘.
뭐야, 뜬금없이.
아까 너 따갑다고 빨리 끝냈잖아.
그걸 또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냐.
마음에 담아 뒀다기 보다는 그냥 아쉬워서.
호석이 손을 까딱였다. 남준이 다가가 바로 그의 목을 손으로 감싸고 입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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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거 없는 내용인데
매번 랩홉이들 보러와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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