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뷔민 남고생의 일상 외전 2 (完)

길/남고생의 일상 (完)



1. 청춘

 

건배! 경쾌한 목소리와 함께 유리잔이 맞부딪쳤다. 잔 안에 있던 맥주가 넘쳐 유리잔을 타고 흘러내렸다. 잔뜩 상기된 표정의 지민은 건배하기가 무섭게 맥주를 들이켰다. 입 안 가득 탄산처럼 터지는 시원함이 목으로 부드럽게 넘어갔다. 크으!! 지민은 시원하게 탄성을 지르며 앞에 있는 감자튀김을 입에 넣었다. 얼마만의 맥주인지 모르겠다. 지민은 다시 맥주잔을 잡고 입에 댔다.

 

 

너 김태형한테 말하고 왔지?

 

 

큭흡! 동기의 말에 지민은 순간적으로 사례 들려 켈록거렸다. ... . 입가를 슥 닦으며 한 대답이 영 시원치 않아, 동기가 지민을 탐탁지 않은 눈으로 바라봤다. 지민은 그의 눈을 살짝 피하며 다시 맥주를 입에 가져다댔다.

 

 

너 설마 김태형한테 말 안하고 왔냐?

 

오늘 과모임 있다고 얘기 했어...

 

술 마신다고 이야기 하고 왔냐고.

 

......

 

안했어?

 

어차피 빨리 갈 거야.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새끼야.

 

 

지민의 말을 들은 동기들이 진저리를 치며 지민의 손에 들린 맥주를 뺏었다. 야야 빨리 치워, 김태형 또 들어오기 전에 빨리! 같이 있던 후배들은 영문도 모른 채 지민의 앞에 있는 소주잔도 치웠다. 아 괜찮다니까 진짜! 지민이 성질을 내며 제 잔을 다시 가져왔다. 이대로라면 더 이상 술은 입도 못 댈 것이 분명했다. 지민은 다급히 맥주잔 안에 소주도 섞기 시작했다. 저 미친놈! 친구가 재빨리 다시 잔을 뺏으려 했지만 지민이 더 빨랐다. 바로 입 안에 부어버리는 지민에, 후배들은 상황 파악이 안돼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지민과 친구들을 번갈아 바라보기만 했다.

 

맥주잔을 탕 소리가 나도록 탁자에 내려놓은 지민은 후 숨을 깊게 내쉬며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아 이제 좀 살 것 같다. 지민은 히힣 웃으며 말했다. 다른 친구들은 그런 지민의 행동이 어이없을 뿐이었다.

 

 

제에발, 술자리 올 때는 김태형한테 말하고 와라.

 

아 걔한테 말하면 겁나 찡찡대는 거 알잖아. 진짜 오늘은 괜찮다니까? 나 오늘은 딱 이만큼만 마시고 가려고 했어. 어차피 집에 빨리 들어가 봐야해.

 

이러다 김태형이 또 여기 찾아오면 어쩔 건데.

 

걔가 과모임 여기서 하는 걸 어떻게 알아.

 

내가 왜 몰라, 색시야.

 

 

우와아아악!!!! 갑자기 뒤에서 들리는 낮은 목소리에 지민은 소리를 빽 질렀다. 심장이 쿵 떨어질 정도로 너무 놀라 펄떡펄떡 뛰어댔다. 지민의 뒤에는 태형이 후드집업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삐딱한 자세로 지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테이블에 있던 모든 사람의 시선이 태형에게 쏠렸다. 그 중에는 태형과 알고 지내던 사람도 있었고, 지금 처음 본 사람들도 있었다. 눈알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던 지민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손을 살짝 들었다. , 안녕? 지민의 인사에 태형의 한 쪽 눈썹이 위로 꿈틀 움직였다. 색시야. 태형은 나직이 지민을 부르며 살짝 웃었다. 입꼬리는 살짝 웃고 있지만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은 그 표정은 지민이 두 번째로 무서워하는 표정이었다.

 

 

술을 마시고 싶었으면 나한테 이야기 하지, 색시야.

 

... 아니 그게 아니라...

 

내가 괜히 너 술 못 먹게 하는 거 아니잖아. 색시의 그 개 같은 술버릇만 좀 어떻게 하면 내가 이렇게 좆 빠지게 색시 찾으러 다닐 일도 없어, 알잖아.

 

 

태형이 주머니에서 한 손을 쓱 빼, 지민의 어깨를 잡았다. 그의 커다란 손은 지민의 어깨를 감싸기 충분했다. 제 어깨를 꽉 잡는 그 악력에, 지민은 저절로 몸이 움츠러졌다. 지민은 살짝 고개를 돌려 눈빛으로 SOS를 요청해보지만, 이미 이런 일을 여러 번 겪었던 그의 친구들은 시선을 피하기 바빴다. 사실 태형의 마음을 이해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저 같아도 제 애인이 지민 같은 술버릇이었으면, 술자리에 보내기 마음 불편했을 것이다. 지민은 제 친구들이 자신과 끝까지 술자리를 같이 해주지 않는다며, 내 친구가 아니라 김태형 친구라며 유치하기 짝이 없는 말까지 한 적 있었지만, 그건 전부 다 제 술버릇을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이었다. 지민의 친구들은 술에 있어서는 전력으로 태형을 도울 마음이 있었다. 오늘 태형에게 술집 위치를 알린 것도 지민의 잔을 뺐었던 친구였다. 그만큼 그들은 지민에게 술을 먹이기 싫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지민의 술버릇에 당하기 싫었다. 친구들은 태형에게 정신 팔린 지민 몰래 얼른 데려가라고 손을 훠이훠이 휘저었다. 그들의 손짓을 본 태형은 다시 고개를 내려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지민을 바라봤다.

 

 

... 색시 지금 일부러 날 그렇게 보고 있는 거지.

 

내가 뭘?

 

어어, 이거 봐 이거 봐, 방금 입술 삐죽 내민 거 나 다 봤다. 지금 일부러 응? 나 마음 약해지라고 그렇게 보고 있는 거잖아.

 

......

 

입술 넣어. 오늘은 안 봐줄 거니까.

 

......

 

나 다 들었어. 너 소맥 비율도 없이 그냥 막 섞어 마셨다고. 이제 안 돼. 너 이미 한계야.

 

아닌데.

 

맞는데.

 

나 아직 멀쩡한데.

 

색시 얼굴 빨간데.

 

나 원래 홍조 있는데.

 

지금 누구 앞에서 거짓말을 치고 있지? 내가 색시 얼굴을 몇 년을 봤는데. 홍조랑 술 때문에 올라온 열기 하나 구분 못할까봐? , 너보다 네 얼굴 더 많이 봤어.

 

 

씨발, 얘 언제부터 이렇게 말 잘했지. 지민은 제 말을 꼬박꼬박 받아치는 태형에,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입술만 잘근 깨물었다. 원래라면 제 간절한 눈빛 때문에 결국 못 이기고 옆에 앉았었는데 오늘따라 강하다. 아니 이 정도로 내가 끈질기게 달라붙었으면 적당히 눈치 채고 옆에 앉아주면 안되냐. 지민은 태형을 밉게 노려봤다. . 태형이 살짝 코웃음 치며 검지로 톡 지민의 입술을 살짝 쳤다. 삐죽 나와 있던 입술은 태형의 손길에 쏙 들어갔다.

 

 

그렇게 고양이 눈 해도 하나도 안 무섭다.

 

나 지금 너 미워하는 건데.

 

, 그건 좀 무서운데. 입술 자꾸 나오지 또.

 

눈치 고자냐? 이 정도 티냈으면 좀 알아줘라, 진짜.

 

그래서. 키스해달라고?

 

 

야아아악!!!!! 결국 지민이 또 한 번 빽 소리를 질렀다. 막상 그런 말 한 당사자는 단순한 안부인사 한 사람마냥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지민의 얼굴만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지민은 살짝 몸을 일으켜 태형의 멱살을 잡고 끌어내렸다. 태형은 순순히 허리를 숙였다. 너 지금 사람 많은데서 무슨 말 하는 거야... 지민은 이를 악 문 채 태형의 귓가에 속삭였다. 흐흫. 태형이 낮게 목울대에서 울리는 듯 웃었다. 색시야, 나 지금 바로 너한테 진하게 키스할 수도 있어. 입술을 지민의 귀에 바짝 대고 말하는 태형의 목소리는 미칠 듯이 섹시했다. 이렇게 가까이서 이야기 할 때, 목울대에서 울리는 듯한 그의 낮은 목소리는 언제나 지민에게는 큰 자극이었다. 살짝 굳은 듯한 지민에, 태형은 그의 귓바퀴에 일부러 소리 내며 뽀뽀하고 떨어졌다. 지민의 두 귀가 순식간에 불타올랐다. 자연스레 두 손으로 귀를 감싼 지민이 태형을 천천히 올려봤다. 태형은 여전히 평온하기 그지없는 표정이었다.

 

 

제발 애정행각은 너희들 집에서 해줄래.

 

봤어?

 

바로 앞에서 그런 짓 해놓고 어떻게 그렇게 뻔뻔하게 말할 수 있지?

 

씨발, 귀에 뽀뽀하는 소리까지 다 들렸어.

 

, 그럼 내가 색시 귓가에 한 말도 들렸겠네.

 

그건 못 들었는데 딱히 알고 싶지도 않아.

 

 

친구들의 말에 태형이 개구지게 웃었다. 간신히 정신줄 잡은 지민은 천천히 몸을 돌려 바로 앉았다. 왠지 맞은편에 앉아있는 친구들과 후배들의 얼굴을 보기 민망해, 계속 헛기침만 하며 시선을 아래로 내린 채 손만 더듬거리며 맥주잔을 찾았다. 뭐 하는 거야. 뒤에서 태형의 손이 쑥 나와 지민의 손을 덮어 잡아 당겼다. 손이 테이블에서 떨어졌다. 아 제발 태태... 나 지금 그냥 정신을 잃고 싶어... 지민의 간절한 바람은 태형에게까지 닿지 않은 듯, 태형은 지민의 손을 놓지 않았다. 결국 지민은 제 옆에 있는 태형의 팔에 몸을 기대고 얼굴을 묻었다.

 

야이씨, 가던지 앉던지 둘 중 하나만 해. 맞은편에 앉아있던 친구의 말에 태형은 반대쪽 손으로 지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겼다. 이제 일어나자 진짜, 너 완전 아슬아슬해 지금. 태형의 말에도 지민은 입 꾹 다물고 기대고 있던 태형의 팔을 꽉 잡았다. 오늘따라 왜 이럴까, 우리 색시. 거의 지민을 안다시피 하며 어깨를 토닥이던 태형은 결국 허리를 피고 일어났다. 미안하다, 잠시 자리 좀 채워도 되냐. 결국 항복과도 같은 태형의 말에 지민은 그 몰래 씨익 웃었다. 결국 태형은 절대 자신을 이길 수 없었다.

 

그럼 술 마셔도 되지? 지민은 금세 해맑게 웃으며 맥주잔을 들었다가, 태형이 그대로 맥주잔을 가져갔다. 어어어? 순간 당황한 지민은 뭐 어쩌지도 못한 채 자연스럽게 태형의 입 속으로 들어가는 그 일련의 과정을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다. 아 쓰다.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테이블에 맥주잔을 내려놓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 지민이 태형의 팔뚝을 퍽 때렸다.

 

 

, 아퍼어.

 

네가 내 술을 왜 먹어!

 

내가 여기 있겠다고 했지, 너 술 마시라고는 안했는데.

 

그럼 여기 왜 있는데.

 

색시가 안 가잖아.

 

씨발 진짜 죽고 싶냐?

 

여하튼 안 돼. 차라리 내가 죽는 게 낫지, 내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을 때까지는 색시가 남 앞에서 술 취해서 헤롱거리는 꼴 못 봐.

 

 

표정까지 단호한 태형에, 지민은 기가 막혀 코웃음조차 안 나왔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내가 무슨 알코올 중독자처럼 맨날 술만 퍼마신 줄 알겠네. 지민이 투덜거리면서 말해도 태형은 그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기만 했다. , 건들지 마. 지민이 짜증스레 그의 손을 쳐내도 태형은 허허 웃었다.

 

태형은 딱히 이유를 이야기 해주지도 않으면서 술 좀 먹는다고만 하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어 막곤 했다. 지민은 술을 처음 입에 대기 시작한 20살 때부터 도무지 그런 태형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정확히 11일 자정이 되자마자 같이 술을 부었던 그 날부터였다. 지민은 처음 마신 술이 너무 맛있었다. 이미 술을 마신 적 있던 태형에게는 음주 행위가 새로운 일은 아니었지만 지민에게는 신세계였다. 와 태태, 나 술 좀 잘 마시는 편인가 봐. 지민은 앞에 있던 맥주 캔을 하나 더 따서 벌컥벌컥 들이켰다. 태형은 맞은편에 앉아 안주로 나온 오징어만 질겅질겅 씹어댔다. 넌 안 마셔? 지민이 이따금 그렇게 물어볼 때만 살짝 맥주를 입에 머금을 뿐이었다.

 

태형은 자신의 주량과 술버릇을 이미 알고 있었다. 주량은 어디 가서 말도 못 꺼낼 정도로 하찮았고, 술버릇은 잠이 드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민의 주량은 어느 정도인지, 술버릇은 뭔지 하나도 몰랐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저 맛있다고 물처럼 들이키는 지민의 앞에서 자신이 술을 마실 수는 없었다. 아무리 집 안이라 해도 혹시 모르니까. 사실 지민의 술버릇이 뭔지 궁금하기도 했다. 드디어 지민이가 술 마시는 모습도 보게 되다니... 태형은 문득 든 생각에 감격스러워져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안 그래도 홍조 있어 붉은기 도는 저 볼이 술 마시면 더 시뻘겋게 올라올지 궁금했다. 술이 좀 들어가서 기분 좋아지는 것도 보고 싶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지민이 술 마시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한창 조잘거리면서 술을 마시던 지민이 어느 순간, 고개를 푹 숙인 채 말도 없었다. 색시야? 태형이 조심스레 부르자 지민이 고개를 팍 들어 태형을 바라봤다. 눈이 살짝 풀린 것이 누가 봐도 취한 모습이었다. 태형은 지민의 앞에 있는 맥주 캔을 들어봤다. 빈 캔이 두 개, 그리고 반 정도 남은 캔 하나. 색시도 그렇게 술을 잘 마시는 편은 아닌가. 태형은 맥주 캔을 한 쪽으로 치우며 생각했다. 태태. 갑자기 자신을 부르는 지민에, 태형은 고개를 돌려 지민을 바라봤다. 풀리는 눈을 억지로 떠가며 억지로 결의에 찬 표정을 짓는 지민이 조금 웃기기는 했지만 태형은 웃음을 참으며 응 하고 대답했다.

 

 

태태.

 

왜 불러.

 

나 사랑해?

 

색시 진짜 취하긴 했나보다. 안하던 말을 하네.

 

난 사랑해.

 

나도 사랑해. 색시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지? 내가 서운하게 한 일 있어?

 

......

 

말해봐, 다 들을게.

 

 

태형은 아예 가운데 있던 안주들을 옆으로 다 치우고 몸을 슥슥 밀어 지민의 앞에 왔다. 지민의 두 손을 꼭 잡고 지민을 바라봤다. 태태... 지민이 말꼬리를 늘이며 태형을 쳐다봤다. 태형은 지민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머릿속에서 시끄러운 경보음이 울리는 느낌이 들었다. , 위험하다. 태형이 깨달았을 때는 이미 일이 일어난 후였다.

 

 

 

 

 

지민 선배한테 애인이 계신 건 처음 알았어요. 한 후배의 말에 지민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 내가 말을 안했나? 딱히 숨긴 건 아니었는데.

 

우리 과는 나 애인 있는 거 다 아는데. 애인이 색시인 것도 알아.

 

김태형 넌 알만 하다. 보나마나 과에서 틈만 나면 박지민 얘기를 해댔겠지.

 

 

친구의 말에 태형이 프스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김태형 때문에 나 학교에서 얼굴 다 팔리는 거 아니야? 지민이 말하면서 자연스레 술잔에 손을 가져갔다. 김태형이 알아차리고 술잔을 뺏으려 할 때는 이미 늦었다. 술잔에 남은 술을 호로록 다 마셔버린 지민은 천천히 술잔을 테이블에 내려놨다. 색시야. 태형의 부름에도 지민은 미동도 없었다. 술잔을 잡고 있는 그대로 고개만 푹 숙일 뿐이었다. , 안 되겠다 우리 먼저 갈게. 태형은 다급히 주위에 지민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어 그래 제발 빨리 데려가라, 얘들아 자리 비켜줘. 선배들까지 다급히 일어나라 손짓을 해, 지민의 옆에 앉아있던 후배들이 영문도 모른 채 슬금슬금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형이 테이블 위에 올려져있던 지민의 폰을 들었을 때, 갑자기 지민이 태형의 손을 턱 잡았다. . 태형은 급하게 숨을 들이키며 지민을 힐끗 쳐다봤다. 지민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였다. 태형의 손이 다급해졌다. 다른 한 손으로 가방을 들어 한 쪽 어깨에 메고, 지민의 핸드폰을 자신의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색시야 우리 빨리 집에 가자, ? 지민의 등을 토닥이면서 힘을 주어 그를 일으키려 했지만 술만 먹으면 어디서 이렇게 힘이 나는지 꿈쩍도 않는 지민에, 태형만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제발 색시야... 이제는 거의 태형이 애원 하다시피 지민을 얼렀다. 결국 지민의 양 겨드랑이에 팔을 끼우고 그를 일으켰다.

 

 

미안하다, 그냥 아까 바로 갔어야 했는데.

 

괜찮아, 너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너 없었으면 우리가 꼼짝없이 당했었어.

 

나도 그거 보기 싫어서 달려온 거 아니야.

 

 

태형은 지민을 꼭 안은 채 밑을 보며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태태야? 태형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던 지민이 확 얼굴을 들더니 양 손으로 태형의 볼을 꽉 잡고 억지로 고개를 올렸다. 난데없는 힘에 태형이 놀라 눈이 커진 채로 지민을 바라봤다. 양 볼이 꾹 눌려 입술이 붕어처럼 툭 튀어나왔다. 아니, , 잠깐... 태형이 다급히 지민의 손목을 잡고 내리려 했지만 지민은 여전히 힘이 셌다. 태형이 말릴 새도 없이 입술이 맞붙었다. 처음 본 후배들은 너무 놀라 헉 소리도 못 내고 눈만 커진 채 그들을 멍하니 바라봤다. 어찌나 진하게 입을 맞추는지 태형은 지민의 힘에 뒤로 천천히 밀려났다.

 

잠깐, , 색시야. 태형이 간신히 지민을 밀어냈다. 지민은 뚱한 표정으로 태형을 바라보다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또 누군가에게 손을 뻗는 지민에, 태형은 아예 그 손을 깍지 껴서 잡았다. 지민이 술만 취하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차라리 술을 잘 마시면 몰라, 주량도 얼마 안되는데 술자리는 좋아하니 애인으로써 이런 자리가 불안하기만 한 것이다. 심지어 술버릇이 뽀뽀라니, 다음날 기억도 못한다니, 태형은 속이 답답하기만 했다. 내가 이러니까 술만 마신다고 하면 눈에 흙이 들어가도 못 마신다고 떼를 쓰지... 태형은 곧 죽어도 지민이 남의 얼굴에 뽀뽀하는 꼴은 볼 수 없었다. 이미 지민의 술버릇을 알고 있는 친구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눈 돌아갈 것 같았다. 정말 박지민이 작정하고 자신을 피 말려 죽일 생각으로 그런 거라면, 이미 충분히 성공했다. 태형은 지민이 다른 사람이랑 술 마시는 것이 정말이지 끔찍이 싫었다.

 

테이블 밖을 나온 태형은 아예 지민을 업을 생각으로 몸을 숙였다. 옆에 있던 후배들이 눈치 채고 지민을 부축하며 태형의 등에 그를 업었다. 읏차, 가볍게 지민을 든 태형의 이마에 벌써 땀이 송글송글 맺히기 시작했다. 하 진짜 애인 하나 데려가기 힘드네. 태형이 살짝 지친 듯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미안하다 진짜, 우리도 웬만하면 술 안 먹이려고 했는데.

 

너희가 억지로 먹였겠냐. 또 색시가 자기 취하고 싶다고 무작정 들이켰겠지. 어쨌든 먼저 갈게. 저기 가방 좀.

 

 

태형이 한 손을 뻗자, 옆에 있던 사람이 후다닥 가방을 걸어주었다. 내일 색시 학교 못갈 수도 있다. 태형이 술집을 나가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친구는 손을 흔들어주었다.

 

한바탕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듯, 테이블에 정적이 돌았다. 후배들은 방금까지 휘몰아치던 폭풍의 여운이 가시지 않았는지 멍한 상태였다. 머릿속에서는 오로지 지민 선배 애인, 남자, 술버릇만 둥둥 떠다녔다.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 지민 선배의 생각지도 못한 TMI를 너무 많이 알아버린 날이었다.

 

 

 

이제 곧 여름이 다가오려는지 밤공기가 많이 쌀쌀하지는 않았다. 태형은 요즘 즐겨 듣는 노래로 작게 허밍하며 천천히 걸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그 난리를 피우더니 그새 자는지 목덜미에 지민의 숨결이 닿았다. 제 목을 감싸 안은 팔과 등 전체에 느껴지는 지민의 온기는 여전했다. 살 좀 빠졌나, 어째 저번보다 좀 더 가벼운 것 같기도 하다. 언젠가 살이 좀 찐 것 같다고 운동해야겠다더니 정말 저 몰래 운동이라도 하는가보다. 하나도 안 쪘다고 운동 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렸는데, 색시 정말 내 말은 하나도 안 들어주네. 태형이 작게 한 혼잣말에 뒤에서 큭큭 웃는 소리가 들렸다.

 

 

깼어?

 

네가 하도 맛있는 거 많이 사와서 나 살 엄청 많이 쪘어.

 

어디가 쪄. 내 눈에는 하나도 안 보이는데.

 

옷에 가려졌어. 벗으면 막 여기저기 살 좀 붙은 게 보여.

 

아닌데. 저번 주말에 봤는데 없었는데.

 

아닌데. 그 때 어두워서 네가 잘 못 본 건데.

 

봐야만 아나? 내가 막 여기저기 다 만져서 모를 리가 없는데.

 

아 뭐야, 변태.

 

 

지민은 태형의 어깨를 살짝 때리면서 꺄르르 웃었다. 아 머리아파. 지민은 다시 그의 목덜미와 어깨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뜨끈한 온기가 그대로 전해졌다. 아직 술 오른 게 다 가라앉은 건 아닌 모양이다. 으쌰. 태형은 지민을 고쳐 업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천천히 걷는 태형의 발소리가 타박타박 일정하게 들렸다.

 

.

 

목에서 느껴지는 말캉한 느낌에 태형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흐흫. 뒤에서 지민이 프스스 웃더니 갑자기 목 이곳저곳에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색시야, 하지 마. 태형의 말에 지민은 으응. 작게 앙탈을 부리며 태형의 뺨에 제 볼을 비볐다. 몰랑몰랑한 지민의 볼 살이 제 뺨에 거침없이 닿았다. 아니 아까 말 제대로 하길래 안취한 줄 알았더니... 태형은 눈을 감고 크게 심호흡을 하며 스멀스멀 올라오는 화를 참았다. 이렇게 지민이 취해서 스킨십을 할 때마다 좋으면서도 화가 나서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아니 내 앞에서만 하는 거면 몰라, 지금 이거를 그 친구들한테도 했다는 거잖아. 또 그 생각을 하니 절로 이가 부득부득 갈렸다. 화는 나지만 그렇다고 그 친구들 잘못은 아니고, 지민은 아무것도 모르고 해맑게 웃기만 한다. 다음 날에는 숙취 때문에 골골대면서 또 자기 술버릇은 기억 안 나지. 태형만 속이 타들어가는 거다. 그래도 어쩔 수 있나. 지민과 저의 관계에 갑과 을을 따지고 싶지는 않지만, 지민이 사르르 웃으면 화도 못 내는 자신이 을임이 분명했다. 아니, 스스로 을을 자초한다. 어쩌겠나. 좋아하는 만큼 지는 거다.

 

색시야, 그 뽀뽀하는 술버릇 언제 고칠래. 태형의 말을 듣기는 들었는지 지민이 작게 웃으며 몸을 위아래로 통통 뛰었다. 무거워 인마. 태형의 타박에 지민은 태형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태태야. 지민의 목소리가 길게 늘어졌다. 술이 들어가 나른한 그의 목소리에 태형은 헙 급히 숨을 들이켰다. 사귄지 몇 년이 지났지만 지민은 언제나 자신을 설레게 만들었다. 처음 사랑이라는 감정을 알게 된 중딩 때의 그 설렘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이 정도면 병 아닐까. 알고 지낸지 거의 20년이 다되어 가는데, 사귄지도 벌써 4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이렇게 심장이 벌렁벌렁 거릴 수가 있는 건가. 나는 아직도 이만큼 너를 좋아하는데 색시야, 너도 여전히 나를 그만큼 좋아해?

 

사귄지 4년이 되었다고 말하면 주위에서 다들 놀란다. 엄청 오래 사귀네. 권태기 안 왔냐. 권태기 어떻게 넘겼냐. 그런 말을 한두 번 들은 것이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어떻게 대답을 해야할지 난감했다. 태형은 여태 권태기를 느낀 적이 없었다. 익숙하면 익숙한대로 좋았다. 그 익숙함과 안정감 사이에 불쑥불쑥 들어오는 설렘은 자신을 정신 못 차리게 만들었다. 4년 전이나 그보다 훨씬 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제 마음은 언제나 그대로였고 그 어떤 것도 그 마음에 흠을 낼 수는 없었다. 그런데 주위에서 자꾸 그런 소리를 들으니 문득 두려움을 느끼고 마는 것이다. 언젠가는 이 마음이 옅어지고 서로에게 무뎌지면 결국은 사랑이라는 것도, 설렘이라는 감정도 잊고 헤어지게 될 날이 올 수도 있겠지. 아직까지는 까마득히 먼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지만 아예 있을 수 없는 일도 아니다. 태형은 그 순간이 오는 것이 못내 두려웠다. 그래서 그 언젠가의 순간이 왔을 때 후회는 없도록, 좋은 추억은 가져갈 수 있도록, 매 순간 지민과 함께 있는 시간에 최선을 다 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태형은 지금도 제 모든 신경을 지민에게 쏟고 있는 중이었다. 사랑해 마지않는 제 색시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은 그런 것이었다.

 

그들이 사는 집은 골목골목 들어가야 나오는 곳이었다. 집 자체는 오피스텔 형으로, 그리 나쁘지 않지만 접근성은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다. 밤만 되면 꽤나 으슥해지는 이 골목은 사실 그들이 좋아하는 길이기도 했다. 조용한 골목길을 손을 꼭 잡고 천천히 걸어가다가 갑자기 뽀뽀를 해도 아무도 보지 않는, 그런 골목.

 

골목에 들어서자 어깨에 얼굴을 기대고 있던 지민이 갑자기 홱 얼굴을 치켜들었다. 태태야 내려줘. 별안간 몸을 흔들며 내려달라 칭얼거리는 지민 때문에, 순간적으로 휘청거린 태형은 간신히 옆에 있는 벽을 잡고 중심을 잡았다.

 

 

태태, 내려줘. 내려줘.

 

, 잠깐 색시, 너무 목을 꽉 조르진 말고.

 

나 걸어갈 수 있어. 나 하나도 안취했어. 술 깼다.

 

 

지민의 그 말이 거짓임을 알면서도 태형은 못이기는 척 지민을 내려주었다. 두 발이 땅에 닿자마자 제 몸을 못가누어 휘청거린 지민은 간신히 몸을 벽에 기대었다. 아그그... 허리 나가겠다. 태형은 두 손으로 허리를 짚고 좌우로 허리를 굽혀 스트레칭을 했다. 태태. 지민의 부름에 태형은 허리를 바로 하고 지민을 바라봤다. 두 눈이 마주치는 순간,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을 맞추었다. 격하게 들어오는 지민에, 태형은 한 손으로 지민의 허리를 꽉 감싸안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의 뒷머리를 헤집었다. 저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가로등 외에 빛이라고는 없는 이 으슥한 골목은 이 행위를 꽤나 짜릿하게 만들어주었다. 태형은 이 골목길에서 하는 키스가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최소한의 빛으로 보이는 지민은 미치도록 섹시했다.

 

지민은 태형의 아랫입술을 살짝 물고 떨어졌다. 촉하는 마찰음이 작게 들렸다. 처음 하는 키스도 아닌데 어쩐지 그 소리 때문에 부끄러워져 태형은 순간 얼굴에 열이 확 올랐다. 지민이 지금 정신없고, 거리도 어두운 편이라서 다행이었다. 아마 시뻘게진 얼굴을 지민에게 들키면 한 달 동안 놀림 받을 것이 분명했다.

 

지민은 제 허리를 감은 태형의 팔을 만지작거리다 고개를 들어 태형을 바라봤다. 태형과 또 눈이 마주쳤다. 태형은 살짝 고개를 숙여 지민의 입술에 가볍게 뽀뽀했다.

 

 

아 취할 것 같아.

 

네 입술 때문에 이딴 드립 치기만 해봐.

 

색시한테서 진짜 술 냄새 나서 레알 취할 것 같은데.

 

 

태형의 말에 지민이 급하게 킁킁거리며 제 몸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태형은 그런 지민의 모습이 퍽 귀여워 큭큭 웃었다. 태형은 저한테 기대오는 지민을 폭 안았다. 문득 든 생각에 태형이 물었다.

 

 

색시야. 너한테 나는 뭐야?

 

?

 

 

갑작스러운 질문에 지민은 잠시 당황한 듯 태형을 바라봤다. 태형은 정말 진지했다. 어느 순간부터 자신들의 연애에 참견하는 사람들이 생긴 이후로, 권태기라는 게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자신은 아직 그런 걸 느낀 적 없었지만 혹시나 지민은 그럴 수 있으니까. 사람 마음이라는 게 언제나 서로 같을 수는 없으니까. 사랑에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까. 혹여나 그 차이가 있으면 그만큼 자신이 더 사랑하면 되니까. 그냥 궁금했다. 지민에게 사랑을 물어보고 싶었다.

 

태형의 진중한 표정을 보고 지민도 덩달아 웃음기를 거두고 진지하게 태형을 쳐다봤다. 태형은 가끔 대놓고 사랑을 물어보긴 했었다. 그가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주 잘 알았다. 태형은 저보다 마음이 여려서 가끔 그런 것에 불안함을 느끼는 것 같았다. 지민은 여전히 그에게 진지했다. 그러니까, 태형과 사귀는 이 자체가 단순 장난 같은 연애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가 사랑을 확인할 때면 그만큼 자신은 확인시켜주면 될 일이다.

 

지민은 태형의 목에 팔을 두르고 얼굴을 가까이 했다. 태형은 아예 두 손으로 지민의 허리를 감아 안았다. 서로의 온기가 느껴졌다. 지민은 문득 그와 맨살이 닿고 싶다고 생각했다.

 

 

태형아, 너는.

 

......

 

내 사랑.

 

......

 

10. 20.

 

......

 

내 청춘.

 

 

이번에는 태형의 입술이 격하게 들어왔다. 지민은 굳이 그를 막지 않았다. 제 청춘은 이렇게 또 한 번 입술을 맞대온다





















---


두 번째 외전을 끝으로

남고생의 일상이 완전히 마무리 되었습니다!

별 내용 없는데 오래 걸려서 죄송합니다ㅠㅠ

단순 고딩들의 이야기 좋아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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뷔민 남고생의 일상 외전 1

길/남고생의 일상 (完)



1. 태형의 시선

 

좋아해. 한숨처럼 퍼진 지민의 말에 순간 제 귀를 의심했더란다. 몇 번이나 이건 꿈이 아닐까 되뇌어보고, 품에 안긴 지민을 계속 쓰다듬어보고 그랬더란다. 지민에게는 제 모습이 어떻게 보였을지 모르겠지만 그만큼 태형은 그 말이 굉장히 충격적이었고, 그래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사고회로가 갑자기 퓨즈 끊긴 듯 탁 멈추어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오로지 지민의 그 말만 둥둥 떠다니고 귓가에서는 그의 목소리만 반복재생 되었다. 표정 관리 하느라 죽는 줄 알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 자신이 다시 고백하고 그를 대기실까지 데려다 주고, 그 정신으로 어떻게 그의 무대까지 볼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무대를 다 마치고 자신에게 달려오며 제 무대 어땠냐고 물어보는 그를 보는 건 꽤나 곤욕이었다. 지민은 공부 때문에 이제 춤을 추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그는 아직 춤을 많이 좋아했고, 여전히 춤에 열정이 가득했다. 열정이 가득해서 반짝거리는 눈을 하고서는 저를 바라보는 그 모습은, 제가 좋아하는 수많은 지민 중 하나이기도 했다. 중학교 때 그가 처음으로 췄던 그 춤을, 그 무대를 아직까지도 바로 어제 일처럼 기억이 생생했다. 그 전부터 지민을 좋아했겠지만, 아마 제대로 깨달은 때는 그 때일 거라 생각했다. 태형에게 지민은 항상 반짝였고, 귀여웠으며, 사랑해 마지않았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지민이 춤추는 모습을 보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제 눈에도 지민이 이리도 찬란한데, 다른 사람이라고 그렇지 않으리라고는 보장 못하니까. 다른 사람이 지민에게 반하면 안되니까. 반해서 제 옆을 훌쩍 떠나버리면 안되니까.

 

그래, 태형은 단 한 번도 지민을 친구라고 생각해본 적 없다. 그를 좋아 한다 깨닫지 못한 어렸을 때조차도 본인이 지민에게 가지고 있는 어떤 감정이 우정은 아니라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했는지도 몰랐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무렇지 않게 색시라고 부를 수 없겠지. 아무리 그 어린 날에 뭘 모른다고 해도, 색시라는 말이 여자한테 쓰는 말이라는 것조차 모를 리는 없었다. 어렸을 때 정확히 어떤 감정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것만은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자신은 지민이 첫사랑이고 짝사랑을 했으며, 그 마음이 지민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오래되었다고.

 

왜 그렇게 지민이 좋아? 하고 물어보면 할 말이 없었다. 그러게, 내가 왜 이렇게까지 그 애를 좋아하지. 태형은 침대에 누워 하루온종일 고민한 적도 있었다. 그렇게 머리 싸매고 고민해서 나온 결론은 딱히 없었다. 나올 수 없는 것이 맞았다. 태형은 지민의 무언가 때문에 좋아진 것이 아니었다. 물 흐르듯, 가랑비에 옷 젖듯, 그렇게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언제 어디서 그에게 이렇게 젖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고민한 만큼 태형은 진지했다. 이게 단순히 철없는 시절, 잠시 방황하면서 스쳐 지나가는 마음이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이토록 제 감정에 진지했던 적 없었다. 자신이 느끼던 모든 것들이 거짓이라 할지라도, 지민에게 느끼는 이 감정만큼은 절대 거짓일 수 없었다. 태형은 확신했다. 지민이 제 마지막 사랑이 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지만, 이렇게 강렬한 사랑을 느끼게 해준 사람은 지민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거라고.

 

그래서 더 아팠다. 오랜 동성친구를 사랑하면서, 이 사랑은 보상 받지 못할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어차피 이렇게 혼자 짝사랑 하다가 나중에 들키고 남보다 못한 최악의 사이가 되거나, 저절로 마음이 사그라지기만을 기다리거나. 어찌됐든 좋은 결과는 염두조차 안했었는데. 혼자 그 많은 새벽을 눈물로 삼켰었는데. 그냥 좋은 친구로라도 좋으니까 계속 제 옆에 있기만을 기도 했는데. 기적이 찾아온 것이다.

 

 

 

축제가 다 끝나고 집으로 가는 길에 손잡고 나란히 걸었다. 사실 손잡고 걷는 것이 그렇게 별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이전에도 자주 손잡고 다녔었고 끌어안거나 하는 스킨십은 자주 했었다. 생각이 바뀌었다고 느끼는 감정이 이렇게 달라질 수도 있나. 줄곧 짝사랑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제 같은 마음이라는 생각이 드니까 손잡는 행동조차도 간질간질한 게 자꾸 웃음이 나고 어쩐지 부끄럽기도 했다. 손을 살짝 풀어 깍지를 꼈다. 지민이 살짝 움찔했지만 손을 빼지는 않았다. 제 손가락 사이사이에 느껴지는 지민의 온기가 너무도 좋았다.

 

서로 말은 없었지만, 굳이 억지로 말을 꺼내고 싶지도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유난히 조용했다. 너무 조용해서 저에게 들리는 이 심장소리가 혹여 지민에게도 들릴까 조마조마하기까지 했다. 태형은 힐끗 지민을 쳐다봤다가 눈이 마주쳤다. 순간 당황한 태형이 우물쭈물 하다가 환하게 웃었다. 지민은 살짝 눈이 커졌다가 홱 고개를 돌렸다. 광대부분이 봉긋하게 솟아오른 걸 보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집이 보이는 게 이렇게나 아쉬울 일인지 몰랐다. 어차피 옆집이라 마음먹으면 바로 놀러갈 수도 있고, 그것도 안되면 창문 열어놓고 볼 수도 있는데, 뭐가 그렇게 아쉬운지. 태형은 애써 웃는 얼굴을 하며 깍지 낀 손을 풀었다. 잘 들어가. 태형의 말에 집에 들어가려던 지민이 살짝 뒤돌아 태형을 바라봤다. 그가 답지 않게 우물쭈물했다. 고개를 갸웃하다 문득 든 생각에 슬쩍 앞으로 다가가 지민의 손을 잡았다. 본의 아니게 그를 당겼는지 지민이 살짝 앞으로 주춤 다가왔다. 지민이 살짝 시선을 내리깠다. 찰랑거리는 앞머리가 얼굴을 가렸다. 색시야. 태형의 부름에 음칫 몸을 살짝 떤 지민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태형을 바라봤다. 아 심장아. 적당히 크고 맑은 저 눈을 마주할 때면 언제나 심장이 제멋대로 폭주하기 시작한다. 큼큼. 괜히 심장소리 들릴까 주먹 쥔 손을 입 가까이 대고 헛기침을 한 태형이 다시 지민을 바라봤다. . 지민이 말꼬리를 살짝 늘이며 물었다. 지민이도 부끄러운 걸까. 지민이도 지금 나처럼 막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감당 안될 정도일까. 태형은 요란한 속을 숨기며 가만히 지민을 봤다. 자꾸 제 표정이 신경 쓰였다. 너무 헤벌레 하고 있는 거 아니야? 태형은 입꼬리에 힘을 주어봤지만 자꾸 올라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색시야.

 

.

 

우리.

 

......

 

우리, 사귈까?

 

 

목소리가 떨렸던 것도 같다. 행복감에 잔뜩 젖은 목소리였던 것도 같다. 순식간에 얼굴에 열이 확 올라 벌게진 지민의 얼굴을 봤다. 지민은 잡지 않은 한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그의 손 위로 빼꼼 보이는 두 눈만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었다. 그를 잡은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제 커다란 손 안에 쏙 들어간 자그만 손의 촉감이 더 단단히 들어왔다.

 

, 말해 뭐해. 지민은 홱 손을 빼 후다닥 제 집으로 들어갔다. 쾅 하고 철문 닫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어찌나 빠르던지 순식간에 사라진 지민 때문에 아무 말도 못 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 태형은 가만히 철문만 바라보다가 두 손을 마주잡고 천천히 가슴께에 올렸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간신히 담벼락에 몸을 기대었다. 지민이 한 말이 자꾸 머릿속에 맴돌았다. 말해 뭐해. 말해 뭐해. 말해 뭐해.

 

끄아아... 태형은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소리 없는 환호성을 질렀다. 제 얼굴은 안 봐도 시뻘게져서 흐물흐물 녹아내린 표정일 것이다. 아이고야 가슴이야. 태형은 제 가슴을 통통 치면서 천천히 제 집으로 향했다.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자마자 그대로 다리에 힘이 풀려 스르르 주저앉았다. 아직도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안간다. 이 모든 것이 정말 오늘 일어난 것인지 믿기지 않았다. 당장 오늘 아침만 해도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지민을 억지로 친구라 생각하며, 두근거리는 소리 들릴까 조마조마해하며, 언제나 예쁜 지민을 보며 애써 표정관리하며, 자꾸 넘쳐흐르는 제 마음을 억지로 감추며 그렇게 지나갈 줄 알았는데. 그 애를 너무너무 좋아해버려서 사귀게 된 꿈을 꾸는 거면 어떡하지. 너무 행복한데 그만큼 잔인한 그런 꿈이면 어떡하지. 태형은 잘게 떨리는 손으로 더듬더듬 가방을 열어 핸드폰을 꺼냈다.

 

 

-지민아 색시야 좋아해

 

 

무작정 보낸 카톡에 바로 1이 사라졌다.

 

 

[나도]

 

 

깔끔한 답장은 지민다웠다. 답장이 온 화면을 괜히 엄지로 쓸어봤다. 슥슥 밀리면서 카톡창이 올라갔다. 군데군데 욕과 ㅋㅋㅋㅋ이 남발하는 카톡창은 여느 고딩 친구들끼리 하는 카톡과 다름없었다. 이렇게 순식간에 관계가 바뀐다. 선 앞에서 아슬아슬 중심 잡고 있던 우리가 그냥 확 넘어가버린 것이다. 묘한 기분을 느끼고 있을 때 하단에 메시지가 또 뜨기 시작했다.

 

 

[나도 너 좋아해]

 

[진짜로]

 

[나도 지금 못 믿겠거든 이 상황?]

 

[꿈같고 너도 나 좋아한다는 거 나랑 같은 마음으로 좋아한다는 건지 자꾸 고민되고 그러는데]

 

[옛날부터 좋아했다는 그 사람 진짜 나라고 하니까]

 

[마음은 편안하네]

 

[진짜 다른 사람 있을까봐 괜히 화나고 질투 나고 속상하고 그랬는데]

 

[야 보면 말 좀 해 씹지 말고]

 

[나 혼자 안달 났나봐]

 

 

태형은 바로 대기화면으로 나가 통화버튼을 눌렀다. 연결음이 몇 번 들리기도 전에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안내음성이 나왔다. 곧이어 카톡이 또 오기 시작했다.

 

 

[야 전화 하지마 부끄러워]

 

[내가 지금 이거 믿고 막 말 하는 건데]

 

[전화하면 아무 말 못할 것 같아]

 

 

피실피실 웃음이 새어나왔다.

 

 

-정말 같은 마음이야?

 

-지금도 나처럼 막 가슴 저릿저릿한데 웃음 나오고 기분 좋고 그래?

 

-색시야

 

-나 지금 너무 행복해

 

 

 

 

 

 

 

 

 

 

2. 연애 초보들의 연애

 

연애는 어떻게 하는 것일까. 어떻게 해야 연애를 잘 하는 걸까. 태형과 지민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연애를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모솔이었고, 연애에 관심이 있는 애들도 아니었다. 연애에 연 자도 모르는 애들 둘이 만나서 연애라는 걸 해보려 하니, 참 막막한 것이다. 어쨌든 사귀고 있는 사이에 우리도 다른 커플들처럼 하는 걸 따라하면 되지 않을까. 둘은 그렇게 단순히 생각했다.

 

그래서 주말에 데이트를 하기로 했다. 태형은 인터넷에 데이트를 쳐보고 혀를 찼더란다. 아니 뭐야 이게, 색시랑 여태까지 다 했던 거잖아. 영화 보고, 밥 먹고, 쇼핑하고, 집에 데려다 주고. 사실 데이트란 게 별 거 없었다. 뭐 같은 시간을 공유 하는 게 중요한 거지. 태형은 그렇게 생각하며 집을 나섰다.

 

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보이는 지민에, 태형은 입을 틀어막았다. 너무 귀여워... 색시는 분명 자기를 심정지로 죽일 작정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멜빵바지를 입고 나올 수 없는 거다. 멜빵바지를 입고 담벼락에 기대서서 주위를 휘휘 둘러보고 있는 모습이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그에게 다가가면서 쓰고 있던 모자를 씌워주었다. 엇 뭐야. 다른 곳을 보고 있던 지민은 갑자기 씌워진 모자에 당황하면서 모자를 더듬다가 태형과 눈이 마주쳤다. 보자마자 사르르 눈이 접히며 해맑게 웃는 지민에, 태형은 흠흠 헛기침을 했다. 저렇게 바로 앞에서 갑자기 웃는 모습을 보는 건 아직 면역이 없다.

 

 

모자는 뭐야?

 

그냥.

 

그냥 너 써.

 

색시가 더 잘 어울려서 씌운 거야. 옷이랑도 잘 맞고.

 

흐응...

 

 

모자를 만지작거리던 지민이 손을 내려 태형의 손을 잡았다. 태형은 훅 들어온 지민의 스킨십에 흠칫 놀라고, 그런 태형 때문에 지민이 더 흠칫 놀랐다. 뭐야 왜 놀라. 지민의 물음에 태형은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지민과 맞잡은 손에 계속 신경이 갔다. 손에 땀나면 어떡하지. 갑자기 손을 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땀나니까 잠시만 손 떼보라고 말하는 것도 이상하고. 이 와중에 자그맣고 보들보들한 지민의 손은 너무 귀엽다. 같은 남자지만 어떻게 이 손이 제 손 안에 이렇게 쏙 들어올 수 있나 싶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에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손잡는 게 그렇게 유난 떨 일도 아닌데, 친구였을 때도 자주 잡고 다녔는데. 아 물론 지금은 친구 사이가 아니지만. 이 전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덥석덥석 잡았는데, 지금은 애인이 되었다고 바로 손잡는 것 하나까지 쑥스러워지는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혼자 앓았던 기간이 너무 길어서 그런 것인지 아직은 모든 것이 처음 하는 것처럼 뭔가 어색하기도 하고, 부끄러운 기분이 들기도 했다. 옆에서 지민이 종알종알 이야기 했지만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로지 맞잡은 손의 체온과 기분 좋게 두근거리는 심장, 묘하게 붕 뜨고 설레는 마음에 집중되었다.

 

미리 예매해둔 티켓을 찾고 팝콘을 샀다. 콜라 두 개에 빨대를 꽂고 뒤를 도니, 지민이 팝콘을 하나씩 입에 넣고 있었다. . 눈이 마주치자 씨익 웃는 지민은 참 천진난만했다. 태형이 가까이 다가가 아 하고 입을 살짝 벌렸다. 지민이 팝콘을 입 안에 넣어주었다. 혀에 닿자마자 퍼지는 달달한 카라멜 향에 절로 웃음이 났다.

 

아직 영화 시작 시간이 되지 않아 광고 중이었다. 지민은 광고를 보다가 무언가 문득 생각난 듯 아, 하면서 태형을 바라봤다.

 

 

우리 마지막에 영화 봤을 때. 나 사실 그거 영화 제대로 못봤어. 네가 했던 행동이나 말들이 자꾸 신경 쓰여서.

 

어쩐지. 그 때 자꾸 옆이 따가운 거야. 딱 돌아봤는데 색시가 나를 보고 있네?

 

나는 그 때 무진장 신경 쓰이고 괜히 설레고 그랬는데. 너는? 넌 안그랬어?

 

좋아하는 사람이랑 한 공간에 있고 같은 시간을 보내는데 어떻게 안 그럴 수 있어.

 

......

 

색시야. 난 너랑 무언가를 할 때마다 항상 떨리고 설레고, 조심스럽고 그랬어.

 

 

태형은 지민이 들고 있는 팝콘 통에 손을 뻗어 팝콘을 집어 천천히 입에 넣었다. 입에 넣자마자 사르르 녹으면서 달달함만 남았다. 그건 지금도 그래, 색시야. 태형의 말에 지민은 멍해진 표정으로 태형을 바라봤다.

 

 

... 잘도 그런 부끄러운 말 하네.

 

드디어 사귀는데 내가 무슨 말을 못하겠어.

 

 

태형이 헤 웃었다. 지민은 가만히 태형이 웃는 모습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말은 안했었는데 너 그렇게 웃을 때마다 심장이 아파. 생각지도 못한 지민의 말에 태형이 순간 멍해졌다. 온 몸이 굳은 듯 가만히 있던 태형의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 색시... 잘도 그런 부끄러운 말 하네. 태형의 말에 지민이 피식 웃었다.

 

영화는 적당히 재밌었다. 아니, 사실 잘 모르겠다. 내용이 하나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팝콘 먹으려고 무심코 뻗은 손이 살짝 얽히고 나니, 그 이후로는 팝콘 통에 손도 못 넣었다. 클리셰 범벅인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서로의 손이 닿자마자 정전기라도 통한 것처럼 찌릿한 게 심장까지 영향을 주는 거라. 평생 손 한 번 못 잡아 본 사이도 아니고, 영화를 처음 본 사이는 더더욱 아닌데 하는 짓은 영 숙맥이다. , 첫 연애니까 숙맥이 맞기는 하지. 데이트라는 게 이렇게 마음이 쓰이는 거였나. 행동 하나하나 다 신경쓰다보니 벌써 피곤해졌다. 차라리 친구였을 때가 더 데이트 같았다. 도대체 연인 사이에 데이트는 어떤 마음으로 하는 거지.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하고는 있지만 그 사랑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고 어떻게 공유를 해야 하는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냥 둘이 좋아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연애라는 건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닌가보다.

 

저녁으로는 자주 가던 초밥 뷔페에 갔다. 태형이 익숙하게 음식을 담아 자리에 돌아오니 지민이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먹고 있지. 태형의 말에 지민이 살풋 웃으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 둘은 마주보고 앉아서 적당히 이야기를 하고 적당히 먹으며 시간을 보냈다.

 

근데 우리가 하는 거 데이트 맞아? 갑작스런 지민의 물음에, 입 안에 초밥을 막 넣던 태형이 사례가 들려 켈록켈록 기침을 해댔다. 괜찮아? 갑자기 왜 그래! 지민이 다급히 잔에 물을 채워 태형에게 건넸다. 태형은 괜찮다는 듯 손을 저으며 물을 마셨다. 아 괜찮아, 괜찮아. 두어번 더 기침을 한 태형은 간신이 진정 되었다.

 

 

갑자기 왜 그렇게 생각해.

 

그냥. 이러면 우리 친구였을 때랑 별 다를 거 없는 것 같아서.

 

......

 

항상 하던 대로 영화보고 밥 먹고, 후식까지 먹거나 아니면 피씨방.

 

그러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연애하지?

 

... 글쎄.

 

 

태형은 팔짱까지 끼며 심각하게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사실 그 문제는 처음 사귀기 시작할 때부터 생각하고 있던 것이었다. 물론 될대로 돼라 식으로 무작정 데이트 나오긴 했지만, 태형 역시 아는 것은 없었다. 친구에서 연인으로 발전한 사람은 그렇게 많던데 그 사람들은 다 첫 데이트를 어떻게 한 거야. 태형은 진심으로 궁금했다.

 

 

보통 영화나 그런 거 보면 다들 이렇게 데이트 하던데. 같이 영화 보고 밥 먹으면서 이야기 하고.

 

, 그건 그렇긴 해.

 

친구에서 연인으로 발전한 사람들도 그냥 이렇게 친구끼리 하는 것처럼 노는 건가?

 

... 우리가 이상한 거였나?

 

 

지민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하는 말에 태형이 놀랐다. 내가 색시를 계속 좋아해서 나도 모르게 데이트를 하게 된 건가?! 진심으로 놀라며 말하는 태형에 지민이 빵터졌다. 끅끅거리며 한참을 웃던 지민이 간신히 진정하며 물었다.

 

 

그럼 나도 너 좋아했으니까 우리도 모르게 데이트 한 거야?

 

... 아니야. 그 때랑 지금이랑 느낌이 다르단 말이야.

 

어디가.

 

몰라. 그냥 달라. 느끼는 게 달라. 뭔가 좀 더... ... 기뻐.

 

......

 

그 때는 마음 숨기기 급급했는데 지금은 좀 더 편안하기도 하고. 이런 거 막 해도 되고.

 

 

태형이 갑자기 손을 훅 뻗어 지민의 입가를 살짝 쓸었다. 그의 부드러운 손가락이 입가에 닿고 떨어지는 그 순간을 멍하니 보던 지민은, 그의 손가락이 그의 입에 닿았다가 떨어지는 그 모습까지 다 보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얼굴에 열이 훅 올라왔다. 여기에 묻힐게 뭐 있다고 그렇게 묻히고 먹어. 타박하는 듯해도 다정하기만 한 태형의 목소리에 지민은 말없이 손부채질만 했다.

 

 

, 그런 건 말 하고 해...

 

? ?

 

갑자기 그런 거 좀 마음의 준비 할 시간을 달라고!

 

? 내가 뭘 했다고 마음의 준비 할 시간을 달래.

 

아씨... 어쨌든.

 

 

지민은 괜히 짜증을 내며 들고 온 초밥을 마구 입 안에 넣었다. 지금은 바로 앞에 있는 태형의 얼굴도 보기 힘들었다. 쟤는 뭐가 저렇게 자연스러워? 아니 내가 지금 너무 예민한 건가? 지민은 온갖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태태. 지민의 부름에 태형이 입 안에 초밥을 가득 넣은 채 지민을 바라봤다. 두 볼이 빵빵해진 채 눈을 커다랗게 뜨며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이 퍽 귀여웠다.

 

 

너 내가 첫사랑이라고 했지.

 

.

 

연애 해본 적도 없고.

 

.

 

네 얼굴이 아깝긴 하다. 이제 곧 고3인데 그 얼굴에 이제야 연애 하냐.

 

... 뭐야, 그 말은. 계속 색시만 보고 다녔는데 그럼 어떻게 연애 하냐?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이랑 어떻게 사귀어.

 

만약에 우리 평생 서로 마음 몰랐으면 넌 어쩔 생각이었어?

 

 

지민의 물음에 열심히 상하운동 하던 태형의 턱이 천천히 멈추었다. 동시에 그의 표정이 묘하게 가라앉았다. 동그랗게 뜨고 있던 눈이 천천히 차가운 눈매가 되었다. 태형이 목울대가 움직였다. 천천히 물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 태형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처음에는 색시를 무시했지. 그런데 색시가 우는 거야. 그래서 포기했어. 그 다음에는 그냥 친구로 평생 옆에 붙어있을 생각이었어. 그게 우리가 제일 오래 볼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거든.

 

......

 

내가 고백할 생각은 전혀 없었어. 가끔 나조차도 감당하기 힘든 감정인데 그걸 아무것도 모르는 색시한테 넘겨줄 수가 없는 거야. 그리고 고백하는 순간 우리 관계는 끝나는 거니까.

 

......

 

난 겁쟁이야. 너 잃는 거 무서워서 고백도 못했던 거야. 만약 색시가 먼저 말하지 않았더라면, 난 정말 이대로 쭉 색시 뒤만 보며 살았을지도 몰라.

 

 

다행이다, 그치. 씨익 웃으며 말하는 태형을 보며 지민은 따라 웃을 수 없었다. 그저 말 뿐이었는데도 태형의 진심이 그대로 전해지는 기분이었다. 자신에 대한 그의 마음이 얼마나 무거운지 너무나 잘 느껴져서 장난으로 넘길 수 없었다. 지민도 짝사랑 때문에 마음고생 꽤나 했으니까. 잠깐이었지만 누군가를 혼자 좋아하는 것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지 잘 알았다. 자신은 그 조금도 힘들어서 각오하고 고백한 건데, 태형은 그 오랜 시간동안 얼마나 어떻게 견뎠는지 감도 오지 않았다.

 

 

그래서 사실 아무것도 안해도 좋아. 그냥 이렇게 색시가 내 마음 알고, 내가 색시 마음 알고 있는 상태로 얼굴만 보고 있어도 좋아.

 

......

 

색시는 안그래?

 

... 아니.

 

......

 

미치도록 좋아.

 

 

 

 

 

 

 

 

 

 

3. 뽀뽀하고 싶소

 

벚꽃의 꽃말은 시험기간이라 했던가. 올해는 꼭꼭 벚꽃놀이 가자고 약속에 약속을 받아놨으나, 역시나 벚꽃이 만개할 시기에 딱 걸린 시험 때문에 올해도 결국 무산이 되어버렸다. 태형은 그 무산된 벚꽃놀이 때문에 아직까지도 삐져있었다. 야 지금 며칠 째야. 지민이 정색 하면서 목소리를 낮게 깔아도 태형은 책상에 볼을 대고 엎드린 채 묵묵부답이었다.

 

 

나도 가고 싶었어. 야 나라고 너랑 데이트 안하고 싶었겠냐? 만개한 날이랑 시험기간이랑 딱 겹친 걸 어떡해.

 

하루 공부 안한다고 뇌세포가 다 죽어? 색시가 이때까지 축적해놓은 지식들이 홀라당 다 날아간대? 그 몇 시간 바람 좀 쐰다고 색시 등수가 저 바닥에 처박힌대?

 

넌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난 그렇게 느껴져!

 

누가 들으면 우리가 뭐 데이트 한 번도 안한 줄 알겠네!

 

벚꽃놀이 데이트는 한 번도 안했어.

 

 

지민은 결국 입을 다물었다. 얘 이런 똥고집은 옛날부터 오졌지. 지민은 결국 태형에게 다가가 그대로 쭈그려 앉아, 태형과 시선을 맞추었다. 그 와중에 볼이 눌려 툭 튀어나온 입술 그대로 뚱한 표정인 태형이 귀여워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난 지금 웃을 기분 아니야, 색시야. 태형이 뚱한 표정 그대로 뚱하게 말했다.

 

 

올해 시기가 많이 안좋았잖아. 나도 주말에는 너랑 벚꽃놀이 하고 싶었어. 근데 주말에 비 오고 다 떨어졌잖아. 게다가 시험기간이기도 했고.

 

......

 

앞으로도 같이 있을 시간 많아, 태형아. 내년에는 우리 성인도 되는데 술 마시면서 벚꽃놀이 하면 되겠네.

 

......

 

오늘 학교 마치고 집 돌아가면서 놀이터 잠깐 들릴까? 거기 엄청 큰 벚나무 하나 있잖아. 거기 바람도 잘 안 드는 곳이니까 어쩌면 꽃이 아직 남아있을지도 몰라.

 

... 알았어.

 

 

지민의 말에 그제야 태형이 슬금슬금 상체를 일으켰다. 지민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똥고집은 어째 안변한다. 차라리 이런 건 귀엽기라도 하지, 춤 같은 거랑 관련되면 무서울 정도로 집착할 때도 있었다. 다년간의 경험을 미루어봤을 때, 태형의 똥고집을 꺾는 방법 따윈 없었다. 그나마 도저히 들어줄 수 없을 걸로 고집부린 적은 없었기 때문에 좋게 좋게 넘어가는 거지, 만약 말도 안되는 걸로 고집 부린다면 정말 끝을 봐서라도 서로 치고 박고 싸울지도 몰랐다. , 거기까지는 가본 적 없지만.

 

태형을 설득하고 나서야 제자리에 앉는 지민을 쭉 보던 정우가 입을 열었다.

 

 

사귄지 몇 달이 넘었는데도 너희는 어째 변한 게 없네.

 

우리?

 

하긴 너희 옛날부터 그러고 다니는데도 친구라고 우기는 게 존나 코미디긴 했지.

 

뭐래.

 

너희 사이가 애초에 친구였긴 했냐.

 

 

정우는 심드렁하게 하는 말에 뚱해진 지민이 고개를 돌렸다. 언제부터 자신을 보고 있었는지 태형과 시선이 마주쳤다. 턱을 괸 채 무표정으로 자신을 지그시 보고 있는 그의 모습에, 지민은 순간 헉 숨을 들이켰다. 언제나 생각하는 거지만, 태형의 그 눈빛은 누구라도 홀릴 듯한 것이어서 지민은 때때로 그를 멍하게 바라보기만 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이 깊기만 한 그의 눈을 멍하니 바라보면, 태형은 이내 피식 웃으면서 한 손을 들어 지민의 머리를 한 번 헝클였다.

 

 

그렇게 보면 나 심장 떨려.

 

 

태형의 말에도 지민은 할 말 없이 헝클어진 머리만 쓱쓱 정리했다. 누가 할 소릴.

 

 

 

3학년이 된 이후로 마음이 급해져서인지 따로 둘이 만날 시간이 잘 생기지 않았다. 그나마 옆집이고 학교도 같으니 거의 자는 시간 빼고는 하루온종일 붙어 다닐 수 있는 게 다행이었다. 태형은 사실, 전부터 공부에 큰 뜻이 없었지만 지민은 달랐다. 지민은 본인이 확실히 원하는 과가 있었고 가고 싶은 대학이 있었다. 그 학교에 가려면 공부를 꾸준히 열심히 해야 했다. 3학년 올라와서는 정말 둘이 따로 만난 시간이 없었던 것 같다. 오늘 태형이 그렇게 뚱하게 시위를 하고 있던 것이 이해되기는 했다.

 

색시 바쁘니까 잠깐만 보고 가자. 태형의 목소리가 잔잔히 퍼졌다. 밤중에 골목길은 가로등이 있어도 어둡긴 했지만, 지민은 둘만 걷고 있는 이 길이 너무 좋았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항상 같이 다니던 길이어서 많은 추억이 있었다. 제 손을 감싸 듯 잡은 태형의 손은 굉장히 따뜻하고 포근했다. 옛날부터 심심치 않게 잡았던 손이라, 이제 손이 혼자 공중에 떠 있으면 허전할 지경이었다. 그런 제 마음을 아는 건지, 태형은 언제나 먼저 손을 잡아주었다.

 

12시가 다 된 시간에 놀이터에 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미끄럼틀과 그네, 시소만 덜렁 있는 놀이터는 아직도 모래밭이 있는 옛날 놀이터였다. 봐봐, 그래도 여기 벚꽃은 아직 남아있지? 지민이 웃으면서 말했다. 놀이터 입구 즈음에 있는 벚꽃은 매우 크기도 해서, 꽤나 예뻤다. 이미 떨어진 꽃잎들이 주위 바닥을 물들여 놓았다. 이따금 바람이 살짝 불 때마다 조금씩 꽃잎이 떨어졌다. 지민은 손바닥을 쫘악 폈다. 공중에서 하늘하늘 떨어지던 꽃잎은 지민의 손바닥에 사르르 앉았다. 헐 태형아 이거 봐봐! 지민은 그대로 몸을 돌려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민을 보고 있던 태형이 그에게 다가왔다.

 

 

벚꽃 잎을 잡으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다고 그러던데. 얘는 그냥 나한테 왔어.

 

, 신기하네.

 

첫사랑이 이미 이루어져서 얘가 먼저 다가왔나봐.

 

 

꽃잎이 바닥에 떨어지지 않게 살짝 주먹 쥔 지민이 고개를 들어 태형을 보다 푸핫 웃음을 터뜨렸다. 태태한테도 꽃잎이 먼저 다가왔네. 지민이 손을 뻗어 태형의 머리 위에 떨어진 꽃잎을 조심스럽게 집었다. , 내 거. 태형이 두 손을 내밀자, 지민은 그의 머리 위에 있던 벚꽃을 두었다. 태형은 그런 지민을 가만히 바라보다, 불시에 그의 볼에 촉 뽀뽀했다. 아 깜짝아. 지민이 움찔 놀라 태형을 올려다봤다. . 태형은 마치 7살 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지민은 그의 웃음에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색시야.

 

.

 

 

태형의 부름에 지민은 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나 뽀뽀하고 싶어. 태형의 말에 지민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방금 했잖아.

 

그건 볼이잖아. 입술에도 하고 싶다고.

 

, 그건...

 

맨날 볼뽀뽀만 하게 해주고. 사귀는 거 맞아?

 

, 그럼 맞지! 내가 왜 너랑 손잡고 뽀뽀하고 그러는데!

 

웃겨 진짜. 우리 무슨 7살 애도 아니고 볼뽀뽀가 뭐냐! 나는 색시만 보면 막 응? 안고 싶고 키스하고 싶고 그런데!

 

, ... ! 너는 완전 애기 때부터 볼 거 다보고 자란 사이에 그런 거 하고 싶냐?

 

하고 싶어! 우리가 친구도 아니고, 난 색시랑 항상 닿고 싶었단 말이야!

 

 

태형의 커다란 두 손이 지민의 두 볼에 닿았다. 살짝 감싸 안은 지민의 두 볼이 열이 난 듯 화끈화끈했다. 색시야, 너 볼 뜨거운 것 같아. 태형의 말에 지민이 화들짝 놀라며 얼굴을 뒤로 빼려 했지만 태형이 살짝 힘을 줘 꾹 잡았다. 야 이그 느르... 살짝 튀어나온 지민의 입술이 삐약삐약거리 듯 움직였다. 흐흐흫. 태형이 웃으며 얼굴을 살짝 가까이 들이밀었다. 지민의 눈이 살짝 커져 끔뻑거렸다.

 

 

색시, 뽀뽀하고 싶소.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저 얼굴이 어쩐지 얄미웠다. 지민은 장난 그만하라며 태형의 손목을 잡았을 때였다.

 

입술에 부드러운 무언가가 닿았다. 가까이에 제가 사랑해 마지않는 태형의 얼굴이 보였다. 촉하는 소리와 함께 두 입술이 살짝 떨어졌다. 코끝이 살짝 닿을 거리에서 태형은 지민을 바라봤다. 태형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안그래도 빨리 뛰던 심장이 태형의 저 웃음을 보고 아예 폭주하는 듯 미친 듯이 뛰어댔다. 이 정도 거리면 이 심장소리가 들릴 것 같아 어쩐지 부끄러워졌다. , 이거 놔... 지민이 소심하게 말했다. 입술을 조금만 움직여도 태형의 입술에 닿을 것만 같았다. 나 심장 엄청 뛰어. 태형이 작게 말했다. 지민은 입술만 옴짝달싹 하다가 말했다.

 

 

나도 엄청 뛰어.

 

나 한 번만 더 해도 돼?

 

...그런 걸 왜 물어봐.

 

 

지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또 맞부딪친 입술에, 지민은 결국 꾹 눈을 감았다. 부드러우면서도 말랑한 그의 입술 감촉이 느껴지고 뒷목과 허리를 감싸는 손길이 느껴졌다. 지민은 아예 두 팔을 태형의 목에 감았다. 서로의 사이가 더 가까워졌다. 아까부터 들리는 이 빠른 심장 소리가 제 것인지, 태형의 것인지 모르겠다.

 

제 아랫입술을 깨물고 서서히 떨어지는 느낌이 나서야 지민은 천천히 눈을 떴다. 막 눈을 뜨고 있던 태형과 시선이 얽혔다. 갑자기 얼굴에 열이 확 올랐다. 내가 지금 뭘 한 거야. 어안이 벙벙했다. 지민은 어쩔 줄 몰라 애써 시선을 피하다 다시 태형을 봤다. 태형의 얼굴이 시뻘게져 폭발직전이었다.

 

 

, 네가 해놓고 네가 더 부끄러워하면 어떡해!

 

몰라, 그냥 부끄러운 걸 어떡해! 그냥 뽀뽀만 하려고 했는데...

 

너 얼굴 엄청 시뻘게졌어.

 

색시 얼굴도 터질 것 같애.

 

너 때문이잖아.

 

어때?

 

뭐가.

 

아직도 친구 같아?

 

 

태형의 낮은 목소리가 잔잔히 울렸다. 밤이 되면 살짝 가라앉는 태형의 목소리가 어쩐지 낯간지럽게 들렸다. 지민은 태형을 가만히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가슴 터질 것 같은데 친구라니 말도 안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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뷔민 남고생의 일상 14

길/남고생의 일상 (完)



1. 축제


그들이 다니는 마고는 축제로 굉장히 유명했다. 다른 학교에 비해 축제 크기도 큰 편이었고 볼거리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 중에서 제일 유명한 것은 역시 댄스였다. 마고 댄스부는 지역적으로 유명했다. 그저 취미로 댄스를 하고 싶어서 온 아이들이 만든 동아리라고 하기에는 그 퀄리티가 굉장히 뛰어났고 전국 대회에서 상을 탄 적도 몇 번 있었다. 그래서 근처 동네 학생들은 더더욱 마고 축제를 보러 오려고 했었다. 작년부터는 그 유명한 지민 덕분에 축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 열기는 더욱 뜨거웠다.






지민은 댄스부를 피할 수는 없었다. 고등학교 들어오고나서 댄스부에 들어가지도 않았지만 댄스부는 끈질겼고, 그래서 연말 축제 때만 도와주기로 합의를 봤던 것이다. 그 합의조차도 태형은 모르고 있는 일이지만. 안그래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춤 추는 것을 치떨리게 싫어하는 김태형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또 난리날 것이다.


아니 지금은 모르겠다. 화해 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태형은 제 춤연습 하는 모습을 보러 오지 않았었고, 이제는 정말 신경 안쓰는 듯 했다. 왜 애가 하던 짓을 안하지. 그의 작은 변화가 오히려 불안했다. 이제는 제가 춤을 추든 꽹과리를 치든 아무 상관 안쓸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니 어쩐지 우울해져 몸이 추욱 처졌다. 한창 무대 준비로 바쁘게 왔다갔다 거리던 친구 한 명이 지민의 어깨를 감싸안고 손에 살짝 힘을 주어 잡았다. 왜 이렇게 축 처졋어, 곧 무대 올라야 하는데. 지민은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우리 제일 마지막이지?


어, 몸 좀 풀고 있어. 아직 시간 좀 남긴 했는데.


나 축제 보러 갔다 와도 돼?


상관 없긴한데 우리 전전 무대까지는 와야한다. 동선 한 번 더 맞춰보게.


알았어.



지민은 대기실을 나오며 대답했다. 어쩐지 속이 답답해 바깥공기라도 쐬어야 할 것 같았다. 길게 나 있는 복도를 지나 밖으로 나왔다. 바로 옆에 붙어있는 강당에서는 쿵쿵쿵 음악소리가 크게 났다. 아마 레크레이션을 하고 있는 듯 했다. 마고 축제는 마고 학생들뿐만이 아니라 다른 학교 학생들도 많이 오기 때문에 본격적인 축제 시작 전에 레크레이션을 진행했다. 마고의 레크레이션 또한 많이 유명했다. 축제를 보러 오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하기 때문에 매 년 새로웠고 재미있었다. 마고 레크레이션에 오면 애인이 생긴다는 전설은 이미 유명한 말이라 매 년 새로운 인연을 원해서 오는 사람들도 넘쳐났다. 또한 레크레이션은 고등학생들만 참가할 수 있기 때문에 정말 그들만의 축제인 것이다.


지민은 강당 뒷문으로 슬쩍 안을 봤다. 올해도 역시 엄청난 인파였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 저 앞에 있는 무대가 잘 보이지 않았다. 어째 작년보다 사람이 더 많이 온 것 같냐... 지민은 어쩐지 긴장되는 기분이었다. 원체 사람들 앞에서 많이 서봤기 때문에 이제는 아무렇지 않을 법도 한데, 지민은 항상 무대에 처음 오르는 사람처럼 떨렸다.


강당 안으로 들어가자 벌써부터 열기가 후끈거렸다. 지민은 다닥다닥 붙어 있는 인파를 비집고 들어갔다. 어쨌든 지민도 이 학교 학생이므로, 앞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노래가 심장을 쿵쿵쿵 때릴 정도로 크게 들리고 엠씨가 한창 진행을 하고 있었다. 언제부터 시작 했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한창 뜨겁게 달아오를 때 들어온 듯 했다.

 

앞자리는 뒷사람들을 위해서 자세를 낮춰주어야 했기 때문에, 앞자리 사람들은 거의 앉아 있었다. 지민도 대충 자기 반이 있는 위치를 찾아내어 비집고 들어가 앉았다. 아나 빡찜 자리 없다고! 주위에서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지민은 뻔뻔하게 안 들리는 척 했다. 제 옆에는 정우가 있었고 그 주위로 지혁과 이한도 있었다. 바로 뒤에는 태형이 있었다. 색시 우리 여기 있는 거 어떻게 알았어? 태형이 지민의 어깨에 턱을 얹고 말했다. 지민은 순간 옆구리부터 귀까지 쫘악 소름이 돋아, 흠칫 몸을 떨었다.

 

 

... 그렇게 말 하지마, 간지러워.

 

? 잘 안 들려.

 

내 귀 가까이 대고 말 하지 말라고!

 

 

지민이 결국 고개를 돌려 큰 소리로 말 하고 나서야 태형은 이해 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민은 다시 앞을 바라봤다. 지금 뭐 하고 있었어? 지민은 바로 옆에 있는 정우에게 바짝 다가가 물었다. 체육관은 너무 시끄러워서 이렇게 가까이서 이야기 하지 않으면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지민의 말을 용케 알아들은 정우는 지민에게 얼굴을 들이밀고 조금 크게 말했다. 엠씨가 말하는 조건에 충족되는 사람 나가는 거 있잖아. 아아, 그거. 지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럼 마지막입니다. 과연 이번에는 나올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엠씨 특유의 익살스러운 목소리가 체육관을 울렸다. 체육관 안은 여전히 쿵쿵 울리는 노랫소리 외에는 다른 사람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만큼 학생들은 엠씨의 목소리에 집중을 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묘한 긴장감이 도는 듯 했다.

 

 

이 체육관 안에서 내가 가장 인기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나오세요!

 

야 이건 무조건 김태형이다!

 

김태형 나가!

 

김태형! 김태형!

 

 

엠씨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태형의 옆에 있던 지혁이 태형을 억지로 일으키기 시작했다. 태형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두 손을 거세게 휘저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미 옆에 있는 정우를 시작으로 주변에 있는 학생들이 전부 김태형을 외쳐댔다. 얼른 나오세요! 아무나 나오세요! 엠씨는 아무나 나오라고 하면서 태형을 향해 손을 까딱였다. 아직까지 무대 위로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니 네가 아니면 누가 나가! 정우까지 태형의 팔을 잡고 일으키자 그들의 힘을 못이긴 태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혁이 불시에 태형의 등을 밀어 앞으로 보냈다. 태형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결국 무대 위로 올라갔다. 태형의 걸음이 누구나 느낄 정도로 조심스러웠다. 표정도 조심스럽게, 걸음도 조심스럽게 무대 위로 오른 태형은 약간 긴장된 듯 딱딱하게 섰다. 너 정말 인기 많나 보네, 아무도 안나오는 거 보면. 엠씨의 말에 태형이 화들짝 놀라며 손사래 쳤다. 그러자 무대 아래에서 엄청난 야유가 쏟아졌다. 김태형 구라 치지 마라, 새끼야!! 정우가 악에 받친 소리를 질렀다. 야유와 환호성이 한데 섞여 체육관은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엠씨가 중재를 하고 나서야 흥분이 조금 사그라들었다.

 

 

일단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 마고 2학년 김태형입니다.

 

 

체육관에 태형의 목소리가 울리자 또 한 번 큰 환호성이 터졌다. 참 나 좋아 죽는구먼, 좋아 죽어. 정우의 말에 지민이 작게 웃었다. 좋을 수밖에. 특히 다른 학교 애들은 이런 때 아니면 김태형을 보기 힘드니까. 아마 지금 이 체육관 안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 반 정도는 김태형을 보러 왔을 것이다. 그 중 일부는 혹시나 김태형과 인연이 닿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이 있을 수도 있다. 지민은 그렇게 확신했다. 아마 자신이 다른 학교 여자였다면 분명 김태형 걔가 대체 뭐길래 이 동네에서 그렇게 소문이 자자한지 궁금해서라도 와 볼 것 같았다. 지민은 다리를 세워 앉아 두 팔을 얹고 턱을 괸 채 태형을 올려다봤다. 위에서 보는 태형도 멋있었다. 그냥 멋있다 못해 막 빛이 나서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물론 빛이 나서 눈이 부시는 건 조명 탓이겠지만. 아마 좋아하는 가수의 콘서트를 보러 가면 이런 기분일까.

 

 

가까이서 보니까 왜 아무도 안 나왔는지 알 것 같애. 진짜 나 레크리에이션 강사 한지 십년 가까이 되는데 이런 얼굴 처음 봤어.

 

, 감사합니다...

 

어디 아이돌 연습생이에요? 아니면 배우 지망생?

 

? 아뇨. 그냥 학생인데요. 연예인 생각도 없어요.

 

와 진짜 이 정도 얼굴은 거의 다 연습생이나 배우 준비 하는 애들이던데. 이런 얼굴 여기서 썩히기 너무 아까워서 그래. 뭐 명함 받은 것도 없어요?

 

... 있긴 한데 딱히 관심 없어서 다 거절해요.

 

 

태형이 말할 때마다 여기저기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지민도 들으면서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김태형 연예인 되는 건 진짜 싫어했지. 얼굴이 아깝다는 생각 엄청 많이 하긴 했는데 뭐, 쟤 짝사랑 하는 입장에서는 연예인 생각도 없는게 다행이려나.

 

 

태형군을 좋아하는 사람이 엄청 많을 것 같은데.

 

 

엠씨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섞여 시끄러워졌다. 김태형은 어지간히도 쑥스러운지 고개까지 숙였다. 엠씨는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 여기에 태형군을 좋아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여기서 장기자랑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어요?

 

 

또 한 번 함성이 터져 나왔다. 태형군이 뭘 했으면 좋겠어요? 엠씨의 물음에 각자 보고 싶은 것들을 목 터져라 불러댔다. 역시 노래랑 댄스가 제일 많네요. 엠씨의 대답에 태형이 다급히 엠씨의 마이크를 뺏어들었다. 저 춤 진짜 못 추니까 차라리 노래할게요. 태형의 말에 사람들은 거의 실신 직전이었다.

 

 

, 김태형 노래 부르는 거 잘 못 들어봤는데.

 

그러게. 존나 우리랑 있을 때는 그렇게 빼더니.

 

빡찜, 넌 들어봤어?

 

 

정우가 물어보며 지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흠칫 놀랐다. 지민의 표정이 묘하게 심기 뒤틀린 듯한 표정이었다. 박지민, 너 왜 그래? 정우가 지민을 살짝 흔들자 그제서야 정신이 든 듯 흠칫 놀라며 정우를 바라보는 지민이었다.

 

 

, ? 뭐라고 했어?

 

아니 너 근데 표정이 왜 그래, 어디 아파?

 

... 아니.

 

 

저번에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부르기 싫다고 했으면서... 지민은 괜히 심술만 나, 입술을 불퉁하게 내밀었다. 자꾸 질투만 늘어나니 큰일이다. 이러다 나중에는 자신이 무슨 일이라도 일으킬 것만 같았다. 이제는 이런 자신이 싫을 정도였다. 시도 때도 없이 질투하고 마음이 베베 꼬이니 정말 자신이 못된 사람 같다.

 

앉아서 부르고 싶다는 태형의 말에 의자까지 올라왔다. 뒤에서 사람들의 환호성이 들렸다. 지민의 입은 삐죽삐죽 들어갈 생각을 안했다. 엠씨한테 귓속말로 무언가를 속삭인 태형이 자리에 앉았다. 곧이어 체육관에 MR이 울려 퍼졌다. 익숙한 멜로디에 사람들이 우와 소리를 질렀다. 태형이 입꼬리를 부드럽게 올리며 씨익 웃었다. 알 수 없는 자괴감 때문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지민도 천천히 고개를 들어 태형을 올려다봤다. 의자에 다리 꼬고 앉아서 눈을 감은 채 살짝 미소를 짓고 있는 태형은 솔직하게 너무 멋있었다. 김태형은 누구라도 멍하게 그를 보게 되는 얼굴이었다. 그를 보면 왠지 모르게 숨이 턱 하고 막히고, 심장은 잔잔하지만 조금은 빠르게 뛴다. 원래도 홍조가 있었지만 얼굴에 열이 몰리는 느낌도 든다. 남이 보면 아마 얼굴이 더 빨개져 있겠지.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보이려나. 지민은 턱을 괴고 있던 두 손을 살짝 움직여 두 볼을 감쌌다.

 

 

자꾸 눈이 가네 하얀 그 얼굴에

질리지도 않아 넌 왜

 

슬쩍 웃어줄 땐 나 정말 미치겠네

어쩜 그리 예뻐 babe

 

 

달달한 MR과 함께 태형의 목소리가 잔잔하게 울렸다. 적당히 낮은 그의 목소리는 노래와 또 묘하게 잘 어울렸다. 미친 김태형 노래 존나 잘 부르네. 정우가 지민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지민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태형의 목소리는 노래를 부를 때 진가를 발휘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낮고 허스키한 듯 담백한 목소리는 노래 부르는데 적합한 목소리였다. 저 목소리에 이다지도 달달한 노래를 부르다니, 이건 사기다.

 

 

You know he's so beautiful

Maybe you will never know

내 품에 숨겨두고 나만 볼래

 

어린 마음에 하는 말이 아니야

꼭 너랑 결혼 할래

 

 

노래를 부르며 천천히 눈을 뜬 태형과 눈이 마주쳤다. 서로의 시선이 얽혀 꽉 잡힌 듯, 지민은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태형도 시선을 다른 데 옮길 생각이 없는지 계속 지민을 바라봤다.

 

 

오 어떤 단어로 널 설명할 수 있을까

아마 이 세상 말론 모자라

 

 

지독히도 취향인 목소리로 달달하기 그지없는 노래를 부르며 올곧은 시선으로 자신만을 바라보니, 지민은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미치겠다. 귓가로 스며드는 그의 목소리와 제 시선에 가득 담긴 그의 얼굴이 정말이지 위험하다. 자꾸 이렇게 되면 나중에 정말 태형에게 옴짝달싹도 못하고 잡히게 생겼다. 절대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몇 번을 말해줘도 모자라

오직 너만 알고 있는

간지러운 그 목소리로

노래 부를 거야 나 나 나 나

 

자꾸 맘이 가네 나 정말 미치겠네

 

 

노래를 끝낸 태형은 살짝 웃었다. 지민은 결국 고개를 푹 숙였다. 큰 박수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환호성이 아득히 들렸다. 이미 끝났는데 자꾸 태형의 노랫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제 심장소리도 크게 들리는 것도 같다. 어떻게 이런 노래를 저런 목소리로 여기서 부를 수가 있어. 태형의 노래가 끝나자마자 또 심술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사실 태형이 못 부를 이유도 없는데. 부르든 말든 자신이 왈가왈부할 일 아닌데. 와중에 마지막에 노래를 끝내고 자신을 보며 웃었던 그 표정이 생생히 기억에 남았다.

 

 

이런 얼굴에 그런 목소리에 노래실력까지 완전 사기 아닌가요.

 

 

엠씨가 감탄을 하며 태형에게 다가갔다. 태형은 그 말에 쑥스러운 듯 고개를 살짝 숙이며 웃었다. 노래 부르는 거 들어보니까 그냥 그 노래를 부른 건 아닌 것 같은데. 엠씨는 그런 말을 하며 짓궂은 표정을 지어보였다.

 

 

가사가 대놓고 너 좋아해하는 노랜데 표정도 엄청 행복한 표정 지으며 부른 거 알아요?

 

알아요.

 

오오오오!!!!

 

 

엠씨가 어떤 의미로 물어본 건지 대놓고 드러났다. 태형은 그런 엠씨의 물음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대답했다.

 

 

혹시 여친 있어요?

 

아니요.

 

그렇다면 이 체육관 안에 있는 사람들이 무엇을 궁금해 할지 알 것 같네요. 왜 학교에서 이 정도로 인기 많은 애들은 누구를 잘 안 사귀는 경우가 많거든. , 그럼 좋아하는 사람은 있습니까?

 

 

와아아악!!! 엠씨의 물음에 학생들이 난리가 났다. 어쩌면 태형에게 제일 궁금했던 질문. 최근에 크게 돌았던 소문의 진상을 알게 될 날이 오늘일지도 몰라, 학생들은 숨까지 죽여가며 태형의 대답을 기다렸다. 일단, 누구를 사귀고 있다는 소문은 개구라였고 좋아하는 사람의 유무만 알면 되었다. 여학생들은 엠씨한테 고마워 죽을 지경이었다. 원체 태형에 대해 아는게 없었는데 이번 기회에 많이 알아가는 것 같았다. 좋아하는 사람은 고사하고 이상형만이라도 알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 태형을 좋아하는 nn명 아니, 어쩌면 1nn명의 여학생들은 태형에게 집중했다. 잠시 생각하는 듯 체육관을 한 번 쓱 훑어 본 태형은 천천히 마이크를 들었다.

 

 

, 있어요.

 

 

꺄아아아!!! 체육관이 또 한 번 난리가 났다. 그 소문이 진짜였어, 씨발 어떡해!! 여기저기서 안타까움인지 혹시 모를 기대인지 모를 웅성거림으로 시끄러워졌다. 엠씨가 두 손으로 진정하라는 듯 제스처를 취하자, 그제서야 조금 조용해졌다.

 

 

그럼 방금 부른 노래는 좋아하는 사람에게 불러준 건가요?

 

그 아이 생각하면서 부른 건 맞아요.

 

그 아이라니 동갑 아니면 연하겠네요.

 

 

헐 동갑 아니면 연하라니. 그 자리에 있던 2학년 1학년 학생들은 혹시 모를 기대가 생기기 시작했다. 에이 설마 나는 정말 아니겠지만 혹시나 나인 거 아니야? 내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지만 그래도 복숭아 같다는 소리 좀 듣는 편인데. 태형을 좋아하던 사람들이 각자 착각을 할 때, 지민은 무릎을 안고 고개를 파묻은 채 꼼짝 않고 있었다.

 

태형이 그 사람을 얼마나 좋아하는지는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보면서 아주 잘 알았다. 그가 눈을 감으며 노래를 부를 때 그 표정이 세상 얼마나 행복해 보였는지. 그 사람 생각하는 것만으로 그런 표정이 나온 거라면, 여태까지 좋아하는 사람 있는 것을 어떻게 숨겼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태형의 그 표정은 지민조차 낯선 표정이었다. 태형이 그렇게 행복해 했던 적이 있었나. 그렇게 온 몸으로 드러날 정도로 누군가를 좋아했던 적 있었나. 과거를 돌이켜봐도 없었다. 지민은 깨달았다. , 얘 정말 사랑하고 있구나.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억지로 참으려고 했지만 이제는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짝사랑?

 

....

 

 

태형이 대답을 할 때마다 함성이 터져 나왔다. 지민은 아예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지만 그 손을 비집고 들어오는 소리까지 다 막을 수는 없었다. 아득하게 엠씨와 태형의 목소리가 계속 들렸다.

 

 

그 친구는 어떤 친구예요?

 

그냥... 노래 가사처럼. 그런 친구예요.

 

복숭아 같은 친구?

 

그것도 그렇고요. 그냥, 여러모로.

 

고백해본 적 없어요?

 

아직 고백할 생각도 없어요.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괜찮아요, 아직은.

 

태형군이 좋아할 정도면 그 사람도 되게 예쁠 것 같은데. 그러다 다른 사람한테 가면 어떡해요.

 

... 생각해본 적 없는데... 그러면 정말 그 애 붙잡고 울지 않을까요.

 

 

여기저기서 안타까움의 탄식이 쏟아져 나왔다. 절대 짝사랑이란 건 없을 것 같은 사람도 짝사랑을 하는구나. 김태형이 고백하면 다 받아줄 것 같은데. 도대체 그 김태형이 저렇게 좋아하는 사람은 누굴까. 학생들은 김태형의 님이 궁금해 미칠 것 같았다. 수많은 여자들의 고백을 거절했던 이유도 당연히 짝사랑 때문이겠지. 이쯤 되면 궁금해지는 것이다. 태형은 언제부터 그 님을 좋아한 거지?

 

 

그 사람은 태형군이 자신을 좋아하는 거 알까요?

 

절대 모를걸요.

 

같은 학교 학생이에요?

 

.

 

 

학생들의 입에서 동시에 헉 소리가 나왔다. 같은 학교 학생일 것이라고는 절대 생각 못했는데. 아까보다 웅성거림이 더 심해졌다. 학교까지 밝혀진 순간 범위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지민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너 어디 아파? 옆에 있던 정우가 지민을 살짝 흔들며 물었지만 지민은 고개만 저을 뿐, 얼굴을 들지 않았다.

 

아마 제 얼굴은 보기 싫게 일그러져 있을 것이다. 일그러져 있기만 할까, 눈물에 얼굴이 다 젖어 있고, 코와 볼은 보기 싫게 붉어져 있고, 안 그래도 통통한 눈두덩이가 더 부어올라 있을지도 몰랐다. 지민은 지금 자신의 모든 것을 제어하기 힘들었다. 표정도, 눈물도, 감정도.

 

전혀 몰랐다. 김태형이 좋아하는 사람이 이 학교 학생이라니. 자기도 모르는 새에 김태형과 그 사람이 몇 번이나 마주쳤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아니 친하게 지내고 있을 수도 있다. 나도 모르는 태형의 친구라니. 전혀 낌새도 느끼지 못했는데. 태형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충격적이라, 지민은 혼란스러웠다. 김태형에 제일 잘 알고 있고 제일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오만이었다.

 

더 이상 물어보면 태형군도 곤란할 것 같네요, 혹시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있어요? 엠씨의 물음에 태형은 잠시 고민하는 듯 마이크만 만지작거리다 입을 열었다.

 

 

이 순간에도 너를 말하고 있는 줄은 모를 거다, 바보야. 어쩔 때는 눈치 채줬으면 싶고, 또 어쩔 때는 평생 몰랐으면 싶기도 해. 너한테 고백이라도 해볼까 싶다가도 지금 이대로가 더 좋은 것 같기도 하고. 나조차도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지, 네가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는지 잘 모르고 여전히 갈팡질팡 한다. 너에 대한 건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역시 제일 어렵기도 해. 여전히 너를 대할 때마다 조심스러워져. 옛날에는 이 마음 자체가 너무 무거워 포기하려고 했는데... 이제는 내가 많이 커서 그런지 그럭저럭 견딜만해. 나 참, 내가 사람들 다 보는데서 별 소리를 다 하네. 어쨌든, 그만큼 널 좋아해. 보상 바라고 말하는 건 아니니까 몰라도 괜찮아. 그냥 넌 누군가의 첫사랑이라는 것만 알면 돼. 너는 그 사랑 받을 만큼 좋은 사람이니까.

 

 

태형은 마지막에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마이크를 내렸다. 체육관 내에 박수소리와 함께 큰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태형은 처음부터 지민을 보며 이야기를 했지만 한 번도 그와 눈을 마주치지는 못했다. 뭐 때문에 계속 저렇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걸까. 그래도 눈 마주치면서 이야기 하고 싶었는데. 절로 씁쓸한 표정이 나왔다.

 

천천히 무대에서 내려온 태형은 갑자기 벌떡 일어난 지민과 눈이 마주쳤다. 체육관 내는 어두컴컴하면서도 화려한 조명 탓에 시야가 정신없음에도 불구하고, 지민의 얼굴은 너무나도 잘 보였다. 누가 봐도 운 것 같은 표정과 잔뜩 젖은 얼굴에 깜짝 놀라 빠른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가려했지만, 지민은 그대로 뒤로 빠져나갔다. 태형도 많은 인파를 제치며 지민의 뒤를 쫒았다.

 

사람들 틈에 있던 지민은 옆으로 빠져 체육관 뒷문으로 향하다 누군가의 손에 붙잡혀 몸이 돌아갔다. 생각지도 못한 얼굴에 흠칫 놀란 지민은 바로 고개를 숙였다. , 태형아...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하려 했지만 아까의 눈물 때문에 벌써 목소리가 먹먹해져 있었다. 다시금 울려 퍼지기 시작한 노래와 본격적으로 시작한 축제 때문에 체육관은 또 시끄러워졌다. , 나 무대 준비해야 해. 지민은 어물쩍 넘기며 태형에게 잡힌 손목을 살짝 비틀어 빼내었다. 색시야, 왜 울어. 태형은 그런 지민의 손을 다시 다급히 잡으며 물었다. 지민은 순간 울컥함에 인상을 찌푸리며 태형을 바라봤다.

 

 

그 색시 소리 좀 그만 집어치워!

 

......

 

내가 계속 적당히 넘어가니까 만만해? 내 말은 말 같지 않아?

 

그런 뜻 아닌 거 잘 알잖아.

 

몰라! 그 놈의 색시 색시 내가 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얘기 했는데도 무시하는데 내가 네 의도를 어떻게 알아. 자꾸 그딴 식으로 부르면 너랑은 끝이야.

 

......

 

 

지민은 아무 말 못하는 태형의 손을 뿌리치고 빠른 걸음으로 체육관을 나갔다. 바깥 빛을 보자마자 울음이 탁 터졌다. 입을 꾹 다물었지만 새어나오는 울음소리는 어쩔 수 없었다. 지민은 결국 학교 뒤편으로 뛰어갔다.

 

 

 

 

 

 

 

 

 

 

2. 짝사랑의 결말

 

학교 뒤편으로 넘어가자마자 벽에 기대었다. 두 손으로 자꾸 흐르는 눈물을 닦아보지만, 눈물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축제날에 쓰레기장으로 오는 사람은 없겠지. 지민은 결국 쭈그려 앉아 흐느끼며 울었다. 가슴팍을 퍽퍽 쳤다. 왜 자꾸 여기가 뻐근하게 아파오는지 모르겠다. 가슴이 너무 아파서 그래서 눈물이 나는 거다. 지민은 가슴팍을 치던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생각했다.

 

너무 오랫동안 제 진심에서 도망 쳤었다. 김태형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정말 큰일 날 것 같았다. 그렇게 부정하고 부정하다 겨우 인정한 사실이다. 박지민은 김태형을 좋아한다. 제 진심만은 부정 않기로 했다. 어차피 김태형은 항상 제 옆에 있었으니까, 그렇게 친구로 평생 옆에 있다면 그걸로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늘 김태형의 말을 듣고 보니 문득 불안해졌다. 여태까지는 뭐가 됐든 김태형의 인생에서 자신이 제일 먼저라는 확신이 있었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김태형은 항상 자신을 먼저 생각했다. 그런 사소한 배려들을 새삼스레 깨달았던 적이 무수히도 많았다. 그래서 굳이 고백을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도 너무 행복한데 괜히 고백해서 차이고 친구로도 못 남는 것은 더 싫었다. 어차피 태형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자신만의 생각이었다. 태형이 그 사람을 언제부터 좋아했는지, 얼마만큼 좋아하는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지금 태형의 진심을 들은 순간부터 자신이 생각했던 모든 것들은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민은 태형이가 그렇게 좋아하는 사람을 이길 자신이 없었다. 누가 들어도 태형은 그 사람을 오랫동안 짝사랑 했으며, 그 사랑이 가벼운 사랑은 아니라는 것이 너무 잘 느껴졌다.

 

아 쪽팔린다. 이때까지 얼마나 자만했던가. 김태형이 저를 대할 때 다른 사람과 확연히 차이가 날 정도로 세심하고 배려가 넘치는 모습들을 보면서 어쩌면 자신도 모르게 우월감을 느꼈었나보다. 자신만은 김태형에게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나보다. 그냥 소꿉친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데. 김태형은 원래 그렇게 다정한 사람이었는데. 그 호의에 그만 착각하고 만 거다.

 

정말 별 거 아닌 일이다. 김태형은 옛날부터 자신을 색시라고 불렀고 다정하게 대해줬었다. 모든 것은 제 마음가짐의 차이다. 할 수만 있다면 정말 태형을 만나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다. 돌아가서 다시는 그런 별명으로 자신을 부를 수 없게 하고 싶다. 더 이상 아무 의미 없는 별명에 의미부여 하고 싶지도 않고, 마음고생 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렇게 아플 바에야, 차라리 아예 만나지 않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몰랐다.

 

 

여기 있었네.

 

 

갑자기 지민의 앞에 태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민은 순간 놀라 흠칫 몸을 떨었다. 지민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지금은 태형의 얼굴이 보고 싶지 않았다. 바로 앞에서 신발이 끌리는 소리와 함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색시야. 그의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는데 기어코. 지민은 울컥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다 순간 휘청거렸다. 다리에 쥐가 난 탓이었다. 태형도 놀라서 지민을 잡아주었지만, 지민이 그의 손을 확 쳐냈다. 왜 울어. 태형의 손이 지민의 볼로 향했다. 지민이 순간적으로 몸을 뒤로 뺐다. 태형의 손이 허공에서 우뚝 멈추었다.

 

 

너 진짜 나를 호구로 보냐? 내가 색시라고 부르지 말랬잖아! 내가 그랬지, 그렇게 부르면 너랑은 끝이라고.

 

뭘 자꾸 끝내, 시작한 것도 없는데!

 

 

태형의 윽박에 지민은 흠칫 놀라, 조금 커진 눈으로 태형을 바라봤다. . 태형이 거칠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것도 시작 안했어. 난 너랑 한 게 없는데 뭘 너 혼자서 끝내. 웃기지마. 다른 애들은 몰라도 너는 나한테 그러면 안 되지.

 

웃긴다. 나는 뭘 그러면 안 되는데. 시작도 안했다고? 그럼 이때까지 너랑 나는 뭐였냐. 친구도 아니었어? 씨발 진짜 그럼 난 14년 동안 너한테서 놀아난 거였어? , 알고 보니 나는 존나 니 받쳐주는 들러리였냐? 시다바리였어? 대체 난 뭐냐고!

 

 

태형의 표정이 차갑게 식었다. 그의 표정에 지민은 살짝 놀랐지만 그를 노려보는 눈빛은 풀지 않았다. 감정을 삭이는 듯 작게 심호흡을 하던 태형은 결국 후 한숨을 뱉으며 말했다.

 

 

그런 식으로 이야기 하지마.

 

네가 말한게 그렇잖아.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야.

 

대체 네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다. 네 의도는 하나도 모르겠다고. 네가 도대체 나한테 왜 그러는지...

 

......

 

태형아. 나 정말 모르겠어...

 

 

지민의 얼굴이 작게 일그러졌다. 지민의 눈가에 눈물이 훅 차올랐다. 잔뜩 굳어있던 태형의 표정이 당황스러움으로 물들었다. , 갈래. 지민이 몸을 확 틀자 태형이 다급히 지민의 손목을 살짝 잡아 당겼다. 갑작스런 힘에 순간 중심을 잃은 지민이 휘청거리자 태형이 지민의 허리를 살짝 감았다. 제 허리에 태형의 손이 닿자마자 지민은 거칠게 태형의 손을 뿌리쳐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너 미쳤어? 지민의 말에 태형이 비소를 날렸다.

 

 

이거 봐, 너 이상하다고.

 

......

 

어느 순간부터 그랬어. 옛날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은근슬쩍 나 피하고 손 뿌리치고 화내고! 왜 그래? 나 정말 이해가 안돼서 그래.

 

이해하려고 하지 마. 애초에 우리가 해왔던 거 이해 못할 짓들이었잖아. 내가 전에 말했지. 우리가 해왔던 모든 것들이 존나 이상한 거라고.

 

......

 

다 이상해. 네가 그렇게 나만 싸고도는 것도, 그렇게 꿋꿋이 색시라고 부르는 것도, 나만 그렇게 챙기는 것도! 아니, 이게 다 나만의 착각이냐? 말해봐, 나 혼자 그렇게 생각하는 거냐고.

 

......

 

내가 너랑 몇 번이나 이런 일로 입씨름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이젠 진짜 지쳐.

 

 

태형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태형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지민은 그 표정에 담긴 의미를 알아차리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울음을 참는 표정이었다. 서운함? 실망?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아주 오랫동안 제 속에 꾹꾹 차 답답하게 만드는 그것들이 한 번에 터져 나올 것 같을 때, 울음으로 나올 것 같을 때 억지로 참는 표정이었다. 그런 얼굴을 하는 태형이 매우 힘들어보였다. 그 얼굴을 보니 도리어 지민이 울음이 나올 것 같았다. 지금 울고 싶은 건 난데 왜 네가 더 힘든 표정을 지어. 지민은 결국 참지 못하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런 표정 짓지 마. 나를 오해하게 만들지 마. 괜히 내 마음 들쑤시지 마. 친구잖아. 고작 친구일 뿐인데 왜 자꾸...

 

 

울음 때문에 목이 매여 결국 말을 끝맺지 못하고, 지민의 눈에서는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태형이 놀라 한발짝 다가가 지민의 눈물을 살짝 닦아주었다. 지민이 그의 손을 약하게 쳐냈다. 너무 가까이 다가온 태형을 밀어내려 하지만 자꾸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지민은 작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지민은 아예 그 자리에 주저앉아 고개를 숙여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태형도 따라 앉았다. 그를 안아주고 싶었지만 제 손길을 자꾸 피하는 것 같아 결국 두 손으로 무릎을 끌어안았다. 무릎에 살짝 턱을 얹고 정수리만 보이는 지민을 가만히 바라봤다. 저번부터 어렴풋이 짐작은 했다. 뭔가 어긋나기 시작했다는 건 이미 느끼고 있었다. 지민의 행동이 점점 변했다. 제 행동에 지민이 예민하게 반응하고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다. 태형은 더 이상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기식으로 지민에게 숨길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결과가 좋든 나쁘든 이제 더 이상은 이 짝사랑의 끝을 미룰 수 없었다.

 

지민은 손바닥으로 대충 눈물을 닦고 고개를 들어 태형을 바라봤다. 무릎에 턱을 얹은 채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태형의 시선에 또 울컥 눈물이 차올랐지만 애써 참았다. 자꾸 목이 매여 말하기가 힘들었다.

 

언제부터 김태형이 좋아졌을까. 왜 좋아졌을까. 태형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변한 게 없었는데. 옛날부터 쭉 자신한테 그래왔는데. 새삼스럽게 왜. 사람이 없어서 그 애한테 반하냐. 14년을 같이 붙어 다닌 친구가 어디가 좋아서 그렇게 심장을 벌렁벌렁 거리냐고. 걔가 변한 것도 아닌데 갑자기 그런 마음이 드는 건 이상한 거잖아. 색시라는 거 그냥 어렸을 때 그렇게 불려서 지금까지 온 별명일 뿐이잖아. 그거에 갑자기 왜 설레는데 병신같이. 그런 거 아니잖아. 이제 와서 네가 듣고 싶은 대로 듣지 마. 원래 그런 뜻 아닌 거 알잖아. 김태형은 그냥 친구일 뿐이라고.

 

지민은 자꾸 제 머릿속에 들어차는 김태형을 애써 밀어내며 스스로 마음을 다잡았다. 이건 오로지 자신만이 해야 할 것들이었다. 갑자기 변해버린 제 마음 때문에 태형에게 더 이상 상처를 줄 수는 없었다. 빨리 깨달았어야 했다. 김태형이 자신한테 했던 그 행동들이 다른 친구들보다 좀 더 따스하고 다정한 행동들이었다는 걸 일찍이 깨달았으면, 김태형은 원래 그런 애니까 하고 넘어가지 않았으면, 친구의 선을 확실히 했으면, 이렇게 김태형한테 반하는 일은 없었을까. 모든 것이 후회가 되었지만 그런 것들이 없었다면 김태형을 좋아하지 않았을 거라고도 말 못하겠다. 그것이 제일 두려웠다. 자신이 김태형을 좋아하는 것이 불가항력이었을까 봐.

 

지민은 자꾸 가빠오는 호흡을 간신히 정리했다. 더 이상 숨길 수 없었다. 더 이상 태형에게 거짓을 말하기 힘들었다. 점점 무거워지는 마음은 이제 지민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져버려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결과가 어떻게 되던, 이제는 짝사랑의 끝을 미룰 수 없었다.

 

 

태형아 내가 힘들어서 못하겠어. 이제. 너무 힘들어. 네 옆에 있는 게 너무 힘들다. 네가 색시라고 부를 때마다 정말 내가 그런 사람마냥 착각을 하게 돼. 네가 이렇게 할 때마다 나는 오해를 하게 된다고. 넌 원래 다정한 애잖아. 그래서 그렇잖아. 원래 친구끼리는... 친구사이에서는 이렇게 하는 거 아니잖아.

 

 

지민의 눈에서 툭 눈물이 떨어졌다. 한 번 떨어지니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태형은 손을 뻗어 엄지로 조심스럽게 뺨을 훑었다. 눈물이 태형의 엄지에 묻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태형의 눈빛이 따스하기 그지없었다. 아니면 이것 역시 이미 그에게 반해버린 저의 착각일까. 뭐가 됐던 지민은 이 따스함에서 헤어 나올 수 없을 것 같았다. 지민은 천천히 한 손을 들어 제 뺨을 살짝 감싸고 있는 태형의 손을 덮어 잡았다.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다. 미처 흐르지 못한 눈물들이 한 번에 후두둑 떨어졌다. 색시야. 그의 입에서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나직했다. 그 놈의 색시는 또 못 버린다. 습관이 되어버려서 그런 건지 일부러 그러는 건지, 이제는 모르겠다.

 

 

그래, 이런 건 원래 친구사이에서 하는 행동이 아니야. 그리고 나 원래 다정한 사람 아니야.

 

 

태형의 말에 지민이 놀라 눈이 살짝 커졌다. 아까의 눈물 때문에 눈과 코가 빨개져 있었다. 크흥. 지민이 작게 코를 들이마셨다. 지민은 입술을 감춰 물어 잘근잘근 씹었다. 지민은 가까이 다가온 태형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봤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던데, 얘를 그렇게 오랫동안 봐왔으면서 왜 아직도 얘 마음을 읽을 수 없는 건지. 아니, 왜 계속 저 눈빛의 의미를 보고 싶은 대로 해석하게 되는지. 자꾸 가슴이 먹먹해져온다. 태형이가 무슨 이유로 그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지민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좋아해.

 

 

지민이 한숨처럼 내뱉었다. 더 이상 눈물 흐를 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직 눈가에 고여 있었는지, 툭 한 방울 흘러내렸다. 태형은 말이 없었다. 어쩐지 더 울고 싶어졌다. 아까부터 자꾸 울기만 하고, 이렇게 울보는 아니었는데 김태형 때문에 마음까지 약해진 것 같다.

 

 

모르겠어. 언제부터였는지, 아니 이게 진짜 그런 마음인지도 모르겠는데, 그냥, 그냥, 좋아해. 너 때문이야. 네가 나를 오해하게 만들었어. 착각하게 만들었어. 네 그 다정함 때문에 내가, 내가, 그냥, 흐으... 태형아. 좋아해. 네가 자꾸 색시라고 부르니까... 그래서... 그러니까...

 

 

한 번 말문이 터지기 시작하니 말이 줄줄 다 터져 나왔다. 머릿속이 정리가 안돼서 그냥 마음 가는대로 말 할 뿐이었지만, 지민은 적어도 후회는 없었다. 다시 눈물이 울컥 차올라서 목소리가 자꾸 갈라졌다. 목 놓아 엉엉 울고 싶은데 그래도 자존심이 있지 태형의 앞에서 쪽팔리게 고백하고 울고 싶지는 않았다. 지민은 또 흐르려 하는 눈물을 팔로 벅벅 닦았다.

 

 

내가, 내가 너 좋아한다고, 바보야! 너는 씨발 좋아하는 사람 있으면서 나한테 자꾸 색시라고 부르고, 흐으... 자꾸 잘 해주고... 내가, 내가 남자라서... 나도 그냥 너랑 친구 하고 싶었는데... 근데... 어쩔 수 없잖아...

 

 

지민은 결국 고개를 숙였다. 흐으으... 이를 악 물어도 자꾸 울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지민은 결국 참는 걸 포기했다. 이제는 눈이 아플 지경이었다. 가슴 아프고 눈도 아프고 머리도 아픈 것 같다. 다 아프다. 누가 말하지 않아도 지금 제 꼴이 얼마나 추할지 알 것 같았다. 보상받지 못할 짝사랑을 고백하고 엉엉 우는 꼴이 썩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닐 거다.

 

 

오늘은 너 보기 싫으니까 꺼,

 

 

갑자기 제 품에 확 들어오는 태형의 몸에, 지민은 놀라서 히끅 딸꾹질까지 나왔다. 얇은 태형의 팔이 지민의 목을 감았다. 태형이 지민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었다. 말랐지만 단단한 그의 품에 지민은 두 팔로 천천히 태형의 허리를 감아 니트를 꼭 부여잡았다. 어깨에 이마를 기대었다. 달달한 섬유유연제의 향이 약하게 났다.

 

지민아, 내 색시야. 태형이 말하면서 느껴지는 숨결에 온 몸이 간질간질했다. 자꾸 이러면 안되는데 왜 계속 눈물이 나는 건지. 태형에게서 거의 처음 듣는 제 이름이었다. 그렇게 바랐는데 이제 와서 불러주는 건 반칙 아닌가. 제 이름이 원래 이렇게 달콤한 이름이었나. 이렇게 눈물 나는 이름이었나. 이렇게 좋아도 되는 건가. 내가 이제는 미쳐서 그렇게 들리는 건가. 태형의 니트를 잡은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지민아.

 

흐으...

 

좋아해.

 

......

 

좋아한다고, 바보야.

 

 

결국 눈물을 터뜨렸다. 태형의 품에서 엉엉 울었다. 제 목을 감았던 태형의 팔이 살짝 내려와 등을 천천히 토닥여주기 시작했다. 그 손길도 영락없이 태형이 것이라, 너무도 다정해서 자꾸 눈물이 나왔다. 태형이 한 손으로 제 뒤통수를 천천히 쓰다듬어주었다.

 

 

너 짝사랑 한다며.

 

.

 

오랫동안 좋아했다며.

 

.

 

...그거... 나야?

 

.

 

 

조금은 낮은 태형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듯 들렸다. 지민은 멍한 표정으로 태형을 바라보다 문득 든 생각에 얼굴에 열이 확 올라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렇게 울었던 제 얼굴은 지금쯤 퉁퉁 부어 있을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런 얼굴을 대놓고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다. 으흐흥. 태형이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얼굴 보여줘. 태형이 두 손으로 지민의 손목을 살짝 감싸 잡았다. 지민은 제 손에 힘을 주었다. 자꾸 제 손을 치우려 하는 태형 때문에 곤욕이었다.

 

 

안돼! 지금 나 존나 못생겼단 말이야.

 

나한테 네가 못생겼던 적 없어.

 

,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지금!

 

지민아.

 

 

그 입에서 제 이름이 나오는 건 아직 면역이 안되었다. 색시라는 그 별명 때문에 정신없이 태형에게 빠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름은 자신을 흐물흐물 녹게 만들었다. 태형의 목소리로 제 이름을 듣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더 듣기 좋았다.

 

지민의 손에서 힘이 빠지는 순간, 태형이 살짝 지민의 손을 치웠다. 아까 많이 울어 살짝 부은 눈과, 조금 벌게진 코와 볼이 보였다. 태형은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픽 웃었다. 언제나 그랬다. 지민을 볼 때마다 이렇게 웃음이 나곤 했다.

 

 

지민아.

 

...왜 자꾸 불러.

 

색시야.

 

......

 

좋아해, 진심으로.

 

 

지민은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태형을 확 안았다. 태형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 작은 웃음소리마저 심장 떨려 미칠 것 같았다. 먹먹했던 감정은 어느샌가 사라지고 없었다. 태형의 품은 언제나처럼 따스했고, 제 등을 토닥여주는 손길은 언제나처럼 다정했다.





















---


<그냥 주저리. 안읽으셔도 됩니다!>


처음으로 나름 중장편을 끝냈네요.

중간에 긴 공백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함께 해주신 분들,

그리고 최근까지도 놀러와주신 분들

전부 감사합니다!

제 만족에서 쓰기 시작한 글이지만

여러분들 덕분에 이렇게

끝까지 쓸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많이 부족한 글인데도

좋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많은 응원 감사합니다.

단순히 청게 고딩이 보고 싶어서

쓴 글인데 생각보다 많은 사랑을

받아서 기쁩니다.


아마 완결을 읽고 뭐야 이게 끝이야?

하실 분들이 있을거라 생각됩니다.

오랜 삽질 끝에 뷔민이들 연애 하는 모습도

봐야 하는데 그쵸ㅠㅠㅠㅠ

사실 중간에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만

그래도 원래 생각했던대로 마무리를 짓는게

맞는 것 같아 이런 완결을 내게 되었습니다.

애초에 둘이 연애 하는 내용은 본편에 실을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뷔민이들 연애하는 내용은 외전으로 쓸

생각이었습니다. 앞으로 외전이 한 두개 정도

나올 것 같네요. 남고생 뷔민이들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답니다ㅎㅎ

그럼 외전으로 찾아뵙겠습니다.

남고생 뷔민이들 찾아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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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남고생의 일상 (完)



요즘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다확실한 증거라고는 없는 말도 안되는 루머지민은 그렇게 믿고 싶었다.


김태형 좋아하는 사람 있대.


김태형 여친 사귄다던데?

 

 

 

학교 구석구석까지 퍼진 소문이다.










 

1. 소문

 

히스테리가 이런건가. 지민은 모든 것이 짜증나고 신경질 나기 시작했다. 일주일 전부터 어디선가 스물스물 나오기 시작한 소문은 점점 몸집을 부풀리기 시작하더니 이주일이 지난 지금, 학교 구석구석까지 퍼져 그의 소문을 모르는 사람이 없어졌다. 그 소문들은 지민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기 딱 좋았다. 속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오는 이 감정이 화인지,배신감인지, 속상함인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그 모든 것이 섞여 있을 수도 있다. 지민은 또 울컥 올라오는 이 감정에 또 짜증이 나 신경질 적으로 머리를 헝클였다

 

왜 이런 기분 더러운 감정을 느껴야 하는 것인가 천천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지민은 태형에게서 그런 소문이 붙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태형은 누구를 좋아한다고 언질 한 번 해준 적 없었고, 그런 낌새를 보인 적도 없었다. 여친이 생겼다? 만약 여친이 생겼다면 하루 24시간 중 제일 오래 붙어있는 자신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데 대체 왜 그런 소문이 도는 거지... 지민은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마구 낙서를 하다, 문득 든 생각에 볼펜을 쥔 손을 우뚝 멈추었다. 손이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것만큼 지민의 눈동자도 잘게 떨렸다. 창문을 열어놓고 서로 이야기를 했던 어느 날 밤이 떠올랐다. 굉장히 의미심장한 대화의 연속이었다. 그 때 김태형은 자신에게 물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색시한테 물어보길 원해? 그 때 분명 그렇게 답했었지. 아니.

 

심장이 발밑으로 추락하는 느낌이 들었다. 지민은 헉하며 심장께를 쥐었다. 설마설마... 내가 그렇게 말해서 나한테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던 건가. 아니 근데 그 때는 분명 좋아하는 사람 없다고 했던 것 같은데... 머리가 굳어져 그 때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 기억도 안 났다. 좋아하는 사람 없다고 그랬던 것 같은데... 아닌가. 뭐라고 그랬더라. 아니 그 때 얘기 했던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 이후로 좋아하는 사람이 생길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지민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제 옆에 붙어있는 태형의 책상이 보였다. 전 시간에 수업한 교과서만 펼쳐져 있고 빈자리였다. 급히 교실을 둘러봤다. 태형이 보이지 않았다. 지민은 교실을 뛰쳐나갔다가 복도 한가운데서 우뚝 멈추었다. 나 지금 뭐 하는 거야. 비소가 터져 나왔다. 존나 웃긴다. 뭐 김태형이 하루 종일 제 옆에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쉬는 시간 10분 동안 어디 일 보러 나갈 수도 있는 건데. 이게 뭐라고 이렇게 미친놈처럼 김태형 찾는 건데. 정말 이상해졌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자신은 어딘가 이상해졌다.

 

 

 

 

 

야 김태형 진짜 누구 좋아한대?

 

몰라 씨발.

 

 

친구의 물음에 지민이 정색하며 대답했다. 지민은 스탠드에 앉아 턱을 괸 채 뚱한 표정으로 운동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김태형이 운동장을 이리저리 가로지르며 뛰어다니고 있었다.

 

체육시간이었지만 선생님이 자유 시간을 주시면서 남자들은 대부분 축구 하러 운동장으로 뛰어갔고, 여자들은 피구 하거나 지민처럼 스탠드에 앉아서 쉬었다. 지민은 체육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자유시간이 생기면 거의 쉬는 편이었다. 지민 혼자서 스탠드에 앉아 있으니, 쉬고 있던 반 친구들이 슬금슬금 지민의 옆으로 다가왔다. 김태형 좋아하는 사람 생겼다며? 너희 엄청 친하잖아, 누군지 알아? 아예 여친 있다던데. 별로 듣고 싶지 않은 소문들을 제 옆에서 나불거리니 지민은 팍 짜증이 올라, 그들을 째릿 노려봤다.

 

 

야 그런건 소문 당사자한테 물어볼 것이지 왜 나한테 물어봐?

 

친하지도 않은 사람한테 가서 어떻게 물어보냐? 네가 제일 친하잖아.

 

몰라, 나도 모른다고. 진짜 다들 왜 나한테 그래, 짜증나게.

 

다른 학교 다니는 내 친구들이 궁금하대. 내 친구 김태형 좋아한단 말이야.

 

헐 내 친구들도 좋아한다던데. 그래서 진짜 여친 생긴 거 맞는지 물어봐달라 그랬어.

 

우리가 김태형한테 물어봤자 걔 우리 무시나 안하면 다행이지. 다른 사람들한테는 얼마나 쌀쌀맞은지 아냐

 

걔 진짜 너한테만 헤헤 웃고 잘해주잖아. 너한테는 잘 말 해줄 것 같은데.

 

 

지민은 입술을 잘근 씹었다. 자꾸 제 팔을 붙잡고 부탁해대는 애들 때문에 마음이 흔들렸다. 말도 안 되는 헛소문이라고 생각 하지만 태형에게 확실한 사실을 듣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정말 태형이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면? 여친이 생겼다면? 그 대답을 들었을 때 표정관리를 잘 할 수 있을까.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능청스레 물어볼 수 있을까. 여친 보여 달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할 수 있을까. 그 어느 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대답을 듣는 순간 표정이 굳어지고, 어쩌면 울음을 터뜨릴지도 몰랐다. 그 때는 어떻게 변명해야 하지.

 

점점 심각해지는 지민의 표정에, 옆에 있던 친구들이 지민을 툭툭 쳤다. 야 무슨 생각을 하는데 그렇게 표정이 심각해. 친구의 말에 지민이 움찔 놀라며 상념에서 벗어났다.

 

 

김태형한테 뭐 들은 건 없어? 친구들끼리 그런 이야기 안 해?

 

그런 이야기 안해.

 

근데 궁금하긴 하다. 김태형은 대체 어떤 여자랑 사귈까.

 

 

그건 지민도 궁금했다. 그렇게 생긴 애는 그렇게 생긴 애랑 사귀겠지. 그래도 애가 다정하니까 여친한테도 잘해줄 거야. 지민은 여러 생각을 하며 친구들을 보고 있던 시선을 다시 운동장으로 돌렸다. 태형과 눈이 마주쳤다. 운동장 한가운데 멀뚱히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축구 중에 저렇게 있어도 되는 거야? 지민은 턱을 괴고 있던 손을 내리고 상체를 바로 했다. 어 김태형 온다. 옆에 있던 친구가 중얼거렸다. 태형이 가볍게 뛰어와 스탠드 앞에 섰다. 스탠드 제일 위쪽에 앉아있던 지민은 태형을 살짝 내려다봤다. 땀에 젖은 앞머리가 이마에 살짝 달라붙어 있었다. 아직 숨이 차는지 숨소리가 거칠었다.

 

 

무슨 이야기 했어?

 

?

 

엄청 재밌어 보이던데.

 

 

넌 지금 그거 물어보려고 여기까지 온거냐. 지민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옆에서 친구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쟤네는 또 뭘 기대하는 거야.

 

 

아무 얘기 안했어.

 

근데 왜 그렇게 재밌어 했어?

 

내가 재밌어 했다고? 잘못 봤겠지.

 

 

짝사랑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 하는데 재미 있을리가 없다. 제 표정은 자신도 볼 수 없지만 썩 유쾌하지는 않은 표정이었을 거라고, 지민은 생각했다

 

지민의 대답에 태형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어딘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지민 역시 뚱한 표정으로 태형을 바라봤다. 둘 사이에 쎄한 기류가 돌았다. 옆에 있던 친구들도 둘을 힐끔힐끔 눈치 보기 시작했다. 잠시 말 없던 태형은 갑자기 입고 있던 후드집업을 벗더니 지민에게 홱 던졌다. 저에게 날라 오는 후드집업을 얼떨결에 받은 지민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태형을 바라봤다. 추우니까 입어. 한마디 하고 운동장 쪽으로 돌아가던 태형이 그 자리에 멈추어 서더니 지민 쪽으로 돌아봤다.

 

 

색시야.

 

.

 

... 아니다.

 

 

머뭇거리던 태형은 결국 입을 다물고 운동장으로 돌아가 아무렇지 않게 팀에 섞여 축구를 하기 시작했다. 왜 말을 하다 말아, 궁금하게. 한 친구의 말에 같이 있던 다른 친구들이 맞장구쳤다. 지민은 멍하니 태형을 바라봤다. 궁금한 것 투성이었다. 축구 잘 하다가 갑자기 다가온 이유도 궁금했고, 왜 갑자기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도 궁금했다. 잠깐 동안의 알 수 없는 그 기 싸움은 뭐였는지도 알 수 없었다. 자신이 딱히 못할 말을 한 것도 아니었고 그렇게 분위기가 싸해질 만한 상황도 아니었는데 태형의 반응은 과했다. 아니, 과하다고 생각했다. 알다가도 모르겠네. 요즘 들어 태형에게 드는 생각이었다.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엔 모르겠다.

 

 

김태형은 지민이한텐 항상 다정하네.

 

어디가.

 

지금도 후드집업 벗어 던져주고.

 

그냥 지가 더워서 그러는 거야. 저렇게 뛰어다니는데 덥지.

 

아니 그래도. 평소에도 그냥 그렇게 느낀 적이 많아.

 

하긴. 김태형이 박지민한테 하는만큼 다른 사람한테 그렇게 해주는 건 한 번도 못봤다.

 

 

친구들의 말을 한 귀로 흘리던 지민은, 마지막 말에 눈이 번쩍 뜨였다. 걔가 나한테 좀 많이 유난이긴 하지? 지민이 넌지시 물었다. 뭐 좀 그런 것 같긴 해. 애기 때부터 친구라고 하니까 그러려니 하는데 사실 생각해보면 왜 저러나 싶긴 하지. 남자 둘이서 그렇게 붙어 다니는 걸 본 적 없어서 그런가.

 

자신만 김태형의 행동이 과하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 김태형이 너무 했어. 지민은 차라리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마음 편했다. 걔가 자꾸 자기만 특별하게 대해줘서 괜히 이상한 마음이 드는 거라고, 말도 안 되는 합리화라도 하는 게 나았다. 그러면 나중에 너 때문이라고 우기기라도 할 수 있을 거 아니야.

 

하 모르겠다. 자꾸 머릿속이 복잡했다. 쓸데없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지저분하게 이어졌다. 제 마음을 어떤 이유를 만들어 합리화해야 하는 것도 웃기고, 그렇게 할 정도로 제 마음을 숨겨야 한다는 것도 웃겼다. 걔 탓을 하다가도 제 탓을 하고, 그러다 또 소문이 생각나고, 그러면 또 불안해지고. 지민은 제 머리를 열면 마구 엉킨 실타래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걸 푸는 방법은 다른 거 없다. 그냥 칼로 한 번에 베어버리는 것. 그 칼은 무엇일까. 고백? 절교? 아니 내가 그걸 할 수는 있을까. 긴 생각 끝에 결론을 내었다. 애초에 칼자루를 쥐고 있는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김태형이었다. 모든 것의 답은 그냥 김태형이었다.

 

 

 

 

 

점심 때 먹은 것들이 얹힌 느낌이었다. 온갖 말이 모이는 급식실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 억지로 밥을 먹다보니 결국 이렇게 된 것 같다. 왜 김태형 소문인데 자신이 눈치를 봐야 하는지 모르겠다. 자신을 보며 수근 거리고, 그 수근거림 사이에 제 이름이 들리기도 했다. 왜 그 이야기에 제 이름이 언급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더 심한 경우에는 직접 찾아오기까지 했다. 선배고 후배고 할 거 없이 생전 본 적도 없는 사람이 와서 대뜸 '너 김태형이랑 친하지? 걔 진짜 좋아하는 사람 있어?'라고 물어보기까지 했었다. 무례하기 짝이 없는 상황에 표정관리도 안되고 절로 씨발이 툭 튀어나올 뻔 했다. 그런 상황에 밥이 제대로 목구멍으로 넘어갈리 만무했다.

 

결국 지민은 청소시간에 잠깐 빠져나와 보건실로 향했다. 청소고 뭐고, 이대로 가다가는 공부 시간에 체한 것들이 위로 올지도 모른다. 요즘 따라 되는 일이 없냐. 지민은 가슴부근을 주먹으로 툭툭 치며 보건실 문을 열려고 했다.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팍 꽂힌 것은 찰나의 순간이었다. 문을 열려고 손잡이에 손을 올린 그 순간, 그 익숙한 목소리는 김태형을 말했다. 지민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천천히 문에 귀를 댔다. 누구지, 목소리가 너무 익숙한데. 지민은 온 신경을 청각에 집중시켰지만 보건실 안에 있는 사람도 꽤나 조용히 이야기를 하는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아 알 것 같은데... 지민의 미간이 점점 좁아졌다. 집중을 심하게 한 나머지 본인이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지도 모르는 듯 했다. 보건실 문에 바짝 붙어서 인상을 팍 찌푸리고 있는 지민의 모습을 누가 본다면, 꽤나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봤을 것이다.

 

보건실 안에서 무어라 웅얼거리는 와중에 김태형 이름은 그렇게도 잘 들렸다. 아니 왜 김태형 이름만 이렇게 크게 들리는 거야... 지민은 그것마저 왠지 모르게 민망했다. 곧이어 들리는 말에 지민은 망설임 없이 문을 열었다.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그냥 몸이 먼저 반응한 것 같았다. 그들의 말을 듣자마자 머릿속으로 그 말을 받아들일 틈도 없이 문을 열어재꼈다. 그냥 순간적으로 감정이 욱했다. 표정관리? 씨발 그게 뭔데. 지민은 지금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관심 없었다. 몰라 씨발, 소문 처음 들었을 때랑 똑같은 표정이겠지. , 실망, 배신감, 뭐 그런 것들. 아니, 어쩌면 그것보다 훨씬 더 격한 감정일지도. 왜냐하면 그 때는 그냥 소문이었고 지금 들은 건 확인사살이니까.

 

씩씩거리며 보건실로 들어간 지민은 침대에 쳐져있는 커튼을 뜯어낼 기세로 젖혔다. 침대에 누워있던 한 명과, 걸터앉아 있는 한 명이 눈알 튀어나올 듯이 놀라 지민을 바라봤다. 지민은 그들의 얼굴을 보자마자 감정이 폭발하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제대로 느낀 적도 처음이다. 눈물은 특정 상황에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어떤 감정이든 그것이 극에 달하면 눈물이 나는 것 같다. 지민은 자신도 정확히 무엇인지 모를 감정 때문에 결국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 와중에도 입술을 피 날듯이 짓이겨 울음은 막았다. 지민은 그 둘을 노려보며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 작은 한숨에서도 울음이 섞인 듯 떨렸다. 그게 무슨 소리야. 지민은 제 속을 간신히 진정시키며 물었다. 모든 것을 찢어발길 듯이 들어온 애 치고는 꽤나 덤덤한 말투였다. 지민이 그렇게 하려고 죽을힘을 다해 애쓰고 있었다. 침대에 앉아있던 그들은 눈에 띄게 당황하고 있었다. 그 표정들이 꽤나 볼만해서 비소가 자꾸 터져 나왔다.

 

 

난 그 소문이 씨발 말도 안되는 루머인줄 알았는데 아니었네.

 

지민아...

 

김태형 좋아하는 사람 있는 걸 나만 몰랐네, 나만.

 

......

 

아 뭐지, 이 배신감은

 

 

지민은 작게 코웃음 치며 말했다. 그의 눈가에 고여 있던 눈물은 결국 툭 떨어졌다. 지민의 눈물에 둘은 크게 당황했다. 어찌할 바 몰라 안절부절 못하는 표정들이 참 가관이었다. 저러고 있는 걸 보니 숨기기도 오래 숨겼다 싶었다. 이걸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머릿속이 복잡했다. 아 좆같아. 오늘따라 자꾸 기분이 더럽더라니 마지막에 이렇게 대형 엿을 투척하기 위한 떡밥이었나. 하하하. 자꾸 헛웃음만 나왔다. 더 좆같은 것은 자신이 이렇게 마음을 추스리느라 아무런 말을 못하고 있는 이 와중에도, 그들은 입도 벙긋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 변명조차 하지 않았다.

 

 

, 윤정우. 너 언제부터 알고 있었는데.

 

......

 

김태형이 가르쳐 줬어?

 

...그냥 우연히 알게 됐어.

 

이한 너는, 너도 우연히 알게됐냐?

 

......

 

언제... 언제부터?

 

 

지민의 얼굴 볼 낯도 없어 고개만 푹 숙이고 있던 정우는 그의 마지막 물음에 고개를 들었다. 목소리에 울음기가 있는 것 같다 했더니, 지민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제일 오래 알고 지냈고 그렇게 친하게 지냈던 김태형인데 자기만 모르는 이 상황이 배신감 들고 속상할 수도 있다고는 생각 되지만, 저렇게 울 정도인가 싶었다. 둘 사이가 그냥 친구로 보기 힘들기는 했지만... 적어도 지민은 태형이가 그냥 친구일 텐데. 아니, 잘 모르겠다. 태형은 그렇다 치더라도 지민도 옛날부터 태형에게 유난인 구석이 있긴 했다. 안 그런 척 해도 태형이 제 옆에 꼭 있어야 했고, 태형을 제일 잘 알고 있다는 부심도 있을 정도로 태형의 모든 것을 알아야 했다. 그러니 지금 지민은 배신감 들만했다. 애초에 그들은 지민이 느끼고 있을 감정을 함부로 단정 지을 입장은 안 되었다.

 

그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들의 침묵에 지민은 점점 속이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아까는 머리끝까지 올라 폭발할 정도였는데 이제는 밑바닥으로 축 가라앉는다. 점점 아래로, 발밑으로.

 

 

태형... 김태형은 너희가 알고 있는 거 알아?

 

......

 

...알아?

 

지민아 있잖아...

 

아는구나.

 

 

굳이 대답은 피하려는 그들을 보고 지민은 깨달았다. 아 정말 나만 몰랐던 이야기구나. 얘네들은 이미 다 알고 있었구나.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꽤나 오래 됐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민은 결국 두 손으로 제 얼굴을 묻었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냥 공허했다. 순식간에 길을 잃은 느낌이었다.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제자리에서 빙빙 돌기만 하는. 지민은 그대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마른세수를 했다. 김태형 어디 있는지 알아? 지민의 물음에 그들은 고개만 저었다. 지민은 그대로 몸을 돌려 보건실을 나갔다. 정우와 이한은 한참을 멍하니 보건실 문만 바라보다가 이내 머리를 쥐어뜯었다. 악 씨발! 김태형한테 뒤졌다.

 

지민은 보건실을 나오자마자 건물 밖으로 뛰어나갔다. 청소시간에 김태형이 교실에 없으면 어디로 갔을지 뻔했다. 건물 뒤쪽으로 돌아가자 바로 벽에 기대 서 있는 태형을 발견했다. 지민은 망설일 것도 없이 김태형 앞에 섰다. 멍하니 허공만 보던 태형은 갑자기 제 시야로 훅 들어온 지민에, 흠칫 놀랐다가 바로 씨익 웃었다. 우리 색시네? 태형의 말투가 퍽 능청스러웠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민은 그의 능청을 받아줄 만큼 심적으로 여유롭지 못했다.

 

 

, 그 소문 사실이야?

 

 

단도직입적인 지민의 물음에 태형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태형의 대답에 지민의 입에서 헛웃음이 나왔다

 

 

둘 중 하나는 거짓말이네.

 

... ?

 

윤정우랑 이한은 알고 있던데. 너 좋아하는 사람 있는 거.

 

......

 

그게 그렇게 나한테 숨길 일이었어? 다른 애들한테는 떠벌떠벌 다 말하면서 나한테는 숨길 일이야, 그게?

 

색시야, 그게...

 

내가 이제는 이런 거에 배신감을 느껴야 하냐?

 

......

 

... 너 정말... 정말 좋아하는 사람... 있어?

 

 

지민은 이런 식으로 태형의 마음을 물어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런 식으로 누군가한테 등 떠밀리듯 억지로 물어보게 될 줄은. 한 마디 한 마디 뱉는 게 그리도 어려웠다. 답을 알면서도 아니길 바라면서 묻는 이 상황이 너무 비참했다. 왜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했을까. 이제 와서 그런 생각 해봤자 너무 늦었다.

 

 

. 있어.

 

 

그의 대답에 지민은 숨을 헉 들이켰다.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눈가가 뜨거워졌다. 안 돼 울지 마. 지민은 억지로 눈을 크게 떠가며 눈물 나오지 않으려 애썼다. 여기서 울었다가는 제 마음을 들킬 수도 있다. 짝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을지언정 제 마음까지 들킬 수는 없었다. 그건 최악이었다. 내가... 내가 그 때 말했잖아... 지민은 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울컥 올라오는 것을 간신히 삼키며 말했다. 계속 속이 울렁거렸다. 정신이 없었다. 지민은 지금 자신이 제대로 서 있고 제대로 말 하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내가 그 때... 너 좋아하는 사람 생겨도...

 

내가 끝까지 거짓말을 하길 원해?

 

네가 그 때 그랬잖아. 썸도 없고 사귀는 사람도 없다 그랬잖아. 네 취향인 사람도 없다며!

 

. 썸도 없고 사귀는 사람도 없어. 내 취향인 사람이 나한테 대쉬한 적도 없어.

 

...

 

네가 나 좋아하는 사람 생겨도 말 하지 말라며.

 

 

. 지민은 순간 휘청거렸다. 태형이 재빨리 지민을 안았지만 그의 손을 거칠게 쳐냈다. 태형의 말이 다 맞았다. 잘 생각해보면 딱히 배신감이 들 만한 이유도 없었다. 이미 자신이 이야기 하지 말라고 했었으니까. 태형은 제 말을 잘 들은 것밖에 없었다. 오히려 자신이 이렇게 나오는 것은 과민반응이었다. 생각해보니 웃겼다. 어느 누가 친구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이렇게 역정을 낼까. 이게 다 짝사랑 때문이다. 짝사랑은 사람을 미친놈으로 만든다.

 

힘이 쭉 빠졌다. 지민은 터덜터덜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몇걸음 안가서 태형에게 잡혔다. 그의 힘에 따라 몸을 돌리자 그의 얼굴이 보였다. 항상 보기 좋은 얼굴이었는데 오늘은 보기 싫었다. 좋아하는 사람 있다는데도 굳이 그 애한테 반응하는 제 마음도 싫었다.

 

 

누구 좋아하는지는 안 궁금해?

 

 

, 씨발 진짜. 지민은 순간적으로 욕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억눌렀다. 손목을 살짝 비틀어 그에게서 벗어났다. 내가 왜 네가 좋아한다는 사람을 궁금해야 하는데. 지민은 부러 차갑게 말했다. 스스로가 듣기에도 싸늘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였다. 태형이 움찔했을 정도면 말 다 했다. 태형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지민은 그대로 그 자리를 벗어났다. 오늘만큼은 태형을 보고 싶지 않았다.

 

 

 

 

 

 

 

 

 

 

2. 화해

 

춤으로는 꽤나 유명인사인 지민은 언제나 축제를 피할 수 없었다. 댄스 동아리는 아니었지만 동아리 사람들이 매 번 지민에게 부탁을 했기 때문이었다. 작년에도 그래서 축제 때 무대 섰다가 김태형이랑 엄청 싸웠다. 아니 싸울 일도 아닌데 자꾸 김태형이 오버 한 거다. 지민은 춤 얘기만 나오면 예민하게 구는 태형을 이해할 수 없었다. 막말로 내가 좋아서 춤춘다는데 춤 보는 건 좋아하면서 축제 같은데 나간다고 말하기만 하면 싫다고 난리를 쳐대니 곤란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작년에도 그랬고 올해도 진즉 축제 나가지 말라고 몇 번이나 으름장을 놨더란다. 참 나 지가 뭐라고. 지민은 무용실로 향했다. 곧 축제였고 댄스부에서 같이 무대 서달라고 부탁 받았다. 지금부터 연습을 해야 했다.

 

요즘 지민과 태형은 냉전 상태였다. 냉전 상태라고 말해도 되는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랬다. 서로 대화를 제대로 안한지 꽤나 되었다. 주위에서 싸웠냐고 난리였다. 여러모로 주위에서 더 사람 피곤하게 만든다. 저번에는 소문 가지고 사람 괴롭히더니 이제는 김태형이랑 같이 안다니냐고 괴롭힌다. 싸웠냐고 물어보면 안 싸웠다고 대답했다. 정말 싸우지 않았기 때문에 안 싸웠다고 말하면 또 믿지 않는 눈치다. 씨발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굳이 말하자면 어색했다. 웃기는 일이다. 서로 제 인생의 반 이상을 같이 보낸 친구인데 어색하다니. 심지어 그렇게 유난 떨면서 붙어 다녔는데. 그 수많은 세월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듯 보고도 못 본 척, 말 한 번 안 섞고 남보다도 못한 사이로 지냈다. 그깟 소문 하나 때문에. 어째보면 주위에서 더 애가 타는 것도 무리는 아닌 듯싶다. 한순간에 친구 하나 잃었는데 겉으로 보이는 만큼 덤덤할 수 있을까. 적어도 지민은 그랬다. 아무렇지 않게 태형을 무시하고, 없는 척 했지만 속은 말도 아니었다. 태형과 이런 사이로 남고 싶지 않았다. 지금 당장이라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말 걸고 같이 등하교 하고 그러고 싶었다. 그런데 제가 먼저 다가가기는 죽기만큼 힘들었다. 내가 어떻게 뻔뻔하게 그렇게 다가가... 지민은 겁쟁이었다.

 

그와 같이 하교를 하지 않은지도 꽤 되었다. 지민은 축제 연습 때문에 학교에 남아 있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원래라면 태형이 무용실까지 찾아와 연습을 방해하거나 가만히 앉아 춤추는 걸 봤을 텐데, 연습을 시작한 이후로 단 하루도 찾아온 적 없었다. 김태형도 나쁜 새끼다. 제가 먼저 다가가는 거 잘 못하는 거 알면서 부득불 안 오는 거 봐. 아니, 나쁜 새끼는 나다. 태형 입장에서는 황당하기만 하고 어이없기만 한 상황인 것이다. 그렇게 말도 안 되는 걸로 화내고 먼저 돌아섰으면서 태형이 먼저 오기를 기다리는 자신이 그냥 쓰레기인 거다. , 우울하다. 자꾸 마음이 이랬다저랬다잡생각이 불쑥불쑥 머릿속을 파고들어 연습도 제대로 안됐다. 결국 잠깐 쉬라는 친구의 말에 지민은 무용실 소파에 몸을 던졌다.

 

, 한숨이 나왔다. 엎드린 채로 눈을 감으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저절로 김태형이 떠올랐다. 뭐가 됐든 우선 이 말도 안 되는 냉전 상태를 좀 풀어야 할 것 같다. 친구였을 때도 괴로웠는데 친구도 아니고 남도 아닌 이 어정쩡한 상태로는 정말 피 말려 죽을 것 같았다.

 

 

, 너 김태형이랑 헤어졌다는 소문이 돌던데.

 

 

위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지민은 깜짝 놀라 파드득 몸을 떨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잠시 쉬는 타임인지 땀을 송글송글 매달고 있는 친구가 지민을 내려 보고 있었다. , 뭔 개소리야. 지민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입을 열었다. 헤어졌다는 게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괜히 제 마음 들킨 것처럼 제 발 저렸다. 잠깐 목소리가 떨린 건 기분 탓이겠지.

 

 

우리 연습 시작한지 며칠 째인데 김태형 머리털도 안 보이는 건 말이 안 돼.

 

걔가 여길 왜 와, 댄스부도 아니고 춤 도와주는 애도 아닌데.

 

네가 그런 소리를 하면 안 되지. 걔가 여기 오는 모든 이유가 다 너인데.

 

뭐 우리는 하루종일 붙어 있어야 하냐? 아 계속 시비 털 거면 저리 꺼져.

 

여자애들이 너희 무슨 일 있냐고 물어봐달라던데.

 

그걸 걔네들이 대체 왜 궁금해 하는데. 아무 일 없어, 짜증나게 개나 소나 다 물어봐 진짜.

 

싸웠구나.

 

안 싸웠다고!!

 

아니 뭘 그렇게 예민하게 굴어. 너희가 평소랑 너무 다르니까 그렇지.

 

 

아 빡쳐, 말 할 기운도 없어... 지민은 철푸덕 다시 소파에 몸을 엎드렸다.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겠다는 무언의 행동에 결국 친구도 그 이상 물어보지 못했다. 그래도 그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건 확실했다. 친구 사이에 치고 박고 싸우는 건 사실 흔한 일이지만 박지민이랑 김태형이 이렇게 남처럼 생 까고 다니는 일은 절대 흔하지 않았다. 아니, 그냥 처음이었다. 그들과 알고 지내던 애들이 그들의 일을 궁금해 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일지도 몰랐다. 원래 생전 보지 못한 것이 항상 궁금한 법이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빨리 화해해. 그냥 이대로 남 될 건 아니잖아.

 

 

친구의 말에 지민의 몸이 움찔 떨렸다. 하지만 여전히 엎드려있는 몸은 일으키지 않았다. 나중에 합류해. 지민의 어깨를 아프지 않게 탁탁 친 친구는 다시 거울 앞으로 갔다. 무용실 뒤편에는 지민만이 있었다. 친구의 말이 뇌리에 콱 박혀 떨어지지 않았다. 그냥 이대로 남 될 건 아니잖아... 태형과 남이 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적어도 지민은 그랬다. 근데 김태형은 어떨지 잘 모르겠다. 요새 자신이 했던 짓을 생각해보면 이미 정 털렸을지도 몰랐다. 갑자기 피해 다니지를 않나, 기뻤다가 갑자기 화내고 또 그러다 우울해 하는 등, 감정기복도 롤러코스터 급이었다. 김태형은 그런 애 옆에서 이때까지 잘 참아왔다 싶을 정도였다. 짝사랑이란 거 정말 감당 안 되는 일이구나 싶었다. 정말 정 털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삐질삐질 나오기 시작했다. 짝사랑은 씨발 사람 존나게 감수성 예민하게도 만드는구나... 지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팔로 눈가를 벅벅 문질렀다. 약한 눈두덩이가 금세 붉어졌다.

 

야 나 오늘 먼저 집에 들어갈게. 지민은 무용실 구석에 대충 던져놓은 가방을 들고 후다닥 무용실을 빠져나왔다. 야 시간 없어! , 박지민! 박지, 이 미친 새끼야!!! 저 멀리서 친구의 절규가 아득히 들려왔지만 지민은 입술을 꾹 깨물고 더 빨리 뛰었다. 당장 코앞인 축제보다 김태형이 더 중요했다. 어떤 결과를 받아들더라도 일단 얼굴 보고 이야기는 해야 할 것 같았다. 이렇게 앞으로 쭉 이도 저도 아닌 사이로 지내다가 나중에 정말 남이 되어버리면, 손해는 자신이었다. 아니, 손해고 자시고 그냥 사과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약간은 충동적이기도 했다. 그래, 정말 솔직히, 그냥 김태형이 너무 보고 싶었다.

 

 

 

 

 

무작정 뛰었다. 찬바람이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목구멍으로 찬바람이 자꾸 들어와 폐까지 차가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켁켁 기침이 나왔다. 그래도 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빨리 가야했다.

 

큰 대로를 지나 골목길로 들어갔다. 골목길의 가로등과 이따금 집 안에 켜진 불들만이 골목길을 밝혀주었다. 아무도 다니지 않는 조용하기 그지없는 골목길에 지민의 뛰는 소리만 들렸다. 숨이 차 헉헉거리면서도 지민은 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힘든 것을 몰랐다. 일단 김태형을 봐야겠다는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 들어차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만나면 뭐라고 이야기를 해야 할지, 어떻게 사과를 해야 할지, 아무것도 생각해 본 적 없으면서. 매우 충동적이었다.

 

제 집을 지나 바로 옆집 대문 앞에서 드디어 멈추었다. 찬바람을 너무 많이 쐬어 콧속이 따가울 정도였다. 목도 너무 건조했다. 토해낼 듯 기침을 하고 나서야 간신히 진정이 된 지민은 숨이 차다 못해 터질 것 같이 아픈 가슴을 살짝 토닥이며 초인종을 눌렀다. 집에는 아직 불이 켜져 있었다. 심장은 여전히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좀 오래 뛰어오긴 했다. 지민은 그것 때문이라고 믿고 싶었다.

 

집 밖에 아무도 나오지 않아 의아함을 느낀 지민이 다시 한 번 초인종을 누르려 손을 뻗었을 때, 굳게 닫혀 있던 대문이 천천히 열렸다. 지민은 얼굴을 보자마자 순간 울컥하는 느낌에 입술만 꾹 깨물었다. 가슴팍을 토닥이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몇 번을 더 치던 지민은 결국 그 손을 내렸다. 심장은 여전히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목도리는 어디다 버리고 이렇게 얇고 입고 다녀.

 

 

태형은 아예 대문 밖을 나와 들고 있던 목도리를 천천히 지민에게 둘러주었다. 지민은 천천히 손을 들어 목도리를 살짝 잡았다. 이제야 무용실에 놔두고 온 목도리가 생각이 났다. 태형이 둘러준 목도리와 똑같은 것이었다. 코랑 볼이 다 빨가네. 태형은 두 손으로 지민의 볼을 살짝 감쌌다. 태형의 커다란 손이 지민의 얼굴을 다 덮었다. 손은 따뜻했다. 지민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태형이 하는 것을 멍하니 보기만 하다, 문득 여기 온 이유를 깨닫고 헤 벌어져 있던 입을 꾹 닫았다. 어떻게든 말은 붙여야겠는데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할지 조차 생각하지 않았던 터라, 머릿속이 많이 복잡했다. 하고 싶은 말은 정말 많은데 하나도 정리되어 있지 않았다. 태형아. 지민이 작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입술이 덜덜덜 떨렸다. 추워서 떨리는 건 아니었다. 심장은 여전히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내가... 내가, 미안해.

 

......

 

그냥 다 미안해. 요즘 그러니까... 내가 좀 많이 이상해서... ... 그 때 화내서 미안. 내가 많이 생각해봤는데 그냥 내가 너무 과민반응 했던 것 같아. 그렇게 막 그럴 일은 아니었잖아, 사실. 다른 애들은 다 아는데 나만 모르는 게 있었다는 게 그 때는 좀 배신감이 들었나봐. 그냥... ... 과하게 화냈어. 그러니까... ...

 

색시야.

 

......

 

울지 마.

 

 

무슨 소리야. 지민은 차마 마주치지 못하던 시선을 그대로 들어 올려 태형을 봤다. 태형이 검지를 눈 밑에 살짝 갖다 대었다. 지민은 그제야 제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래서 눈가가 이상하리만치 뜨거웠었구나. 한 번 눈물이 나니 멈출 수가 없었다. 태형은 아예 엄지로 살살 눈 밑을 쓸었다. 지민은 차마 그 손길을 피할 수 없었다. 너무 따뜻했다. 그냥 너무 좋았다. 나 피하지마. 지민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눈물 때문에 금세 목소리가 떨려왔다. 간신히 뱉어낸 말마저 물에 젖어있었다. 태형은 손을 내려 지민의 등을 천천히 토닥이기 시작했다. 지민은 그대로 태형의 어깨에 기대었다.

 

 

나 색시 못 피해.

 

......

 

내일 같이 학교 갈까.

 

......

 

그리고 같이 돌아오고.

 

....

 

 

지민이 태형의 품에서 천천히 떨어졌다. 태형은 등을 토닥이던 손을 그대로 내려 지민의 손을 덮어 잡았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지민의 집으로 향했다. 자연스럽게 대문을 연 지민은, 반쯤 들어가다 고개를 돌려 태형을 바라봤다. 태형은 손을 흔들어 주었다. 내일은 그 목도리 하고 와. 태형의 말에 그제야 목에 둘린 목도리가 생각났다.

 

 

근데 나 목도리 없는 거 어떻게 알았어?

 

난 항상 색시를 보고 있어.

 

 

어서 들어가, 춥다. 태형의 재촉에 지민은 어어 고개를 끄덕이며 종종걸음으로 현관까지 갔다. 고개를 돌리니 이미 대문은 닫히고 어두컴컴한 정원만 보였다. 지민은 도어락을 풀고 집에 들어갔다. 집 안의 온기가 온 몸을 감쌌다. 왠지 몸이 탁 풀리는 기분에 지민은 스르르 주저앉아버렸다. 항상... 나를 보고 있다고? 지민은 목도리를 풀다가 그대로 얼굴을 폭 묻었다. 무슨 의미야 대체. 지민은 이제 거의 무의식적으로 제 심장께를 툭툭 쳤다. 이제는 한계다.

 

심장은 여전히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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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어서 정말 죄송합니다ㅠㅠㅠㅠ

몇개월만에 올라온 글인데

뷔민 오지게 삽질하는 내용만 있어서

죄송합니다... 이상하게 자꾸 길어지네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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뷔민 남고생의 일상 12

길/남고생의 일상 (完)



1. 짝사랑

 

오랜 기간 한 사람을 좋아하면서 느낀 건,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이 뻔뻔해진다는 것이었다. 태형은 자신이 이 나이 먹고 지민이한테 색시라고 부르는 것도, 남들이 보면 오해할 수 있을 정도의 스킨십을 하는 것도, 단순히 오랜 친구기 때문에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제 식대로 마음을 드러내는 행위였고, 동시에 제 속을 숨기는 방법이었다. 사랑을 숨긴다는 것은 그 어떤 감정보다 힘든 것이었다. 조금이라도 어설프면 들키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래서 뻔뻔해야 한다. 태형은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올 감정을 애써 숨기는 것보다, 그것을 마구 드러내놓고 그 위에 우정을 덮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그것은 태형의 생각보다 훨씬 더 오래갔다.

 

처음에 태형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천천히 움을 틔우는 감정의 싹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아니, 그 싹은 너무나도 작고 연약했기 때문에 태형 본인조차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 맞았다. 태형이 깨달았을 때는 이미 꽃이 만개하여 그 향이 온 몸에 베일 정도였다. 태형이 사랑을 하고 있다는 것이 겉으로 지나치게 드러났었다. 그 사실을 알고 나니 문득 두려움이 밀려왔다. 이제야 깨달은 자신의 마음은 자신이 생각해도 당황스러운데, 지민이가 제 마음을 알게 되면 얼마나 당황스러울까. 절대로 이 마음을 들키면 안 된다. 그런 생각에 무작정 숨기기만 했다. 많은 방황을 하기도 했다. 최대한 지민을 피해 다녔다. 너무 오래 붙어 다녀서 그런 거라고, 조금이라도 떨어져 있다면 괜찮아지지 않을까. 지민이 자신에게 정 떨어져서 좀 멀어지면 괜찮아질까. 태형은 점점 어긋나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하면 자다가도 이불을 팡팡 찰 과거지만 그 때 당시의 태형은 진지했다. 어쨌든 품어서는 안될 마음이라고 생각했고 어떻게든 그걸 털어내야 했다. 제 마음이 고작 지민이 한 명 때문에 오락가락 하고, 하루에도 열두 번씩 기분이 하늘로 솟았다가 땅으로 곤두박질 쳐졌다가 아주 난리 났다.  태형은 짝사랑의 부작용이 어떤 것인지 뼈저리게 느끼기 시작했다. 이미 그를 좋아하는 마음이 제 몸에 차고도 넘쳐서 제 자신도 어쩔 줄 모르는 상태였다. 이 상태에서 지민에게 말 했다가 자신도 모르게 흘린 마음이 지민에게 닿으면 안될 일이었다.

 

이 정도면 병 아니야? 사람 좋아하는 게 뭐라고 이렇게 줄 잡힌 연 마냥 끌려 다니고 오락가락해? 다들 이런 마음을 견디면서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는 거야? 만약에 누군가를 좋아할 때마다 이런 느낌이 든다면, 태형은 두 번은 못할 것 같았다. 이건 고문 수준이었다. 누군가를 짝사랑 한다는 것이, 태형에게는 고문과도 같았다.

 

태형의 방황은 지민의 울음으로 끝이 났다. 마음 접는 것에 집중한 나머지 지민이 받을 상처를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벌게진 눈을 애써 치켜뜨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지민을 본 순간, 태형은 아차 했다. 이건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지민을 울릴 생각은 아니었다. 태형은 그 이후로 자신의 모든 일탈을 그만두었다. 방법이 너무나도 잘못되었다는 것을 그 때 알았다. 그리고 이미 커질 대로 커져버린 제 마음은, 더 이상 제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흔하디흔한 사랑 노래가 이렇게 다양하게, 많이 나오는 대는 다 이유가 있었다. 다 비슷비슷 하다고 느꼈던 노래들이 이제야 이해되기 시작했다. 지금 겪고 있는 감정 한순간 한순간이 다 낯설었다. 사랑은 그만큼 다양했고, 비슷할지언정 완전히 같을 수는 없었다. 그저 좋아한다, 사랑한다 라는 단어 한마디로 정의 내릴 만큼 단순하지도 않았다. 애초에 추상적이기만 한 감정을 그런 단어들로 표현하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사랑 노래가 이렇게 많이 나오는 것이라고, 태형은 생각했다.

 

마음이 너무 간질간질 했다. 누군가 제 마음 속에서 휘휘 간지러운 바람을 부는 것 같았다. , 누군가가 아니라 지민이겠지. 가끔 이 마음을 주체할 수 없을 때면, 너무너무 커져버려서 더 이상 자신이 담고 있기 버거울 때면 창문을 열었다. 방에 있는 창을 열면 앞에 보이는 지민의 창을 바라보면서 작게 속삭이고는 했다. 내일도 오늘처럼 만이었으면 좋겠다. 지민아. 사랑아. 좋아해.

 

모두가 자고 있는 밤, 동네가 고요에 잠길 때면 살짝 창문을 열어 턱을 괸 채 하염없이 바라봤다. 가끔 달빛이 은은하게 내려오고 별이 총총 박힌 날일 때면, 이상하게 눈물이 나기도 했다. 밤하늘이 예쁘네, 지민아. 달빛도 별빛도 이상하게 따뜻한 날이야. 악몽은 내가 다 가져갈게. 그러니까 지민아, 잘 자. 지민아, 사랑해.

 

좋아하는 마음을 접는 것은 장렬히 실패했다. 그렇다고 고백할 용기도 없었다. 태형은 매일을 고민했다. 지민의 앞에서 웃어준다고 해도 마음은 진정하기 힘들었다. 원래도 그의 이름을 잘 부르지 않았지만, 제 마음을 깨달은 이후로 더더욱 그의 이름을 부르기 힘들었다. 어째서 박지민은 박지민일까. 왜 이름도 박지민일까. 왜 이름마저 지민이 같이 귀엽고 설레는 거야. 더 이상 태형에게 박지민이라는 세 자는 그저 이름의 의미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누구보다도 무거운 이름이었다. 그 이름을 제 입으로 직접 내는 순간, 바로 이어서 좋아한다는 말이 튀어나올까봐 두려웠다. 지민아 좋아해. 지민아 사랑해. 속으로만 수천수만 번 외쳤던 말이라서. 지민이를 부르자마자 바로 연결되어 나올까봐, 그게 무서웠다. 그래서 더더욱 그의 애칭을 놓을 수 없었다. 태형에게 색시는 간절한 염원이기도 했다. 적당히 그에게 애정을 드러내면서, 진짜 속마음을 한 겹 가려주는, 아슬아슬 하면서도 단단한 보호막 같은 거였다. 그걸 모르는 지민은 제 이름을 부르라고 짜증내지만 태형에게는 최후의 수단이었다. 태형에게서 자신의 진심을 덮어주는 단 하나의 보호막마저 사라진다면,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없이 덜컥 진심을 내어보일게 뻔했다. 지민을 오래오래 보고 싶다면 그런 일은 일어나서는 안 되었다.

 

 

 

 

 

지민과 둘이서 놀러가는 것. 언제나 그래왔기 때문에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하지만 태형은 항상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지나친 설렘에 혹시나 실수를 할까봐, 제 조그만 실수 하나에 지민을 잃을까봐. 그냥 가볍게 놀러갔다 오는 거라 해도, 마음까지 가벼울 수는 없었다.

 

나란히 걸으면 아슬아슬하게 스치는 손등이 신경 쓰이고, 웃을 때마다 기대오는 작은 머리가 신경 쓰이고, 말할 때 가끔 톡 튀어나오는 부리 같은 입술이 신경 쓰였다.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올려다 볼 때나, 그 눈이 사르르 접히면서 웃을 때는 숨이 턱턱 막혔다. 그에게서 사랑이라는 감정을 깨달았을 때는 중학교 때지만, 그런 감정이 생긴 것은 그보다 훨씬 더 오래전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 한순간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할 정도일 수 없다고, 태형은 생각했다.

 

지금도 살짝 살짝 부딪치는 손등에 온 신경이 쏠렸다. 지민은 재잘재잘 신나게 이야기 했지만 태형의 귓속까지 들어오지 못했다.

 

 

듣고 있어?

 

 

갑자기 제 앞으로 훅 들어오는 지민의 얼굴에, 태형이 흠칫 놀라 몸을 뒤로 뺐다. , 깜짝이야... 태형의 말에 지민의 표정이 뚱해졌다. 거의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미세한 변화였지만 태형은 다 알아볼 수 있었다. 무슨 일 있어? 지민의 물음에 태형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없는데, ?

 

 

아니이... 뭔가 표정이 심각해 보여서.

 

내가? 표정이 심각해 보여?

 

막 미간 찌푸리고 있고. 무슨 고민 있어 보이길래.

 

 

지민의 말에 태형이 아차 싶었다. 다른데 온 신경을 쓰고 있었더니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쓰고 있었나보다. 미안. 태형이 작게 사과를 하며 씨익 웃어보였다. 고민 있어? 태형은 다시 묻는 지민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너무 힘주지는 않고, 머리카락이 손바닥에 닿을 정도로만, 살살.

 

오늘 뭐 하고 놀까 생각하고 있었어. 태형의 말에 지민의 표정이 환하게 펴지며 또 재잘재잘 거리기 시작했다. 일단 영화를 먼저 보고, 점심 먹고 나서 노래방을 갈까, 쇼핑을 할까? 자신이 생각했던 계획을 이야기 하는 지민을 가만히 보던 태형은 피식 웃으며, 계속 슬쩍슬쩍 스치던 그의 손을 확 잡았다. 지민은 갑자기 훅 다가온 손의 온기에, 살짝 놀라며 태형을 바라봤다. 태형이 능글맞은 웃음으로 맞잡은 손을 들어서 살짝 흔들어 보였다. 지민의 웃음이 터졌다. 손을 앞뒤로 살살 흔들며 길을 걸었다. 맞잡은 두 손의 온기는 적당히 따스했고, 조곤조곤 말하는 지민의 목소리는 듣기 좋았다. 태형은 칭칭 두른 목도리에 살풋 얼굴을 묻었다. 목도리에 가려진 입은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첫사랑에다가 짝사랑이다. 모든 것이 서툴 수밖에 없었다. 가끔은 정말 친구처럼 아무렇지 않다가도 문득 아, 나 얘 좋아하고 있었지 깨달은 날이면 수줍어졌다. 얼굴만 봐도 좋고 설레고 부끄러울 때가 있었다. 아무렇지 않게 하던 스킨십도 유난히 의식하게 되고 쑥스러울 때가 있었다. 지금 그의 작은 손을 꼭 잡고 있는 이 순간도 평소답지 않게 떨렸다. 너무 떨려서 이 두근거림이 전해지는 거 아닌가 걱정이 될 정도로.

 

 

나 너 노래 부르는 거 페북에 올려도 돼?

 

 

지민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태형이 고개를 천천히 돌려 지민을 바라봤다. 차가운 공기에 닿은 볼이 불그스름하게 홍조가 올라왔다. 태형은 주머니 속에 넣고 있던 다른 손을 들어 지민의 볼을 살짝 감쌌다. 작은 지민의 볼이 커다란 태형의 손에 다 덮였다. 너 손 진짜 따뜻하다. 지민이 웃으며 말했다. 볼이 밀려 올라가는 것이 손으로 느껴졌다.

 

 

나 노래 부르는 거?

 

. 너 노래 부르는 거 내가 좋아하잖아. 목소리도 좋고 노래도 잘 부르고. 다른 사람들한테 자랑하고 싶어서.

 

색시 들으라고 노래 부르는 거지, 다른 사람들한테 부를 생각 없어.

 

그냥 노래방에서 노래 부르는 거 올린다는 거지. 오늘 노래방 가자. 다른 사람들도 엄청 좋아할걸.

 

난 다른 사람들이 내 노래 듣는 거 싫어, 색시야.

 

부끄러워?

 

 

장난스레 묻는 지민을 가만히 바라봤다.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결국 꾹 삼켰다. , 부끄러우니까 제발 올리지 마. 씨익 웃으며 말했다. 흐음... 아쉬운데... 끝을 늘리는 지민의 목소리에 미련이 많이 남아보이지만 그가 올리지 않을 것이란 걸 잘 알고 있다. 지민은 그래도 남이 싫다는 짓은 절대 하지 않으니까.

 

내 노래는 항상 너를 위해서만 부르는 거라고 말 하지 못했다. 이 말에 자신도 모르게 마음을 담을까봐, 그래서 지민이 알아차릴까봐.

 

 

 

 

 

 

 

 

 

 

너 박지민 볼 때 진짜 징그러운 거 아냐. 정우의 말에 폰만 만지작거리고 있던 태형이 정우를 힐끗 바라봤다. . 무뚝뚝하기 그지없는 태형의 대답에 정우는 허, 하고 헛웃음이 나왔다. 존나 온도차이 보소. 정우의 말에 태형도 웃긴지 피식 웃었다. 야 너랑 색시랑 같냐. 태형의 말을 들은 정우가 쯧 혀를 찼다.

 

 

그냥 고백해 새끼야. 누가 짝사랑을 몇 년 씩이나 끌고 있어.

 

......

 

너도 참 징 하다 진짜. 어떻게 몇 년 동안 한 사람만 좋아할 수 있냐.

 

몰라. 시비 틀 거면 꺼져.

 

네가 몇 년 째 짝사랑 하고 있다는 거 알면 여자애들이 울고불고 난리날 거다.

 

.

 

전교에 여자가 반인데 이 중에 너 좋아하는 애 한 명 없겠냐. 그렇게 고백도 많이 받는데.

 

......

 

너 인기 많잖아. 또 페북스타여서.

 

아 씨발 진짜 페북스타 얘기 하지 말랬지.

 

 

치를 떨며 정색하는 태형이 웃겨서 정우가 낄낄댔다. 아직도 박지민 페북 알람 터진다, 터져. 태형은 정우의 말에 만지작거리던 폰을 탁 내려놓고 그를 바라봤다.

 

 

네가 색시 페북 알람은 어떻게 아는데?

 

병신아. 박지민 페북만 들어가도 좋아요에 댓글이 몇갠데 모르는게 더 이상해.

 

원래 그 정도면 인기 많은 거야?

 

네가 괜히 페북스타겠냐.

 

씨발아, 하지! 말라고! 하지! !

 

 

태형이 결국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정우의 팔뚝을 퍽퍽 내리쳤다. 정우는 아파 하면서도 태형 놀리는 것에 맛 들려 낄낄 거렸다. 아 아프다고! 정우가 태형을 밀치고 나서야 태형은 때리는 것을 그만두고 씩씩대며 정우를 내려 봤다. 저 표정도 웃겨 정우는 자꾸 웃음이 실실 새어나왔다. 김태형 놀리는 것만큼 재밌는 것도 없다.

 

 

박지민 페북에 들어오는 사람의 70퍼는 너 때문이고 30퍼가 박지민 때문일걸?

 

? 30퍼나? 그러니까 내가 춤추는 거 올리지 말라니까!

 

 

태형은 씩씩거리며 페북에 들어갔다. 어차피 지민이 밖에 친추되어 있지 않은 태형의 페북은, 지민의 이야기밖에 없었다. 지민이가 공유한 것, 댓글 단 것, 직접 올린 것들로 넘쳐나는 글을 빠르게 스캔한 태형은 짜증나는 듯 머리까지 헝클였다. 이거 봐봐, 내가 싫다고 해도 기어코 올린다니까! 폰을 얼굴 가까이 들이밀며 보여주는 태형의 행동에 정우가 화면을 바라봤다. 3일 전에 올린 댄스 커버 영상이었다.

 

 

. 나 이거 봤어. 이거 진짜 대박이던데. 사람들 난리남.

 

싫다고 진짜!

 

아 왜 나한테 성질이야!

 

얘는 왜 자꾸 이런 걸 올리는 거야.

 

박지민이 꼭 네 말을 들어야 하냐. 네가 뭔데.

 

?

 

그렇잖아. 네가 이런 거 올리지 마라. 춤추지 마라 하는 거, 친구가 그러는 거 어이없잖아.

 

 

태형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멍해졌다가 책상에 철푸덕 엎드렸다. 그렇지... 내가 색시한테 이래라 저래라 할 권리는 없지... 금방 또 시무룩한 목소리로 웅얼 거리는게 웃기긴 하지만 어쩐지 짠해져, 정우는 태형의 어깨를 토닥였다.

 

 

박지민이 그렇게도 좋냐.

 

.

 

왜 좋은데.

 

몰라 새끼야. 너 같은 놈한테 아무리 설명해줘도 모를거다.

 

야 나도 연애 해봤어!

 

그래. 연애는 해봤겠지.

 

그 얼굴 달고 연애 한 번도 안 해본 너보다는 낫지.

 

아쉽지도 않아.

 

너 좋다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데 그 사람들도 참 불쌍하다.

 

그 사람들이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이 감정만큼 나를 좋아하면 인정한다.

 

뭐래.

 

그 사람도 존나 불쌍하다. 어쩌다가 나를 그렇게 좋아해서. 그런 사람이 고백하면 거절은 또 어떻게 하지. 너무 마음 아플 것 같은데.

 

누가 너한테 고백했어?

 

 

갑자기 들리는 지민의 목소리에, 태형과 정우가 파드득 놀라며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민이 한 입 베어 먹은 빵을 든 채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리로 와봐. 태형의 손짓에 지민이 가까이 다가갔다. 뭘 이렇게 묻히고 먹냐. 태형이 조심스레 입가를 털어내자, 지민도 엇 하며 벅벅 입가를 문질렀다.

 

 

누가 너한테 고백했냐니까?

 

아니. , 신경 쓰여

 

너 고백 받는 거 한두 번도 아니고.

 

 

지민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며 교실 앞 쪽으로 갔다. 뭐야, 질투 유발 작전이라도 쓰려고 했냐. 정우의 말에 태형이 피식 웃었다. 자조적인 웃음이었다. 나는 신경도 안 쓰는 애 건드려서 어쩌려고.

 

 

 

 

 

 

 

 

 

 

2. 질투

 

제 인생에 질투라는 단어는 평생 없을 줄 알았다고작 18년 밖에 안 살았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 사람을 좋아하는 자신이 누군가를 질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근데 내가 살다 살다 김태형 때문에 누군가를 질투할 줄이야.

 

지민은 저 멀리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두 남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래봤자 그들은 제 시선이 느껴지지도 않겠지만 그렇게라도 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아니 김태형 저 자식은 왜 저렇게 태어나서 주위에 좋아한다는 사람이 넘쳐 나냐고. 팔짱을 끼고 잔뜩 썩은 얼굴로 그들을 노려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지만 사실 지민도 할 말은 없었다. 어쩌면 자신도 태형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가 저 잘생긴 얼굴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기도 하고. 저 잘생긴 얼굴을 들이밀며 다정한 말만 하고 다정한 행동만 하는데 솔직히 누가 안 빠지고 배기겠냐고. 얼굴만 보고도 좋다고 졸졸 따라다니는 사람만 수십 명인데.

 

아니 근데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길래 이렇게 오래 걸리는데. 지민은 이제 질투를 넘어서 궁금해지기까지 했다. 아니 그냥 고백하면 거절하고 오면 되는 거 아니야? 헐 아 씨발 혹시 마음에 드는 건가... 아 고백 하는 게 아니라 정말 뭐 심도 깊은 이야기를 나누는 건가. 교복을 입은 걸 보면 사이비는 아닌 것 같은데. 아무리 사이비 수법이 다양해졌다 해도 교복 위장은 좀 아니잖아. 별의별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김태형이 뒤돌아 있어서 얼굴은 안보이지만 여자는 아주 잘 보였다. 여자의 얼굴만 보면 그들의 대화가 아주 화기애애했다. 그래서 더 짜증이 났다. 원래 김태형한테 말을 건 여자애들은 대부분 얼굴이 썩어 들어가거나 울상이던데. 아니 뭐 그렇다고 저 여자애도 그래야 한다는 건 아니고. 그냥 되게 분위기 좋아 보인다고. 지금 보니 여자가 좀 예쁘긴 하다. 저런 사람이 말 걸면 나 같아도 이야기 할 것 같아... 어쩐지 우울해졌다.

 

잠시 후, 태형은 여자와 헤어지고 지민에게 다가왔다. 기다림에 지쳐 쭈그려 앉아있던 지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태형의 말에 지민은 자연스레 태형의 옆에 붙었다.

 

추위가 다가올수록 해가 짧아졌다. 언제나 하교를 하는 시간은 같은데 확실히 여름에 비해 많이 어두워졌다. 하늘은 벌써 노을이 다 지고 어스름한 푸른빛만 남았다. 지민은 아까부터 물어보고 싶은 것투성이라 입이 근질근질했다. 자신을 힐끗힐끗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는지 태형이 고개를 돌려 지민을 바라봤다. ? 태형의 물음에 지민은 입만 달싹이다 결국 고개를 저었다.

 

옛날 같았으면 그냥 그 사람이랑 무슨 이야기 했냐고 물어봤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도저히 그러지를 못하겠다. 어떤 의도를 가지고 묻는 건지 자신이 뻔히 아는데 아무것도 아닌 척 물어보는 게 너무 양심에 찔렸다. 원래 짝사랑은 이렇게 다 눈치 보는 건가. 한숨이 나왔다.

 

 

내일 봐.

 

태형아. 아까 그 사람이랑 무슨 얘기 했어?

 

 

결국 집 앞에서 헤어지려고 할 때 물어봤다. 양심에 찔리고 자시고 궁금해서 못참겠다. 태형은 몸을 돌려 지민을 바라봤다.

 

 

무슨?

 

아까. 하교할 때 어떤 여자랑 얘기 했잖아.

 

아 별 거 아니야.

 

뭔데.

 

아니 그냥... 나한테 오는 이유가 다 거기서 거기지.

 

 

괜히 물어봤다. 지민은 애써 웃어 보이며 뒤로 돌았다. 그래, 내일 보자. 얼굴도 안 보고 집으로 헐레벌떡 들어왔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물어 본거지. 이렇게 금방 후회할거면서 왜 물어봤냐고... 지민은 지금 당장이라도 5분 전으로 시간을 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후회의 감정이 지나가니 부러움이 밀려왔다. 저렇게 당당하게 고백을 할 수 있는 게 너무 부러웠다. 나도 김태형을 친구로 만나지 않았다면 저렇게 바로 들이댈 수 있었을까. 마음만 먹으면 고백을 하고 거절하면 그대로 안 볼 사이로 남을 수 있을 텐데. 나도 누구보다 김태형을 좋아하는데. 친구 이상으로는 갈 수 없으니까이미 친구로 정의내린 사이니까, 그의 옆에 있어도 씁쓸했다.

 

기분이 울적해졌다. 김태형이 고백 받는 거 한두 번도 아니고 이제와 이러는 것도 웃겼지만 그랬다. 진짜 걔 하나 때문에 마음이 이렇게 치솟았다 꺼졌다 할 수도 있구나. 놀랍기까지 했다.

 

심란했다. 이제 곧 고3이고 공부도 지금보다 더 열심히 해야 하는데, 심란해서 펜을 잡지도 못하겠다. 지민은 침대에 몸을 던지고 뒹굴뒹굴 거리다 몸을 대자로 폈다. 고개를 살짝 돌리니 한 벽 전체에 쳐진 커튼이 보였다. 저 커튼 너머에는 창문이 있었다. 태형과 제 방에서 서로가 보이는, 집과 집 사이가 가장 가까운 창문이었다. 지민은 상체를 일으켜 앉아 커튼을 젖혔다. 마음이 너무 답답해서 어디에라도 털어놓고 싶은 심정이었다. 허공에라도 털어놓으면 마음이 좀 편안해질까. 지민은 창문을 열었다.

 

 

우와아악!!!!

 

와아악!!!! 아 진짜 깜짝 놀랐네!!!

 

 

지민은 맞은편에 보이는 태형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라 뒤로 넘어갔다. 창틀에 기대어 턱을 괴고 있던 태형과 딱 눈이 마주친 탓이었다. 괜히 민망해진 지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빽 소리를 질렀다. 너너너너 뭐야, 왜 그러고 있어! 지민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나 제 마음도 들켰을까 괜히 민망해졌다. 정말 도둑이 제 발 저린 꼴이 아닐 수 없었다. 태형도 마찬가지였다. 이때까지 한 번도 지민의 창문이 열린 적 없었는데 갑자기 열리며 보고 싶다 생각했던 얼굴이 떡하니 나오니 깜짝 놀랐다. 순간적으로 이때까지 이렇게 창문으로 지민의 창을 봐온 것을 들켰나 생각하기까지 했다.

 

지민은 자신이 괜히 오버해서 놀란 것 같아 민망해져서 헛기침만 흠흠 했다. 근데 너 왜 창문 열어놓고 그러고 있어? 지민의 물음에 태형이 당황해 동공까지 흔들렸다.

 

 

? ... , 별 보려고. 너는?

 

? .. 어어... , 오늘 달이 예쁘다 그래가지고.

 

 

둘은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감추며 하늘을 바라봤다. 구름이 잔뜩 끼어 달과 별이 보이지 않았다. 둘 사이에 잠시 적막이 돌았다. 지민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태형이가 너무너무 보고 싶어서 창문을 열었는데 진짜 태형이가 나왔네. 절대 그럴 리는 없겠지만... 태형이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으면 좋겠다.

 

나 사실 너한테 할 말이 있어서 창문 연거야태형 지민이 턱을 괸 채 마주보고 있다가 지민이 먼저 입을 열었다. ...뭔데? 뜸을 들이다 묻는 태형에, 지민은 입을 달싹이며 머뭇거리다 결국 입을 열었다.

 

 

태형이는 잘생겨가지고 너 좋아하는 사람 많잖아.

 

그런가.

 

그래. 내 페북이 인기 많은 것도 다 네 사진 보려고 오는 거고너 지나가면 사람들 다 쳐다보고 번호 물어보고. 오늘도 그랬잖아.

 

페북은 사람들이 전부 색시 춤 보러 들어오던데.

 

 어쨌든!

 

 

살짝 짜증스레 말을 뱉는 지민도 귀여워 태형은 큭 웃었다. 그래그래, 어쨌든마치 어린 아이를 달래는 듯한 태형의 말투가 마음에 안 들었지만 어쨌든 그게 중요한게 아니니까. 지민은 다시 말을 이었다.

 

 

만약... 만약 어떤 사람이 네 이상형이고 사귀자고 하면 어떡할 거야?

 

 

지민의 물음은 상상도 못한 것이라 태형은 살짝 당황했다. 태형과 지민은 서로 한 번도 이런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없었다기본적으로 지민은 이성에 대한 관심이 딱히 없었다. 누군가를 좋아한다거나사귄다는 것은 지민과 별개의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태형의 표정이 저절로 날카로워졌다.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지민도 그런 쪽에 관심이 생겼다는 것 아닌가. 태형의 입장에서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이었다. 갑자기 그건 왜. 말도 날카롭게 나가, 태형은 본인도 흠칫 놀랐다. 다행히 지민은 느끼지 못했는지 아무렇지 않아보였다.

 

 

... ... 물론 너를 좋아하고 너도 그 사람이 좋으면 사귈 수도 있는데...

 

......

 

네가 다른 사람이랑 사귀면... ...

 

내가 다른 사람이랑 사귀면 뭐.

 

내가 좀 외로울 것 같아.

 

 

많이 슬플 것 같아슬퍼서 집에서 하루종일 울 것 같아. 너를 못 볼 것 같아. 너를 보면 사귀고 있는 그 사람과 어떻게 다닐지 상상이 돼서, 너랑 더 이상 이렇게 같이 있지 못할 것 같아. 지민은 다다다 뱉고 싶은 말을 꾹꾹 눌러 참았다. 태형이 지그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 눈이 어쩐지  속을 헤집는 느낌에 살짝 시선을 피했다. 저 눈을 보면 자신도 모르게 진심을 말할 것 같았다갑자기 그런 말을 왜 해? 태형이 물었다지민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냥 말 하지 말걸이렇게 계속 꼬리를 물다보면 제 속마음 들키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질투가 나서 그렇다는 말을 어떻게 해. 지민은 부러 입을 꾹 다물었다. 태형은 입을 열지 않는 지민에 오기가 생겼는지 집요하게 물어댔다.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하는데? 색시 원래 그런 거 관심 없었잖아.

 

......

 

말해봐. 내가 뭐 색시 외롭게 한 적 있어? 아니면 외롭다고 느낀 적 있어?

 

그건 절대 아니야.

 

내가 누구랑 썸 타거나 사귄 적도 없는데 갑자기 그런 말을 왜 해.

 

......

 

색시가 자꾸 그런 말 하면 속상하다. 나는... ...

 

 

태형이 결국 입을 다물었다. 지민은 갑자기 가라앉은 분위기에 힐끔힐끔 태형만 쳐다봤다. 그냥 질투 나서 한번 틱틱 거려본 건데, 생각보다 태형의 반응이 너무 진지해서 당황스러웠다. 그냥 별 뜻 없이 한 말이니까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 지민의 말에 태형은 초점 없이 허공만 보던 눈을 돌려 지민을 바라봤다.

 

 

자꾸 예쁜 사람들이 와서 번호 물어보고 대시하고 그러니까... 그 중에 네 취향 한 명 없겠나 싶고. 어쩌면 사귈 수도 있는데 만약에 네가 누구랑 사귀면 그냥... 그냥 외로울 것 같단 거야. 딱히 별 뜻은 없었어.

 

관심 없어 난. 내 취향인 사람이 나한테 대시한 적 없어.

 

... 좋아하는 사람 있어?

 

 

지민은 자신이 물어봐놓고 자신이 놀라 입을 턱 막았다. 태형은 또 생각지도 못한 물음에 놀란 표정으로 지민을 멍하니 바라봤다. 지민은 애써 침착하게 표정관리 했다. 아니, 이게 어때서. 친구 사이에 물어볼 수도 있는 거 아닌가.

 

태형은 지민을 가만히 쳐다봤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뭐지. 갑자기 사귀니 뭐니 관심 없던 이야기를 하질 않나, 좋아하는 사람이 있냐고 물어보질 않나. 아무리 봐도 여태 봐왔던 지민과는 달랐다. 점점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절대 아니었으면 하는 가정이 머리에 자꾸 맴돌았다. 박지민은 김태형의 마음을 알아차렸을 수 있다는 가정.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사실대로 말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거짓말을 해야 하는 건지, 아니 그 전에 지민은 뭘 알고 저런 말을 하는 건지 아니면 정망 순수하게 궁금해서 묻는 건지 조차 알 수 없어 답답했다. 태형은 긴장감에 마른침 한 번 삼키고 입을 열었다.

 

 

만약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색시한테 말해주길 원해?

 

 

태형의 역질문에 지민은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혼란스러움에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왜 굳이 저렇게 말하는 거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가.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태형의 시선이 올곧게 자신을 향해 있었다. 차마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기 힘들었다. 지민 역시 태형의 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니.

 

 

그의 입에서 다른 사람 이름이 나오는 것을 듣기 싫었다. 지민은 아직 겁이 많은 첫사랑이고, 짝사랑이었다.




















---


정말 완결이 얼마 안남아서

빨리 들고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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뷔민 남고생의 일상 11

길/남고생의 일상 (完)



1. 일상

 

눈이 번쩍 떠졌다. 지민은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마자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부산스레 휴대폰을 찾아 시간을 보니 8시였다. 아 뭐야, 8시 밖에 안됐어! 지민은 속으로 빽 소리를 지르며 침대를 데굴데굴 구르다 대자로 쭉 뻗었다. . 숨을 깊이 내쉬었다. 별 거 아니다. 그냥 옛날처럼, 평소처럼 주말에 태형과 놀러가는 것뿐이었다.

 

... 사실 평소처럼은 아니었다. 그 때와 지금이랑은 마음가짐 자체가 다르잖아!! 지민은 그대로 엎드려 엉엉 우는 소리를 냈다. 한번 마음 깨닫고 나니 도대체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원체 거짓말을 못하는 지민이었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다가는, 안 그래도 차고 넘치는 마음이 그대로 흘러넘쳐서 태형에게 닿을지도 몰랐다.

 

아 씨발. 지민은 자신의 마음이 들켜버린 상상을 하니 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어쩜 그렇게 좆같을수가. 만약 정말로 들켜버린다면 쪽팔려서 그대로 뒤져버릴지도 몰랐다. 그것만은 절대 안 돼... 지민은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방을 나왔다.

 

2시에 만나 영화를 보고 저녁을 먹으러 가기로 했다. 평소라면 정말 별 것도 아닌, 여느 때와 다름없는 주말이다. 그저 친구와 가벼운 마음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뿐이다. 그런데 왜 꼭 데이트 같냐고... 지민은 평소보다 더 오랜 시간 샤워하고, 얼굴에 무려 스킨로션을 발랐으며 옷장 앞에서 장장 1시간 동안 서서 옷을 꺼냈다 넣었다 반복했다. 존나 미쳤지, 이게 뭐하는 거야. 주접떨고 앉아있네. 제 입으로 중얼중얼 스스로를 욕하면서도 도저히 멈출 수 없었다. 고등학생이 교복이면 됐지 무슨 옷이 더 필요하냐고 생각했던 지난날의 자신을 매우 쳐버리고 싶었다. 아무리 옷장을 뒤져봐도 입을 옷이 없었다. 아니 그냥 티에 청바지에 후드집업만 걸치면 되지 무슨.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마음은 그게 되지 않았다. 제 속 저 깊숙한 곳에 김태형에게 잘 보이고 싶다는 티끌만한 마음은 남아 있나보다. 결국 입은 것은 주황색 맨투맨과 청바지, 뒤로 쓴 캡이었다.

 

시간 맞춰 집을 나오니 밖에서 태형이 기다리고 있었다. 집에서 막 나오는 지민을 발견한 태형이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지민은 자신도 모르게 활짝 웃으며 똑같이 손을 부웅부웅 흔들려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손을 내렸다. 애써 무심한 표정을 지으며 밖으로 나오는 지민을 쭉 본 태형은 자연스럽게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어깨에 묵직하게 내려앉은 그의 팔에 지민은 어색하게 태형의 팔을 잡아 내렸다. 태형이 의아한 표정으로 지민을 내려 봤다.

 

 

네 팔이 얼마나 무거운지는 아냐? 내가 너 때문에 키가 안 큰 거야, 분명.

 

, 미안.

 

 

지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다 또 흡 숨을 들이마실 정도로 놀랐다. 태형은 아무것도 모르고 순진하게 웃으며 맞잡은 손을 들어 올려 보였다. 이건 괜찮지? 해맑게 웃으며 제 손을 꽉 잡은 채 살살 흔들기까지 하는데 지민은 그 앞에서 안 돼라고 말 할 수 없었다. 커다란 태형의 손이 지민의 손을 다 덮었다. 지민은 제 손바닥에 느껴지는 단단한 태형의 손을 내려다 보며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다. 아니, 사실은 고민도 아니었다. 이미 머리가 백짓장처럼 새하얘져서 제대로 된 사고도 못할 정도였다. 눈앞이 핑핑 도는 기분이었다. 우리가 옛날에도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손을 잡기도 했나.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사소한 이런 행동마저 심장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팔딱거리는데, 옛날에 제가 도대체 어떻게 행동했었는지 모르겠다. 아니 이것도 안 돼 하면서 손을 빼기에는 타이밍이 늦었다. 제 긴장 때문에 손바닥에 땀이라도 날까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어우 씨발 진짜... 지민은 눈을 꾹 감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땀아 나오지 마라, 심장아 제발 나대지마, 이게 뭐라고 니가 미친 듯이 뛰니, 옛날부터 이랬잖아 새삼스레 너 왜 그래... 정말 이러다 길바닥에 쓰러져도 이상할 게 없을 것 같다. 너무 떨려서 쓰러져...

 

 

우리 되게 오랜만에 영화 본다, 그치?

 

? 어어...

 

뭘 그렇게 멍 때리고 있어, 위험하게.

 

... 아무것도.

 

 

지민의 시원찮은 대답에 태형은 결국 두 걸음을 멈추고 홱 지민 쪽으로 온 몸을 돌렸다. 지민도 자연스레 몸을 돌려 태형을 바라봤다. 콩깍지라는 건 무섭다. 원래도 태형이 잘생겼다고 생각했었지만 거기서 더 잘생겨 보일 수도 있다니 이건 반칙이다. 내가 걔를 바라보는 마음이 달라졌다고 해서 생긴 것도 달라 보인다니, 사랑이란 건 생각보다 더 무서운 것이었다.

 

지민은 말없이 태형을 올려다봤다. . 라고 물어보려던 입이 제 이마를 덮는 손에 꾹 다물렸다. 태형은 심각한 표정으로 지민의 이마를 짚었다. 살짝 갸웃하며 이마를 짚은 손을 좀 더 내려 볼을 감쌌다. 지민은 순간 숨 쉬는 것을 잊을 정도로 멍해져서는 태형만 바라봤다. 쓰읍... 아닌데. 태형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손을 내렸다. , ? 지민은 약간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감추며 물었다. 색시가 계속 멍 때리고 그러니까 어디 아픈 줄 알았지. 태형은 지민의 머리를 가볍게 두어 번 쓰다듬으며 말했다. 안 아프면 다행이고. 흘리듯 말한 태형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지민은 태형이 움직이는 대로 따랐다. 다른 한 손을 들어 제 머리를 두어 번 쓸었다. 정말 사소한 행동들이었다. 언제나 태형이 저에게 했었던 작은 행동들. 이제 와서 그것이 달라 보이기도 했지만 새삼스레 깨닫기도 했다. 태형은 정말 섬세하고 배려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이거 진짜 재밌대. 아 어떡해, 벌써부터 설레.

 

 

표를 끊어서 지민에게 다가온 태형은 정말 설레는 듯 발까지 동동 굴렀다. 지민은 의자에 앉은 채 그런 태형을 보며 작게 웃었다. 태형도 지민의 맞은편에 앉았다. 영화 상영 시간까지 20분 정도 남았다. 내가 팝콘 사올게. 지민은 괜히 어색해질 것 같아 자리에서 일어나자, 태형도 따라 일어났다.

 

 

, 같이 가자.

 

그냥 앉아 있어. 내가 갔다 올게.

 

어차피 팝콘 줄 길어서 사면 바로 들어가야 할 걸. 같이 가자.

 

 

자 갑시다. 태형은 지민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지민의 팔 틈에 손을 끼워 넣고 걸음을 옮겼다. 지민은 순간 당황했지만 결국 태형이 이끄는 대로 끌려갔다. 팝콘 단짠으로 가자. 줄을 서면서 하는 말에 지민이 프스스 웃었다. 나는 카라멜 팝콘, 색시는 오리지널.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다시 하는 말에 지민은 결국 끅끅 소리 내어 웃으며 태형의 팔에 머리를 살짝 기대었다. 그러다 헛 정신을 차리고 머리를 뗐다. 지민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내가 평소에도 이렇게 많이 치댔었나. 앞으로 이런 무의식 행동들이 나중에 제 사심 채우는 행동으로 변할까봐 무서웠다. 안 돼 그럼 안 돼, 태형이의 순수한 우정을 그런 식으로 변질시키고 그럼 안 돼. 지민은 어색하게 웃으며 팔짱끼고 있는 태형의 손을 잡아 살짝 떼어냈다. 태형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팝콘과 콜라가 나오고 지민은 자연스레 팝콘을 들었다. 태형이 양손에 콜라 한잔씩 들었다. 팝콥의 고소한 냄새와 달달한 냄새가 섞여 났다. 자연스레 콧속으로 들어오는 냄새에 지민은 자신도 모르게 헤헤 웃었다. 태형은 해맑게 웃는 지민을 보며 따라 웃었다.

 

 

저기... 죄송한데요.

 


갑자기 다가온 여자에 지민과 태형의 두 눈이 의아함으로 바뀌었다. 그 쪽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그러는데 혹시 번호 주실 수 있으세요? 태형을 보며 말하는 여자에, 지민은 자연스럽게 몸을 뒤로 뺐다. 팝콥을 좀 더 위쪽으로 들어 입가를 가렸다.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 사람도 처음 보는 사람한테 제 속을 이야기 하는데 나는 뭐하나. 나는 왜 이렇게 마음을 꽁꽁 숨겨야 하나. 태형에게 고백할 자신이 없어서인지, 혹시나 고백했다가 차이면 친구도 못할까 불안해서인지, 아니면 둘 다인가.

 

괜히 발장난만 툭툭 하며 바닥을 보는데 누군가 자신을 치는 느낌에 고개를 들었다. 그럼. 태형은 고개를 살짝 숙여 여자한테 인사 한 후, 지민에게 고개 짓으로 상영관 입구를 가리켰다. 얼떨결에 태형의 뒤를 따르던 지민이 힐끗 뒤를 바라봤다. 여자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여자한테 뭐라고 했어? 지민이 넌지시 물었다. 태형은 빙글 웃기만 할 뿐, 답해주지 않았다. 지민은 괜히 조급해져 태형의 소매를 살짝 잡아당겼다.

 


? 뭐라고 했냐니까.

 

뭐라고 했긴, 관심 없다고 미안하다고 했지.

 

그래?

 

. 그게 그렇게 궁금했어?

 

 

지민보다 앞서가던 태형이 고개를 살짝 돌려 지민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 . 지민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괜히 팝콘 하나 입 안에 넣었다. 고소한 향과 함께 짭조름한 맛이 입 안에 퍼졌다.

 

 

나한테 색시밖에 없어, 알잖아.

 

 

태형이 웃으며 하는 말에 지민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고 아무렇지 않게 걸어가는 저 뒷모습에다 대고 그냥 소리 지르고 싶다. 너는 내가 무슨 마음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는 아냐고, 내가 지금 너를 어떻게 보는지는 알고 그런 말을 하는 거냐고. 저 멀리 가던 태형이 반쯤 뒤돌아 지민을 바라봤다. 안 와? 태형의 한마디에 지민은 결국 걸음을 뗐다.

 

상영관에 들어가니 한창 광고 중이었다. 영화가 개봉한지 좀 지나서 안에 사람들이 많은 편은 아니었다. 태형이 먼저 자리에 앉고 그 옆에 지민이 뒤따라 앉았다. 커다란 스크린이 한 눈에 들어왔다. 콜라 여기 둘게. 태형이 컵홀더에 콜라를 두었다. 입 안이 텁텁했던 지민이 바로 콜라에 손을 뻗으면서 두 사람의 손이 살짝 스쳤다. 지민은 그의 손가락이 닿자마자 얼어붙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콜라를 한 모금 들이키고 팝콘 통에 손을 넣었다가 또 한 번 태형의 손과 닿았다. 지민은 움찔하며 태형을 힐끗 쳐다봤다. 태형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팝콘을 입 안에 넣고 또 팝콘 통에 손을 넣었다. 한 번 신경 쓰이니 온 신경이 그 쪽으로 쏠리는 기분이다. 지민은 아까부터 손등과 손가락이 슬쩍슬쩍 스치는 것이, 기분이 묘했다. 태형의 손가락이 닿을 때마다 전기가 통하는 듯 찌릿찌릿했다. 심장이 쿵쿵쿵 빨리 뛰기 시작했다. 지민은 애써 무시하느라 곤욕이었다. 영화에 집중해야지, 집중. 지민은 괜히 인상을 쓰며 스크린을 바라봤다. 다행인지, 바로 조명이 꺼지면서 영화가 시작되었다.


영화는 가볍게 볼 수 있는 영화였다. 사실 영화 보자는 태형의 말에 무슨 영화 보는지도 모르고 덥썩 약속을 잡은 터라, 예고는커녕 누가 나오는지조차 모르고 보는 건데 꽤 재밌었다. 지민은 금방 영화에 빠져들었다. 이렇게나 무언가에 집중을 한 것은 오랜만이었다. 지민은 눈도 떼지 않고 집중해서 보다 갑자기 입 안에 무언가 쑥 들어오는 느낌에, 깜짝 놀라 몸을 파드득 떨며 고개를 돌렸다. 태형이 짓궂은 표정으로 실실 웃고 있었다. 맞물린 잇새로 팝콘이 바사삭 터졌다. 카라멜 특유의 단내가 입안에 맴돌았다. 갑자기 태형이 훅 다가와 지민이 흠칫 놀라며 몸을 뒤로 뺐다. 태형이 자연스레 손으로 목을 감쌌다. 태형의 입술이 귓가에 닿았다. 온 몸이 뻣뻣해졌다. 너 입에 벌레 들어 갈까봐 팝콘 넣어줌. 작게 속삭이고 멀어지는 태형을 멍하니 바라보던 지민이 합 입을 다물었다. 태형은 여전히 장난기어린 웃음을 달고 있었다. 지민은 괜히 태형을 노려보며 팝콘 하나 더 입 안에 넣었다. 나 카라멜 팝콘 싫어하는 거 알면서. 고소한 맛 고른다고 했는데 카라멜이었냐. 지민의 타박에 태형이 능청스레 대답했다.

 

영화에 집중하고 있었는데 태형의 사소한 행동 하나에 파스스 무너졌다. 다시 그를 의식하기 시작했다. 고개를 살짝 돌려 태형을 바라봤다. 스크린에서 나오는 불빛에 비춰진 태형의 옆태는 자신도 모르게 함성이 나올 정도로 잘생겼다. 영상에 따라 번쩍번쩍거리는 불빛들이 태형의 얼굴을 어째 더 화려하게 만들어주는 느낌이었다. 문득 아까 태형에게 번호를 물어보던 여자가 생각났다. 어쩌면 자신이 여기서 태형을 봤더라도 번호 한번쯤은 물어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태형은 눈에 띄었다. 하긴, 이 정도는 되어야 페북스타 소리 듣지. 지민은 혼자 든 생각에 키득키득 웃었다. 태형은 페북스타라는 소리를 좋아하지 않았다. 무슨 중2병도 아니고 오글거린다고 했었다. 그나마 태형이가 페북을 안 해서 다행이지 만약 활발하게 SNS를 하는 애였다면 진즉 이불 킥을 몇 번이나 했을 것이다.

 

태형과 눈이 마주쳤다. 지민은 놀랐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우연히 눈 맞은 척 살짝 웃어보였다. 태형이 고개를 가까이 해 작게 중얼거렸다. 내가 너무 잘생겨서 영화에 집중 안 되긴 하지? 태형의 말에 지민은 제 얼굴에 열이 확 오르는 것을 느꼈다. 당황스러웠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스크린으로 돌렸다. 헛소리 하지 말고 영화나 봐. 옆에서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귀까지 화끈화끈해지는 것 같다. 영화는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재밌었어? 태형의 물음에 지민은 멍하니 고개만 끄덕였다. 재미있는지 없는지 판단할 수 없을 정도로 본게 없다. 중반부터 내용은 다 놓치고 머리속에 태형의 얼굴과 했던 말만 둥둥 떠다녔다. 대체 김태형이 나한테 뭘 했길래 이렇게 계속 생각나는 거지. 그런데 또 생각해보면 별 거 없다. 그냥 내가 이상한거지 뭐. 지민은 아까부터 정신이 없는 자신의 상태에 후 한숨만 나왔다. 그 때 제 어깨를 감싸오는 느낌에 지민이 태형을 바라봤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길래 내가 몇 번을 말해도 대답이 없어.

 

? 무슨 말 했어?

 

저녁 뭐 먹을거냐고.

 

...

 

뭐야, 내가 옆에 있는데 색시는 자꾸 다른 생각만 하고.

 

그런 거 아니야.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색시가 먹고 싶은 거.

 

팝콘 때문에 딱히 밥 생각은 없는데.

 

 

쓰읍. 지민의 말에 태형이 짐짓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지민을 바라봤다. 지민의 어깨를 둘렀던 손을 그대로 내려 허리를 쓱 쓸어내렸다. 허리께에 퍼지는 간지러움에 지민은 온 몸을 꼬며 태형을 밀쳤다. 아 간지러워! 꽤나 세게 밀쳐졌는데도 뭐가 그리 좋다고 실실 웃는지 모르겠다.

 

 

허리에 살이 하나도 없어. 색시 너무 말라서 안돼. 뭐라도 좀 먹자, ?


네가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지민이 태형의 허리에 팔을 확 둘렀다. 지민의 힘에 태형이 살짝 끌려왔다. 지가 더 말랐구먼 누가 누구한테 말랐다는 거야. 지민은 중얼거리며 태형의 허리를 위아래로 쓸었다. 색시야, 간지러워. 갑자기 낮게 깔리며 진지해진 태형의 목소리에 지민은 손을 떼며 자연스럽게 고개를 들어 태형을 바라봤다가 흠칫했다. , 미안. 간신히 사과를 했지만 지민은 어쩐지 태형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자신을 오롯히 바라보는 태형의 시선이, 마치 덫처럼 제 시선을 옭아맸다. 태형의 눈빛은 방금 전 그의 목소리처럼 진지했고, 깊었다. 아까처럼 장난스럽지 않았다. . 지민은 턱턱 막힌 목을 간신히 열어 말했다. 순간적으로 목이 잠겨 살짝 떨리긴 했지만 그렇게 신경 쓸 정도는 아니었다. 태형은 말없이 천천히 손을 뻗어 지민의 손을 잡았다. 맞닿은 두 손바닥과 서로 얽힌 손가락이 꽉 맞물렸다. 맞잡은 손에 태형이 아프지 않을 정도로 힘을 꽉 주었다. 얄쌍하지만 단단한 태형의 손힘이 그대로 느껴졌다. 지민은 피식 웃었다. 웃겼다. 그저 손을 잡은 것뿐인데 말도 안 되게 안도감이 들었다. 옛날부터 익숙하게 해 온 행동들에 대한 편안함이었다. 남자 둘이서 손을 잡는 것에 이런 안도감이 든다는 게 새삼 웃겼다. 생각해보면 그랬다. 어떤 친구가 같은 거 달린 불알친구한테 색시라고 부르며 손을 잡는 것과 안는 것에 거부감이 없으며, 금지야 옥이야 만지면 부서질까 놓으면 날라갈까 조심조심 대하느냔 말이다. 지민은 어렴풋이 느꼈다. 태형과 저의 사이는 그저 친구라고 하기에는 그 경계선을 한 발짝 넘어섰다. 그래서 아슬아슬했다. 하지만 그것이 태형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진 저 때문인지, 애초부터 자신을 그렇게 대했던 태형이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그냥 집에 갈까. 지민의 말에 태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말없이 영화관을 나섰다. 그러나 맞잡은 두 손은 여전했다. 지민은 그제야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원래는 안 그랬는데 정말 마음에 품었다고 이런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 다 조심스러웠다. 지민은 태형의 눈치를 보다 슬금슬금 그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내기 시작했다. 꽉 잡힌 손이 꼬물꼬물 움직이자 태형은 지민을 바라봤다. ? 태형의 물음에 지민은 손에 힘을 주어 확 뺐다. 온기 가득하던 손이 바깥공기에 순식간에 식었다. 지민은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하지만 지민은 온 몸으로 느껴지는 한기에 몸을 떨기 시작했다. 추위도 많이 타면서 이렇게 입고 오면 어떡해. 태형은 작게 타박하며 자신이 입고 있던 후드집업을 벗었다.

 

 

아니야, 난 괜찮아.

 

괜찮기는. 이도 떨리기 시작하면서. 빨리 입어.

 

괜찮다니까.

 

쓰읍!

 

 

태형은 부러 화난 표정을 지으며 후드집업을 지민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태형이 입어도 많이 컸던 후드집업은 지민의 어깨를 두르며 지민을 폭 감쌌다. 태형은 작게 키득거리며 지민의 팔을 잡아 직접 옷을 입혀주었다. 두 손 다 직접 넣어준 태형은 지퍼도 야무지게 잠가준다. 지민은 너무 길어 나폴 거리는 소매 때문에 두 팔을 살짝 들었다. 옷이 지민이 두 손을 넘어서 팔랑거렸다. 아빠 옷 뺏어 입은 아들 같아. 태형이 웃으면서 하는 말에 지민이 태형을 째릿 노려봤다. 그러나 그의 말에 반박하지는 못했다. 태형에게도 많이 컸던 후드집업이 지민에게 맞을리가 없었다. 옷이 워낙 커서 축축 처졌다. 기장은 엉덩이를 넘어서 허벅지 거의 반을 가렸다. 예쁘네. 태형이 툭 내뱉은 한마디에 지민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니 눈에는 지금 이게 이쁘냐? 지민은 두 팔을 홱홱 흔들며 말했다. 지민의 팔에 따라 많이 남는 소매가 팔랑거렸다.

 

 

그러엄! 색시는 뭘 해도 예쁘지.


... 말은.

 

색시 추우니까 빨리 집에 가야겠다.


 

태형은 자연스레 팔을 둘러 지민의 반대쪽 팔뚝에 손을 올렸다. 태형의 품 안에 폭 파묻힌 지민이 살짝 놀라 태형을 올려다봤다. 키 차이가 그렇게 안 난다고 생각했는데 키는 1cm가 다르다고, 5cm는 족히 차이 나 올려다 볼 수밖에 없게 된다. 지민은 입술을 감춰 물었다. 18년 동안 정말 아무렇지 않았는데, 매일 보던 얼굴이 맞는데. 어쩌다 이렇게 갑자기 김태형이 좋아지게 된 거지. 지민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볼 거 다 보고 웬만한 김태형의 치부도 다 알고 있는데, 더 이상 겉만 잘생긴 이 애한테 이렇다 할 환상을 가질 일도 없는데. 내가 대체 얘의 뭐 때문에 말도 안 되게 갑자기 반해버린 거지.

 

지민은 태형의 옆구리를 살짝 밀어 태형에게서 벗어났다. 태형이 의아한 표정으로 지민을 바라봤지만 지민은 신경 쓰지 않고 앞을 걸었다. 태형이 재빨리 지민의 옆에 다가갔다. 색시야, 뭐 안 좋은 일 있어? 태형의 물음에 지민이 고개를 저었다. 안 좋은 일은 무슨, 오늘은 너무 행복했다. 영화도 재밌었고, 같이 본 사람도 좋았다. 팝콘은 맛있었고, 태형은 여전히 자신에게 잘해줬다. 김태형 번호를 물어본 여자가 좀 걸리긴 했지만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니고 상관없었다. 모든 게 좋았고, 모든 게 별 다른 거 없이 평범했다. 딱 한 가지 다른 건 지민의 마음뿐이었다.

 

 

색시야,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갑자기 제 어깨를 두어 번 치더니 어디론가 홱 뛰어나가 버리는 태형에, 지민은 이렇다 할 말도 놓쳐 버리고 멍하니 태형의 뒷모습만 바라봤다. 갑자기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지민은 그를 잡는답시고 어정쩡하게 뻗은 팔을 그대로 물려 팔짱을 꼈다. 사람 이렇게 혼자 남겨두고 가버리기 있냐. 지민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태형의 후드집업은 따뜻했다. 처음 태형이 후드집업을 어깨에 둘러줄 때, 갑자기 확 밀려온 온기에 몸이 풀어질 정도였다. 옷 자체가 따뜻한 것도 있지만, 태형이 오래도록 입어 그의 온기가 가득 남아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제는 태형의 온기 대신 제 온기가 가득 남아있겠지만, 그래도 좋았다. 김태형 닮아서 따뜻하네. 지민은 팔을 살짝 들었다. 여전히 긴 소매는 축 늘어져 팔랑거렸다. 멀리서 보면 내 꼴 우습겠지. 잠시 상상한 지민은 큭 웃었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에 활짝 올라갔던 입꼬리가 축 처졌다.

 

김태형은 따뜻한 사람이다. 다정한 사람이고 사랑이 많은 사람이다. 오랫동안 그와 함께 다니면서 느낀 것이었다. 지민은 더 이상 예전처럼 그를 친구로 볼 수가 없는데, 태형이 하는 모든 행동들은 오랜 친구의 정이다. 일반적으로 친구에게 하기에는 태형의 행동이 과하긴 했지만 태형이라서 납득이 가는 행동들이었다. 태형이는 기억도 잘 안 나는 어린 시절 때부터 자신한테 그렇게 했으니까. 친구의 사랑을 그런 식으로 표현하는 태형이니까. 태형은 변함이 없었다. 문제는, 마음이 변해버린 지민 자신이었다.


울적해져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던 지민의 볼에 무언가 닿았다. 차가운 공기에 홍조가 맴돌던 볼에 따땃한 것이 닿으니, 지민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돌아봤다. 태형이 컵 두개를 양 손에 들고 히 웃고 있었다. . 태형이 컵 하나를 내밀었다. 지민은 두 손으로 조심히 받았다. 두 손 가득 퍼지는 따뜻한 기운에 갑자기 울컥했다. 태형은 이렇게 좋은 사람이다. 인생의 모든 길을 함께 해 온 애였다. 짝사랑이나 친구를 떠나서, 지민의 인생 그 자체라고 자신있게 얘기할 수 있을 정도로 태형이 소중했다. 그에 비해 자신의 마음은 이제 갓 태어난 조그만 감정일 뿐이었다. 이 조그만 감정 하나 때문에 친구 사이가 흔들리고, 결국 태형과 남보다도 못한 사이가 되는 건 싫었다.

 

. 지민이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몇 번이나 바뀌었는지 모를 신호는 또 한 번 초록불로 바뀌었다. 태형이 먼저 걸음을 옮기고 지민이 그의 옆을 따랐다. 이 신호등을 건너고 조금 걷다가 오른쪽으로 꺾으면 지민과 태형이 사는 주택단지가 나왔다. 태형은 지민을 힐끗 보다가 슬쩍 지민 쪽으로 손을 뻗었다. 지민이 살짝 옆으로 비켰다. 태형이 결국 걸음을 멈추고 지민 쪽으로 완전히 돌아 지민을 바라봤따. 색시야. 태형의 부름에 지민도 몸을 완전히 돌려 태형을 바라봤다.

 

 

나 피하지 않기로 했잖아.

 

안 피해.

 

이제는 거짓말까지 해? 나 거짓말 하는 거 싫어하는 거 알지.

 

거짓말 아니야.

 

또 거짓말. 이 입 진짜.

 

 

태형은 지민의 입술을 꽉 잡고 살짝 흔들었다. 우븝! 지민이 아픔에 몸부림 쳤지만 허리도 꽉 감고 있는 태형 때문에 결국 그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태형이 잡고 있던 손을 떼자 지민의 입 주변이 불긋해졌다. 태형은 자신도 모르게 살짝 웃었다. 이 웃음도 지민에게 들키면 또 바락바락 댈게 분명했기에 입꼬리만 살짝 올린 수준이었지만.

 

태형은 지민의 한 손을 잡아 올려 엄지로 살살 쓸었다. 그의 온기가 지민의 손을 감쌌다. 갑자기 왜 그래. 태형이 작게 말했다. 지민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사실 지민도 혼란스러웠다. 아직 제대로 영글지도 않은 풋사랑이었다. 생전 겪어본 적도 없던 첫사랑이기도 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태형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머리로는 태형과 오래도록 같이 있고 싶고, 그러기 위해서는 제 마음을 접는게 맞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으로는 그게 안 되었다. 정말 이 조그마한 마음 가지고 이러는 거 미련한 짓 인줄 잘 알면서도 어째 이 작은 마음 하나 접을 수 없는 건지. 볼 거 다 본 불알친구한테도 휴지조각처럼 쉽게 흔들리면서 어째 자신이 접으려고만 하면 철판이다.

 

김태형. 지민의 부름에 태형이 지민을 바라봤다. 그의 눈을 보기만 해도 숨이 막힌다. 콩깍지가 씐 눈이라 그렇게 보이는 건지, 아니면 정말 김태형이 자신을 그렇게 보고 있는 건지, 제대로 판단할 수 없었다. , 생각할 것도 없이 전자겠지만.

 

이 일은 혼자서는 절대로 해결할 수 없었다. 혼자서 어떻게 해보려고 했는데 제가 건들면 건들수록 마음은 주체 없이 커져만 갔다. 태형은 항상 저에게 다정하고 좋은 친구지만 그런 그의 행동은 자신을 착각하게 만들었다. 아닌 걸 알면서도 마음이 벌렁벌렁 거렸다.

 

생각해보면 저와 김태형 사이에 경계라는 게 딱히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자신이 이렇게 혼란스러운 거 아닌가, 그렇게 생각했다. 김태형은 자신에게는 별 대수롭지 않게 하는 행동을, 다른 친구들에게는 절대로 하지 않았다. 자신 역시 태형이 어떤 짓을 해도 딱히 신경 쓴 적 없었지만 만약 다른 친구들이 자신에게 똑같이 행동한다면 경악할 것 같았다. 그래, 김태형이 하던 행동들은 절대 친구들에게 할 행동이 아니었다.

 

지민은 태형의 손목을 잡아 천천히 떼어냈다. 태형의 표정이 의아하게 바뀌었다. 툭 하고 떨어진 손에서 공허함이 느껴졌다. 갑자기 사라진 온기에 차가운 공기만 스쳐가, 태형은 살짝 주먹을 쥐었다.

 

 

김태형.

 

... .

 

너 다른 애들한테도 이래?

 

?

 

정우한테, 이한한테, 지혁이한테도 나처럼 대해줘?

 

무슨 말이야.

 

우리 친구 맞지?

 

... 색시야.


색시라는 그 말도.


......

 

하지마.

 

 

태형은 방금까지만 해도 표정에 남아있던 웃음기를 싹 걷었다. 평소와는 달랐다. 지민은 단호했고, 옛날에 가끔 투정부리던 느낌이 아니었다. 지민이 진지하게 물어오는 순간부터 태형 역시 장난스럽게 넘길 때는 지났다는 걸 깨달았다. . 태형은 숨을 깊게 내쉬며 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지민은 그런 태형의 행동에 움찔 몸을 떨었다. 제 앞에서는 원체 그런 행동을 한 적이 없었지만 저건 뭔가 불만이 있거나 제가 원하는 대로 일이 풀리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니까, 지금 태형은 화가 많이 났다는 것이었다. 태형을 보고 다시 한 번 깨달았다. 태형은 여태까지 자신한테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화를 낸 적이 없었다. 자신한테는 언제나 배려 넘쳤고, 다정했으며, 조심스러웠다.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눈물이 날 것 같아, 올라오는 울음을 애써 참았다. 목 부근에 뭐가 턱 막힌 것처럼 먹먹하고 뜨거웠다. 도대체가 이유를 모르겠다. 왜 그랬을까. 똑같은 친구일 뿐인데 왜 저한테는 그렇게 대했을까. 왜 자신한테만 그렇게 대했을까. 내가 첫 친구였기 때문에? 제일 오래 사귄 친구기 때문에? 그 뭐가 이유가 됐던 지금 자신의 감정으로는 절대로 태형을 친구처럼 볼 수 없다.

 

태형을 잃고 싶지는 않았다. 이 마음을 다시 친구간의 정으로 바꿔야했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내 봐도 이런 방법 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태형이 자신한테 너무 다정하게 대해줘서 잠시 착각하는 거라고, 그의 다정함이 친구와 그 이상의 감정을 구분하던 벽을 천천히 녹힌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가 항상 부르던 그 색시가, 다른 친구들한테는 없는 자신만의 애칭이 자신을 이렇게 주체 없이 허물어뜨렸다. 그러니까 그 말만 없으면. 그 행동만 없으면.

 

 

친구 사이에도 선이란 게 있잖아.

 

... 색시야.

 

유치원 때 별명, 그 정도면 오래 우려먹었어. 머리도 굵어졌으니까 알아먹겠지.

 

갑자기 왜 그래, 진짜.

 

솔직히 알잖아. 이 나이 먹고 그런 별명 이상한 거. 그러니까 남들처럼 평범하게 하자 우리.

 

우리 사이가 평범한 게 아니란 거야?

 

 

태형의 말투가 딱딱해지기 시작했다. 떨리는 것 같기도 했다. 아니, 모르겠다. 지민은 지금 눈 앞도 핑글핑글 돌고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을 뱉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감정을 피하겠다고, 되도 않는 말만 지껄인다.

 

 

교복까지 갖춰 입은 남자 고딩 두 명이 손잡고, 껴안고, 색시라고 부르고, 너 다른 애들한테는 그렇게 안하잖아. 나한테만 그러잖아.

 

그 애들이랑 색시랑은 다르지.

 

또 색시! 색시! 나 박지민이야. 대체 언제까지 너한테서 색시 소리 들어야 하는데? 나이 먹었으면 먹은 만큼 생각 좀 해!

 

......

 

우리 사이가 평범한 게 아니라고 물었지.

 

......

 

네가 애초에 다른 애들이랑 나랑 다르게 대하는데 그걸 어떻게 평범하다고 할 수가 있어.

 

 

마지막에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지민은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아까부터 뜨거운 무언가가 목과 가슴께에 꽉 막혔다. 토해내고 싶었지만 그대로 울어버릴 것 같아 억지로 참아냈다. 지민은 그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건 점점 더 커지고 있는 제 마음이었다. 내가... 태형이 한참을 지민만 보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지민은 정말 울고 싶었다. 그 자리에서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울고 싶었다. 낮은 음성으로 잔잔히, 나직하게 그리 묻는 건 반칙이다. 태형은 천성이 이리도 다정한 애였고, 자신은 사람의 호의를 멋대로 착각했으면서 멋대로 바꾸려하는 이기적인 놈이었다.

 

사랑은 가랑비처럼 천천히 스며드는 거라더니, 가랑비가 아니라 장대비였다. , 하는 순간 홀딱 다 젖어버렸다. 한번 빠져드는 순간 걷잡을 수 없이 끌려가, 그 끝을 알 수 없어 깊숙히, 더 깊숙히 들어가기만 하는 것이다. 지민은 그 끝을 알 수 없는 감정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오려고 부단히 애를 썼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고 태형과의 관계도 잃지 않기 위해.

 


나 챙기려고 하지마. 색시라고 부르는 것도, 스킨십 하는 것도 나중에 네 여친한테나 해.

 

내 마음이야.

 

네 마음대로 하고 싶다고 땡깡 부릴 나이는 지났어.

 

무슨 일 있었어?

 

... 아니.

 


그런데 왜 자꾸 그럴까, 색시야.

 


저 색시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힘이 쭉 빠졌다. 말도 안 되는 저 별명이 의미를 담고 듣기 시작하니 단어의 무게가 점점 무거워졌다. 태형에게는 그저 오래된 친구의 오래된 별명일 텐데 계속 애칭으로 들리니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지민은 억지로 더 표정을 굳혔다.

 


내 말이 우습냐? 하지 말라니까 왜 자꾸 하냐고!

 

... .

 

 

태형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아까 웃음을 지운 표정과는 다른 딱딱한 표정에, 지민은 순간 심장이 추락하는 느낌이 들었다. 무심코 깨달았다. 태형은 자신을 야라고 부른 적도 없었다. 태형의 입에서 들은 저 한마디가 너무 낯설었다. 지금 보고 있는 저 싸늘한 표정 또한 자신이 여태 본 적 없던 태형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쓰렸다. 화가 날만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별 말 없던 애가 갑자기 예민하게 굴면서 아무 이유 없이 무작정 하지 말라니, 자신이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지민은 입을 꾹 다물었다. 차라리 화를 내주었으면 했다. 조곤조곤 달래주듯 말하지 않고, 왜 갑자기 이러는 거냐고 화라도 냈으면 했다. 태형은 후 작게 한숨을 쉬며 지민의 어깨에 살짝 손을 올렸다.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이 느껴졌다.

 

 

... 미안해.

 

 

가슴 한켠이 아렸다. 눈가가 시큰해졌다. 굳이 제 얼굴을 보지 않아도 눈시울이 시뻘게졌을 것이다. 태형의 목소리는 바스라지는 낙엽처럼 힘이 없었다. 모든 걸 놓은 듯 허공으로 사라지는 그의 말이 왜 이렇게 아픈지 모를 일이다. 지민은 이로 입술을 짓이기다 그대로 태형에게 달려들어 멱살을 잡았다. 갑작스런 힘에 태형이 두어 걸음 뒤로 밀려났다. 그냥 화를 내, 병신아! 지민이 소리를 질렀다.


 

너도 어이없잖아. 아까까지만 해도 아무 말 없던 애가 갑자기 이러는 거 너도 황당하잖아!


......

 

다른 애들한테 하는 것처럼 나한테도 화도 내고! 때리고! 그래 보라고!

 

 

태형은 씩씩대는 지민을 가만히 내려 보다가 손을 들어 그의 손목을 가볍게 쥐었다. 태형이 딱히 힘을 주지 않아도 태형의 움직임대로, 지민의 손이 그에게서 툭 떨어졌다.

 

 

내가 어떻게 너한테 화를 내.

 

 

아아, 실패다. 지민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기어코 터져 나오는 눈물을 또 제 손가락으로 가볍게 훔치는 제 앞에 이 남자한테 더 이상 빠져나올 구멍은 없었다. 그 별명만 없으면, 김태형이 자신한테 너무 붙지만 않으면 어떻게든 되겠지 라고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의 감정을 너무 얕봤다. 지민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태형을 좋아했다.





















---


친구한테 느낀 감정에

많이 혼란스러운 지민이.






아마 여러분들이 제 창고에 올라오기를 

가장 기다렸던 글이 아닐까 싶네요

정말 별 내용 없는 글인데

꾸준히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자꾸 텀이 늦어지는 점 정말 죄송합니다ㅠㅠ

글 같은 건 이어본 적이 없어서 속도가 더디네요ㅠㅠㅠ

다음에는 좀 더 빨리 오도록 노력하겠습니다;ㅅ;




이건 그냥 사담인데

연재하는 글 외에도

보고 싶은 소재, 쓰고 싶은 썰이 많아서

저도 트위터 하나 팔까 싶네여

그 썰들은 소재나 보고싶은 내용 몇 개만 던지고

말 것들이라 창고에 넣기 뭣해섴ㅋㅋㅋ

SNS 고자라 지금 많이 고민중이긴하지만요

이야기는 하고 싶었어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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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남고생의 일상 (完)



1. 수학여행 마지막

  

전주, 경주를 돌고 마지막은 부산이었다. 부산 역시 자유롭게 다니고 시간에 맞추어 숙소에 오면 되는 형식이었다. 지민은 미식거리는 속을 부여잡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다, 버스 입구에서 손을 내밀고 있는 태형을 봤다. 멈칫한 지민은 잠시 머뭇거리다 결국 그의 손을 잡았다. 단단한 그의 손이 지민을 확 잡아 당겼다. , ! 지민이 순간 중심을 잃고 그대로 태형 쪽으로 엎어졌다. 태형이 지민을 단단히 받쳐 안았다. 깜짝 놀랐잖아! 지민이 어깨에 쿵 부딪친 얼굴을 홱 들어 태형을 바라봤다. 비켜. 살짝 밀자 태형이 순순히 뒤로 밀려났다. 지민은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걸음을 옮겼지만, 속은 전혀 아무렇지 않았다. 태형을 아무렇지 않게 보기가 힘들었다. 아무런 생각이 없었는데 그 술래잡기 이후로 계속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왜 이래 진짜. 지민은 답답함에 가슴만 툭툭 쳤다.

 


 

 

 

아이들은 신이 났다. 아무래도 부산에 오기는 힘드니까 다들 설레는 듯 했다. 야 근데 부산은 성인 돼서 와야 더 재밌는 거 아니냐. 정우가 지민에게 다가와 어깨에 팔을 턱 걸치며 말했다. 지민은 정우를 힐끗 쳐다봤다.

 

 

 

낮에 해운대 갔다가 밤에 클럽 딱!


고딩이 무슨 클럽이야!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러니까 성인 돼서 와야 재밌다는 거 아니야.

 

바다나 가.

 

야 김태형! 너도 갈 거지?

 

 

정우가 뒤돌아 태형을 바라봤다. 태형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 옛날에 부산에 살았는데. 지민의 말에 정우가 놀래서 지민을 내려다봤다. 진짜? 너 김태형이랑 어렸을 때부터 친구였다며.



그 보다 더 전에. 부산에 태어나서 4살 이었나 쟤 옆집으로 이사 왔어.

 

그럼 서울 와서 처음 사귄 친구가 김태형?

 

몰라. 엄마랑 아빠끼리도 친해서 태어났을 때부터 만났대. 근데 기억 안 나. 처음 만난 날도 기억 안나는데 무슨.

 

 

생각해보니 정말 징글징글한 인연이기는 하다. 지민은 갑자기 돋는 소름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럼 진짜 서로 모르는 게 없겠네. 정우의 말에 지민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눈만 봐도 구라 치는지 어떤지 다 아는데. 정우는 고개를 살짝 돌려 태형을 힐끔 쳐다봤다. 태형은 몇 걸음 뒤에서 천천히 자신들 뒤를 따라 걷고 있었다. 야 넌 무슨 왕따 코스프레 하냐, 여기로 와. 정우가 손짓 하며 뱉은 말에 태형은 조금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지민의 옆에 섰다. 윤정우 잠시 와 봐! 어디선가 정우를 부르는 목소리에, 정우는 어깨동무 하던 손을 내려 지민의 등을 툭 치며 자신을 부르는 곳을 떠났다. , 잠시만 윤정우! 지민이 다급히 그를 부르며 뒤돌아 봤지만 정우는 이미 지민이 안중에도 없었다. 순식간에 둘만 남겨진 상황에 지민은 마른침만 삼켰다. 그러다 또 퍼뜩 정신이 든다. 아니 왜? 내가 왜 김태형을 의식해? 아니 의식 한다고? 내가? 이상하다. 진짜 이상하다. 어제부터. 지민은 짜증스러움에 제 머리를 마구 헝클였다. 태형은 지민을 힐끗 보더니 말없이 손을 들어 슥슥 그의 머리를 정리해주었다. 묵직한 그의 손이 느껴졌다. 지민은 살짝 머리를 비켜 그의 손에서 벗어났다. 태형의 손이 우뚝 멈추더니 결국 손을 내렸다. 이상해. 태형이 나직이 말했다. 지민은 말없이 그를 지나쳐 걷다, 결국 태형에게 손이 잡혀 뒤돌려졌다. 태형의 표정이 드물게 굳어 있었다. 색시 이상하다고. 지민은 손목을 비틀어 손을 빼내었다. 그래, 이상하다. 자신이 생각해도 이상한데 남이 보면 얼마나 그럴까. 특히 태형이라면. 지민은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태형은 살짝 제 입술을 짓이기다 다시 입을 열었다.

 

 

미안해.

 

......

 

내가 미안해.

 

네가 왜 미안한데.

 

말을 해 줘. 나한테 뭐라도 말을 해야 내가 고치지.

 

너 때문이 아니야.

 

그럼 왜 계속 피하는데.

 

... 피한 거 아니야.

 

 색시야.

 

그렇게 부르지마.

 


지민의 단호한 말에 태형이 입을 꾹 다물었다. 진짜 왜 그래... 기어들어가는 듯 작기만 한 태형의 목소리에 지민은 입술만 잘근잘근 씹었다. 우습지, 누가 봐도 이상한 건 자신인데 태형이는 마치 자신이 죄인인 것처럼 군다. 그의 행동이 자신을 자꾸 작게 만든다. 가슴께가 콱 막힌 것처럼 답답해서 지민이 가운데를 퉁퉁 쳤다. 아무것도 먹은 게 없는데 체한 것 같다. 어디 아파? 태형이 가까이 다가가자 지민이 그만큼 뒷걸음질 쳤다. 태형은 어정쩡한 자세 그대로 굳어 지민을 바라봤다. 들었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태형이 속삭이듯 하는 말에 지민은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을 받았다. 그에게 어떤 말을 해줘야 할지 모르겠다. 지민도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이런 느낌은 처음이라 제 자신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제가 어떻게 남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을까. 제 심장 어딘가가 이상해진 것이 확실하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피가 안 통하는 것처럼 저릴 수 없는거다.

 

 

 


 

너희 싸웠어? 정우가 조심스레 다가와 태형에게 작게 속삭였다. 지민은 저 앞에서 지혁과 이한과 걸어가고 있었다. 태형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거짓말 치지마, 새끼야. 정우가 등을 아프게 때렸다. 아아. 태형은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몸부림을 친다던지, 맞은 부위를 문지르는 행동도 하지 않았다. 정우는 생각보다 심각한 것 같은 태형의 상태에 헉했다. 백 번 양보해서 둘이 싸우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것이다. 정우는 입술만 달싹이다 결국 입을 열었다.

 

 

혹시 어제 우리 얘기 들은 거 아니야?

 

?

 

아니... 어제 네가 말한 거.

 

그건 절대 아니야.


 

다른 건 몰라도 그건 확신할 수 있다. 지민은 태형의 감정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만약 제가 그에게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면 절대로 이 정도로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하다못해 제 멱살이라도 잡고 직접적으로 물어봤겠지. 너 나 좋아해? 라고. 그래서 더 답답했다. 여태까지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싸웠을 때도 이렇게 피한 적은 없었다. 이유를 알면 고칠 수라도 있지, 말도 없이 피하기만 하고 있으니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태형은 마른세수를 하며 후 한숨을 쉬었다. 정우는 그저 위로의 의미로 어깨를 두드려 주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너 김태형이랑 싸웠어? 조심스럽게 물어보는 이한에 지민은 작게 한숨만 쉬었다. 그런 거 아니야. 그런데 왜 아까부터 김태형 피하냐? 지혁의 말에 지민은 욱해서 지혁을 돌아봤다. 아 몰라 진짜! 갑자기 빽 소리를 지르는 지민에, 그들은 놀라 눈만 끔뻑였다. 얘 아까부터 왜 이렇게 예민해. 지혁의 중얼거림에 이한은 어깨만 으쓱였다.

 

미치겠네, 진짜. 지민은 머리를 헝클였다. 어쩐지 김태형을 보기가 껄끄럽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그게 더 답답하다. 지민은 힐끗 고개를 돌렸다. 조금 떨어져서 걷고 있던 김태형과 눈이 마주쳤다. 지민은 흠칫 놀라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 한숨이 나왔다. 언제까지고 이렇게 살 수 없는 것도 잘 안다. 자신도 답답하지만 아마 김태형도 답답해하고 있을 것이다.

 

 

 



밥을 먹으러 갔다. 공교롭게도 지민의 앞에 태형이 앉았다. 제 앞에서 딱 앉아서 자신을 바라보는 저 눈을 마주치기 힘들어서 자꾸 고개가 숙여졌다. 태형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채 뚫어져라 지민을 쳐다봤다. 야 뭐 먹을래. 정우의 말에 메뉴를 고르는 것은 지혁과 이한 밖에 없었다. 야 너희 뭐하냐, 진짜. 결국 정우가 한마디 했다. 태형은 정자세로 앉아 계속 지민만 바라보고 있었고 지민은 죄 지은 사람처럼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태형은 지민을 빤히 쳐다보다가 수저통에서 수저를 꺼내 지민의 앞에 놓았다. 갑자기 제 시야에 훅 들어오는 수저에 지민은 흠칫 놀랐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했다. . 앞에서 한숨소리가 들렸다. 지민은 움찔했다. 색시야. 한숨 같은 부름에 지민은 결국 고개를 들었다. 하루 종일 이렇게 제대로 얼굴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태형은 지민과 눈이 마주치자 마른세수를 했다. 잠시 얘기 좀 하자. 그의 말에도 지민은 입을 꾹 다문 채 바라보기만 했다.

 

 

나 지금 진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거든.

 

아무것도 하지마. 내가 알아서 할 문제야. 넌 아무 문제없어.

 

계속 그런 식으로 피하기만 하잖아!


......

 

왜 피하는데? 왜 계속 사람 병신 만드냐고.

 

내가 언제 병신 만들었어.

 

지금 그러잖아. 계속 무시해서 사람 병신 만들고 있잖아.

 

그런 거 아니라고.

 

말해. 대체 왜 그러는지 이유라도 알아야겠으니까.

 

 

태형의 표정은 단호하기 그지없었다. 정말 이대로 물러나지 않을 작정이다. . 지민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시끌시끌한 식당에 저와 태형만 따로 고립된 세계처럼 공기가 조용했다. 제 모든 신경이 그에게로 향한 것 같았다. 그의 작은 움직임 하나도 크게 보였다. 굳게 쥔 주먹이 화를 참는 듯 했다.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지민은 할 말을 몇 번이나 머릿속에 되뇌며 입을 열었다.

 

 

생각할게 있어.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근데 네가 계속 내 눈에 띄면 제대로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단 말이야.

 

. 뭔데.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데.

  

오래 안 걸릴 거야. 그러니까 그때까지만 잠시 기다려 달라고.

 

... 나 솔직히 아직 납득이 안 되고, 왜 그러는지 이해도 안가고, 화도 덜 풀렸는데.

 

......


그냥 네 말만 믿고 기다리는 거야.

 


태형의 말에 지민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다른 아이들이 주문했던 해물탕이 나왔다. 너희 기 싸움에 우리 등 터지겠다, 이거나 먹어. 정우가 앞접시에 해물을 가득 담아 그들에게 건넸다. 지민은 젓가락을 들었다. 점점 머리가 복잡해진다.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고 했는데 솔직히 모르겠다. 뭔가 이상하긴 한데 정확히 무엇이, 어떻게, 왜 그런지 모르겠으니 감조차 잡을 수 없다. , 또 태형을 생각하니 심장이 이상하게 뛴다. 이때까지 제 심장이 움직이는 것을 의식한 적도 없었는데 그를 생각하면 항상 심장의 두근거림도 귓가에 웅웅 울리기 시작한다. 지민은 애써 의식을 피하며 조개를 주워 먹었다.

 

 

 

 


마지막은 바다였다. 바닷가에서 해가 질 때까지 있다가 숙소로 돌아가는 것으로 수학여행을 마무리 지을 생각이었다. 해운대에는 해변에서 버스킹을 하기도 한대. 수학여행 루트를 짰을 때 지혁이 했던 말에 지민은 조금 기대 했었다. 해가 진 어두운 밤바다와 잔잔한 모래사장을 배경으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것이 꽤나 분위기 있을 것 같았다. 지민은 노래를 부르는 것도 좋아했으니까. 사실 부산에 와서 가장 기대 했던 것이 버스킹이기도 했다.

 

지민은 해변에 살포시 앉았다. 혹시나 모래가 안에 들어가지는 않을까 조금 걱정 되었지만 긴바지여서 이내 걱정을 덜었다. 두 무릎을 맞대고 팔로 끌어안은 채 바다를 바라봤다. 다른 애들은 어디 갔지. 잠시 그들이 생각났지만 곧 기억을 지웠다. 어디서든지 잘 있을 애들이었다.

 

태양이 제 마지막 빛을 다 뿜어내기 시작한 듯 하늘이 붉게 타올랐다. 노을은 어디서 봐도 항상 아름다웠다. 지민은 멍하니 저 멀리 수평선을 바라봤다. 어찌나 집중했던지 옆에 누가 앉았는지 인기척도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귓가에 꽂고 있던 이어폰에서는 잔잔한 기타소리와 담백한 노랫소리가 들렸다. 낮게 깔린 듯 나직한 목소리는 어쩐지 태형의 목소리와 비슷했다. 지민은 이 노래를 좋아했다. 담담하게 부르는 것도 좋고 잔잔하게 울리는 이 감정도 좋았다. 음흠흠 지민은 작게 허밍을 했다. 어디선가 가수와는 다른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지민은 놀라 이어폰 줄을 당겨 다소 거칠게 빼내며 노랫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태형이 바다를 바라보며 지민의 허밍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뭐야. 지민의 물음에 태형이 그를 바라보며 헤 웃어보였다. 우리 색시 찾고 있었는데 여기 있었네. 그의 말에 지민은 다시 고개를 돌려 바다를 바라봤다. 붉은 하늘 아래 바다의 색이 점점 진해지기 시작했다.



색시 어디 갔나 했는데, 저 멀리서도 딱 색시가 보이는 거야.

 

......

 

한눈에 색시를 딱 알아봤지.

 

다른 애들은?

 

지금 다른 애들이 신경 쓰여?


 

태형은 살풋 인상을 찌푸렸다. 지민은 입을 다물었다. . 태형의 한숨소리가 들렸다. 죄를 지은 것도 없는데 죄인처럼 자꾸 몸이 움츠러든다. 파도가 잔잔히 밀려들어오면서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조용한 소리였다. 그 애들이 신경 쓰여? 태형이 다시 물었다. 태형의 눈동자가 노을빛을 머금고 반짝반짝 빛이 났다. 지민은 모르긴 몰라도 태형의 눈 하나는 예쁘다고 생각했다. 아마 가끔 그가 잘생겨 보이는 이유 중 눈이 한 70%를 차지하지는 않을까. 쓸데없이 크기만 하고. 지민은 일부러 마음에도 없는 생각을 하며 입을 삐죽였다. 그 와중에도 태형의 눈은 지민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태형은 제가 입고 있던 후드를 벗어 지민의 어깨에 살포시 얹어주었다. 아직 밤바람은 차.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퍼지고 지민은 자연스레 태형을 바라봤다. 태형의 눈동자 속에 노을빛이 일렁인다. 아 잘못 생각했다. 이 시간에는 김태형을 봐서는 안 되었다. 말도 안 되는 분위기에, 이성보다 감정이 앞서는 시간에, 그와 마주보고 있으면 안됐었다. , 지금 이 순간이 심장에 해롭다.

 

지민은 진즉에 알고 있었다. 이상하게 가슴이 답답했던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모르는 척 하고 싶었던 거다. 갑자기 확 변한 제 감정이 무서워서, 그 감정을 태형에게 들킬까봐, 그래서 무시하고 싶었던 거다. 어차피 지금 깨달은 감정이다. 조금만 아닌 척 하면 자연스레 사그라들지 않을까. 이건 김태형이 너무 잘 생겨서, 남자가 봐도 잘 생긴 편이니까 그냥 잠시 얼굴에 설렌 거라고, 그렇게 믿고 싶은 거다. 그래서 잠시 안보고 싶었다. 너무 붙어 다녀서 그런가. 잠시 얼굴을 안보면 좀 괜찮아지려나. 하지만 그것은 지민의 입장에서만 생각한 것이었다. 태형은 지민의 옆에서 잠시라도 벗어나는 것을 싫어했다.

 

위험하다. 점점 어두워지는 하늘과 바다와, 시원하면서도 잔잔한 파도소리가 점점 사고력을 잃게 만든다. 심지어 김태형은 그 잘생긴 얼굴로 가만히 한없이 진중한 표정으로, 지민을 바라봤다. 그 시선이 덫 같다고 생각했다. 어디 한 눈을 팔 수 없게 꽉 제 시선을 잡아놓고 천천히 천천히 깊숙이 제 속으로 파고드는. 그 덫에 다치는 것은 자신이었다. 이렇게 숨 막힐 수가. 거짓말 안하고 이대로 심장 터져 죽어버릴 것 같았다. 어쩌다 그 덫에 걸려버렸을까. 아니, 왜 이제야 자신을 바라보는 그 눈빛이 덫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을까.

 

지민은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모래사장에 두 손을 짚고 몸을 일으키는 순간, 태형이 그의 손목을 확 잡았다. 갑작스러운 힘에 지민은 순간 휘청거렸다. 태형이 다른 손으로 허리를 감지 않았으면 지민은 꼼짝없이 모래사장에 처박혔을 것이다. 지민은 순간 욱해서 그를 노려봤다. 그의 표정은 여전히 웃음기 하나 없이 진지했다. 방금 그것이 장난으로 한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지민은 잡힌 손에 힘을 주어 빼내려 했지만 그럴수록 태형이 손목을 꽉 잡았다. 당혹스러웠다. 얘 왜이래. 지민은 당황스러운 눈을 숨기지 않고 태형을 바라봤다. 흔들리는 그의 눈을 본 태형이 입을 열었다.

 

 

피하지마.


......

 

색시가 뭘 생각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더 이상은 못하겠어. 너무 힘들어.

 

김태형.

 

도와줄게. 내가 도와줄 테니까 나 그만 피하면 안돼?

 

미안해, 태형아.

 

소원이야.

 

 

태형의 입에서 소원이라는 말이 나오자 지민은 더 이상 그에게 강요할 수 없었다. 손목 잡힌 부근이 시큰해지기 시작했지만 지민은 이 손 떼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제 손목을 잡은 태형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하늘에 붉은빛이 점점 빠지면서 보라빛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어두워지는 하늘 따라 바다도 점점 고요해졌다. 잔잔히 부서지는 파도 소리는 여전했다.

 

 

나 소원 들어줘야 하잖아.


......

 

내 소원 들어줘.


......

 

나 피하지마. 내 옆에서 떠나지마.


 

그에게 잡힌 손목이 시큰했다. 그리고 뜨거웠다. 지민은 어쩐지 제 속 같다고 생각했다. 속이 시큰거리고 울컥울컥 뜨거웠다. 나랑 약속해, 중학교 때처럼. 태형의 마지막 말에 지민은 아슬아슬 했던 제 속이 모래성처럼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2. 그 어느 날에

 

너 요즘 왜 그래, 진짜!

 

 

지민은 결국 태형을 돌려세우며 빽 소리를 질렀다. 뒤돌아본 태형의 얼굴을 보자, 지민은 순간 놀랐다. 태형의 표정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당혹스러움에 머리가 새하얘진 지민은 할 말도 잃어버린 채 입만 벙긋거렸다. ... 김태형... 혼란스러움에 말을 잇지 못하는 지민을 가만히 보던 태형은 제 팔을 잡고 있는 지민의 손을 덮어 잡은 채 천천히 손을 떼어냈다. 지민은 자신의 손등에 느껴지는 온기가 떨어져 나가는 느낌이 나자 순간 불안해졌다. 제 손 전체를 감싸 안던 온기가 사라지고 바깥의 서늘함만 손등에 남았다. 태형의 표정도 그것처럼 서늘했다. 너 왜 그래... 지민이 겨우 입을 열었지만 태형은 말없이 몸을 돌려 멀어졌다.



 

 

 

김태형이 요즘 이상하다. 모르긴 몰라도 그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김태형이 요즘 자신을 피한다. 갑자기 왜 그렇게 변했는지 이유도 알 수 없어 더 답답했다.

 

처음에는 갑자기 같이 등하교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교실에서 자신과 놀지 않고 다른 애들이랑만 놀기 시작했다. 조금 당혹스러웠긴 했다. 그래도 중학교 올라와서 다른 친구들도 사귀려 하니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태형이 다른 애들이랑 어울린다고 어딘가 꽁해지는 것이 속 좁은 인간도 아니고 우습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태형이 자꾸 어딘가 모르게 어긋나고 있었다.

 

지민아, 요즘 태형이랑 싸웠니? 교무실로 직접 부르시면서까지 물어보는 선생님에게 고개를 젓는 것 밖에는 답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선생님은 한숨을 쉬셨다.

 

 

태형이가 요즘 들어 질 안 좋은 애들이랑 놀러 다니는 것 같아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야. 오늘은 학교까지 안 나오고.

 

......

 

지민이는 태형이랑 많이 친하니까 이유라도 알 줄 알았는데.

 

아니요... 저도 요즘 김태형 잘 못 만나서요.

 

그래. 혹시나 서로 마음에 담아 둔 거 있으면 털어내고 예전처럼 잘 지내렴. 너희 둘, 사소한 다툼으로 떨어질 애들 아니잖아.

 

 

교무실에 나와서는 더욱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래, 많이 친하니까 김태형에 대해서 많이 아는 줄 알았다. 모르긴 몰라도 김태형만큼은 그의 부모님 다음으로 많이 알고 있는 줄 알았다. 근데 이게 뭐야. 사실은 그의 속은 하나도 몰랐던 것이다. 지금 그가 어디 있는지 조차 모른다. 그렇게까지 생각하니 갑자기 온 몸에 피가 식는 기분이 들었다. 헛웃음이 나온다. 정말 그 시간은 아무것도 아니었나.

 

지민은 바로 폰을 들어 문자를 보냈다. [너 지금 어디야] 문자를 보내고 나서도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 여러 번 연속으로 보냈다. [너 이제 막 나가냐?] [뭐 하고 싸돌아다니면 학교도 안 나오냐고] [김태형 니 중2병 참는 것도 정도가 있다]

 

원래라면 금방 답장하는 앤데 이제는 답장도 안한다. . 한숨을 쉬며 폰을 주머니 안에 넣었다.

 

태형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은 한 달 전 즈음부터였다. 1학년 때는 다른 반이었기 때문에 태형이가 사귄 친구들이 조금 질 안 좋은 친구라는 것을 듣기만 했었다. 그래서 2학년 때 같은 반 되면서 태형이가 들과 조금 거리를 두기를 바랐었다. 그런데 이게 웬 걸, 밀쳐진 게 오히려 자신이라는 생각을 하니 배신감에 눈가에 열까지 올랐다. 지민은 입술을 깨물며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어쨌든 지민은 더 이상 태형이 어긋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하아. 태형은 한숨을 쉬며 폰을 넣었다. 네 색시야? 정우의 말에 태형이 그를 노려봤다. 정우는 그의 표정에 기가 찬 듯 웃었다.

 

 

아이고, 무서버라. 지 색시 얘기 좀 했다고 사람 찢어 죽일 듯이 노려보네.

 

색시라고 부르지마, 내 색시야.

 

미친 새끼. 존나 친구 감싼다니까.

 

 

정우는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입에 물었다. 태형이 그걸 보자마자 담배를 확 채가 발로 짓밟았다. 씨발 진짜 뭐하냐! 정우는 화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으나 더 이상 태형에게 다가설 수 없었다. 태형의 신경을 거스르는 일은 웬만하면 피하고 싶었다.

 

태형은 태형대로 머리 아팠다. 한 가지 고민을 머리 빠개질 정도로 해본 적도 없었는데, 아마 지금이 그 처음이자 마지막 시기가 아닐까 싶다.

 

태형은 엄청난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고 있는 중이었다. 제 속이 정말로 질풍노도였다. 사람들은 모두 그 시기가 온다고 한다. 사춘기 때라서 감정의 동요가 격한 시기라고 한다. 그렇다면 제가 지금 느끼고 있는 이 낯선 감정이, 사춘기 때라서 감정의 동요가 격하기 때문에 그러는 건가. 태형은 그 어느 것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 어느 것도 확신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섣불리 그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제 자신도 제어가 안 되는 마음으로 그의 앞에 섰다가는 어떤 짓을 할지 몰랐다. 낯설었기 때문에 피했다. 감정을 받아들이는 것에는 서툴렀기 때문에.

 

만약에 지금이 질풍노도의 시기라서 그러는 거라면, 그 시기가 조금 지나면 괜찮지 않을까. 그 때는 그를 다시 예전처럼 마주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막연한 생각만 들어다. 15살의 태형은 그렇게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물론, 눈치 없는 제 색시는 절대 알 리 없지만.

 

 

 

 


골목 곳곳에 가로등 불이 켜질 때 즈음, 태형은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무도 없는 골목은 한적하다 못해 정적이 감돌았다. 바로 앞 골목만 돌면 제 집이다. 태형은 골목을 돌자마자 누군가의 힘에 의해 멱살이 잡히고 몸이 확 쏠렸다. 태형은 깜짝 놀라 소리도 지르지 못했다. , 색시? 태형은 제 멱살을 잡고 노려보는 지민을 보고 간신히 입을 열었다. 지민은 어지간히도 화났는지 표정이 냉하기 그지없었다. 태형은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지민의 표정을 보고 내심 놀랐다. 태형은 단 한 번도 지민의 화난 표정을 본 적이 없었다. 멱살을 잡은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듯 했다.

 


너 왜 이제 와. 하루 종일 어디 갔었어. 왜 연락 하나도 안 받는데.

 

......

 

너 진짜 미쳤냐? 요즘 들어 왜 안하던 짓을 하는데.

 

......

 

하아.

 

 

지민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태형 때문에 결국 한숨을 쉬며 꽉 쥔 멱살을 풀었다. 그냥 허탈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도 모르겠다. 지민은 힘이 다 풀린 팔을 툭 떨치듯 내리고 태형을 지나쳤다. 천천히 제 집으로 향하는 걸음에는 힘이 없었다. 태형은 몸을 돌려 멀어지는 지민을 바라봤다. 지민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태형을 돌아봤다. 김태형. 멀리서 이름을 불렀다.

 

 

더 이상 너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어.

 

 

태형은 주먹을 꽉 쥐었다. 어차피 지민에게는 보이지 않을 거리다. 혼란스러웠다. 이렇게 해도 되는 걸까. 제 마음 지우기에 너무 급급했던 것은 아닐까. 태형은 결코 지미노가 멀어지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다. 다만, 어지럽기만 한 감정을 잠재울 시간이 필요했다. 색시야. 태형이 작게 불렀다. 웅얼거리듯 작은 목소리에도 지민은 들은 듯 가만히 서 있었다. 속에 알 수 없는 뜨거움이 일렁였다. 태형은 결국 도망치듯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태형이랑 싸웠냐는 질문을 들을 때마다 열이 머리끝까지 오르는 것을 느끼며 지민은 인간의 인내심의 한계를 경험하는 중이었다. 싸운 적 없어요. 지민의 짜증어린 대답에도 선생님들은 태형의 일을 계속 물어봤다. 그래도 지민이가 제일 친했는데 태형이와 이야기 좀 해보렴, 요즘 자꾸 안좋은 길로 빠지려고 해서 걱정이 되네.

 

그런 걱정을 왜 똑같은 학생한테 해결 하라고 하시는 건데요. 지민은 턱 끝까지 차오르는 말을 애써 꾹꾹 눌러 담으며 교무실을 나섰다. 이제는 짜증이 나려 한다. 그 따위 새끼 이제 나랑 상관없는 일이다. 그저 걔는 걔대로, 나는 나대로. 그렇게 끝날 일이다. 지민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그의 얼굴에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끼면서, 지민은 결국 그가 신경 쓰인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인생의 전부를 김태형과 보냈는데 그렇게 한 번에 끊어낼 수는 없던 것이다. 꽉 쥔 두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종례시간이 되어서야 학교에 슬금슬금 들어온 저 머저리 같은 새끼를 더 이상 모른 척 넘어갈 수가 없었다.

 

. 지민은 성큼성큼 다가가 태형의 어깨를 잡아 확 돌렸다. 태형은 예의 그 차가운 눈으로 지민을 올려다보았다. 너 진짜 요즘 왜 이래. 왜 이렇게 변했어.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으면 이렇게 변하는데. 지금 반항 하는 거냐. 왜 안하던 짓을 해. 질 안 좋은 애들이랑 다니지마. 싸움 하지마. 너 그런 애 아닌 거 내가 잘 알아. 그런 거 다 헛소문인 거 다 알아. 내가 어떻게 해야 해? 불만 있으면 이딴 식으로 하지 말고 그냥 말로 해. 내 말 무시 하지마. 나 피하지마.

 

하고 싶은 말은 천지였다. 지민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쉬면서 마음을 정리했다. 종례 하고 나 좀 봐. 그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태형은 말이 없었다. 지민은 제 자리로 돌아갔다.

 

선생님이 들어오시고 간단한 종례를 했다. 소떼처럼 우르르 교실 밖을 나가는 학생들 사이에서 지민은 태형을 찾으려 낑낑댔다. 그 새끼는 제 말은 어디로 들었는지 이미 교실 밖을 나갔다. 이 씨발... 지민은 절로 욕지기가 튀어나는 것을 애써 참으며 애들을 밀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김태형!! 지민은 거의 괴성을 지르듯 그의 이름을 부르며 태형의 손목을 확 잡아 돌렸다. 방심했던 탓인지 태형은 지민의 힘에 의해 홱 돌아섰다. 지민은 헉헉 숨을 고르며 태형을 올려다봤다. 최대한 머릿속을 정리하려 애썼다. 너 진짜 왜 그러는지 이유나 좀 알자. 지민의 말을 무시한 채 태형은 걸음을 옮겼다. 지민은 오기가 생겨 그의 뒤를 졸졸 쫓으며 코치코치 캐물었다. 오늘은 진짜 무슨 일 있어도 얘기 듣고 간다. 지민의 표정은 결연했다.

 

태형의 걸음이 더 빨라졌다. 바닥에 신발을 툭 던지고 대충 발에 끼워 나갔다. 지민도 대충 신발에 발을 욱여 넣고 후다닥 태형의 뒤를 쫓았다. 야이씨, 김태형!! 뒤에서 지민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태형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계단의 끝이 너무 멀리 있었다. 길기만 한 계단을 한 단, 두 단, 밟고 내려갔다. 거기 멈춰보라고! 지민의 목소리가 또 들리기 시작한다. , 존나 미움 받겠네. 태형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이미 어느 정도 각오한 일이긴 하지만 어쩌면, 제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이 미움 받을지도 모르겠다.



그래 씨발! 보지마!! 우리 이제 끝이야!!

 

 

격앙된 지민의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제 옆을 훅 스쳐지나가더니 제 앞에 툭 떨어졌다. 신발이었다. 계단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떨어진 신발은 몇 번 더 굴러 떨어지다 멈추었다. 태형은 가만히 그 신발을 내려다보았다. 조금 때 탄 흰 신발이 끈이 다 풀린 채 덩그러니 있었다.

 

 

씨발 진짜 왜 그러는데!! 내가 대체 뭘 잘못 했는데 그렇게 계속 피하냐고!!!

 

 

악에 받친 목소리에 물기가 어려 있는 듯 했다. 태형은 몇 걸음 더 내려가 허리를 숙여 그 신발을 들고 천천히 몸을 돌려 지민을 올려봤다. 지민은 계단에 주저앉아 태형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닌 척 하지만 다 알고 있다. 태형은 지금 지민이 애써 울음을 참고 있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눈가가 벌게져 씩씩 거리며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저 얼굴을 보니 만감이 교차했다. 화를 주체 못해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인지 눈물이 고여 있는 그를 보며 태형은 한 걸음, 두 걸음,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지민의 얼굴이 점점 가까이 보였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본 지민은 입을 앙 다물었다. 그를 향한 도끼눈은 사라지지 않았다.

 

태형은 그의 밑에서 한쪽 무릎만 꿇어 앉아 그의 신발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지민의 발목을 살짝 감싸 잡아 신발을 신겨주기 시작했다. 지민은 킁 코를 훌쩍이며 태형이 하는 대로 가만히 따랐다. 울지마. 태형이 리본을 묶으며 나직이 말했다. 나 때문에 울지마. 매듭을 꽉 당긴 태형이 지민을 올려다보았다. 벌게진 눈을 하고 코를 훌쩍거리면서도 애써 울지 않으려는 듯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지민의 얼굴을 보자니, 심장이 저릿저릿했다. 그 저릿저릿함이 혈관을 타고 퍼지는지 손가락 끝까지 저릿저릿해졌다. 누가 심장을 막 쥐어짜내는 것처럼 욱신욱신 했다. 손이 떨렸다. 태형은 아무렇지 않은 척 손을 숨겼다. 어차피 색시는 제 이런 사소한 행동 하나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지마. 지민이 작게 속삭이듯 말했다.

 

 

나 피하지 말라고 개새끼야.

 

......

 

약속해. 피하지 않는다고. 내 옆에 있겠다고 하라고 씨발아...

 

너는 진짜...

 

 

태형은 손을 들어 지민의 머리 위에 툭 얹었다. 제 힘에 의해서인지 지민의 고개가 살짝 숙여졌다. 부들부들한 그의 머리카락이 손바닥에 느껴졌다. 태형은 천천히 지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의 머리카락에 제 손에 따라 살랑살랑 움직였다. 너는 진짜 뭐. 지민이 눈만 도르륵 올려 태형을 바라봤다.

 


왜 자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만드냐.

 

 

그렇게 말할 수는 없어, 태형은 지민에게 웃어 보이기만 했다. 태형은 지쳐버렸다. 지민을 보는 것보다 피하는 것이 더 힘들었다. 어떻게 해도 그를 피할 수 없음을 깨달아버렸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제 셔츠 끝을 잡아당기며 약속하라 낑낑대는 색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뿐이었다.





















---


2는 태형이와 지민이가 중2 때.






...ㅋㅋㅋㅋ...  ㅋㅋ... 제가 너무 늦었죠...

망할 현생은 자비를 베풀어 주시지 않네여...

한꺼번에 몰려온 과제더미에 허덕이다

이제야 좀 여유가 생겼네요.

제가 있는 곳은 아직 방학을 하지 않았기에.

하나 둘 씩 종강을 하고 있고

다음주에 완전히 다 끝나기 때문에

이제는 요즘보다 자주 만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글 올라오는 것 없이 먼지만 쌓이던 창고임에도

들려주신 분들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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뷔민 남고생의 일상 9-2

길/남고생의 일상 (完)


1. 수학여행 2

 

숙소는 5명이서 한 방을 쓰기로 되어 있었다. 방 문 열자마자 먼저 들어간 지민은 널찍한 방에 소리를 질렀다. 와 씨발 존나 좋아. 뒤따라 들어오던 친구들도 감격스러운 소리를 질렀다. 작은 부엌에 거실에 방도 두 개나 되었다. 와 대박이네 진짜. 문 하나하나 열어서 구경하던 지민은 작은 방에 가방을 던져 넣었다. 지민의 행동에 다른 친구들도 너도나도 그 방에 가방을 몰아넣기 시작했다. 내일 일정은 10시부터다. , 내일 10시까지 자유시간이라는 의미였다. 지하에는 각종 놀이시설이 완벽하게 구비 되어 있고, 시간도 많고, 무엇보다...

 

, 오늘은 진짜 자면 안된다. 정우의 말에 태형을 포함한 세 명은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민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팔짱을 낀 채 그들을 바라보다가 후 한숨을 쉬었다. , 밤새고 그 다음날 어떻게 일정을 소화하냐. 지민의 말에 정우가 홱 고개를 돌려 지민을 바라봤다.

 

 

야 오늘이 무슨 날인데!

 

뭔 날이긴 뭔 날이야. 아무 날도 아니지.

 

너는 수학여행도 모르냐?

 

그러니까. 내일 수학여행 제대로 즐기려면 자야지.

 

 

쯧쯧, 태형아 네가 너무 애를 말랑하게 키웠다. 정우가 혀를 끌끌 차며 하는 말에 태형이 끅끅 거리며 웃었다. 그의 옆에 있던 지혁이 지민의 어깨에 손을 턱 올렸다. 지민아, 너는 정녕 수학여행의 묘미를 모르는 것이냐. 그게 뭐라고 표정과 말투가 비장하기 그지없어, 지민도 따라 진지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뭔데?

 

 

! , 새끼야, !

 

존나 모범생인 척 개 오진다니까.

 

색시가 모범생이긴 하지.

 

 

어디서 꺼냈는지 태형이 어느새 오징어 다리를 질겅이며 지민을 바라봤다. 지민의 표정이 와자작 구겨졌다. 김태형. 지민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자, 옆으로 누워 편안한 자세로 있던 태형이 아차 싶어 후다닥 일어나 지민에게 다가갔다. 잔뜩 굳은 지민의 표정이 장난이 아니구나를 느낀 태형은 그대로 그를 끌고 가 방 안에 들어갔다. , 나 잠깐만 이야기 좀 하고 올게. 친구들은 뭐라 대답도 하기 전에 쾅 닫혀버린 문에, 할 말을 잃어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지민이 팔짱을 끼고 태형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태형이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너 뭐야, 진짜 술 가져 왔어? 지민의 말에 금새 뭐 마려운 강아지 마냥 눈썹을 내린다. 화 풀어준답시고 짓는 애교 표정에 지민은 헛웃음을 뱉었다. 어이가 없네.

 

 

색시야. 수학여행인데.

 

수학여행이 뭐. 수학여행이 뭐 대수야? 모든 탈선이 다 용서가 되는 날이야?

 

그게 아니라,

 

싫다고! 너 그 때 뭐라고 그랬어. 옛날에 네가 나한테 뭐라고 그랬는지 생각 안 나?

 

아니 그,

 

너 기억 안나면 내가 말해줘? 너 그 때 다시는 안그러겠다고 했지. 술 안마시고, 다른 애들 안 패고 다니고, 조용히 지금처럼 아무 사고 안치고 다니겠다고 분명히 나랑 약속했어.

 

......

 

아니면 뭐, 제 버릇 남 못 주는 그런거냐?

 

미안해. 근데 진짜 색시야. 우린 그냥 가볍게, 막 술파티 벌이고 이런 거 아니고. 그 때처럼 이상한 사고나 치고 다니고 그러지도 않아, 진짜로.

 

. 내가 또 눈 감고 넘어가 줘야해?

 

색시야.

 

......

 

아아, 색시야...

 

 

태형이 지민의 팔을 붙잡고 딱 붙었다. 얼마나 간절하면 잘 안하던 애교까지 부린다. 진짜로! 진짜로! 그냥 맥주 한 캔 가볍게, 약속. 제 새끼손가락까지 내미는 태형의 행동에 지민은 태형을 노려보다가 못이기는 척 제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태형이 바로 지민의 새끼손가락에 제 손가락을 걸었다. 하 진짜... 내가 너... 지민은 말을 이으려다 무심코 마주친 시선에 결국 입을 다물었다. 저 놈의 얼굴은 쓸데없이 잘 생겨서 화가 나려해도 금방 푸시식 식고 만다.

 

 

대신 나 시간되면 잘 거니까, 나 자고 나서 술 마시던 뭘 하던 알아서 해.

 

응응.

 

시끄럽게 해서 나 깨면 그대로 술 파티 쫑낼 거니까 알아서 처신 잘 해라.

 

알았어.

 

그리고 쌤한테 들켜서 뭔 일 나면 너네 진짜 내가 다 죽인다.

 

알았다니까.

 

 

... 작게 한숨을 쉰 지민이 손을 대충 휘저었다. 나가자. 지민이 먼저 방에서 나오고 뒤를 이어 태형이 나왔다. 거실 소파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지민의 눈치를 보며 힐끗 태형을 본 그들은, 태형이 엄지를 들며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태형의 행동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저 빡빡한 빡찜이 융통성은 있는가봐, 그지. 정우가 자기들끼리만 들릴 정도로 속닥거리자 그 말을 들은 애들이 키득거렸다. 야야 숙소도 넓은데 뭔 게임이라도 하자. 정우의 주도 하에 사내 다섯이서 게임을 하기로 했다. 야 이곳에서 할 게임이라고는 그거 밖에 없다. 지혁이 제 가방을 뒤지면서 말했다. 그의 가방에서 나온 것은 긴 손수건이었다. 눈 가리고 술래잡기. 지혁의 말에 그들은 바로 거실을 깨끗하게 치우기 시작했다.

 

 

 

너희들 진짜 움직이는 거 없다. 지민은 두 손으로 손수건을 든 채 몇 번이나 그들의 다짐을 받아내고 있는 중이었다. 아 존나 알겠다니까, 빨리 눈이나 가려 새끼야. 정우는 벌써 12번째 듣는 소리에 지겨울 대로 지겨워져 대충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너희가 맨날 룰 파괴하니까 그러는 거 아니야! 지민도 지민 나름대로 욱해서 빽 소리를 질렀다. 보다 못한 태형이 직접 다가가 손수건을 뺏어 들어 확 지민의 눈을 가려버렸다. 아 깜짝아! 지민은 그의 힘에 순간 고개가 뒤로 젖혀져 다급히 태형의 팔뚝을 잡았다. 15초세고 잡으러 와. 손수건을 묶으며 말했다. 움직이지 마라, 진짜. 지민이 웅얼거렸다. 알았다니까. 태형은 다 묶고 그대로 이마에 살짝 딱콩 때렸다. 아야... 지민은 제 이마를 쓱쓱 문질렀다. 방에도 들어가는 거 없음! 거실에서만인 거 알지? 지민의 말에 결국 원성이 터졌다. 알겠다고! 알겠으니까 씨발 좀 작작해!

 

하나, , , . 숫자를 세기 시작한 지민에, 아이들은 소리 없이 분주해졌다. 먼저 명당을 잡은 정우는 가까이 다가오는 애들에게 훠이훠이 물러가라 손짓했다. 무음으로 입만 뻥긋 거리며 꺼지라 말하는 정우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태형도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섰다. 이제 간다. 지민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랜 정적 속에서 지민만이 방 안을 움직였다. 혹시나 어디 부딪치지는 않을까 걷는 걸음은 조심스러우면서도 팔은 사람을 찾으려는 움직임이 적극적이었다. 야이씨 너희들 있는 거 맞아? 지민은 한참을 안잡히는 애들 때문에 결국 짜증을 냈다. 어디선가 피식 하고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가 나 지민은 그 쪽으로 홱 고개를 돌렸다. 눈이 안보이니 자연스레 청각이 예민해졌다. 그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정쩡하게 서서 팔을 휘저으며 천천히 다가가던 지민은 팔에 걸리는 무언가에 엇! 하며 구부정히 있던 허리를 폈다. 지민은 그대로 손을 쓸어 올렸다. 벨트가 느껴지고, 셔츠의 감촉이 느껴지고, 손이 천천히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가슴께를 지나 어깨를 지나고 목을 쓸어 올려 엄지에 입술이 닿았다. 지민은 그대로 누군가의 볼을 감쌌다. 김태형? 지민은 거의 확신에 찬 말투로 소리치자 어떤 손이 볼을 감싼 손을 덮었다. 커다란 손의 느낌이 너무도 익숙한 것이라 지민은 재빨리 다른 손으로 제 눈을 가리고 있던 손수건을 끌어내렸다.

 

손수건을 내린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은 느낌을 받은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지민은 순간 당황해 온 몸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제 손등을 덮어 잡은 태형의 손과, 손바닥에 느껴지는 그의 볼의 감촉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졌다. 자연스레 전해지는 그의 온도가 어쩐지 평상시와 너무 다른 느낌이었다. 태형과 제 사이의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숨결마저 닿는 거리에 지민은 자신도 모르게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 속 동공까지 다 보이는 거리였다. 지민은 온전히 자신만 바라보는 태형의 그 눈빛에 자기도 어찌 피할 바 모르고 멍하니 따라 쳐다보기만 했다. 꽉 옭아매는 덫 같았다. 여태까지 태형이 자신을 저런 눈으로 바라본 적 있었지만, 오늘은 달랐다. 깊은 눈동자로 보는 그 시선이 진득했다. 무언가, 어떤 알 수 없는 감정이 잔뜩 엉켜있었다. 그런 태형의 시선에 지민이 민망할 정도였다. 지민은 제 마음 속 깊은 어떤 곳에서 작은 경보음이 울리기 시작했다고 생각했다. 무엇에 대한 경고음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무언가를 부정하고 있었다. 자기가 생각해도 이건...

 

야 너네 뭐하냐, 눈 맞았냐! 정우가 꽥 소리치자 지민은 그제야 퍼뜩 정신 차리고 한 발짝 물러났다. 자연스레 태형의 볼을 감싸던 손도 물렀다. 태형 역시 제 손을 물렀다. 손바닥은 여전히 지민의 온기를 담고 있었다. 태형은 자연스레 가벼운 주먹을 쥐고 능글맞은 웃음을 지었다. 지민의 표정에 혼란스러움이 역력했다. 색시야. 태형이 낮은 목소리로 부르자 어, ? 하고 지민이 놀라면서 대답했다. 뭐 해, 나한테 손수건 줘야지. 어어... 태형의 말에 지민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제 목에 둘러진 손수건을 뺐다. 색시가 해 줘. 매듭을 풀고 있는 지민에게 한 발짝 다가가면서 말하자 지민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손수건의 넓은 면으로 살짝 태형의 눈을 가리고 그대로 손수건을 뒤로 둘러 매듭을 묶기 시작했다. 태형이 허리를 살짝 숙였다. 그만큼 가까워진 거리에 지민은 또 다시 긴장하기 시작했다. 아니 잠깐, 왜 긴장하는데. 아까부터 이상했다. 지민은 무의식적으로 든 생각에 표정이 울멍울멍하게 일그러졌다. 손에 힘이 안난다. 색시야, 그렇게 느슨하게 묶으면 나중에 풀린다. 태형의 말에 그제야 또 정신을 차리고 손에 힘을 주었다. 태형이 손을 뻗어 자연스레 지민의 허리에 손을 감았다. 몸에 힘이 들어갔다. 무의식적으로 자꾸 태형의 행동을 의식하게 된다. 왜 그러냐 박지민... 지민은 자기도 알 수 없는 제 행동에 거의 울 듯한 표정으로 매듭을 마무리 지었다. 다 됐어. 지민의 말에 태형은 허리를 감았던 손을 풀고 허리를 폈다. 15초 셀 테니까 알아서 잘들 숨어라. 태형의 말에도 지민은 움직일 수 없었다. 머리가 너무 복잡했다. 제 눈을 가리고 있던 손수건을 내리자마자 보였던 태형의 그 눈빛, 그 눈빛에서 읽은 무언가, 그리고 제 감정. 그 모든 것을 잊을 수 없었다. 갑자기 태형이 자신에게 해왔던 모든 것들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신경 쓸 것도 아닌데. 갑자기. .

 

 

 

 

 

야 빨리 너네 씻... 방문을 연 셋은 바로 앞에 보이는 모습에 꾹 입을 다물었다. 태형은 고개를 받치고 옆으로 누워, 지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민은 어느새 자고 있었다. 태형 쪽으로 누워 자고 있는 지민이라, 방을 같이 쓰는 셋은 지민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태형의 행동은 다 보였다. 가만히 보고 있다가 다른 손으로 지민의 앞머리를 살살 쓸어 넘기기도 하고, 허리께에 있던 이불을 턱까지 끌어올려 덮어주기도 했다. 김태형, 씻어. 정우의 말에 그제야 태형은 그들을 발견했다. 벌써 다 씻었어? 태형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박지민도 씻어야 하는데. 정우의 옆에 있던 지혁의 말에 태형이 살짝 고개를 저었다. 깨우지마, 아침에 일어나서 씻어도 되니까. 태형은 조심스레 침대를 나왔다. 으응... 지민이 작게 앓으며 몸을 뒤척이자 태형이 살짝 뒤돌아봤다. 이불이 살짝 젖혀져 있었다. 태형은 다시 이불을 끌어 덮어주었다. 눈을 가리는 그의 앞머리를 살짝 쓸어 넘겨지고 볼을 감싸 안은 채 엄지로 몇 번 쓰다듬던 태형은 그제야 천천히 방을 나왔다.

 

오 미리 세팅 다 해놨네. 태형이 후다닥 적당한 자리를 찾아 앉았다. 나머지 세 명도 태형 따라 쪼르륵 앉았다. 색시 깨면 안되니까 조용히 놀아. 태형의 말에 정우가 썩은 표정으로 태형을 쳐다봤다. 야 무슨 술 파티를 조용히 해. 그의 말에 태형이 손을 저었다.

 

 

색시가 조용히 놀라고 했어. 자기 깨면 바로 술 파티 쫑 나는 걸로 알래.

 

아 씨바...

 

야 빡찜 말대로 해. 김태형 존나 빡찜한테 잡혀서 지금 걔가 서열 1위임.

 

 

그들은 빵터져 묵음으로 꺽꺽 웃으며 거실 바닥을 굴렀다. 태형도 오징어를 질겅거리며 실실 웃음을 흘렸다. 맞아, 중학교 때부터 김태형이는 그 놈의 색시한테 잡혀 살았지. 지혁의 말에 두 명이 맞장구 쳤다. 맞아, 중학교 때부터 빡짐한테 전화만 오면 바로 날라가고, 무슨 아내한테 잡혀 사는 남편인줄. 야 남편 맞잖아, 박지민이 색시인데. 또 뭐가 웃기다고 본인들끼리 빵터져 거실을 구르는지, 태형은 그들을 보며 오다리를 하나 더 물었다.

 

 

재밌냐? 새끼야, 재밌어?

 

. 존나 재밌는데. 너희들 하는 거 보면.

 

야 말 나온 김에 우리 확실히 하자. 어차피 시끄럽게 못논다고 했으니까 진실게임 쪽으로, ?

 

아 무슨 진실게임이야 유치하게. 나 너희들한테 궁금한 거 없어.

 

우리가 너한테 궁금해, 새끼야.

 

 

정우는 태형의 말을 막으며 그의 앞에 맥주 캔을 내밀었다. 전교생이 너희들의 관계를 굉장히 궁금해 하는 거 알고 있습니까? 지혁의 물음에 태형이 작게 인상을 찌푸리며 더욱 격하게 오징어를 씹어댔다. 참 나 남의 관계에 궁금할 게 뭐가 있다고. 정우는 혀를 쯧 차며 검지를 좌우로 까딱였다.

 

 

학교에서도 난리지, 너희 페북에서도 난리인 거 모르냐? 솔직히 말해. 진짜 진심으로 물어보는 거다. 너희 무슨 사이야?

 

그렇게 거창한 거 아니야. 그냥 색시야.

 

그게 이상하다니까?

 

 

가만히 듣고 있던 정우가 들고 있던 캔을 세게 내려놓았다. 지혁과 이한도 오징어를 질겅질겅 씹으며 태형을 바라봤다. 뭐가 이상해. 태형은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맥주를 홀짝였다. 야 막말로, 18살이나 먹은 사내새끼들이 색시라고 부르는데 그게 정상이냐? 지혁이 답답한 듯 가슴을 퉁퉁 치며 말했다. 태형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게 뭐 어때서. 뻔뻔하기 짝이 없는 대답에 셋은 할 말을 잃고 그를 쳐다봤다.

 

 

... 진짜 우리가 한참을 잘못 생각했다. 김태형 저 새끼 또라이인 거 우리가 제일 잘 알면서.

 

박지민도 또라이야. 지 한평생을 색시라고 불리면서 살았는데 그러려니 하는 것도 웃기지.

 

아니야. 박지민 존나 지랄지랄 많이 했는데 씨알도 안먹히니까 포기한 거야. 요즘도 가끔 빡치면 자기가 왜 색시냐고 또 개지랄 떪.

 

언제부터 색시였냐?

 

 

이한의 물음에 안주를 씹던 태형의 입이 움찔 멈추었다. 오래 됐어. 태형이 답했다. , 지민 색시 말고 다른 색시 만들 생각은 없냐? 정우가 음흉한 표정으로 물었다. 태형은 인상을 찌푸리며 그를 바라봤다. 그건 또 뭔 개소리야.

 

 

너 막말로 여자한테 엄청 인기 많잖아. 고백도 더럽게 많이 받았고.

 

인정하긴 싫지만 솔직히 김태형 존나 잘생기긴 했지.

 

근데 네가 여친 없는 게 솔직히 이해가 안 간단 말이지.

 

맞아. 너한테 고백한 애들 중에 괜찮은 애들 많던데. 얼굴뿐만이 아니더라도.

 

관심 없어.

 

 

태형은 그들의 말에 대꾸하며 맥주 한 모금을 더 들이켰다. 남은 세 명의 얼굴이 와자작 썩어 들어갔다. 하여간에 생긴 것들은 꼭 말도 이렇게 재수 없게 한다니까. 지혁이 들고 있던 땅콩을 집어던지며 말했다. 아니 진짜 관심 없는 걸 어쩌라고. 태형이 나름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항변했다. 고자 새끼 아니야 이거. 이한이 쯧 혀를 찼다. 난 네가 살면서 여자 애들도 그렇고, 여자 배우, 걸그룹에도 관심을 가진 걸 본 적이 없다.

 

이한의 말에 순간 거실에는 알 수 없는 정적이 감돌았다. 태형이 맥주 한 모금 더 들이키는 소리만 울렸다. 순간 세 명의 뇌리를 팍 스치는 어떤 생각에, 서로 눈치만 힐끗 봤다. 큼흠. 정우가 괜히 헛기침을 했다.

 

 

너 좋아하는 사람 있어?

 

......

 

, 진실게임이니까 솔직히 얘기해.

 

 

어어, 그래 맞아 진실게임이니까. 정우가 나머지 두 명에게 눈치를 보내자 지혁과 이한도 얼떨결에 맞장구치며 부추겼다. 태형은 손을 뻗어 땅콩을 하나 집었다. 좋아하는 사람? 태형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그들은 태형의 입만 주시했다. 태형은 엄지와 검지로 땅콩을 잡고 시선을 맞춰 가만히 쳐다봤다. 이 새끼 벌써 취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뜬금없는 행동이기는 했다.

 

 

갑자기 좋아하는 사람은 왜.

 

아니, 너 좋다고 고백해오는 사람마다 막 차니까. 혹시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런 거 아닌가 해서.

 

맞아. 좋아하는 사람 있어.

 

 

태형의 입에서 나온 말에 세 명의 시선이 부딪쳤다. 왠지 모를 긴장감이 돌았다. 그들은 어떻게 물어봐야 할까 서로 힐끗힐끗 눈치 보기 바빴다. 누군데? 이한이 조심스레 물어봤다. 태형은 무슨 생각을 그리 하는지 입을 꾹 다문 채 아까부터 들고 있던 땅콩만 멍하니 쳐다봤다. 야 너 취했냐? 이걸로 안 취해, 병신아. 보다 못한 지혁이 한마디 했다가 병신 취급당했다. 우리가 아는 사람이야? 이한이 다시 물어봤다. 그러자 태형이 뜬금없이 땅콩을 잡은 손을 확 뻗었다.

 

 

내가 땅콩 새싹을 봤어. 너무 예뻐서 이름도 지어주고 맨날 맨날 물도 주고 그렇게 길렀다? 나는 이 땅콩이 내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어.

 

뭐야, 갑자기.

 

씨발 안취했다며.

 

안취했다고.

 

 

태형이 너무 단호한 표정으로 너무도 아무렇지 않게 하는 말에 그들은 긴가민가해졌다. 취해서 헛소리 하는 건 맞는 것 같은데 발음도 그렇고 표정도 그렇고 취한 사람 같지는 않았다. 아니야, 존나 취한 것 같애. 정우가 제 옆에 앉아있는 지혁에게 살짝 속삭이듯 말했다. 지혁도 맞은편에 앉아 있는 태형을 보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내 거 인줄 알았는데. 뭐랄까. 쉽게 내 손에 안 들어오더라. 그때서부터 점점 걱정이 되기 시작하는 거야. 아 진짜 얘 내 거 맞지? 내 거일텐데. 내가 이때까지 매일 물주고, 사랑 주고, 예쁘게 잘 키웠는데. 심지어 애는 자라는 속도가 너무 더뎌. 나는 이만큼이나 컸는데, 이 땅콩은 도무지 크지를 않아.

 

어어...

 

당최 뭔 소리를 하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좋아하는 사람 이야기 하다가 갑자기 땅콩이 왜 나와.

 

들어봐 새끼들아. 얘가 안 큰다니까? 땅콩이 안 큰다고. 얘가 다 커야지 내가 먹든가 할텐데 애가 안 커. 이렇게 계속 밍기적 대다가는 누가 확 채갈 것 같은데, 그렇다고 안 큰 애 섣불리 잡아먹었다가 내가 아프면 어떡해, ?

 

 

태형은 제 손에 든 땅콩을 제 입에 쏙 던져 아작아작 씹어 먹었다. ? 이렇게 완전히 내 걸로 만들고 싶은데, 이 땅콩 새끼는 당최 무슨 생각인지 알 수가 없다고. 나는 네가 당최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다. 정우는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태형을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서, 그 땅콩은 누군데. 이한이 맥주 한 모금 들이키며 하는 말에 태형이 이한을 쳐다봤다. 우리도 아는 애야? 정우가 덧붙여 물었다. , 아는 애야. 태형의 입에서 한숨같이 나온 대답에 그들은 동시에 누군가가 떠올랐다. 씨발 내 이럴 줄 알았어. 정우가 작게 중얼거렸다. 너희 되게 묘한 거 알지. 이한의 말에 태형이 피식 웃었다.

 

 

묘한 건 둘 사이에 뭔가 있는 것 같은 거고. 나는 나 혼자 그런 거고.

 

아니, 너희 진짜 이상해. 중학교 때부터 그랬어.

 

그래? 너희 어떻게 알았냐? 나도 중학교 때부터 걔 좋아한다는 거 깨달았는데.

 

얘 진짜 취했나봐, 완전 나불나불 다 부는데?

 

안 취했다고. , 그냥 취하고 싶다. 취한 척 그냥 다 나불나불 거리고 싶다고.

 

 

그래서 마시는 거 아니야. 태형은 제 앞에 있는 맥주 캔을 한 번에 다 들이켰다. 술도 약한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정신이 멀쩡하냐.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캔 하나 더 따는 태형을 가만히 바라만 보던 그들은 무어라 할 말도 찾지 못해 머뭇거리기만 했다. 어차피 너희 오늘 술판 벌린 거 나한테 이거 물어보려고 한 거 아니었어? 태형의 물음에 이번에는 찔려서 할 말이 없었다. 처음에, 진짜 사귀는 줄 알았어. 정우의 말에 태형이 푸핫 웃음을 터뜨렸다. 걔 아직 덜 자랐어, 좋아하는 게 어떤 건지도 모를걸. 태형이 캔 입구를 만지작거렸다. 나 혼자 이만큼 자랐는데 걔는 아직도 여기. 태형은 한 손을 높이 들고 한 손은 낮추었다. 하아. 이내 두 손을 턱 떨구고 한숨을 내쉬는 태형에 정우가 손을 뻗어 어색하게 그의 어깨를 두어 번 쳤다. 오래도 좋아하네, 완전 호구 아니야. 이한의 말에 태형은 푸흐흐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냈다. 완전 호구라서 존나 기다리기만 하는 거 아니야, 멍청하게.

 

근데 나 누구라고 말도 안했는데 너희들은 누군지 어떻게 알아? 문득 생각났는지 물어보는 태형에, 그들이 또 한 번 얼굴을 와자작 구겼다. 네가 그렇게 좋아요 티를 내고 다니는 걸 모르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니야? 야 사람을 대체 얼마나 멍청하게 봤으면 그걸 몰랐을 거라고 생각하냐. 아마 우리 학교 애들 대부분은 모르긴 몰라도 너희 둘 사귀고 있다고 생각할걸. 한명씩 툭툭 던지는 대답에 태형은 또 웃음이 터져 그대로 뒤로 발라당 누웠다.

 

 

내가 그렇게 티냈구나.

 

그래 씨발아. 그래놓고 친구라니 우습지도 않아.

 

난 친구라고 한 적 없는데.

 

...?

 

색시랑 친구라고 한 적 없어.

 

......

 

단 한번도.

 

 

그러니까 더 미안하네, 색시한테. 태형의 말에 셋은 결국 입을 다물고 말았다. 태형은 누운 채로 팔을 들어 두 눈을 가렸다. 색시한테 나는 둘도 없는 친구일 거 아니야, 기억도 안 나는 어린 시절부터 같이 있었는데. 그래서 무슨 사이냐고 물어보면 대답을 못하겠어. 아 겉으로는 친구인데 사실은 내가 얘 짝사랑 하는 사이요 이럴 수는 없잖아. 어차피 고백 할 생각은 없어. 애초에 옆에 있기만 하면 그걸로 괜찮아. 그냥, 기적을 바라면서 기다리고 있는 거야. 그 애가 다 커서, 나한테 그런 감정을 느끼기를. 만약 그런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음 그 때는 정말 어떡하지.





















---

친구 이름은 모두 임의로 지은겁니다.
어떤 실존 인물과도 관련 없어요.
저 세명의 친구들이 중학교 때부터
태형과 함께 지냈던 친구들 입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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뷔민 남고생의 일상 9-1

길/남고생의 일상 (完)


1. 수학여행

 

와하하하하핳 씨발 수학여행이다!!!

 

정우의 큰 소리에 버스 안에 있던 반 친구들이 와아아아!!! 소리 질렀다. 기분 좋은 건 알겠지만 기사님 운전 하시는데 너무 큰 소리는 안된다. 선생님의 말씀에 정우가 제일 큰 소리로 대답했다. 네 알겠슴다!!

 

 

멀미약 붙였어?

 

.

 

먹는 멀미약도 먹었지?

 

.

 

아침은. 아침은 먹고 왔어?

 

먹었어.

 

뭐 먹었어? 많이 먹었지? 배 든든해?

 

. 많이 먹었어. , 그만 좀 해.

 

 

지민은 짜증어린 목소리로 말하며 손을 휘저었다. 아예 눈을 감고 버스 차창에 머리를 기대었다. 태형은 몸을 더 빼며 지민의 얼굴을 바라봤다. 색시 멀미 할 것 같으면 바로 말해야한다. 알았다니까! 지민은 아예 태형의 볼을 밀어냈다. 진짜 차만 타면 유난이야, 으휴 으휴! 지민은 아예 팔짱을 끼고 차창에 고개를 댄 채 눈을 감았다. 색시가 얼마나 멀미를 심하게 하면 내가 다 이러냐! 태형이 크게 소리쳤다. 지민은 질린다는 표정으로 태형을 보다가 결국 고개를 저었다. 차창 흔들려, 내 어깨에 기대. 태형은 퉁명스럽게 말하면서도 의자 등받이에 등을 딱 붙여 앉았다. 지민은 자세를 바꾸어 그의 어깨에 머리를 뉘었다.

 

빡찜 멀미함? 지민과 태형의 뒤에 앉아 있던 친구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을 내려다봤다. , 색시 멀미 겁나 심하니까 앞으로 말 걸지마. 태형의 대답에 어깨에 기대고 있던 지민이 팍 고개를 들었다. 나 그렇게 안심해. 태형이 피식 웃었다. 안 심하기는.

 

 

진짜 조금만 차 덜컹거려도 헛구역질 오진다니까.

 

내가 언제!

 

언제라니. 매 번 차 탈 때마다 나한테 토 하고 난리도 아니었으면서.

 

!... 씨이...

 

 

지민은 할 말이 없어 다시 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으이구. 태형은 지민의 머리를 밀듯이 쓰다듬었다.

 

와 진짜 수학여행을 제주도로만 가면 딱 좋았을텐데. 그러니까 말이야. 정우의 말에 태형은 폰으로 게임을 하면서 대꾸했다. 으응... 지민이 몸을 뒤척이자 손가락만 움직이던 태형이 움찔 멈추었다. 숨도 다 멈추며 힐끗 지민을 쳐다봤다. 태형의 팔을 껴안은 채 자고 있던 지민은 그의 팔을 더 세가 껴안았다. 태형은 결국 게임을 닫고 좀 더 편한 자세로 바꾸었다. 지민의 볼이 제 어깨에 눌리면서 땡땡해졌다. 태형은 가만히 지민을 내려다보다가 다른 손을 들어 그의 볼을 살짝 찔러봤다. 몰랑한 볼이 폭 들어갔다. 태형은 두어 번 더 찔러봤다. 제 힘에 따라 콕콕 들어가는 볼의 느낌이 좋았다. 말랑말랑하네. 태형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손을 더 높이 들어 머리를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머릿결이 태형의 손길에 따라 사르륵 넘어갔다.

 

어휴 씨발 우리 학교도 진짜 징하다. 정우가 투덜거리면서 버스에서 내리자 태형이 그의 머리를 툭 치면서 내렸다. 한옥마을이 어때서. 정우가 태형을 노려봤다.

 

 

너는 그럼 이 나이 먹고 한옥마을에 수학여행 가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 하냐.

 

한옥마을만 가는 거 아니잖아.

 

경주도 똑같아, 씨발! 무슨 중학생이냐? 경주로 수학여행 가게?

 

태태.

 

 

태형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자 정우의 말도 다 튕겨내고 바로 고개를 들렸다. 어휴, 내 말을 들어주는 사람도 없네. 정우가 민망함에 혀를 쯧 찼다.

 

왜 불렀어? 태형이 물어보기가 무섭게 살짝 휘청거리는 지민에, 태형이 깜짝 놀라 두 손으로 그를 부축했다. 어지러워? 어쩐지 다급한 태형의 목소리에, 지민은 태형에게 몸을 기댄 채 손만 내저었다. , 계속 말 시키지마 토할 것 같으니까. 버스 계단 덕에 살짝 위에 있는 지민의 허리를 감싸 안은 태형은 그대로 힘을 줘 안아 들었다. 지민은 화들짝 놀라며 급히 태형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으차차, 색시 진짜 손 많이 가는 거 알지? 지민은 그의 말에 머리를 콩 때렸다. 내가 네 손 빌린 적 있냐? 어이가 없어.

 

태형은 천천히 지민을 내려주었다. 야 버스 앞에서 연애질 그만하고 빨리 나와, 새끼야. 뭐 씨발? 뭔 연애야!! 지민이 뒤돌아 빽 소리를 질렀다. 어휴 저 성질머리는 언제 죽냐. 귀를 후비며 버스에서 내리는 친구를 죽일 듯 노려보던 지민은 흥 새침하게 고개를 돌렸다.

 

 

 

한옥마을은 자유 시간이었다. 아이들 모두 제각기 하고 싶은 것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지민도 눈을 빛내며 기웃 거리기 시작했다.

 

 

뭐하냐.

 

, 내가 봐 둔 한복집이 있는데...

 

 

태형의 물음에 대충 대답한 지민은 이내 폰을 들어 검색까지 하기 시작했다. 태형은 그대로 팔짱낀 채 짝다리를 짚고 서서 지민을 내려다 봤다. 한복 입게? 당연하지! 태형의 물음에 지민이 큰소리쳤다. 여기까지 왔는데 한복 빌려 입고 돌아다니는 게 낫지. 태형은 지민의 머리만 긁적였다.

 

 

그냥 아무데나 들어가서 빌리자.

 

안돼. 내가 예쁜 거 봐놓았단 말이야. 너랑 진짜 잘 어울린다고.

 

? 내 것도 봐놓았어?

 

너 아까부터 계속 당연한 소리만 할래?

 

 

태형은 입을 다물고 지민을 따라갔다. 아 찾았다! 지민은 저 앞에 있는 한복집을 발견하고 후다닥 뛰어 가게로 훅 들어갔다. 엄청 설레 하네. 그의 뒷모습에서도 느껴지는 설렘에 태형은 피식 웃었다. 한옥마을로 설레 하는 고2는 아마 쟤 밖에 없을 거다. 야 빨리 오라고! 가게 문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고 하는 소리에, 태형은 발걸음을 더욱 빨리 옮겼다.

 

아이고 지민이가 한복을 잘 골랐네. 한복집 주인이 호들갑을 떨며 한복을 꺼냈다. 그쵸 그쵸 이모, 이 애가 얼굴이 또 끝장나서 뭘 입어도 잘 어울리긴 하지만. 지민이 의자에 반대로 앉아 등받이에 팔을 얹은 채 조잘거렸다. 언제 또 지민이랑 이모가 됐대. 태형은 그의 친화력에 혀를 내두르며 한복을 받아들었다. 이모, 이모가 저한테 서비스 준다고 했잖아요오. 지민이가 말꼬리를 늘이며 말했다. 그럼 그럼, 이미 빼놨지. 이모는 가게 안쪽으로 들어갔다. 김태 너 그거 입어봐. 지민의 말에 태형은 자신이 들고 있는 한복을 쭉 내려다봤다.

 

 

색시야.

 

? 야 시간 없어 빨리 입고 사진 좀 건져야 할 거 아니야.

 

색시 애교 되게 많더라.

 

뭐래.

 

막 그렇게 말꼬리 늘일 줄도 알고. 아 뭐 하긴, 색시는 원래 애교가 많았지.

 

너 진짜 뭐 잘못 먹은 거 아니야? 아까부터 계속 뭔 헛소리야.

 

나한테는 안 그렇게 해주면서.

 

 

투덜대는 듯한 태형의 말투에 지민의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너 진짜 미쳤냐? 내가 돌았다고 너한테 그렇게 말하겠냐. 태형은 입술을 삐죽이며 한복만 만지작거렸다. 빨리 입고 나와, 나도 입고 올게. 지민은 제 한복을 입고 탈의실에 들어갔다. 태형은 멍하니 서 있다 지민이 들어가자 자신도 후다닥 옆 탈의실로 들어갔다.

 

한복을 입는 것은 꽤나 까다로운 일이었다. 얼추 옷을 걸치기는 했지만 옷고름이 문제였다. 이리저리 매보다가 결국 옆 벽을 똑똑 두들겼다.

 

 

.

 

색시야 이거 옷고름을 못 매겠는데.

 

내가 해 줄테니까 대충 입고 나와.

 

색시 다 입었어?

 

그냥 내가 네 쪽으로 갈게.

 

 

잠시 후 문을 노크하는 소리에 태형은 잠금장치를 풀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보이는 지민에, 태형은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헐 색시야... 너무 심장에 무리가 와. 지민은 그의 말에 피식 웃었다. 나 참 또 실없는 소리 하기는.

 

한복은 매듭을 잘 지어야 예쁘니까. 지민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야무지게 매듭을 묶기 시작했다. 태형은 꼼지락 거리는 지민의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요즘은 이런 거 잘 나오지 않아? 왜 이렇게 묶는 옷으로 골랐어.

 

이렇게 제대로 된 게 더 예뻐.

 

 

태형은 입을 다물었다. 색시가 이쁘다는데 그럼 색시 말대로 해야지. 직접 묶어주기까지 하는데. 저 조그만 손이 꼬물꼬물 움직이는 걸 가만 보던 태형은 결국 피식 웃고 말았다. 뭐야, 왜 그렇게 웃어. 지민은 다 묶은 고름을 다듬으며 말했다. 색시야. 태형의 나직한 부름에 지민은 그를 올려다봤다. . 태형은 고개를 저었다. 그냥.

 

지민아. ! 어디선가 들리는 주인 이모의 목소리에 지민이 크게 대답했다. 이거 서비스야. 지민은 서비스라는 말에 옷고름도 내팽개치고 후다닥 달려갔다. 순식간에 혼자 남은 태형은 왠지 모를 뻘쭘함에 옷고름 끝만 만지작거렸다.

 

 

원래 이거 비싼데 이모가 특별히 서비스로 해주는 거야.

 

감사 합니다 이모!

 

 

지민은 조심히 받아들고 해맑게 뛰어왔다. 한복을 입은 채 멀리서 달려오는 그를 보던 태형은 팔짱을 낀 채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게 이 형님의 힘이다.

 

형님은 무슨, 까분다.

 

 

태형은 지민의 얼굴을 확 쓸어내렸다. 아 그거 하지말랬지! 지민은 빽 소리를 질렀다. 그거나 내놔. 태형은 지민의 손에서 갓 하나를 뺏어 들어 대충 머리에 썼다. 야 그거 먼저 아니야. 지민이 망건을 건넸다. 태형은 그것을 어색하게 받아들었다. 그거 일단 써. 지민이 제 망건을 머리에 둘렀다. 태형은 지민을 힐끔힐끔 보며 그를 따라 망건을 두르기 시작했다. 앞머리 튀어나오게 하지마. 태형은 삐죽삐죽 튀어나온 앞머리를 망건 안으로 꾹꾹 밀어 넣었다. 지민은 자연스레 갓 끈을 묶었다. 태형은 자세히 보면서 어수룩하게 따라하다 결국 포기했다. 색시야... 태형이 작게 그를 불렀다. 지민은 그를 힐끗 봤다. 갓 끈을 양 손으로 잡고 멀뚱히 자신을 보고 있는 태형의 눈이 반짝반짝 하기만 했다. 제 갓을 다 묶은 지민은 태형의 갓도 묶어주기 시작했다. 턱 부근이 간질간질했다.

 

둘은 나란히 거울 앞에 섰다. 지민은 이리 보고 저리 보며 옷을 확인했다. 어때? 나 어울려? 지민의 물음에 태형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예뻐, 색시랑 잘 어울리네 색이. 태형의 말에 지민은 기분이 좋은지 흐흫 웃으면서 한번 사르르 돌았다. 그가 입은 옷자락이 그의 움직임에 따라 사라락 휘날렸다. 태형은 뒷짐을 진 채 거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어때, 옷 예쁘지? 허리를 살짝 숙여 눈높이를 낮춘 채 그를 올려다보는 지민에, 태형은 흠칫 놀라 몸을 살짝 뒤로 뺐다. , 진짜 예쁘다니까.

 

 

지민은 기분이 좋은지 연신 몸을 돌려댔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사라락 사라락 옷 소리가 났다. 우리 거울 앞에서 한번 찍자. 지민이 태형의 팔을 끌어 양 옆으로 섰다. 야 찍는다, 끝장나게 멋있는 얼굴로 찍어. 지민이 폰을 들어 거울에 초점을 맞추었다. 하나, , . 에 맞추어 태형이 지민의 어깨에 팔을 휙 둘렀다. 끄아아 너무 예뻐. 지민은 제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야 빨리 나가자. 잔뜩 들뜬 표정으로 제 손목을 잡아끄는 지민에, 태형은 주체 없이 끌려 나갔다.

 

내가 도령 한복이랑 어른 한복 중에 고민 했거든. 태형은 조잘조잘 거리는 지민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아무래도 이게 더 어울릴 것 같아서 이거 했지. 태형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색시는 도령 한복 하지, 나는 이거 하고. 태형의 말에 지민은 태형을 힐끗 올려다봤다. 장난하냐? 나만 그거 입으면 나 완전 형 따라 놀러 온 애로 보일걸. 지민의 말에 태형이 빵 터져 끅끅거렸다. 웃지마, 새끼야. 지민의 말에 태형은 애써 웃음을 참았다. 지민이 폰을 만지작거리더니 이내 높이 들어올렸다. , 일단 붙어. 태형은 자연스레 그의 옆에 딱 붙었다. 익숙하지 않은 옷차림에 갓까지 쓰고 있어 위치 잡는데 조금 오래 걸리긴 했지만 어찌저찌 예쁘게 셀카 잘 찍었다. 오늘 뭔가 사진 잘 나오는 것 같아. 그렇게 말하는 지민의 표정이 만족스러워 하는 표정이라, 태형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햇살도 바람도 배경도, 모든 게 완벽했다.

 

 

 

태형아 나랑도 같이 사진 찍자.

 

지민은 아까부터 다가오는 반 친구와 태형이 사진을 찍어주느라 표정이 말이 아니었다. 본인이 생각해도 양반집 도련님 같은 비단결 고운 옷 입고 뒷짐 진 태형이 멋있긴 했다. 내가 고르긴 했지만 너무 잘 골랐나. 지민은 투덜대면서 대충 한 방 찍고 됐다며 손을 저었다. 한 명 찍어주면 또 다른 한 명이 오고, 또 찍어주면 또 한 명이 찍어 달라 하고 구경할 틈도 없었다. 이게 뭐야 진짜. 지민은 폰을 내리면서 투덜댔다. 멀리서 보고 있던 태형이 지민에게 다가왔다. 그렇게 싫으면 거절하면 되지 뭘 다 해주고 있어. 태형이 손을 뻗어 한복 소매로 그늘을 만들어주었다. 지민은 쭈그려 앉은 채 고개만 살짝 들어 태형을 올려다봤다.

 

확실히 그림이 예쁘긴 하더라. 뜬금없는 지민의 말에 태형이 고개를 갸웃했다. 여자 한복이랑 같이 서 있으니까 되게 잘 어울리더라고. 지민은 태형의 폰에 있는 사진들을 넘겨보며 말했다. 태형은 그의 팔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갑작스런 힘에 지민은 휘청거리며 일어났다. 우리도 찍어 달라고 하자. 지민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성큼성큼 걷던 태형은 방금 같이 찍었던 여자를 불러 세웠다. 우리 좀 찍어줘. 지민이 태형의 손을 살짝 뿌리쳤다. 아파, 그렇게 안잡아도 어디 도망 안 가. 태형은 멋쩍은 듯 살풋 웃었다. 저어기 담벼락 쪽으로 가 봐, 예쁘게 찍어줄게. 그녀의 말에 태형과 지민은 담벼락 쪽으로 걸어갔다. 예쁘게 핀 개나리가 담벼락을 넘어서 흐드러져 있었다. 색시 한복 색이다. 태형이 개나리를 살짝 건들면서 하는 말에 지민이 힐끗 제 한복을 내려다 봤다.

 

 

나랑 잘 안어울리나?

 

아니. 예쁜데.

 

야 나도 멋있다는 말 듣고 싶거든? 아까부터 계속 예쁘다고만 하고. 너만 멋있다고 그래, 애들이.

 

 

어쩐지 풀 죽은 듯한 지민의 목소리에 태형이 키득거렸다. 그래, 색시도 엄청 멋있어. 어쩐지 엎드려 절 받은 기분이라 지민은 뾰로통한 표정을 숨길 수 없었다.

 

, 너희들 좀 더 붙어봐! 멀리서 소리치는 말에 지민이 옆으로 한발 짝 다가갔다. 어떻게 서야 예쁘게 나오지. 지민은 고개를 갸웃 거리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색시야. ? 옆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마자 확 당겨진 몸에 지민의 동공이 커졌다. 순식간에 맞닿은 상체와 가까워진 태형과의 얼굴과, 허리께에 느껴지는 단단한 팔뚝에 너무 놀라 딸꾹질까지 했다.

 

찍었어? 여자에게 큰 목소리로 물어본 태형은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고 나서야 만족스러운 듯 크큭 웃었다. 야 이 새끼야 깜짝 놀랐잖아! 지민이 그의 팔을 퍽퍽 때렸다. , 아파! 아프다면서도 실실 웃는 태형의 얼굴이 너무 얄미워 지민은 그를 세게 밀어냈다. 태형은 쉽게 밀려났다. 여자가 태형의 폰을 들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너희들 그림 죽이던데, 나도 모르게 셔터 눌렀다 야. 무슨 소리인가 싶던 지민은 사진을 보자마자 경악을 했다. 야 뭘 이런 걸 찍어! 거칠게 폰을 뺏은 지민이 재빨리 사진을 지우려 하자 태형이 홱 폰을 낚아챘다. 뭐야! 고개를 드니 태형이 손을 위로 쭉 뻗은 채 폰을 흔들고 있었다.

 

 

이거 내 폰이고, 사진은 내 폰 안에 있으니까 사진도 내 거고.

 

? 야 그건 좀 아니잖아!

 

뭐가 아닌데?

 

...

 

존나 예쁘게 나왔는데? 날씨도 완벽하고 배경도 완벽하고 사람도 완벽하고.

 

자세가 안완벽해. 그게 뭐야 진짜 낯부끄럽게!

 

그림, 예쁘지 않아?

 

 

갑자기 자신에게 물어보는 태형에, 여자는 순간 놀랐다. ...어어, 예뻐. 왠지 그렇게 대답 안하면 안될 것 같은 태형의 표정에, 여자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아니 씨발 이건 꼭... 지민은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이건 뭐? 태형이 되물으면서 도무지 모르겠다는 듯 짓는 표정이 짜증난다. 언젠가 내가 저거 지운다. 지민은 이만 부득부득 갈며 태형을 노려봤다.

 

 

 

태형은 아마 이 한옥 마을에서 제일 사진 많이 찍힌 사람일 것이다. 갓을 써도 그 얼굴이 가려지지는 않는지, 같은 학교 친구들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사진 찍어도 되냐고 물어왔다. 처음 몇 번은 거절하기도 뭣해서 같이 찍어주다가 이내 귀찮아졌는지 다가오는 사람마다 죄송하다며 재빨리 빠져 나오고는 했다. 몰래 찍는 사람도 분명 있었다. 지민은 그게 못내 마음에 안들었다. 아니 초상권도 안배웠나, 뭐 저렇게 몰래 찍어. 지민이 고개까지 돌려 사람들을 몰래 노려보면, 태형은 그의 볼을 잡고 앞으로 돌리고는 했다. 그러다 넘어진다, 앞 보고 다녀야지. 지민은 태형을 쭉 훑어봤다. 참 저렇게 이목구비 뚜렷하게 생겨서는 한복도 찰떡같이 어울린다. 지민은 갑자기 후다닥 앞으로 뛰어가더니 뒤돌았다. 태태, 거기 있어봐. 지민은 재빨리 폰을 든 채 제자리에 쭈그려 앉았다. 뒷짐 져봐. 그의 요구대로 태형은 뒷짐 진 채 지민을 바라봤다. 지민은 두어장 사진을 찍더니 이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색시야, 너도 제대로 서 봐. 태형의 말에 지민도 뒷짐 진 채 섰다. 너무 잘 나왔어. 태형의 말에 지민이 후다닥 다가왔다. 어디 어디? 지민도 사진을 보고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나중에 카톡으로 줘. 그의 말에 태형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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뷔민 남고생의 일상 8

길/남고생의 일상 (完)



1. 페북

 

 

오랜만에 들어간 페북에 친구 추천이 와 있었다. 쓸데없이 이런 거 존나 뜬다니까. 작게 쯧 혀를 차며 누군가 보던 지민은 예상치 못한 사람에 누워있던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 사람의 프로필을 눌러봤지만 아무런 글도 사진도 올라온 것은 없었다. 지민은 침대에서 내려와 바로 발코니로 나갔다. 김태형! 김태형! 그의 외침에 맞은편 방에 커튼이 젖혀지더니 태형이 나왔다. 태형은 뿌듯한 웃음을 지으면서 발코니 문을 열었다.

 

 

너 페북 뭐야? 너도 페북 할거야? 

 

.

 

갑자기 왜? 너 그런 거 귀찮다고 안했잖아.

 

그냥. 그런데 색시 페북 엄청 열심히 하나봐? 뭐 되게 많이 올렸던데.

 

... 이것저것.

 

흐음...

 

, 너 사진별로야? 싫으면 지우고.

 

아니 그건 상관없는데.

 

... , 너 또 내 춤 영상 가지고 지랄 하지마라 진짜.

 

 

태형이 들켰다는 듯 혀를 살짝 내보였다. 이씨 저럴 줄 알았어. 지민은 태형을 밉지 않게 노려봤다. 아니이... 맨날 사람들이 색시 페북 보고 이야기를 하니까 대체 뭐가 올라오길래 그렇게 말들이 많은지 궁금해서 만들었어. 태형의 말을 듣던 지민의 얼굴이 와자작 썩어 들어갔다.

 

 

야 이 자식아, 그 말은 지금 내 페북 감시하려고 만들었다는 거야?

 

그런 의미는 아니었지만 색시가 그렇게 느꼈다면 뭐...

 

맞잖아, 새끼야!

 

 

열까지 올라 벌게진 지민의 얼굴을 여유로운 표정으로 보던 태형은 아예 발코니 난간에 팔을 받치고 턱을 괴기까지 했다. 씨익씨익 거리던 지민은 결국 후 한숨을 쉬었다. 쟤한테 화내봤자 제 속만 열 뻗치지 그에게는 아무런 반응도 얻어낼 수 없음을 아주 잘 알았다. 색시야. 태형의 물음에 지민은 태형을 바라봤다. 같이 사진 찍을래? 태형의 물음에 지민은 멍하니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갈까?

 

아니, 내가 갈게!

 

 

태형이 바로 후다닥 방 밖을 나가는 모습을 보고 지민도 따라 방을 나섰다. 계단을 내려와 현관문을 열어 문을 받치고 기다렸다. 작은 문을 열고 마당 쪽으로 들어오는 태형의 모습이 보였다. 색시야. 지민이 보이자 헤 웃으며 다가온 태형이 자연스레 집 안에 들어갔다. 태형이 다 들어가고 나서야 지민이 문을 닫았다. 근데 갑자기 사진은 왜? 지민의 물음에 태형은 히히 웃기만 할 뿐 가르쳐 주지 않았다.

 

소파에 발라당 뒤로 눕듯이 앉은 태형이 제 옆자리를 툭툭 쳤다. 지민은 그의 옆에 앉아 태형을 바라봤다. , 페북에 올릴 거니까 제대로 붙으세요. 태형이 폰을 높이 들면서 하는 말에 피식 웃은 지민이 그의 옆에 붙었다. 다른 한 손을 자연스레 지민의 어깨를 감싼 태형이 셀카 화면에 익살맞은 표정을 지었다. 색시야 너도 이렇게 표정 지어. 태형의 표정을 본 지민은 빵터져 그의 가슴팍을 퍽 때렸다. 야 그게 뭐야. , 빨리. 태형의 재촉에 지민은 웃음을 참으며 따라 익살맞은 표정을 지었다. 지민은 찍힌 사진을 보며 질색했다. 어우야, 그건 페북에 올리지 마라. 태형도 폰을 내려다 봤다.

 

 

? 잘 나왔는데?

 

야 너만 잘 나왔지 난 뭐냐. 존나 빵떡이야.

 

아니야. 귀엽게 잘 나왔어.

 

아 싫어. 진짜 이상하게 나왔어. 너 올리기만 해봐, 진짜.

 

, 색시야. 미안.

 

 

올렸네. 해맑게 웃으며 폰을 보여주는 태형에, 지민이 질색하며 태형의 폰을 빼앗았다. 아 싫다고 했잖아!! 재빨리 삭제를 누르려는 지민의 손을 제지하고 제 폰을 다시 뺏어온 태형이 지민을 밉지 않게 노려봤다.

 

 

왜 내 페북이잖아. 내 마음대로 올릴 거야.

 

아 그건 진짜 안된다고! 이상하다고! 아 내 볼 어쩔 건데!

 

! ! 볼이 어때서, 귀엽기만 하구먼!

 

눈 삐었냐? 지만 잘 나왔다고 막 올리냐?

 

아닌데... 진짜 예쁜데...

 

 

태형은 제 폰을 엄지로 쓱쓱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지민은 결국 입을 다물었다. 저렇게 좋아하는데... 지민은 결국 또 그렇게 넘어갔다.

 

근데 색시야, 내가 이렇게 사진을 올리면 다른 사람들도 다 볼 수 있어? 태형의 물음에 지민이 고개를 빼서 태형의 폰을 바라봤다. 글쎄, 넌 지금 친구가 한명도 없어서... 일단 나 친추해. 지민의 말에 태형이 눈만 끔뻑이며 지민을 바라봤다. 폰만 쳐다보고 있던 지민도 고개를 돌려 태형을 바라봤다. 친구추가 하라고. 지민의 말에 태형이 멋쩍게 웃었다. 친구추가? 어벙한 말투에 헛웃음을 뱉은 지민이 결국 그의 손에서 폰을 뺏었다. 어차피 제대로 쓰지도 않을 거 왜 만들었대. 혼잣말로 중얼거린 지민이 익숙하게 자신을 찾아 친구요청을 보낸 후 자신의 폰으로 친구 요청을 수락했다.

 

 

이렇게 하면 내 사진을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있어?

 

너랑 친구인 사람이 볼 수 있고 내가 좋아요를 눌렀거나 댓글을 쓰면 나랑 친구인 사람도 볼 수 있을걸.

 

아 진짜? 그러면 내가 이 사진 올렸으니까 너만 볼 수 있어?

 

몰라, 너는 사진 퍼지는 거 순식간일걸. 타고 타고 들어가면 다 나와.

 

아 그래?

 


태형은 신기한 듯 몇 번 만지작거리다가 이내 흥미가 식었는지 옆에 툭 폰을 던지듯 놔두었다. 근데 너 진짜 왜 페북 만들었어. 지민의 물음에 태형은 비싯비싯 웃기만 하고 얘기 해주지 않았다. 지민은 뚱한 표정으로 꿍얼거렸다. 그래, 말해주기 싫으면 하지 마라 치사하게. 색시는 모르는 게 좋을걸. 태형의 의미심장한 말에 지민은 고개만 갸웃했다. 내가 왜?

 

 

 

 

 

진짜 감시하려고 페북 만든 거야? 또 한 번 울리는 카톡 알람에 지민은 으아아악!!!! 악을 지르며 제 머리를 마구 헝클였다. 저 알람을 하도 들어서 이제 노이로제 걸릴 것 같았다. 지민은 벌써 20번째 카톡에 들어갔다. 그 와중에도 뭐 그리 할 말이 많은지 카톡 알람이 계속 울렸다.

 

[색시야 이 영상은 좀 아니지 않냐.]

 

[사진]

 

[이것도 좀 너무 야해]

 

[사진]

 

[얘네는 뭔데 색시한테 친한 척이야 아는 사람?]

 

[사진]

 

[아 색시야 이거 나한테만 보여줬던 거 아니었어?ㅠㅠㅠㅠ]

 

[사진]

 

이 와중에 정성스레 캡처해서 보내는 게 대단하다싶다. 지민은 무시하고 카톡을 나왔다. 그러자 또 무섭게 울리기 시작하는 알람에 지민은 아예 무음으로 바꾸었다. 아 이제 좀 조용하나 싶었더니 발코니 쪽 창문을 툭툭 치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색시야, 일부러 못 듣는 척 하는 거 다 알아. 태형의 목소리도 들렸다. 지민은 베개로 두 귀를 막았다가 결국 짜증을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을 거칠게 열어제끼니 태형이 기다란 막대기를 들고 서 있었다. , 나왔다.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꼴에 지민은 욱했다.

 

 

아 나왔다? 나왔다아? 너 나한테 무슨 악감정 있어? 왜 계속 못 괴롭혀 안달이야, 이 새끼야!

 

몰랐는데 색시 페북 되게 오래 했더라. 올라온 게 생각보다 훨씬 더 많아서 놀랐어.

 

당연하지, 내가 그걸 언제부터 시작했는데.

 

진짜 마음 같아서는 색시 춤 영상 다 내리고 싶지만.

 

너 이러려고 페북 가입했지.

 

그럼. 이거 아니면 내가 페북 가입 할 이유가 뭐가 있어.

 

...

 

아 근데 모르는 사람한테서 계속 친추와. 그거 막는 방법 없어?

 

몰라, 새끼야 너 알아서 해.


 

지민은 홱 뒤돌아서 발코니 창을 확 닫았다. 창을 닫기가 무섭게 또 탕탕탕 창을 쳐대기 시작하는 통에 지민은 아예 제 방을 나갔다. 발코니를 없애든가 해야지 원. 지민은 거실로 내려가 소파에 푹 몸을 뉘었다. 이제야 폰이 좀 잠잠해졌다. 지민은 카톡을 다시 확인하기 시작했다.

 

 

[색시야 영상 진짜 많이 올렸네]

 

[내 사진도 진짜 많이 올렸네]

 

[좋아 내 사진 올린 거]

 

[같이 찍은 사진도 많이 올리지]

 

[색시 되게 잘 나왔다 댓글 보니까 다 칭찬해]

 

너 칭찬한 거지 나 칭찬한 거냐? 지민은 피식 웃었다.

 

[아 색시야 이건 너무했다 내가 이거 제일 좋아하는 거 알면서]

 

[사진]

 

[이건 인간적으로 내리면 안돼? 이건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지민은 망설임 없이 카톡을 나갔다. 태형이가 좋아한다던 춤 영상은 사실 지민도 좋아하는 것이었다. 언제였더라, 초등학교 땐가 중학교 땐가. 중학교 때였던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제 인생 영상이었다. 처음으로 수많은 관객들 앞에서 춤을 췄었다. 정말 정신없이 췄었다. 어떻게 췄는지 지금도 기억이 안난다. 기억나는 거라고는 끝난 노래와 함께 열광적인 반응뿐이었다. 나중에 태형이 춤 춘 영상을 보내주면서 말했었다. 너무 예뻤다고, 잘했다고, 내가 네 친구인 게 너무 자랑스럽다고. 아마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춤에 빠졌었던 것 같다. 아 지금 생각해보니까 김태형 이 자식 이때부터 남 앞에서 춤추는 걸 싫어했던 것 같기도 하고. 지민은 페북에 들어갔다. 알림은 언제나 미어터졌다. 그냥 똑같은 고딩일 뿐인데 왜 이렇게 관심을 주는 거지. 지민은 여태 제 페북의 인기를 이해하지 못했다. 딱히 다른 사람들의 페북과 다를 것도 없는데. 아 물론 제 춤에 관심을 가지고 좋아해주시면 고맙지만. 그 중 김태형이 댓글을 남겼다는 알림에 지민은 망설임 없이 댓글을 하나하나 보기 시작했다.

 

 

멋있네 색시야

 

항상 예쁘고 멋있지만 춤 출 때가 제일 멋있어

 

헐 이런 사진을 올리다니 부끄럽게

 

나 모르는 사이에 이렇게나 많이 올렸다니 나 이거 다 보기 전까지는 안잠

 

와 이 사진도 있었구나 대박이다ㅋㅋㅋㅋㅋㅋㅋ

 

어 이 사진 나 모르는 사진인데 나 몰래 찍었구나 하긴 내가 찍고 싶은 얼굴이긴 하지ㅋㅋㅋㅋㅋ

 

사진 속 색시도 예쁘지만 실물로 보는 색시는 훨씬 더 예뻐

 

색시야 너 춤 잘 추는 거 이제 다른 사람들도 다 아니까 이제 그만 올리면 안될까

 

아 이건 나만 보고 싶었는데ㅠㅠㅠㅠㅠㅠㅠㅠ 여기에 올리면 어떡해ㅠㅠㅠㅠㅠㅠㅠ

 


지민은 하나하나 태형의 댓글을 읽어보면서 낄낄댔다. 완전 자기 멋대로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지민의 입꼬리는 내려갈 줄 몰랐다. 제일 최근에 올렸던 글부터 천천히 내리면서 하나하나 댓글을 보던 지민은 제일 처음 올렸던 영상 댓글에서 움찔 손을 멈추었다. 태형이가 제일 좋아한다는 춤 영상. 제가 처음으로 많은 관객들 앞에서 췄던 그 날 영상. 저 역시 제일 좋아하는 그 영상. 기어코 여기까지 다 봤는지 어김없이 댓글이 있었다.

 

 

또 반했어 그때처럼

 

 

다른 댓글들과는 다르게 한마디만 적혀 있는 그 댓글에 지민은 순간 멍해졌다. 얘 또 장난치네. 지민은 잠시 고민하다가 태형의 댓글을 눌러 답댓을 달았다. 태형의 많은 댓글 중에서 처음으로 다는 답댓이었다.

 

 

ㅋㅋㅋㅋㅋ 이 형님이 좀 멋있지 아마 이 영상은 남자들도 반할 걸ㅋㅋㅋㅋ

 

 

답댓은 없었다.

 

 

 

 

 

 

 

 

 

 

1. 여장

 

 

후후훗. 아까부터 음흉하게 웃는 태형에 지민이 끔찍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태형을 바라봤다. 태형은 손등으로 입을 가리며 웃음을 참아보지만 계속해서 새어나오는 웃음을 어찌 할 수는 없었다. 음흠흠흠 얼마나 신이 났는지 콧노래까지 부르며 책상서랍을 뒤져 교과서를 꺼내는 모습을 쭉 본 지민이 입을 열었다.

 

 

너 어디 다쳤어?

 

-?

 

누구한테 사기 맞았냐?

 

아아니이!

 

근데 왜 이렇게 미친놈처럼 실실 웃고 있지?

 

으흐흐흥.

 

 

태형은 누가 봐도 기분 좋은 듯한 웃음을 지으며 지민에게 얼굴을 들이댔다. 아오 씨, 지금 어디다 얼굴을 들이미는 거야! 지민이 태형의 얼굴을 밀어냈다. 우리 색시- 태형은 말꼬리를 늘이며 얼굴을 더 들이댔다. 왜 이래 얘가 진짜 미쳤나봐! 지민은 점점 몸을 뒤로 빼며 그의 얼굴을 밀어냈다. 그제야 가까이 들이대던 얼굴을 빼는 태형이다. 내가 뭘 들고 있는지 알면 아마 색시 깜짝 놀라 뒤로 자빠질걸. 태형의 말에 지민이 힐끗 태형을 바라봤다. 뭔데. 지민의 물음에 태형은 의미심장하게 씨익 웃었다. 마치 먹잇감을 포착했다는 듯한 그 눈빛에 지민은 아차 했다. 쟤 저런 표정 지으면 분명 뭐가 있다는 건데.

 

 

색시가 너어무 예뻐서 여장해도 여자로 착각하는 사람 많겠다 그치.

 

뭔 개소리야, 존나 미쳤나봐.

 

색시 중학교 때도 여장대회에서 1등 했잖아.

 

아 씨발 흑역사 얘기 하지마 좆같으니까. 근데 갑자기 그 얘긴 왜 하는데.

 

으흐흫.

 

나 그 때 사진 다 지우고 찢어버렸는데? 너한테 없을텐데?

 

, 글쎄.

 

씨발! 너 지금 가지고 있지! 어디 있어!

 

 

지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미친 듯이 태형의 몸을 뒤지기 시작했다. , 잠깐 으핰핰핳핳앜 간지, 간지러워! 태형이 지민의 어깨를 꾹 잡고 밀어내려고 하지만 이런 힘은 대체 어디서 나는지 지민은 밀려나지도 않았다. 대체 어떻게 구한거야! 지민은 거의 악을 지르며 태형의 바지 주머니에 안에 손을 넣었다. 아 간지럽다고 진짜! 태형이 의자 위에서 몸을 비틀다가 결국 우당탕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그럼에도 지민의 집념은 완고했다. 아예 태형의 눕히고 위에 올라타 못 움직이게 막고 주머니를 뒤졌다. , 항복 항복! 태형이 두 팔과 다리를 휘젓고 팡팡 바닥을 내려쳐도 지민은 꿈쩍도 안했다. 온 주머니를 다 뒤져도 나오지 않았다. 아씨 어딨는 거야. 지민은 그 상태로 손을 뻗어 가방을 들고 와 뒤지기 시작했다. 아 어디 뒀냐고! 지민의 윽박지름에 태형은 미묘한 웃음만 보이면서 지민을 올려다봤다. 책상서랍 안에도 손을 넣어 찾아봤다. 어디에도 나오지 않았다. 나 그 사진 가지고 있다 한 적 없는데. 태형의 말에 그제야 지민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태형을 내려다봤다. 나 그 사진 가지고 있다고 말한 적 없어, 색시야. 지민은 입술을 꾹 깨물고 일어났다. 태형은 상체를 일으켜 앉은 채로 지민을 올려다봤다. , 뭔가 찜찜한데. 지민은 미심쩍은 눈빛으로 태형을 바라봤다. 저 요상하게 빙글빙글 웃는 낯짝이 거슬린단 말이지... 심증만 있고 물증은 없으니 답답한 마음으로 자리에 앉았다. 태형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색시 어릴 때 여장 사진은 있지!

 

태형의 말에 지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의자가 뒤로 넘어가면서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야 이 씨발아! 지민은 진즉에 교실 밖을 뛰쳐나간 태형의 뒤를 따라 뛰쳐나갔다. 색시 너무 예쁜 거 아니야? 나 순간 누나인줄 알았잖아! 태형이 도망가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너 잡히면 진짜 뒤진다! 지민이 빠른 속도로 태형의 뒤를 쫓았다.

 

지민은 부끄러운 제 과거를 활활 다 태워버린 줄 알았다. 사진은 남기고 싶다는 엄마의 말에도 그것만큼은 안된다며 길길이 날뛴 끝에, 엄마가 다 처리한 줄 알았는데 그걸 어떻게 태형이가 가지고 갔는지 의문이다. 또 김태형이 사바사바 했거나 엄마가 태형이한테 줬겠지. 굳이 복잡하게 생각 안해도 어떤 루트로 사진이 저 또라이한테 갔는지 알만하다.

 

지민의 부모님은 둘째에게 첫째 옷을 자주 입히고는 했었다. 그러니까, 지민은 어렸을 때 꽤나 자주 제 누나의 옷을 입었었다. 애기 때는 다 예뻐서 괜찮다는 이유로 치마도 자주 입고 사진을 찍었다. 유치원생 때까지는 그랬다. 뭣도 모르고 예쁜 옷 입는다고 좋아했었지... 지민은 지금도 옛날에 제가 그런 옷을 입고 돌아다닌 기억이 되살아나면 이불을 뻥뻥 차댔다. 이제 이불을 뻥뻥 차댈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배신감인지 뭔지 뒤통수가 괜히 아리다.

 

너 안오냐 개새끼야!!! 지민이 빽 소리를 질렀지만 태형은 이미 저 멀리 계단을 내려가면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지민은 두 무릎을 손으로 짚고 헥헥 숨을 몰아쉬었다. 옛날부터 날씨, 계절 가리지 않고 마냥 기분 좋은 강아지 마냥 운동장을 활보한 태형과, 땀 흐르는 것은 춤추는 것 말고는 절대 싫은 지민은 애초에 달리기 실력이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 아 씨발 진짜 저거 어떡하지. 지민은 결국 복도 바닥에 벌러덩 엎어졌다. 아직도 얼굴이 화끈화끈하다. 중학교 때 사진이 아닌 걸 다행으로 생각해야 할지, 제 기억 저어기 구석탱이 처박아 놓았던 과거가 드러난 것을 비통해 해야 할지 가늠도 안됐다. 아니 그냥 어이가 없어. 지민은 결국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아래층으로 내려간 태형은 헉헉 숨을 몰아쉬며 지민이 안오나 목을 쭉 빼고 두리번거렸다. 안오네. . 안도의 한숨을 내쉰 태형은 마이 안주머니에서 사진을 꺼내 내려다보았다. 흐흫. 태형은 어지간히도 기분 좋은 듯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지민은 하나 간과한 게 있었다. 본인의 사진은 본인 집에만 있는 줄 안다. 태형과 지민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친했다. 둘이 붙어 지낸 만큼 서로 가지고 있는 사진도 많을 것이고, 당연히 지민의 여러 모습이 태형의 사진첩에도 있었다. 어제 아무 생각 없이 사진첩을 열어봤다가 발견한 사진들이었다. 중학교 때 여장 사진도 지민이 다 없애 버렸다고 생각하겠지만 아마 클라우드 뒤져보면 나올지도 몰랐다. 어렸을 때 이렇게 다니기도 했구나. 태형은 문득 그런 생각을 하며 엄지로 살살 사진을 쓸었다. 그러다 갑자기 아아악!!! 소리를 지르며 머리를 부여잡았다. 이런 멍청한 두뇌 같으니라고! 이런 모습을 기억하고 있어야지!!!

 

 

 

 

 

, 내놔. 지민이 손을 뻗으면서 하는 말에 태형은 들은 척도 안했다. 그거 내 사진이잖아, 엄마한테 받았지? 그의 물음에 고개만 젓는다. 내건데. . 지민은 헛웃음 쳤다.

 

 

야 그게 무슨 네 거야. 우리 집에서 받은 거 아냐?


아닌데? 진짜 우리 집 사진첩에서 가져온 건데.

 

... 그거 나잖아. 빨리 줘봐.

 

싫어. 바로 찢어버릴 거면서. 이거 내 사진이야. 내 거니까 너도 함부로 못해.

 

야 그게 무슨!... 그게 무슨 네 거야. 내 얼굴인데.

 

내 거야.

 

김태형.

 

그렇게 불러도 안 줘.

 

 

지민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진짜 저 새끼 팰 수도 없고... 지민은 제 풀에 지쳐 자리에 풀썩 앉았다. 자신의 앨범만 없애면 될 줄 알았더니 그것보다 더 큰 김태형이라는 산이 있었다. 김태형은 생각도 못했는데... 세상에 김태형네 집 앨범에도 내 사진이 있을 거란 생각은 절대 못했지.

 

태형은 옆에서 머리를 부여잡고 있는 지민을 힐끔 보더니 의자채로 슥슥 다가가 지민의 옆에 딱 붙었다. 지민은 고개만 살짝 돌려 태형을 힐끗 쳐다봤다. , 또 뭐하려고. 지민의 말에 태형이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속삭였다.

 

 

내가 색시 치마 입은 사진 다 줄까?

 

? 진짜?

 

대신,

 

아 싫어.

 

뭐야. 나 말도 안꺼냈어.

 

그걸 빌미로 뭐 말도 안되는 거 시킬 거잖아.

 

아니야.

 

... 뭔데.

 

나 소원 하나 들어줘.

 

말도 안되는 거 맞네!

 

이게 뭐가 말이 안되는데!

 

또라이한테 소원을 하나 들어준다는 약속을 하면 그게 미친 거지,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태형의 양 볼이 부풀었다. 그렇게 해도 그건 안돼. 지민의 단호박에 미운 눈으로 지민을 바라보던 태형이 사진을 꺼냈다. 지민을 향해 보이는 사진에 지민이 벌떡 자리에 일어났지만 사진을 든 손을 뒤로 빼고 다른 한 손으로 그를 막은 태형의 행동에, 지민은 결국 자리에 다시 앉았다.

 

 

내가 어떤 소원을 빌 줄 알고?

 

그래, 어떤 소원을 빌 줄 모르니까 승낙하면 안되지.

 

......

 

너 지금 하는 거 보니까 정말 말도 안되는 거 시키려 했구먼.

 

그건 아니야!

 

네가 퍽도 아니겠다. 지금도 그걸로 협박하는데.

 

이씨, 너는 친구가 이렇게까지 바라면 왜 그럴까 궁금하지도 않냐?

 

내가 네 생각을 어떻게 따라가니.

 

페북에 올려버릴 거야.

 

죽는다 진짜.

 

. 내 거 내가 올리겠다는데.

 

뭐가 내거야?

 

 

갑자기 태형의 손에서 쑥 빠지는 사진에, 태형이 그대로 고개를 젖혀 위를 바라봤다. 헐 쌤. 태형과 지민은 동시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선생님의 손에 들린 사진을 바라봤다. 선생님은 사진을 내려다봤다. 쌤이 들어오는데도 둘만의 세상이길래 뭐 때문인가 했더니, 이거 때문이었어? 선생님이 사진을 팔랑거리며 말하자 둘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이쁜 애네. 누군데?

 

색시요.

 

 

선생님의 물음에 태형이 망설임 없이 답했다. 지민은 진심으로 놀라 두 눈이 확장된 채 태형을 바라봤다. 그래봤자 태형이 더 앞에 있어 지민이 어떤 표정을 지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선생님은 살짝 당황한 기색을 비치며 사진과 지민을 번갈아봤다. 대박, 이게 빡찜이라고?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정우가 꽥 소리를 질렀다. 어디 어디? 갑자기 아이들의 우르르 몰려오기 시작했다. 지민은 한 손으로 제 눈을 가렸다. 망했다. 지민의 머릿속에 저 말이 가득 들어찼다.

 

태형이가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색시 색시 노래를 부르던 이유를 알겠네. 선생님의 말씀에 아이들이 더욱 붙었다. 쌤 저희도 보여주세요! 보여주세요! 그들의 말에도 선생님은 아예 배에 사진을 딱 붙인 채 보여주지 않았다. 너희들이 이걸 봐서 뭐하게, 빨리 앉아 수업해야 해. 선생님의 단호한 말에 아이들은 아쉬움을 뒤로 하고 제 자리에 앉았다. 선생님은 아이들이 다 자리에 앉고 나서야 태형에게 그 사진을 돌려주었다. 지민이 옛날에 되게 오해 많이 받았겠네. 선생님의 말에 지민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색시야.

 

......

 

색시야, 화났어?

 

......

 

근데 진짜로 이건 내 거잖아.

 

 

태형의 마지막 말에 지민은 우뚝 발걸음을 멈추고 홱 뒤돌았다. 서너 걸음 뒤에서 따라 걸어오던 태형도 멈추어 서서 지민을 바라봤다. 그래, 소원 하나 들어줄게. 뜬금없는 지민의 말에 태형의 눈에 의아함이 돌았다. 내가 네 소원 들어준다고.

 

 

그러니까 내 사진 다 줘.

 

정말이지?

 

나 거짓말 하는 거 봤어?

 

알았어.

 

소원이 뭔데.

 

그건 비밀.

 

 

? 이번에는 지민이 의아함을 담은 눈으로 태형을 바라봤다. 태형은 미묘한 웃음을 지으며 지민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아 올렸다. 지민은 자연스레 손바닥을 펴보였다. 태형은 지민의 손에 사진을 올렸다. 나중에 내가 빌고 싶을 때 그 때 말 할 거야. 태형의 말에 제 사진만 내려다보던 지민이 고개를 들어 태형을 바라봤다. 그러다 까먹어도 소용없어. 그의 말에 태형이 피식 웃었다. 절대 그럴 일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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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쓰고 있는 것 중에

아마 남고생이 제일 먼저 끝날 것 같네요.

그게 언제일지는 모르겠지만.






저희 창고에 들어오시는 분들 중에

그냥 아무거나 검색하다가 들어온건지

정말로 저의 글을 보기 위해 검색해서 들어온건지

가끔 궁금할 때가 있어요

정말 제 글을 보기 위해서 검색하고 들어온거면

좀 기쁘네여ㅋㅋㅋㅋㅋ

사실 뷔민 남고생으로 들어오는 분들이 많아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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