뷔민 남고생의 일상 외전 2 (完)
길/남고생의 일상 (完)1. 청춘
건배! 경쾌한 목소리와 함께 유리잔이 맞부딪쳤다. 잔 안에 있던 맥주가 넘쳐 유리잔을 타고 흘러내렸다. 잔뜩 상기된 표정의 지민은 건배하기가 무섭게 맥주를 들이켰다. 입 안 가득 탄산처럼 터지는 시원함이 목으로 부드럽게 넘어갔다. 크으!! 지민은 시원하게 탄성을 지르며 앞에 있는 감자튀김을 입에 넣었다. 얼마만의 맥주인지 모르겠다. 지민은 다시 맥주잔을 잡고 입에 댔다.
너 김태형한테 말하고 왔지?
큭흡! 동기의 말에 지민은 순간적으로 사례 들려 켈록거렸다. 어... 어. 입가를 슥 닦으며 한 대답이 영 시원치 않아, 동기가 지민을 탐탁지 않은 눈으로 바라봤다. 지민은 그의 눈을 살짝 피하며 다시 맥주를 입에 가져다댔다.
너 설마 김태형한테 말 안하고 왔냐?
오늘 과모임 있다고 얘기 했어...
술 마신다고 이야기 하고 왔냐고.
......
안했어?
어차피 빨리 갈 거야.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새끼야.
지민의 말을 들은 동기들이 진저리를 치며 지민의 손에 들린 맥주를 뺏었다. 야야 빨리 치워, 김태형 또 들어오기 전에 빨리! 같이 있던 후배들은 영문도 모른 채 지민의 앞에 있는 소주잔도 치웠다. 아 괜찮다니까 진짜! 지민이 성질을 내며 제 잔을 다시 가져왔다. 이대로라면 더 이상 술은 입도 못 댈 것이 분명했다. 지민은 다급히 맥주잔 안에 소주도 섞기 시작했다. 저 미친놈! 친구가 재빨리 다시 잔을 뺏으려 했지만 지민이 더 빨랐다. 바로 입 안에 부어버리는 지민에, 후배들은 상황 파악이 안돼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지민과 친구들을 번갈아 바라보기만 했다.
맥주잔을 탕 소리가 나도록 탁자에 내려놓은 지민은 후 숨을 깊게 내쉬며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아 이제 좀 살 것 같다. 지민은 히힣 웃으며 말했다. 다른 친구들은 그런 지민의 행동이 어이없을 뿐이었다.
제에발, 술자리 올 때는 김태형한테 말하고 와라.
아 걔한테 말하면 겁나 찡찡대는 거 알잖아. 진짜 오늘은 괜찮다니까? 나 오늘은 딱 이만큼만 마시고 가려고 했어. 어차피 집에 빨리 들어가 봐야해.
이러다 김태형이 또 여기 찾아오면 어쩔 건데.
걔가 과모임 여기서 하는 걸 어떻게 알아.
내가 왜 몰라, 색시야.
우와아아악!!!! 갑자기 뒤에서 들리는 낮은 목소리에 지민은 소리를 빽 질렀다. 심장이 쿵 떨어질 정도로 너무 놀라 펄떡펄떡 뛰어댔다. 지민의 뒤에는 태형이 후드집업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삐딱한 자세로 지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테이블에 있던 모든 사람의 시선이 태형에게 쏠렸다. 그 중에는 태형과 알고 지내던 사람도 있었고, 지금 처음 본 사람들도 있었다. 눈알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던 지민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손을 살짝 들었다. 아, 안녕? 지민의 인사에 태형의 한 쪽 눈썹이 위로 꿈틀 움직였다. 색시야. 태형은 나직이 지민을 부르며 살짝 웃었다. 입꼬리는 살짝 웃고 있지만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은 그 표정은 지민이 두 번째로 무서워하는 표정이었다.
술을 마시고 싶었으면 나한테 이야기 하지, 색시야.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내가 괜히 너 술 못 먹게 하는 거 아니잖아. 색시의 그 개 같은 술버릇만 좀 어떻게 하면 내가 이렇게 좆 빠지게 색시 찾으러 다닐 일도 없어, 알잖아.
태형이 주머니에서 한 손을 쓱 빼, 지민의 어깨를 잡았다. 그의 커다란 손은 지민의 어깨를 감싸기 충분했다. 제 어깨를 꽉 잡는 그 악력에, 지민은 저절로 몸이 움츠러졌다. 지민은 살짝 고개를 돌려 눈빛으로 SOS를 요청해보지만, 이미 이런 일을 여러 번 겪었던 그의 친구들은 시선을 피하기 바빴다. 사실 태형의 마음을 이해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저 같아도 제 애인이 지민 같은 술버릇이었으면, 술자리에 보내기 마음 불편했을 것이다. 지민은 제 친구들이 자신과 끝까지 술자리를 같이 해주지 않는다며, 내 친구가 아니라 김태형 친구라며 유치하기 짝이 없는 말까지 한 적 있었지만, 그건 전부 다 제 술버릇을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이었다. 지민의 친구들은 술에 있어서는 전력으로 태형을 도울 마음이 있었다. 오늘 태형에게 술집 위치를 알린 것도 지민의 잔을 뺐었던 친구였다. 그만큼 그들은 지민에게 술을 먹이기 싫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지민의 술버릇에 당하기 싫었다. 친구들은 태형에게 정신 팔린 지민 몰래 얼른 데려가라고 손을 훠이훠이 휘저었다. 그들의 손짓을 본 태형은 다시 고개를 내려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지민을 바라봤다.
... 색시 지금 일부러 날 그렇게 보고 있는 거지.
내가 뭘?
어어, 이거 봐 이거 봐, 방금 입술 삐죽 내민 거 나 다 봤다. 지금 일부러 응? 나 마음 약해지라고 그렇게 보고 있는 거잖아.
......
입술 넣어. 오늘은 안 봐줄 거니까.
......
나 다 들었어. 너 소맥 비율도 없이 그냥 막 섞어 마셨다고. 이제 안 돼. 너 이미 한계야.
아닌데.
맞는데.
나 아직 멀쩡한데.
색시 얼굴 빨간데.
나 원래 홍조 있는데.
지금 누구 앞에서 거짓말을 치고 있지? 내가 색시 얼굴을 몇 년을 봤는데. 홍조랑 술 때문에 올라온 열기 하나 구분 못할까봐? 나, 너보다 네 얼굴 더 많이 봤어.
씨발, 얘 언제부터 이렇게 말 잘했지. 지민은 제 말을 꼬박꼬박 받아치는 태형에,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입술만 잘근 깨물었다. 원래라면 제 간절한 눈빛 때문에 결국 못 이기고 옆에 앉았었는데 오늘따라 강하다. 아니 이 정도로 내가 끈질기게 달라붙었으면 적당히 눈치 채고 옆에 앉아주면 안되냐. 지민은 태형을 밉게 노려봤다. 허. 태형이 살짝 코웃음 치며 검지로 톡 지민의 입술을 살짝 쳤다. 삐죽 나와 있던 입술은 태형의 손길에 쏙 들어갔다.
그렇게 고양이 눈 해도 하나도 안 무섭다.
나 지금 너 미워하는 건데.
어, 그건 좀 무서운데. 입술 자꾸 나오지 또.
눈치 고자냐? 이 정도 티냈으면 좀 알아줘라, 진짜.
그래서. 키스해달라고?
야아아악!!!!! 결국 지민이 또 한 번 빽 소리를 질렀다. 막상 그런 말 한 당사자는 단순한 안부인사 한 사람마냥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지민의 얼굴만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지민은 살짝 몸을 일으켜 태형의 멱살을 잡고 끌어내렸다. 태형은 순순히 허리를 숙였다. 너 지금 사람 많은데서 무슨 말 하는 거야... 지민은 이를 악 문 채 태형의 귓가에 속삭였다. 흐흫. 태형이 낮게 목울대에서 울리는 듯 웃었다. 색시야, 나 지금 바로 너한테 진하게 키스할 수도 있어. 입술을 지민의 귀에 바짝 대고 말하는 태형의 목소리는 미칠 듯이 섹시했다. 이렇게 가까이서 이야기 할 때, 목울대에서 울리는 듯한 그의 낮은 목소리는 언제나 지민에게는 큰 자극이었다. 살짝 굳은 듯한 지민에, 태형은 그의 귓바퀴에 일부러 소리 내며 뽀뽀하고 떨어졌다. 지민의 두 귀가 순식간에 불타올랐다. 자연스레 두 손으로 귀를 감싼 지민이 태형을 천천히 올려봤다. 태형은 여전히 평온하기 그지없는 표정이었다.
제발 애정행각은 너희들 집에서 해줄래.
봤어?
바로 앞에서 그런 짓 해놓고 어떻게 그렇게 뻔뻔하게 말할 수 있지?
씨발, 귀에 뽀뽀하는 소리까지 다 들렸어.
어, 그럼 내가 색시 귓가에 한 말도 들렸겠네.
그건 못 들었는데 딱히 알고 싶지도 않아.
친구들의 말에 태형이 개구지게 웃었다. 간신히 정신줄 잡은 지민은 천천히 몸을 돌려 바로 앉았다. 왠지 맞은편에 앉아있는 친구들과 후배들의 얼굴을 보기 민망해, 계속 헛기침만 하며 시선을 아래로 내린 채 손만 더듬거리며 맥주잔을 찾았다. 뭐 하는 거야. 뒤에서 태형의 손이 쑥 나와 지민의 손을 덮어 잡아 당겼다. 손이 테이블에서 떨어졌다. 아 제발 태태... 나 지금 그냥 정신을 잃고 싶어... 지민의 간절한 바람은 태형에게까지 닿지 않은 듯, 태형은 지민의 손을 놓지 않았다. 결국 지민은 제 옆에 있는 태형의 팔에 몸을 기대고 얼굴을 묻었다.
야이씨, 가던지 앉던지 둘 중 하나만 해. 맞은편에 앉아있던 친구의 말에 태형은 반대쪽 손으로 지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겼다. 이제 일어나자 진짜, 너 완전 아슬아슬해 지금. 태형의 말에도 지민은 입 꾹 다물고 기대고 있던 태형의 팔을 꽉 잡았다. 오늘따라 왜 이럴까, 우리 색시. 거의 지민을 안다시피 하며 어깨를 토닥이던 태형은 결국 허리를 피고 일어났다. 미안하다, 잠시 자리 좀 채워도 되냐. 결국 항복과도 같은 태형의 말에 지민은 그 몰래 씨익 웃었다. 결국 태형은 절대 자신을 이길 수 없었다.
그럼 술 마셔도 되지? 지민은 금세 해맑게 웃으며 맥주잔을 들었다가, 태형이 그대로 맥주잔을 가져갔다. 어어어? 순간 당황한 지민은 뭐 어쩌지도 못한 채 자연스럽게 태형의 입 속으로 들어가는 그 일련의 과정을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다. 아 쓰다.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테이블에 맥주잔을 내려놓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 지민이 태형의 팔뚝을 퍽 때렸다.
아, 아퍼어.
네가 내 술을 왜 먹어!
내가 여기 있겠다고 했지, 너 술 마시라고는 안했는데.
그럼 여기 왜 있는데.
색시가 안 가잖아.
씨발 진짜 죽고 싶냐?
여하튼 안 돼. 차라리 내가 죽는 게 낫지, 내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을 때까지는 색시가 남 앞에서 술 취해서 헤롱거리는 꼴 못 봐.
표정까지 단호한 태형에, 지민은 기가 막혀 코웃음조차 안 나왔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내가 무슨 알코올 중독자처럼 맨날 술만 퍼마신 줄 알겠네. 지민이 투덜거리면서 말해도 태형은 그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기만 했다. 아, 건들지 마. 지민이 짜증스레 그의 손을 쳐내도 태형은 허허 웃었다.
태형은 딱히 이유를 이야기 해주지도 않으면서 술 좀 먹는다고만 하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어 막곤 했다. 지민은 술을 처음 입에 대기 시작한 20살 때부터 도무지 그런 태형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정확히 1월 1일 자정이 되자마자 같이 술을 부었던 그 날부터였다. 지민은 처음 마신 술이 너무 맛있었다. 이미 술을 마신 적 있던 태형에게는 음주 행위가 새로운 일은 아니었지만 지민에게는 신세계였다. 와 태태, 나 술 좀 잘 마시는 편인가 봐. 지민은 앞에 있던 맥주 캔을 하나 더 따서 벌컥벌컥 들이켰다. 태형은 맞은편에 앉아 안주로 나온 오징어만 질겅질겅 씹어댔다. 넌 안 마셔? 지민이 이따금 그렇게 물어볼 때만 살짝 맥주를 입에 머금을 뿐이었다.
태형은 자신의 주량과 술버릇을 이미 알고 있었다. 주량은 어디 가서 말도 못 꺼낼 정도로 하찮았고, 술버릇은 잠이 드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민의 주량은 어느 정도인지, 술버릇은 뭔지 하나도 몰랐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저 맛있다고 물처럼 들이키는 지민의 앞에서 자신이 술을 마실 수는 없었다. 아무리 집 안이라 해도 혹시 모르니까. 사실 지민의 술버릇이 뭔지 궁금하기도 했다. 드디어 지민이가 술 마시는 모습도 보게 되다니... 태형은 문득 든 생각에 감격스러워져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안 그래도 홍조 있어 붉은기 도는 저 볼이 술 마시면 더 시뻘겋게 올라올지 궁금했다. 술이 좀 들어가서 기분 좋아지는 것도 보고 싶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지민이 술 마시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한창 조잘거리면서 술을 마시던 지민이 어느 순간, 고개를 푹 숙인 채 말도 없었다. 색시야? 태형이 조심스레 부르자 지민이 고개를 팍 들어 태형을 바라봤다. 눈이 살짝 풀린 것이 누가 봐도 취한 모습이었다. 태형은 지민의 앞에 있는 맥주 캔을 들어봤다. 빈 캔이 두 개, 그리고 반 정도 남은 캔 하나. 색시도 그렇게 술을 잘 마시는 편은 아닌가. 태형은 맥주 캔을 한 쪽으로 치우며 생각했다. 태태. 갑자기 자신을 부르는 지민에, 태형은 고개를 돌려 지민을 바라봤다. 풀리는 눈을 억지로 떠가며 억지로 결의에 찬 표정을 짓는 지민이 조금 웃기기는 했지만 태형은 웃음을 참으며 응 하고 대답했다.
태태.
왜 불러.
나 사랑해?
색시 진짜 취하긴 했나보다. 안하던 말을 하네.
난 사랑해.
나도 사랑해. 색시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지? 내가 서운하게 한 일 있어?
......
말해봐, 다 들을게.
태형은 아예 가운데 있던 안주들을 옆으로 다 치우고 몸을 슥슥 밀어 지민의 앞에 왔다. 지민의 두 손을 꼭 잡고 지민을 바라봤다. 태태... 지민이 말꼬리를 늘이며 태형을 쳐다봤다. 태형은 지민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머릿속에서 시끄러운 경보음이 울리는 느낌이 들었다. 아, 위험하다. 태형이 깨달았을 때는 이미 일이 일어난 후였다.
지민 선배한테 애인이 계신 건 처음 알았어요. 한 후배의 말에 지민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 내가 말을 안했나? 딱히 숨긴 건 아니었는데.
우리 과는 나 애인 있는 거 다 아는데. 애인이 색시인 것도 알아.
김태형 넌 알만 하다. 보나마나 과에서 틈만 나면 박지민 얘기를 해댔겠지.
친구의 말에 태형이 프스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김태형 때문에 나 학교에서 얼굴 다 팔리는 거 아니야? 지민이 말하면서 자연스레 술잔에 손을 가져갔다. 김태형이 알아차리고 술잔을 뺏으려 할 때는 이미 늦었다. 술잔에 남은 술을 호로록 다 마셔버린 지민은 천천히 술잔을 테이블에 내려놨다. 색시야. 태형의 부름에도 지민은 미동도 없었다. 술잔을 잡고 있는 그대로 고개만 푹 숙일 뿐이었다. 야, 안 되겠다 우리 먼저 갈게. 태형은 다급히 주위에 지민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어 그래 제발 빨리 데려가라, 얘들아 자리 비켜줘. 선배들까지 다급히 일어나라 손짓을 해, 지민의 옆에 앉아있던 후배들이 영문도 모른 채 슬금슬금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형이 테이블 위에 올려져있던 지민의 폰을 들었을 때, 갑자기 지민이 태형의 손을 턱 잡았다. 헉. 태형은 급하게 숨을 들이키며 지민을 힐끗 쳐다봤다. 지민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였다. 태형의 손이 다급해졌다. 다른 한 손으로 가방을 들어 한 쪽 어깨에 메고, 지민의 핸드폰을 자신의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색시야 우리 빨리 집에 가자, 응? 지민의 등을 토닥이면서 힘을 주어 그를 일으키려 했지만 술만 먹으면 어디서 이렇게 힘이 나는지 꿈쩍도 않는 지민에, 태형만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제발 색시야... 이제는 거의 태형이 애원 하다시피 지민을 얼렀다. 결국 지민의 양 겨드랑이에 팔을 끼우고 그를 일으켰다.
미안하다, 그냥 아까 바로 갔어야 했는데.
괜찮아, 너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너 없었으면 우리가 꼼짝없이 당했었어.
나도 그거 보기 싫어서 달려온 거 아니야.
태형은 지민을 꼭 안은 채 밑을 보며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태태야? 태형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던 지민이 확 얼굴을 들더니 양 손으로 태형의 볼을 꽉 잡고 억지로 고개를 올렸다. 난데없는 힘에 태형이 놀라 눈이 커진 채로 지민을 바라봤다. 양 볼이 꾹 눌려 입술이 붕어처럼 툭 튀어나왔다. 아니, 자, 잠깐... 태형이 다급히 지민의 손목을 잡고 내리려 했지만 지민은 여전히 힘이 셌다. 태형이 말릴 새도 없이 입술이 맞붙었다. 처음 본 후배들은 너무 놀라 헉 소리도 못 내고 눈만 커진 채 그들을 멍하니 바라봤다. 어찌나 진하게 입을 맞추는지 태형은 지민의 힘에 뒤로 천천히 밀려났다.
잠깐, 새, 색시야. 태형이 간신히 지민을 밀어냈다. 지민은 뚱한 표정으로 태형을 바라보다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또 누군가에게 손을 뻗는 지민에, 태형은 아예 그 손을 깍지 껴서 잡았다. 지민이 술만 취하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차라리 술을 잘 마시면 몰라, 주량도 얼마 안되는데 술자리는 좋아하니 애인으로써 이런 자리가 불안하기만 한 것이다. 심지어 술버릇이 뽀뽀라니, 다음날 기억도 못한다니, 태형은 속이 답답하기만 했다. 내가 이러니까 술만 마신다고 하면 눈에 흙이 들어가도 못 마신다고 떼를 쓰지... 태형은 곧 죽어도 지민이 남의 얼굴에 뽀뽀하는 꼴은 볼 수 없었다. 이미 지민의 술버릇을 알고 있는 친구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눈 돌아갈 것 같았다. 정말 박지민이 작정하고 자신을 피 말려 죽일 생각으로 그런 거라면, 이미 충분히 성공했다. 태형은 지민이 다른 사람이랑 술 마시는 것이 정말이지 끔찍이 싫었다.
테이블 밖을 나온 태형은 아예 지민을 업을 생각으로 몸을 숙였다. 옆에 있던 후배들이 눈치 채고 지민을 부축하며 태형의 등에 그를 업었다. 읏차, 가볍게 지민을 든 태형의 이마에 벌써 땀이 송글송글 맺히기 시작했다. 하 진짜 애인 하나 데려가기 힘드네. 태형이 살짝 지친 듯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미안하다 진짜, 우리도 웬만하면 술 안 먹이려고 했는데.
너희가 억지로 먹였겠냐. 또 색시가 자기 취하고 싶다고 무작정 들이켰겠지. 어쨌든 먼저 갈게. 저기 가방 좀.
태형이 한 손을 뻗자, 옆에 있던 사람이 후다닥 가방을 걸어주었다. 내일 색시 학교 못갈 수도 있다. 태형이 술집을 나가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친구는 손을 흔들어주었다.
한바탕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듯, 테이블에 정적이 돌았다. 후배들은 방금까지 휘몰아치던 폭풍의 여운이 가시지 않았는지 멍한 상태였다. 머릿속에서는 오로지 지민 선배 애인, 남자, 술버릇만 둥둥 떠다녔다.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 지민 선배의 생각지도 못한 TMI를 너무 많이 알아버린 날이었다.
이제 곧 여름이 다가오려는지 밤공기가 많이 쌀쌀하지는 않았다. 태형은 요즘 즐겨 듣는 노래로 작게 허밍하며 천천히 걸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그 난리를 피우더니 그새 자는지 목덜미에 지민의 숨결이 닿았다. 제 목을 감싸 안은 팔과 등 전체에 느껴지는 지민의 온기는 여전했다. 살 좀 빠졌나, 어째 저번보다 좀 더 가벼운 것 같기도 하다. 언젠가 살이 좀 찐 것 같다고 운동해야겠다더니 정말 저 몰래 운동이라도 하는가보다. 하나도 안 쪘다고 운동 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렸는데, 색시 정말 내 말은 하나도 안 들어주네. 태형이 작게 한 혼잣말에 뒤에서 큭큭 웃는 소리가 들렸다.
깼어?
네가 하도 맛있는 거 많이 사와서 나 살 엄청 많이 쪘어.
어디가 쪄. 내 눈에는 하나도 안 보이는데.
옷에 가려졌어. 벗으면 막 여기저기 살 좀 붙은 게 보여.
아닌데. 저번 주말에 봤는데 없었는데.
아닌데. 그 때 어두워서 네가 잘 못 본 건데.
봐야만 아나? 내가 막 여기저기 다 만져서 모를 리가 없는데.
아 뭐야, 변태.
지민은 태형의 어깨를 살짝 때리면서 꺄르르 웃었다. 아 머리아파. 지민은 다시 그의 목덜미와 어깨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뜨끈한 온기가 그대로 전해졌다. 아직 술 오른 게 다 가라앉은 건 아닌 모양이다. 으쌰. 태형은 지민을 고쳐 업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천천히 걷는 태형의 발소리가 타박타박 일정하게 들렸다.
쪽.
목에서 느껴지는 말캉한 느낌에 태형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흐흫. 뒤에서 지민이 프스스 웃더니 갑자기 목 이곳저곳에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색시야, 하지 마. 태형의 말에 지민은 으응. 작게 앙탈을 부리며 태형의 뺨에 제 볼을 비볐다. 몰랑몰랑한 지민의 볼 살이 제 뺨에 거침없이 닿았다. 아니 아까 말 제대로 하길래 안취한 줄 알았더니... 태형은 눈을 감고 크게 심호흡을 하며 스멀스멀 올라오는 화를 참았다. 이렇게 지민이 취해서 스킨십을 할 때마다 좋으면서도 화가 나서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아니 내 앞에서만 하는 거면 몰라, 지금 이거를 그 친구들한테도 했다는 거잖아. 또 그 생각을 하니 절로 이가 부득부득 갈렸다. 화는 나지만 그렇다고 그 친구들 잘못은 아니고, 지민은 아무것도 모르고 해맑게 웃기만 한다. 다음 날에는 숙취 때문에 골골대면서 또 자기 술버릇은 기억 안 나지. 태형만 속이 타들어가는 거다. 그래도 어쩔 수 있나. 지민과 저의 관계에 갑과 을을 따지고 싶지는 않지만, 지민이 사르르 웃으면 화도 못 내는 자신이 을임이 분명했다. 아니, 스스로 을을 자초한다. 어쩌겠나. 좋아하는 만큼 지는 거다.
색시야, 그 뽀뽀하는 술버릇 언제 고칠래. 태형의 말을 듣기는 들었는지 지민이 작게 웃으며 몸을 위아래로 통통 뛰었다. 무거워 인마. 태형의 타박에 지민은 태형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태태야. 지민의 목소리가 길게 늘어졌다. 술이 들어가 나른한 그의 목소리에 태형은 헙 급히 숨을 들이켰다. 사귄지 몇 년이 지났지만 지민은 언제나 자신을 설레게 만들었다. 처음 사랑이라는 감정을 알게 된 중딩 때의 그 설렘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이 정도면 병 아닐까. 알고 지낸지 거의 20년이 다되어 가는데, 사귄지도 벌써 4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이렇게 심장이 벌렁벌렁 거릴 수가 있는 건가. 나는 아직도 이만큼 너를 좋아하는데 색시야, 너도 여전히 나를 그만큼 좋아해?
사귄지 4년이 되었다고 말하면 주위에서 다들 놀란다. 엄청 오래 사귀네. 권태기 안 왔냐. 권태기 어떻게 넘겼냐. 그런 말을 한두 번 들은 것이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어떻게 대답을 해야할지 난감했다. 태형은 여태 권태기를 느낀 적이 없었다. 익숙하면 익숙한대로 좋았다. 그 익숙함과 안정감 사이에 불쑥불쑥 들어오는 설렘은 자신을 정신 못 차리게 만들었다. 4년 전이나 그보다 훨씬 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제 마음은 언제나 그대로였고 그 어떤 것도 그 마음에 흠을 낼 수는 없었다. 그런데 주위에서 자꾸 그런 소리를 들으니 문득 두려움을 느끼고 마는 것이다. 언젠가는 이 마음이 옅어지고 서로에게 무뎌지면 결국은 사랑이라는 것도, 설렘이라는 감정도 잊고 헤어지게 될 날이 올 수도 있겠지. 아직까지는 까마득히 먼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지만 아예 있을 수 없는 일도 아니다. 태형은 그 순간이 오는 것이 못내 두려웠다. 그래서 그 언젠가의 순간이 왔을 때 후회는 없도록, 좋은 추억은 가져갈 수 있도록, 매 순간 지민과 함께 있는 시간에 최선을 다 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태형은 지금도 제 모든 신경을 지민에게 쏟고 있는 중이었다. 사랑해 마지않는 제 색시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은 그런 것이었다.
그들이 사는 집은 골목골목 들어가야 나오는 곳이었다. 집 자체는 오피스텔 형으로, 그리 나쁘지 않지만 접근성은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다. 밤만 되면 꽤나 으슥해지는 이 골목은 사실 그들이 좋아하는 길이기도 했다. 조용한 골목길을 손을 꼭 잡고 천천히 걸어가다가 갑자기 뽀뽀를 해도 아무도 보지 않는, 그런 골목.
골목에 들어서자 어깨에 얼굴을 기대고 있던 지민이 갑자기 홱 얼굴을 치켜들었다. 태태야 내려줘. 별안간 몸을 흔들며 내려달라 칭얼거리는 지민 때문에, 순간적으로 휘청거린 태형은 간신히 옆에 있는 벽을 잡고 중심을 잡았다.
태태, 내려줘. 내려줘.
자, 잠깐 색시, 너무 목을 꽉 조르진 말고.
나 걸어갈 수 있어. 나 하나도 안취했어. 술 깼다.
지민의 그 말이 거짓임을 알면서도 태형은 못이기는 척 지민을 내려주었다. 두 발이 땅에 닿자마자 제 몸을 못가누어 휘청거린 지민은 간신히 몸을 벽에 기대었다. 아그그... 허리 나가겠다. 태형은 두 손으로 허리를 짚고 좌우로 허리를 굽혀 스트레칭을 했다. 태태. 지민의 부름에 태형은 허리를 바로 하고 지민을 바라봤다. 두 눈이 마주치는 순간,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을 맞추었다. 격하게 들어오는 지민에, 태형은 한 손으로 지민의 허리를 꽉 감싸안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의 뒷머리를 헤집었다. 저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가로등 외에 빛이라고는 없는 이 으슥한 골목은 이 행위를 꽤나 짜릿하게 만들어주었다. 태형은 이 골목길에서 하는 키스가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최소한의 빛으로 보이는 지민은 미치도록 섹시했다.
지민은 태형의 아랫입술을 살짝 물고 떨어졌다. 촉하는 마찰음이 작게 들렸다. 처음 하는 키스도 아닌데 어쩐지 그 소리 때문에 부끄러워져 태형은 순간 얼굴에 열이 확 올랐다. 지민이 지금 정신없고, 거리도 어두운 편이라서 다행이었다. 아마 시뻘게진 얼굴을 지민에게 들키면 한 달 동안 놀림 받을 것이 분명했다.
지민은 제 허리를 감은 태형의 팔을 만지작거리다 고개를 들어 태형을 바라봤다. 태형과 또 눈이 마주쳤다. 태형은 살짝 고개를 숙여 지민의 입술에 가볍게 뽀뽀했다.
아 취할 것 같아.
네 입술 때문에 이딴 드립 치기만 해봐.
색시한테서 진짜 술 냄새 나서 레알 취할 것 같은데.
태형의 말에 지민이 급하게 킁킁거리며 제 몸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태형은 그런 지민의 모습이 퍽 귀여워 큭큭 웃었다. 태형은 저한테 기대오는 지민을 폭 안았다. 문득 든 생각에 태형이 물었다.
색시야. 너한테 나는 뭐야?
너?
갑작스러운 질문에 지민은 잠시 당황한 듯 태형을 바라봤다. 태형은 정말 진지했다. 어느 순간부터 자신들의 연애에 참견하는 사람들이 생긴 이후로, 권태기라는 게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자신은 아직 그런 걸 느낀 적 없었지만 혹시나 지민은 그럴 수 있으니까. 사람 마음이라는 게 언제나 서로 같을 수는 없으니까. 사랑에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까. 혹여나 그 차이가 있으면 그만큼 자신이 더 사랑하면 되니까. 그냥 궁금했다. 지민에게 사랑을 물어보고 싶었다.
태형의 진중한 표정을 보고 지민도 덩달아 웃음기를 거두고 진지하게 태형을 쳐다봤다. 태형은 가끔 대놓고 사랑을 물어보긴 했었다. 그가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주 잘 알았다. 태형은 저보다 마음이 여려서 가끔 그런 것에 불안함을 느끼는 것 같았다. 지민은 여전히 그에게 진지했다. 그러니까, 태형과 사귀는 이 자체가 단순 장난 같은 연애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가 사랑을 확인할 때면 그만큼 자신은 확인시켜주면 될 일이다.
지민은 태형의 목에 팔을 두르고 얼굴을 가까이 했다. 태형은 아예 두 손으로 지민의 허리를 감아 안았다. 서로의 온기가 느껴졌다. 지민은 문득 그와 맨살이 닿고 싶다고 생각했다.
태형아, 너는.
......
내 사랑.
......
내 10대. 20대.
......
내 청춘.
이번에는 태형의 입술이 격하게 들어왔다. 지민은 굳이 그를 막지 않았다. 제 청춘은 이렇게 또 한 번 입술을 맞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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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외전을 끝으로
남고생의 일상이 완전히 마무리 되었습니다!
별 내용 없는데 오래 걸려서 죄송합니다ㅠㅠ
단순 고딩들의 이야기 좋아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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