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뷔민/다각] 에스퍼 썰13
길/에스퍼
어, 정국아!
보건실에서 나와 교실로 가는 길에 정국을 본 지민이 멀리서 크게 불렀다. 정국은 그들을 발견하고 앞까지 다가왔다. 얘기 들었어요. 정국의 말에 아... 탄식을 뱉은 지민은 이내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그 노멀이 없네요.
아... 먼저 교실로 들어갔어.
그 노멀이 수습했다던데.
... 응.
아까 석진이 형 만났어요. 그 노멀 이야기 들어보니까 진짜 평범한 노멀은 아닌 것 같던데요.
안그래도 그거 때문에 지금 다들 혼란스러운 것 같아. 남준이 형도 그렇고 태형이도 그렇고.
석진이 형이랑 윤기 형, 그 노멀 에스퍼래요.
......
형도 그렇게 생각해요? 진짜 그 애가 에스퍼라고요?
너보다 형이야, 전정국.
출신도 완전 가관이더만. 그런데 에스퍼라고요? 전부 제정신이에요?
너 말 조심해.
지민이 정국을 노려봤다. 정국은 아차 싶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럼에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은 숨기지 않았다. 지민은 한숨을 쉬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복잡했다. 각각 겪은 게 있으니 태형이 그냥 노멀은 아니라는 것을 다들 눈치 챘을 것이다. 그렇다고 에스퍼다 라고 하기에는 증거가 너무 부족했다. 단순히 '어 너 능력이 안 통하네. 너 에스퍼.' 라고 단정 지을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한 게 아니었다. 게다가 태형에 대해서 다들 어디까지 생각하고 있는지 몰랐다. 지민처럼 '태형이는 에스퍼인 것 같다.' 라고만 생각하고 있는지, 아니면 그에 대한 무언가를 알고 있기 때문에 에스퍼임을 확신하는 건지 아무것도 몰랐다.
아직 정확한 거 아니야. 석진이 형이랑 윤기 형이 뭘 알고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태형이도 자기 에스퍼 아니라고 하고 있어.
형은 뭐라고 생각하는데요.
... 정국아.
형 입장에서는 걔가 노멀인게 좋겠죠. 형도 어차피 그런 마음 아니었어요? 노멀한테 붙어서 여기서 벗어나려는 생각 아니었냐고요.
넌 무슨 말을 그렇게 해.
그런게 아니면 형이 노멀한테 관심 가질 이유가 없잖아!
전정국!
지민은 정국을 노려봤다. 허. 정국은 헛웃음을 뱉었다. 내 친구한테 더 이상 말 함부로 하면 너 진짜 가만 안 둬. 지민의 말에 정국은 어이없는 듯 코웃음을 치며 지민을 바라봤다.
8년 본 동생보다 그 노멀이 더 소중해요?
......
그 노멀이 여기저기서 싸고 돌 만큼 천연기념물이긴 하죠? 남준이 형도 못 막는 호석이 형 폭주까지 막아냈으니, 아주 극진한 대접을 해드려야죠. 그치?
야.
아, 호석이 형 능력도 잠재웠다는데 제 능력도 잠재울 수 있는지 시험 해보고 싶네요.
너 미쳤어? 아까부터 왜 이래 진짜!
결국 지민은 얼굴까지 싹 굳히고 정국을 밀쳤다. 세상에 내 능력 안 통하는 사람도 있다는데 궁금하지 않겠어요? 정국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지민을 지나쳤다. 미쳤어. 지민은 재빨리 정국의 앞을 막았다. 농담도 할 농담이 있고 못 할 농담이 있지, 자신의 능력을 뻔히 아는 주제에 사람 목숨 가지고 농담 하는 거 유쾌하지 않다.
뭐 불만 있어? 태형이가 너한테 뭐 잘못 했어?
불만 있다면 있고, 잘못 한 게 있다면 있겠죠.
뭔데. 나한테 말해봐.
그래도 형은 그 노멀을 챙기네요.
지민은 혼란스러운 표정을 했다. 제 말의 의미를 아직까지 알아차리지 못한 지민이 왠지 괘씸했다. 저번에 어리광 피우지 말라던 지민의 말이 생각났다. 어리광이라면 어리광이었다. 동생한테 엄마를 뺏기기 싫어하는 아이 같은 기분이었다. 정국에게 태형은 그 정도의 사람이었다. 지민이 형과 내 사이에 끼어든 불청객. 저 지금 형 보기 싫어요. 정국은 또 지민을 지나쳤다. 절박함에 지민은 재빨리 그의 손목을 잡았다. 정국아. 아 놓으라고! 정국이 거칠게 그의 손을 뿌리쳤다. 그의 행동에 지민이 놀라 뒤로 살짝 물러났다. 툭. 무언가 복도 바닥에 떨어진 소리가 그들 주위에 울렸다. 바닥을 본 지민의 표정이 점점 경악에 물들면서 천천히 정국을 올려다보았다. 복도 바닥에 작은 큐브가 떨어져 있었다. 정국의 얼굴이 급격히 굳어졌다. 어두운 보라색의 그것은 크림색의 복도 위에서 눈에 너무 띄었다. 너, 너 지금... 지민은 충격에 목소리까지 떨렸다. 정국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다가 결국 지민을 지나쳐 재빨리 그 자리를 피했다. 전정국! 지민의 외침에도 정국은 결국 멀어졌다.
지민은 학생회실 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가 석진의 앞에 조각을 탕 소리 날 정도로 세게 내려놓았다. 석진이 놀라 지민을 한번 올려다보고 그대로 시선을 내려 책상을 보았다. 이거 큐브잖아. 석진의 말에 지민이 한숨을 쉬었다.
정국이 여기 안 왔어요?
정국이? 안 왔는데. 근데 너 누구한테 능력 쓴 거야.
제가 쓴 거 아니에요.
... 뭔 소리야. 이거 네 능력이잖아.
석진은 지민이 내려놓은 큐브를 가리키며 말했다. 지민은 제 머리를 마구 헝클였다. 제가 쓰고 싶어서 쓴 거 아니에요. 지민의 말에 석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럼 누가 너한테 능력을 썼다는 건데.
... 실수였겠죠.
누구야. 네 능력이 갑자기 개방 됐다는 건 갑자기 공격을 해 와서 그런 거잖아.
공격까지야. 그냥 자기도 모르게 나온 거겠죠.
누구냐니까. 이런 색깔 처음 보는데.
... 정국이요.
지민의 말에 큐브를 만지작거리던 석진이 재빨리 큐브를 내려놓았다. 이거 만진다고 설마 퍼지지는 않지? 석진의 물음에 지민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능력을 개방해야 써지죠, 만진다고 되는 거 아니에요. 지민의 말에 석진은 안도 했다가 바로 표정을 굳혔다. 정국이가 너한테 왜 능력을 써?
실수였겠죠.
걔가 실수를 한다고? 자기도 모르게 능력을 썼다고? 걔 컨트롤 S야.
그럼 걔가 일부러 저한테 능력을 썼다는 거예요?
석진은 입을 다물었다. 정국 본인도 모르게 능력이 나와 버렸고, 지민의 능력 특성에 따라 그 힘을 흡수해 큐브로 만들어 버렸다고 생각하는 게 편했다. 석진은 유심히 책상에 놓여있는 큐브를 봤다. 정국의 능력을 고체화해서 본 적이 없으니 어두운 보라 빛 큐브가 여간 신기한 게 아니었다. 석진은 손가락 끝으로 툭툭 큐브를 건드렸다. 충격이었겠네, 정국이. 석진이 입을 열었다.
여태 그런 적 없었는데 너한테 능력을 쓴 거잖아.
......
컨트롤 잘 해서 웬만해서는 실수 라던지 불시에 라던지 그런 본능에 가까운 이유로 능력을 개방 시키는 애가 아닌데. 어지간히도 급박했나봐. 아니면 뭔가... 심적으로 굉장히 불안했다던가.
심적으로 불안이요?
석진의 입에서 나온 말에 지민이 화들짝 놀랐다. 석진은 그게 뭐 그리 놀랄 일이냐는 듯 표정은 여전히 평온했다.
심적으로 불안하니까 그런 식으로 자기도 모르게 능력이 개방 됐겠지. 근데 큐브가 되어 버리니까 더 충격적이었을 거야. 너한테 자신의 능력이 위협이 되었다는 소리니까. 넌 본능적으로 능력이 개방된 거 아니야?
...네.
정국이 요즘 뭐 힘든 일 있어?
......
아니면 내가 따로 얘기 해,
아뇨 형. 그냥 모르는 척 해주세요. 그리고 다른 사람한테도 이 일, 말하지 말아줘요. 윤기 형도 안돼요.
뭐? 윤기도 안 돼?
안돼요. 그냥 형도 잊어주세요. 제가 알아서 해결할게요. 죄송해요, 형.
지민아, 지민아?
석진은 자기 할 말만 끝내고 바로 학생회실을 나가는 지민의 뒷모습에다 대고 아련하게 이름만 외쳐댔다.
***
정신이 좀 들어? 천천히 눈을 뜬 호석이 제일 처음에 들은 말이었다.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니 여느 때와 다름없이 남준이 제 옆에 있었다. 호석은 왼손을 천천히 들었다. 하나도 빠짐없이 제 위치에 딱딱 들어가 있는 반지를 보고는 툭 힘없이 팔을 내렸다. 잠시 그들 사이에 정적이 돌았다. 다친 사람은? 호석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거의 먹혔지만 그 작은 소리도 남준은 놓치지 않았다.
걱정 마, 아무도 안 다쳤어.
너는?
당연히 괜찮지. 나 너 때문에 다치는 일 없어.
......
너무 힘 뺐지? 오늘은 그냥 쉬는 게 낫겠다.
사람들... 많이 봤지.
아니. 운동장에 사람 그렇게 많지 않았어.
다들 나... 그런 거 알았겠지.
아니야. 몰라. 사람들이 너 능력 쓰는 거 보고 깜짝 놀랐을 걸?
호석은 입을 앙 다물었다. 남준은 아무 일 일어나지 않았다고 안심 시키고 있지만, 아무 일 아닐 수가 없었다. 그때 왜 그랬을까. 자신이 생각해도 미친 짓이었다. 컨트롤 능력도 없으면서 미쳤다고 제어장치를 다 빼서 던져버리다니. 부상자가 한명도 없는 게 기적일 정도였다. 호석은 두 손을 들어 제 얼굴을 묻었다. 반지의 차가운 감촉이 볼 여러군데에서 느껴졌다. 그의 두 손에는 금으로 만든 얇은 실반지가 잔뜩 끼워져 있었다. 팔목에도 여러 팔찌가 휘감겨 있었다. 목에도 목걸이가 두어 개 있었다. 얼핏 보면 그저 꾸미기 위한 악세서라지만 용도는 전혀 달랐다. 보기 좋으라고 예쁘게 만든 제어장치일 뿐이었다. 귀까지 뚫으려는 걸 호석이 악을 질러가며 거부하지 않았더라면 이미 피어싱도 여러 개 했었을 것이다. 호석은 제 처지가 우스워서 헛웃음이 다 났다. 이제는 지겨웠다. 이렇게 온 몸에 제어장치를 칭칭 두르고 다녀도 언제 어디서 능력이 폭주할까 전전긍긍 하는 것도, 이깟 얇은 실반지 하나 안 꼈다고 순식간에 몸이 달아오르는 것도, 그것 때문에 또 남준이 땀을 뻘뻘 흘려가며 자신을 케어 하는 것도. 지겹다 못해 신물이 났다. 호석은 상체를 일으켰다. 남준이 재빨리 보고 있던 책을 내려놓고 호석을 받쳐주었다.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자 남준은 협탁에 있는 물병에 물을 따라 건넸다. 일단 이거 마셔. 호석이 아무 생각 없이 컵을 들었다. 시원했다. 열 식히라고 주는 거야? 호석의 물음에 남준이 피식 웃었다.
그... 이런 말 해야 하나 고민 하다가 너한테는 숨기면 안 될 것 같아서.
뭐가.
의사 선생님 갔다 오셨어.
호석의 손이 살짝 떨렸다. 남준은 그의 손을 감싸 잡았다. 한동안 능력을 안 써서 쌓인 게 너무 많았대. 거기다가 제어장치까지 한 번에 풀어버려서 큰일 날 뻔 했다고.
......
이제부터라도 그만 감추고 천천히 개방 하는 게,
남준아. 넌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
호석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남준은 입을 다물었다. 그 의사는 뭘 모르고 하는 소리다. 능력을 천천히 개방을 하라니. 그건 애초에 컨트롤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나 해당되는 말이었다. 자신은 컨트롤 능력이 부족해서 폭주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를 어렸을 때부터 봐와놓고 아직도 그런 소리가 나온대? 호석은 당장이라도 그 의사를 찾아가 멱살 잡고 소리치고 싶었다. 나는 댁들처럼 능력을 컨트롤 할 힘이 아예 없어서, 컨트롤이라는 것 자체가 결핍된 채 태어나 버려서, 그 놈의 천천히가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고 댁들처럼 능력의 힘을 제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고, 소리치고 싶었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한다. 모두가 가지고 태어나는 컨트롤 능력이 결핍된 채 태어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무도 몰랐다. 제어장치를 하나만 빼고 힘이 약한 상태에서 천천히 개방? 다 지랄이다. 애초에 호석은 제 스스로 능력을 쓸 수 없었다. 노력만 하면 컨트롤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의사는 다 호구다. 그거야 컨트롤 능력을 가지고 태어나는 니들이나 가능한 거고요. 컨트롤이란 게 아예 없는 나는 노력이고 자시고 그냥 안 된다고. 아무도 그를 이해하는 사람이 없었다.
넌 모를 거야. 컨트롤 능력이 결핍됐다는 게 무슨 느낌인지.
호석아.
존나 어이없지 않냐? 차라리 능력이라도 거지같던가. 자연계에다가 잠재능력까지 알 수 없으니 그냥 시한폭탄인거지. 언제 터질지 모르는.
......
나한테 노력하면 된다고, 연습하면 된다고, 천천히 시작해보자고 말 하는 새끼들 입을 다 찢어버리고 싶어. 애초에 난 너희들이랑 다른데, 어떻게 그게 되겠냐고. 컨트롤 능력을 키우는 것도 그런 능력이 있어야 하지 씨발. 나한테 그게 어떻게 들리는 줄 알아? 노멀한테 가서 노력하면 너희들도 능력이 나올 거라고 하는 거랑 똑같아.
......
애초에 없는 걸 어떻게 노력을 해. 난 아직도 천천히 능력을 개방해보라는 말을 이해 못해. 아니 어떻게 능력을 천천히 개방 할 수가 있지? 능력이 어떻게 내 마음대로 휘둘러진다는 거지. 나한테는 능력이라는 게 그냥 몸에서 빠져나가는 거야.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자기 스스로 나가는 거라고.
남준은 손을 들어 호석의 눈가를 살짝 훔쳤다. 호석은 고개를 돌려 남준을 바라봤다. 그의 두 눈에 눈물이 고여 있다 결국 볼을 타고 조용히 흘러내렸다. 남준아. 호석이 살짝 잠긴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남준은 대답 대신 그와 눈을 맞추었다. 제발 살려줘. 호석이 탄식과 함께 뱉어낸 말은 공중에서 힘없이 부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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