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뷔민 말도 안되는 육아물 썰13

길/육아물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깜깜함 어둠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이 공간에는 자신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고개를 돌려보아도 다를 것 없는 이곳은 어둠의 끝이 어디인지도 보이지 않았다.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지민아? 불러봤지만 제 목소리마저 어둠에 잡아먹힌 듯 울림도 없이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지민아! 박지민! 도하야! 크게 외쳐 봐도 똑같았다. 여전히 어둠은 물러나지 않았고, 제 말에 답해 주는 이 하나 없었다.

뛰었다. 끝이 어딘지도 모를, 그저 앞만 향해서 뛰었다. 어디선가 웅성웅성 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걸음을 멈추었다. 귓가를 파고드는 알 수 없는 소리가 이상하게 거슬렸다.

왜하필생겨가지고는.없는듯이죽은듯이살아.우리집안에피해주지마.가문의수치.너같은건.한때의실수였어.아직도너를낳은것을후회한다.넌내아들이아니야.복받은새끼.부모잘만나먹고놀기만할줄알지.너같은새끼는얼굴만봐도역겹다.꺼져내눈에띄지마.

괴로웠다. 험한 말들이 한 번에 쏟아져 제 몸 여기저기를 난장판으로 쑤시기 시작했다. 태형은 주저앉아 두 귀를 꾹 막았다. 손틈 새로 악담이 비집고 들어왔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싫다. 이런 건 싫어. 여기서 빠져나가고 싶다. 더 이상 이런 어둠에 묻히고 싶지는 않아. 제 힘으로는 이곳에서 나갈 수 없다. 길도 이정표도 없는 막막한 어둠 속에서 혼자 빠져 나갈 수 있는 방법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몸이 점점 더 수그러졌다. 자신을 향한 악담과 욕설은 더욱 심해졌다. 지겹게 들어왔던 말임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면역력은 없었다. 몸에서 피가 철철철 흐르는 기분이었다. 끔찍했다. 이제는 몸도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들의 말소리는 점점 커졌다. 귀를 더욱 꾹 막았다. 손톱이 귀 뒤쪽을 파고들 정도로 세게 막았다. 지민아. 지민아. 어디 있어. 지민아. 내 목소리를 들어줘.





김태형!

태형은 눈을 확 떴다. 눈 뜨자마자 보이는 것은 잔뜩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는 지민이었다. 괜찮아? 아까부터 계속 끙끙 거리고 막 식은땀 나. 지민은 태형의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이마를 짚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온 몸에 땀으로 젖었는지 찝찝함이 느껴졌다. 태형은 제 이마를 덮고 있는 지민의 손목을 잡고 몸을 틀어 자세를 바꾸었다. 갑자기 침대에 푹 몸이 눕혀진 지민이 당황할 새도 없이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푹 묻었다. 지민은 어정쩡하게 있는 손을 그대로 태형의 머리로 가져가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들었어. 뜬금없는 지민의 말에 태형이 살짝 고개를 들어 지민을 바라봤다. 나 불렀던 거, 네 목소리, 들었다고. 지민이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그대로 내려 태형의 볼을 살짝 감쌌다. 태형의 표정이 살짝 어그러졌다. 악몽 꿨구나, 우리 태형이. 지민의 말에 태형은 얼굴을 폭 묻은 채 그를 더욱 꽉 껴안았다.



태형은 악몽을 꽤나 자주 꾼다. 지민은 그가 꾸는 악몽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 내용은 얼핏 예상이 갔다. 그가 지금 꾸고 있는 악몽들은 아마 과거의 현실이었을 거다. 태형은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태형이 악몽을 꿀 때면 그 날은 아기처럼 착 달라붙어 떨어질 생각을 않는다. 뭐가 그리 불안한지 제 눈에 보이지 않으면 졸졸졸 따라와 기어코 제 시야에 담는다. 태형은 그런 사람이었다. 아직 누군가에게 애정을 가르쳐 주기에는, 태형도 애정이 부족했다.

지민은 뒤에 태형을 매단 채 아침을 준비했다. 오늘이 주말이어서 다행이었다. 만약 평일이었으면 학교 가는데 또 애를 먹었을 것이다. 태형은 지민의 온기를 조금이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허리를 꽉 감싸 안고 목덜미 부근에 머리를 부빗거리기도 하고 쪽쪽 입술을 맞대기도 했다. 민소매 티를 입은 지민은 목덜미도 훤히 드러나 있어서 더 그랬다. , 간지러워 야 나 칼 들고 있어. 지민은 그만두라고 말 하면서도 차마 그를 밀쳐내지는 못했다.


도하 크기 전에는 그 애기 같은 버릇 고쳐야 할 텐데.

......

애가 둘이나 생겨서 어쩌지.

내가 애냐.

지금 이렇게 딱 붙어서 안 떨어지는데 그럼 애지 뭐야.

네가 없었어.

......

그곳에는 네가 없어. 도하도 없고. 나 혼자야.


태형아. 지민은 결국 칼을 내려놓고 뒤돌아 태형을 바라봤다. 뭐가 그리 불안한지 잘게 흔들리는 눈동자가 애처로울 지경이다.


무서워, 그런 거. 더 이상 그런 거 겪고 싶지 않아.

나 어디 안 가. 진짜로. 여기 있을 거야.

......

난 네 목소리 들려. 내가 너 찾으면 되잖아


그건 그냥 꿈일 뿐이니까 다 잊으세요. 지민은 태형의 이마에 살짝 꿀밤을 놓고 다시 뒤돌았다. 태형의 팔이 다시 지민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흐흫. 지민이 낮게 웃음을 흘렸다.

아 그러고 보니 종이 갈 때 됐는데. 지민은 문득 생각나 말했다. 아 종이. 태형도 생각났다는 듯 지민의 뒷목에 푹 기대고 있던 볼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요새 도하는 그림 그리기에 빠졌다. 문제는 스케치북이 아니라 벽에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다. 그걸 하지 말라고 말릴 수도 없고 그래서 생각한 게 벽 한 편에 커다란 도화지를 붙이는 것이었다. 거실 소파 쪽 벽에 커다란 도화지 한 장, 옆 쪽 벽에 도화지 두 장 이어서 붙이고, 도하 방 벽에도 도화지를 붙여놓았었다. 도하의 상상력은 너무 풍부해 도화지는 금방 알록달록한 색으로 채워지곤 했다. 이제는 하얀 부분이 없으면 바꿔달라고 먼저 찡찡댄다.

아이고, 우리 아들 화가해도 되겠다! 언제 한 번, 태형은 온갖 색으로 가득 채워진 도화지를 들고 그런 말을 했다. 도하가 아장아장 걸어와 물었다. 하가가 무야? 그러면 태형은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화가란 말이지, 우리 아들처럼 그림을 엄청엄청 잘 그리는 사람을 말하는 거야. 그러면 도하는 꺄르르 웃었다. 도하 하가! 하가!

태형아 종이 좀 갈아줘. 지민의 말에도 움직일 생각을 않는 태형에 지민은 고개를 살짝 돌렸다. 태형의 머리가 보였다. 종이 좀 갈아달라니까? 태형이 입술을 목덜미에 묻은 채 웅얼거렸다. 간지러운지 지민의 몸이 작게 들썩거렸다.


오늘은 지민이한테 안 떨어질 거야.

? 하루 종일 그렇게 있겠다고?

지민이 어디 못가 게 내가 딱 붙잡고 있을거야.

나 어디 안 간다니까.

알아. 그래도.


흐음. 지민은 작게 한숨을 쉬며 결국 칼을 내려놓았다. 지민이 걸음을 옮기면 태형은 어정쩡한 자세로 뒤뚱뒤뚱 걸었다. 너 전에 도화지 갈고 어디 뒀어? 아 그러게 창고에 놔뒀었나. 지민은 창고 쪽으로 몸을 옮겼다. 세로 길이만 얼추 허리 부근까지 오는 거대한 도화지 뭉치를 두 손을 낑낑 들고 나오는데 방에서 도하가 눈을 비비며 나왔다. 아 우리 아들 일어났어? 태형이가 지민의 뒤에서 얼굴을 빼꼼 내밀며 인사했다. ! 도화지를 발견한 도하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아장아장 걸어왔다. 도하 그리래! 도하 하가! 도화지를 꽉 껴안은 도하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준 지민은 도하의 손을 잡아 살짝 떼어내었다. 이거 무거우니까 엄마가 옮겨줄게? 도하는 알아들었는지 뒤로 물러났다.

거실 한가운데 서서 도화지의 끝 부분에 붙여 놓은 테이프를 떼어냈다. 돌돌 말린 도화지 뭉치 중 네 장을 빼내어 반대로 말아 쫙 펴냈다. 커다란 도화지가 넓은 거실을 채울 듯 펴진 것을 본 도하가 꺄! 소리를 지르며 도화지 위에 누워 데굴데굴 굴렀다. 도하 기분 좋아? 지민의 물음에 응! 도하가 대답했다. 도하 그림! 도하의 말에 지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앞치마랑 토시 가져오세요. 지민의 말에 도하가 방으로 들어가 제 앞치마랑 토시를 들고 왔다.

옷에 잘 안 묻는 색연필이나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리는 거면 몰라, 도하는 물감으로도 그림을 그리기 때문에 앞치마와 토시는 꼭 필요했다. 아들, 아빠랑 같이 그림 그릴까? 태형의 말에 도하는 세게 고개를 끄덕였다. 파파도 이거 해. 도하가 앞치마랑 토시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알았어. 태형은 키득키득 웃으며 말했다. 점심 만들고 있을 테니까 둘이 잘 놀고 있어. 지민이 제 허리를 감싸 안고 있는 태형의 손을 살짝 빼내려 하자 태형은 손에 힘을 더 꽉 주어 안아 지민의 볼에 재빨리 뽀뽀 했다. . 지민이 놀라며  손을 볼에 갖다 대었다. 씨익 웃은 태형이 허리를 감은 손을 쓱 빼고 방에 들어갔다. 마마. 도하가 바지를 잡아당기자 지민은 어어 하며 정신 차리고 도하를 안았다. 왜 그래요? 도하의 몸을 퉁퉁 튕기며 묻자 도하도 갑자기 지민의 볼에 쪽 뽀뽀했다. 지민의 표정이 멍해졌다. 아까 태형이 뽀뽀한 자리였다. 이게 뭐야아? 지민은 푸스스 웃으며 말꼬리를 늘였다. 이힣. 지민을 따라 웃는 도하의 표정이 여간 깜찍한 게 아니다. 지민은 그의 볼에 몇 번이나 뽀뽀를 했다.

뭐야아아! 왜 도하한테만 해줘!! 방에서 나오던 태형이 둘의 모습을 보자마자 다급히 뛰어왔다. 그의 모습을 본 지민이 도하를 내려주자마자, 태형이 지민을 팍 안았다. 아 나도 해줘어! 태형의 앙탈에 지민은 픽 웃으며 그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자 다 뽀뽀했으니까 둘이 놀고 있어. . 지민의 말에 태형은 쭈그려 앉아 도하에게 앞치마를 매주기 시작했다.

아이고, 우리 아들 이거 입으니까 진짜 화가 같네. 토시까지 끼워준 태형은 바로 휴대폰을 들어 도하를 찍기 시작했다. 아들, 이쁜 자세. 태형의 요구에 도하는 자세를 잡기 시작했다. 옳지! 아구 잘한다! 와 기깔 난다 진짜! 누구 아들인데 이렇게 멋져? 완전 모델이다, 모델! 표정 쥑인다! 태형이 한 컷 찍을 때마다 터져 나오는 칭찬에 도하가 꺄르르 웃어댔다. 지민은 찌개를 끓이면서 들리는 목소리에 피식피식 웃어댔다. 언제나 생각하는 거지만 다른 곳에서 저 부자들 노는 소리를 들으면 그렇게 재밌는 게 없다. 아주 둘이서 꺄르르 꺄르르 좋아 죽는다. 또 사진 찍는데 여념이 없겠지. 지민은 다 끓여진 찌개를 한입 맛보았다. , 잘 끓였다.

밥 다됐으니까 부엌 오세요. 지민의 크게 부르며 식탁에 세팅했다. 밥 다됐다니까? 아무도 올 기미가 보이지 않자 지민이 한 번 더 불렀다. 대답도 안 들리고 올 낌새도 보이지 않자 지민이 거실로 나갔다.


밥 다 됐다는데 왜 안 나와!

?


동시에 꽂히는 땡글땡글한 눈에 지민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똑같은 앞치마를 매고 마주보고 엎드려서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 모습이 붕어빵처럼 똑같아 지민은 결국 웃음을 풉 터뜨렸다. 너희 완전 쌍둥이 같아. 쌍둥이? 태형이 몸을 일으켜 앉았다. 도하도 꾸물꾸물 몸을 일으켜 앉았다.


지민아. 우리가 그린 그림 볼래?

일단 밥 먼저 먹... 야 너 손이 왜 그래!


지민은 순간적으로 보인 태형의 손바닥에 경악을 하며 달려왔다. 태형이 놀라서 손을 숨기기도 전에 지민이 손목을 확 잡아당겼다. 손바닥 전체가 시뻘건 태형의 손을 본 순간 욱한 지민이 뭐라 한마디 하려다 입을 꾹 다물었다. 거대한 도화지 곳곳에 알록달록한 손바닥이 꾹꾹 찍혀 있었다. 도하 손바닥 보자. 지민의 말에 도하가 두 손을 뻗었다. 노란색과 초록색이 손바닥 전체에 꼼꼼히 발려져 있는 것을 본 지민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둘이 손 씻고 와, 빨리 밥 먹게. 지민의 말에 둘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쪼르르 화장실로 들어갔다. 지민은 덩그러니 남겨진 도화지를 내려 봤다. 참 알록달록하게도 찍었네. 지민은 도화지를 들어 거실 벽에 붙였다.

근데 너희 대체 뭐 그리려고 손바닥 찍은 거야? 지민이 다소 큰 소리로 한 말에 태형이 화장실 안에서 대답했다. 손바닥 동물원! 아하. 지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손바닥 동물원은 요즘 도하가 빠진 동화책이었다. 그 동화책 그림은 전부 손바닥을 찍고 사인펜 같은 것으로 추가적으로 그려서 동물로 만든 것들이었다. 귀엽기는. 지민은 중얼거리며 먼저 부엌으로 들어갔다.





마마, 밥 다 먹구 노리터 가두 대? 도하가 밥을 냠냠 씹으며 묻는 말에 지민이 젓가락질을 멈추고 도하를 바라봤다. 그럼 당연히 되지. 지민의 말에 도하가 베시시 웃으며 밥을 빨리 먹기 시작했다. 천천히 먹어, 안 그럼 나중에 도하 배 아야 한다. 그제야 도하는 밥을 꼭꼭 씹어 먹기 시작했다.

그럼 나도 따라가야 하나? 그들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던 태형이 입을 열었다. 그제야 지민은 도하가 전에 한 말이 생각났다. , 그건 그렇네. 지민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어떤 누나가 다가와서 말 걸었다는 것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진짜 아이가 예뻐서 말을 걸었을 수도 있지만 요즘 사회가 그렇다보니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럼 밥 먹고 아빠랑 갔다 올래? 지민의 말에 도하의 입이 불퉁하게 나왔다. 그 입은 뭐야, 아들. 태형은 내심 서운하다는 투로 말했다.


파파도 좋은데에... 노리터에서는 칭구들이랑 놀구 시픈데 파파가 계속 도하랑 놀구 시퍼 하니까...


도하의 말에 빵 터진 지민이 옆에 앉아 있는 태형을 퍽퍽 때렸다. , 아파! 태형은 지민의 손을 홱 치우고 맞은 데를 슥슥 문질렀다. 그럼 엄마랑 아빠랑 같이 갈 테니까 도하는 친구랑 놀고 엄마는 아빠랑 놀면 어때? 죠아! 지민의 말에 한결 표정이 밝아진 도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거실에 어질러 놓은 건 다 치우고 놀러가야 해. 지민의 말에 도하가 바로 자리에 일어났다. 밥은 다 먹고! 다 머거써! 뒤도 안 돌아보고 가는 도하의 뒷모습만 보던 지민이 피식 웃으면서 도하의 밥그릇을 치웠다. 싱크대에 두고 오던 지민은 태형의 설레 하는 표정을 보고 웃음이 더욱 진해졌다. 뭐가 그렇게 신났어? 지민의 물음에 태형은 고개만 저었다.


놀이터 데이트.

?

와 놀이터 데이트 하니까 뭔가 고등학생 같애. 놀이터 정자에 앉아서 이야기 하고. 완전 풋풋해.

우리가 풋풋해 하기에는 너무 오래되지 않았냐? 애까지 있는데.

무슨 상관이야. 마음이 그대로면 됐지. 난 아직도 막 설레고 그러는데.


넌 아니야? 태형의 물음에 지민은 고개를 저었다. 나도 여전히 좋아.

마마 다 치워써! 거실에서 들리는 도하의 목소리에 지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탁 좀 치워줄래? 그의 부탁에 태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하 이 닦고, 옷 입고 해야지 그러면. 태형은 지민이 부엌을 나서는 모습을 좇다, 그가 더 이상 보이지 않고 나서야 자리에 일어나 식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식탁 정리를 마치고 거실로 나올 때 즈음 지민과 도하도 방에서 나왔다. 헐 우리 아들 완전히 복숭아 됐네. 태형은 또 주섬주섬 핸드폰을 꺼내들기 시작했다. 베이비 핑크색의 후드티에 멜빵이 있는 연청바지를 입고 노란 병아리가 그려져 있는 흰 양말을 신고 나온 도하는 귀엽기 그지없었다. 내 새끼 이렇게 분홍색이 잘 어울리다니, 역시 내 안목은 틀리지 않았어. 폰에서 찰칵찰칵 소리가 나자 도하는 기가 막히게 알아차리고 포즈를 잡기 시작했다. 지민은 슬쩍 몸을 피해 프레임 밖으로 벗어났다. 왜 피해. 안 돼, 나 지금 좀 못생겼어. 뭔 소리야,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도하 옆에 붙어.


아 진짜 아니야. 얼굴도 좀 부었고.

어디가? 너 얼굴 원래 그렇게 통통했잖아.

!


태형은 키킥거리며 도하 옆에 붙으라고 손짓했다. 지민은 입을 불퉁하게 내밀며 도하 옆에 붙었다. 어떻게 저런 표정은 도하랑 지민이랑 똑같냐. 태형은 문득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폰을 들었다. 마마 나 안아주. 도히가 팔을 뻗자 지민은 도하를 안아 들었다. , 도하 브이. 도하는 브이 한 손으로 제 눈가에 갖다 대었다. 찰칵. 셔터 음이 경쾌하게 울렸다. 빠리 가자! 도하의 재촉에 지민과 태형이 후다닥 안방에 들어갔다. 미안해 도하야, 옷 빨리 갈아입고 나올게!



왼손은 엄마 손, 오른손은 아빠 손을 잡은 도하가 신나서 폴짝폴짝 뛰었다. 마마 파파 하늘그네! 도하의 말에 지민과 태형이 동시에 팔에 힘을 주어 도하를 들어올렸다. 도하의 몸이 붕 뜨면서 앞으로 후웅 갔다. 꺄아!! 도하가 재밌는 듯 마구 웃어댔다. 한 번 더! 도하의 말에 한 번 더 하늘그네를 해주었다. 도하가 꺄르르 넘어갔다.

, 얘드라!! 저 앞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친구들을 발견한 도하는 두 손을 놓고 후다닥 달려갔다. 도하야 그러다 넘어져! 지민의 걱정 어린 외침은 들리지도 않는지 도하는 기어코 뛰어가 친구들 사이에 꼈다.

태형과 지민은 천천히 걸어가 놀이터 근처에 있는 정자에 나란히 앉았다. 바람이 선선하게 불었다. 그래도 아직 완전히 여름이 온 건 아닌가보다. 태형의 말에 지민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 멀리 도하가 친구들이랑 놀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래도 도하가 친구들이랑 잘 놀고 있어서 다행이다.

도하 친구 많아. 맨날 놀이터에 가면 친구들한테 인기 많은데?

어린이집이고 유치원이고 보낸 적이 없어서 걱정했는데.

그걸 왜 걱정해. 우리 아들은 언제 어디서나 인기 많아. 맨날 친구들이 있어.


태형이 뿌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민은 그의 표정을 보다가 푸흐 웃었다. 그러게, 누구 아들이길래 이렇게 친화력이 좋을까. 태형은 그대로 지민의 팔을 감싸 팔짱을 끼고 머리를 부빗거렸다. 왜 이래. 지민은 태형을 밀어내는 듯하다 결국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주었다. 태형은 제 얼굴을 지민의 어깨 부근에 파묻었다. 오늘. 태형의 나직한 목소리에, 그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던 손길을 멈추었다. . 지민이 작게 대답했다.


꿈을 꿨었잖아.

.

... 아무도 없었다고 했잖아. 어두컴컴한 그곳에 너도, 도하도 없이 나 혼자 덩그러니.

......

거기서 그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었어. 요즘 그런 꿈을 자주 꿔.

태형아.

어쩌지. 내가 너무 행복해서 그런가. 내가 행복한 게 싫어서 계속 나오는 건가? 계속 그런 말 하는 건가?

김태형.

지민아. ...


지민이 다급히 몸을 돌려 두 손으로 태형의 볼을 잡았다. 어느새 태형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갑자기 오른 열 때문인지 눈가가 벌겠다. 지민은 울컥함에 입술을 살짝 깨물며 엄지로 그의 눈가를 살살 쓸어 눈물을 닦아냈다. 왜 자꾸 그런 생각 하는 건데. 지민은 애써 단호하게 말했다.

 

 

그거 그냥 꿈이야. 개꿈이라고. 너 이제 그 사람들이랑 완전히 정리했잖아. 왜 계속 연연하는 건데. 태형아. 이제 너 그 사람들이랑 완전히 남이야.

 

지민아.

 

네 가족이 여기 있잖아! 네 아들도, 나도. 여기 네 옆에!

 

 

태형은 제 볼을 감싸 안고 있는 지민의 손목을 감싸 쥐었다. 살포시 눈을 감자 결국 눈물이 떨어졌다. . 지민은 속상함에 자꾸 한숨이 나왔다. 미웠다. 태형이를 평생 놔주지 않을 것 같은 그 족쇄를 만든 가족들이 너무 끔찍했다. 아니, 이제는 가족도 아니었다. 정말로 태형에게 가족은 지민과 도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매정하게 잘랐으면서, 왜 계속 태형이의 꿈에서 나오는 건지. 대체 태형이가 왜 그들에게 지금까지 그런 소리를 들어야 하는 건지. 지민은 결국 태형이를 와락 안았다. 태형이 자연스레 팔을 지민의 목에 둘렀다. 태형아, 더 이상 두려워하지 마. 귓가에 지민의 목소리가 들린다. 끔찍한 그들의 목소리 위로 지민의 목소리가 덮인다. 이제 너 혼자가 아니잖아, 그러니까 더 이상 그 사람들을 무서워하지 마. 지민은 천천히 얼굴을 떼고 태형을 바라봤다. 너 옛날로 돌아갈 일, 절대 없어. 똑같이 눈물을 달고 있는 주제에 그렇게 말하는 표정은 단단하다. 태형은 지민의 눈가를 살짝 훔쳤다. 너는 왜 우냐. 태형의 말에 지민이 흠칫 놀라 다급히 팔로 제 눈가를 닦았다. 몰라 나도, 갑자기 눈물이 났겠지. 민망한 듯 살짝 몸을 내뺀 지민을 보던 태형이 그의 허리에 손을 감아 확 당겼다. , 깜짝아! 갑자기 몸이 끌리며 태형에게 폭싹 안긴 지민은 태형의 배를 툭 쳤다. 살짝 누운 듯한 자세에 지민은 살짝 고개를 들어 태형을 바라봤다.

 

 

지민아. 나 잘 하고 있어?

 

?

나 좋은 아빠야?

 

 

그의 물음에 약간의 떨림이 느껴졌다. , 잘하고 있어. 지민은 바로 대답했다. 당연하다는 듯한 그의 말투에 태형이 피식 웃었다. 너 도하한테 정말 좋은 아빠야. 지민은 확인 사살하듯 좋은 아빠에 힘을 주어 말했다. 넌 앞으로도 좋은 아빠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지민의 확신에 가득 찬 말에 태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민은 아예 태형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마, 진짜로. 태형은 말없이 지민의 앞머리를 살살 넘겼다.

 

, 저거 뭐야. 지민이 갑자기 상체를 확 일으키며 말하자 태형이 화들짝 놀라며 놀이터 쪽을 바라봤다. 둘 다 동시에 자리에 벌떡 일어나 도하가 있는 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김도하! 갑자기 들린 제 이름에 도하가 뒤돌아보기 무섭게 몸이 확 들려졌다. 파파? 도하는 어느새 자신을 안고 있는 태형을 바라봤다. 당신 뭐예요, 우리 애한테 무슨 볼 일이에요. 지민은 확 굳은 얼굴로 도하의 앞에 쭈그려 앉아 있던 여자에게 물었다. 여자는 당황한듯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

 

 

, 안녕하세요.

 

당신 누구냐구요! 저번에도 우리 도하한테 왔었다고 들었는데 무슨 볼 일이에요, 우리 애한테!

 

죄송합니다. 악의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여자는 고개를 몇 번이나 숙이며 사과 했다. 도하야 저 사람이 너한테 뭐 말 한 거 없어? 태형이 도하에게 슬쩍 물었지만 도하는 고개만 저었다. 저 누나 사진 찡는 사람이래. 도하의 대답에 태형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진? 지민도 도하의 말을 듣자 얼굴이 더 딱딱하게 굳었다. 태형은 아무 생각 없이 지민을 바라봤다가 바로 홱 고개를 돌렸다. 누가 봐도 빡친 모습이다. 어휴, 쟤 빡치면 진짜 무서운데. 태형은 작게 혀를 찼다.

 

 

사진 찍는 사람이라고요?

 

저 절대로 이상한 거 찍는 사람 아니고요! 죄송합니다. 아이가 너무 예뻐서 그만... , 일단 전 이런 사람입니다.

 

 

여자는 황급히 명함을 건네었다. 지민은 씩씩 거리면서 명함을 내려다봤다. 뭔데? 태형도 얼굴을 힐끗 들이밀며 봤다. 제가 지금 키즈 모델을 구하고 있는 중인데 아드님이 너무 눈에 띄어서요. 여자의 부연 설명에 지민이 어벙한 표정으로 여자를 바라봤다. 모델? 태형이 놀라서 되물었다. 모델? 도하가 태형의 말을 따라 했다.

 

 

. 우연히 인스타를 봤는데 저희가 찾고 있는 이미지와 딱 맞아떨어져서요. 혹시 관심이 있으시면 꼭 좀 와주세요.

 

... 너무 갑작스러워서...

 

꼭 좀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힘든 것도 아니고요. 아기들한테 힘든 일을 시키는 것도 아닙니다. 굉장히 편안한 환경에서 촬영하고, 부모님도 다 오셔서 보고 그러는 거라서 괜찮습니다

 

...

 

항상 인스타만 보다가 이렇게 실물로 뵙는 것은 처음인데 역시 아버님 닮아서 도하가 그렇게 예쁜가봐요.

 

 

여자는 태형을 보면서 말했다. ... 감사합니다. 태형이 어색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파파 나 내려조. 도하의 말에 태형은 또 어어 얼빠진 표정으로 대답하며 도하를 내려주었다. 아직도 이 상황이 얼떨떨하기만 하다. 인스타 보고 찾아왔다니. 정말 인스타 보는 사람이 많기는 한가보네. 태형은 머리를 긁적이며 그런 생각을 했다. 도하는 아장아장 걸어가 지민의 다리를 안았다. 지민이 슬쩍 도하를 내려다 봤다. 마마, 사진 찡는 고야? 도하의 물음에 지민은 쭈그려 앉아 도하와 시선을 맞추며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이 누나가 도하가 너어무 예뻐서 도하를 찍고 싶다고 하네. 지민의 말에 흐음... 도하는 검지로 제 옆머리를 콕 찍으며 골똘히 생각하는 자세를 취했다.

 

앞에 있는 여자는 그들의 관계를 파악 하느라 머리가 핑핑 돌아갔다. 일단 아빠는 저 남자일테고, 이 남자는 그래봤자 아빠의 친구일 줄로만 알았는데 마마라니 머리가 복잡해진다. 게다가 실물로 봤던 것 보다 훨씬 더 젊어 보인다. 아니, 젊은 수준이 아니라 그냥 어려 보였다. 많이 해봤자 20대 중반으로 보이는데. 아무리 봐도 자신보다 어려보이는 남정네 둘 사이에 6살 된 아이라니 참 묘한 관계다 싶다.

 

 

지금 당장 답 안주셔도 되니까, 언제라도 마음이 생겼거나 이 쪽 일이 궁금하시면 그 번호로 언제든지 전화주세요. 정말 언제라도 괜찮으니까요, 꼭 부탁드립니다!

 

아아, ...

 

 

허리 숙여 인사하는 여자를 보고 얼떨결에 따라 인사한 지민은 그렇게 후다닥 가버리는 여자의 뒷모습만 멍하니 보다가 천천히 명함을 내려다보았다. 이야, 우리 아들 이쁜 건 알아가지고. 태형도 옆에서 명함을 힐끗 보며 말했다. 그러게. 지민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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