뷔민 남고생의 일상 14
길/남고생의 일상 (完)1. 축제
그들이 다니는 마고는 축제로 굉장히 유명했다. 다른 학교에 비해 축제 크기도 큰 편이었고 볼거리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 중에서 제일 유명한 것은 역시 댄스였다. 마고 댄스부는 지역적으로 유명했다. 그저 취미로 댄스를 하고 싶어서 온 아이들이 만든 동아리라고 하기에는 그 퀄리티가 굉장히 뛰어났고 전국 대회에서 상을 탄 적도 몇 번 있었다. 그래서 근처 동네 학생들은 더더욱 마고 축제를 보러 오려고 했었다. 작년부터는 그 유명한 지민 덕분에 축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 열기는 더욱 뜨거웠다.
지민은 댄스부를 피할 수는 없었다. 고등학교 들어오고나서 댄스부에 들어가지도 않았지만 댄스부는 끈질겼고, 그래서 연말 축제 때만 도와주기로 합의를 봤던 것이다. 그 합의조차도 태형은 모르고 있는 일이지만. 안그래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춤 추는 것을 치떨리게 싫어하는 김태형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또 난리날 것이다.
아니 지금은 모르겠다. 화해 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태형은 제 춤연습 하는 모습을 보러 오지 않았었고, 이제는 정말 신경 안쓰는 듯 했다. 왜 애가 하던 짓을 안하지. 그의 작은 변화가 오히려 불안했다. 이제는 제가 춤을 추든 꽹과리를 치든 아무 상관 안쓸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니 어쩐지 우울해져 몸이 추욱 처졌다. 한창 무대 준비로 바쁘게 왔다갔다 거리던 친구 한 명이 지민의 어깨를 감싸안고 손에 살짝 힘을 주어 잡았다. 왜 이렇게 축 처졋어, 곧 무대 올라야 하는데. 지민은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우리 제일 마지막이지?
어, 몸 좀 풀고 있어. 아직 시간 좀 남긴 했는데.
나 축제 보러 갔다 와도 돼?
상관 없긴한데 우리 전전 무대까지는 와야한다. 동선 한 번 더 맞춰보게.
알았어.
지민은 대기실을 나오며 대답했다. 어쩐지 속이 답답해 바깥공기라도 쐬어야 할 것 같았다. 길게 나 있는 복도를 지나 밖으로 나왔다. 바로 옆에 붙어있는 강당에서는 쿵쿵쿵 음악소리가 크게 났다. 아마 레크레이션을 하고 있는 듯 했다. 마고 축제는 마고 학생들뿐만이 아니라 다른 학교 학생들도 많이 오기 때문에 본격적인 축제 시작 전에 레크레이션을 진행했다. 마고의 레크레이션 또한 많이 유명했다. 축제를 보러 오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하기 때문에 매 년 새로웠고 재미있었다. 마고 레크레이션에 오면 애인이 생긴다는 전설은 이미 유명한 말이라 매 년 새로운 인연을 원해서 오는 사람들도 넘쳐났다. 또한 레크레이션은 고등학생들만 참가할 수 있기 때문에 정말 그들만의 축제인 것이다.
지민은 강당 뒷문으로 슬쩍 안을 봤다. 올해도 역시 엄청난 인파였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 저 앞에 있는 무대가 잘 보이지 않았다. 어째 작년보다 사람이 더 많이 온 것 같냐... 지민은 어쩐지 긴장되는 기분이었다. 원체 사람들 앞에서 많이 서봤기 때문에 이제는 아무렇지 않을 법도 한데, 지민은 항상 무대에 처음 오르는 사람처럼 떨렸다.
강당 안으로 들어가자 벌써부터 열기가 후끈거렸다. 지민은 다닥다닥 붙어 있는 인파를 비집고 들어갔다. 어쨌든 지민도 이 학교 학생이므로, 앞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노래가 심장을 쿵쿵쿵 때릴 정도로 크게 들리고 엠씨가 한창 진행을 하고 있었다. 언제부터 시작 했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한창 뜨겁게 달아오를 때 들어온 듯 했다.
앞자리는 뒷사람들을 위해서 자세를 낮춰주어야 했기 때문에, 앞자리 사람들은 거의 앉아 있었다. 지민도 대충 자기 반이 있는 위치를 찾아내어 비집고 들어가 앉았다. 아나 빡찜 자리 없다고! 주위에서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지민은 뻔뻔하게 안 들리는 척 했다. 제 옆에는 정우가 있었고 그 주위로 지혁과 이한도 있었다. 바로 뒤에는 태형이 있었다. 색시 우리 여기 있는 거 어떻게 알았어? 태형이 지민의 어깨에 턱을 얹고 말했다. 지민은 순간 옆구리부터 귀까지 쫘악 소름이 돋아, 흠칫 몸을 떨었다.
야... 그렇게 말 하지마, 간지러워.
어? 잘 안 들려.
내 귀 가까이 대고 말 하지 말라고!
지민이 결국 고개를 돌려 큰 소리로 말 하고 나서야 태형은 이해 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민은 다시 앞을 바라봤다. 지금 뭐 하고 있었어? 지민은 바로 옆에 있는 정우에게 바짝 다가가 물었다. 체육관은 너무 시끄러워서 이렇게 가까이서 이야기 하지 않으면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지민의 말을 용케 알아들은 정우는 지민에게 얼굴을 들이밀고 조금 크게 말했다. 엠씨가 말하는 조건에 충족되는 사람 나가는 거 있잖아. 아아, 그거. 지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마지막입니다. 과연 이번에는 나올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엠씨 특유의 익살스러운 목소리가 체육관을 울렸다. 체육관 안은 여전히 쿵쿵 울리는 노랫소리 외에는 다른 사람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만큼 학생들은 엠씨의 목소리에 집중을 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묘한 긴장감이 도는 듯 했다.
이 체육관 안에서 내가 가장 인기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나오세요!
야 이건 무조건 김태형이다!
김태형 나가!
김태형! 김태형!
엠씨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태형의 옆에 있던 지혁이 태형을 억지로 일으키기 시작했다. 태형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두 손을 거세게 휘저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미 옆에 있는 정우를 시작으로 주변에 있는 학생들이 전부 김태형을 외쳐댔다. 얼른 나오세요! 아무나 나오세요! 엠씨는 아무나 나오라고 하면서 태형을 향해 손을 까딱였다. 아직까지 무대 위로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니 네가 아니면 누가 나가! 정우까지 태형의 팔을 잡고 일으키자 그들의 힘을 못이긴 태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혁이 불시에 태형의 등을 밀어 앞으로 보냈다. 태형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결국 무대 위로 올라갔다. 태형의 걸음이 누구나 느낄 정도로 조심스러웠다. 표정도 조심스럽게, 걸음도 조심스럽게 무대 위로 오른 태형은 약간 긴장된 듯 딱딱하게 섰다. 너 정말 인기 많나 보네, 아무도 안나오는 거 보면. 엠씨의 말에 태형이 화들짝 놀라며 손사래 쳤다. 그러자 무대 아래에서 엄청난 야유가 쏟아졌다. 김태형 구라 치지 마라, 새끼야!! 정우가 악에 받친 소리를 질렀다. 야유와 환호성이 한데 섞여 체육관은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엠씨가 중재를 하고 나서야 흥분이 조금 사그라들었다.
일단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아... 마고 2학년 김태형입니다.
체육관에 태형의 목소리가 울리자 또 한 번 큰 환호성이 터졌다. 참 나 좋아 죽는구먼, 좋아 죽어. 정우의 말에 지민이 작게 웃었다. 좋을 수밖에. 특히 다른 학교 애들은 이런 때 아니면 김태형을 보기 힘드니까. 아마 지금 이 체육관 안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 반 정도는 김태형을 보러 왔을 것이다. 그 중 일부는 혹시나 김태형과 인연이 닿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이 있을 수도 있다. 지민은 그렇게 확신했다. 아마 자신이 다른 학교 여자였다면 분명 김태형 걔가 대체 뭐길래 이 동네에서 그렇게 소문이 자자한지 궁금해서라도 와 볼 것 같았다. 지민은 다리를 세워 앉아 두 팔을 얹고 턱을 괸 채 태형을 올려다봤다. 위에서 보는 태형도 멋있었다. 그냥 멋있다 못해 막 빛이 나서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물론 빛이 나서 눈이 부시는 건 조명 탓이겠지만. 아마 좋아하는 가수의 콘서트를 보러 가면 이런 기분일까.
가까이서 보니까 왜 아무도 안 나왔는지 알 것 같애. 진짜 나 레크리에이션 강사 한지 십년 가까이 되는데 이런 얼굴 처음 봤어.
가, 감사합니다...
어디 아이돌 연습생이에요? 아니면 배우 지망생?
에? 아뇨. 그냥 학생인데요. 연예인 생각도 없어요.
와 진짜 이 정도 얼굴은 거의 다 연습생이나 배우 준비 하는 애들이던데. 이런 얼굴 여기서 썩히기 너무 아까워서 그래. 뭐 명함 받은 것도 없어요?
아... 있긴 한데 딱히 관심 없어서 다 거절해요.
태형이 말할 때마다 여기저기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지민도 들으면서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김태형 연예인 되는 건 진짜 싫어했지. 얼굴이 아깝다는 생각 엄청 많이 하긴 했는데 뭐, 쟤 짝사랑 하는 입장에서는 연예인 생각도 없는게 다행이려나.
태형군을 좋아하는 사람이 엄청 많을 것 같은데.
엠씨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섞여 시끄러워졌다. 김태형은 어지간히도 쑥스러운지 고개까지 숙였다. 엠씨는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자, 여기에 태형군을 좋아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여기서 장기자랑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어요?
또 한 번 함성이 터져 나왔다. 태형군이 뭘 했으면 좋겠어요? 엠씨의 물음에 각자 보고 싶은 것들을 목 터져라 불러댔다. 역시 노래랑 댄스가 제일 많네요. 엠씨의 대답에 태형이 다급히 엠씨의 마이크를 뺏어들었다. 저 춤 진짜 못 추니까 차라리 노래할게요. 태형의 말에 사람들은 거의 실신 직전이었다.
오, 김태형 노래 부르는 거 잘 못 들어봤는데.
그러게. 존나 우리랑 있을 때는 그렇게 빼더니.
빡찜, 넌 들어봤어?
정우가 물어보며 지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흠칫 놀랐다. 지민의 표정이 묘하게 심기 뒤틀린 듯한 표정이었다. 박지민, 너 왜 그래? 정우가 지민을 살짝 흔들자 그제서야 정신이 든 듯 흠칫 놀라며 정우를 바라보는 지민이었다.
어, 어? 뭐라고 했어?
아니 너 근데 표정이 왜 그래, 어디 아파?
... 아니.
저번에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부르기 싫다고 했으면서... 지민은 괜히 심술만 나, 입술을 불퉁하게 내밀었다. 자꾸 질투만 늘어나니 큰일이다. 이러다 나중에는 자신이 무슨 일이라도 일으킬 것만 같았다. 이제는 이런 자신이 싫을 정도였다. 시도 때도 없이 질투하고 마음이 베베 꼬이니 정말 자신이 못된 사람 같다.
앉아서 부르고 싶다는 태형의 말에 의자까지 올라왔다. 뒤에서 사람들의 환호성이 들렸다. 지민의 입은 삐죽삐죽 들어갈 생각을 안했다. 엠씨한테 귓속말로 무언가를 속삭인 태형이 자리에 앉았다. 곧이어 체육관에 MR이 울려 퍼졌다. 익숙한 멜로디에 사람들이 우와 소리를 질렀다. 태형이 입꼬리를 부드럽게 올리며 씨익 웃었다. 알 수 없는 자괴감 때문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지민도 천천히 고개를 들어 태형을 올려다봤다. 의자에 다리 꼬고 앉아서 눈을 감은 채 살짝 미소를 짓고 있는 태형은 솔직하게 너무 멋있었다. 김태형은 누구라도 멍하게 그를 보게 되는 얼굴이었다. 그를 보면 왠지 모르게 숨이 턱 하고 막히고, 심장은 잔잔하지만 조금은 빠르게 뛴다. 원래도 홍조가 있었지만 얼굴에 열이 몰리는 느낌도 든다. 남이 보면 아마 얼굴이 더 빨개져 있겠지.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보이려나. 지민은 턱을 괴고 있던 두 손을 살짝 움직여 두 볼을 감쌌다.
자꾸 눈이 가네 하얀 그 얼굴에
질리지도 않아 넌 왜
슬쩍 웃어줄 땐 나 정말 미치겠네
어쩜 그리 예뻐 babe
달달한 MR과 함께 태형의 목소리가 잔잔하게 울렸다. 적당히 낮은 그의 목소리는 노래와 또 묘하게 잘 어울렸다. 미친 김태형 노래 존나 잘 부르네. 정우가 지민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지민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태형의 목소리는 노래를 부를 때 진가를 발휘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낮고 허스키한 듯 담백한 목소리는 노래 부르는데 적합한 목소리였다. 저 목소리에 이다지도 달달한 노래를 부르다니, 이건 사기다.
You know he's so beautiful
Maybe you will never know
내 품에 숨겨두고 나만 볼래
어린 마음에 하는 말이 아니야
꼭 너랑 결혼 할래
노래를 부르며 천천히 눈을 뜬 태형과 눈이 마주쳤다. 서로의 시선이 얽혀 꽉 잡힌 듯, 지민은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태형도 시선을 다른 데 옮길 생각이 없는지 계속 지민을 바라봤다.
오 어떤 단어로 널 설명할 수 있을까
아마 이 세상 말론 모자라
지독히도 취향인 목소리로 달달하기 그지없는 노래를 부르며 올곧은 시선으로 자신만을 바라보니, 지민은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미치겠다. 귓가로 스며드는 그의 목소리와 제 시선에 가득 담긴 그의 얼굴이 정말이지 위험하다. 자꾸 이렇게 되면 나중에 정말 태형에게 옴짝달싹도 못하고 잡히게 생겼다. 절대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몇 번을 말해줘도 모자라
오직 너만 알고 있는
간지러운 그 목소리로
노래 부를 거야 나 나 나 나
자꾸 맘이 가네 나 정말 미치겠네
노래를 끝낸 태형은 살짝 웃었다. 지민은 결국 고개를 푹 숙였다. 큰 박수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환호성이 아득히 들렸다. 이미 끝났는데 자꾸 태형의 노랫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제 심장소리도 크게 들리는 것도 같다. 어떻게 이런 노래를 저런 목소리로 여기서 부를 수가 있어. 태형의 노래가 끝나자마자 또 심술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사실 태형이 못 부를 이유도 없는데. 부르든 말든 자신이 왈가왈부할 일 아닌데. 와중에 마지막에 노래를 끝내고 자신을 보며 웃었던 그 표정이 생생히 기억에 남았다.
이런 얼굴에 그런 목소리에 노래실력까지 완전 사기 아닌가요.
엠씨가 감탄을 하며 태형에게 다가갔다. 태형은 그 말에 쑥스러운 듯 고개를 살짝 숙이며 웃었다. 노래 부르는 거 들어보니까 그냥 그 노래를 부른 건 아닌 것 같은데. 엠씨는 그런 말을 하며 짓궂은 표정을 지어보였다.
가사가 대놓고 너 좋아해하는 노랜데 표정도 엄청 행복한 표정 지으며 부른 거 알아요?
알아요.
오오오오!!!!
엠씨가 어떤 의미로 물어본 건지 대놓고 드러났다. 태형은 그런 엠씨의 물음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대답했다.
혹시 여친 있어요?
아니요.
그렇다면 이 체육관 안에 있는 사람들이 무엇을 궁금해 할지 알 것 같네요. 왜 학교에서 이 정도로 인기 많은 애들은 누구를 잘 안 사귀는 경우가 많거든. 자, 그럼 좋아하는 사람은 있습니까?
와아아악!!! 엠씨의 물음에 학생들이 난리가 났다. 어쩌면 태형에게 제일 궁금했던 질문. 최근에 크게 돌았던 소문의 진상을 알게 될 날이 오늘일지도 몰라, 학생들은 숨까지 죽여가며 태형의 대답을 기다렸다. 일단, 누구를 사귀고 있다는 소문은 개구라였고 좋아하는 사람의 유무만 알면 되었다. 여학생들은 엠씨한테 고마워 죽을 지경이었다. 원체 태형에 대해 아는게 없었는데 이번 기회에 많이 알아가는 것 같았다. 좋아하는 사람은 고사하고 이상형만이라도 알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 태형을 좋아하는 nn명 아니, 어쩌면 1nn명의 여학생들은 태형에게 집중했다. 잠시 생각하는 듯 체육관을 한 번 쓱 훑어 본 태형은 천천히 마이크를 들었다.
네, 있어요.
꺄아아아!!! 체육관이 또 한 번 난리가 났다. 그 소문이 진짜였어, 씨발 어떡해!! 여기저기서 안타까움인지 혹시 모를 기대인지 모를 웅성거림으로 시끄러워졌다. 엠씨가 두 손으로 진정하라는 듯 제스처를 취하자, 그제서야 조금 조용해졌다.
그럼 방금 부른 노래는 좋아하는 사람에게 불러준 건가요?
그 아이 생각하면서 부른 건 맞아요.
그 아이라니 동갑 아니면 연하겠네요.
헐 동갑 아니면 연하라니. 그 자리에 있던 2학년 1학년 학생들은 혹시 모를 기대가 생기기 시작했다. 에이 설마 나는 정말 아니겠지만 혹시나 나인 거 아니야? 내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지만 그래도 복숭아 같다는 소리 좀 듣는 편인데. 태형을 좋아하던 사람들이 각자 착각을 할 때, 지민은 무릎을 안고 고개를 파묻은 채 꼼짝 않고 있었다.
태형이 그 사람을 얼마나 좋아하는지는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보면서 아주 잘 알았다. 그가 눈을 감으며 노래를 부를 때 그 표정이 세상 얼마나 행복해 보였는지. 그 사람 생각하는 것만으로 그런 표정이 나온 거라면, 여태까지 좋아하는 사람 있는 것을 어떻게 숨겼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태형의 그 표정은 지민조차 낯선 표정이었다. 태형이 그렇게 행복해 했던 적이 있었나. 그렇게 온 몸으로 드러날 정도로 누군가를 좋아했던 적 있었나. 과거를 돌이켜봐도 없었다. 지민은 깨달았다. 아, 얘 정말 사랑하고 있구나.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억지로 참으려고 했지만 이제는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짝사랑?
...네.
태형이 대답을 할 때마다 함성이 터져 나왔다. 지민은 아예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지만 그 손을 비집고 들어오는 소리까지 다 막을 수는 없었다. 아득하게 엠씨와 태형의 목소리가 계속 들렸다.
그 친구는 어떤 친구예요?
그냥... 노래 가사처럼. 그런 친구예요.
복숭아 같은 친구?
그것도 그렇고요. 그냥, 여러모로.
고백해본 적 없어요?
아직 고백할 생각도 없어요.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괜찮아요, 아직은.
태형군이 좋아할 정도면 그 사람도 되게 예쁠 것 같은데. 그러다 다른 사람한테 가면 어떡해요.
음... 생각해본 적 없는데... 그러면 정말 그 애 붙잡고 울지 않을까요.
여기저기서 안타까움의 탄식이 쏟아져 나왔다. 절대 짝사랑이란 건 없을 것 같은 사람도 짝사랑을 하는구나. 김태형이 고백하면 다 받아줄 것 같은데. 도대체 그 김태형이 저렇게 좋아하는 사람은 누굴까. 학생들은 김태형의 님이 궁금해 미칠 것 같았다. 수많은 여자들의 고백을 거절했던 이유도 당연히 짝사랑 때문이겠지. 이쯤 되면 궁금해지는 것이다. 태형은 언제부터 그 님을 좋아한 거지?
그 사람은 태형군이 자신을 좋아하는 거 알까요?
절대 모를걸요.
같은 학교 학생이에요?
네.
학생들의 입에서 동시에 헉 소리가 나왔다. 같은 학교 학생일 것이라고는 절대 생각 못했는데. 아까보다 웅성거림이 더 심해졌다. 학교까지 밝혀진 순간 범위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지민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너 어디 아파? 옆에 있던 정우가 지민을 살짝 흔들며 물었지만 지민은 고개만 저을 뿐, 얼굴을 들지 않았다.
아마 제 얼굴은 보기 싫게 일그러져 있을 것이다. 일그러져 있기만 할까, 눈물에 얼굴이 다 젖어 있고, 코와 볼은 보기 싫게 붉어져 있고, 안 그래도 통통한 눈두덩이가 더 부어올라 있을지도 몰랐다. 지민은 지금 자신의 모든 것을 제어하기 힘들었다. 표정도, 눈물도, 감정도.
전혀 몰랐다. 김태형이 좋아하는 사람이 이 학교 학생이라니. 자기도 모르는 새에 김태형과 그 사람이 몇 번이나 마주쳤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아니 친하게 지내고 있을 수도 있다. 나도 모르는 태형의 친구라니. 전혀 낌새도 느끼지 못했는데. 태형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충격적이라, 지민은 혼란스러웠다. 김태형에 제일 잘 알고 있고 제일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오만이었다.
더 이상 물어보면 태형군도 곤란할 것 같네요, 혹시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있어요? 엠씨의 물음에 태형은 잠시 고민하는 듯 마이크만 만지작거리다 입을 열었다.
이 순간에도 너를 말하고 있는 줄은 모를 거다, 바보야. 어쩔 때는 눈치 채줬으면 싶고, 또 어쩔 때는 평생 몰랐으면 싶기도 해. 너한테 고백이라도 해볼까 싶다가도 지금 이대로가 더 좋은 것 같기도 하고. 나조차도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지, 네가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는지 잘 모르고 여전히 갈팡질팡 한다. 너에 대한 건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역시 제일 어렵기도 해. 여전히 너를 대할 때마다 조심스러워져. 옛날에는 이 마음 자체가 너무 무거워 포기하려고 했는데... 이제는 내가 많이 커서 그런지 그럭저럭 견딜만해. 나 참, 내가 사람들 다 보는데서 별 소리를 다 하네. 어쨌든, 그만큼 널 좋아해. 보상 바라고 말하는 건 아니니까 몰라도 괜찮아. 그냥 넌 누군가의 첫사랑이라는 것만 알면 돼. 너는 그 사랑 받을 만큼 좋은 사람이니까.
태형은 마지막에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마이크를 내렸다. 체육관 내에 박수소리와 함께 큰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태형은 처음부터 지민을 보며 이야기를 했지만 한 번도 그와 눈을 마주치지는 못했다. 뭐 때문에 계속 저렇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걸까. 그래도 눈 마주치면서 이야기 하고 싶었는데. 절로 씁쓸한 표정이 나왔다.
천천히 무대에서 내려온 태형은 갑자기 벌떡 일어난 지민과 눈이 마주쳤다. 체육관 내는 어두컴컴하면서도 화려한 조명 탓에 시야가 정신없음에도 불구하고, 지민의 얼굴은 너무나도 잘 보였다. 누가 봐도 운 것 같은 표정과 잔뜩 젖은 얼굴에 깜짝 놀라 빠른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가려했지만, 지민은 그대로 뒤로 빠져나갔다. 태형도 많은 인파를 제치며 지민의 뒤를 쫒았다.
사람들 틈에 있던 지민은 옆으로 빠져 체육관 뒷문으로 향하다 누군가의 손에 붙잡혀 몸이 돌아갔다. 생각지도 못한 얼굴에 흠칫 놀란 지민은 바로 고개를 숙였다. 아, 태형아...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하려 했지만 아까의 눈물 때문에 벌써 목소리가 먹먹해져 있었다. 다시금 울려 퍼지기 시작한 노래와 본격적으로 시작한 축제 때문에 체육관은 또 시끄러워졌다. 나, 나 무대 준비해야 해. 지민은 어물쩍 넘기며 태형에게 잡힌 손목을 살짝 비틀어 빼내었다. 색시야, 왜 울어. 태형은 그런 지민의 손을 다시 다급히 잡으며 물었다. 지민은 순간 울컥함에 인상을 찌푸리며 태형을 바라봤다.
그 색시 소리 좀 그만 집어치워!
......
내가 계속 적당히 넘어가니까 만만해? 내 말은 말 같지 않아?
그런 뜻 아닌 거 잘 알잖아.
몰라! 그 놈의 색시 색시 내가 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얘기 했는데도 무시하는데 내가 네 의도를 어떻게 알아. 자꾸 그딴 식으로 부르면 너랑은 끝이야.
......
지민은 아무 말 못하는 태형의 손을 뿌리치고 빠른 걸음으로 체육관을 나갔다. 바깥 빛을 보자마자 울음이 탁 터졌다. 입을 꾹 다물었지만 새어나오는 울음소리는 어쩔 수 없었다. 지민은 결국 학교 뒤편으로 뛰어갔다.
2. 짝사랑의 결말
학교 뒤편으로 넘어가자마자 벽에 기대었다. 두 손으로 자꾸 흐르는 눈물을 닦아보지만, 눈물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축제날에 쓰레기장으로 오는 사람은 없겠지. 지민은 결국 쭈그려 앉아 흐느끼며 울었다. 가슴팍을 퍽퍽 쳤다. 왜 자꾸 여기가 뻐근하게 아파오는지 모르겠다. 가슴이 너무 아파서 그래서 눈물이 나는 거다. 지민은 가슴팍을 치던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생각했다.
너무 오랫동안 제 진심에서 도망 쳤었다. 김태형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정말 큰일 날 것 같았다. 그렇게 부정하고 부정하다 겨우 인정한 사실이다. 박지민은 김태형을 좋아한다. 제 진심만은 부정 않기로 했다. 어차피 김태형은 항상 제 옆에 있었으니까, 그렇게 친구로 평생 옆에 있다면 그걸로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늘 김태형의 말을 듣고 보니 문득 불안해졌다. 여태까지는 뭐가 됐든 김태형의 인생에서 자신이 제일 먼저라는 확신이 있었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김태형은 항상 자신을 먼저 생각했다. 그런 사소한 배려들을 새삼스레 깨달았던 적이 무수히도 많았다. 그래서 굳이 고백을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도 너무 행복한데 괜히 고백해서 차이고 친구로도 못 남는 것은 더 싫었다. 어차피 태형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자신만의 생각이었다. 태형이 그 사람을 언제부터 좋아했는지, 얼마만큼 좋아하는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지금 태형의 진심을 들은 순간부터 자신이 생각했던 모든 것들은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민은 태형이가 그렇게 좋아하는 사람을 이길 자신이 없었다. 누가 들어도 태형은 그 사람을 오랫동안 짝사랑 했으며, 그 사랑이 가벼운 사랑은 아니라는 것이 너무 잘 느껴졌다.
아 쪽팔린다. 이때까지 얼마나 자만했던가. 김태형이 저를 대할 때 다른 사람과 확연히 차이가 날 정도로 세심하고 배려가 넘치는 모습들을 보면서 어쩌면 자신도 모르게 우월감을 느꼈었나보다. 자신만은 김태형에게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나보다. 그냥 소꿉친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데. 김태형은 원래 그렇게 다정한 사람이었는데. 그 호의에 그만 착각하고 만 거다.
정말 별 거 아닌 일이다. 김태형은 옛날부터 자신을 색시라고 불렀고 다정하게 대해줬었다. 모든 것은 제 마음가짐의 차이다. 할 수만 있다면 정말 태형을 만나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다. 돌아가서 다시는 그런 별명으로 자신을 부를 수 없게 하고 싶다. 더 이상 아무 의미 없는 별명에 의미부여 하고 싶지도 않고, 마음고생 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렇게 아플 바에야, 차라리 아예 만나지 않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몰랐다.
여기 있었네.
갑자기 지민의 앞에 태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민은 순간 놀라 흠칫 몸을 떨었다. 지민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지금은 태형의 얼굴이 보고 싶지 않았다. 바로 앞에서 신발이 끌리는 소리와 함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색시야. 그의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는데 기어코. 지민은 울컥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다 순간 휘청거렸다. 다리에 쥐가 난 탓이었다. 태형도 놀라서 지민을 잡아주었지만, 지민이 그의 손을 확 쳐냈다. 왜 울어. 태형의 손이 지민의 볼로 향했다. 지민이 순간적으로 몸을 뒤로 뺐다. 태형의 손이 허공에서 우뚝 멈추었다.
너 진짜 나를 호구로 보냐? 내가 색시라고 부르지 말랬잖아! 내가 그랬지, 그렇게 부르면 너랑은 끝이라고.
뭘 자꾸 끝내, 시작한 것도 없는데!
태형의 윽박에 지민은 흠칫 놀라, 조금 커진 눈으로 태형을 바라봤다. 허. 태형이 거칠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것도 시작 안했어. 난 너랑 한 게 없는데 뭘 너 혼자서 끝내. 웃기지마. 다른 애들은 몰라도 너는 나한테 그러면 안 되지.
웃긴다. 나는 뭘 그러면 안 되는데. 시작도 안했다고? 그럼 이때까지 너랑 나는 뭐였냐. 친구도 아니었어? 씨발 진짜 그럼 난 14년 동안 너한테서 놀아난 거였어? 아, 알고 보니 나는 존나 니 받쳐주는 들러리였냐? 시다바리였어? 대체 난 뭐냐고!
태형의 표정이 차갑게 식었다. 그의 표정에 지민은 살짝 놀랐지만 그를 노려보는 눈빛은 풀지 않았다. 감정을 삭이는 듯 작게 심호흡을 하던 태형은 결국 후 한숨을 뱉으며 말했다.
그런 식으로 이야기 하지마.
네가 말한게 그렇잖아.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야.
대체 네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다. 네 의도는 하나도 모르겠다고. 네가 도대체 나한테 왜 그러는지...
......
태형아. 나 정말 모르겠어...
지민의 얼굴이 작게 일그러졌다. 지민의 눈가에 눈물이 훅 차올랐다. 잔뜩 굳어있던 태형의 표정이 당황스러움으로 물들었다. 나, 갈래. 지민이 몸을 확 틀자 태형이 다급히 지민의 손목을 살짝 잡아 당겼다. 갑작스런 힘에 순간 중심을 잃은 지민이 휘청거리자 태형이 지민의 허리를 살짝 감았다. 제 허리에 태형의 손이 닿자마자 지민은 거칠게 태형의 손을 뿌리쳐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너 미쳤어? 지민의 말에 태형이 비소를 날렸다.
이거 봐, 너 이상하다고.
......
어느 순간부터 그랬어. 옛날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은근슬쩍 나 피하고 손 뿌리치고 화내고! 왜 그래? 나 정말 이해가 안돼서 그래.
이해하려고 하지 마. 애초에 우리가 해왔던 거 이해 못할 짓들이었잖아. 내가 전에 말했지. 우리가 해왔던 모든 것들이 존나 이상한 거라고.
......
다 이상해. 네가 그렇게 나만 싸고도는 것도, 그렇게 꿋꿋이 색시라고 부르는 것도, 나만 그렇게 챙기는 것도! 아니, 이게 다 나만의 착각이냐? 말해봐, 나 혼자 그렇게 생각하는 거냐고.
......
내가 너랑 몇 번이나 이런 일로 입씨름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이젠 진짜 지쳐.
태형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태형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지민은 그 표정에 담긴 의미를 알아차리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울음을 참는 표정이었다. 서운함? 실망?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아주 오랫동안 제 속에 꾹꾹 차 답답하게 만드는 그것들이 한 번에 터져 나올 것 같을 때, 울음으로 나올 것 같을 때 억지로 참는 표정이었다. 그런 얼굴을 하는 태형이 매우 힘들어보였다. 그 얼굴을 보니 도리어 지민이 울음이 나올 것 같았다. 지금 울고 싶은 건 난데 왜 네가 더 힘든 표정을 지어. 지민은 결국 참지 못하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런 표정 짓지 마. 나를 오해하게 만들지 마. 괜히 내 마음 들쑤시지 마. 친구잖아. 고작 친구일 뿐인데 왜 자꾸...
울음 때문에 목이 매여 결국 말을 끝맺지 못하고, 지민의 눈에서는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태형이 놀라 한발짝 다가가 지민의 눈물을 살짝 닦아주었다. 지민이 그의 손을 약하게 쳐냈다. 너무 가까이 다가온 태형을 밀어내려 하지만 자꾸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지민은 작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지민은 아예 그 자리에 주저앉아 고개를 숙여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태형도 따라 앉았다. 그를 안아주고 싶었지만 제 손길을 자꾸 피하는 것 같아 결국 두 손으로 무릎을 끌어안았다. 무릎에 살짝 턱을 얹고 정수리만 보이는 지민을 가만히 바라봤다. 저번부터 어렴풋이 짐작은 했다. 뭔가 어긋나기 시작했다는 건 이미 느끼고 있었다. 지민의 행동이 점점 변했다. 제 행동에 지민이 예민하게 반응하고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다. 태형은 더 이상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기식으로 지민에게 숨길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결과가 좋든 나쁘든 이제 더 이상은 이 짝사랑의 끝을 미룰 수 없었다.
지민은 손바닥으로 대충 눈물을 닦고 고개를 들어 태형을 바라봤다. 무릎에 턱을 얹은 채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태형의 시선에 또 울컥 눈물이 차올랐지만 애써 참았다. 자꾸 목이 매여 말하기가 힘들었다.
언제부터 김태형이 좋아졌을까. 왜 좋아졌을까. 태형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변한 게 없었는데. 옛날부터 쭉 자신한테 그래왔는데. 새삼스럽게 왜. 사람이 없어서 그 애한테 반하냐. 14년을 같이 붙어 다닌 친구가 어디가 좋아서 그렇게 심장을 벌렁벌렁 거리냐고. 걔가 변한 것도 아닌데 갑자기 그런 마음이 드는 건 이상한 거잖아. 색시라는 거 그냥 어렸을 때 그렇게 불려서 지금까지 온 별명일 뿐이잖아. 그거에 갑자기 왜 설레는데 병신같이. 그런 거 아니잖아. 이제 와서 네가 듣고 싶은 대로 듣지 마. 원래 그런 뜻 아닌 거 알잖아. 김태형은 그냥 친구일 뿐이라고.
지민은 자꾸 제 머릿속에 들어차는 김태형을 애써 밀어내며 스스로 마음을 다잡았다. 이건 오로지 자신만이 해야 할 것들이었다. 갑자기 변해버린 제 마음 때문에 태형에게 더 이상 상처를 줄 수는 없었다. 빨리 깨달았어야 했다. 김태형이 자신한테 했던 그 행동들이 다른 친구들보다 좀 더 따스하고 다정한 행동들이었다는 걸 일찍이 깨달았으면, 김태형은 원래 그런 애니까 하고 넘어가지 않았으면, 친구의 선을 확실히 했으면, 이렇게 김태형한테 반하는 일은 없었을까. 모든 것이 후회가 되었지만 그런 것들이 없었다면 김태형을 좋아하지 않았을 거라고도 말 못하겠다. 그것이 제일 두려웠다. 자신이 김태형을 좋아하는 것이 불가항력이었을까 봐.
지민은 자꾸 가빠오는 호흡을 간신히 정리했다. 더 이상 숨길 수 없었다. 더 이상 태형에게 거짓을 말하기 힘들었다. 점점 무거워지는 마음은 이제 지민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져버려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결과가 어떻게 되던, 이제는 짝사랑의 끝을 미룰 수 없었다.
태형아 내가 힘들어서 못하겠어. 이제. 너무 힘들어. 네 옆에 있는 게 너무 힘들다. 네가 색시라고 부를 때마다 정말 내가 그런 사람마냥 착각을 하게 돼. 네가 이렇게 할 때마다 나는 오해를 하게 된다고. 넌 원래 다정한 애잖아. 그래서 그렇잖아. 원래 친구끼리는... 친구사이에서는 이렇게 하는 거 아니잖아.
지민의 눈에서 툭 눈물이 떨어졌다. 한 번 떨어지니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태형은 손을 뻗어 엄지로 조심스럽게 뺨을 훑었다. 눈물이 태형의 엄지에 묻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태형의 눈빛이 따스하기 그지없었다. 아니면 이것 역시 이미 그에게 반해버린 저의 착각일까. 뭐가 됐던 지민은 이 따스함에서 헤어 나올 수 없을 것 같았다. 지민은 천천히 한 손을 들어 제 뺨을 살짝 감싸고 있는 태형의 손을 덮어 잡았다.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다. 미처 흐르지 못한 눈물들이 한 번에 후두둑 떨어졌다. 색시야. 그의 입에서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나직했다. 그 놈의 색시는 또 못 버린다. 습관이 되어버려서 그런 건지 일부러 그러는 건지, 이제는 모르겠다.
그래, 이런 건 원래 친구사이에서 하는 행동이 아니야. 그리고 나 원래 다정한 사람 아니야.
태형의 말에 지민이 놀라 눈이 살짝 커졌다. 아까의 눈물 때문에 눈과 코가 빨개져 있었다. 크흥. 지민이 작게 코를 들이마셨다. 지민은 입술을 감춰 물어 잘근잘근 씹었다. 지민은 가까이 다가온 태형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봤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던데, 얘를 그렇게 오랫동안 봐왔으면서 왜 아직도 얘 마음을 읽을 수 없는 건지. 아니, 왜 계속 저 눈빛의 의미를 보고 싶은 대로 해석하게 되는지. 자꾸 가슴이 먹먹해져온다. 태형이가 무슨 이유로 그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지민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좋아해.
지민이 한숨처럼 내뱉었다. 더 이상 눈물 흐를 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직 눈가에 고여 있었는지, 툭 한 방울 흘러내렸다. 태형은 말이 없었다. 어쩐지 더 울고 싶어졌다. 아까부터 자꾸 울기만 하고, 이렇게 울보는 아니었는데 김태형 때문에 마음까지 약해진 것 같다.
모르겠어. 언제부터였는지, 아니 이게 진짜 그런 마음인지도 모르겠는데, 그냥, 그냥, 좋아해. 너 때문이야. 네가 나를 오해하게 만들었어. 착각하게 만들었어. 네 그 다정함 때문에 내가, 내가, 그냥, 흐으... 태형아. 좋아해. 네가 자꾸 색시라고 부르니까... 그래서... 그러니까...
한 번 말문이 터지기 시작하니 말이 줄줄 다 터져 나왔다. 머릿속이 정리가 안돼서 그냥 마음 가는대로 말 할 뿐이었지만, 지민은 적어도 후회는 없었다. 다시 눈물이 울컥 차올라서 목소리가 자꾸 갈라졌다. 목 놓아 엉엉 울고 싶은데 그래도 자존심이 있지 태형의 앞에서 쪽팔리게 고백하고 울고 싶지는 않았다. 지민은 또 흐르려 하는 눈물을 팔로 벅벅 닦았다.
내가, 내가 너 좋아한다고, 바보야! 너는 씨발 좋아하는 사람 있으면서 나한테 자꾸 색시라고 부르고, 흐으... 자꾸 잘 해주고... 내가, 내가 남자라서... 나도 그냥 너랑 친구 하고 싶었는데... 근데... 어쩔 수 없잖아...
지민은 결국 고개를 숙였다. 흐으으... 이를 악 물어도 자꾸 울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지민은 결국 참는 걸 포기했다. 이제는 눈이 아플 지경이었다. 가슴 아프고 눈도 아프고 머리도 아픈 것 같다. 다 아프다. 누가 말하지 않아도 지금 제 꼴이 얼마나 추할지 알 것 같았다. 보상받지 못할 짝사랑을 고백하고 엉엉 우는 꼴이 썩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닐 거다.
오늘은 너 보기 싫으니까 꺼,
갑자기 제 품에 확 들어오는 태형의 몸에, 지민은 놀라서 히끅 딸꾹질까지 나왔다. 얇은 태형의 팔이 지민의 목을 감았다. 태형이 지민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었다. 말랐지만 단단한 그의 품에 지민은 두 팔로 천천히 태형의 허리를 감아 니트를 꼭 부여잡았다. 어깨에 이마를 기대었다. 달달한 섬유유연제의 향이 약하게 났다.
지민아, 내 색시야. 태형이 말하면서 느껴지는 숨결에 온 몸이 간질간질했다. 자꾸 이러면 안되는데 왜 계속 눈물이 나는 건지. 태형에게서 거의 처음 듣는 제 이름이었다. 그렇게 바랐는데 이제 와서 불러주는 건 반칙 아닌가. 제 이름이 원래 이렇게 달콤한 이름이었나. 이렇게 눈물 나는 이름이었나. 이렇게 좋아도 되는 건가. 내가 이제는 미쳐서 그렇게 들리는 건가. 태형의 니트를 잡은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지민아.
흐으...
좋아해.
......
좋아한다고, 바보야.
결국 눈물을 터뜨렸다. 태형의 품에서 엉엉 울었다. 제 목을 감았던 태형의 팔이 살짝 내려와 등을 천천히 토닥여주기 시작했다. 그 손길도 영락없이 태형이 것이라, 너무도 다정해서 자꾸 눈물이 나왔다. 태형이 한 손으로 제 뒤통수를 천천히 쓰다듬어주었다.
너 짝사랑 한다며.
응.
오랫동안 좋아했다며.
응.
...그거... 나야?
응.
조금은 낮은 태형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듯 들렸다. 지민은 멍한 표정으로 태형을 바라보다 문득 든 생각에 얼굴에 열이 확 올라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렇게 울었던 제 얼굴은 지금쯤 퉁퉁 부어 있을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런 얼굴을 대놓고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다. 으흐흥. 태형이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얼굴 보여줘. 태형이 두 손으로 지민의 손목을 살짝 감싸 잡았다. 지민은 제 손에 힘을 주었다. 자꾸 제 손을 치우려 하는 태형 때문에 곤욕이었다.
안돼! 지금 나 존나 못생겼단 말이야.
나한테 네가 못생겼던 적 없어.
무,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지금!
지민아.
그 입에서 제 이름이 나오는 건 아직 면역이 안되었다. 색시라는 그 별명 때문에 정신없이 태형에게 빠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름은 자신을 흐물흐물 녹게 만들었다. 태형의 목소리로 제 이름을 듣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더 듣기 좋았다.
지민의 손에서 힘이 빠지는 순간, 태형이 살짝 지민의 손을 치웠다. 아까 많이 울어 살짝 부은 눈과, 조금 벌게진 코와 볼이 보였다. 태형은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픽 웃었다. 언제나 그랬다. 지민을 볼 때마다 이렇게 웃음이 나곤 했다.
지민아.
...왜 자꾸 불러.
색시야.
......
좋아해, 진심으로.
지민은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태형을 확 안았다. 태형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 작은 웃음소리마저 심장 떨려 미칠 것 같았다. 먹먹했던 감정은 어느샌가 사라지고 없었다. 태형의 품은 언제나처럼 따스했고, 제 등을 토닥여주는 손길은 언제나처럼 다정했다.
---
<그냥 주저리. 안읽으셔도 됩니다!>
처음으로 나름 중장편을 끝냈네요.
중간에 긴 공백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함께 해주신 분들,
그리고 최근까지도 놀러와주신 분들
전부 감사합니다!
제 만족에서 쓰기 시작한 글이지만
여러분들 덕분에 이렇게
끝까지 쓸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많이 부족한 글인데도
좋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많은 응원 감사합니다.
단순히 청게 고딩이 보고 싶어서
쓴 글인데 생각보다 많은 사랑을
받아서 기쁩니다.
아마 완결을 읽고 뭐야 이게 끝이야?
하실 분들이 있을거라 생각됩니다.
오랜 삽질 끝에 뷔민이들 연애 하는 모습도
봐야 하는데 그쵸ㅠㅠㅠㅠ
사실 중간에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만
그래도 원래 생각했던대로 마무리를 짓는게
맞는 것 같아 이런 완결을 내게 되었습니다.
애초에 둘이 연애 하는 내용은 본편에 실을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뷔민이들 연애하는 내용은 외전으로 쓸
생각이었습니다. 앞으로 외전이 한 두개 정도
나올 것 같네요. 남고생 뷔민이들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답니다ㅎㅎ
그럼 외전으로 찾아뵙겠습니다.
남고생 뷔민이들 찾아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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