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창고

뷔민 남고생의 일상 12

길/남고생의 일상 (完)



1. 짝사랑

 

오랜 기간 한 사람을 좋아하면서 느낀 건,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이 뻔뻔해진다는 것이었다. 태형은 자신이 이 나이 먹고 지민이한테 색시라고 부르는 것도, 남들이 보면 오해할 수 있을 정도의 스킨십을 하는 것도, 단순히 오랜 친구기 때문에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제 식대로 마음을 드러내는 행위였고, 동시에 제 속을 숨기는 방법이었다. 사랑을 숨긴다는 것은 그 어떤 감정보다 힘든 것이었다. 조금이라도 어설프면 들키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래서 뻔뻔해야 한다. 태형은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올 감정을 애써 숨기는 것보다, 그것을 마구 드러내놓고 그 위에 우정을 덮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그것은 태형의 생각보다 훨씬 더 오래갔다.

 

처음에 태형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천천히 움을 틔우는 감정의 싹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아니, 그 싹은 너무나도 작고 연약했기 때문에 태형 본인조차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 맞았다. 태형이 깨달았을 때는 이미 꽃이 만개하여 그 향이 온 몸에 베일 정도였다. 태형이 사랑을 하고 있다는 것이 겉으로 지나치게 드러났었다. 그 사실을 알고 나니 문득 두려움이 밀려왔다. 이제야 깨달은 자신의 마음은 자신이 생각해도 당황스러운데, 지민이가 제 마음을 알게 되면 얼마나 당황스러울까. 절대로 이 마음을 들키면 안 된다. 그런 생각에 무작정 숨기기만 했다. 많은 방황을 하기도 했다. 최대한 지민을 피해 다녔다. 너무 오래 붙어 다녀서 그런 거라고, 조금이라도 떨어져 있다면 괜찮아지지 않을까. 지민이 자신에게 정 떨어져서 좀 멀어지면 괜찮아질까. 태형은 점점 어긋나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하면 자다가도 이불을 팡팡 찰 과거지만 그 때 당시의 태형은 진지했다. 어쨌든 품어서는 안될 마음이라고 생각했고 어떻게든 그걸 털어내야 했다. 제 마음이 고작 지민이 한 명 때문에 오락가락 하고, 하루에도 열두 번씩 기분이 하늘로 솟았다가 땅으로 곤두박질 쳐졌다가 아주 난리 났다.  태형은 짝사랑의 부작용이 어떤 것인지 뼈저리게 느끼기 시작했다. 이미 그를 좋아하는 마음이 제 몸에 차고도 넘쳐서 제 자신도 어쩔 줄 모르는 상태였다. 이 상태에서 지민에게 말 했다가 자신도 모르게 흘린 마음이 지민에게 닿으면 안될 일이었다.

 

이 정도면 병 아니야? 사람 좋아하는 게 뭐라고 이렇게 줄 잡힌 연 마냥 끌려 다니고 오락가락해? 다들 이런 마음을 견디면서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는 거야? 만약에 누군가를 좋아할 때마다 이런 느낌이 든다면, 태형은 두 번은 못할 것 같았다. 이건 고문 수준이었다. 누군가를 짝사랑 한다는 것이, 태형에게는 고문과도 같았다.

 

태형의 방황은 지민의 울음으로 끝이 났다. 마음 접는 것에 집중한 나머지 지민이 받을 상처를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벌게진 눈을 애써 치켜뜨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지민을 본 순간, 태형은 아차 했다. 이건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지민을 울릴 생각은 아니었다. 태형은 그 이후로 자신의 모든 일탈을 그만두었다. 방법이 너무나도 잘못되었다는 것을 그 때 알았다. 그리고 이미 커질 대로 커져버린 제 마음은, 더 이상 제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흔하디흔한 사랑 노래가 이렇게 다양하게, 많이 나오는 대는 다 이유가 있었다. 다 비슷비슷 하다고 느꼈던 노래들이 이제야 이해되기 시작했다. 지금 겪고 있는 감정 한순간 한순간이 다 낯설었다. 사랑은 그만큼 다양했고, 비슷할지언정 완전히 같을 수는 없었다. 그저 좋아한다, 사랑한다 라는 단어 한마디로 정의 내릴 만큼 단순하지도 않았다. 애초에 추상적이기만 한 감정을 그런 단어들로 표현하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사랑 노래가 이렇게 많이 나오는 것이라고, 태형은 생각했다.

 

마음이 너무 간질간질 했다. 누군가 제 마음 속에서 휘휘 간지러운 바람을 부는 것 같았다. , 누군가가 아니라 지민이겠지. 가끔 이 마음을 주체할 수 없을 때면, 너무너무 커져버려서 더 이상 자신이 담고 있기 버거울 때면 창문을 열었다. 방에 있는 창을 열면 앞에 보이는 지민의 창을 바라보면서 작게 속삭이고는 했다. 내일도 오늘처럼 만이었으면 좋겠다. 지민아. 사랑아. 좋아해.

 

모두가 자고 있는 밤, 동네가 고요에 잠길 때면 살짝 창문을 열어 턱을 괸 채 하염없이 바라봤다. 가끔 달빛이 은은하게 내려오고 별이 총총 박힌 날일 때면, 이상하게 눈물이 나기도 했다. 밤하늘이 예쁘네, 지민아. 달빛도 별빛도 이상하게 따뜻한 날이야. 악몽은 내가 다 가져갈게. 그러니까 지민아, 잘 자. 지민아, 사랑해.

 

좋아하는 마음을 접는 것은 장렬히 실패했다. 그렇다고 고백할 용기도 없었다. 태형은 매일을 고민했다. 지민의 앞에서 웃어준다고 해도 마음은 진정하기 힘들었다. 원래도 그의 이름을 잘 부르지 않았지만, 제 마음을 깨달은 이후로 더더욱 그의 이름을 부르기 힘들었다. 어째서 박지민은 박지민일까. 왜 이름도 박지민일까. 왜 이름마저 지민이 같이 귀엽고 설레는 거야. 더 이상 태형에게 박지민이라는 세 자는 그저 이름의 의미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누구보다도 무거운 이름이었다. 그 이름을 제 입으로 직접 내는 순간, 바로 이어서 좋아한다는 말이 튀어나올까봐 두려웠다. 지민아 좋아해. 지민아 사랑해. 속으로만 수천수만 번 외쳤던 말이라서. 지민이를 부르자마자 바로 연결되어 나올까봐, 그게 무서웠다. 그래서 더더욱 그의 애칭을 놓을 수 없었다. 태형에게 색시는 간절한 염원이기도 했다. 적당히 그에게 애정을 드러내면서, 진짜 속마음을 한 겹 가려주는, 아슬아슬 하면서도 단단한 보호막 같은 거였다. 그걸 모르는 지민은 제 이름을 부르라고 짜증내지만 태형에게는 최후의 수단이었다. 태형에게서 자신의 진심을 덮어주는 단 하나의 보호막마저 사라진다면,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없이 덜컥 진심을 내어보일게 뻔했다. 지민을 오래오래 보고 싶다면 그런 일은 일어나서는 안 되었다.

 

 

 

 

 

지민과 둘이서 놀러가는 것. 언제나 그래왔기 때문에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하지만 태형은 항상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지나친 설렘에 혹시나 실수를 할까봐, 제 조그만 실수 하나에 지민을 잃을까봐. 그냥 가볍게 놀러갔다 오는 거라 해도, 마음까지 가벼울 수는 없었다.

 

나란히 걸으면 아슬아슬하게 스치는 손등이 신경 쓰이고, 웃을 때마다 기대오는 작은 머리가 신경 쓰이고, 말할 때 가끔 톡 튀어나오는 부리 같은 입술이 신경 쓰였다.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올려다 볼 때나, 그 눈이 사르르 접히면서 웃을 때는 숨이 턱턱 막혔다. 그에게서 사랑이라는 감정을 깨달았을 때는 중학교 때지만, 그런 감정이 생긴 것은 그보다 훨씬 더 오래전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 한순간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할 정도일 수 없다고, 태형은 생각했다.

 

지금도 살짝 살짝 부딪치는 손등에 온 신경이 쏠렸다. 지민은 재잘재잘 신나게 이야기 했지만 태형의 귓속까지 들어오지 못했다.

 

 

듣고 있어?

 

 

갑자기 제 앞으로 훅 들어오는 지민의 얼굴에, 태형이 흠칫 놀라 몸을 뒤로 뺐다. , 깜짝이야... 태형의 말에 지민의 표정이 뚱해졌다. 거의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미세한 변화였지만 태형은 다 알아볼 수 있었다. 무슨 일 있어? 지민의 물음에 태형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없는데, ?

 

 

아니이... 뭔가 표정이 심각해 보여서.

 

내가? 표정이 심각해 보여?

 

막 미간 찌푸리고 있고. 무슨 고민 있어 보이길래.

 

 

지민의 말에 태형이 아차 싶었다. 다른데 온 신경을 쓰고 있었더니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쓰고 있었나보다. 미안. 태형이 작게 사과를 하며 씨익 웃어보였다. 고민 있어? 태형은 다시 묻는 지민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너무 힘주지는 않고, 머리카락이 손바닥에 닿을 정도로만, 살살.

 

오늘 뭐 하고 놀까 생각하고 있었어. 태형의 말에 지민의 표정이 환하게 펴지며 또 재잘재잘 거리기 시작했다. 일단 영화를 먼저 보고, 점심 먹고 나서 노래방을 갈까, 쇼핑을 할까? 자신이 생각했던 계획을 이야기 하는 지민을 가만히 보던 태형은 피식 웃으며, 계속 슬쩍슬쩍 스치던 그의 손을 확 잡았다. 지민은 갑자기 훅 다가온 손의 온기에, 살짝 놀라며 태형을 바라봤다. 태형이 능글맞은 웃음으로 맞잡은 손을 들어서 살짝 흔들어 보였다. 지민의 웃음이 터졌다. 손을 앞뒤로 살살 흔들며 길을 걸었다. 맞잡은 두 손의 온기는 적당히 따스했고, 조곤조곤 말하는 지민의 목소리는 듣기 좋았다. 태형은 칭칭 두른 목도리에 살풋 얼굴을 묻었다. 목도리에 가려진 입은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첫사랑에다가 짝사랑이다. 모든 것이 서툴 수밖에 없었다. 가끔은 정말 친구처럼 아무렇지 않다가도 문득 아, 나 얘 좋아하고 있었지 깨달은 날이면 수줍어졌다. 얼굴만 봐도 좋고 설레고 부끄러울 때가 있었다. 아무렇지 않게 하던 스킨십도 유난히 의식하게 되고 쑥스러울 때가 있었다. 지금 그의 작은 손을 꼭 잡고 있는 이 순간도 평소답지 않게 떨렸다. 너무 떨려서 이 두근거림이 전해지는 거 아닌가 걱정이 될 정도로.

 

 

나 너 노래 부르는 거 페북에 올려도 돼?

 

 

지민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태형이 고개를 천천히 돌려 지민을 바라봤다. 차가운 공기에 닿은 볼이 불그스름하게 홍조가 올라왔다. 태형은 주머니 속에 넣고 있던 다른 손을 들어 지민의 볼을 살짝 감쌌다. 작은 지민의 볼이 커다란 태형의 손에 다 덮였다. 너 손 진짜 따뜻하다. 지민이 웃으며 말했다. 볼이 밀려 올라가는 것이 손으로 느껴졌다.

 

 

나 노래 부르는 거?

 

. 너 노래 부르는 거 내가 좋아하잖아. 목소리도 좋고 노래도 잘 부르고. 다른 사람들한테 자랑하고 싶어서.

 

색시 들으라고 노래 부르는 거지, 다른 사람들한테 부를 생각 없어.

 

그냥 노래방에서 노래 부르는 거 올린다는 거지. 오늘 노래방 가자. 다른 사람들도 엄청 좋아할걸.

 

난 다른 사람들이 내 노래 듣는 거 싫어, 색시야.

 

부끄러워?

 

 

장난스레 묻는 지민을 가만히 바라봤다.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결국 꾹 삼켰다. , 부끄러우니까 제발 올리지 마. 씨익 웃으며 말했다. 흐음... 아쉬운데... 끝을 늘리는 지민의 목소리에 미련이 많이 남아보이지만 그가 올리지 않을 것이란 걸 잘 알고 있다. 지민은 그래도 남이 싫다는 짓은 절대 하지 않으니까.

 

내 노래는 항상 너를 위해서만 부르는 거라고 말 하지 못했다. 이 말에 자신도 모르게 마음을 담을까봐, 그래서 지민이 알아차릴까봐.

 

 

 

 

 

 

 

 

 

 

너 박지민 볼 때 진짜 징그러운 거 아냐. 정우의 말에 폰만 만지작거리고 있던 태형이 정우를 힐끗 바라봤다. . 무뚝뚝하기 그지없는 태형의 대답에 정우는 허, 하고 헛웃음이 나왔다. 존나 온도차이 보소. 정우의 말에 태형도 웃긴지 피식 웃었다. 야 너랑 색시랑 같냐. 태형의 말을 들은 정우가 쯧 혀를 찼다.

 

 

그냥 고백해 새끼야. 누가 짝사랑을 몇 년 씩이나 끌고 있어.

 

......

 

너도 참 징 하다 진짜. 어떻게 몇 년 동안 한 사람만 좋아할 수 있냐.

 

몰라. 시비 틀 거면 꺼져.

 

네가 몇 년 째 짝사랑 하고 있다는 거 알면 여자애들이 울고불고 난리날 거다.

 

.

 

전교에 여자가 반인데 이 중에 너 좋아하는 애 한 명 없겠냐. 그렇게 고백도 많이 받는데.

 

......

 

너 인기 많잖아. 또 페북스타여서.

 

아 씨발 진짜 페북스타 얘기 하지 말랬지.

 

 

치를 떨며 정색하는 태형이 웃겨서 정우가 낄낄댔다. 아직도 박지민 페북 알람 터진다, 터져. 태형은 정우의 말에 만지작거리던 폰을 탁 내려놓고 그를 바라봤다.

 

 

네가 색시 페북 알람은 어떻게 아는데?

 

병신아. 박지민 페북만 들어가도 좋아요에 댓글이 몇갠데 모르는게 더 이상해.

 

원래 그 정도면 인기 많은 거야?

 

네가 괜히 페북스타겠냐.

 

씨발아, 하지! 말라고! 하지! !

 

 

태형이 결국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정우의 팔뚝을 퍽퍽 내리쳤다. 정우는 아파 하면서도 태형 놀리는 것에 맛 들려 낄낄 거렸다. 아 아프다고! 정우가 태형을 밀치고 나서야 태형은 때리는 것을 그만두고 씩씩대며 정우를 내려 봤다. 저 표정도 웃겨 정우는 자꾸 웃음이 실실 새어나왔다. 김태형 놀리는 것만큼 재밌는 것도 없다.

 

 

박지민 페북에 들어오는 사람의 70퍼는 너 때문이고 30퍼가 박지민 때문일걸?

 

? 30퍼나? 그러니까 내가 춤추는 거 올리지 말라니까!

 

 

태형은 씩씩거리며 페북에 들어갔다. 어차피 지민이 밖에 친추되어 있지 않은 태형의 페북은, 지민의 이야기밖에 없었다. 지민이가 공유한 것, 댓글 단 것, 직접 올린 것들로 넘쳐나는 글을 빠르게 스캔한 태형은 짜증나는 듯 머리까지 헝클였다. 이거 봐봐, 내가 싫다고 해도 기어코 올린다니까! 폰을 얼굴 가까이 들이밀며 보여주는 태형의 행동에 정우가 화면을 바라봤다. 3일 전에 올린 댄스 커버 영상이었다.

 

 

. 나 이거 봤어. 이거 진짜 대박이던데. 사람들 난리남.

 

싫다고 진짜!

 

아 왜 나한테 성질이야!

 

얘는 왜 자꾸 이런 걸 올리는 거야.

 

박지민이 꼭 네 말을 들어야 하냐. 네가 뭔데.

 

?

 

그렇잖아. 네가 이런 거 올리지 마라. 춤추지 마라 하는 거, 친구가 그러는 거 어이없잖아.

 

 

태형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멍해졌다가 책상에 철푸덕 엎드렸다. 그렇지... 내가 색시한테 이래라 저래라 할 권리는 없지... 금방 또 시무룩한 목소리로 웅얼 거리는게 웃기긴 하지만 어쩐지 짠해져, 정우는 태형의 어깨를 토닥였다.

 

 

박지민이 그렇게도 좋냐.

 

.

 

왜 좋은데.

 

몰라 새끼야. 너 같은 놈한테 아무리 설명해줘도 모를거다.

 

야 나도 연애 해봤어!

 

그래. 연애는 해봤겠지.

 

그 얼굴 달고 연애 한 번도 안 해본 너보다는 낫지.

 

아쉽지도 않아.

 

너 좋다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데 그 사람들도 참 불쌍하다.

 

그 사람들이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이 감정만큼 나를 좋아하면 인정한다.

 

뭐래.

 

그 사람도 존나 불쌍하다. 어쩌다가 나를 그렇게 좋아해서. 그런 사람이 고백하면 거절은 또 어떻게 하지. 너무 마음 아플 것 같은데.

 

누가 너한테 고백했어?

 

 

갑자기 들리는 지민의 목소리에, 태형과 정우가 파드득 놀라며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민이 한 입 베어 먹은 빵을 든 채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리로 와봐. 태형의 손짓에 지민이 가까이 다가갔다. 뭘 이렇게 묻히고 먹냐. 태형이 조심스레 입가를 털어내자, 지민도 엇 하며 벅벅 입가를 문질렀다.

 

 

누가 너한테 고백했냐니까?

 

아니. , 신경 쓰여

 

너 고백 받는 거 한두 번도 아니고.

 

 

지민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며 교실 앞 쪽으로 갔다. 뭐야, 질투 유발 작전이라도 쓰려고 했냐. 정우의 말에 태형이 피식 웃었다. 자조적인 웃음이었다. 나는 신경도 안 쓰는 애 건드려서 어쩌려고.

 

 

 

 

 

 

 

 

 

 

2. 질투

 

제 인생에 질투라는 단어는 평생 없을 줄 알았다고작 18년 밖에 안 살았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 사람을 좋아하는 자신이 누군가를 질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근데 내가 살다 살다 김태형 때문에 누군가를 질투할 줄이야.

 

지민은 저 멀리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두 남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래봤자 그들은 제 시선이 느껴지지도 않겠지만 그렇게라도 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아니 김태형 저 자식은 왜 저렇게 태어나서 주위에 좋아한다는 사람이 넘쳐 나냐고. 팔짱을 끼고 잔뜩 썩은 얼굴로 그들을 노려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지만 사실 지민도 할 말은 없었다. 어쩌면 자신도 태형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가 저 잘생긴 얼굴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기도 하고. 저 잘생긴 얼굴을 들이밀며 다정한 말만 하고 다정한 행동만 하는데 솔직히 누가 안 빠지고 배기겠냐고. 얼굴만 보고도 좋다고 졸졸 따라다니는 사람만 수십 명인데.

 

아니 근데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길래 이렇게 오래 걸리는데. 지민은 이제 질투를 넘어서 궁금해지기까지 했다. 아니 그냥 고백하면 거절하고 오면 되는 거 아니야? 헐 아 씨발 혹시 마음에 드는 건가... 아 고백 하는 게 아니라 정말 뭐 심도 깊은 이야기를 나누는 건가. 교복을 입은 걸 보면 사이비는 아닌 것 같은데. 아무리 사이비 수법이 다양해졌다 해도 교복 위장은 좀 아니잖아. 별의별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김태형이 뒤돌아 있어서 얼굴은 안보이지만 여자는 아주 잘 보였다. 여자의 얼굴만 보면 그들의 대화가 아주 화기애애했다. 그래서 더 짜증이 났다. 원래 김태형한테 말을 건 여자애들은 대부분 얼굴이 썩어 들어가거나 울상이던데. 아니 뭐 그렇다고 저 여자애도 그래야 한다는 건 아니고. 그냥 되게 분위기 좋아 보인다고. 지금 보니 여자가 좀 예쁘긴 하다. 저런 사람이 말 걸면 나 같아도 이야기 할 것 같아... 어쩐지 우울해졌다.

 

잠시 후, 태형은 여자와 헤어지고 지민에게 다가왔다. 기다림에 지쳐 쭈그려 앉아있던 지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태형의 말에 지민은 자연스레 태형의 옆에 붙었다.

 

추위가 다가올수록 해가 짧아졌다. 언제나 하교를 하는 시간은 같은데 확실히 여름에 비해 많이 어두워졌다. 하늘은 벌써 노을이 다 지고 어스름한 푸른빛만 남았다. 지민은 아까부터 물어보고 싶은 것투성이라 입이 근질근질했다. 자신을 힐끗힐끗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는지 태형이 고개를 돌려 지민을 바라봤다. ? 태형의 물음에 지민은 입만 달싹이다 결국 고개를 저었다.

 

옛날 같았으면 그냥 그 사람이랑 무슨 이야기 했냐고 물어봤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도저히 그러지를 못하겠다. 어떤 의도를 가지고 묻는 건지 자신이 뻔히 아는데 아무것도 아닌 척 물어보는 게 너무 양심에 찔렸다. 원래 짝사랑은 이렇게 다 눈치 보는 건가. 한숨이 나왔다.

 

 

내일 봐.

 

태형아. 아까 그 사람이랑 무슨 얘기 했어?

 

 

결국 집 앞에서 헤어지려고 할 때 물어봤다. 양심에 찔리고 자시고 궁금해서 못참겠다. 태형은 몸을 돌려 지민을 바라봤다.

 

 

무슨?

 

아까. 하교할 때 어떤 여자랑 얘기 했잖아.

 

아 별 거 아니야.

 

뭔데.

 

아니 그냥... 나한테 오는 이유가 다 거기서 거기지.

 

 

괜히 물어봤다. 지민은 애써 웃어 보이며 뒤로 돌았다. 그래, 내일 보자. 얼굴도 안 보고 집으로 헐레벌떡 들어왔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물어 본거지. 이렇게 금방 후회할거면서 왜 물어봤냐고... 지민은 지금 당장이라도 5분 전으로 시간을 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후회의 감정이 지나가니 부러움이 밀려왔다. 저렇게 당당하게 고백을 할 수 있는 게 너무 부러웠다. 나도 김태형을 친구로 만나지 않았다면 저렇게 바로 들이댈 수 있었을까. 마음만 먹으면 고백을 하고 거절하면 그대로 안 볼 사이로 남을 수 있을 텐데. 나도 누구보다 김태형을 좋아하는데. 친구 이상으로는 갈 수 없으니까이미 친구로 정의내린 사이니까, 그의 옆에 있어도 씁쓸했다.

 

기분이 울적해졌다. 김태형이 고백 받는 거 한두 번도 아니고 이제와 이러는 것도 웃겼지만 그랬다. 진짜 걔 하나 때문에 마음이 이렇게 치솟았다 꺼졌다 할 수도 있구나. 놀랍기까지 했다.

 

심란했다. 이제 곧 고3이고 공부도 지금보다 더 열심히 해야 하는데, 심란해서 펜을 잡지도 못하겠다. 지민은 침대에 몸을 던지고 뒹굴뒹굴 거리다 몸을 대자로 폈다. 고개를 살짝 돌리니 한 벽 전체에 쳐진 커튼이 보였다. 저 커튼 너머에는 창문이 있었다. 태형과 제 방에서 서로가 보이는, 집과 집 사이가 가장 가까운 창문이었다. 지민은 상체를 일으켜 앉아 커튼을 젖혔다. 마음이 너무 답답해서 어디에라도 털어놓고 싶은 심정이었다. 허공에라도 털어놓으면 마음이 좀 편안해질까. 지민은 창문을 열었다.

 

 

우와아악!!!!

 

와아악!!!! 아 진짜 깜짝 놀랐네!!!

 

 

지민은 맞은편에 보이는 태형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라 뒤로 넘어갔다. 창틀에 기대어 턱을 괴고 있던 태형과 딱 눈이 마주친 탓이었다. 괜히 민망해진 지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빽 소리를 질렀다. 너너너너 뭐야, 왜 그러고 있어! 지민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나 제 마음도 들켰을까 괜히 민망해졌다. 정말 도둑이 제 발 저린 꼴이 아닐 수 없었다. 태형도 마찬가지였다. 이때까지 한 번도 지민의 창문이 열린 적 없었는데 갑자기 열리며 보고 싶다 생각했던 얼굴이 떡하니 나오니 깜짝 놀랐다. 순간적으로 이때까지 이렇게 창문으로 지민의 창을 봐온 것을 들켰나 생각하기까지 했다.

 

지민은 자신이 괜히 오버해서 놀란 것 같아 민망해져서 헛기침만 흠흠 했다. 근데 너 왜 창문 열어놓고 그러고 있어? 지민의 물음에 태형이 당황해 동공까지 흔들렸다.

 

 

? ... , 별 보려고. 너는?

 

? .. 어어... , 오늘 달이 예쁘다 그래가지고.

 

 

둘은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감추며 하늘을 바라봤다. 구름이 잔뜩 끼어 달과 별이 보이지 않았다. 둘 사이에 잠시 적막이 돌았다. 지민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태형이가 너무너무 보고 싶어서 창문을 열었는데 진짜 태형이가 나왔네. 절대 그럴 리는 없겠지만... 태형이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으면 좋겠다.

 

나 사실 너한테 할 말이 있어서 창문 연거야태형 지민이 턱을 괸 채 마주보고 있다가 지민이 먼저 입을 열었다. ...뭔데? 뜸을 들이다 묻는 태형에, 지민은 입을 달싹이며 머뭇거리다 결국 입을 열었다.

 

 

태형이는 잘생겨가지고 너 좋아하는 사람 많잖아.

 

그런가.

 

그래. 내 페북이 인기 많은 것도 다 네 사진 보려고 오는 거고너 지나가면 사람들 다 쳐다보고 번호 물어보고. 오늘도 그랬잖아.

 

페북은 사람들이 전부 색시 춤 보러 들어오던데.

 

 어쨌든!

 

 

살짝 짜증스레 말을 뱉는 지민도 귀여워 태형은 큭 웃었다. 그래그래, 어쨌든마치 어린 아이를 달래는 듯한 태형의 말투가 마음에 안 들었지만 어쨌든 그게 중요한게 아니니까. 지민은 다시 말을 이었다.

 

 

만약... 만약 어떤 사람이 네 이상형이고 사귀자고 하면 어떡할 거야?

 

 

지민의 물음은 상상도 못한 것이라 태형은 살짝 당황했다. 태형과 지민은 서로 한 번도 이런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없었다기본적으로 지민은 이성에 대한 관심이 딱히 없었다. 누군가를 좋아한다거나사귄다는 것은 지민과 별개의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태형의 표정이 저절로 날카로워졌다.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지민도 그런 쪽에 관심이 생겼다는 것 아닌가. 태형의 입장에서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이었다. 갑자기 그건 왜. 말도 날카롭게 나가, 태형은 본인도 흠칫 놀랐다. 다행히 지민은 느끼지 못했는지 아무렇지 않아보였다.

 

 

... ... 물론 너를 좋아하고 너도 그 사람이 좋으면 사귈 수도 있는데...

 

......

 

네가 다른 사람이랑 사귀면... ...

 

내가 다른 사람이랑 사귀면 뭐.

 

내가 좀 외로울 것 같아.

 

 

많이 슬플 것 같아슬퍼서 집에서 하루종일 울 것 같아. 너를 못 볼 것 같아. 너를 보면 사귀고 있는 그 사람과 어떻게 다닐지 상상이 돼서, 너랑 더 이상 이렇게 같이 있지 못할 것 같아. 지민은 다다다 뱉고 싶은 말을 꾹꾹 눌러 참았다. 태형이 지그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 눈이 어쩐지  속을 헤집는 느낌에 살짝 시선을 피했다. 저 눈을 보면 자신도 모르게 진심을 말할 것 같았다갑자기 그런 말을 왜 해? 태형이 물었다지민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냥 말 하지 말걸이렇게 계속 꼬리를 물다보면 제 속마음 들키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질투가 나서 그렇다는 말을 어떻게 해. 지민은 부러 입을 꾹 다물었다. 태형은 입을 열지 않는 지민에 오기가 생겼는지 집요하게 물어댔다.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하는데? 색시 원래 그런 거 관심 없었잖아.

 

......

 

말해봐. 내가 뭐 색시 외롭게 한 적 있어? 아니면 외롭다고 느낀 적 있어?

 

그건 절대 아니야.

 

내가 누구랑 썸 타거나 사귄 적도 없는데 갑자기 그런 말을 왜 해.

 

......

 

색시가 자꾸 그런 말 하면 속상하다. 나는... ...

 

 

태형이 결국 입을 다물었다. 지민은 갑자기 가라앉은 분위기에 힐끔힐끔 태형만 쳐다봤다. 그냥 질투 나서 한번 틱틱 거려본 건데, 생각보다 태형의 반응이 너무 진지해서 당황스러웠다. 그냥 별 뜻 없이 한 말이니까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 지민의 말에 태형은 초점 없이 허공만 보던 눈을 돌려 지민을 바라봤다.

 

 

자꾸 예쁜 사람들이 와서 번호 물어보고 대시하고 그러니까... 그 중에 네 취향 한 명 없겠나 싶고. 어쩌면 사귈 수도 있는데 만약에 네가 누구랑 사귀면 그냥... 그냥 외로울 것 같단 거야. 딱히 별 뜻은 없었어.

 

관심 없어 난. 내 취향인 사람이 나한테 대시한 적 없어.

 

... 좋아하는 사람 있어?

 

 

지민은 자신이 물어봐놓고 자신이 놀라 입을 턱 막았다. 태형은 또 생각지도 못한 물음에 놀란 표정으로 지민을 멍하니 바라봤다. 지민은 애써 침착하게 표정관리 했다. 아니, 이게 어때서. 친구 사이에 물어볼 수도 있는 거 아닌가.

 

태형은 지민을 가만히 쳐다봤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뭐지. 갑자기 사귀니 뭐니 관심 없던 이야기를 하질 않나, 좋아하는 사람이 있냐고 물어보질 않나. 아무리 봐도 여태 봐왔던 지민과는 달랐다. 점점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절대 아니었으면 하는 가정이 머리에 자꾸 맴돌았다. 박지민은 김태형의 마음을 알아차렸을 수 있다는 가정.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사실대로 말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거짓말을 해야 하는 건지, 아니 그 전에 지민은 뭘 알고 저런 말을 하는 건지 아니면 정망 순수하게 궁금해서 묻는 건지 조차 알 수 없어 답답했다. 태형은 긴장감에 마른침 한 번 삼키고 입을 열었다.

 

 

만약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색시한테 말해주길 원해?

 

 

태형의 역질문에 지민은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혼란스러움에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왜 굳이 저렇게 말하는 거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가.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태형의 시선이 올곧게 자신을 향해 있었다. 차마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기 힘들었다. 지민 역시 태형의 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니.

 

 

그의 입에서 다른 사람 이름이 나오는 것을 듣기 싫었다. 지민은 아직 겁이 많은 첫사랑이고, 짝사랑이었다.




















---


정말 완결이 얼마 안남아서

빨리 들고왔습니다!








' > 남고생의 일상 (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뷔민 남고생의 일상 14  (22) 2018.04.08
뷔민 남고생의 일상 13  (23) 2018.03.21
뷔민 남고생의 일상 11  (8) 2017.11.11
뷔민 남고생의 일상 10  (10) 2017.07.14
뷔민 남고생의 일상 9-2  (6) 2017.06.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