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뷔민] 우리의 계절 下
짧날씨는 점점 더워졌다. 직사광선으로 내리쬐는 햇살은 뜨겁다 못해 따가웠다. 매미는 어느 순간부터 울어대기 시작했다. 지민은 눈부심에 눈을 찌푸리면서까지 바깥을 보다가 교실을 슥 둘러봤다. 교실은 에어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하나같이 책상에 널브러져 있었다. 하 씨, 드브라. 앞에 앉아있던 친구가 셔츠를 펄럭거리며 짜증을 부렸다. 지민은 제 바로 옆에 앉아있는 태형을 봤다. 태형 역시 축 처져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에어컨이 필요가 없다, 필요가 없어. 이렇게 더운데 26도가 말이가!
니는 복도 쪽에 있으면서 그런 말 하지마라! 창문 쪽은 햇빛까지 다 들어와가지고 드버죽겠다!
햇빛이 학교 안까지 후끈 후끈 달궈주는 탓에, 적정온도를 유지하는 에어컨은 사실상 무용지물이었다. 덕분에 아이들은 짜증지수가 절정에 달하고 있었다. 학교 끝나고 물놀이 하러 갈 사람! 한 친구가 벌떡 일어나며 하는 말에 여기저기서 너도나도 저요 저요 하면서 일어났다.
김태형, 니는 안 가나.
태형을 바라보면서 하는 말에, 태형이 비척비척 상체를 일으켰다. 멍한 표정으로 있던 태형은 지민에게 고개를 돌렸다. 갑자기 마주친 시선에 지민은 흠칫 놀랐다. 니는. 태형의 말이 무슨 뜻이지 잠시 생각하던 지민은 그 뜻을 깨닫고 고개를 살짝 저었다.
내 안간다.
왜!
그냥.
쟈는 덥지도 않은 갑다. 지민이는?
아, 나도 괜찮아.
쟈들은 덥지도 않은가베. 셔츠를 펄럭펄럭 거리며 자리에 앉은 친구를 쭉 보던 지민은 소리 없이 웃었다.
날은 좋았다. 장마도 다 지났는지 날 흐리지도 않고 연일 푸른 하늘이었다. 대신 푹푹 찌는 더위는 숨쉬기도 버겁게 만들었다. 이 날씨에 밖에 나가면 정말 온 몸이 바싹 말라 죽을 거야. 지민의 말에 옆에서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지민이 고개를 돌리자 태형과 눈이 마주쳤다. 태형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져 있었다. 여태까지 본 적 없던 태형의 표정이었다. 지민의 얼굴에 점점 놀라움이 퍼지는 모습을 본 태형은 급히 표정을 굳혔다. 태형아. 지민이 불렀다. 태형은 언제나 저 ‘태형아’에 약했다. 그 부드러운 목소리로 제 이름을 부를 때마다 가슴에 깃털이라도 생겨나는 것처럼 간질간질해졌다. 왜. 태형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했다. 너 웃는 거 예뻐. 지민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태형은 결국 고개를 돌렸다. 도저히 지민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지금 제 얼굴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도 보이지 않으니 답답했다. 굳이 보지 않아도 바보 같은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다. 날씨가 미치도록 더웠다. 온 몸에 열이 더 오르는 느낌이 드는 것을 보니 정말 학교 에어컨은 무용지물이다.
학교가 파하기 무섭게 아이들이 후다닥 뛰어나갔다. 그들의 목적지는 딱 봐도 마을에 있는 강일 것이다. 결국 오늘도 마지막에 남은 사람은 태형과 지민이었다. 태형은 언제나 서두르는 법이 없었다. 굳이 서두를 이유가 없기도 했고, 성격 자체가 그렇게 빨리빨리 하는 편도 아니었다.
당번도 아니건만 물놀이에 정신 팔려 교실문도 잠그지 못하고 뛰쳐나가버린 친구 대신, 태형이 문단속을 했다. 학교 밖을 나서자마자 온 몸에 내려앉는 더위에 절로 몸이 축축 처졌다. 매미가 귀 따갑게 울어댔다. 둘은 느린 걸음으로 나란히 걸어갔다. 둘 사이에 오고가는 말은 없었다. 굳이 영양가 없는 말을 죽 늘어놓지 않아도, 그냥 편안했다. 만난지 불과 3개월이 채 되지 않았는데도 그랬다. 지민은 그게 태형이 저에게 많이 배려를 해주어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아이스크림 하나 묵고 가까. 태형의 말에 땅을 보고 있던 지민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바로 앞에 작은 마트가 있었다. 사실 마트라기에 너무 작은, 상점 같은 곳이었다. 그러고 보니 지민은 한 번도 상점에서 무언가를 사본 적이 없었다. 지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스크림 냉장고 안을 쳐다보며, 지민은 심각하게 고민했다. 태형아 너 뭐 먹을 거야? 심각한 표정으로 묻는 지민에, 태형도 잠시 생각하다가 이내 메로나 하나 꺼냈다. 그럼 나도 그거 먹을래. 지민이 따라서 메로나를 집었다.
상점 앞에 놓여있는 평상에 나란히 앉아 메로나를 입에 물었다. 날씨가 많이 더워서 그런지 메로나는 빨리 녹기 시작했다. 벌써 밑 부분이 녹아 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해, 지민은 재빨리 밑을 베어 먹었다. 이렇게 먹을 생각은 없었는데 마음이 급해져서 허겁지겁 베어 먹다 나중에는 한 번에 쏙 넣었다. 슬쩍 고개를 돌리니, 태형 역시 반쯤 먹은 메로나를 어찌하지 못해 어정쩡한 자세로 후다닥 먹어치우고 있었다. 바닥에는 연두 빛 물이 후두둑 떨어져 있었다. 허허. 지민은 그 모습이 퍽 웃겨 낮게 웃었다. 허리를 숙인 채 고개만 돌린 태형이 지민과 눈을 마주했다. 동시에 웃음이 터져 꺄르르 웃었다. 지민도 그러했지만 태형도 눈을 접어 콧잔등을 찌푸리며, 입을 환히 벌리며 가감 없이 제 감정을 드러내어 웃었다. 더 없이 상쾌한 웃음이었다.
여름에 보는 별이 예쁘다.
뜬금없는 말이었다. 지민은 막대를 입에 문 채 태형을 쳐다봤다. 태형은 허벅지에 팔을 올리고 턱을 괸 채 지민을 바라봤다. 오늘 갈까. 태형이 덧붙여 말했다. 지민은 천천히 물고 있던 막대를 뺐다. 그래. 지민의 간결한 대답에 태형이 입꼬리를 올려 씨익 웃었다. 후덥지근한 바람이 한차례 훅 불어왔다. 동시에 하늘에서 비가 투둑 떨어지기 시작했다. 투둑투둑 몇 차례 떨어지던 비는 갑자기 그 속도를 더하더니 이내 쏴아아 얇은 비를 쏟아냈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맑았던 하늘에 어디서 비구름이 생겨났는지 영문 모를 일이다. 소나기겠지? 지민이 작게 중얼거렸다. 여름이니까. 태형이 대답했다.
언제쯤 그칠까.
딱히 안 그쳐도 상관없다.
어?
맞고 갈 생각이었는데.
의외의 대답이었던지, 지민의 눈이 살짝 놀라 커졌다. 태형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자리에서 일어나 옆에 있던 쓰레기통에 막대를 던져 넣었다. 자, 잠깐만. 지민이 다급히 일어나 발걸음을 뗀 태형을 붙잡으려 했지만 태형이 더 빨랐다. 태형의 머리와 옷이 젖어들기 시작했다. 비 맞으면 어떡해! 당황스러움에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낸 지민은, 본인도 놀라 텁 입을 막았다. 태형이 뒤돌았다. 머리가 축 늘어져 이마에, 볼에 붙었다. 곧게 뻗은 코끝에 빗물이 매달렸다.
여름비는 맞아도 괜찮다.
그게 무슨!
깜짝 물놀이.
덤덤한 표정으로 그런 소리를 하니 헛웃음만 나왔다. 지민은 결국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어버렸다. 문득 영화 속 한 장면이 떠올랐다. 갑자기 내린 소낙비에 그저 달리던 주인공들. 병원 침대에만 앉아있던 그 때, 화면으로만 느낄 수 있었던 소년들의 활기. 지민은 그것을 참 부러워했다. 그렇게 아무 걱정 없이 뛰기만 하고 싶었다. 그런 자유로움이 좋았다.
지민은 한 걸음 내딛었다. 차가운 빗방울이 지민의 앞머리를 톡톡 적시기 시작했다. 한 걸음 더 내딛었다. 온 몸이 차가운 빗물로 젖어들었다. 태형이 손을 내밀었다. 지민은 망설임 없이 달려가 태형의 손을 맞잡았다. 한 여름 갑자기 맞은 소나기는 생각보다 훨씬 더 시원했다. 찝찝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상쾌했다.
무작정 뛰기 시작했다. 태형의 달리기는 의외로 빨랐다. 무엇이든 서두르는 법이 없던 태형이라 달리기도 그럴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니었나보다. 다만, 타고나기를 약한 심장으로 태어난 지민에게 태형의 속도는 너무 빨랐다. 지민의 속도가 점점 줄어드는 것을 느낀 태형은 자신의 속도도 늦추었다. 뒤에서 지민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처음 봤을 때부터 생각한 거지만, 지민은 정말 잘 웃었다. 태형이 생각하기에 아주 평범하고 사소하기 짝이 없는 일에도 지민은 그것이 정말 좋다는 듯 웃었다. 그가 웃을 때마다 톡 올라오는 분홍빛 볼이나, 휘어지는 눈, 살짝 두툼한 눈두덩이가 생각났다. 분명 제 뒤에서 웃고 있는 지금도 그런 모습일 것이다. 태형은 흠흠 헛기침을 했다.
가자. 지민이 한 마디 하더니 갑자기 뛰기 시작했다. 태형은 지민의 뒷모습을 보며 멍하니 끌려가기만 했다. 원래 찰랑찰랑 거렸던 머리가 물 맞아 착 달라붙었다. 새하얀 그의 교복도 몸에 착 달라붙었다. 뒤로 뻗은 팔뚝 부분에 드문드문 살갗이 보였다. 태형은 살짝 시선을 내렸다. 맞잡은 두 손이 보였다. 둘 다 손에 물기가 흥건한데도 서로 먼저 손을 빼려고 하지 않았다. 태형은 오히려 그 손을 더욱 꽉 잡았다. 쏟아지는 빗소리는 마음을 두드리는 듯 했다.
비 오는 날 달리기는 지민의 집 앞에 도착하고 나서야 끝이 났다. 지민은 두 손으로 무릎을 짚고 헉헉 숨을 몰아쉬었다. 태형은 지민의 등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그의 등을 쓸어주기 시작했다. 차가운 비만 맞다가 갑자기 닿는 온기에, 지민이 움찔 몸을 떨었다. 아 깜짝이야... 지민이 고개를 들며 말했다. 등을 쓸어주던 태형의 손이 움찔 멈추었다. 태형은 천천히 그의 등에서 손을 떼며 시선을 살짝 피했다. 생글생글 웃고 있던 지민이 고개를 갸웃했다.
지민이 집 지붕 덕에 비는 피할 수 있었다. 아까보다 빗줄기가 많이 약해진 것을 보니 곧 그칠 듯 했다. 정말 소나기네. 지민의 말에 태형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괜찮나.
뭐가?
이런 날 이렇게 뛰어도.
아아, 뭐. 괜찮아. 시원하고 좋네. 자유롭고.
......
나 많이 좋아졌거든. 이젠 정말 이 정도는 아무렇지 않아. 음... 숨은 좀 가쁘지만.
괜찮다고 하면서도 지민의 숨은 살짝 헐떡거렸다. 태형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지자 지민은 일부러 더 웃어보였다. 우리 별 보러 가자고 했잖아. 지민은 아예 대화 주제를 바꾸었다. 태형은 그가 지금 상황을 외면하려고 꺼낸 주제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의 장단에 맞춰주었다.
오늘 8시나 9시쯤 시간 되나.
나 완전 돼.
내가 데리러 올게.
응. 기다리고 있을게.
들어가라, 춥다.
먼저 가.
어차피 요 앞이다. 빨리 드가라.
들어가라 손짓까지 하는 태형에, 결국 지민은 현관문을 열었다. 들어가기 전에 고개를 돌려 태형을 슬쩍 봤다. 교복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지민이 들어가는 것을 보고 있던 태형은, 눈이 마주치자 주머니에서 손을 빼 천천히 흔들었다. 지민도 살풋 웃으며 살랑살랑 손을 두어 번 흔들고 집으로 들어갔다.
너는 몸도 안 좋은 애가 왜 그렇게 뛰었어.
엄마의 타박에도 할 말 없었다. 지민은 자꾸 터져 나오려는 기침을 애써 숨기며 이불을 코끝까지 끌어올렸다. 아, 자꾸 머리가 빙빙 돈다. 열이 오르는 것 같기도 하다. 뱉는 숨마다 뜨거웠다. 정말 괜찮을 줄 알았단 말이에요... 지민은 작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엄마는 지민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팔짱을 꼈다.
여기 와서 좀 괜찮아진 것 같다고 무리하지 마. 그러다 또 재발 하면 어떡하니.
......
비 쫄딱 맞고 들어왔을 때는 괜찮다 괜찮다 하더니 금방 또 열 오르는 거봐. 너 항상 우산 챙겼잖아. 왜 그거 안 썼어.
그냥...
그냥 비 맞는 게 말이 되니? 어휴, 어쨌든 내일 상황 봐서 학교에 연락 하던지 해야지.
아 나 오늘 밤에 나가야 하는데.
지금 그 몸으로 어디를 가겠다는 거야. 내일 학교 갈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데.
엄마 나 진짜 괜찮아요. 그냥 몸이 으슬으슬한 것뿐이니까 약만 먹고 잠들면 괜찮을 것 같은데...
지민이 다급히 몸까지 일으키며 말했지만 잔뜩 굳은 엄마의 표정에 결국 입을 다물었다. 안 그래도 몸 약한 애가 엄마 걱정하게 만들지 마. 엄마는 그 말을 끝으로 방을 나갔다. 문까지 닫으니 방 안이 어두워졌다. 아직 해가 완전히 저물지 않아서 그런지 창밖이 분홍빛을 가득했다. 가끔 이런 날이 있었다. 무슨 이유로 분홍빛 하늘이 생기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노을이 지면서 붉어지는 것이 아니라 분홍빛으로 물드는 날. 지민은 멍하니 창밖만 보다가 결국 커튼을 확 쳐버렸다. 이렇게나 날이 좋은데 빌어먹을 몸 때문에 또 방 안에만 처박혀있게 생겼다. 나는 왜 이렇게 태어나서는. 오늘처럼 약한 제 몸이 원망스러웠던 적도 없었다.
어디서 자꾸 톡톡 소리가 나, 지민은 눈을 떴다. 방 안은 어두컴컴했다. 잠시 누워 있는다는 게 깜빡 잠이 들었나보다. 눈을 비비며 상체를 일으켰다. 톡톡 소리는 창문 쪽에서 나는 것이었다. 지민은 비몽사몽으로 커튼을 젖혔다. 톡. 자잘한 돌이 창문을 맞고 떨어졌다. 뭐지. 지민은 아예 몸을 일으켜 창문 밖을 봤다. 아래에 태형이 올려다보고 있었다. 지민은 깜짝 놀라 바로 문을 열었다. 열자마자 후덥지근한 바람이 훅 끼쳐왔다.
미안, 태형아. 아까 비 맞은 것 때문에 갑자기 약한 감기가 들어서...
안다. 어머니께 들었다.
정말 미안. 어쩌지, 오래 기다렸지... 연락이라도 했어야 했는데 경황이 없어서...
태형은 작게 고개만 저었다.
별로 안 기다렸다. 바로 니네 집 왔는데 어머니가 니 아프다고 하셔서.
아... 엄마가 오버하는 거야. 내가 일반 애들이랑 좀 다르니까.
몸은 좀 개안나.
보이는 대로.
별로 안 아파 보이는데.
그 말을 하는 태형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묻어있었다. 지민도 가볍게 웃었다. 정말 하나도 안 아프다니까.
둘 사이에 잠시 말이 없었다. 시골의 밤은 고요했다. 둘 사이에서 들리는 것이라곤 풀벌레가 우는 소리뿐이었다. 아까 내렸던 소나기 탓인지 젖은 흙냄새가 옅게 나는 듯 했다. 지민은 문득 태형의 뒤가 은은하게 빛나는 것을 깨달았다. 지민은 손가락으로 태형을 살짝 가리키며 물었다.
어두워서 손전등 켜고 왔어?
아... 이거...
태형은 답지 않게 우물쭈물했다. 그러고 보니 손도 뒤로 감추고 있었다. 무언가를 들고 있는 건 확실하다. 지민은 아예 창틀에 팔을 올리고 얼굴을 살짝 기대어 태형을 쳐다봤다. 또 그들 사이에 잠시 침묵이 돌았다. 태형이 뒤로 감춘 손을 꼼지락거렸다. 불빛이 태형의 움직임에 따라 살짝 흔들렸다. 뭐지. 지민은 고개를 갸웃했다. 손전등도 아니면 대체 뭐란 말인가. 그러고 보니 손전등에서 나오는 불빛 색이 아닌 듯 했다.
오늘 별 보러 가려고 했는데 못 봤으니까. 아쉬우니까...
태형이 주섬주섬 무언가를 앞으로 꺼냈다. 태형 때문에 가렸던 빛들이 확 뿜어져 나왔다. 팔에 얼굴을 기댄 채 엎드려 있던 지민이 몸을 팍 일으켰다. 커다란 통 안에 동그란 빛이 여기저기 움직였다. 와. 지민은 작게 탄성을 뱉었다.
별빛은 못 보니까, 이 빛이라도.
태형아.
...어?
넌 정말...
지민은 결국 말을 다 잇지 못했다. 태형은 굳이 그에게 더 묻지 않았다. 어두워서 흐릿하긴 하지만 지민의 얼굴만 봐도, 지금 그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잘 알 수 있었다. 그의 표정을 보고 피식 웃던 태형은 급히 얼굴을 굳혔다. 어느 순간부터 지민만 보면 이렇게 실없는 사람처럼 실실 웃고 있다. 어째선지, 참 알 수 없다.
두 손으로 감싸 들고 있던 유리병을, 뚜껑부근에 달린 손잡이로 다시 들었다. 유리병이 흔들리면서 은은한 빛도 같이 흔들렸다. 지민은 문득 든 생각에 푸흐흐 웃었다. 왜 웃노. 태형의 물음에 지민은 억지로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아무 것도 아니야.
자꾸 입꼬리가 올라가는데.
부끄러워서 말 못해.
궁금하다.
표정에는 딱히 드러나지 않는 듯해도 반짝반짝 빛나는 커다란 그의 눈은 숨길 수 없었다. 지민은 제 입으로 그 생각을 말하는 것이 민망해 섣불리 입을 열기 힘들었다. 뭐가 그렇게 궁금해. 작게 타박해도 태형은 곧 죽어도 들어야 하나보다. 지민은 말 하려 입을 열었다가 입술을 깨물었다가 반복했다. 얼굴에 점점 열이 오르는 기분이다. 태형은 고개를 한껏 치켜든 채 지민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지민은 이렇게 어두운 와중에도 제 붉어진 얼굴을 들킬까 손으로 살짝 얼굴을 가렸다.
진짜 별 거 아니야. 그냥 혼자 생각한 건데.
니랑 같이 웃고 싶다.
으음...
태형의 손에 들린 노란 빛들은 여전히 유리병 속에서 움직이며 은은히 빛났다. 지민은 그 빛을 멍하니 바라보다 살짝 시선을 틀어 태형을 쳐다봤다. 태형은 여전히 지민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원래 이런 애가 아닌 것 같은데 오늘따라 굉장히 끈질기다.
네가...
내?
네가 별을 따온 것 같다고!
끄아아악!!!! 지민은 빽 소리를 지르자마자 탁 창문을 닫고 침대에 몸을 날리며 묵음으로 소리를 질렀다. 자신이 말하고도 온 몸이 오그라드는 기분에 데굴데굴 침대를 굴렀다. 미쳤나봐 박지민!! 당장 베개에 코를 박고 죽고 싶었다. 민망함에 어쩔 줄 몰라 애꿎은 이불만 좍좍 잡아 뜯었다. 이불이 찢어지지 않는 게 용할 지경이다. 후아... 간신히 진정된 듯 대자로 누웠다. 슬쩍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은은한 그 빛들이 유유히 날아다니는 것이 보였다. 2층 창문에서 빛들이 보이는 것을 보면 태형이 풀어준 듯싶었다. 지극히 태형다운 행동이었다. 자유롭게 날아다니던 그 빛들은 점점 멀어지더니 이윽고 사라졌다. 창문 밖은 이제 어둠밖에 보이지 않았다. 갔으려나. 그렇게 생각할 때 즈음, 밖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지민아.
지민은 멍하니 있다가 확 몸을 일으켰다. 내가 지금 잘못 들은 건 아니겠지? 태형이 여태까지 자신을 그렇게 부른 적 있었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없었다. 지민은 재빨리 창문에 붙었다. 태형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제 방 쪽을 보고 있었다. 태형은 지민이 볼 것이라는 생각은 못했는지, 지민이 눈에 보이자 움찔 놀랐다. 혀를 살짝 내밀어 입술을 적셨다. 태형이 말하기 전 자주 하는 버릇 같은 거였다.
잘 자리.
태형은 한 마디 툭 던지고는 후다닥 달려갔다. 그의 뒷모습은 금방 사라졌다. 지민은 멍하니 태형이 사라진 곳만 바라봤다. 낮에도 느꼈지만 그의 달리기는 꽤나 빠른 편이었다. 그의 목소리가 자꾸 귓가에 맴도는 것 같았다. 왠지 모를 부끄러움에 지민은 또 한 번 침대를 데굴데굴 굴렀다.
앞뒤 안보고 미친 듯이 달렸다. 돌다리를 건너고 나서야 우뚝 멈추었다. 숨이 차서 깊이 들이마시고 내쉬면서 호흡을 정리했다. 삐질삐질 흘러나오는 땀을 슥 닦으며 고개를 돌려 지민의 집을 슬쩍 봤다. 여기서 그가 보일 리는 없지만, 그는 자신이 보일까봐 그게 또 부끄러웠다. 날이 덥네. 태형은 손부채질 하다가 귀를 감쌌다. 귀가 뜨끈뜨끈했다. 여름이라 더워서 그런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 모르겠다. 한 손에 들고 있던 유리병을 내려다봤다. 이제는 텅 비어 어둠만 담고 있는 병이었다. 태형은 두 팔로 유리병을 감쌌다. 무슨 용기로 그렇게 지민을 불렀는지 모르겠다. 지민은 잘도 그렇게 불렀는데 제가 불러보니 생각보다 훨씬 더 간지러웠다. 지민아. 태형은 작게 속삭이듯 한 번 더 불렀다. 간질간질했다. 태형은 괜히 가슴께를 긁었다.
여름방학이 다가왔다. 일주일 뒤에 방학을 한다고 했다. 교실의 아이들은 벌써부터 여름방학 때 무엇을 할 건지 이야기 나누느라 정신이 없었다. 개 중에는 숲에 들어가서 캠핑 하자는 얘기도 있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지민은 화들짝 놀랐다. 아니, 숲에서 야영이라니 너무 위험한 거 아니야? 굉장히 진지한 표정의 지민에, 다른 친구들을 빵 터져 꺄르르 웃었다.
거기 한 개도 안 위험하다. 숲 옆에 호수도 있고 숲이 그렇게 깊지도 않아가지고 개안타.
그래, 오히려 뭐고, 그 산이 더 위험하지.
우리 맨날 반딧불이 본다고 밤에도 드가고 그라는데.
갑자기 나온 반딧불이에 지민은 괜히 민망해져 흠흠 헛기침을 했다. 어제 일이 생각났다. 힐끔 곁눈질로 태형을 바라보니 태형도 어색하게 시선을 튼 채 딴청피우고 있었다. 이건 꼭 할 거제? 친구들의 물음에 지민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엄마한테 물어봐야 할 것 같은데...
왜? 진짜 하나도 안 위험한데. 말이 숲이지.
아 그게 아니라...
지민은 어떻게 설명을 해야할지 몰라 우물쭈물 거렸다. 여기 온 지 얼마 안됐는데 당연히 걱정이 많으시지. 옆에서 태형이 거들었다. 아 그런가. 친구들은 태형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지이인짜 재밌으니까 꼭 오래이. 작은 호수도 있어서 수영도 할 수 있고, 시원하기도 하고 밤에 딱 누우면 하늘에 별 억수로 많이 보이고, 반딧불이 날라댕기는 것도 볼 수 있다.
맞다. 반딧불이는 거기서밖에 못 본다. 거기는 진짜 물이 깨끗하고 완전 청정지역이라가꼬. 니 반딧불이 아직 본 적 없제.
으응...
아 진짜 빡찌미니 여까지 이사 왔으면 여름에 캠핑은 함 해봐야제.
반딧불이 얘기에 뜨끔한 지민이 어색하게 반응했지만 눈치 챈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이야기 하다가 자기들끼리 신나서 이거 하자 저거 하자 난리났다. 이야기만 들어도 즐거웠다. 친구들끼리 밤늦게까지 캠핑을 하면서 놀아본 적이 없었다. 제 선천적인 병 때문이기도 했지만, 애초에 방학 때 이 나이에 친구들끼리 캠핑 가는 것 자체가 드물기는 했다. 함께 학원을 가거나 주말에 시간 내서 워터파크나 수영장 가는 것이 통상이다. 중학생들끼리 캠핑을 간다 해도 공원 근처에 만들어진 야영장이 다일 것이다. 여기 친구들은 노는 스케일이 달랐다. 고민을 하고 있는 지민의 표정을 본 친구들은 달콤한 말로 지민을 유혹하기 시작했다.
응? 빡찌민이. 꼭 부모님께 물어봐. 이럴 때 하루종일 놀지 언제 놀아보겠노.
맞다. 어차피 고등학교 들어가면 이렇게 많이 못놀텐데.
응. 엄마께 꼭 허락 받아볼게.
좋아. 빡찌미니가 오면 김태형이는 그냥 따라 오겠지.
한 친구의 말에 다른 친구들이 꺄르르 넘어갔다. 그래 그래, 김태형이는 빡찌미니를 제일 좋아하니까 찌미니가 오면 그냥 따라오겄지. 친구들은 놀리기에 맛 들려서 좋아 죽는다. 사실 별 거 아닌 일인데 괜히 민망해졌다. 자기만 그런가 싶어 지민은 옆을 슬쩍 봤다. 태형은 턱을 괸 채 그들의 장난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딱히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는 걸 보면 정말 신경 쓰이지 않나보다. 하긴, 그냥 하는 말인데 괜히 의식하는 자신이 더 이상한 것일지도 모른다.
좋아한다라는 말은 참 애매한 것 같다. 그 대상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그 말에 담겨있는 감정이 달라지는 거니까. 지민은 친구들의 장난에 더 혼란스러워졌다. 좋아한다는 말에 민망한 느낌을 받았다면 애초에 자신은 태형을 친구로 봐왔던 게 아니라는 것인가. 태형을 좋아한다. 그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좋아한다는 게 어떤 의미로 좋아하는 거야? 라고 물어본다면 어떻게 대답해야할지 잘 모르겠다. 아직 어린 지민에게 감정이라는 것은 많이 복잡한 것일지도 몰랐다.
어머니한테 물어볼 기가.
응. 나도 너희들이랑 놀러가고 싶긴 하니까.
그래.
너는?
니가 가면.
... 어?
니가 가면 내도 갈게.
아. 지민은 천천히 입을 다물었다. 태형은 턱을 괸 그 자세 그대로 지민을 바라봤다. 나른한 그의 눈빛에 시선을 뺏겨 멍한 표정을 바라보던 지민은, 헙 정신을 차리고 후다닥 앞을 봤다. 가끔 그의 그런 눈빛을 볼 때마다 그렇게 아무 생각도 못하게 된다. 밤하늘에 박힌 별을 보는 것처럼, 멍하니 보게 된다. 잘생겨서 그래. 지민은 그렇게 결론을 내었다. 너무 잘생겨서, 서울 올라오면 무조건 한 번은 캐스팅 당할 얼굴이잖아.
서울? 지민은 문득 든 생각에 고개를 홱 돌려 태형을 바라봤다. 태형은 여전히 지민을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 한 번 같이 서울 놀러갈까?
서울?
서울도 나름 재밌는 거 많아.
궁금하네.
그치?
서울 살았을 때의 니가 쫌 궁금하네.
... 같이... 놀러가자.
지민은 간신히 대답을 했다. 이 정도면 일부러 저렇게 말하는 것이 아닐까. 한 번 제 감정에 대한 의구심이 들기 시작하니 어떤 것을 들어도 다 그런 쪽으로 생각하게 된다. 태형이 어떤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니 그냥 친구로서 그런 말을 한 것이겠지만. 지민은 잡생각을 떨쳐내려 고개를 세게 흔들었다.
종례 후 선생님의 부름에 잠시 교무실에 갔던 지민은, 이미 조용해진 교실 복도를 천천히 걸었다. 찜통더위에 셔츠 앞을 잡고 펄럭거려봤지만 그다지 효과는 없었다. 집에 가기 전에 가게 들려서 아이스크림을 사먹던가, 흐르는 강물에 살짝 발 담글까 의미 없는 생각을 하면서 교실 문을 열었다. 워낙 조용한터라 교실 문 열리는 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지민은 열자마자 창가 쪽에 엎드려 있는 태형보고 살짝 놀랐다. 태형도 친구들 따라 집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복도보다는 조금 더 시원한 교실에는 태형만 덩그러니 있었다. 얇은 커튼으로는 뜨거운 여름 햇빛을 다 막아주지 못하는지, 제 자리와 태형의 자리가 밝았다. 자고 있는 걸까. 지민은 최대한 발소리를 죽이고 자리로 갔다. 낡은 나무 바닥은 제 존재를 드러내는 듯 삐그덕 삐그덕 소리가 났지만 태형은 움직이지 않았다. 거의 숨까지 참으며 조용히 다가온 지민은 제 자리에 앉고 나서야 후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태형은 지민 쪽을 고개를 돌려 엎드린 채 자고 있었다. 지민은 가만히 그를 내려다봤다. 살짝 흐트러진 앞머리와 감은 눈 밑으로 길게 내려앉은 속눈썹, 곧게 뻗은 코는 언제 봐도 잘났다는 생각이 든다. 지민은 검지를 뻗어 그의 코끝을 살짝 건들었다. 말랑말랑한 감촉이 느껴졌다. 어, 얘 코에도 점이 있었네. 점도 살짝 콕 눌러봤다. 코끝에서 천천히 콧대를 따라 슥 쓸었다. 닿을 듯 말 듯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간지럽다.
아악!!
갑자기 턱 잡힌 손목에 지민은 너무 놀라 단발마의 비명을 질렀다. 크흐흑. 태형은 잠결에도 지민이 소리 지른 게 웃긴지 바람 빠지는 소리로 웃었다. 휘어지는 그의 눈이 이토록 얄밉게 느껴지는 건 처음이다. 지민은 입술을 삐죽이며 태형을 흘겨봤다. 그의 장난스러운 눈은 어디가고 어느새 또 진지한 눈빛이다. 별 같은 그런 눈. 아무 생각도 안 나게 만들어 버리는 그런 나른한 눈빛.
태형이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올라가는 그의 눈을 따라, 지민도 천천히 고개를 들어 태형을 바라봤다. 시선이 뜨거웠다. 태형의 손에 잡힌 손목도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지, 집에 갈까? 지민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작게 말했다. 태형은 대답 없었다. 태형의 나른한 시선을 마주했다. 태형이 천천히 지민에게 다가갔다. 서로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태형아? 지민이 거의 속삭이듯 태형을 불렀지만, 태형은 꼼짝도 안했다. 지민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멈추었다. 코끝이 살짝 스쳤다. 너무 가까웠다. 뭐지. 뭐지. 대체 이게 뭐지. 지민은 혼란스러운 눈으로 태형만 쳐다봤다. 태형이 살짝 고개를 꺾었다. 그 와중에도 뭐에 사로잡힌 듯 서로의 눈만 바라봤다. 지민은 결국 두 눈을 꾹 감았다. 잡혔던 손목이 갑자기 허전해졌다. 집에 가자. 태형의 말에 지민은 천천히 눈을 떴다. 어느새 태형은 가방을 맨 채 자리에 일어나 있었다. 뒤돌아 있어서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지민은 갑자기 얼굴에 열이 확 올라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 그래. 민망함에 지민은 말까지 더듬거리며 가방을 맸다. 아직도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머릿속이 혼란스럽다. 태형의 뒷모습만 보며 졸졸 뒤따라갔다. 지금 상태로는 도저히 그와 나란히 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자꾸 아까 일이 머릿속을 빙빙 돌고 열이 자꾸 올랐다. 지민은 손부채질 하다가 양 손을 볼을 살짝 누르기도 하며 애써 열을 식히려 노력했다. 진짜 아까 그 분위기는 뭐였지. 뽀, 뽀뽀... 하려고 했던 건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머리끝까지 온 열이 다 몰려 팡 터질 것 같았다. 아니 거기서 눈은 왜 감은 건데... 끄아아... 지민은 속으로 괴성을 질러댔다.
뽀뽀... 할 뻔했제. 태형은 문득 든 생각에 제 입을 틀어막았다. 뒤에 지민만 없었다면 당장에라도 머리를 쥐어뜯었을 것이다. 미칬는갑다, 날씨가 돌아삐가꼬 내도 헤까닥 했는갑다... 태형은 엄지로 살짝 입술을 쓸었다. 당황스러운 듯 눈만 굴리다가 사르르 눈을 감던 지민이 자꾸 생각이 났다.
사실 지민에게 다가간 것은 거의 충동적으로 한 행동이었다. 스스로 하고자 마음먹고 한 행동은 아니라는 것이다. 진짜 왜 그랬지. 내가 얘를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나. 그렇게 의식하고 보니 부끄러워 죽을 것 같다. 태형은 점점 뜨거워지는 것 같은 제 귀와 볼을 애써 무시했다. 더워서 그래, 더워서. 가슴 속에서, 머릿속에서 스멀스멀 떠오르는 제 감정을 뒤로 하고 자꾸 다른 이유를 덧붙였다.
지민은 태형과 갈림길에서 헤어질 줄 알았다. 앞으로 쭉 가면 자신의 집, 오른쪽으로 돌아 강을 건너면 태형의 집이었기 때문에. 이 와중에도 자신의 집에 데려다 줄 것이란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태형은 지민의 집 앞에서 일부러 시선을 땅에 고정하며 들어가라 손짓했다. 지민은 어벙하게 있다가 후다닥 대문을 열었다. 저... 잘 들어가. 지민의 말에 태형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지민을 마주했다. 지민아. 태형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지민의 얼굴은 벌게져 있었다. 홍조 탓인지 아니면 더워서 그런지, 그것도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알 수는 없었다. 왜... 지민이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
... 불러놓고 말이 없어.
아... 아무것도 아이다.
네가 너를 태형아 하고 부를 때마다 이런 느낌이었어?
태형은 지민의 말뜻을 생각하다, 크흠 헛기침을 했다. 또 가슴 부근이 간질간질해지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정말 의도치 않은 부름이었다. 오늘따라 왜 이러지. 자꾸 스스로도 생각 않던 일을 하게 된다.
어떤 느낌인데. 태형이 물었다. 지민은 아차 싶어 입을 다물었다. 섣불리 대답하기 힘들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지민은 결국 자신의 물음을 철회했다. 잘 가. 지민은 굳이 태형의 대답을 듣지 않고 바로 집으로 들어갔다. 태형은 닫힌 대문만 한참 바라보다 천천히 집으로 돌아갔다.
좋아한다는 건 무엇일까. 태형은 좋아한다는 감정이 참 생소했다. 애초에 느껴본 적 없으니 더 그러한 것일지도 몰랐다. 사실 지금도 잘 모르겠다. 다른 애들과 지민은 확실히 차이가 있었다. 그런데 그들과 조금 다르다고 해서 그게 좋아한다고 할 수 있을까. 조금은 특별한 우정일 수도 있지 않을까. 뭐가 됐든 제 감정도 제대로 정의 내리지 못하면서 섣불리 행동하고 싶지는 않았다. 특히 이런 애매모호한 것에는 신중할 필요가 있었다. 이미 신중하지 못한 행동을 할 뻔 했지만... 또 다시 생각난 학교에서의 일에 태형은 아예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아이고, 정신 사납구로 먼 짓이고! 엄마의 타박에 그제야 몸부림을 멈춘 태형이 하아 한숨을 쉬었다. 머리 아프다. 요 근래 이렇게 머리 아플 정도로 고민 한 일이 있었나 싶다. 매일 아무 생각 없이 학교 다니고 놀러 다니고 그랬던 것 같은데. 이것도 마음고생이라면 고생일까. 고개를 돌리니 거실 한 편에 둔 책장이 눈에 들어왔다. 태형은 자리에 일어나 쭉 둘러보다 책 한 권을 꺼내들었다. 몇 장을 넘겨 빽빽이 적혀있는 글자들을 눈에 담기 시작했다.
지민이 태형의 집을 찾아온 건 8시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갑자기 밖에서 철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 깜짝 놀랐다. 태형은 거실 창문을 열고 대청마루로 나갔다. 태형아! 태형아! 지민의 목소리였다. 어쩐지 다급해 보이는 목소리에, 태형도 다급히 대문으로 나가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지민의 얼굴에, 자신도 모르게 살짝 웃었다가 급히 입꼬리를 내렸다. 참 이것도 병인 듯싶다. 얼굴만 봐도 이리 웃음이 나올 수 있나.
태형아... 지민의 부름에 마음을 가다듬던 태형은 제대로 지민을 봤다. 무슨 일 있나. 태형의 물음에 지민이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려보였다. 지민은 어딘가 다급해 보이면서도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듯 슬퍼보였다. 엄마랑 싸웠나. 집에 무슨 일 있나. 태형이 아무리 물어도 지민은 고개만 저었다.
근데 표정이 와 그렇지.
우리... 우리 별 보러 가면 안돼? 지금 보러 가자.
어?
지금 바로 가자. 네가 말했던 그 곳에, 별이 정말 잘 보이는 곳. 우리 호수도 갈까? 반딧불이 날아다니는 거 볼까?
... 무슨 일 있제.
결국 지민의 눈에서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태형은 당황함에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엄지로 지민의 눈 밑을 살살 닦아주었다. 태형아 가자, 응? 지민은 저에게 뻗은 태형의 팔을 잡고 애원했다. 그래, 가자. 태형은 지민의 등을 살살 쓸어주었다.
나란히 시골길을 걸었다. 간혹 풀벌레나 개구리가 우는 소리 외에는 조용했다. 드문드문 지민이 킁 하는 소리가 들렸다. 작게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지민은 들키기 싫은 듯 입술을 깨물었지만 그래도 소리가 새어나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태형에게 걱정 끼치고 싶지 않은데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태형아. 지민이 그를 불렀다. 목소리가 떨려와 흠흠 헛기침을 했다.
나 돌아간대.
......
서울로... 다시 서울 간대.
......
안 가고 싶다고 처음으로 떼도 써보고 했는데... 우리가 아예 여기로 온 건 아니라고...
여기보다 서울이 낫기야 하지.
생각지도 못한 태형의 대답에 지민은 다소 격하게 고개를 돌려 태형을 바라봤다. 태형은 언제부터였는지 이미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을 보니 또 울컥한다. 지민은 목을 타고 올라오는 울음을 꾹꾹 삼키고 다시 입을 열었다.
너, 너 진짜 그렇게 생각해?
......
내가, 내가... 내가 서울로 돌아가면, 강에서 같이 놀지도 못하고... 너랑 같이 반딧불이도 못 보고... 이렇게 같이 별 보러 갈 수도 없고...
......
상점 앞에서 같이 아이스크림도 못 먹고... 또... 또... 소나기도 같이 못 맞고... 또...
네가 없는데.
지민은 끝끝내 입에서 맴돌던 말을 뱉지 못하고 꾹 다물었다. 갑자기 억울해졌다. 나는 너랑 헤어진다는 사실이 이렇게 북받칠 정도로 슬픈데, 너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아서. 사실 이 곳에서 만들었던 추억이 뭐였든 그건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중요한 건 태형이었다. 그가 있었기 때문에 그 일상이 매 번 소중했던 거였다. 그런데 이제는 볼 수 없다잖아. 하루를 함께 공유할 수 없다잖아. 지민은 그게 너무 서러웠다. 근데 태형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보여서, 더 서러워졌다.
너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지민이 다시 물었다. 태형은 한참 말이 없었다. 하. 지민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둘은 다시 천천히 길을 걷기 시작했다. 터덜터덜 걷고 있던 지민은 제 손을 덮어오는 온기에 살짝 시선을 내렸다. 태형의 손이 가볍게 제 손을 잡고 있었다. 지민은 일부러 그의 손을 꼭 잡았다. 아무렇지 않을 수 있겠나, 내가. 태형이 잔잔히 말을 이었다.
매일이 색다른 하루였고, 그래서 재밌었고. 소중했고.
......
니가 서울로 가는 건 어쩔 수 없는 거다이가. 내가 니를 잡는다고 해도 변하지 않잖아.
......
그러니까, 기억해줘 지금 이 순간을. 이 날을. 우리가 만났던 그 시간을.
지민은 걸음을 멈추고 아예 몸을 돌려 태형을 바라봤다. 태형은 힐끗 지민을 보더니 몸을 틀어 지민을 마주했다. 한 손은 여전히 이어져 있었다. 아까의 울음 탓인지 지민의 눈가가 촉촉이 젖어있었다. 우리 다시 만날 수 있어? 지민의 눈이 확 붉어졌다. 눈물이 차올랐다. 태형은 지민에게 한 발짝 더 다가갔다. 다른 한 손으로 지민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지민의 머리가 톡 태형의 어깨부근에 닿았다. 지민은 다른 손으로 태형의 티를 꾹 잡았다.
만나러 갈게.
......
그러니까 건강하고. 내 잊지 말고.
내가 너를 어떻게 잊어.
지민의 말에 태형이 낮게 웃었다. 지민도 작게 웃었다. 이렇게 웃는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다. 풀벌레는 어디선가 찌르르 찌르르 계속 울어대고, 한여름 밤은 깊어져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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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어서 죄송합니다ㅠㅠㅠㅠ
7월을 생각하며 썼는데
또 8월을 넘겨버리고 말았네요...
언급을 했는지는 모르겠는데
이 글의 뷔민은 중3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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