슙민슈짐 선인장
짧혹시 모를 소재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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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걸었다. 느릿느릿한 발걸음에는 여유로워 보이다 못해 굼떠보이기까지 했다.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넣고 발 뒷꿈치를 질질 끌며 쭉 뻗은 거리를 걷는 모습이 영락 없는 백수였다. 그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한참을 걷다가 어느 한 곳에서 우뚝 멈추어섰다. 그 자리에만 꽃들이 만연해 있었다. 고개를 돌렸다. 꽃집이었다. 마스크를 쓰고 있어 향이 날 수가 없을텐데 콧 속으로 꽃의 향기가 훅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여러 색으로 알록달록한 꽃들은 보기만 해도 그 향기가 났다. 순간 아찔함에 윤기는 머리를 살짝 저었다.
햇살은 강렬히 내리쬐고, 꽃집 앞에 널려있는 꽃들은 그 금빛 햇살을 받아 제 색을 더욱 진하게 뿜어냈다. 그 강렬한 색감에 윤기는 눈이 다 부실 지경이었다. 익숙하지 않다, 이런 지나친 생동감은. 아니, 밝음이라 해야하나. 하나같이 제 색이 강한 꽃들은 윤기의 발목을 붙잡았다. 이상하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너희들은 사람들의 시선을 뺏어가는구나. 그렇게 모든 사람들의 눈에 띄게 만드는구나. 나는 그럴 수 없는데. 이름도 모르는 꽃들을 하염없이 내려다봤다.
꽃 예쁘죠. 갑자기 들리는 목소리에 윤기는 흠칫 놀라며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습관적으로 모자를 더욱 깊이 눌렀다. 시야가 조금 가리긴 하지만 얼굴만 가려진다면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아... 윤기는 갑작스러운 대면에 너무 놀라 몸까지 굳어 버렸다. 이렇게 훤한 대낮에 사람을 만나는 것은 역시 껄끄러웠다. 움찔움찔 뒷걸음질 치던 다리는 그와 시선이 닿자마자 결국 멈춰섰다. 아, 아니에요. 거의 기어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말한 윤기는 그 자리를 벗어나려 홱 몸을 돌렸다. 아, 잠시만요. 그의 목소리가 윤기를 또 멈춰세웠다. 그는 후다닥 윤기의 앞으로 다가왔다. 갑자기 훅 다가와 순식간에 좁혀진 거리에, 윤기는 흠칫 놀라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이거요. 그가 내민 것은 꽃 한송이였다. 그쪽이랑 어울려서요, 그냥 선물이니까 받으세요.
이런 일은 경황이 없어 윤기는 어찌할 바 몰라 우물쭈물거렸다. 얼른요. 그가 들고 있는 꽃을 살짝 흔들었다. 꽃이 살랑이며 움직였다. 윤기는 결국 꽃을 받아들었다. 색깔도 참 독특했다. 끝은 하얀데 안 쪽은 오묘한 보라빛이었다. 멍하니 그 꽃만 바라보다 퍼뜩 정신이 든 윤기는 어정쩡하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가, 감사합니다. 생각 없이 고개를 들다 그의 얼굴을 제대로 봤다. 아니요. 하면서 웃는 그의 웃음에 윤기는 그를 제대로 마주 할 수 없었다. 햇살이었다. 윤기는 결국 눈을 피했다.
꽃을 키워본 적 없으니 받은 꽃을 어떻게 보관을 해야할지 몰랐다. 윤기는 거실 한가운데 서서 꽃 줄기만 살짝 잡고 하염없이 고민했다. 부엌으로 들어가 안 쓰는 유리컵 하나를 찾아내었다. 싱크대에서 물을 살짝 받았다가 멍하니 그 컵을 내려다 보더니 이내 그 물을 버리고 정수기 물을 받았다. 그리고 꽃을 넣었다. 기다란 머그컵이어서 다행이었다. 만약 조금이라도 작았더라면 꽃은 제 머리를 견디지 못하고 푹 고꾸라졌을 것이다. 윤기는 꽃을 담근 컵을 들고 집 안을 배회했다. 어디에 놔둬야 할지 몰랐다. 그러다 아, 생각이 났다. 꽃은 햇빛이 필요하다. 윤기는 제 집에서 가장 햇빛이 많이 들어오는 곳을 찾아 조심히 컵을 놔두었다. 꽃은 아까 꽃집에서 봤던 것처럼 제 색을 뽐내며 시선을 빼앗았다. 꽃은, 햇빛이 필요하구나. 아니면 자신을 보여줄 수 없으니. 윤기는 그 앞에 쭈그려 앉아 두 팔을 무릎을 감싸듯 두고 그 위에 제 머리를 얹었다. 하염없이 꽃을 내려다봤다. 윤기가 가지고 있는 가장 밝은 것이었다.
꽃은 며칠 견디지 못하고 결국 시들어 버렸다. 갈색으로 변해 바짝 마른 꽃은 힘 없이 처져 있었다. 윤기가 당황함에 살짝 건들이자 파스스 바스라졌다. 순간 뜨끔한 윤기는 바스라진 꽃잎을 손에 쥔 채 덜덜 떨었다. 어, 어쩌지... 죽일 생각은 없었는데. 이런 어두컴컴한 곳에는 살지 못하는건가. 역시 더 큰 빛이 필요했던걸까. 여러가지 생각이 막 얼기설기 엮이기 시작했다. 어찌할 바 몰라 꽃 주위만 빙빙 돌며 고민하다 결국 컵째로 들어 집 밖을 나섰다.
꽃집 근처까지 오자 아차 싶었다. 내가 뭐라고 여기까지 왔지. 윤기는 들고 있는 컵을 내려다 보았다. 아까 만지다가 바스라져버려 꽃잎도 몇 장 안남았다. 안그래도 느릿한 그의 걸음이 더욱 느려졌다. 저 앞에 보이는 꽃집까지의 거리가 삼만리처럼 멀었다. 그럼에도 결국은 도착한 꽃집 앞에서 윤기는 또 서성였다. 유리컵만 붙잡고 꽃집 문 앞을 왔다갔다 했다. 꽃을 죽여버렸다고 할까. 이 애를 죽일 생각은 없었는데. 미안하다고 해야하나. 여러가지 상황을 상상하며 어떻게 말을 건네야 하나 고민하던 윤기 앞에 작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 때 그 분이시네요. 고개를 들기도 전에 들리는 목소리는 윤기가 잘 아는 그 목소리였다.
아...
안녕하세요. 오늘은 어쩐 일로...
아... 그...
윤기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주먹 쥔 손을 입가에 갖다댄 채 괜히 흠흠 헛기침을 했다. 눈 마주치는 것 조차 부끄러워 고개가 들리지 않는다. 제가 생각해도 자신이 답답해 죽을 것 같은데 제 앞에 있는 이 남자는 어찌나 마음이 고운지 조용히 자신이 말을 다 끝낼 때까지 조용히 기다려준다.
그... 꽃이 시들었는데... 내가 관리를 못해서...
그가 작게 풋 하고 웃는 소리가 들렸다. 어쩐지 얼굴에 열이 오르는 기분에 윤기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작게 부채질을 했다. 뿌리가 없기 때문에 시드는 건 당연하죠. 남자의 말에 윤기는 순간 뒷통수 맞은 것처럼 머리가 띵해졌다. 아... 윤기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그 때와 같은 미소다. 햇살과 같은 웃음. 여전히 그 햇살은 감당할 수 없이 강렬하다. 윤기는 시선을 살짝 피했다. 아, 잠시만요. 남자는 갑자기 꽃집에 들어갔다. 윤기는 꽃집 앞에서 유리컵을 두 손으로 든 채 멍하니 그 자리에 서있었다. 잠시 나온 남자의 손에는 작은 화분이 들려 있었다. 여기요. 윤기는 자신 쪽으로 내밀어진 조그만 화분을 한 손으로 받았다. 이건 왜...? 라는 의문 가득한 윤기의 표정을 읽은 그가 살풋 웃었다. 이건 쉽게 죽지 않을 거예요. 그가 입을 열었다.
그대가 조금이라도 관심을 준다면 언제나 푸르게 있을거랍니다. 꽃도 피워요. 대신 선인장의 꽃은 수수할지 몰라도 그만큼 귀하죠. 사랑을 많이 받아야만 꽃을 피우거든요.
아...
선물이에요.
윤기는 다시 선인장을 내려다 봤다. 이 쪼그만게 도무지 꽃을 피울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아보였다. 저... 이런 거 키울 줄 몰라서. 윤기의 말에 그가 또 작게 웃었다. 조금의 물, 햇빛, 그것들을 줄 수 있을 정도의 관심 정도면 충분해요. 어느 순간 퍼뜩 생각이 나서 보는 정도만 해도, 괜찮아요.
그래서 결국 들고왔다. 집에 다 와서야 문득 생각이 들었다. 아, 돈. 이건 정말 파는 것 같았는데 매 번 이렇게 받기만 해서 좀 미안하다. 다음에 갈 때는 뭐라도 사들고 가야 하나... 그 생각까지 들다 순간 헛 하고 퍼뜩 정신이 들었다. 다음에 갈 때라니, 마치 당연히 또 갈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는 그 생각이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이 이상 밖에 돌아다니는 것은 위험했다. 자신이 돌아다니기에는 너무 밝았다. 눈부신 밝음은, 결국 어둠을 눈에 띄게 만든다.
윤기는 선인장을 전에 꽃 놔둔 장소에 조심스레 두었다. 어둠 속에서 유일하게 빛이 닿는 곳이었다. 선인장이 내는 초록빛이 어쩐지 낯설기만 해 윤기는 괜히 머리만 긁적였다. 이렇게 쪼끄만 애가 꽃을 피운다고? 윤기는 그 때처럼 쭈그려 앉아 가만히 선인장만 내려다보다가 문득 든 생각에 휴대폰을 꺼내 검색창에 들어갔다. '선인장 키우는 법', '선인장 물 주기'. 여러가지를 쳐서 나온 사이트를 꼼꼼히 보는 윤기의 표정에 비장함까지 느껴졌다. 전처럼 또 시들게 만들지 않기 위해서는 공부가 필요했다.
오늘도 앞에서 서성이기만 하는 그를 발견한 지민은 피식 웃었다. 매 번 이 앞에서 보라는 듯 서성이기만 하고 들어오지는 않는다. 앞까지 왔다가 뒤돌아 가더니 어느순간 다시 와서 앞에서 머뭇거리며 괜히 꽃만 보고 있다가 머리를 긁적이다가, 참 부산스럽다. 결국 이번에도 지민이 나갔다.
어서오세요. 지민의 인사에 뒤돌아 있던 윤기가 화들짝 놀라며 뒤로 고개를 홱 돌렸다. 아, 안녕하세요. 어지간히도 놀란듯 말까지 더듬으며 어색하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는 윤기에, 지민도 따라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윤기는 살짝 시선을 피한 채 제 귀만 만지작 거렸다. 잠시 그들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돌았다. 잠시 들어오실래요? 지민의 물음에 윤기는 그제서야 고개를 들어 지민을 바라봤다. 들어오세요. 눈을 접어 웃으며 살짝 몸을 돌려 길을 만든 지민이 손으로 가게 안을 가리켰다. 윤기는 뭐에 홀린듯 천천히 꽃집 안으로 들어갔다.
발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 윤기는 낯설기만 한 꽃집 공기에 머뭇거렸다. 괜찮으니까 들어가세요. 지민이 뒤에서 그의 등을 살짝 밀자, 윤기는 속절없이 안으로 밀려 들어갔다. 밖에서 은은하게 퍼져 나가던 향기가 꽃 집 안에서는 좀 더 진하게 나는 느낌이었다. 꽃들은 원래 이렇게 향기가 진한건가. 아니면 내가 그런 착각을 하는건가. 윤기는 작게 코를 킁킁거렸다. 윤기는 코가 굉장히 예민한 편이었다. 냄새 하나에 민감하게 반응을 해야하는 직업이기 때문에 그럴지도 몰랐다. 지민은 윤기의 옆을 지나 테이블 앞에 섰다. 둥그런 테이블 위에는 갖가지 꽃들이 잔뜩 늘어져 있었다. 지민은 그 꽃들을 들어 다듬기 시작했다. 윤기는 멍하니 서서 그가 하는 일을 바라봤다. 그런데 오늘은 어쩐 일이세요? 지민의 물음에 멍하니 그만 보던 윤기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흠흠 헛기침을 했다.
그... 선인장 말인데...
예쁘죠. 요즘은 선인장 키우는게 유행인데 그 아이가 제일 잘 나가요.
아...
토끼 닮았다고 해서 토끼 선인장이라고 불리는데 원래 이름은...
백도선.
어머, 잘 아시네요. 백도선 맞아요. 가시가 하얗고 보드라워 보이는게 정말 토끼 같지 않아요? 자라는 것도 토끼 귀처럼 자라고.
꽃도 예쁘던데.
그쵸. 꼭 자기처럼 귀엽고 노란 꽃을 피워요.
꽃을 사진으로 봤을 때, 윤기는 지민이 생각났다. 처음 본 날 노란 후드티를 입고 있어서 그랬나. 지민 말마따나 귀여운 꽃이었다. 실제로 보고 싶을 정도로.
검색해봤어요.
뭘요? 백도선?
선인장을 키워본 적이 없어서. 또 나 때문에 죽을까봐.
윤기의 말에 지민은 결국 빵 터져서 손으로 입을 가린채 꺄르르 웃었다. 들고 있던 꽃이 지민의 머리를 자꾸 쓸었다. 윤기는 그 꽃과 지민을 번갈아 봤다. 전 또 이름 검색해봤다는 줄 알았는데. 지민은 간신히 호흡을 정리하며 입을 열었다.
선인장은 잘 죽지 않아요. 생명력이 정말 끈질겨요. 그래서 사람들이 더 많이 기르는 것일 수도 있지만요.
그래도요. 그렇게 생명력이 끈질긴 애가 나 때문에 죽으면 좀 그렇잖아요.
음...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검색까지 해 보고 벌써부터 많은 사랑 주잖아요?
윤기는 멋쩍음에 볼만 긁적였다. 어쩐지 뒷목이 홧홧해지는 느낌에 윤기는 괜히 꽃집을 돌아보는 척 주위를 둘러보았다. 밖에서 봤을 때는 아주 조그만 꽃집 같아 보였는데 안으로 들어오니 생각보다 훨씬 넓었다. 꽃집 하면... 돈 많이 벌어요? 윤기는 아무 생각 없이 뱉었다가 헙 입을 다물었다. 본인이 생각해도 무례하기 그지 없는 질문이었다. 미안해요. 윤기는 바로 몸을 돌려 지민을 바라봤다. 아무 의미 없는 질문이었어요, 미안해요 답해주지 마요.
괜찮아요. 어차피 많이 듣던 질문이라.
미안해요.
남자가 왜 이걸 하느냐는 소리도 들었어요. 뭐, 직업에 성별 상관 없다지만 여전히 사람들의 사고에는 직업에 성별이 따로 나눠져 있나봐요.
......
돈 많이 번다는게 어떤 기준인지는 모르겠지만 뭐... 먹고 살 정도로는 벌어요. 그래도 저는 많이 버는 편이라.
... 인기 많나봐요.
음... 글쎄요. 웨딩이나 파티 주문이 좀 들어오는 편이라... 가끔 연예계 쪽에서도 들어오기도 하고요. 꽃을 소품으로 많이들사용하니까.
꽃집 사장님은 바쁘네요.
윤기의 말에 지민이 또 빵터져 끅끅 웃었다. 윤기는 왠지 모를 민망함에 열이 머리 끝까지 올랐다. 아 뭐 꽃집 사장님 맞죠... 지민은 웃음을 간신히 가라앉히며 겨우 말 했다. 정확히는 플로리스트죠. 지민의 말에 윤기는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 메모를 했다. 플로리스트. 이게 뭔지 정확히는 몰라도 자신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직업이라는 것은 알 것 같았다. 꽃 좋아해요? 지민은 새로운 꽃을 다듬으며 물었다. 윤기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꽃을 좋아하냐니. 윤기한테는 지민의 모든 것이 낯설었다. 그가 건네는 질문까지도. 윤기는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싫어하지는 않아요.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 왜요.
그 쪽 처음 본 날, 꽃을 뚫어지게 쳐다봤잖아요. 그 표정도 다 기억해요.
어떤 표정이었는데요.
음, 따뜻한 표정이었어요. 따스한 눈이었고요. 사람의 눈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자신의 눈을 가리키며 말하는 지민에, 윤기는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자주 여기 오시잖아요, 꽃이 좋아서 오는 거 아니에요? 지민은 '내 말이 맞지?'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 윤기를 봤다. 그의 뿌듯한 표정에 윤기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네, 좋아하는 거 맞는 것 같네요. 윤기의 대답에 지민은 헤 웃었다. 꽃을 싫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으니까요.
아 맞다. 왜 왔는지 물어봤는데 대답을 못들었네요.
선인장. 잘 키우고 싶어서요. 아니... 음, 사실 선인장은 핑계고.
......
그냥 왔어요. 오고 싶어서.
윤기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생각해보니까 이상하다. 무슨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닌데 오고 싶어서 왔다니. 진짜 웬 또라이인가 싶을거다. 윤기는 괜히 뒷목만 만지작거렸다. 아까부터 계속 뒷목에 열이 오르는 듯 홧홧하다. 아마 뒤에서 보면 제 목만 시뻘게져 있을 거다. 톡. 지민이 꽃 줄기를 자르는 소리가 났다. 그 작은 소리가 윤기의 귀에 들릴 만큼 이 안은 조용했다. 다행이네요. 지민이 입을 열었다.
그냥 오고 싶을 정도로 제 집이 마음에 든다니. 좋네요.
......
자주 놀러오세요. 언제든. 아, 그러고 보니까 이름도 모르네.
......
저는 박지민이에요. 그 쪽은?
순간 윤기는 목구멍이 턱 막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지민과 눈이 마주쳤다. 아무런 악의 없는 순수한 그의 눈은 왠지 모르게 죄책감 들게 만들었다. 왜? 내가 왜 그에게 죄책감이 드는거지. 윤기는 맹세코 그에게 잘못한 일이 없었다. 하지만. 윤기도 알았다. 저의 행동이 그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는 것을. 그 사실은 윤기한테 죄책감으로 날라왔다. 입술은 달싹이지만 차마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죄책감이 목구멍을 콱 막았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이미 많은 욕심을 부렸다. 여기서 더 욕심을 부려도 되는 것인지 판단이 제대로 서지 않았다. 저는... 윤기는 고민 끝에 간신히 목소리를 냈다.
윤기.
네?
민윤기요.
민윤기... 정말 예쁜 이름이네요.
... 고마워요.
정말 잘 어울려요. 그 쪽이랑.
......
되게 말랑말랑하고.
윤기. 민윤기. 지민은 마치 허밍 하는 것처럼 그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타인의 입에서 나온 제 이름은 지민의 말처럼 말랑말랑하기 그지 없었다. 내 이름을 들으면 이런 느낌이구나. 윤기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윤기씨는 무슨 일 해요? 지민이 윤기를 보며 묻다가 바로 입을 다물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윤기의 얼굴을 보자 아차 싶었다. 뭔가 잘못 물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곤란하면 굳이 대답 하지 않아도 돼요. 지민이 바로 이어서 한 말에 윤기는 자신의 표정이 잘못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입술을 살짝 짓이겼다. 저 그냥... 백수예요. 윤기의 말에 지민은 당황스러운 표정을 숨길 수 없었다. 죄송해요, 제가 괜히 주책을 부렸네요. 지민의 사과에 윤기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지민...씨는 이 일 좋아서 하는 거예요?
음, 그렇죠. 처음에 주위에서 엄청 반대 심했거든요.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은 아니니까요. 뭐, 지금은 아무도 뭐라 못해요. 아까도 말했지만, 저 나름 잘 나가서요.
아...
윤기씨는 하고 싶은 일 있어요?
윤기는 잠시 생각하는 듯 입을 다물었다. 직업을 정한다는게 참 힘들긴 하죠, 뭘 하고 싶은지, 내가 잘 하는 것은 무엇인지, 나와는 잘 맞는지, 그런 것들을 다 생각해보고 가장 적합한 일을 구한다는게 어려운 일이긴 해요. 지민은 꽃다발을 만들기 시작했다. 윤기는 멍하니 그가 만드는 꽃다발을 봤다. 테이블 위에 널브러져 있던 꽃들은 지민의 손길을 받고 화려해졌다. 서로의 조합이 서로를 더욱 화사하게 만들었다. 밝은 일이요. 윤기가 중얼거렸다. 지민은 꽃을 향하던 시선을 돌려 윤기를 바라봤다.
빛을 볼 수 있는... 일이요. 윤기가 다시 한 번 말했다. 지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세상에 직업은 참 많죠, 윤기씨한테 잘 맞는 일을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윤기는 매일 그 꽃집을 들렸다. 그가 갈 때마다 지민은 항상 웃으며 반겨주었다. 그는 매 번 같은 말을 했다. 어서오세요, 기다렸어요. 처음에는 그 말이 어쩐지 부끄러웠지만 이제는 익숙했다.
혹시 차 좋아하세요? 지민의 물음에 윤기가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윤기의 대답에 지민은 가게 안 쪽으로 들어갔다. 테이블에 앉아계세요, 제가 국화차를 좀 만들었거든요. 윤기는 쭈뼛쭈뼛 의자에 앉았다. 여전히 가게 안에는 꽃향기가 은은하게 났다. 언젠가 여기는 항상 좋은 냄새가 난다고 말했더니 지민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래요? 저는 하루종일 여기 있어서 그런가 그렇게 많이 나는지는 처음 알았네요. 꽃집을 가득 채운 그 향은 그의 몸에서도 은은하게 났다. 하루종일 좋은 곳에 있으니 좋은 향만 나는 듯 했다.
지민은 국화차를 내어왔다. 은은한 향에 이끌리듯 차를 머금었다. 조그마한 국화가 차 위에 동동 띄워져 있는게 귀여워 윤기는 피식 웃었다. 향 좋죠? 지민의 물음에 윤기는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마음이 평화로워지는 느낌이었다. 얼마만에 느끼는 여유로움인지 모르겠다. 윤기는 바랐다. 이 여유가 깨지지 않기를.
지민은 참 신기한 사람이었다. 윤기는 턱을 괸 채 지민만 빤히 바라본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꽤나 쑥쓰러워 하면서 그렇게 보지 말라고 하던 지민은 이제는 익숙해졌는지 윤기의 시선에 마주 웃어주고는 한다. 왜 그렇게 부끄럽게 쳐다보세요. 언제 한 번 지민의 물음에 윤기는 깊이 고민한 적이 있었다. 그러게, 내가 왜 그러는지 나도 잘 모르겠는데, 그냥, 계속 시선이 가게 만드는 사람이네요. 한참을 생각하던 윤기가 뱉은 말에 지민의 귀가 발그레 해졌다. 참,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시네요. 지민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잔을 만지작거리며 말했었다. 윤기는 새까만 머리와, 뽀얀 뒷목을 보이며 쑥쓰러워 하는 지민을 보며, 참 귀여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신기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전혀 몰랐던 사람을 보며 귀여움을 느끼고, 계속 시선이 가게 만들고, 왠지 그가 궁금해지는 그 과정들이, 윤기는 너무 신기했다. 이렇게까지 깊게 사람을 신경쓴 건, 거의 처음이었다.
***
일이 들어왔다. 거의 세 달만에 들어온 의뢰였다. 후. 한숨이 나왔다. 손에 힘을 주어, 들고 있던 종이 볼품없이 구겨졌다. 그대로 홱 던졌다. 종이는 힘 없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눈 앞에 있던 종이가 사라지면서 거실 바닥에 두었던 선인장에 눈에 띄었다. 선인장은 여전히 거실 안으로 들어오는 작은 햇빛에 의존한 채 숨쉬고 있었다. 갑자기 숨이 턱 막혔다. 윤기는 숨이 부족한 사람처럼 숨을 헐떡거렸다. 힘 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윤기는 제 목을 감싸잡았다. 누군가 점점 제 목을 조여오는 것 같았다.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여전히 눈 앞에 보이는 작은 선인장에, 결국 두 눈을 꾹 감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컴컴한 어둠에 지민의 얼굴이 보이는 듯 했다. 그것마저 괴로웠다. 윤기는 한참 후에야 이 모든 증상의 원인을 알았다.
그것은 죄책감이었다.
이 전 의뢰로 많이 다쳤었다. 그래서 몸이 나을 때까지 쉬라고 했었다. 한번도 가져본 적 없는 갑작스런 휴식에 무엇을 해야할지 몰라 방황 하고 있을 때, 그를 만난 것이었다. 윤기는 어둡기만 한 제 집 한가운데 쭈그려 앉아 고민했다. 돌아가지도 않는 머리 억지로 쥐어짜내어 가면서 고심을 했다. 처음이었다. 누군가를 이토록 오랫동안,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자신이 올바른 판단을 하고 있는가 하는 고민까지 들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불도 켜놓지 않은 제 집은 어둡기만 했다. 이런 곳에 한줄기의 햇빛이 들어오는 것이 기적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어둡고, 칙칙했고, 음습했다. 제가 앉아 있는 이곳이 어두우면 어두운만큼, 선인장이 듬뿍 받고 있는 햇살은 눈이 부실 정도로 밝아졌다. 자신과 그의 사이는 그런 것이었다. 점점 어둠 속 깊이 들어갈 수 밖에 없는 자신에게 그는 더 이상 바라 볼 수 없을 정도로 눈부신 존재였던 것이다. 보기가 힘들었다. 그 눈부심을 계속해서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언젠가 저 작은 빛줄기 하나가 결국엔 어둠에 잠식 당하여 제 빛을 잃을까, 저 선인장은 그 한줄기마저 사라진 어둠 속에서 결국 시들어 버릴까, 그 걱정에 어느 것 하나 손에 잡히지 않았다.
사람은 제 분수에 맞지 않는 욕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윤기 삶의 신념 같은 것이었다. 언제 어디서 이 세상을 떠도 미련이 남지 않도록, 욕심을 가지지 말자. 지금 당장 죽는다 해도 후회 없도록, 지켜야 할 것을 만들지 말자. 윤기에게 있어서 그는 미련이자 욕심이었다. 이 이상 깊게 다가가서는 안되었다. 그 빛에 홀려 결국 눈이 멀어버리지 않도록, 지금이라도 윤기는 그 빛에서 발을 떼어야 했다.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장갑을 꼈다. 장비를 챙겼다. 긴 코트를 입었다. 워커를 신었다. 모든 것이 검은색이었다.
생각해보면 이상한 날이었다. 그 날따라 이상하게 밖에 나가고 싶었고, 갑자기 걸음이 멈추어졌으며, 하필 그 때 딱 그의 꽃집이 있었다. 마치 모든 것이 이미 정해져 있던 것처럼. 그 날은 일상적이었으며, 특별했다. 어쩌면 처음부터 그에게 끌렸던 것이라고, 윤기는 생각했다.
방아쇠에 손가락을 올렸다. 숨을 죽였다. 기척을 숨겼다. 지금도 이 곳에 부유하고 있을 공기처럼. 존재를 숨기는 것은 밥 먹는 것보다 쉬웠다. 조준경에 눈을 갖다대었다. 저 멀리 어딘가에 있을 목표가 마치 제 바로 앞에 있는 것처럼 생생히 보였다. 셋, 둘, 하나.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소리 없이 나아간 총알은 목표의 심장을 정확히 맞추었다. 목표는 조용히 쓰러졌다. 아마 그는 아침, 시간이 되어도 나오지 않는 회장님을 직접 모시러 온 비서에게 발견될 것이다. 화려하기만 했던 그의 생에 비해 한없이 초라한 죽음이었다.
후. 윤기는 작게 한숨을 쉬며 바로 자리에서 벗어났다.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집을 향했다. 숨도 제대로 안쉬어지는 느낌에 거칠게 마스크를 벗었다. 갑갑하기만 한 장갑도 벗어서 대충 주머니에 쑤셔넣었다. 건물 밑에 주차해둔 차에 타 뒷자석에 아무렇게나 장비를 던졌다. 오늘따라 마음이 급했다.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공포감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처음에는 이 공포감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감이 오지 않았다. 윤기는 운전을 하며 한 손으로 제 머리를 쥐어뜯었다. 제 직업에 있어서 쓸모 없는 감정들이었다.
제 집 창고에 대충 차를 주차해놓고 누군가에게 쫓기듯 집 안으로 들어왔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거실 구석에 있는 선인장이 눈에 띄었다. 선인장을 보자마자 올라오는 구토감에 입을 틀어막고 화장실로 뛰쳐갔다. 거의 화장실 바닥에 쓰러지듯 주저 앉아 변기를 부여잡고 구역질 했다. 먹은 것이 없어 신물만 계속 게워냈다. 변기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윤기는 그제서야 자신이 느꼈던 공포감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미련이었다. 미련은 사람을 쫓기게 만들고, 불안감을 만들었다. 전에는 한 적 없던 만약이라는 가설을 수도 없이 만들어 그 함정에 헤어나올 수 없게 만들었다. 누군가에게 들켜서 갑자기 죽으면? 잡히면? 나는 더 이상 그를 볼 수가 없는데. 지켜야 할 무언가, 보고 싶은 무언가, 죽지 말아야 할 이유가 생겨버리자 전에 없던 공포감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갑자기 제 존재가 원망스러워졌다. 여태까지 한 번도 이런 적 없었는데, 처음으로 후회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절대 그럴 일 없을거라 생각했는데 이런식으로 제 존재의 이유에 대해 큰 자멸감을 느낄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윤기는 또 한 번 몰려오는 구토감에 헛구역질을 했다. 속에 응어리진 미련을 없애고 싶었다. 그것을 남겨버리면 결국 아플 사람은 자신이었다.
어둠 속에서 빛을 동경했다. 철저히 어둠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무의식의 걸음 끝은 빛이었다. 그렇게 제 속에 남아 있던 동경은 자신을 꽃집으로 이끌었던 것 같다고, 윤기는 생각했다.
매일 그 곳을 들리면서, 윤기는 자신의 본질을 잊었었다. 그만큼 그의 빛은 제 눈을 멀게 했다. 빛만 쫓아가는 나방처럼 앞뒤없이 그에게 홀린듯 따라다녔다. 막연히 좋았다. 좋다라는 감정이 무엇인지 제대로 모르겠지만 아마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이런 느낌은 아닐까. 행복을 느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아마 행복이라는 말에 정의를 내린다면 그와 함께 있는 그 순간이 아닐까. 매 번 그런 생각을 해왔다. 하지만 이제는 본인을 자각해야 할 때였다. 자신과 그는 절대 어울리지 않았다.
문 닫을 준비를 하고 있던 지민은 가게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그를 보자마자 달려가 문을 열어주었다. 거의 3주 만이었다.
오랜만이에요. 잘 지냈어요?
왜 이때까지 오지 않았냐고 투정 부리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안부 인사를 건넸다. 그는 지민을 가만히 바라만 봤다. 아, 들어오세요. 지민이 살짝 몸을 틀었지만 윤기는 고개만 저었다. 지민은 그제서야 그가 평소와는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문을 살짝 닫았다. 지민이 밖으로 나왔다.
미안해요. 그의 목소리가 낮게 잠겨 있었다. 앞으로 매일 오면 용서해줄게요. 지민의 발랄한 목소리가 귓가에 스치자 윤기도 살풋 웃었다. 표정이 많이 안좋아 보였는데 이렇게 웃는 모습을 보자 내심 안심이 되어, 지민도 따라 미소를 지었다.
무슨 일 있어요?
지민이 물었다. 윤기는 제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것을 느꼈다. 그의 앞에서는 어떻게 해도 감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윤기에게 감정을 드러내고 표정을 숨기지 못한다는 것은 치명적인 일이었다. 지민은 그런 사람이었다. 이 서툰 마음 하나 숨기지도 못할 정도로, 아무것도 못하게 만들었다.
많이 안좋아 보여요.
지민이 손을 들어 천천히 윤기의 볼을 감쌌다. 작지만 단단하고 따스한 그의 감촉이 보드라운 뺨에 온전히 닿았다. 윤기는 그의 손을 잡아 천천히 내렸다. 지민은 남아있던 웃음기를 싹 지우고 윤기를 쳐다봤다. 윤기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지민은 순간 안좋은 예감이 들었다. 무어라 설명할 수 없지만 묘하게 흐르는 분위기와 어딘가 미묘하게 다른 윤기가 지민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지민은 그 알 수 없는 불안감을 지우기 위해 입꼬리를 올렸지만 어색하게 올라간 입꼬리와 잔뜩 굳은 얼굴근육은 오히려 그것을 드러내는 꼴이 되었다.
윤기는 잡고 있던 손을 살짝 놓았다. 윤기가 손을 놓자마자 그의 온기를 다 뺏어가는 차가운 공기에 지민은 흠칫 놀랐다. 윤기는 지민을 바라봤다. 이마, 눈, 코, 입, 전체적인 얼굴, 표정, 그리고 다시 눈. 그의 하나 하나를 조각하는 심정으로, 절대 잊지 않기 위해, 자세히 바라봤다. 지민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그 흔들리는 눈동자에 불안함이 잔뜩 묻어나왔다. 순간 속에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훅 올라오는 느낌에 윤기는 입을 꾹 다물었다. 가슴께가 답답하니 아프고 목구멍이 뜨거워졌다. 피는 아니지만 피가 터져나오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지민씨. 윤기는 그 모든 것들을 애써 넘기며 입을 열였다.
그거 알아요?
......
지민씨는 민윤기를 존재하게 했어요. 존재의 이유를 만들어줬어요.
... 윤기씨.
그래서 난 더 그 쪽이랑 있을 수 없어요. 제 욕심이 누군가를 해하면 안되는 거잖아요.
윤기씨 지금 무슨 말을 하는거예요.
저에게 너무 과분한 욕심이었요. 미안해요, 잠시나마 그대를 욕심부려서.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냐구요.
지민은 다급히 그의 손목을 잡았다. 윤기는 흠칫 놀랐지만 이내 차분한 표정으로 다른 손으로 그의 손을 덮어 잡았다. 윤기가 손에 힘을 주자 지민의 손이 윤기의 손목에서 쉽게 떨어졌다. 지민의 두 눈동자가 혼란으로 요동쳤다. 제 손등을 덮은 그의 손은 따뜻하지만 그가 뱉는 말은 어딘가 모르게 차가웠다. 이대로 바로 뒤돌아 영영 안 볼 사람처럼 냉정했다.
욕심이라뇨. 저 그렇게 대단한 사람 아니에요. 저도 윤기씨를 욕심부렸어요. 저도 당신이 그만큼 필요했다고요. 이러지마요. 갑자기 이러면... 안되는 거잖아요...
지민이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예의 지민처럼 언제나 단정하기만 할 줄 알았던 그의 말 끝이 형편없이 갈라지며 맥없이 끊겼다. 잘게 흔들리는 그의 목소리를 들은 윤기의 얼굴이 아프게 일그러졌다. 지민씨 난... 윤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지민이 확 달려들어 그의 어깨 부근을 꽉 쥐었다. 윤기가 입고 있는 티가 지민의 손 안에서 구겨졌다. 그의 힘에 윤기가 몇 걸음 뒤로 밀려났다. 윤기는 그의 어깨를 살짝 감싸안았다. 그런 작은 움직임 하나에도 지민은 울컥울컥 울음이 치밀어 올랐다. 제 몸에 닿은 그의 손길은 이리도 따뜻하면서, 어찌 그렇게 차가운 말만 하는지 모르겠다.
지민은 갑자기 손가락을 들어 제 눈 밑을 살짝 훔치는 윤기의 행동에 너무 놀라 입만 벙긋거렸다. 눈물에 잔뜩 젖은 커다란 눈이 자신을 살짝 올려다 보고 있었다. 윤기는 다시 한 번 더 엄지로 그의 눈 밑을 훔쳤다.
울지 마요.
윤기가 그 말을 하고 나서야 지민은 자신이 울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나 때문에 울지 마요. 저는 지민씨가 기꺼이 눈물을 흘릴만큼 좋은 사람이 아니에요.
왜그래요. 무슨 일 있는 거 맞잖아요. 아니면 갑자기 이럴리 없잖아요!
미안해요.
윤기는 단호히 그의 손을 내쳤다. 허망하게 툭 떨어지는 제 팔에 지민은 주저없이 눈물을 죽죽 쏟아냈다.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윤기는 표정변화 없었다. 이제 눈물을 닦아주지도 않는다. 그런 그의 표정을 보기 힘들어 지민은 결국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눈물이 손바닥을 적셨다. 차마 속시원히 나오지 못하는 울음이 끅끅거리며 새어나왔다. 숨도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두 눈을 감고, 두 손으로 막아 이제 세상은 껌껌하기만 한 어둠이다. 어둠 속에서 혼자 울었다. 잠깐 어깨를 감싸온 온기가 느껴지지만 그것도 곧 사라졌다. 마지막까지 따뜻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니 울음이 멈추지 않았다. 한참 뒤에 고개를 들었을 때, 그는 없었다.
눈물날 정도로 행복한 시간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누군가 만날 사람이 있다는 것이 기뻤고,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준비를 하는 것이 설레었다. 지민에게로 가는 길은 언제나 밝았고, 하늘은 맑았으며, 날이 좋았다. 지민이 저와 매일 같은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마음이 벅차올라 그 자리에서 눈물을 쏟아낼 뻔 했으며, 그와 오손도손 이야기를 나누며 그와 꼭 어울리는 꽃을 다듬는 것은 하루 중 가장 재밌는 일과였다. 이 모든 일이 고작 3개월 정도 밖에 안되었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그들은 많은 것을 공유했다. 꽃집을 비우면 안되는 지민과 밖을 오랫동안 다니면 안되는 윤기였기 때문에 항상 만나는 장소는 정해져 있었지만 아무렴 상관 없었다. 그 어느 곳이든 둘만 있으면 되었다. 윤기는 그랬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빛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컴컴한 어둠에 순간 숨이 컥 막혔다. 항상 이랬는데. 그를 만나기 전에도, 그를 만나면서도 다를 바 없는 그냥 어두운 방일 뿐인데, 어째서 이렇게 제 숨을 조여오는지 모를 일이었다. 윤기는 이 답답한 방에서 도망치듯 뛰쳐나왔다. 방 보다는 덜하지만 여전히 어두운 거실이 나왔다. 여기도 저기도 다 어둠뿐이었다. 윤기는 근처에 있는 화장실로 다급히 들어갔다. 손을 더듬거리며 불을 켜고 변기 앞에 쓰러지듯 주저 앉았다. 토해낼 것은 없었지만 계속 무언가를 토해낼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저번부터 그랬다. 죄책감에, 미련에, 그리고 그와 헤어져서. 수 많은 이유들을 만들며 먹은 것 없이 계속 속을 게워내기만 했다. 이러다 정말 사람 한 명 죽겠다. 그럼 죽지 뭐, 하다가도 실낱같은 미련에 또 죽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머리 속에서 피어났다. 엉망진창이었다. 안그래도 엉망진창이었던 인생에, 박지민이 뭐라고 이렇게 또 사람 죽지도 못하게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놓나 싶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그를 원망이라도 하고 싶었다. 너 때문에 괜히 희망고문만 한다고, 또 언젠가 우연히 만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이렇게 죽지도 못하고 산다고. 아니면 너도 또한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를 만나고 싶어할까 이렇게 죽지도 못한다고.
옛날에는 삶에 미련이 없었다. 여차하면 자살을 할 생각도 있었다. 그 생각이 극에 달할 때, 아무런 목적도 없이 길을 잃고 방황하며 발 닿는대로 가던 그 곳에 꽃집이 나왔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윤기에게 더 특별한 존재였는지도 모른다. 뭐, 이제와서 그런 것을 추억해봤자 다 어젯밤 꿈 이야기일 뿐이지만. 윤기는 아닌 척 하면서도 미련에 두 발이 묶여 질척거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아주 조금은 후회중이었다.
***
누구는 그를 어거스트라고 불렀고 누구는 그를 D라고 불렀다. 어느 쪽으로 불리든 상관은 없었다. 결국 그들이 부르는 건 아무나 하지 못하는 무언가를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그 한 명일 뿐이었다. 그가 하는 일은 대부분 누군가의 존재를 세상에서 지우는 일이었다. 그 일은 남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쉬웠다. 죄책감이라는 것이 있었다면 힘들겠지만 그에게 있어서 그 일은 그저 의뢰인이 지명한 목표를 제거하는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단순하기 그지 없었다. 그는 그 일을 십년이 넘도록 했었다. 죄책감 따위 남아있을리 없었다.
그는 이 일을 하면서 깨달은 것이 있었다. 지킬 것이 많으면 많아질수록 누군가의 표적이 되기 쉽상이다. 그리고 삶에 미련이 생기게 된다. 지킬 것은 사람과 물질 모든 것을 포함했다. 심지어 이름까지도. 그래서 그는 이름을 버렸다. 어차피 아무도 불러주지 않는 이름은 가치가 없었다. 이유 없는 존재는 없지만, 제 이름은 존재의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버릴 때도 딱히 아쉬움 따위는 없었다.
어쩌다 이 일을 시작했냐 묻는다면 그리 길지는 않은 저의 생을 곰곰히 되짚어보며, 지금 이순간까지 걸어온 그 가시밭을 다시 걸으며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오래도록 생각해야 했다. 사실 이 바닥에서 그가 걸어온 가시밭 따위 궁금해 한 사람도 없었지만. 이 바닥이 그랬다. 각자 제일 밑바닥보다 더 깊은 어딘가의 어둠 속에 파묻혀 살았다고, 모두가 그랬다. 인생이 기구한 이유는 이 바닥의 사람 수만큼 있었다.
요즘 D가 다른데 눈 돌리고 있다던데.
툭 내뱉은 말에 가시처럼 찔렸다. 위험할 정도는 아니지만 피를 볼 말이었다. 그는 눈동자만 살짝 들어 맞은편에 앉아있는 남자를 슬쩍 쳐다봤다. 언제부터 나 신경 썼다고.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남자의 눈썹 한쪽이 삐딱하게 올라갔다. 요즘 이 바닥에서 슬슬 말이 나오고 있어. 남자가 하는 말이 언질인지 협박인지 모르겠다. 그는 아무렴 자신과 상관 없다는 듯이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그런 쪽에 전혀 관심이 없을 줄 알았더니.
당최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네.
그래, 뭐가 됐든 알아서 잘 간수할 일이지.
협박이다. 미묘한 표정 변화 하나 놓치지 않으려는 듯 번득이는 저 눈빛이 뱀처럼 징그럽다. 뭐라 떠들어대든 관심은 없어. 그가 입을 열었다.
철컥.
찰나였다.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남자의 이마에 닿은 총구는 차갑기 그지 없었다. 남자는 태연한 척 하지만 긴장감으로 몸이 뻣뻣하게 굳은 것이 느껴졌다. 그의 입에는 어느새 담배까지 물려 있었다. 실로 신속하고 정확한 움직임이었다. 필요 없는 움직임은 다 빼고 최소한만 움직인다. 그가 민첩하고도 고요히 작업을 할 수 있는 이유기도 했다.
담배를 문 잇새에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총구를 그의 콧대따라 천천히 내렸다. 콧대에서 코 끝으로, 거기서 더 내려 입술을 찍어 누르는 총구에, 남자의 몸은 거의 경직되었다. 그는 다른 한 손으로 담배를 살짝 입에서 빼냈다. 하이얀 연기가 후 나와 남자의 시야를 어지럽혔다. 알싸한 담배향이 코를 찡하게 울렸다. 이봐. 그의 목소리가 목울대에서 나는 듯 낮게 울렸다.
가벼운 입 자랑하고 다니다가 몸이 무거워질지도 모르겠네.
......
바다에 빠져도 헤엄쳐 나오지 못할거라고.
... 지금 협박하는겐가.
협박은 뭔가 얻어낼게 있어야 하는거고. 나는 그냥 알려주는거아.
......
나는 무서울게 없거든.
남자의 목울대가 작게 움직였다. 저러면서 누구를 협박하겠다고. 그는 작게 쯧 혀를 찼다. 남자는 남몰래 침을 삼키면서까지 두려움에 떨고 있으면서, 마지막 자존심은 있는지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하긴, 이 바닥에 발 들였으면 최소한 그 정도의 깡은 있어야지.
남자는 이름을 대면 누구나 아는 대기업의 회장이었다. 원체 권세와 제물에 욕심이 많은 남자였기 때문에 이 바닥에 발을 들인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렇게 뒤로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게 많으니 들러붙는 날파리도 많고, 노리고 있는 하이에나도 많은 것이다. 악착 같이 지키고 묻을게 많은 사람이었다.
남자는 의뢰를 하는 것 뿐만이 아니라 이 바닥에 자신의 영역을 넓히고 싶어했다. 이 곳에서 목적 없이 떠돌기만 하는 그와 같은 사람들을 데리고 갔다. 아무리 욕심이 많아도 그렇지, 여기가 어디라고 발을 들이는 건지. 이 바닥에 있던 몇 사람들은 남자가 하는 것을 탐탁치 않아했다. 아니, 같잖아했다. 사업 하듯이 영역 넓히고 사람 모으면 되는 건 줄 아나. 그 남자와 같은 장사치들은 절대로 이 바닥의 순리를 알 수 없었다.
어쨌든 남자는 그를 데려가고 싶어 했다. 그가 이 바닥에서 얼마나 이름을 날리고 있는지 잘 알았다. 게다가 그는 의뢰를 많이 받았다. 상대가 누구고 목표가 누구든, 의뢰가 들어오면 깔끔히 처리했다. 그만큼 그는 그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민감한 부분이나 기밀한 부분까지 다 알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는 걸어다니는 시한폭탄 같았다. 나라의 최상위 계층 사람들의 정보를 대부분 알고 있었다. 지금 누구에게도 소속되어 있지 않는 그를 데려온다면, 남자는 부든, 권력이든, 지금보다 더 막대한 무언가를 얻을 것은 분명했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자신은 또 혼자가 되었으니. 마음 속에 미련과 후회는 남아 있더라도 제 마음이 닿지는 않으니. 이제는 후회도 버려야 했다. 이럴줄 알면 같이 사진이라도 한 장 찍어둘 걸 그랬나. 사진 한 장이면 평생을 견딜 수 있을텐데.
술을 마셨다. 잊으려고 노력했던 그를 생각지도 못한 사람의 입에서 불쑥 튀어나와 제 머리 속을 헤집어 놓았다. 갑자기 튀어나온 그를 어떻게 다시 잊어야 할지 알 길이 없었다. 답답함에 술을 마셨다. 사실 자신에게 술은 치명적이었다. 술을 한 잔이라도 마시게 되면 경계심이 옅어지고 몸이 둔해진다. 목숨을 담보로 정신을 팔 정도로 술을 마신 건.
발길이 닿는대로 움직인 끝에 도착한 곳은 우습게도 꽃집이었다. 허. 자조적인 비웃음이 절로 새어나왔다. 아무리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쳐봐도 결국 끝은 이 곳이라는 건가. 맞은편에 보이는 꽃집을 하염없이 보았다. 자신과 그 꽃집 사이를 막고 있는 차도가 유일한 차단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차도를 건너면 정말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기분일 것 같았다. 이 악물고 당장이라도 뛰쳐가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여기서 그에게로 가버리면 끝은 안봐도 불 보듯 뻔하다. 그와 자신의 끝은 파멸 뿐이었다.
불은 켜져 있었다. 시간이 몇신데 아직까지 집에 안가고 있어. 시계를 봤다. 12시가 다되어가고 있었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어느새 꽃집 불은 꺼져 있었고 그가 꽃집에서 나오고 있었다. 재빨리 근처에 몸을 숨겼다. 그럼에도 시선은 계속해서 그에게 머물렀다. 그는 셔터를 내리고 자물쇠를 잠군 후에, 천천히 어둠이 내린 길을 걸어갔다. 그가 점점 멀어지고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에게 시선이 머물렀다. 여전해 보였다. 혹시나, 만에 하나 조금이라도 못 지내고 있으면 마음이 아팠을 것 같았다. 잘 지내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자신은 정말 그거면 되었다. 그가 자신을 만나기 전처럼 지내기만 한다면, 아무렴 좋았다. 천천히 차도를 건너 그의 꽃집 앞으로 갔다. 굳게 닫힌 셔터를 주먹을 살짝 쳐봤다. 철컹하는 철문 소리가 들렸다. 그 철문은 이제 다시는 열리지 않을 것처럼 굳건하기만 했다. 이렇게 몰래 찾아오는 것도 너무 범죄자 같나. 인생이 불법인 주제에 그에게만큼은 떳떳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었다. 후. 한숨을 쉬며 철문에 등을 기대었다. 술냄새가 옅게 올라왔다. 이렇게 냄새가 올라올 정도면 어지간히도 마셨네. 사실 얼마나 마셨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고개를 숙였다. 신발코 끝이 보였다.
윤기씨?
그는 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자신을 부른다고 생각하지도 못했다. 그렇게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그는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민이 벙벙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재빨리 기대었던 자세를 바로했다. 여긴 어쩐, 아니... 지민은 차마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목소리에 물기가 가득했다. 울컥함이 목도 다 막은 듯 했다. 후회하는 삶을 산 적이 없었는데 지민을 만난 이후로 후회할 짓이 늘어나고 있다. 내가 왜 술을 먹었지. 아니, 왜 술을 먹고 이 사람을 만나러 온거지. 뒷수습도, 감당도 못할 거면서. 지민을 만나고 난 이후로 자신의 사고회로가 완전히 고장난 것 같았다. 만약 제정신이었다면 이 곳에 찾아오지도 않았겠지.
저 찾아온거죠. 제가 그리웠던 거죠.
아니요.
전 그리웠어요. 매일을 그 쪽 기다리면서 하루를 버텼다고요. 어떻게 아무런 말도 없이 그렇게 사라지고 얼굴 한 번 안 보여줄 수가 있어요.
왜 저를 기다려요.
당신이 나한테 아무것도 이야기 해준게 없으니까!
......
미안하다고만 하고, 영영 떠나버릴 사람처럼 굴었잖아요. 이유도 말해주지 않으면서 욕심 부렸다 그러고. 무슨 욕심인데요. 내가 뭐라고 내가 욕심인건데요. 서로 사랑해서 연애 한다는데 그게 어떻게 욕심이 돼요.
......
왜 그랬어요.
또박또박 말하던 말이 끝에 가서는 잔뜩 흐트러졌다. 그는 그제서야 자신이 지민에게 어떤 말을 했는지 깨달았다. 아니, 어떤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흰색은 검은색이 될 수 있지만 검은색은 흰색이 될 수 없어요.
......
그리고 전 지민씨가 저에게 물들지 않았으면 해요.
윤기씨는 좋은 사람이에요.
아니. 지민씨는 평생 모를거예요, 저를. 그리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으면 해요. 진짜 웃긴 거 알지만, 좋은 사람도 아니면서 지민씨한테는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거든요.
......
헤어져요.
... 진심이에요?
전 항상 지민씨한테 진심이었어요.
거짓말.
......
헤어지자고 말할 때는 그런 표정 지으면서 하는 거 아니에요.
그는 자신이 어떤 표정인지 알지 못했다. 그는 감정을 표정에 드러내는 법을 몰랐다. 아마 지금 제 감정이 표정에 드러난다 해도 어색하게 일그러져 있는 표정일 것이다. 왜 자꾸 나를 떠나려고 하는 거예요.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이미 어둠에 잠식당한 거리는 주황빛 가로등만이 간신히 거리를 비추고 있었다. 아무도 지나가지 않았다. 상가가 늘어선 거리는, 자정이 넘은 시간까지 깨어있지 않는다.
어떤 표정인데요.
그는 간신히 물었다. 후회가... 가득한 표정이요. 지민이 답했다.
괴로운 표정이요.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억지로 하는 표정이요.
......
당신 지금, 울 것 같다고.
......
언제든 돌아와요. 전 항상 이 자리에 있으니까. 헤어진다고 하면 영영 못 볼 것 같으니까, 그냥 안녕이라고 해요.
......
안녕이라고만 하면 언제든 다시 만날 수 있어요.
유혹이란게 이런걸까. 그는 생각 했다. 그를 위하고자 했던 일이 사실은 그를 위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금 무엇을 원하고 있는거지. 그를 위한다는 말이 사실은 내 이기심이었다면. 굳게 다짐했던 마음이 갈대처럼 흔들렸다. 여태까지 방황만 했던 삶에 한번쯤 쉬어갈 곳을 만들어도 괜찮지 않을까. 이 정도는. 그 하나만은.
그가 입을 열었다. 저는.
헤어짐은 누구를 위한 길이었나. 자신이 더 이상 지민의 앞에 서지 않는 것이 지민에게 줄 수 있는 최소한의 도움이었다. 자신은 지민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제 마음마저 지민에게는 부담이라고 생각했었다. 지민은 그 부담마저 기꺼이 받아들였지만, 애초에 많은 것을 숨기고 있는 사람에게 영원한 사랑은 없었다. 그는 이 관계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지민에게는 매우 미안하지만, 자신은 매일 아침 일어나면서, 꽃집으로 향하면서, 지민의 얼굴을 마주보고 이야기를 하면서, 해가 저물어 지민과 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매 번 행복함을 느낌과 동시에 끝을 생각했었다. 그건 어쩔 수 없었다. 십몇년 동안을 죽음을 제일 가까이서 보고 직접 죽음을 가져다 주었으며 자신도 언젠가 죽게 된다면 이런식으로 죽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해왔던 그가, 가장 소중한 사람과의 일상과 영원을 생각할리는 없었다.
계속해서 도망치려고 했다. 언젠가 지민에게 닥칠 어떤 위기에서 온전히 그를 지킬 자신이 없어서, 자신이 안고 있던 수 많은 위험을 그에게 덜어주고 싶지 않아서, 그래서 도망치려고 했었다.
자네는 너무 혼자 있었어. 아는 것이 많아졌지.
......
자네가 전에 협박은 얻는 것이 있어야 한다고 했었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어두컴컴한 창고 안, 지민이 있는 곳만이 불이 켜져 있었다. 너는 이런 암흑 속에서도 빛이었다. 그 차이가 더욱 좌절하게 만들었다. 현실을 자각시키고는 만다. 낡은 헝겊으로 눈이 가려져 있었고 두 손은 등받이 뒤에, 발은 의자다리에 묶여 있었다. 멀리서 봐도 덜덜 떨리는 것이 보였다. 네 주위에 다섯명. 이 이상의 사람은 없는 것 같다. 그는 미묘하게 웃어보였다. 그래봤자 이 어둠 속에서 그의 웃음이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아아, 그랬지. 그가 나직히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 고개를 숙인 채 벌벌 떨고 있던 지민이 고개를 들었다. 눈이 가려져 있었지만 시선이 마주친 느낌이 들었다. 발 끝에서부터 알 수 없는 전율이 머리카락 끝까지 타고 올라왔다. 이런 느낌은 너랑 시선을 마주하지 않으면 느낄 수 없다. 그는 빨리 저 더러운 헝겊을 풀어내고 제대로 마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달만의 재회를 이런식으로 하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아니, 다시 만날거라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그 날 이후로 끝이라고, 애초에 없었던 사람처럼 그렇게 살려고 했었다. 지금까지 잘 버텨왔다고, 어차피 옛날에 자신이 살던 것과 다를 바 없다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다 헛짓이었다. 잘 버텨온게 아니라 그런 척 한 것일 뿐이었다.
권세와 탐욕에 찌든 저 남자가 언젠가 이렇게 할 것이라는 생각은 들었다. 갑자기 자신에 대한 소문에 대해 언급을 했던 것도, 요즘들어 자주 자신을 찾는 것도. 기어코 이 바닥에까지 제대로 손을 뻗어보려는 저 남자의 심보를 모를리 없었다. 그러나 남자가 간과한게 있었다. 자신의 말이라면 모두가 따를 것이라는 오만하기 그지 없는 생각. 결국 이 바닥도 그 소문 무성한 D를 가지기만 하면 모두 제 것이 될 것이라는 생각.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고 이리저리 떠도는 D는 자신의 말을 따를 것이라는 생각.
그는 한 쪽 입꼬리만 올려 비릿하게 웃었다. 명백한 그의 비웃음을 본 남자는 순간 열이 올랐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허허 웃어보였다. 그를 제 편으로 만드는 건 어려운 일일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지민을 납치한 것이다. D가 제 사람을 만들었더라. 그 소문이 이 바닥에 쫙 깔렸었다. 사람 같은 거 안만든다는 D의 굳건한 신념을 단번에 무너뜨린 사람이 누군지 궁금하기도 했고. 남자에게는 지민이 이용가치가 있었다. 결과적으로 D는 이 곳에 왔고, 그에게 있어서 지민이 어떤 존재인지도 대충 확인이 되었다.
어떤 매력적인 여자가 D를 홀렸나 했는데.
......
남자였구먼.
내가 분명 경고했을텐데. 입만 가벼운 줄 알았더니 귀에는 살까지 쪘으니 참 곤란하기 그지 없군.
뭐?
입이 가벼우면 몸이 가라앉는다고.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어디선가 날라온 총알이 창고 창문을 깨고 지민의 근처에 있던 남자들을 정확히 맞추었다. 그들은 억소리 내며 쓰러졌다. 머리를 맞고 쓰러진 그들은 고통을 호소하기도 전에 죽었다. 뭐야! 남자는 당황함과 공포감을 동시에 느끼며 뒷걸음질쳤다. 도저히 이 상황을 이해 할 수 없는 듯한 표정이었다.
아으으... 으으...!! 지민이 작게 앓는 소리가 났다. 두 눈을 가린 헝겊이 젖어 있었다. 볼에서 턱 끝으로 지민의 눈물이 죽죽 흘렀다. 입도 막혀 있어 제대로 울음소리도 못내었다. 의자에 온 몸이 꽁꽁 묶여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그의 처지가 딱했다.
그는 차마 지민을 어루만져줄 정도로 이성이 온전치 못했다. 그는 거침없이 남자에게 다가갔다. 그가 신고 있는 구두가 창고 바닥과 부딪치면서 딱딱 소리가 났다. 남자는 공포감에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계속해서 뒷걸음질쳤다. 하지만 그리 넓지만은 않은 창고에, 결국 벽에 부딪치고 말았다. 남자는 그 자리에 주저 앉으며 그제서야 자신이 어떤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이 바닥에서 D가 그렇게 유명한 이유가 무엇이었으며 왜 아무도 그를 소속시키려 하지 않았는지, 왜 아무도 그를 건들지 않는지.
그는 무표정으로 남자의 이마에 총구를 들이대었다. 지난번과 같은 자세였지만 그 때와 의미하는 바가 달랐다. 이제 더 이상 남자의 표정에서는 그 어떤 자존심도 없었다. 죽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에 남자는 무릎을 꿇어 그의 바짓가랑이를 잡았다.
사, 살려주게. 내가 잘못했네. 한번만 살려주게. 내 다시는 이런 일 없을걸세.
어이.
......
다음 날 아침이 되면 모든 티비 채널에서는 당신에 대한 뉴스가 뜰거야. 티비에서는 모두 바다에서 투신 자살을 했다고 보도하겠지. 당신 저택에서 대량의 우울증 약과 유서가 발견돼. 유서에는 이렇게 적혀있어.
내가 잘못했어! 한번만! 다시는 눈에 띄지 않을테니까!
모든 것이 풍요로웠지만 모든 것이 풍요롭지 않았다.
제발!
그래도 안면이 있는 사이인데 자살이라니 안타깝군. 삼가고인의 명복을 빌지.
안돼!!
총성과 함께 창고 벽에 피가 튀었다. 남자는 그의 바지를 잡고 목숨을 구걸하던 표정 그대로 쓰러졌다. 바닥이 그의 피로 물들어갔다. 끈적한 피는 그의 구두바닥도 적셨다. 비릿한 피냄새가 퍼지기 시작했다. 익숙한 냄새였지만 여전히 역겨웠다. 그는 어지러움에 살짝 몸을 휘청였다. 손에 들린 총이 힘 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흐으... 조용하기만 한 창고에 그제서야 지민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는 작게 새어나오는 그의 울음소리에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홱 돌렸다.
전구 하나의 빛에만 의지해 앉아 있던 지민은 깜깜한 공포심에 어찌할 바 몰랐다. 아까 분명 그리운 목소리를 들었는데. 그의 목소리는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고 종국에는 총소리까지 들렸다. 도무지 그와 어울리지 않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바닥과 구두굽이 닿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자신의 앞에서 멈추었다. 지민은 두려움에 떨던 몸을 멈추었다. 극한 공포심에 숨이 멎는 기분이었다. 제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모르겠다. 지민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비릿한 피냄새가 진동을 했다. 자꾸 헛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다.
그는 피에 쩔은 코트를 천천히 벗었다. 코트는 스르르 바닥에 떨어졌다. 조심스레 반무릎으로 앉아 지민과 시선을 마주했다. 그에게 손을 뻗다가 손에 묻은 피를 보고 움찔 멈추었다. 결국 손을 다시 물렀다. 침을 한 번 삼키었다. 이름을 불러도 될까. 존재 자체가 죄인 자신이, 감히 빛을 불러도 될까.
흐으으... 살려, 살려주세요...
지민의 입에서 거의 속삭이듯이 우는 소리가 났다. 그는 온 몸이 굳어버렸다. 여태까지 수도 없이 들었던 그 말을 지민의 입을 통해서 들으니, 그렇게 고통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이 말이 이렇게 아픈 말이었나.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로 듣기에는 너무 아픈 말이었다. 그는 천천히 두 손을 들어 입을 막고 있는 천을 풀었다. 입이 풀리자 지민의 울음소리가 더 커졌다. 숨을 약간 헐떡이는 것 같기도 했다. 지민씨. 그가 작게 불렀다. 불안에 떨던 몸이 우뚝 멈추었다. 가로막힌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는게 느껴졌다. 그는 다시 한 번 그를 불렀다.
지민씨.
......
지민씨, 미안해요.
지민의 눈에서 또 한 번 눈물이 왈칵 흘렀다. 윤기는 그의 눈물을 닦아주고 싶어도 팔을 뻗을 수 없었다. 그의 손은 누군가의 피로 더럽혀져 있었기 때문에. 내가... 내가 지금... 윤기씨? 지민의 물음에 윤기는 말 없이 뒤로 묶여 있던 지민의 손을 풀었다. 손이 풀리자마자 지민은 그를 확 끌어안았다. 진하게 다가오는 피냄새에 묘하게 윤기 냄새도 섞여있었다. 그런 미묘한 냄새에도 정말 민윤기라는 생각에 안심이 되었다. 자신이 이 곳에 왜, 어떻게 왔는지는 이제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저 그가 다시 제 앞에 왔고, 자신을 구해주었다는게 중요했다. 지민이 제 눈을 가린 헝겊을 풀려고 헝겊에 손을 대자, 그가 결국 지민의 손을 꽉 잡으며 제재했다.
풀지마요.
보고 싶어요.
안돼요.
왜요? 왜 안되는데요. 지금도 당신은 저를 보고 있으면서 왜 나는 당신을 보면 안되는건데요.
지금 내 모습은 너무 추해서 보여주고 싶지 않아요.
윤기씨는 항상 멋있는 사람이에요.
당신은 제 진짜 모습을 본 적 없었으니까요. 전 괴물이에요.
아 제발... 지민은 앓는 소리를 내며 다른 손으로 더듬더듬 윤기의 볼을 찾아 감쌌다. 익숙한 느낌에 계속해서 눈물이 울컥울컥 쏟아졌다. 괴물이라니. 괴물이라면 이렇게 따스한 온기와 이렇게 다정한 목소리를 가질 수 없다. 지민은 당장이라도 제 눈을 가린 헝겊을 벗어버리고 싶었지만 윤기의 손에 막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그 때 찾아왔었잖아요, 저 보러 온거잖아요. 지민은 울음에 잔뜩 젖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당신도 그리웠던 거잖아! 나랑 같은 마음인 거잖아!
아니.
......
처음에는 그랬는데 지금은 아니야.
...아... 흐으... 윤기..흐... 이러지마요...
지민은 이 곳에서 이런 짓을 당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인생에서 이런 낡은 창고와 납치, 협박이 존재할리 없었다. 이런 역겨운 일에 연루된 연결고리가 유일하다면 그것만 잘라내면 되는 일이었다. 윤기는 더 이상 지민이 이 곳에 더 깊이 연관되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빛이 어둠에 잠식 당하도록 두어서는 안되었다.
내일부터는 전부 잊도록 해요. 오늘 일도, 나를 만났던 모든 날도.
웃기지마요.
어차피 잠깐의 유희였을 뿐이에요. 가벼운 만남 같은 거.
전 아니에요! 당신이 뭘 두려워 하는지 알아! 난 당신이 누구던 상관이 없어, 괴물이어도 좋아! 그러니까 제발 그 말만은 하지 말라고요!
......
잊으라는 말은 하지마요... 당신이 괴물이어도, 어둠이어도 좋으니까...
......
어차피 나한테는 전부 민윤기라고.
제 눈가를 살짝 훔치는 느낌이 들었다. 그가 제 눈물을 닦아준 것이겠지. 이렇게 작은 행동 하나에 다정함이 묻어나오는데 여태까지의 모든 날이 다 가볍고 거짓일리가 없었다. 지민은 확신했다. 그와 저는 분명 같은 마음이었다고. 손을 잡고 나란히 서서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고. 그가 지금 하는 말은 전부 도망치기 위해서 하는 말이라고. 지민은 도망가는 그의 뒷모습만 바라보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그 날, 여느 때와 다름 없는 하루를 보내고 그 이후 그를 볼 수 없었을 때, 기약 없는 기다림을 했을 때, 그리고 밤 늦게 우연히 만났을 때, 다짐했다. 다시는 그를 그렇게 허망하게 보내지 않을 것이라고.
가려진 시야 탓에 예민해진 청각에 그의 한숨소리가 들렸다. 그의 한숨을 듣자 자신도 모르게 몸이 움찔 떨렸다. 이 한숨의 의미는 잘 모르겠지만 지민은 아무렴 상관이 없었다. 그가 여전히 자신을 사랑하고, 그 마음은 자신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나를 용서하지 마요.
용서할 마음 없었다. 그는 평생 제 옆에서 사죄하며 살아야 할 것이었다.
나를 미워해요. 증오하세요. 그리고 잊으세요.
그의 마지막 말을 끝으로 지민은 정신을 잃었다.
***
지민과 윤기는 매일 꽃집에 있는 테이블에 마주보고 앉아서 차를 마시며 가벼운 담소를 나누었다. 전에는 맡은 적 없던 꽃향기가, 이제는 윤기가 올 때마다 그 향이 진해져 향기에 취할 것만 같았다. 아마 사랑에 냄새가 있다면 이렇게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달달해 결국에 취해버리고 마는, 그런 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 지민은 지독한 짝사랑을 생각했다. 윤기가 올 때마다 이상하게 숨이 막히고 열이 오르는게 그저 가벼운 호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린 순간, 지민은 울어버렸다. 아는 것이라고는 그의 이름 밖에 모르는데 어떻게 그런 사람을 마음에 두었는지 제 자신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언제부터였는지도 알 길이 없었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는게 이렇게 무서운 것이었나. 정신차리고 보니 흠뻑 젖다 못해 몸속으로 스며들어와 깊은 곳에 열병까지 만들었다. 이때까지 이런 감정에는 서툴렀던 탓에, 지민은 이 열병을 참을 수 없었다.
그 날도 어김없이 윤기가 찾아오고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나누었다. 딱히 말이 없어도 그저 할 일을 하고 있어도 편안했다. 가끔 윤기와 눈이 마주칠 때면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러면 그도 살풋 웃어주었다. 윤기는 꽃집에 올 때면 지민과 이야기를 하다가 여유롭게 차 한 잔 마시고 꽃집을 둘러보며 하염없이 꽃만 내려다 봤다. 이 아이는 이름이 뭡니까? 꽃말이 뭐에요? 하고 물어볼 때도 있었다. 그럼 지민은 하나하나 설명해주었다. 그는 꽃말을 듣고 살짝 웃을 때도 있었고 슬픈 표정을 지을 때도 있었다. 윤기는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서툴 뿐, 감정이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누구보다 감정이 풍부했다. 그리고 지민은 그런 그의 모습마저도 사랑했다.
이제 가야겠어요.
윤기가 미적미적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새 밖은 깜깜해졌다. 시계를 보니 9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지민은 뒤돌아서 문 쪽으로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만 멍하니 바라봤다. 윤기는 내색은 안했지만 안그래도 느릿한 걸음에 더욱 미적거리는 모습을 보니, 그도 아쉬워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아니면 정말 아쉬워 했으면 하는 저의 착각일까.
지민은 후다닥 뛰어가 윤기의 손목을 확 잡았다. 그가 깜짝 놀라 동그래진 눈으로 뒤돌아봤다. 지민 역시 생각 없이 반사적으로 나온 행동에 놀랐다. 둘 다 놀라 동그래진 눈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아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그만. 지민은 불에 덴 사람처럼 그의 손목을 잡았던 손을 화들짝 뗐다. 그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지민의 얼굴에 열이 확 올랐다. 그의 미소에는 아직 면역이 안되어있다.
갈게요.
좋아해요.
네?
네엨?!
지민은 자신도 모르게 툭 튀어나온 본심에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홱 뒤돌았다. 지민은 눈가에 주름이 질 정도로 눈을 세게 꽉 감았다. 미쳤다. 상대는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쪽팔림사가 있다면 바로 이 때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지민은 딱 죽고싶은 심정이었다. 빨리 무어라 말을 해야할텐데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장난이었다거나 미안하다는 말은 절대로 하고 싶지 않았다. 장난이라고 하기에는 자신의 진심을 부정하는 꼴이었다. 지민은 혹시나 이 사랑이 돌팔매질 당할 것이라 해도 제 마음을 거짓으로 치부하거나 부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미안하다고 하면 제 사랑이 너무 초라해진다. 설사 짝사랑이라고 해도 제 사랑을 스스로 초라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지민은 입을 꽉 막았던 두 손을 스르르 내렸다. 두 팔이 힘없이 떨어졌다. 천천히 눈을 떴다. 그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의 덤덤함은 익숙했지만 그의 침묵은 어색했다. 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지민이 입을 열었다.
이런식으로 제 마음을 표현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꼭 무언가를 탓해야 한다면 조급했던 제 마음을 탓해야겠죠.
......
좋아해요.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요.
......
무슨 말이라도 해주면 안돼요? 어떤 말이라도 좋으니까.
다시 두 눈을 감았다. 무슨 말이라도 들을 준비가 되었다. 무겁기만 했던 제 마음을 그에게 내밀었으니 그 무게를 받아줄지 말지 결정하는 것은 그의 몫이다. 받아준다면 더할나위 없이 기쁘겠지만 거절해도 괜찮았다. 누군가에게 제 마음을 보여줬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좋아해요. 단 한마디 안에 제 마음을 담기에는 소박하기 그지 없는 표현이었지만, 이 말만큼 마음을 표현할 단어도 없다고 생각했다. 지민과 딱 어울리는 담백한 말이었다.
뒤에서 뻗어온 손이 제 손을 덮어잡았다. 그대로 제 몸을 돌려세웠다. 뒤돌자 알 수 없는 표정의 그가 보였다. 지민은 떨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오늘따라 더더욱 그의 표정을 알 수 없었다. 윤기는 한참 후에 입을 열었다. 다시 말해줘요. 적당히 낮은 그의 목소리에 지민은 홀리듯이 툭 내뱉었다. 좋아해요. 윤기의 입술이 지민의 입술에 닿은 것은 순식간이었다. 지민의 마지막 말이 윤기의 입 속으로 먹혔다. 지민의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지민은 바로 윤기의 어깨에 손을 둘렀다. 윤기는 좀 더 고개를 틀어 더욱 깊숙히 키스했다. 머리가 띵할만큼 아찔했다. 뭐에 중독된 사람처럼 거침없이 탐했다. 자꾸 뒤로 밀리는 지민에, 윤기는 다른 한 손으로 그의 허리를 감싸안았다. 지민의 엉덩이에 테이블이 턱 닿았다. 지민은 자연스레 테이블에 살짝 걸터앉았다. 지민의 손목을 잡고 있던 손이 점점 올라가 그의 볼을 감싸잡았다. 커다란 그의 손이 지민의 얼굴 한쪽을 다 가렸다. 정신없이 서로를 탐하고 나서야 윤기는 살짝 입술을 떼었다. 거친 숨이 느껴지는 거리에서 그는 엄지로 천천히 지민의 볼을 쓸었다. 따스하고 말랑말랑한 그의 볼이 손바닥 전체에 온전히 느껴졌다. 정말 유치하기 짝이 없지만 이 말 밖에 표현이 안되었다. 온 몸에 전율이 흘렀고 아찔함에 머릿속이 새하얘진.
첫키스였다.
눈을 떴다. 낯선 천장에 상황파악하려 애쓰다, 병실인 것을 알게되자 눈물이 죽죽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입을 꾹 다물어도 앓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밧줄로 묶여있었던 손목과 발목이 시큰시큰거렸다. 주위를 둘러봐도 그를 짐작할만한 것이 없었다. 침대에서 뛰쳐나가려고 했지만 그마저도 간호사의 제지에 일어서지 못했다. 누가 자신을 데려왔냐고, 여기 온 사람 없었냐고, 아무리 물어도 대답해주지 않았다. 서랍에 올려져있던 핸드폰을 보자마자 급하게 주소록을 뒤져보다 번호를 교환한 적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결국 몸을 엎드려 펑펑 울었다.
그와의 첫키스 때를 꿈꿨다. 잊으라고 했으면서 이렇게 꿈으로 나오면 어떡하나. 들어올 때는 들어온지도 눈치 못채게 스며 들어왔으면서 나갈 때는 어찌 그리 무심하게 돌아가버리는지. 난 자리는 아직도 허한데. 새로 들어찰 때까지만이라도 있어주지. 저번처럼 이렇게 갑자기 사라져 버리면, 또 언젠가 돌아올까 기대만 하게 되잖아.
모든 것이 꿈 같았다. 어디서부터가 꿈이고 어디서부터가 현실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지금 이건 꿈이어야 했다. 다시 눈을 감았다 뜨면 그가 앞에 있어야 했다. 아니면 그와 만난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이 모든 것이 꿈이어야 했다. 애초에 그를 만난 것 조차 꿈이었다고. 누군가 나를 온전히 사랑해주는 그런 행복하고 달콤한 꿈을 꿨다고, 그래서 그는 현실에서 만날 수 없는 사람이어야 했다. 차라리 그렇게 생각하는게 마음 편했다. 어딘가 계속 뻐근하고, 그렇다고 누군가 덜어줄 수도 없는 이 고통을 계속 느끼고 싶지는 않았다.
별 다를 거 없는 하루였다. 꽃은 여전히 제 색과 제 향기를 뿜어내었고 하늘은 푸르다 못해 투명했다. 하이얀 구름이 몇조각 유유히 떠다녔다. 햇살은 적당히 따스할만큼 내리쬐었다. 구석에 있는 테이블에 앉아, 얼마 전 들어온 의뢰를 구상했다. 평화로운 나날이었다.
딸랑딸랑. 문에 매달아 놓았던 종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지민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입구쪽을 바라보았다. 제 친구가 한 손에 들린 봉지를 달랑달랑 흔들며 꽃집 안으로 들어왔다. 지민은 살풋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친구는 자연스럽게 테이블에 앉아 봉지를 열었다. 안에는 금방 만든 듯 따끈따끈한 떡볶이와 순대가 들어있었다. 마침 배고팠는데. 지민은 히힣 웃으며 묶인 비닐을 풀었다. 안에 갇혀 있던 김이 퍼져나가면서 냄새도 같이 올라왔다.
너 배고플 줄 알고 엉아가 떡볶이 싸왔지.
엉아는 무슨.
뭐 하고 있었어?
의뢰 들어온 거. 뮤비에 쓸 소품 만들어야해.
오, 무슨 뮤비? 아이돌?
네가 알아서 뭐하게.
지민은 들이대는 친구의 얼굴을 살짝 밀어내고 젓가락을 들었다. 오 맛있다 윤아. 지민이 떡볶이를 먹으면서 하는 말에 친구는 그치? 가볍게 대꾸하면서 그의 얼굴을 힐끗 살폈다. 지민은 먹는 것에 집중을 하는터라 친구의 시선을 눈치 채지 못했다. 오늘은 기분이 좀 어때? 친구의 물음에 지민이 눈만 살짝 치켜 떠 그를 바라봤다.
음... 그냥 그런데. 별 다를 거 없어.
그래?
야. 나 진짜 괜찮아.
그래, 괜찮아야지. 벌써 1년이 지났는데.
1년. 지민은 천천히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1년이면 흉터가 남을지언정 상처가 여전히 아플 시기는 아니었다. 제 속에 크게 홈을 파내어 넘치도록 마음을 채워넣었던 그가 호수를 만들어 놓고 떠났다. 마음을 계속 채워넣어주지 못해 호수는 점점 말라갔다. 다 말라서 바닥이 드러나도록 지민은 생경히 느껴지는 아픔에 몸부림을 쳤었다. 물이 다 말라도 호수의 흔적을 없앨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지민은, 여전히 그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문득 그가 머릿속에서 툭 튀어나온다고 해서 지민은 더 이상 옛날처럼 아프거나 슬프지 않았다. 1년이 지난 지금 사랑하고 있는 그 사람을 서서히 추억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친구는 처음에 그런 지민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애초에 지민이 이렇게 괴로워 할 정도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도 몰랐었다. 지민이 지난 1년간 어떻게 버텨왔는지를 생각하면 이름 밖에 모르는 그 남자를 길거리에 눞여놓고 흠씬 패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처음 만나고 헤어지기까지 고작 몇개월 밖에 안됐다면서, 그러면서 그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이름 밖에 모른다니. 이름 밖에 모르는 그 남자에게 푹 빠진 지민도 지민이지만, 남자도 어지간히 쓰레기라고 생각했다. 언제 한 번 이렇게 말했다가 지민의 손바닥으로 등짝을 얻어맞았다. 네가 그렇게 표현할 사람 아니야. 지민의 말이 진심으로 어이 없었다. 그 몇개월 간 얼마나 많은 감정의 교류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이후로 지민의 삶을 생각해보면 그 남자가 미울 수 밖에 없었다. 동시에 신기하기도 했다. 사람이 저렇게까지 사랑할 수 있구나. 그런 사랑이 정말로 존재하긴 하구나.
너한텐 정말로 고맙게 생각해.
알면 나한테 잘해라 진짜. 너 잘나간다고 나 쌩까지 말고.
안 그래.
웃으면서 대답하는 지민에, 친구도 그제서야 안심이 되는지 웃어보였다.
처음 지민에게 전화를 받고 병원에 간 날, 그대로 쓰러질 뻔 했다. 얼굴에 핏기가 하나도 없던 지민은 머리를 산발로 한 채 병실 물건을 다 집어던지며 악을 지르고 있었다. 평소에 큰 소리를 낸 적도 없고 항상 조용조용 다정하고 밝기만 했던 지민에게서 절대로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 꿈에서 깨야 한다고 악을 지르다가 그대로 주저앉아 오열하다가 비틀거리며 일어나 천천히 침대로 걸어갔다. 그 걸음이 금방이라도 쓰러질듯 위태로워 친구가 바로 그를 부축해주었다. 지민에게서 전화를 받을 때까지만 해도 지민이 이토록 심각할 것이라는 생각이 없었다. 지민은 평소보다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병원에 입원했다고만 했다. 친구는 맹장 같은 것을 생각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병문안을 왔을 뿐이었다. 지민이 이렇게 반 미쳐서 난동을 부리고 있을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지민이 퇴원을 한 뒤로, 꽃집은 열리지 않았다. 문 앞에 일신상의 이유로 잠시 휴업한다는 메모만 붙여졌다. 친구는 시간 날 때마다 지민을 보러갔다. 지민은 자기 괜찮다고, 그냥 좀 쉬고 싶다고, 마음을 정리하려고 좀 긴 휴식을 가지는 것 뿐이라고 했지만 친구가 보기에는 지민이 너무 위태로웠다. 정말 금방이라도 어디론가 떠날 사람 같았다. 엄한 짓 할 애가 아니란 것을 알면서도, 그 때의 지민은 그 정도로 위태로워 보였다. 지민의 집을 갈 때마다 엉망이 되어 있는 집을 보며 대신 치워준 적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거실에는 노트와 다 쓴 펜이 굴러다녔다. 왜 이렇게 노트가 많냐고 물어보면 지민은 정리하는 중이라고만 했다. 굳이 보려고 한 적은 없지만 치우면서 우연히 시선이 닿은 적은 있었다. 누군가를 추억하고 그리워 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나 참, 너를 그렇게 만들어놓고 떠났는데 그냥 그립기만 하냐. 나는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그 사람이 원망스럽기만 한데. 투덜대면서도 노트를 잘 정리에 테이블에 가지런히 올려놓았었다.
우열곡절이 많았다. 잘 지내다가도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릴 때도 있었고 술에 취하면 그의 이름을 목터져라 부르짖을 때도 있었다. 어느 날은 하루종일 이불 속에서 오열을 할 때도 있었고, 기분 좋아 보이다가도 갑자기 우울해 하기도 했었다. 갑자기 뻥 뚫려버린 어느 한 곳을 채우기 위해, 지민은 그렇게 많은 방황을 했었다.
그럼 이번에 또 한동안 보기 힘들겠네.
본격적으로 일 들어가면.
오오, 진짜 잘나가 박지민?
나 원래 그랬어, 인마.
이번 작업 마무리 되면 한 턱 쏴라.
알았어.
그럼 나 간다. 친구가 나갈 채비를 하자 지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나와도 돼. 그의 말에 지민은 다시 자리에 앉아 남은 순대를 입 안에 앙 집어넣고 바이바이 손을 흔들었다.
오후가 되니 햇빛이 더욱 따사롭게 내리쬐었다. 한창 구상에 열을 올리던 지민은 문득 든 생각에 문쪽을 바라봤다. 오늘 밖에 있는 아이들한테 물을 줄까. 멍한 표정으로 바깥을 보던 지민은 갑자기 속이 시큰한 느낌에 손으로 제 가슴을 퉁퉁 쳤다. 어쩐지 익숙하다. 이렇게 날이 좋고, 이 곳은 평화롭고, 어쩐지 행운이 있을 것 같은 오늘, 지금 이 시간, 그와 처음 만났을 때와 겹쳐보였다.
이런식으로 불쑥불쑥 그와의 일상이 튀어나와 버릴 때면 조금 힘들었다. 갑작스럽게 마주한 기억은 미처 생각지도 못한 때에 나오는거라 대처도 못했다. 1년이 지나도 실연에 완전히 면역이 생긴 건 아닌가보다. 물 줘야지. 물뿌리개를 챙기고 밖으로 나가려던 지민은 또 한번 겹쳐지는 그 때의 기억에 우뚝 몸을 멈추었다. 문 밖에 아른거리던 누군가의 형체. 처음 만났던 그 날과 똑같은.
이건 기억이 아니다. 갑자기 떠오른 그와의 추억에 잠겨 헛것을 보는 것이 아니다. 물뿌리개를 집어던지고 허겁지겁 밖으로 뛰쳐나갔다. 문을 세게 열면서 달아두었던 종이 거칠게 울렸다. 지민은 좌우 고개를 돌려 그를 찾았다. 아무도 없었다. 양 옆으로 길게 이어져 있는 도로는 안에서 봤던 것처럼 평화롭기만 했다. 아닌데. 꿈이 아닌데. 잘못 본 것도 아니다. 분명히, 그건 분명히.
조급함에 고개만 홱홱 돌리던 지민은 바로 앞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선인장을 발견했다. 지민은 그 자리에 주저 앉아버렸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눈물이 흘렀다. 어떤 감정에 의한 눈물인지 자신도 알지 못했다. 선인장은 여전히 파릇파릇했고, 몸집이 커져 있었다. 선인장의 머리 위에는 앙증맞은 꽃이 피어있었다.
꼭 저를 닮은, 노랗고 귀여운 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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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우여곡절이 많은 글.
이런 전개, 이런 결말을
생각하지 않았는데 어쨌든
올릴 수 있어서 다행.
지우려다가 그냥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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