뷔민 여름, 어느 날 上
짧한 차례 장마가 지나고 나니 느닷없이 무더위가 시작되었다. 여름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특히나 이곳의 여름은 그렇다. 장마가 지나자마자 후끈해진 대기열에 숨이 턱턱 막혀온다. 지민은 어느새 턱에 달롱달롱 매달린 땀을 스윽 닦았다. 학교도 짜증 날 정도로 멀리 있다. 자전거로 20분이나 걸린다는게 말이냐 되느냔 말이다. 이 거리 때문에 매일 아침 인생 고민을 한다. 좀 더 자느냐, 마느냐. 5분만 더 잘까, 말까. 결국 매번 침대 밖을 나오고야 말지만.
지민은 자전거 보관소 앞까지 와서야 자전거에서 내려왔다. 자전거를 끌고 보관소에 들어가려던 지민은, 막 보관소에서 나오던 그와 마주쳤다. 한 쪽 어깨에 기방을 걸쳐매고 나오는 그 모습을 만약 여자애들이 봤다면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무음의 환호성을 질렀을 것이다. 솔직히 남자가 봐도 멋있기는 했다, 그는.
그는 다른 한 손을 들어 가볍게 인사했다. 지민은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받고 자전거를 천천히 끌고 들어갔다. 지민아. 그를 지나치면서 들린 그 이름이 순간 낯설게 들렸다. 지민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그는 완전히 자신 쪽으로 몸을 돌린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민은 작년의 어느 날을 후회했다. 본명을 가르쳐 달라는 그의 말에 마냥 기뻐서 가르쳐 줬었다. 제 생각이 짧았다. 그가 이렇게 제 이름이 닳도록 부를 줄 알았으면 절대 가르쳐 주지 않았을 것이다. 지민아. 그가 다시 제 이름을 불렀다. 자전거를 잡고 있는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왜. 작게 대답했다.
1대1 해줘.
[뭐래.]
나 연습 시켜줘.
다른 선수 있잖아.
너 내 매니저잖아. 선수 연습도 못시켜줘?
우리팀 매니저지, 네 매니저가 아니라.
지민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돌리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자전거를 적당한 곳에 세우고 고개를 돌려보니 그는 가고 없었다. 그제서야 폐 한구석에 꾹꾹 눌러두고 있던 숨을 한꺼번에 몰아 내쉬었다. 숨을 쉰다고 해서 제 감정이 드러나는 것도 아닌데 어째선지 그의 앞에만 서면 감정이 툭툭 튀어나올까봐 숨까지 죽이게 된다. 지민은 잘게 떨리는 손을 다른 손으로 꽉 잡았다. 심장이 제 주제도 모르고 미친듯이 날뛰다가 손으로까지 그 떨림을 옮겼나보다. 지민은 이렇게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은 느낌을 받은 것이 너무 오랜만이었다. 이 떨림의 주체는 조금 달랐지만 그 기분은 그리 다르지 않았다. 운동을 했을 때,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귓가에 웅웅거리는 그 느낌. 제 팀이 우승 했을 때, 자신의 활약으로 이겼을 때 심장이 터질 정도로 벅차오르는 감정. 유망주로 시선을 받았을 때의 그 설렘, 두근거림. 더 이상 느낄 수 없는 감정일 줄 알았는데 갑자기 파도처럼 밀려온 그것들을 미처 피하지 못하고 온 몸으로 맞아버렸다. 흠뻑 젖은 몸을 어찌할 바 몰라 안절부절 못했었다. 당혹스러웠다. 운동이었을 때는 그 감정이 마냥 좋기만 했는데 사람으로 바뀌니 여러 생각에 머리가 복잡하기만 했다.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고 싶었다. 어떡해요, 제가 제 친구한테 설렘을 느끼고 있어요. 처음 운동을 했을 때 처럼,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어요. 그를 동경 하는건지, 그를 부러워 하는건지, 그를 정말로 좋아하고 있는건지,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이 감정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 거죠.
수 많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 짜내보아도 이렇다 할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제 주인 마음 몰라주고 요동치는 그 마음을 감추고 산지, 1년이 넘었다.
교실로 들어가니 그가 먼저 들어와 있었다. 지민은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지민이 자리에 앉자 그는 책상에 팔을 올려 고개를 괸 채 지민을 가만히 바라봤다. 가끔 저 애가 저렇게 볼 때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진심으로 고민스러울 때가 있다. 굳이 말하자면, 솔직히 부담스러웠다.
夕君、おはよう!자신에게 인사해오는 학급 친구들의 인사를 받은 지민은 책을 폈다.
유우.
옆에서 그가 불렀다. 못 들은 척 했다.
유우.
다시 불렀다. 못 들은 척 했다.
지민아.
못 들은 척 할 수 없었다.
고개를 홱 돌려 원망스러운 눈길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는 뭐가 그리 신나는지 베실베실 웃기만 했다. 그 웃음이 못내 짜증이 났다. 사람 놀리는 것만 같은 웃음이었다. 실상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괜히 얄밉게 느껴졌다.
[그렇게 부르지 말랬지.]
[이름은 부르라고 있는 건데.]
[정말 마음에 안든다, 네 입에서 그 이름이 나오는게.]
그는 서운한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지민은 무심히 고개를 돌려 다시 책으로 시선을 내리고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다른 친구들에 비해 자신은 턱없이 부족했다. 3년동안 운동에 모든 것을 바쳤으니, 이제는 그 이상을 공부에 바쳐야 했다. 그래야 다른 친구들과 그나마 선을 맞출 수 있었다.
2학년 새학기 첫 날, 이 반에 들어오자마자 보인 것은 그였다.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생각한 것이 세상은 불공평하다 였다. 자신은 3년의 시간을 잃고 1년 동안 죽도록 공부해서 올라온 진학반이었다. 운동을 버리고 얻은 것이었다. 그런데 그는 주전에다가 공부까지 잘한다. 차라리 뭐 하나 덜떨어진 데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얼굴도 잘생기고 성격도 좋으니 참 불공평하다는 말이 그냥 나올 수 밖에 없다.
그도 자신을 발견하고 환하게 웃으며 손짓했다. 그 손짓을 마다할 정도로 매정한 성격은 아니기에 그저 그의 손짓에 이끌려 옆자리에 앉았다. 담임은 자리에 연연하시는 분이 아니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처음 앉은 자리가 1년 동안 앉을 자리가 되었다. 그렇게 지금까지 그의 옆에 앉아 있는 것이다.
유우!
크게 들리는 제 이름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렸다. 그의 표정에 잔뜩 심통이 어려있었다. 할 말 없어 멋쩍은 미소만 지었다. [내 말 못들었지.] 그의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시간 있냐고.] 그의 물음에 오늘 할 일을 잠시 생각해본다. 딱히 없다. 오늘은 평일 중 가장 한가한 날이기 때문이다. 고개를 저으니 그의 표정이 한층 산뜻해졌다.
[그럼 나 연습 좀 도와줘.]
[그건 안돼.]
[아, 왜!]
그가 소리쳐도 마음을 되돌릴 생각은 없다. [알잖아, 나 하루라도 쉬면 안돼. 연습해야 한단 말이야.] 그의 찡찡거림에도 어쩔 수 없었다. 그의 마음은 제가 제일 잘 알았다. 그는 자신과 닮은 점이 너무나 많았다. 그래서 안된다. 자신과 똑같은 길을 가서는 안된다.
연습이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신의 한계를 몰아부치는 연습은 좋을게 없었다. 그러다 어디 몸 하나 잘못 되기라도 하면 스포츠 인생 끝나는 것이다. 지민은 다시는 그런 일을 보고 싶지 않았다. [매니저로써 하는 말이야, 무조건 많이 한다고 해서 좋은 거 아니야.] 지민의 말에 그는 결국 입을 다물었다. 유우. 그가 다시 제 이름을 불렀다. 지민은 말 없이 그를 쳐다보았다.
[너랑 농구가 하고 싶은거야, 나는.]
샤프를 쥔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목구멍에 묵직한 무언가가 턱 걸린듯 먹먹했다. 그를 처음 봤을 때부터 느낀거지만 그는 언제나 이해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도무지 그의 생각을 따라갈 수 없었다. 항상 사람 마음 복잡하게 만들고, 괜히 생각하게 만들고, 혼자 삽질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지금 그가 뱉은 말도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다. 아니, 이미 자신의 감정이 평범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다. 어쩌면 별 생각 없이 뱉은 말임에도, 그 말에 의미를 부여하고 무게를 싣는 것은 결국 자신이었다. 허. 지민은 목구멍에 콱 막힌 무언가를 빼내는 듯 숨을 뱉었다. 류. 그를 불렀다. 그의 눈이 순간 빛났던 것은 제 착각인가. 괜히 침을 한 번 삼키었다.
[나는 더 이상 농구를 할 수 없어.]
이 말의 의미를 그는 알아차릴까.
그는 인기가 많았다. 뭐 그럴만한 이유는 있었다. 농구로 유명한 학교에 1학년 때부터 주전으로 들어갈 정도로 운동을 잘 하는 데다가 공부도 잘한다. 얼굴도 잘생겼다. 성격도 뭐 좋다. 친화력도 엄청나고 적당히 재밌고 다정하고 안좋아할 이유가 없다. 아마 지금까지 받은 고백만 몇십번은 될 것이다. 그런 애는 만화 속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실제로도 있구나 싶었다. 사실 그런 애가 자신에게 계속 붙어오는 이유가 궁금했다. 지민은 자신이 생각하기에 도저히 그와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친구도 그렇게 많으면서 굳이 일부러 제 이름을 부르고 자신에게 다가와 팔짱을 끼면서까지 친한 척 할 이유는 없었다. 농구부 매니저라서 그런가. 하지만 그게 이유라기에는 뭔가 부족했다. 같은 한국인이라서? 차라리 그게 더 맞는 이유일 수도 있다.
어쨌든 지민은 그와의 관계를 딱 잘라 정의하기 힘들었다. 친구? 남이 보면 친구로 보일 수 있겠지만 지민은 어쩐지 그 친구라는 말이 거슬렸다. 입 안에 굴려지는 그 발음은 마치 처음 조합해 본 단어 마냥 낯설기 짝이 없었다. 이 역시 친구의 감정은 아닌 제 탓인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은 다 내 탓인거구나. 그런 생각만 들었다.
교문을 나서는 자신의 팔을 잡아 돌려세운 것은 그였다. 그의 다른 한 손에는 농구공이 들려 있었다. [놀아줘.] 그가 한마디 툭 내뱉듯 말했다. 지민은 말 없이 그 농구공을 빤히 쳐다보았다. 끔찍한 유혹이었다. 그와 농구공은 자신을 절벽으로 몰아넣을 유혹이었다. 입술을 작게 짓이겼다. 결국 이렇게 된다. 끝을 알면서도 결국 이렇게 끌리게 되고 마는 것이다.
그는 다소 상기된 표정을 문에 열쇠를 꽂아 돌렸다. 체육관 문이 열리고 특유의 냄새가 느껴졌다. 그는 자연스레 안으로 들어가 바로 앞에 가방을 툭 던지듯 내려놓았다. 지민도 천천히 들어와 그의 가방 옆에 제 가방을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어쩐지 떨린다. 여태까지와는 다른 마음으로 들어온 체육관이다. 어제까지는 그저 매니저로써 들어왔다면, 지금은...
탕탕탕 바닥에 닿는 농구공 소리가 넓은 체육관을 가득 채웠다. 일정한 간격으로 닿는 소리가 제 심장을 두드렸다. 그 소리와 더불어 심장 소리도 같이 들리기 시작한다. 쿵쿵쿵 뛰는 소리가 귓가를 울린다. 떨린다. 설렌다. 어느새 코트 안을 밟고 있는 이 순간이, 체육관을 채우고 있는 농구공 소리가, 점점 빨리 뛰기 시작하는 제 심장, 그 소리가.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유우. 그의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셔츠를 팔꿈치께까지 접어 올린 채 어느새 한 손으로 공을 들고 있는 그가 보였다. [해 질때까지만 할까.] 그의 말에 지민은 뭐에 홀린 것처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패스로 받은 공을 바닥에 튕겼다. 바닥에 닿고 맑은 소리를 내며 올라오는 공이 다시 손바닥 가득 닿는 그 느낌이 좋았다. 손바닥에 느껴지는 단단하고도 오돌토돌한 농구공의 느낌이 지금 당장 소리 지르고 싶을 정도로 좋았다. 바닥을 치고 올라오는 농구공을 두 손으로 잡아 바로 훅 뛰어 팔을 뻗었다. 공은 유연하게 포물선을 그리며 그대로 림 안으로 들어갔다. 통통통 바닥에 튕기던 공이 이내 데구르르 굴렀다. 2년이나 쉬었음에도 깔끔한 슛이었다. 체육관은 조용했다. 그가 멍하니 골대만 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지민을 바라봤다. 지민도 멍하니 골대만 바라봤다. 너 진짜 대단하잖아! 그가 환하게 웃으며 지민에게 다가갔다가 순간 당황했다.
지민아, 너 울어?
그렇게 부르지 말랬지.
왜 울어. 울지마.
그가 적잖이 당황하며 안절부절 못하다가 양손으로 지민의 볼을 살짝 감싸 잡고 엄지로 살살 눈물을 닦아냈다. 제 잘못 아닌데도 당황하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에 웃음이 나와 결국 피식 웃어버렸다. 지민의 바람 빠진 웃음소리에 그는 그제서야 조금 안정을 찾았는지 따라 웃으며 그대로 양볼을 눌렀다. 통통한 지민의 입술이 퉁 튀어나왔다. 흐지므. 지민의 말은 들은 척도 안하고 아예 고개를 휙휙 돌리기까지 했다. 지민은 결국 그의 팔을 잡고 내렸다. 태형은 씨익 웃어보이며 저 멀리 굴러간 농구공을 가지러 갔다. 지민은 제 손을 내려다 보다가 눈을 살짝 감고 아까의 그 감각을 되살렸다. 무릎을 살짝 굽히고 몸을 띄우면서, 손을 쭉 뻗으면서, 손아귀에서 자연스럽게 나아간 그 공의 느낌, 공이 깔끔하게 림 안으로 들어가고 출렁이는 네트와 그 소리, 바닥에 닿을 때 울린 그 청아함. 여전히 귀에, 몸에, 여기저기 곳곳에 그 감각이 남아있었다. 슛이 들어갔을 때의 그 짜릿함은 여전했다. 그랬지. 자신은 이 짜릿함이 좋아서 농구를 했었다. 그리고 그 감각은 전혀 바래지 않았다. 기억하고 있던 그대로였다. 왜 울었냐 하면 이유는 그것 밖에 없었다. 너무 좋아서. 너무 좋아서 그대로 가슴 부여잡고 쓰러질 정도로 좋아 죽을 것 같았다.
그는 공을 주워 뒤를 돌았다. 지민을 부르려 했지만 가슴께 셔츠를 꽉 움켜쥔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를 보고 차마 소리내어 부를 수 없었다. 그래서 천천히 다가갔다. 지민의 앞에 섰다. 지민은 천천히 눈을 떴다. 바로 앞에 제 운동화와 운동화 앞코를 맞대고 있는 익숙한 운동화가 보였다. 고개를 들었다. 그가 가만히 자신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가슴께를 움켜쥐었던 손을 내렸다. [어때?] 그가 물었다. 지민은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이러다 정말 죽을 것 같아. 너무 좋아서. 심장이 미친듯이 뛰어. 어쩌지. 나는 많이 녹슬었을 줄 알았는데 하나도 변한게 없었어. 여전히... 너무 좋아.]
[그래? 다행이네. 아직 좋아해서.]
[...류.]
[내 진짜 이름 불러줘.]
... 태형아.
지민은 깊은 숨과 함께 속삭이듯 그의 이름을 뱉었다. 그가 웃었다. 너만 부를 수 있는 이름이야. 그의 말에 지민도 결국 따라 웃어버렸다.
1대1 농구를 했다. 사실 지민은 계속 농구를 해왔던 그를 이길 수 없었다. 그는 모든 면에서 지민보다 뛰어났다. 골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슛을 넣는 것도, 통통 튕기는 그의 공을 뺏어서 바로 골 넣는 것도, 제 골대 끝까지 오다가 스틸 당해도, 그저 재밌었다. 몸에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땀이 나는 이 느낌이 너무 좋았다. 그의 공을 확 뺏어와 바로 3점 슛을 넣었다. [역시 포인트가드.] 그가 엄지를 치켜세우며 말했다. 지민은 셔츠로 대충 얼굴을 닦으며 그를 쳐다봤다.
[어떻게 알았어? 내가 포인트가드였던 거.]
[같은 나이에 농구를 하는 사람인데 너를 모르면 말이 도냐.]
[내가 뭐 그렇게 대단하다고.]
[네가 그런 말 하면 안되지. 그래도 농구판 다 휩쓸며 다닌 사람인데.]
그의 말에 지민은 어깨만 으쓱였다. 다 지난 일이었다. 그 옛날에 자신이 어땠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누군가의 기억 어딘가에 자신이 그렇게 남아 있다는 것이 영광스러울 따름이었다. 그래도 열심히 했구나, 싶었다.
창문을 통해 주황빛이 체육관 깊숙히 들어왔다. 시간이 언제 이렇게 흘렀는지 놀랄 정도였다. 턱 끝을 슥 닦았다. 땀방울이 투두둑 체육관 바닥에 떨어졌다. 그도 어찌나 땀을 많이 흘리는지 셔츠가 다 젖어 있을 정도였다. 갈까.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깨가 욱씬거리지만 심각할 정도는 아니었다. 다른 한 손으로 어깨를 꾹꾹 주물렀다. 이 아픔도 잊을만큼 재미있었다. 이 시간을 후회하지 않았다. 그는 바닥에 던져 놓았던 가방을 들어 어깨에 매고 체육관 문을 열었다. 진한 주황색 빛이 열린 문으로 뿜어져 들어왔다. 지민아. 그가 신난듯한 목소리로 살짝 크게 지민을 부르며 뒤돌았다. 지민은 가방을 들기 위해 살짝 숙였던 허리 그대로 고개만 들어 그를 바라봤다. 역광이라 그의 표정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웃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의 뒤에 눈부실 정도로 내리쬐고 있는 노을빛처럼, 그는 눈부셨다. 지민아. 그가 다시 불렀다. 이제는 아예 허리를 펴고 제대로 서서 그를 바라봤다. 그는 두 팔을 뻗었다. 세상을 덮은 그 빛을 온전히 받고 있었다.
네 시간이야, 지민아.
그가 말했다.
하루 중 가장 아름다운 빛을 온전히 머금으며, 그렇게 말했다. 낮과 밤의 경계, 세상이 고요해지기 시작하는 일몰, 가장 아름다운 빛으로 세상을 덮는 석양. 이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지금 이 시간뿐이다.
지민은 가방을 들어 한 쪽 어깨에 둘렀다. 가자. 지민의 말에 그가 먼저 바깥을 나섰다. 온통 주황빛으로 덮힌 밖으로 한발짝 내딛었다. 아름다웠다.
나 네 이름 처음에 저녁빛인 줄 알았어.
어떻게?
유우(夕)에 히카리(光)할 때 히인줄 알았어.
진짜? 보통 히가 날 일(日)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던데.
그래서 夕陽라는 걸 알았을 때 와아 했어.
와아?
정말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어. 석양이랑, 너랑.
지금 이 시간, 너랑 정말 잘 어울려. 그의 말에 지민은 쑥쓰러움에 괜히 볼만 긁적였다. 좋아하는 사람한테 듣는 칭찬에는, 아직 면역력이 없었다. 둘은 나란히 자전거를 천천히 끌며 하교 중이었다. 여태까지 몰랐는데 둘은 집 가는 방향도 거의 같았다. 네 이름도 예뻐. 지민이 살짝 말 방향을 틀었다.
流星。너랑 잘 어울려.
그래?
응. 다른 애들은 다 너를 용(龍)의 류로 부르던데. 나는 용도 좋지만 별이 더 예뻐.
아싸 칭찬 받았다. 지민이한테.
지민이라고 부르지 말라니까. 그의 입에서 나온 본명에 지민이 대꾸했다. 나는 지민이가 좋아. 그가 말했다.
아무도 네가 지민인 걸 모르잖아. 나만 부를 수 있는 이름이라고.
......
너도 나랑 단 둘이 있을 때는 태형이라고 불러줘. 너만 부를 수 있는 내 이름이야.
......
자, 우리 둘만의 비밀인거야. 암호.
네 이름은 나만 부를 수 있게, 내 이름도 너만 부를 수 있게. 새끼손가락을 펴보이며 하는 말에 지민은 결국 그의 손가락에 새끼손가락을 걸고 엄지를 맞대었다. 이것도 우리 둘이서만 할 수 있는거야 알지? 그의 말에 지민이 푸핫 웃었다.
그는 지민의 집 앞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의 집은 여기서 좀 더 들어가야 있다고 했다. 어느새 낮과 밤의 경계가 지나고 세상이 보라빛으로 가득 찼다. 그는 한 손으로 자전거를 잡은 채 다른 한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작은 철문을 열고 들어간 지민이 바로 뒤돌아 그를 바라봤다. 그는 어느새 자전거에 올라타 한 발로 땅을 딛고 있었다. [이제 네 시간이야, 류.] 지민의 말을 듣던 그가 미소를 지었다. [내 시간도 예쁘지?] 그의 말에 지민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우. 그가 불렀다.
[나 너랑 친해지고 싶었어, 정말로.]
[... 무슨 소리야, 그게?]
지민은 재빨리 철문을 열고 나가 이미 자전거를 타고 가버리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그는 높이 손을 들어 두어번 흔들어 보이기만 했다. 지민은 멍하니 서서 그 모습만 바라보다, 그의 모습이 사라진지 한참이 되어서야 터덜터덜 집에 들어갔다.
친해지고 싶었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지민은 자꾸 그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목욕 하면서도, 저녁을 먹으면서도, 책상에 앉아 펜을 돌리면서도 문득문득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럼 이때까지 친구가 아니었다는 거야? 친구가 아니면 이때까지 왜 그렇게 들러붙었고, 그 때 한국 이름까지 먼저 가르쳐 주면서 다가온건 뭔데. 도무지 그 말 의미를 모르겠다고...
지민은 결국 책상에 철푸덕 엎드렸다. 나는 그런 줄 알았는데 남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니 마음이 심란했다. 어쩐지 서운한 것 같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에 헉 소리를 내며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너무 놀라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설마... 설마... 지민은 그대로 뒤에 있는 침대에 확 뛰어들어가 대굴대굴 굴렀다. 막 베개를 내리쳤다. 애초에 같은 마음이 아니었던 것은 자신이었다. 제가 흑심을 품었으면서 그에게 서운함을 느끼다니 어찌 이리 이기적일 수가 있을까. 지민은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혹시나 제 마음을 들켰을까. 아, 죽고 싶다.
다녀오겠습니다. 현관문을 열고 나오던 지민은 집 앞에 보이는 그의 모습에 화들짝 놀라며 현관문을 확 닫고 등을 기댔다. 어찌나 놀랐는지 심장이 쿵쾅쿵쾅 뛰는 것이 귓가에 느껴질 정도였다. 유우, 빨리 나와. 밖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지민은 결국 문을 살짝 열어 빼꼼 고개만 내밀어 밖을 봤다. 그가 자전거를 세운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민은 쭈뼛쭈뼛 밖으로 나와 앞에 세워 놓은 자전거의 바구니에 제 가방을 내려놓았다. 킥스탠드를 올리고 천천히 자전거를 끌고 나왔다. 오늘도 더웠다. 햇빛이 강렬하게 내리쬐어 뜨겁다 못해 따가웠다. 그도 더운지 항상 팔꿈치까지 셔츠를 접어 입었다. 언제쯤 하복을 입을까. 지민의 중얼거림에 그가 힐끔 지민을 바라봤다.
[여름 안좋아해? 유우는.]
[그냥 끈적끈적한 거 싫어해. 특히 여름에는 습기가 많으니까.]
[흐음... 그렇구나.]
길게 쭉 뻗어있는 기찻길 옆을 일렬로 달렸다. 후덥지근한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나온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지민은 제 앞에 있는 그의 등을 보며 슥 땀을 닦았다. 류. 그를 불렀다. 응? 대답이 돌아왔다.
[기다리고 있었어?]
[응.]
[왜?]
[그냥 같이 가고 싶었는데. 이유가 필요해?]
너무도 태연히 묻는 그에, 지민은 결국 대답하지 못했다. 가까운 곳에서 땡땡땡 소리가 났다. 기찻길 건널목에 다 와서 그가 자전거를 세우자 지민도 따라 세웠다. 잠시 후, 전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전차는 바람을 몰고 왔다. 후덥지근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머리카락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땡.땡.땡.땡. 차단기 소리가 일정하게 울렸다. 꽤나 요란한 그 소리는 자꾸 고막을 때렸다. 가까이에 있는 역에 전차가 멈추고 나서야 소리가 멈추고 차단기가 올라갔다. 그가 다시 다리를 올리고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지민은 그의 뒤를 따랐다.
날씨가 지나치게 푸르렀다. 차라리 비라도 한바탕 쏟아지면 이 더위가 조금은 가시련만, 장마 이후 비는 조금도 오지 않고 운동장의 열기는 스프링쿨러로 간간히 더위를 식혔다.
지민과 그는 자전거를 나란히 세웠다. 지민이 먼저 돌아서서 밖으로 걸어가다 우뚝 걸음을 멈춰세웠다. 지민의 뒤를 따르던 그도 지민의 바로 뒤에 붙어 섰다. 보관소 입구에 서너명이 어깨에 가방을 둘러맨 채 지민과 그를 마주했다. 그 중 가장 앞에 있던 남자가 그를 보더니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아침부터 재수없게.]
퉤. 침까지 뱉으며 하는 말에 그의 얼굴도 일그러졌다. 지민의 표정도 잔뜩 굳었다. 이왕이면 남자와 맞닥뜨리고 싶지 않았다. 저 남자와 엮여서 좋은 일이 없었다. 뒤에서 후 하고 숨을 깊게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지민은 슬쩍 뒤돌아 보았다. 그가 머리를 쓸어올리며 드러난 미간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자신과 있으면서 한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이었다. 어쩐지 낯선 그의 모습에 지민은 온 몸까지 굳는 기분이었다. 천천히 고개를 바로 하는데 목에서 삐거덕삐거덕 소리가 들리는 기분이었다.
[피차 서로 보기 기분 나쁘니까 조용히 지나가자.]
[난 이해가 안가거든. 네 놈이 아직도 주전 달고 코트에 서는게.]
[네가 그만큼 실력이 형편이 없으니까 그렇겠지.]
[뭐?]
[그것 말고 더 있겠냐. 내 슬럼프에도 미치지 못하는 네가 어떻게 주전에 있겠어.]
그만해. 짐니은 그의 배를 팔꿈치로 툭 쳤다. 남자의 두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분노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어떤 감정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너도 그만해, 카즈마. 그러다 벤치에서도 밀려나는 수가 있어.] 지민의 말에 그가 지민을 노려봤다. 그 눈이 흉흉하기 그지 없어 지민은 순간 놀랐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했다. 남자는 한동안 말 없이 그와 지민을 노려보다가 온 몸으로 짜증을 표출하며 사라졌다. 보관소에 정적이 돌았다. 지민이 천천히 몸을 돌려 그를 바라봤다. [카즈마, 여기 왜 온거지?] 지민의 물음에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시비 걸고 싶었나보지.]
카즈마와 그는 사이가 많이 안좋았다. 이해는 갔다. 초등학교 때부터 농구를 했던 카즈마가 중학교 때 농구를 시작한 그에게 밀린 것이 못내 짜증이 났던 것이겠지. 심지어 저번 사건 이후로 아예 벤치로 밀려나 그가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아직도 그 때만 생각하면 눈 앞이 아찔했다. 정신을 차리고 그를 말리지 않았다면 아마 그도 제명 당하고 다시는 농구를 할 수 없었을지도 몰랐다.
인기 참 많네. 지민은 창 밖에 보이는 그를 보며 문득 생각했다. 창 밖에는 그와 한 여자가 마주보고 있었다. 한 손을 입가에 대고 누가봐도 어쩔줄 몰라 하는 표정의 여자를 보면 딱 보인다. 또 고백 받네. 이제는 너무나 익숙한 그 광경을 턱을 괸 채 보던 지민이 흠칫 놀랐다. 눈이 마주쳤다. 당황한 모습이 눈에 다 보여 그가 피식 웃었다. 이 먼거리에도 그가 웃는 모습이 보여 지민은 괜히 멋쩍음에 볼만 긁적이다, 결국 시선을 돌렸다. 더 이상 시선을 마주하지 않자, 그는 높이 들고 있던 고개를 내려 다시 제 앞에 있는 여자를 바라봤다.
생각해보면 그가 여자들한테 인기가 없을 수가 없었다. 얼굴도 잘생겼고, 농구도 잘하고, 공부도 잘하고. 만약 자신이 여자였더라도 좋아한다 말 한마디 해봤을 것이다. 아 억울하다... 지민은 펴 놓고 있던 공책에 의미없는 낙서만 슥슥 했다. 夕。。。陽。。。제 이름을 쓰고 또 생각 없이 손 가는대로 한자를 써내려 갔다. 流星。나란히 쓰여져 있는 이름을 가만히 보던 지민이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박지...민... 김..태...형. 주르륵 써져 있는 글씨를 보며 푸스스 웃고 있던 지민은 갑자기 쭈욱 올라가는 공책을 보고 놀라서 파드득 몸을 떨었다. [뭐야!] 지민이 고개를 들어 공책을 뺏어간 사람을 보고는, 안그래도 놀란 얼굴이 허옇게 질려버렸다.
공책을 보며 생글생글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이 괜히 얄미워, 지민은 얼굴을 붉혔다. [나, 남의 공책을 왜 보냐!] 지민은 괜히 소리를 지르며 공책을 뺏으려 손을 뻗자 그가 확 팔을 들어 공책을 위로 뻗었다. 그의 입에서 피식피식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안그런 척 하려고 해도 입꼬리가 꿈틀거리는 것이 다 보였다. 오랜 치부를 들킨 것 같은 기분에 지민은 부끄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이럴 때는 아무렇지 않은 척 당당하게 나와야 하는데 제 얼굴은 주인 마음도 모르고 벌게지기만 한다. [빨리 내놔.] 지민은 좀 더 손을 뻗었다. 그는 웃음기 머금은 얼굴로 더 높이 손을 올렸다. 지민의 손가락 끝이 공책 모서리에 닿을 듯 말 듯 했다. 이제는 아예 발꿈치를 들었다. [아 진짜, 류!] 지민이 짜증스레 말을 뱉자 제 머리 위에서 웃음소리가 퍼졌다. [한자 예쁘게 쓰네.] 그의 말에 얼굴에 열이 더 오르는 느낌이었다. [장난치지마.] 지민은 욱해서 그를 올려다 보았다. 바로 마주한 그의 얼굴에, 지민은 숨을 헙 들이켰다. 생각보다 너무 가까운 거리에 지민은 순간 삐끗해 휘청거렸다. 그도 놀랐는지 바로 지민을 잡아주었다. 허리께에 느껴지는 단단한 그의 팔에 지민은 살짝 그의 손목을 잡아 빼내었다. 지민은 땅에 떨어진 공책을 주었다. [미안... 내가 너무 장난이 심했어.] 조심스러운 그의 사과에 지민은 고개를 저으며 애써 웃어보였다.
제가 과민반응 한 거 맞다. 친구 사이에 이름 쓴 것 정도야, 이런 장난 치는 것 정도야, 공책에 친구 이름이 적혀 있다고 해서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괜히 의미 부여해서 찔리는 것은 자신 밖에 없었다. 지민은 털썩 쓰러지듯 자리에 앉았다. 온 몸에 힘이 빠지는 기분이다. 아침부터 에너지 소모가 심하다. 그는 지민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지민의 앞에 털썩 앉아 두 손으로 턱을 괴고 지민을 바라봤다. 갑자기 훅 들어온 그의 얼굴에 지민은 또 놀라 몸을 떨었다. [아, 깜짝아.] 지민은 제 가슴께에 손을 올렸다. 심장이 저 바닥으로 훅 내려앉는 듯한 느낌과 함께 찌릿한 느낌이 온 몸에 퍼졌다. 열이 올랐다. 흐흫. 제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사람 좋은 웃음을 흘리며 고개까지 까딱거렸다. 지민은 그를 밉지 않게 노려보며 공책을 폈다. 아차. 지민이 재빨리 닫으려 했으나 그의 손이 더 빨랐다. 그의 커다란 손이 공책을 가득 덮었다. 그의 길쭉한 손가락 사이사이에 검은 글씨가 보였다. [유우는 한글이 더 에쁘네.] 지민은 그의 손을 탁탁 내려쳤다. [아, 아파.] 그는 손을 털면서 떼어냈다.
[이거 뭐야?] 옆을 지나가던 친구가 공책을 발견하고 물었다. [한국어야?]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류군과 유우군은 좋겠다. 서로 한국어로 대화할 수 있어서.]
[그게 왜 좋은데?]
[둘만의 언어로 대화할 수 있잖아.]
[뭐야, 그게.]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지민은 순간 당황했다. 둘만의 언어라니. 제 앞에 있는 이 여자는 그렇게도 그와 뭔가의 공통점을 만들고 싶은가보다.
그와 이야기 하는 것을 본 다른 아이들이 조금씩 몰려오기 시작했다. [무슨 이야기 해?] [와 이거 한국어지?] [뭐라고 써져 있는지 궁금해.] 마지막 말을 하며 그를 보는 여자에, 지민도 그를 쳐다봤다. 그는 두 손으로 턱을 괸 손 그대로 가만히 공책을 바라보기만 했다.
[비밀이야.]
[에?]
[이건 유우와 나만 아는 비밀이야.]
[너무해. 한국어 공부 해야하나.]
[류군이 우리 한국어 가르쳐 주면 안돼?]
지민은 마지막 말을 한 아이를 슬쩍 쳐다봤다. 저번에 고백을 했던 애다. 여전히 그가 좋은가보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한국어는 그렇게 어렵지 않아서 혼자서 할 수 있어.] 애둘러 거절하는 표현이 수준급이다. 그의 말에 지민이 다 무안할 지경이었다.
복작복작 모여 있던 아이들이 가고 다시 주위는 조용해졌다. 음흠흠. 어느새 지민의 펜을 들어 낙서를 하는 그가 작게 허밍하는 소리 밖에 들리지 않았다. 지민은 팔에 얼굴을 얹고 엎드린 채 있는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다 입을 열었다.
[너는 고백 그렇게 많이 받는데 누구랑 안사귀어?]
지민의 말에 그가 고개를 들었다. 공책에는 그의 글씨체로 서로의 이름이 한자로, 한글로, 중구난방으로 적혀있었다. [글쎄.] 그가 중얼거렸다.
[고백하는 애들이 네 취향이 아니라서 그러는거야?]
[아마.]
[그럼 네 취향은 뭔데?]
[음... 아직 잘 모르겠어.]
[뭔가 끌리는 타입은 있을 거 아니야.]
[있긴한데 생각중이야. 내가 끌리고 있는게 정확히 무엇인지.]
[...의미를 모르겠어.]
그는 말 없이 웃어보이기만 했다. [나중에 생각이 다 정리되면 말해줄게.] 지민은 다시 낙서를 하기 시작하는 그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나 진짜 운동계이긴 한가봐.] 뜬금없는 그의 말에 지민은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갑자기 그가 고개를 확 들었다. 순식간에 좁혀진 그와의 거리에, 지민은 흠칫 놀라 고개를 살짝 뒤로 뺐다.
[하나에 꽂히면 그것 밖에 안보여.]
그의 시선이 올가미처럼 지민을 옭아매는 것 같았다. 그의 시선에 사로잡혀 도저히 피할 수 없었다. 그의 눈빛은 그만큼 강했다. 지민은 순간 마른침을 삼켰다. 어쩐지 그와 제 주위의 분위기가 평소와 달리 낯설었다. 잔뜩 굳어있는 지민을 진지한 눈으로 바라보던 그가 피식 웃었다. 커다란 눈이 접히고 표정이 사르르 풀리며 예의 그 해맑은 웃음이 나왔다. 지민은 어느순간부터 참고 있던 숨을 탁 내려놓듯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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