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뷔민] 우리의 계절 上
짧전학생. 이곳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에 태형은 눈을 크게 떴다. 전학생이 왔다. 선생님의 입에서 한 번 더 그 단어가 나왔다. 잘못 들은 게 아니라는 뜻이었다. 쌤 이런 시골 깡깡촌에 뭔 전학생 입니꺼. 한 학생의 말에 다른 아이들도 그렇다며 웅성거렸다. 한 번 터져 나온 웅성거림은 순식간에 그 소리를 키웠다. 바로 소음으로 가득 채워진 교실에 선생님은 들고 있던 단소로 교탁을 내리쳤다. 이런 시골 깡깡촌에도 전학생이 온다, 야들아. 선생님의 말씀에 태형은 삐딱하게 턱을 괴고 있던 자세를 바로 했다. 변화 없이 잔잔히 흘러만 가던 시골의 하루에, 그는 작은 변화였다.
낡은 나무문을 드르륵 열고 들어온 아이는 태형의 시선을 뺏기에 충분했다. 자신과는 다른 하얀 피부에, 새 교복임이 티 나는 새하얀 셔츠. 굉장히 단정해 보이는 얼굴과 발걸음. 그는 조용히, 혹은 사뿐사뿐 교탁 앞으로 다가갔다. 교실 쪽으로 몸을 돌리자 그의 얼굴이 정면으로 보였다. 태형은 뚫어지게 쳐다보던 시선을 다급히 다른 곳으로 돌렸다.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 멍 때리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자신이 그런 시선을 받는다면 분명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아이들은 전에 없던 전학생 소식에 다들 들떠보였다. 여기저기서 수근수근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는지 앞에 서 있는 전학생은 어떠한 표정 변화도 없었다.
자기소개. 선생님의 짤막한 말에 전학생은 교실을 한번 쭉 둘러보더니 입을 열었다. 박지민 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의 짧은 자기소개는 이 교실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와 서울말이다 서울말. 니 서울에서 왔나? 어쩐지 애가 도시 냄새가 나드라. 또 다시 시끄러워지는 교실에 선생님이 단소로 교탁을 두드렸다. 조용히 해라, 서울에서 온 게 대수가? 촌스럽게 굴지 마라. 선생님의 말씀에 아이들이 단체로 입을 꾹 다물었다. 전학생은... 아니, 박지민은 그런 아이들의 모습에 살짝 웃었다. 별 거 아닌 웃음이었다. 그냥 눈이 접혀 기다란 곡선을 만들었고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을 뿐이었다. 그냥 가벼운 웃음이었다. 태형은 그 별 거 아닌 웃음에 눈을 떼지 못했다. 태형에게는 박지민의 모든 것이 새로움 투성이었다. 매일이 똑같은 잔잔한 태형의 하루에, 별안간 툭 떨어진 작은 변화. 지민은 그런 존재였다.
니는 저어짝에 김태형이 옆에 앉아라. 선생님이 손을 쭉 뻗어 가리킨 곳으로 총총총 걸음을 옮긴 지민이 태형의 옆자리에 의자를 빼 앉았다. 태형은 지민이 자기 쪽으로 가까이 다가와 책상 위에 가방을 올려놓고, 의자를 빼서 자리에 앉은 후, 의자를 당겨 책상 가까이 붙이고 가방을 책상걸이에 거는 그 모든 행동을 확장된 눈으로 바라봤다. 그의 표정과 커다란 눈에는 낯섦이 가득 드러나 있었다. 지민이 옆에 앉자, 낯선 향이 잔잔히 퍼졌다. 여태까지 맡아온 이 곳 냄새와는 다른, 뭐라 설명하긴 힘들지만 그냥 박지민의 냄새겠지. 어쨌든 태형은 지민의 그 모든 것이 낯설었다. 심지어 박지민 주위의 공기까지도.
안녕. 박지민의 인사에 태형은 자신도 모르게 경계를 했다. 안녕. 인사를 받아주는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지민은 그런 태형의 모습에 살짝 웃어보였다. 아까 저기 교탁 앞에 서 있었을 때 봤던 웃음과 똑같았다. 이렇게 가까이서 또 보게 되다니. 태형은 자신도 모르게 헉 숨을 들이켰다. 갑자기 누군가 제 머리를 때린 것처럼 멍해졌다. 다채로운 표정변화에 지민의 웃음이 더 진해졌다. 눈 코 입 자기주장 강한 애가 시시각각 표정까지 변하니 더 재밌다.
왜 그렇게 놀라.
아...
앞으로 잘 부탁해, 태형아.
지민이 칠판으로 고개를 돌릴 때까지도 태형은 멍하니 그의 옆모습만 쳐다봤다. 쟤 지금 뭐라캤노. 태형아? 태형은 손을 들어 제 맨팔을 슥슥 문질렀다. 간질간질해서 벅벅 긁고 싶었지만 도대체가 어디가 간지러운지를 모르겠다. 여태까지 자신을 태형아라고 부른 사람은 없었다. 전부 ‘김태형’, ‘김태형이’, ‘태형이’였다. ‘태형아’라니. 태형은 여전히 충격으로 뻣뻣한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지민은 순식간에 학교에서 인기스타가 되었다. 이 곳 학생들은 걸음마 떼기 시작할 때부터 서로 다 알고 지냈다.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다 같이 다니기 때문에 모르는 애들도 없었고, 새로울 것도 없었기 때문에 배우는 것만 다르지 학교생활은 다 똑같았다. 이런 시골 학교에 전학생이, 그것도 서울 사람이 전학 왔다고 하니 모두의 관심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지민의 자리와 그 교실에는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쏟아지는 아이들의 질문에도 지민은 귀찮은 기색 없이 하나하나 다 대답해주었다. 태형은 옆에서 밀려드는 아이들한테 치이며 지민의 대답을 감흥 없는 태도로 들었다.
니 진짜 서울에서 왔나?
응.
딱 보면 모르나. 얼굴도 허옇고 말 하는 것도 딱 서울에서 왔다이가.
서울 사람이라고 다 얼굴이 하얗지는 않고 이런 말투라고 다 서울 사람도 아니야.
서울에서 여기까진 우째 왔노? 이런 데가 있는지도 잘 몰랐을낀데.
그냥 사정이 있어서 왔는데. 사실 이런데 있는지는 몰랐어. 근데 여기 정말 좋다.
여기가 우예 좋노. 영화나 볼라면 버스타고 30분은 나가야 되는데. 여기 완전 시골 깡촌이다. 주위 둘러봐도 전부 산이나 논, 강밖에 없다.
그래서 좋은데? 공기 완전 좋잖아.
지금 우리 놀리나.
한 친구의 장난스런 말에 지민이 푸스스 웃었다. 그는 특히나 여자들한테 인기가 많았다. 매일 사투리 쓰던 남자들만 보다가 조곤조곤 말하는 남자가 오니까 호기심이 동하는가보다. 서울 사람들은 다 니처럼 잘생겼나? 한 아이의 말에 지민이 푸핫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난 잘생긴 축에도 안끼는데, 오히려 난 찌질한 쪽이었지. 흐에엑?! 지민의 대답에 아이들이 뒤로 넘어갔다. 니가 어디가 찌질하노! 거긴 연예인들이 몰려 있어서 눈이 다 높은갑네. 걔네들 여기 오면 완전 난리나겠네. 아이들의 반응이 재밌는지 지민은 연신 웃기만 했다.
공부 시간 종이 치고 나서야 아이들은 각자의 자리로, 반으로 돌아갔다. 태형아. 옆에서 들리는 낯간지러운 부름에 태형은 파드득 몸을 떨며 고개를 돌렸다. 나 아직 교과서가 없어서 그런데 같이 볼 수 있어? 지민의 물음에 태형은 말없이 책상서랍을 뒤져 수학책을 꺼내 올렸다. 고마워. 지민이 눈을 접어 웃으며 말했다. 태형은 가슴께를 긁적였다. 아까부터 계속 간지러운 게 느낌이 이상하다.
태형은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은 아니었다. 매일 엎드려 자기 일쑤였고, 간혹 수업을 듣는다고 해도 몰려오는 졸음을 참지 못하고 병든 닭 마냥 꾸벅대곤 했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 눈이 말똥말똥했다. 눈이 감기지도 않았고 굳이 엎드리고 싶지도 않았다. 선생님들은 교실로 들어올 때마다 허리를 쫙 피고 큰 눈을 반짝이고 있는 태형을 보며 화들짝 놀랐다. 뭐고 김태형, 니가 웬일로 아직도 안자고 그라고 있노. 이야 내일 해가 서쪽에서 뜨는지 함 봐야겠네. 와 김태형이, 내는 내가 꿈꾸는 줄 알았다. 내가 수업시간에 니 눈을 보는 날이 다 있네. 선생님들이 한마디씩 할 때마다 태형의 표정이 뚱해졌다.
아 쌤. 자꾸 그렇게 말 하시면 진짜로 내가 맨날 자러 학교 오는 애 같잖아요.
맞다이가. 니 맨날 자러 오잖아.
선생님 말씀에 반 친구들이 빵터져 끅끅거리며 웃었다. 태형은 씩씩거리면서도 할 말이 없어 입만 꾹 다물었다. 푸흡. 작게 웃음 터지는 소리에 태형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지민이 입가를 손으로 가리고 있었지만 휘어진 눈을 보니, 손 안에 감춰진 저 입도 분명 호선을 그리고 있으리라. 괜히 민망해져 태형은 고개를 홱 반대로 돌려 창밖만 바라봤다. 햇살을 잔뜩 받고 있는 바깥은 눈부실 정도였다. 진짜 햇빛은 쨍쨍 모래알은 반짝이네. 태형은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턱을 괴었다.
니는 박지민이 짝지니까 특히 더 잘 해줘야 한다.
네에.
알았나.
알았다고요.
오늘은 학교 소개 해주고. 니 당번이제? 지민이랑 같이 해라. 문 잠그고 그라고 집에 가라.
네.
태형은 교무실을 나오면서 짜증스레 머리를 헝클였다. 안 그래도 당번이라 할 일이 많은데 귀찮은 일이 하나 더 늘었다. 교실로 돌아가니 아이들은 교실 청소로 왁자지껄했다. 아니, 사실 교실청소 하는 척 하면서 놀고 있는 것이었다. 야 내가 빗자루 하키 하지 말랬제!! 태형은 빽 소리를 지르며 종이 뭉치를 빗자루로 치며 놀고 있는 애들을 말렸다.
아 뭔데, 이제 좀 재밌어질라 했는데.
놀 거면 청소 다 하고 운동장에서 놀아라. 다른 애들 청소 하는데 계속 먼지 날리고 방해 된다이가.
태형의 말에 아이들은 투덜거리면서도 다시 교실 바닥을 쓸기 시작했다. 후. 작게 한숨을 내쉰 태형은 아무 책상에 걸터앉아 청소 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아이들은 각자 자신이 맡은 곳을 청소했다. 당번은 일주일동안 청소 면제기 때문에 태형은 청소를 할 필요가 없었다. 교실을 쭉 둘러보며 잘 하고 있는지 확인 하는데 교실 한편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지민이 보였다. 이미 다 짜인 청소 당번에 지민이 낄 자리는 없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허둥대는 것 같았다. 태형은 가만히 바라보다 결국 책상에서 내려와 지민에게 다가갔다. 갑자기 무표정으로 다가오는 태형을 본 지민은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태형이 그의 앞에 서자 지민이 우물쭈물 말을 이었다.
나도 청소 돕고 싶은데 뭘 해야 할지 몰라서... 친구들은 다 괜찮다고 그러고...
여기 애들 전부 자기가 맡은 일 다른 애 손 빌리는 거 안 좋아해서 그렇다.
아...
둘 사이에 잠시 말이 없었다. 태형은 이런 정적과 어색함을 극도로 싫어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봐 온 친구들끼리 어디서든 붙어 있기 때문에 이런 환경이 주어진 적 없어서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태형은 괜히 머리를 긁적이며 지민을 힐끗힐끗 봤다. 고개를 살짝 숙여 그의 머리가 보였다. 까만 머리카락은 그만큼 부드러워 보였다. 그 아래 살짝 튀어나온 볼과 입술이 어쩐지 통통한 작은 새 같아, 태형이 푸스스 바람 빠지는 웃음을 냈다. 위에서 들리는 웃음소리에 지민이 고개를 들어 태형을 바라봤다. 태형은 언제 웃었냐는 듯 금방 웃음을 지우고 아무렇지 않은 척 했다.
니 할 거 없으면 내랑 당번할래?
어?
우리 반 원래 홀수여서 내 혼자 당번이었다.
아...
싫음 말고.
아, 아니! 같이 하자.
헤 웃는 지민을 멍하니 바라보던 태형이 흠흠 헛기침을 했다. 당번은 끝나고 문 잠가야 한다, 니한테 해줄 것도 있으니까 종례하면 바로 나가지 마리. 태형의 말에 지민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종례가 끝나자마자 반 아이들이 물소 떼처럼 우르르 교실 밖을 나가는 광경을, 책상에 가만히 앉아 바라보는 건 꽤나 재밌었다. 그래봤자 처음 나간 친구와 마지막에 나가는 친구는 1분도 차이 나지 않을 텐데, 1초라도 빨리 이 학교를 벗어나고 싶어 하는 그 마음이 여실히 드러나는 것 같아 웃기면서도 공감된다.
학생들이 다 빠져나간 교실은 순식간에 정적이 되었다. 아무도 없는 교실 뒤편에 태형과 지민만이 나란히 앉아있었다. 우리도 갈까. 태형이 혼잣말 하듯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챙겼다. 필통만 들어있는 가방은 태형의 움직임대로 달랑거렸다. 나한테 해줄게 뭔데? 지민도 태형 따라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지민의 물음에 먼저 앞으로 가던 태형이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그를 봤다. 태형의 기다란 검지에 걸린 열쇠가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태형은 그 열쇠를 가볍게 잡았다. 열쇠는 찰그랑 소리 내며 그의 주먹 안으로 쏙 들어갔다.
별 건 아니고.
응.
그냥 학교 소개시켜줄게.
아...
뭐... 서울만큼은 아니겠지만 우리 학교 쫌 넓은 편이라가꼬.
우리 학교 안 넓었어.
음흠. 뭐... 쨌든.
태형은 괜히 헛기침을 하며 교실을 나왔다. 지민도 따라 후다닥 교실을 나왔다. 불을 끄고 문을 드르륵 닫았다. 자물쇠로 야무지게 문을 걸어 잠근 태형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 지민은 그의 뒤를 따랐다. 이 건물은 거의 교실 밖에 없고, 저 뒤에 건물로 넘어가면 특별실이 몰려있다. 태형이 말에 지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길게 늘어선 복도 창문 밖으로 다른 건물이 보였다. 실내로 이어진 구름다리는 2층 밖에 없는데 밖에 나가서 들어가도 되고. 계단을 내려가며 태형이 말했다. 지민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집중했다.
모두가 하교한 후의 학교는 조용하다 못해 적막했다. 평소에 복도를 걸을 때는 아무 생각 없었는데 유독 복도의 나무 소리가 크게 들렸다. 자연스럽게 발걸음이 조심스러워졌다. 전에 있던 학교는 복도가 전부 대리석 바닥이어서 소리 날 일이 없었다. 이런 나무 바닥 복도는 낯설었다. 이렇게 크게 삐그덕 소리가 나면 거슬리지 않을까. 지민은 자신도 모르게 발소리를 죽였다. 서너 걸음 앞에 있던 태형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지민은 살짝 움찔하며 따라 걸음을 멈추었다. 태형이 뒤돌아보자 지민은 영문 모를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그렇게 힘들게 걸을 필요 없다.
아...
어차피 우리밖에 없고 원래 그 소리 신경 쓰는 사람 아무도 없다.
지민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자신의 행동과 생각이 다 읽힌 기분이라 어쩐지 민망해졌다. 태형은 또 아무렇지 않게 걷기 시작했다. 지민은 총총총 그의 뒤를 따랐다. 아까보다 힘이 담긴 걸음이었다.
여긴 과학실. 미술실. 음악실. 무용실. 특별실이 모여 있는 건물로 넘어간 태형이 하나하나 짚어주며 말했다. 무용실도 있어? 지민의 물음에 태형이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는 학원이란 게 없으니까 별의별 수업이 다 있다. 방과 후 수업도 무조건 하나 이상은 해야 하고.
무용도 있어?
방과 후랑 1학년 때.
방과 후는 어떻게 하면 돼?
그냥 담당 쌤한테 말하면 될 걸. 니도 여기 왔으니까 하나 이상은 꼭 해야 된다.
재밌겠다.
뭐... 여기는 학교에서 그런 거라도 안하면 진짜 할 게 없으니까.
여기는 도서실 가는 입구. 태형이 마지막으로 도착한 곳은 기다란 복도였다. 도서실? 지민이 되물었다. 태형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이 복도로 가봤자 도서실 밖에 없다. 도서실도 따로 건물이 있는 거라서 실내로 가려면 이 복도 밖에 없고. 밖에서 바로 들어가도 되고.
나 가 보고 싶어!
어?
아직 도서실은 문 열려 있지?
태형은 어정쩡한 표정으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 도서실 가고 싶어. 지민의 말에 태형은 결국 걸음을 옮겼다. 기다란 복도를 지나니 바로 커다란 문이 보였다. 따로 건물까지 있는 걸로 보아 도서실이 아니라 작은 도서관 수준이었다. 지민은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도서실 안에 들어갔다. 도서실에는 사람 한 명 없었다. 사서 선생님 자리에도 일 때문에 잠시 자리를 비운다는 팻말이 놓여 있었다.
도서실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고, 아늑하고, 넓었다. 이 도서실은 생긴 지 얼마 안됐다. 태형이 덧붙여 한 말에 지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다른 곳보다 더 새 것 느낌이 나더라. 지민은 숨을 한 번 깊게 들이마셨다. 미묘하게 책 냄새가 났다. 종이 냄새와 잉크 냄새가 섞여서 나는 특유의 향이 있었다. 그리고 오래된 책은 그 시간만큼의 냄새가 났다. 내가 책을 엄청 좋아해. 지민이 나직이 말했다. 도서실 안에 있던 책상을 손으로 쓸어보던 태형은, 지민의 말에 고개를 들어 그를 봤다. 그는 한 눈에 봐도 즐거워 보였다. 책장 사이사이를 왔다갔다하며 어떤 책이 있는지 쭉 확인했다. 나는 언제쯤 책을 빌릴 수 있을까? 어느 한 쪽에서 얼굴만 쏙 내민 채 물어보는 지민에, 태형은 멍하니 지민만 쳐다봤다. 내가 함 물어볼게. 태형의 말에 그 조그만 머리는 또 책장 사이로 쏙 들어갔다.
태형이는 책 많이 읽어? 지민은 보이지 않은 채 말소리만 들렸다. 태형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뭐... 읽기는 하는데. 오. 태형의 대답에 작은 탄성이 돌아왔다. 주로 무슨 책 읽어? 어디선가 또 들리는 목소리에 태형은 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딱히 안 가리는데.
그래? 나는 판타지 소설 좋아해.
......
그걸 보면서 항상 생각했어. 나도 이렇게 다녀보고 싶다. 이런 모험 해보고 싶다.
......
태형이는 그런 생각 한 적 없어?
판타지는 잘 안 읽혀서. 실제로 있을법한 소설은 좋아한다.
그래? 현실주의인가보네.
내도 맨날 그렇게 생각하거든. 아, 내도 이런 일 겪어봤으면 좋겠다 하는 거. 그래서 일상적인 소설 좋아한다.
그렇게 안 봤는데 생각보다 감성적이네.
태형은 걸음을 멈추었다. 여전히 지민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가지런히 꽂혀있는 책들이 보였다. 태형은 책 제목을 쭉 훑어보다 바로 앞에 있는 책을 살짝 빼내었다. 꽤나 두꺼운 책이었지만 태형이 제일 좋아하는 책이기도 했다. 책이 천천히 나오면서 건너편이 보였다. 옆모습만 보이던 지민이 고개를 돌리면서 눈이 마주쳤다. 지민은 눈이 마주치자 생긋 웃었다. 순간 손에 힘이 풀려 책이 떨어져 발을 찧었다. 아오씨!! 묵직하게 올라오는 아픔에 태형이 발목을 잡고 콩콩콩 뛰었다. 괜찮아? 지민이 놀라 후다닥 달려왔다. 태형은 아예 자리에 주저앉아 슬리퍼를 벗고 양말채로 발가락을 감쌌다. 헐 세상에 이렇게 두꺼운 책에 발 찧었어? 지민의 목소리가 생각보다 가까이서 들려 태형은 한 손을 들어 살짝 저었다. 괘, 괜찮다. 고개를 푹 숙인 채 괜찮다고 해보지만 여전히 머리 위에서 지민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 봐봐. 태형은 손을 마구 휘저었다. 아니 진짜 개안타. 태형은 확 고개를 들었다가 바로 앞에 보이는 그의 얼굴에 재빨리 고개를 옆으로 홱 돌렸다. 눈앞에 아무렇게나 펴져있는 책이 보였다. 태형은 그 책을 덮어 그대로 지민에게 내밀었다. 지민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 책을 받아들었다. 이거 내가 좋아하는 책. 태형의 말에 지민이 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보면 태형이 책 취향을 알 수 있는 거야? 지민이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태형은 살짝 어깨만 으쓱였다.
시골길은 언제나 한적했다. 특히 다른 애들이 먼저 집을 가버리고 혼자서 이 길을 걸을 때면 더 그랬다. 처음에 이 길을 걸었을 때 신기했어. 지민이 입을 열었다. 태형은 가만히 그가 하는 말을 듣기만 했다.
양 옆이 다 코스모스잖아. 되게 이쁘다고 생각했어.
......
내가 전에 다니던 학교는 봄에 길 양 쪽이 벚꽃으로 만개 했거든. 여름에는 딱히 뭐 없었어. 그냥 푸른 나무들? 이렇게 긴 길 양 쪽에 전부 코스모스가 있는 걸 보니까 되게 신기하더라.
여기는 벚꽃이 없다.
정말? 벚꽃이 없는 곳은 처음이야. 보통 가로수로 벚꽃 많이 쓰지 않아?
사람이 직접 심은 나무는 없고. 여기는 그냥 다 자연.
좋다.
지민은 갑자기 멈추어 서서 코스모스를 쭉 둘러보기 시작했다. 난 진분홍색 코스모스가 그렇게 예쁘더라. 혼잣말인 듯 중얼거린 지민이 꼿꼿하게 서 있는 가장 큰 코스모스로 손을 뻗었다. 그의 손가락이 코스모스의 줄기에 닿을 때 즈음, 태형이 손을 뻗어 가볍게 그의 손등을 덮어 잡았다. 지민이 고개를 돌려 태형을 바라봤다. 태형은 말없이 지민의 손을 거두었다. 자연은 자연으로 둘 때가 제일 예쁘다. 태형의 말을 뒤늦게 이해한 지민이 살짝 숙였던 허리를 폈다. 내가 생각이 짧았네. 지민은 민망함에 볼만 긁적였다. 태형은 다시 천천히 길을 걸었다. 지민도 그의 옆에서 따라 걸었다. 넌 집이 어디야? 지민의 물음에 태형이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니네 집 앞에 있는 강 건너서 바로 보이는 집.
헐 우리 집은 어떻게 알았어?
여기로 이사 온 집은 한 집 밖에 없어서.
아...
나 궁금한 거 있는데 물어봐도 되나?
물론.
왜 일로 이사 왔노. 중학생이면 서울이 낫지 않나.
음...
지민이 뒷짐을 지고 몸을 돌려 태형을 바라봤다. 태형도 걸음을 멈추고 그를 봤다. 맞아, 아무리 생각해봐도 도시에서 잘 살던 사람이 여기에 올 이유는 없지? 갑작스런 지민의 물음에 태형은 멍하니 있다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사실 여기가 좀 아파서.
심장?
심한 건 아닌데. 응. 그래. 갑자기 좀 악화돼서. 공기 좋고 조용한 곳에서 몸 좀 쉬고 오라고 그래서.
......
근데 난 여기가 더 좋아. 여기서 쭉 고등학교까지 있다가 졸업하고 싶다.
이런 분위기 너무 좋아. 지민은 손을 뻗어 코스모스를 살짝 건들이며 말했다. 아, 이거 비밀이니까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다급히 말을 잇는 지민에, 태형은 고개만 끄덕였다. 우리 집 보인다. 지민은 발걸음을 더 빨리 했다. 태형은 말없이 지민의 뒤를 따랐다.
나 괜찮으니까 너도 먼저 네 집에 가.
아... 그냥. 데려다 주고 싶어서.
태형의 말에 지민은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지민의 집은 이 동네에서 가장 깔끔하고 예쁘게 생겼다. 일반 가정집이 아니라 펜션이나 별장이라는 말이 더 어울렸다. 하얀 울타리에 허리께까지 오는 하얀 나무문을 잡고 연 지민은 뒤돌아 태형을 봤다. 오늘 고마웠어, 여러가지로. 지민은 다른 한 손에 들린 책을 들어보였다. 도서실에서 빌린 책이었다. 태형은 손들어 인사하고 가려다 문득 든 생각에 다시 지민을 봤다. 응? 지민은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시골은 해가 빨리 지니까 6시 이후로 웬만하면 혼자 다니지 말라고.
아.
여기 가로등도 없어서 마이 깜깜하다.
고마워.
간다.
지민은 뒤돌아 천천히 멀어지는 태형의 뒷모습을 한참동안 바라보다 더 이상 보이지 않고 나서야 집에 들어갔다.
안녕 태형아.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태형은 어정쩡하게 고개를 돌렸다. 지민이 몇 걸음 뒤에 서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태형도 손을 들어 어색하게 흔들어 보였다. 지민이 하는 모든 행동들은 어쩐지 간질간질했다. 태형은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성을 떼서 부른 적도 없었고, 이렇게 손을 살랑살랑 흔든 적도 없었다.
지민은 뛰어와 재빨리 태형의 옆에 섰다. 태형은 흔들던 손을 그대로 주머니 안에 넣었다. 등굣길이 원래 이렇게 한적해? 지민의 물음에 태형이 지민을 빤히 쳐다봤다. 옆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지민도 고개를 돌려 태형을 쳐다봤다. 왜... 그렇게 빤히 쳐다봐,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지민은 제 얼굴을 한 손으로 더듬으며 말했다.
아직 등교 시간 아이다.
...어?
지금 8시다이가. 우리 등교 9시까진데.
헐, 진짜? 근데 넌 왜 이렇게 빨리 가?
당번.
아...
그럼 나도 당번이니까 빨리 온 걸로 칠래. 지민의 말에 태형은 살짝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지민의 목소리는 통통 튀었다. 아침 공기처럼 상쾌했으며, 기분 좋은 목소리였다. 그래서 이렇게 계속 웃음이 나는 걸지도 몰랐다. 그는 시선을 끄는 무언가 있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이 일상이고 익숙하기만 한 이 곳에서 지민만이 새로웠기 때문일까.
태형이는 진짜 다정한 것 같아.
뜬금없는 지민의 말에 태형이 힐끗 그를 쳐다봤다 다시 앞을 봤다. 저 멀리 학교가 작게 보였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낡은 학교.
여기 친구들 다 좋지만... 음, 그래. 태형이가 특히 다정한 것 같아.
내 뭐 한 거 없는데.
그래도.
......
눈이 마주쳤다. 지민은 눈을 접어 웃어보였다. 태형은 다시 앞을 봤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무언가가 마구 엉켜 제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 같기도 하다가도, 아무것도 없이 텅 빈 느낌이기도 했다. 태형은 그만큼 혼란스러웠다. 아니 대체 뭐가 혼란스러운 건데. 태형은 이유도 모른 채 싱숭생숭하기만 한 제 속이 답답했다. 지민을 만난 이후로 쭉 이랬다. 분명 속 어딘가 잘못된 게 분명하다. 안 그래도 요즘 성장통인지 뭔지 때문에 발목이 욱신거리기 시작하는데 그 영향이 속에도 가는 건가 싶다. 그러다 아, 깨달았다. 이건 사춘기다. 한창 2차성장이 일어날 시기에 급격한 호르몬 변화로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마음이 싱숭생숭, 혼란스러운 거다. 태형은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렴.
어제 창밖을 봤는데 별이 엄청 많더라. 작은 은하수까지 보였어.
......
은하수 처음 보는 건데. 그럼 별자리도 볼 수 있는 거지?
니 별 좋아하나.
그럼. 예쁘잖아. 은하수도 예쁘고. 보기 흔한 건 아니니까 더 예쁜 것 같아. 이렇게 맑은 공기와 맑은 하늘에서만 보이니까.
같이 보러가자.
응?
집 안에서 보는 것보다 밖에서 보는 게 더 이쁘다.
태형의 말에 지민의 표정이 점점 기대에 차기 시작했다. 눈이 커지면서 입꼬리가 화사하게 올라가는 모습을 보다, 살짝 시선을 돌렸다. 시골 밤은 위험하다고 나가지 말랬으면서. 지민의 투정 섞인 목소리에 태형은 다시 지민을 바라봤다. 목소리에는 투정이 있을지 몰라도 그의 표정은 반짝반짝 벌써부터 별을 본 표정이다. 그들 사이에 잠시 정적이 돌았다. 태형은 깊게 생각하는 듯 하더니 곧 입을 열었다.
천문대 데려가줄게.
천문대?
거창한 건 아이고, 그냥 별이 제일 이쁘게 보이는 곳이다.
좋아.
운이 좋으면 반디도 볼 수 있겠지.
반디?
반딧불이.
지민의 눈이 한층 더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나 한 번도 반딧불이 본 적 없는데, 어떡하지 너무 기대돼. 지민은 제 심장에 두 손을 갖다 대었다. 심장 두근거리는 거 봐. 지민이 갑자기 태형의 손을 확 가져가더니 제 심장에 갖다 댔다. 태형은 흠칫 놀라며 재빨리 손을 빼내려다가 조금 빠른 속도로 뛰는 지민의 심장에, 눈을 크게 뜨며 지민을 바라봤다. 이게 뭐라고. 태형은 천천히 손을 내리며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했다. 여기는 설레는 것투성이야. 지민이 말했다.
모든 게 다 설레. 여기 온 거 잘한 것 같아.
다행이네.
응. 너무 좋아서 심장에 무리가 가면 어떡하지. 너무 빨리 뛰면 안 되는데.
왜.
나도 정확히는 잘 모르는데. 내가 심장이 약하게 태어나서 빨리 뛰면 안 좋대. 그래서 운동 같은 것도 못해. 항상 지루하고 매일 매일이 똑같으니까 심장이 빨리 뛸 일도 없었고. 이렇게 가슴이 두근거린 거 처음이야.
......
지민은 지금처럼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태형 때문에 민망할 때가 있었다. 태형은 본인이 자신을 어떤 눈으로 보고 있는지 알고는 있는지, 아니 그 전엔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건 알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을 정도였다. 커다란 눈으로 어느 곳으로도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오로지 자신만 바라보는 그 눈은 어쩔 땐 굉장히 그윽할 때가 있어서, 지민은 그럴 때마다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하나 당황스러웠다. 그래서 그가 말없이 자신을 바라볼 때면 더 오버해서 말하는 경향이 있었다. 다른 사람이 보면 한 사람만 신나서 이야기 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몰랐다.
그와 있으면서 느낀 건, 태형은 말이 많은 것과 없는 것 중 굳이 고르라면 없는 쪽이라는 것이었다. 한마디 뱉을 때마다 깊게 생각하는 듯,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딱 필요한 말만 했다. 과묵하다고 느낄지도 모르지만 지민은 그것을 진중 하다라고 표현하고 싶었다. 그는 글자를 한 자 한 자 손에 힘을 꽉 주고 꾹꾹 눌러쓰는 것처럼, 말을 할 때도 한 마디 한 마디를 진중하게 말했다. 그래서 그의 말 하나에, 대답 한마디에 언제나 깊은 생각과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는 불필요한 단어의 나열이 없었고, 꾸밈없이 깔끔했다. 치기어린 중학생들의 허세 담긴 상스러운 말도 한 적 없었다. 지민은 그게 좋았다. 그리고 그의 제일 좋은 점은 솔직함이었다. 순수함에서 나오는 솔직함이 좋았다.
내랑 같네.
응?
내도 이렇게 가슴이 두근거리는 거 처음이다.
......
그니까 꼭 같이 가자. 별 보러.
정말이지, 이렇게 깨끗하고 상쾌한 자연과 어울리지 않을 수 없었다.
***
니는 태형이랑 억수로 친하네.
지민이 전학을 온지 한 달이 다 되어갔다. 지민은 이제 이 곳 생활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다. 이 곳 사람들은 전부 친절했고, 이 곳 친구들은 전부 순박했다. 그들의 말을 이해하는 것이 좀 힘들긴 했지만 이제는 적응이 되었다. 말에 높낮이가 있는 언어가 처음에는 낯설었는데 지금은 정겨웠다.
운동장 스탠드에 앉아 축구를 하고 있는 반 친구들을 보고 있던 지민은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어, 설아. 지민은 제 옆에 쌓여있는 셔츠를 반대편으로 옮겼다. 설은 지민의 옆에 앉았다.
뭐라고 했어?
니 김태형이랑 억수로 친하다고.
새삼스럽게. 다 친하잖아.
그건 그런데...
찜찜하게 끊긴 설의 말에 지민은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야 니네 2반한테 지면 진짜 쪽팔린 기다!! 운동장에다 대고 한소리 크게 날린 설이 지민의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뭘 그래 보노.
그건 그런데 하고 말이 끊겼잖아. 태형이가 다른 애들이랑은 안 친해?
아니 뭐 그렇다기 보단... 갸가 원래 말이 좀 없다이가. 진짜 지인짜 말이 없거든. 옛날에는 안 그랬는데 아가 크면서 좀 뭐라 해야 되노, 과묵한? 그렇게 된 거거든.
응.
애들이랑은 친하게 지내는데 뭐래야 되지, 겉도는? 말도 잘 안하고. 사실 좀 어려운 애였는데.
......
니가 오니까 애가 싹 다 바끼뿟다. 내는 중학교 들어와서 갸가 웃는 거 처음 봤다니까.
......
그래서 우리끼리 막 신기하다고 얘기한 적이 있었다. 와 무슨 애가 그렇게 한 달도 안돼서 다른 사람처럼 변할 수가 있냐고.
태형이가 니 진짜 좋아하는 갑다. 설의 마지막 말에 지민은 마시던 물을 풉 뿜어버렸다. 아씨 드르라!! 설이 소리를 지르며 멀찍이 떨어졌다. 지민은 입 안의 물을 다 뿜고도 사래가 들려 켈록 댔다. 뭐, 뭐라고? 자꾸 기침이 나와 눈물 맺힌 눈을 하면서도 설을 보며 되묻는 지민에, 설은 드릅다는 표정을 지우지 않은 채 다시 제자리로 왔다. 김태형 금마가 니 진짜 좋아한다고, 마음이 잘 맞는갑제. 지민은 설의 말을 들으며 제 가슴팍을 툭툭 쳤다. 심하게 기침을 해서 폐까지 아픈 느낌이었다. 근데 뭐 그리 격하게 반응하는데. 설의 물음에 지민은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태형은 가만히 지민을 바라봤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묘하게 지민이 자신을 피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신을 피할 이유가 없어서 그냥 기분 탓이려니 넘어가고 싶어도, 지민은 너무 티가 났다. 저와 시선이 마주치면 급히 눈을 내리깐다던지, 자신이 지민에게 다가가려 하면 누가 봐도 어색하게 옆 친구를 불러 이야기를 한다 던지. 뭐지. 갑자기 왜 저렇게 피하지. 태형은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에게 다가가 왜 이렇게 나 피하느냐고 물어볼 정도로 태형은 적극적이지 못했다. 적극적? 이런 상황에 쓸 수 있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태형은 그랬다. 그래, 어쩐지 낯간지러웠다. 지민은 아무 생각 없는데 자신이 괜히 어림짐작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넘겨짚은 거면 그거대로 민망한 상황이기도 했다. 그래서 태형은 그 이상 지민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태형아, 나, 그, 집에... 집에 급한 일이 있어서 빨리 가봐야 할 것 같아.
시선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몰라 눈만 도르륵 굴리며 더듬더듬 말하는 지민에, 태형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지민은 살짝 밝아진 표정으로 어색하게 손을 흔들며 내일 봐 하고 상투적인 인사를 건넨 후 교실을 나섰다. 교실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애들은 나간 지 오래지만, 태형은 굳이 서둘러 교실을 나가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교실을 괜히 한바퀴 돌다가 제자리로 돌아와 옆 책상을 손으로 쓱 쓸어봤다. 지민이 온지 한 달도 넘었지만 아직 지민이 익숙하지 않을 때가 있었다. 지민을 볼 때마다 새로운 느낌이었다. 처음 그를 봤을 때처럼 어딘가가 간질간질 했고 멍해지기도 했다. 그의 목소리로 듣는 태형아도 이미 수백 번을 들었지만 가끔 낯선 느낌도 들었다. 에이. 태형은 제 머리를 살짝 헝클이며 교실을 나섰다. 자물쇠로 꼼꼼히 교실 문을 잠그고 발꿈치를 들어 문틀 위쪽에 열쇠를 두었다. 지민이 처음에 여기 왔을 때, 이맘 때 즈음이면 서서히 노을이 지기 시작했는데 요새는 하늘이 붉어질 기미 없이 원한 낮같았다. 해가 길어졌다.
혼자서 하교를 하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그와 함께 다닌 지 불과 한 달 조금 넘었을 뿐인데 혼자 다닌 3년이란 세월이 무색하게 지금 이 길이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옆에서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재잘거리는 소리가 없으니 조용했다. 태형은 괜히 귀를 만지작거렸다. 언제부터 그 애가 이렇게 당연해졌나. 알 수 없었다.
얕은 시냇물을 가로지르는 징검다리 한가운데 지민이 쭈그려 앉아있었다. 하마터면 지민인 줄 모르고 그냥 지나칠 뻔 했다. 집에 급한 일이 있다더니 넓적한 돌 위에 쭈그려 앉아 있는 모습이 퍽 여유로워 보였다. 애초에 집에 급한 일이 있다던 그의 말을 믿지는 않았다. 시냇물 속을 유심히 보고 있으니, 그의 동글동글한 정수리가 드러났다. 옛날부터 생각한 것이지만, 동글동글한 그의 머리를 보면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을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조용히 다가갔다. 그에게 장난 칠 생각은 아니었다. 시냇물 속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집중하는 것을 방해 하고 싶지 않았다. 한 발짝 한 발짝 넓적한 돌을 밟으며 그에게 가까워졌다.
서쪽으로 꽤 기울어진 해는 여전히 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따스한 이라고 하기에 6월의 햇살은 조금 따가웠다. 지민은 자그만 등으로 그 햇빛을 흠뻑 받으며 계속 앉아있었다. 이쯤 되면 궁금해지는 것이다. 대체 지민이는 시냇물 속 무엇을 저렇게 집중해서 보고 있는 걸까. 이제 지민과의 거리는 불과 돌 하나 정도였다. 태형은 힐끔 시냇물 속을 봤다. 워낙 물은 맑고 수심은 얕으니 그 속이 훤히 보였다. 냇물의 바닥을 채우고 있는 조약돌들은 물 때문에, 햇빛 때문에 반짝반짝 빛나 보였다. 지민이 무엇에 시선을 뺏겼는지 알 것 같았다. 조심히 한 발을 뻗었다. 신발과 돌이 맞닿으며 탁 소리가 났다. 지민이 홱 고개를 돌렸다. 찰나의 시간에 시선이 얽혔다. 지민은 갑자기 나타난 태형 때문에 놀라 눈이 커지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무 급하게 일어났는지 그의 발은 중심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아, 하는 순간 몸이 기울어졌다. 태형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태형은 몸이 먼저 반응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언제나 생각을 먼저 했고 무언가를 서두르게 하는 법이 없었다. 그게 말이든 행동이든. 그러니까, 이렇게 몸이 먼저 반응해서 지민을 감싸 안은 것은 태형 본인이 느끼기에도 굉장히 낯선 행동이었다는 것이다.
첨벙 시원한 물소리와 함께 차가운 물이 온 몸을 적셨다. 눈을 꾹 감고 있던 지민은 갑자기 맞은 물벼락에 움찔 몸을 떨었다가 천천히 눈을 떴다. 바로 앞에 보이는 태형에 화들짝 놀라 몸을 뒤로 빼려 했지만, 제 허리를 감고 있는 태형의 팔 때문에 움직일 수 없었다. 물에 흠뻑 젖어 축 처진 머리를 한 태형은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아파... 나직이 말하는 태형에 지민이 안절부절 못했다. 어... 어떡해, 괜찮아? 걱정스러워 하는 지민의 얼굴을 가만히 보던 태형은 바닥을 짚고 있던 손을 내밀었다.
이거.
......
이거 보고 있던데.
아...
붉은끼 돌고 반짝반짝 빛나는 돌이었다. 물속에서 햇빛을 받아 빛나는 것이 예뻐서 계속 보고 있었다. 그 새 이걸 또 봤네. 지민은 그의 손바닥 위에 놓여 있는 돌을 조심스레 가져갔다. 물속이라서 빛나는 줄 알았더니, 돌 자체가 빛을 잘 받아들이는 모양이었다. 나, 가져도 돼? 지민의 물음에 태형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춥다. 태형의 나직한 말에 지민이 깜짝 놀라 허둥지둥 태형의 위에서 일어났다. 긴 교복바지가 물에 젖어 다리에 착 달라붙었다. 태형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형은 지민보다 더 많이 젖어있었다.
신발 안에 물이 잔뜩 들어가 걸을 때마다 차박차박 소리가 났다. 길에는 물 자국이 났다. 지민은 왠지 모를 민망함에 태형보다 조금 더 뒤에서 종종걸음을 했다. 집에 먼저 간다고 했으면서 개울가에 놀고 있던 나를 보고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괜히 마음 심란해서 피해보려고 했다가 더 민망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지민은 제 머리를 쥐어뜯다가 갑자기 뒤돌아 본 태형과 눈이 마주쳤다. 순간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만 돌았다. 지민은 멍한 표정으로 머리카락을 쥐고 있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양쪽으로 붕 뜬 머리를 정리했다. 흠흠. 헛기침만 했다.
다음주 쯤에, 별 보러 갈래.
... 어?
뜬금없는 말이었다. 그가 별을 보러 간다는 말인지, 별을 보러 갈래? 하고 물어보는 말인지 순간 생각할 정도로 높낮이가 없었다. 별, 보러가자고. 태형이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아... 지민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태형은 다시 뒤돌아 천천히 집으로 걸어갔다. 지민은 조금 더 빠른 걸음으로 태형의 옆에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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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뷔민의 계절이 왔네요
여름만 되면 왜 이렇게
시골 소년 뷔민이들이 생각 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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