뷔민 남고생의 일상
길/남고생의 일상 (完)1. 공식 색시와 공식 또라이
박지민은 마고 공식 색시다. 지민은 그 별명을 들을 때마다 온 몸에 털이란 털은 다 기립 할 정도로 소름이 끼친다. 대한의 건아, 시꺼먼 사내새끼가 들을 별명은 아니라고 본인은 침 튀겨가며 주장하지만 그럴 때마다 다른 친구들은 고개를 젓는다. 지민아, 너를 볼 때마다 목 놓아 색시라고 부르는 또라이를 먼저 설득 하는게 낫지 않겠냐.
김태형은 마고 공식 또라이다. 미친놈은 아니다. 그저 남들보다 조금 많은 호기심과, 남들보다 조금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냥 평범한 우리는 그의 행동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뿐이다. 그래도 애는 착하거든요. 변명으로 하는 소리가 아니라 레알 착하고 순수하다. 어쩌면 그 순수함에서 별난 모습이 나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김태형은 박지민을 색시라고 부른다. 그 이유는 그 둘 빼고 아무도 모른다. 고등학교 올라와서 그 호칭을 처음 들은 애들은 경악을 하며 저 애들 왜 저러냐며 물어본다. 그러면 같은 중학교 다니던 애들이 말하겠지. 몰라 나 중학교 때 처음 봤을 때부터 저랬어. 같은 초등학교 다니던 애들도 말한다. 몰라 나 초딩 때 처음 봤을 때도 저랬어. 같은 유치원 다니던 애들도 말했다. 몰라 썅 유딩 때를 어떻게 기억해, 그냥 김태형은 박지민 이름 부른 기억이 없어.
김태형, 너 얘 이름 뭐야. 한번은 애들이 김태형을 박지민 앞에 친히 대려놓으며 물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끌려 온 태형은 지민의 얼굴을 보고 씩 웃으며 말했다. 우리 색시네? 아니 병신아 이름. 우리 색시 이름은 지민인데. 이름을 말하는 걸 보니 이름을 모르는 것도 아닌데 왜 하필 색시라고 부르는지, 마고의 미스테리로 남아있다.
김태형은 남이 박지민을 색시라고 부르면 얼굴 싹 굳히고 목소리까지 깔며 존나 인생에 다시는 없을 살벌한 표정으로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한다. 그 표정을 보고 목소리를 들은 애들은 다시는 지민을 보고 색시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원래 착하고 잘 웃고 그런 애가 화나면 더 무섭다고, 김태형이 딱 그런 부류였다. 착하고 순수하다고 멍청하고 호구는 아니다. 그런데 왜 자기는 색시라고 부르면서 남은 안되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지민을 색시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태형 말고는 없다.
둘은 어렸을 때부터 친했다. 지민은 태형을 처음 만난 날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분명 그지 같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다. 분명 처음 만난 날 뭔가 있었으니까 태형이 지금까지 지치지 않고 색시니 뭐니 낯간지럽다 못해 징그럽기까지 한 별명을 불러제끼는 것이겠지.
지민은 태형에게 별 짓을 다 해봤다. 그딴 식으로 부르지 말라고 설득도 해 봤고, 회유도 해 봤고, 개지랄도 떨어봤고, (쪽팔리지만) 울어도 봤다. 변하는 건 없었다. 시팔 그 새끼 존나 개또라이 맞다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멀쩡히 달릴 거 다 달린 사내새끼한테 색시라고 부를 리가 없어. 지민은 언젠가 이를 부득부득 갈며 다른 친구들한테 그렇게 말한 적이 있다. 친구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새끼, 무슨 생각 하는지도 모르겠다니까.
둘은 옆집 이웃이다. 가족끼리도 친한 사이다. 웃긴 건 가족들 앞에서도 태형은 지민이 보고 색시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더 웃긴 건 두 가족들 중 그 누구도 그런 태형을 말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얼마나 오래전부터 그렇게 불려왔으면 아들이 그런 소리를 듣고, 아들이 그런 소리를 하는데 안말리냐고. 그 말을 언제부터 들었는지, 언제부터 했는지도 기억 안나는 걸 보면 역시 제일 처음 만난 그 때겠지. 지민은 할 수만 있다면 태형과 만나서 그 소리를 들은 그 처음을 없애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어쨌든 저쨌든 다른 애들은 그들이 그렇게나 오래 된 사이인지 모를 정도로 둘은 함께 한 시간이 길었다. 죽이네 살리네 해도 결국 서로를 제일 잘 아는 것은 서로였고, 무슨 일 나면 가장 먼저 부르는 게 서로였다. 아닌 척 하면서도 사실은 가장 의지 하는 사람이 서로였다. 불알친구는 그런 것이었다.
2. 그들의 하루.
아침잠은 오지게 많은 태형 때문에, 그를 깨우는 것은 항상 지민의 몫이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가볍게 스트레칭 하고, 씻고, 교복으로 갈아입고 바로 태형의 집으로 들어가 자연스레 이모한테 인사하고 태형의 방으로 들어가는 것은 이제 일상이다.
태형을 깨우는 것은 꽤나 체력이 소모 되는 일이다. 지민은 방문을 거칠게 열며 매고 있던 가방을 아무대나 벗어둔 채 천천히 침대로 다가가다 그대로 태형의 위로 날랐다. 곤히 자고 있던 태형은 갑자기 하늘에서 5톤짜리 쇳덩이가 자신의 몸을 깔아뭉개는 꿈을 꾸었다. 그 꿈이 더욱 무서운 것은 뭉개지는 느낌이 그대로 느껴졌다는 것이다.
아아 씨바 지짜...으으...무거...
뭐라 웅얼대면서도 기어코 눈은 뜨지 않는 태형의 의지에 지민은 혀를 찼다. 이 새끼는 이 집념으로 공부하면 진작에 서울대 조기 입학 한다. 지민은 태형의 위에 엎어진 채로 그를 안아 뒹굴뒹굴 몸을 흔들어댔다. 김태, 일어나라 진짜. 지민이 혼잣말 하듯 중얼거렸다. 태형은 여전히 조용했다.
역시 이 정도로는 안 일어나는군. 지민은 다시 한 번 몸을 날릴 요량으로 상체를 살짝 일으키자마자 태형이 갑자기 그의 손목을 잡고 순식간에 몸을 돌려 자세를 바꾸었다. 윽! 갑자기 일어난 일에 지민은 순간 당황해 억눌린 신음이 튀어나왔다. 등에 닿는 땃땃한 온기와 함께 푹신한 매트의 촉감에 당황을 넘어서 당혹스러울 지경이었다. 태형은 그대로 지민을 안아 어깨부근에 볼을 부빗거렸다. 으으... 우리 색시네... 목소리는 잠이 잔뜩 묻어있는데 잠결인지 뭐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이 행동에 결국 지민은 한 손을 들어 태형의 머리카락을 잡고 올렸다.
아아아!! 아파! 아파!
너 내가 이딴 장난 치지 말랬지.
아아아아 알았어 알았어 아아 아프다고!
어디서 개기름 묻은 머리를 비비고 있어. 일어났으면 퍼뜩 화장실로 안 가?!
아아...
어디서 앙탈짓이야. 빨리 꺼져 나 무거워.
색시 맨날 내 위에 있더라.
몰랐어? 난 매일을 널 압사 시킬 생각으로 누른거였는데.
아 어쩐지 맨날 쇳덩이에 눌리는 꿈을 꾸더라니.
태형은 자리에 일어나 터덜터덜 화장실로 향했다. 지민은 일어나려다가 침대의 유혹 못이겨 결국 다시 누웠다.
지민이 매일 태형을 깨울 때마다 그는 지민을 안는 버릇 했다. 처음에는 돌았냐며 징그럽다며 온 몸으로 거부했지만 이제는 그러려니 한다. 어차피 김태형은 자신이 하고 싶으면 무조건 다 해야 직성이 풀리는 놈이었고, 그가 꽂히는 일이 있으면 옆에서 발가벗고 춤을 춰도 눈길 한 번 안 줄 애 임을 잘 알기 때문에 그냥 포기 하는 게 속 편했다. 또라이잖아. 그냥 넘기는 거다 그렇게.
어우 이러다 자겠다. 지민은 태형이 화장실에서 씻는 동안 자리에서 일어나 이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김태 빨리 씻어, 이러다 지각하겠다고! 알겠어! 지민의 외침에 화장실 안에서 태형의 목소리가 울렸다.
지민은 먼저 1층으로 내려와 미리 차려놓은 식탁에 앉아서 밥을 먹기 시작했다. 태형의 어머니는 항상 지민과 태형, 두 사람분의 밥를 차려 놓고 회사 나가고는 했다. 아싸 된장찌개랑 계란말이. 지민은 으흥흥 콧노래를 부르며 토실토실한 계란말이를 젓가락으로 콕 찍어 입에 넣었다. 아 존나 맛있다. 지민은 입 안을 깔끔히 비우고 하나 더 찍어 입 안에 넣으려는데 머리 위로 무언가 묵직한 게 내려앉았다. 윽. 갑자기 내려오는 묵직한 무게에 절로 목이 수그려진 지민의 입에서 절로 억눌린 신음이 나왔다. 거기다 다서 거칠게 쓰다듬는 손길에 지민은 결국 젓가락을 탁 소리 나도록 내려놓았다. 야 이 씨발, 밥 먹을 땐 개도 안건들인다고 했지! 지민은 머리 위에 얹어진 태형의 손을 거칠게 쳐내며 바락 소리 질렀다.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형은 킬킬대며 냉장고 문을 열어 물을 꺼낼 뿐이었다. 씩씩대며 태형을 노려보던 지민은 다시 자리에 앉아 식탁에 툭 떨어진 계란말이를 손으로 집어 입 안에 넣었다.
아 엄마 또 된장찌개 끓였어.
뭐가. 맛만 좋구먼.
싫어.
계란말이라도 먹어.
너나 다 쳐먹으세요.
이렇게나 많이 있는데?
너 다 먹어.
태형은 식탁 구석에 있는 바나나를 하나 떼어 껍질을 까기 시작했다. 지민의 눈이 얍실해졌다. 야 너는 그 바쁜 와중에도 어머니가 밥을 해놓고 가셨는데 진짜 싸가지 하고는. 지민의 타박에 태형은 인상을 찌푸렸다. 맨날 된장찌개잖아, 맨날.
울 엄마는 색시를 더 좋아해.
뭔 소리야 또.
맨날 니가 좋아하는 밥만 해주고, 내가 좋아하는 건 하나도 안해주고.
맨날 고기 아니면 햄버거 그런 것만 찾는 너한테 대체 어떤 걸 해줘야 하냐.
지민의 말에 할 말이 없는지 입만 불퉁하게 내밀며 껍질만 깠다. 지민은 숟가락을 들어 제대로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맛있는 걸 왜 안먹는데? 지민은 일부러 더욱 오버스럽게 먹었다. 태형은 꽤나 편식이 심한 편이라 억지로라도 먹이지 않으면 굶는 일이 허다했다. 그러니까 애가 살이 안찌지. 지민은 가끔 태형의 몸을 보면 절로 혀 차는 소리가 나왔다. 싫어 안먹어. 단호한 태형의 말에 지민은 결국 포기했다. 그래 나중에 배고프다고 찡찡거리지나 말아라.
너 내가 아무렇게나 교복 벗지 말라고 했지!
지민의 타박이 또 이어졌다. 태형은 잠옷바지를 벗은 채 뻘쭘하게 침대에 앉아 있었다. 어후 씨발 대체 집에 오면 옷을 어떻게 벗길래 지 교복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냐고! 계속 무어라 욕 하면서 온 집안을 뒤지는 지민을 멍하니 보던 태형은 얌전히 셔츠로 갈아입기 시작했다.
어제 내가 교복을 어디다 뒀더라. 잘은 기억 안나지만 셔츠와 넥타이는 찾았다. 니트와 마이, 바지만 찾으면 되었다. 지민은 태형의 옷장과 행거, 빨래통, 거실 구석구석 찾아다녔다. 이젠 진짜 시간 없는데! 지민의 빽소리와 함께 태형의 우렁찬 소리가 들렸다. 찾았다!
태형의 남은 옷은 의자에 있었다. 의자에 올려놓은 채 책상으로 밀어 넣었으니 잘 보이지 않는 게 당연했다. 지민은 허탈감에 말도 안나왔다. 제 마음은 아는지 모르는지 넥타이와 니트 조끼를 양손에 든 채 헤헤 웃고 있는 태형의 모습에 결국 지민은 손을 내저으며 방을 나섰다. 알아서 갈아입고 나와라.
그들이 다니는 학교는 집에서 걸어서 20분 정도 걸리는 곳에 있었다. 주택이 늘어서 있는 거리를 나와 큰 길로 계속 걸어가기만 하면 학교가 나온다. 태형과 지민은 유치원생 때부터 함께 이 거리를 걸었다.
편의점 들릴거야?
아니 들리면 늦어. 나중에 매점 들릴거야.
많이 먹지마라. 그러다 또 점심 거를라.
매점 햄버거 사 먹을래.
태형의 말에 지민이 질린다는 표정으로 태형을 쳐다봤다. 그런 거 작작 먹어, 진짜. 지민의 말을 가볍게 무시한 태형은 저 멀리 보이는 친구를 향해 손을 들어 인사만 할 뿐이었다.
태형과 지민은 같은 반, 짝이었다. 너희는 진짜 징그럽지도 않냐. 친구들의 타박에도 어깨만 으쓱할 뿐이었다. 아마 태형이 갑자기 심경의 변화가 생겨 나 이제 너랑 짝 안할래 하지 않는 이상, 이 자리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처음에는 지민도 다른 친구랑 짝도 해보고 싶었지만 이제는 거의 포기 상태였다. 자신과 짝 할거라고 지랄지랄 하는 태형을 도저히 이길 자신이 없었다. 어찌보면 선생님들의 배려 같은 거였다. 태형이 반이나 자리 같은 걸로 깽판을 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 선생님들도 거의 반포기로 붙여주시는 듯 했다. 그럴 때마다 창피해서 얼굴을 못 드는 건 지민 몫이었다.
자, 김태형 색시 모십니다!
우워어어!!!!
지민이 먼저 교실 문 열고 들어오기 무섭게 외치는 정우의 말과 다른 애들의 함성에 지민의 얼굴이 와자작 썩어 들어갔다. 이 씨발 내가 그렇게 부르지 말랬지! 시뻘게진 얼굴로 씩씩대며 정우에게 달려든 지민이 그를 주먹으로 마구 때려댔다. 와하핳 웃으며 그의 주먹을 다 받아내는 정우도 여간 얄미운 게 아니다. 씩씩대며 정우를 흘겨보는 지민의 어깨 위로 태형의 팔이 턱 걸쳐졌다. 애 작작 좀 놀려라 진짜. 어쩐지 낮게 깔리는 듯 한 태형의 말에 정우는 알아서 몸을 사렸다. 정우는 지민이 모를 태형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 저 새끼 괜히 소문이 그렇게 험하게 난 건 아니지. 아직도 태형을 주먹 하나 못쓰는 마음 여리고 착한 아이라고 생각하는 지민이 안타까울 정도다. 아니, 정정한다. 지민 한정 마음 여리고 착한 애이기는 했다. 그래도 태형이 한때 이 동네를 휩쓸고 다닌 것이 태형을 질투한 누군가가 퍼뜨린, 말도 안되는 개소문이라고 믿고 있는 것은 좀 아니지 않은가. 지민은 태형의 말을 너무 잘 믿었다. 김태형 저 자식, 박지민한테 이미지 메이킹 끝내주게 하긴 했지.
지민과 태형의 자리는 뒷문 쪽 제일 끝자리였다. 지민은 앞자리에 앉고 싶었지만 태형의 억지에 결국 그 자리에 앉은 것이었다. 덕분에 지민은 수업시간마다 몸을 양 옆으로 기웃거리며 칠판을 봐야했다. 그 모습이 또 웃기다고 킬킬대는 태형을 노려보기도 했다. 알았지? 다음달에는 꼭 내가 앉고 싶은데 앉는 거다. 지민이 그런 말을 할 때마다 태형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았다니까.
태형이 그 자리를 고수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야 물론 문이랑 제일 가까우니까. 점심시간에 제일 유리한 자리가 그 자리였다. 다리를 몰래 한 발 빼도 잘 들키지 않았다. 혹여나 종 치자마자 바로 몸을 일으키다 선생님이 아직 안마쳤는데 움직인 사람 나오라 해도 아닌 척 할 수도 있었다. 어차피 앞자리에 우르르 일어난 애들 때문에 가렸을테니. 그렇게 밥 먹는 데만 목숨을 거는 태형을 볼 때마다 지민은 끌끌 혀를 찼다. 빨리 가도 늦게 가도 어차피 밥 다 먹어. 지민의 말에도 태형은 극구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게 아니야. 맨날 뭐가 아닌지 지민은 태형이 단호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할 때마다 머리를 쌔리고 싶었다. 그딴 계산 할 시간에 교과서나 한 자 더 읽어라, 새꺄.
지민의 입장에서 태형이 정말 신기한 게 아침 자습시간 때부터 제대로 잘 준비를 하고 엎드려 세상 업어가도 모를 만큼 깊이 잠드는 놈이 이상하게 4교시 끝나기 10분전에는 꼭 일어난다는 것이다. 지민이 수업에 열중하다 옆에서 엎드려 있던 태형이 갑자기 스스스 상체를 일으키는 모습을 보고 화들짝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언제 한번은 정말 좀비처럼 스스스 일어나는 태형에 놀란 지민이 들고 있던 샤프까지 집어던지며 소리를 지른 적도 있었다. 아니 제발 그렇게 좀 일어나지마. 태형은 지민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럴 수밖에. 태형은 자신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전혀 모른다.
4교시 땡 치는 순간 교실 문이 열리며 학생들이 마치 물소 떼처럼 미친 듯이 급식실을 향해 달렸다. 지민은 그렇게 밥에 대한 욕심이 많은 편이 아니었지만 태형이 제 손목을 잡고 뛰는 바람에 억지로 같이 발을 맞춰줘야 했다. 이것도 3학년들이 교실에서 밥을 먹으니 할 수 있는 거지, 만약 3학년들도 급식실에서 밥을 먹는다면 종치자마자 뛰어나가는 바보 같은 행위는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지민은 생각했다.
태형은 발이 빠른 편이었다. 정말 신기한 게 태형은 항상 급식실에 들어오는 순서 TOP 3 안에 들었다. 이런거나 톱에 들지 말고 공부나 톱에 들어봐라. 지민의 말에 태형은 웃어보였다. 괜찮아, 뒤에서 톱도 톱이야. 지민은 할 말을 잃었다.
이모! 이거 많이 주세요 많이 많이 에헤이 이모 좀만 더, 우왓 감솨함돠!
태형은 결국 제육볶음을 흘러넘칠 정도로 받아와 뿌듯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봐봐 색시야, 빨리 오면 이렇게 음식 흥정을 할 수가 있어요. 응, 그래. 지민은 태형의 말을 들은 척도 안하고 젓가락으로 고기를 제 급식판으로 나르기 바빴다. 와 김태형 뭐냐, 제육볶음 존나 니가 다 쓸어왔네. 지민의 옆에 자리를 잡은 정우도 젓가락을 들고 태형의 급식판을 향해 내밀자 태형이 자신의 젓가락으로 쳐냈다.
넌 안돼, 새끼야.
뭔데. 차별이다.
응, 차별이야. 내가 색시 주려고 가져온거지 너 주려고 가져온 거 아니거든.
와 씨발, 드러워서 안먹는다 드러워서. 개치사해 진짜.
정우는 결국 자신의 몫으로 나온 제육볶음을 전부 밥 쪽으로 쓸어와 비비기 시작했다. 차례로 옆자리를 채운 다른 친구들이 태형이 가져온 제육볶음의 양을 보고 엄지를 치켜들었다. 와우 김태형 리스펙. 리스펙은 개뿔 야 치워 어차피 저 새끼 너희들한테 안나눠줘. 입 안 가득 밥을 문 채 말하는 정우에, 친구들이 바로 엄지를 접었다.
지민과 태형은 1학기 야자를 신청하지 않았다. 김태형은 오랫동안 학교에 있으면 온 몸에 곰팡이가 스는 병에 걸렸다고 선생님께 말도 안되는 구라를 치며 빼달라 사정사정을 해서 뺐다. 지민은 독서실에 다니겠다고 해서 뺐다. 선생님은 지민의 말을 잘 들어주시는 편이었다. 공부도 굉장히 잘하는 편이고 전체적으로 선생님한테 이쁨 많이 받는 스타일이었다. 지민의 말이라면 어느 정도 믿어 주시는게 있었다. 실제로 지민은 학교 교실처럼 탁 트인 공간 보다는 독서실처럼 꽉 막힌 곳에서 더 집중이 잘 되었다.
지민이 다니는 독서실은 학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 사거리를 두고 왼쪽으로 가면 주택단지와 함께 독서실이 나왔고, 오른쪽으로 가면 번화가가 나왔다. 태형은 곧잘 오른쪽으로 갔고, 지민은 거의 왼쪽으로 갔다.
색시, 오늘만 놀자.
신호등에 초록불이 켜져 건너려던 지민은, 태형의 손에 걸음을 멈추고 돌아봤다.
뭔 오늘만이야. 너 맨날 놀잖아.
아니, 너 말이야. 오늘만 같이 놀아줘.
싫어. 빨리 이거 놔.
오락실 가고 싶은데 혼자 가면 재미없잖아.
혼자서 재미없으면 네가 내 독서실 따라 오던가.
미쳤냐! 감옥에 내 발로 들어가게.
이봐요. 저는 그렇게 돈이 넘쳐나는 도련님과는 다르게 평범한 집에서 살거든요. 효도하려면 국립대를 가야 돼. 이게 무슨 말인지는 알겠냐?
야 우리집이 무슨 돈이 넘쳐나냐. 우리집도 그렇게 부자 아니야.
지금 그게 요점이 아니잖아.
아 씨발 신호 놓쳤어! 지민은 빽 소리를 질렀다. 아 빨리 놔, 평일에는 너 장단 맞춰 줄 시간 없어. 지민의 말에 태형은 눈에 띄게 풀이 죽었다. 다음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던 지민은 힐끗힐끗 태형을 눈치보다 결국 제 뒷머리를 헝클였다. 에이씨 야, 오락실 어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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