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뷔민 남고생의 일상 5

길/남고생의 일상 (完)


1. 과거

 

지민과 태형은 굳이 따지자면 태어났을 때부터 친구를 했을 운명이었다. 엄마는 엄마끼리 아빠는 아빠끼리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였기 때문이다. 완전 갓난아기 때야, 태형과 지민도 기억을 못하니까 사진으로만 아 우리 이때도 만나기는 했었구나 할 뿐이었다. 가끔씩 모임으로만 만났던 그들은 지민이네 가족이 태형이네 가족 옆집으로 이사 오고 나서 거의 제 집처럼 자주 왕래를 하게 되었다. 그 때가 지민과 태형이 4살 때 일이었다.

 

태형은 창밖으로 사람들이 커다란 짐을 들고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것을 바라봤다. 태형아 우리 옆집에 태형이 친구가 왔어. 엄마는 태형을 보며 말했다. 태형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엄마를 바라봤다. 지민이 기억하니? 엄마의 말에 태형은 고개만 갸웃해보였다. 하긴, 너무 애기 때만 몇 번 만났고 그 이후로는 잘 만난 적이 없었다. 기억할리 만무했다. 엄마는 웃으며 태형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나중에 태형이 친구 만나러 가볼까? 칭구? 태형은 친구라는 말에 제자리에서 통통 뛰었다. 칭구! 칭구! 태형은 그대로 제 방에 우다다 들어가 자신이 제일 아끼는 장난감을 한아름 들고 왔다. 칭구! 엄마는 장난감을 한아름 손에 든 채 자신을 올려다보는 태형을 보며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그거 태형이 친구 줄거야? 엄마의 물음에 태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 손 잡고 천천히 걸었다. 장난감을 다 가져갈 수 없어 태형은 그 중에서도 가장 아끼는 사자 인형을 다른 손에 쥐고 갔다. 어머, 태형아 많이 컸네. 문이 열리면서 무척이나 아름다운 여자가 나왔다. 태형은 그 여자를 한참이나 올려다보았다. 여자는 웃으며 시선을 마주하고 앉아 태형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머 애가 낯가리지도 않네. 그녀의 말에 엄마는 푸핫 웃어보였다. 성격 완전 나 닮았어, 난생 처음 보는 사람들만 있는 곳에 가도 어느새 무릎 위에서 놀고 있더라니까. 어머 그건 좀 걱정이겠다, 요즘 세상이 하도 흉흉해서. 그래서 나도 맨날 얘 손 꼭 잡고 다녀. 우리 지민이가 태형이 반만 닮았으면 좋겠다, 애가 하도 낯을 많이 가려서 자주 울어.

 

태형이 앞에서는 안울었으면 좋겠네. 그녀는 태형을 보며 환히 웃었다. 태형은 멀뚱히 그녀의 얼굴을 보다가 따라 웃어보였다. 지민이는 방에 있어, 혼자서 노는 걸 좋아해서. 그녀는 태형과 엄마를 방까지 안내했다. 지민아. 엄마는 조용히 지민을 부르며 문을 열었다. 열린 문틈 사이로 태형은 빼꼼 고개를 내밀어 방 안을 바라봤다. 방 안에는 또래 꼬마가 인형을 안은 채 책을 보고 있었다. 그는 방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바라봤다. 그러다 태형과 눈이 마주쳤다.

 

태형아, 들어가봐. 엄마는 태형의 손을 잡고 지민의 앞까지 다가갔다. 태형은 멀뚱히 서서 바로 앞에 있는 지민을 내려다 봤다. 지민은 다리를 쭉 뻗고 품에 인형을 안은 채 두 손으로 책을 잡고 태형을 바라보며 눈만 끔뻑였다. 안우는 거 보니 태형이 얼굴은 익숙한가? 그녀가 작게 중얼거렸다.

 

태형은 멍하니 지민을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얘가 내 새시야? 잠시 방 안에는 정적이 돌았다. 태형은 가만히 지민만 내려다보았다. 지민은 영문 모른 채 고개만 갸웃거렸다. 두 엄마의 시선이 서로 부딪쳤다. 옛날부터 장난기 많았던 둘이었다.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애써 감추며 지민을 부추겼다. 지민아, 신랑 해줘야지 신랑. 제 엄마가 푸흐흐 웃으며 하는 말에 지민은 따라 웃었다. 신낭? 제 말에 환하게 웃는 엄마를 보며 지민은 더욱 해맑게 웃었다. 신낭! 신낭! 결국 두 엄마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태형과 지민은 그저 제 엄마가 웃는 것을 보며 따라 헤 웃기만 할 뿐이었다.

 

둘은 급속도로 친해졌다. 태형은 매일같이 엄마를 졸랐다. 엄마, 새시 보러 가쟈 새시. 그럼 엄마는 태형의 손을 잡고 옆집으로 놀러갔다. 옆집 초인종을 누르면 지민의 엄마가 문을 열고 아래에는 지민이 서 있었다. 새시! 태형이 지민을 안으면 지민도 같이 안아주었다. 모하까? 둘은 서로 뭐할지 정하면서 아장아장 지민의 방으로 들어가면 엄마들은 그들의 뒷모습을 흐뭇하게 보고는 했다.

 

근데에, 새시가 모야? 한창 기린 인형 가지고 놀고 있던 지민은 태형에게 물었다. 사자 인형을 가지고 놀고 있던 태형은 지민의 물음에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 어마가 그래써, 나중에 겨론하고 시픈 사람한테느은, 새시라고 부르는거래. 태형의 말에 지민이 다시 물었다. 신낭은 지미니랑 겨론 하고 시퍼? , 태태느은 나중에 새시랑 겨론 하꺼야. 태형은 바로 대답했다. 근데에, 겨론이 모야? 지민의 물음에 태형은 다시 심각하게 고민했다. 겨론은... 맨날맨날 가치 사는거야. 태형의 말에 지민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맨날맨날 가치 사라?

 

. 우리 어마 아빠처러엄, 맨날맨날 가치 살아.

 

우리 어마 아빠처럼? 그러엄, 우리 어마 아빠처러엄, 맨날맨날 뽀뽀하구우, 맨날맨날 가치 자?

 

. 맨날맨날 가치 살구, 맨날맨날 가치 놀아.

 

지미니도 겨론 하고 시퍼!

 

나두 새시랑 겨론 하고 시퍼. 나중에 크며언, 우리 겨론하자!

 

응응!

 

 

태형은 잠시 고민했다. 음음... 심각한 태형의 표정에 지민은 덩달아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태형을 쳐다봤다. 왜 그래에? 지민의 물음에 태형은 지민을 쳐다봤다. 우리 약쏙해. 태형의 말에 지민은 고개를 갸웃했다. 나중에 우리 둘이 겨론 한다고 약쏙해. 태형이 새끼손가락을 내밀며 하는 말에 지민도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짧은 두 새끼손가락이 서로를 걸었다. 나중에 어른이 되며언, 우리 두리 겨론하기로 약쏙함니다. 태형의 말을 지민이 따라했다. 약쏙함니다.

 

, 도장 이써야대! 태형의 큰 소리에 지민이 화들짝 놀랐다. 도쟝? 지민은 입술을 쭉 내밀며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러엄 지미니가 뽀뽀하믄 대게따, 뽀뽀도쟝. 지민의 말에 태형이 환하게 웃었다. 조아. 지민은 자리에서 일어나 태형에게 다가가 쪽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태형도 앉은 채로 고개를 올려 지민의 볼에 쪽 뽀뽀했다. 우리 이제 나중에 겨론 하는거다? 태형의 말에 지민이 꺄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2. 질투

 

씨발 이제 박지민도 가냐! 정우의 한이 맺힌 악에 옆에 있던 애들이 옳소! 옳소! 받아쳤다. 지민은 시끄럽다는 듯 두 귀를 막았다. 아까부터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다. 김태형은 존나 노려보지, 윤정우는 이제는 너까지 배신이냐며 의리도 없는 새끼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하 시발 그냥 집에 가고 싶다. 지민은 아예 책상에 엎드렸다.

 

사건은 오늘 아침 자습시간에 일어났다. 딱히 사건이랄 것도 없었다. 윤정우나 김태형이나 사건이라며 떠들어대지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아침 자습시간, 태형은 책상에 딱 붙어서 늘어져 있었고, 지민은 수학문제를 풀고 있었다. , 빡찜 누가 너 불러. 화장실 갔다가 들어오던 한 아이의 부름에 지민은 귀에 끼고 있던 이어폰을 빼내며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봤다. 또 댄동인가. 지민은 묘하게 의심미한 애의 미소를 미처 보지 못한 채 바로 뒤에 있는 뒷문으로 나가보았다. 아무도 없는 복도에는 한 여학생이 서 있었다. 무슨 일이야? 지민은 다가갔다. 여자는 지민을 보더니 우물쭈물 했다. , 저기... 지민은 직감했다. 아 또 김태형이다.

 

 

이거...

 

. 태형이한테 주면 돼?

 

, 아니...

 

그래 내가 잘 전... ?

 

 

지민은 익숙하게 말하며 편지를 받아들다 순간 당황했다. 내려다 본 여자의 얼굴은 수줍음이 가득했다. 그제서야 지민은 다시 그 편지를 내려다보았다. 분홍빛 가득한 편지는 누가 봐도 그런 편지 같은데... 지민은 다시 여자를 봤다. 그거 네 거야, 주고 싶어서... 난 가볼게! 여자는 살짝 고개를 숙인 후 후다닥 도망갔다. , 잠깐만! 지민은 다급히 불렀지만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뭐지... 지민은 머리를 긁적이며 들어가려고 몸을 돌린 순간 교실 창문으로 자신을 보고 있던 태형의 모습에 깜짝 놀라 빽 소리를 질렀다.

 

 

우와아아악!!! 아 씨발 진짜!!! 깜짝 놀랐잖아, 아 존나!!!

 

그거 뭔데.

 

. 아 진짜 심장아. 아 진심 여기서 심장마비로 죽는 줄.

 

그거. 분홍색. 그거 뭐냐고.

 

아 이거?... 그냥 주던데.

 

 

태형은 그 커다란 눈으로 지민의 손에 들린 분홍색 편지를 노려보다가 휙 창문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뭐야. 지민이 교실로 들어가자 자리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태형이 보였다. . 지민은 입만 뻐끔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분홍색 편지를 책상 위에 잠깐 올려놓자마자 태형이 홱 가져가 뜯어보기 시작했다. 뭐야 인마, 그걸 네가 왜 뜯어봐! 지민이 의자에 붙였던 엉덩이를 살짝 떼며 편지지로 손을 뻗자 태형은 손을 더 뒤로 뻗었다. 왜이래 진짜, 그거 내 거라고! 지민은 아예 몸을 다 일으켜 손을 더 뻗었다. 태형은 아예 몸을 뒤로 누워가며 손을 멀리하다가 결국 의자에서 우당탕 넘어졌다. 지민도 다리 중심을 잃어 그대로 엎어졌다. , 괜찮아? 지민이 깜짝 놀라 태형을 내려다 봤다. 머리 안다쳤어? 등은 괜찮아? 그러게 왜 그렇게 밑도 끝도 없이 몸을 젖혀! 지민의 말에도 태형은 입을 꾹 다문 채 지민을 올려다봤다. 머리 위로 높이 든 그의 손에는 아직까지 뜯다 만 편지가 있었다.

 

 

김태형. 너 진짜 막나간다. 이제는 남의 물건도 그렇게 마음대로 만지냐?

 

내가 좀 보면 안돼?

 

남의 편지를 네가 왜 보는데!

 

 

둘의 싸움을 중재 하는 건 정우 밖에 없었다. 자자 그만하고, 사내새끼들이 그깟 편지 가지고 왜들 싸우고 그래 무슨 연애편지냐? , 연애편지야. 태형의 말에 정우의 표정이 와자작 굳어 천천히 지민을 바라봤다. 지민이가 연애편지? 야 이 배신자 새끼야! 태형부터 시작해서 정우까지 빽 소리를 지르는 탓에 지민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아 인생...

 

그 뒤로 계속 저 상태다. 태형은 지민을 노려보기만 하고 정우는 친구의 연애편지가 그렇게도 충격적이었는지 눈만 마주치면 배신자 새끼라고 중얼거렸다. 인생 헛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주위에 있는 친구라고는 저런 또라이 새끼들 밖에 없다니. 지민은 후 한숨을 쉬며 결국 돌아온 제 편지를 내려다보았다. 태형의 손에 무자비하게 구겨지긴 했지만 그래도 안찢어진 게 어딘가 싶어 지민은 입구를 천천히 뜯었다. 태형이 아까 반은 뜯어서 손쉽게 봉투를 뜯어낼 수 있었다. 지민은 곱게 반으로 접힌 편지를 펴서 죽 읽어봤다. 요즘 같은 시대에 편지라니. 지민은 오묘한 기분에 천천히 편지를 다시 반으로 접었다. 좋냐? 옆에서 태형이 비아냥거렸다. 지민의 표정이 다시 굳어졌다.

 

 

넌 그렇게 시비조로 말을 해야 하냐?

 

좋으시겠지. 생전 처음 받아보는 연애편지인데.

 

......

 

색시가 연애편지 좋아할 줄 알았으면 나도 연애편지나 쓸 걸 그랬네.

 

 

입을 비죽이며 하는 말에 지민의 표정이 더 없이 썩어 들어갔다. , 넌 무슨 말을 그렇게 짜증나게 하냐. 태형은 말없이 지민을 노려봤다. 그의 무표정은 언제 봐도 무섭다고, 지민은 생각했다. 살면서 그가 태형의 무표정이나, 화난 표정을 볼 일은 거의 없었다. 실실 웃는 모습이나 멍청하게 멍 때리고 있는 모습이나 많이 봤지, 이렇게 살벌한 표정은 거의 처음이어서 지민은 사실 매우 당황스러웠다. 내가 이렇게까지 태형을 화나게 한 일을 했나 싶으면 그건 또 아닌 것 같았다. 아니 무슨 편지 하나 가지고 그래, 자기는 이것보다 몇백 배는 더 많이 받았으면서. 생각해보니 여간 짜증나는 일이 아니라, 지민은 들고 있던 샤프를 거의 집어던졌다. 그들의 싸움에 교실에는 무거운 적막만 돌았다. 교실 안 학생들이 모두 태형과 지민의 눈치만 봤다. 여태까지 싸운 일은 수도 없이 많이 봤지만, 이번 것은 장난 아니었다. 정우도 그걸 느꼈는지 섣불리 다가가지 못하고 눈치 보며 타이밍만 쟀다.

 

 

존나 어이없네. 나 지금 네가 왜 이러는지 하나도 모르겠거든.

 

......

 

나 좋아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그렇게 짜증 나냐? 모든 여자가 너를 좋아해야 해? 그래야 속이 풀려?

 

......

 

그 되먹은 생각머리를 도대체 어디서부터 뜯어고쳐야 할지도 모르겠네.

 

. 모든 여자가 날 좋아할지언정 넌 안돼. 널 좋아하면 안돼.

 

미친 새끼.

 

왜 이래. 나 원래 미쳤잖아.

 

 

지민은 입을 꾹 다물었다. 여태까지의 태형과는 너무 달랐다. 이건 장난이 아니다. 친구한테 질투하는 거, 존나 꼴사납지 않냐? 지민의 말에 허, 태형이 헛웃음을 쳤다. 넌 평생 나를 모를 거다. 태형의 뜬금없는 말에 지민은 태형을 바라봤다.

 

 

나 원래 질투 존나 심해. 그 누구한테든.

 

......

 

진짜 마음 같아서는 그 편지 찢어발기고 싶은데 네가 그렇게 극진히 아끼니까 참는 거야.

 

.

 

내 속 그만 좀 긁어. 그러다 진짜 큰일 난다.

 

김태형.

 

오늘은 네 얼굴 보기 힘드니까 따라 오지마.

 

 

태형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거칠게 열고 나갔다. 문 여는 소리가 어찌나 크게 울렸는지 옆 반에서 나와 힐끗 볼 정도였다. 김태형! 지민이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태형의 뒤를 따라 나가려다 정우가 지민의 팔을 잡아 말렸다. , 저 새끼 진짜 눈 돌아간 것 같으니까 따라가지마. 지민은 정우의 말대로 하는 수밖에 없었다. 저렇게 무서운 태형을, 지민은 처음 봤다.

 

 

 

 

 

내가 잘못했냐? 벌써 93번째 물어보는 지민에 정우는 한숨만 쉬었다. 아니, 네가 잘못한 거 아니니까 제발 밥 좀 쳐먹어. 정우는 기어코 제 식판에 있는 제육볶음을 숟가락으로 퍽퍽 퍼서 지민의 식판에 옮겨주었다. 아니 진짜 걔는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마구 머리를 헝클이다 식탁에 쾅 주먹을 내려친 지민이 씩씩거렸다. 그 이후로 태형은 교실에 들어오지 않았다. 태형이는 어디 갔냐는 선생님의 말에 대충 아파서 보건실에 갔다고 둘러댔지만, 지민은 그 이후로 태형을 볼 수 없었다. 점점 이성을 차리고 보니 후회되기도 하고 의문이 들기도 했다. 존나 이상한 말만 해대고 말이야. 지민은 입 안 한가득 밥을 쑤셔 넣었다. 그래도 난 처음 받은 고백인데 축하 해주면 어디가 덧 나냐고. 이번에는 숟가락으로 제육볶음을 한가득 퍼서 입 안에 쑤셔 넣었다. 분노에 찬 씹기에, 정우는 안쓰럽게 지민을 쳐다봤다. 그래... 너도 또라이 친구 둬서 고생이 많다...

 

 

김태형 저렇게 화난 거 처음이라서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네.

 

저런 모습 처음 봤다고?

 

애가 좀 또라이 같아도 워낙 착한 애라서 화 잘 안내.

 

... , 그래.

 

 

정우는 어색하게 대꾸하며 아이스크림을 한입 깨물었다. 중학교 때 일 얘기하면 존나 기절하겠네... 정우는 중학교 때의 태형을 생각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김태형이 그렇게 정색을 하며 지민이한테 얘기하지 말라고 하는 이유가 있었다. 지민은 태형의 다른 모습을 전혀 몰랐다. 자신이 보는 태형이 그의 전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위험한 생각이었다.

 

하아. 또 한 번 한숨을 내쉬는 지민을 보던 정우는 아이스크림을 한입 더 깨물었다. 근데 진짜 좀 이상하긴 하네. 정우가 문득 말했다. 지민은 감흥 없는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려 정우를 바라봤다. 친구가 연애편지 받았다고 그렇게 질투 하냐? 그건 질투가 아니라 그냥 분노 수준이던데. 정우의 말에 지민이 또 하아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가끔 걔 생각을 모르겠다고.

 

걔 생각을 아는 애 나오면 걔도 또라이인거지.

 

이러다 영영 다시 화해 못하는 거 아니야?

 

? 그건 진짜 아니다. 설마 아무리 그래도 자기 색시를 버리겠어.

 

아 존나 그 단어 꺼내지 말라고. 김태형으로도 족하니까.

 

근데 너 그 애랑 사귈 거야?

 

?

 

 

그 여자애 말이야. 정우는 마지막 한 입 남은 아이스크림을 입 안에 넣었다. 지민은 두 손으로 얼굴을 받친 채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어차피 연애는 관심도 없어, 사귈 생각도 없었단 말이야. 지민의 말에 흐응. 정우가 반응을 해주었다. 그럼 그냥 김태형한테 그렇게 말해. 지민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정우를 바라봤다. 정우는 그런 지민의 표정을 보고 자신이 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 김태형 네가 더 잘 알잖아.

 

 

걔 존나 단순한 거. 너 그냥 연애 관심 없다고 해. 그러면 걔도 널 질투할 이유도 없을 거 아니야.

 

아 근데 왜 나를 질투하지? 걔가 뭐가 아쉬워서? 진짜 편지 이 꼴랑 하나 나한테 왔다고?

 

... 그럼 혹시...

 

... 혹시 뭐.

 

그 여자애를 질투하나?

 

... 뭐래 썅. 네 말을 듣고 있던 내가 한심하다.

 

 

지민은 순간 무슨 말인지 몰랐다가 말의 뜻을 이해하고 급 정색했다. , 농담이지 그거 가지고 존나 정색하기는. 정우가 지민을 살짝 밀쳤다. 일단 가서 거절해야겠다. 지민은 주머니 안에 넣어두고 있던 편지를 괜히 만지작거렸다.

 

하루 종일 학교에서 태형을 볼 수 없었다. 뭐 그거 가지고 학교까지 튀냐. 지민은 제 앞에 있는 자갈돌을 퍽 차면서 웅얼거렸다. 편지는 여자한테 돌려주었다. 미안하다고, 아직 어려서 그런지 그런 마음 잘 모른다고, 그래서 연애란 것도 모른다고 솔직히 이야기 했다. 여자는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으면서도 살풋 웃으면서 친구로라도 지냈으면 좋겠다고 했다. 고민하다 결국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로 된 거겠지. 이제 김태형과 풀 차례인데... 지민은 한 없이 걷던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고개를 들었다. 태형의 집 앞이었다. 조금만 더 걸으면 제 집이었다.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유 모를 어떤 중압감이 지민을 눌러 발을 뗼 수 없게 만들었다. 뭐지, 죄책감인가. 그렇게 생각했다. 문 앞까지 다가가 초인종을 누르려다 손을 내리고, 문을 두드리려다 어차피 안들리는 것을 깨닫고 포기하고. 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다가 엉덩이를 털며 일어나 괜히 문 너머를 기웃거리고. 그래봤자 정원 밖에 안보이는데. 지민은 후 한숨을 쉬며 뒤돌다가 바로 앞에 있는 태형에 너무 놀라 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은 채 숨만 헐떡였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 지민은 손을 심장에 갖다 대었다. 태형은 무표정으로 그런 지민을 끝까지 보고 있었다. 간신히 숨을 고른 지민은 태형을 노려봤다. 아 진짜 깜짝 놀랐잖아. 태형은 말이 없었다. 괜히 멋쩍어진 지민은 흠흠 헛기침을 하다 머리만 긁적였다. ... 지민이 입을 열었다.

 

 

거절했어. 편지도 돌려주고.

 

......

 

어차피 연애 같은 거 나랑 안맞아서. 그런 거 잘 모르겠고.

 

......

 

그리고 너 질투할 필요 없어. 너 엄청 멋있잖아. 괜히 나 같은 사람한테 감정소비 하지 말고,

 

너 같은 게 어떤 건데.

 

?

 

너 같은 사람이 뭐냐고.

 

... 그냥... 평범하잖아. 누가 봐도 훨씬 네가 더 나은데.

 

 

태형은 아무 말이 없었다. 아까부터 이상하게 조용한 태형이 어색하기만 해 지민은 괜히 헛기침만 했다. 어쨌든, 화해하자고. 지민이 손을 내밀었다. 태형은 지민의 손만 내려다봤다. 지민이 손을 한번 흔들었다. 화해 안 해? 그 말에 태형은 그제서야 손을 들어 살짝 지민의 손을 잡았다.

 

 

오늘 너 없어서 나 되게 외로웠, 으앗!

 

 

마주잡은 손만 보며 얘기하던 지민은 갑자기 확 잡아당긴 태형에,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거리며 그에게 끌려가 그대로 안겼다. 태형은 악수하던 손까지 빼서 그의 뒤통수를 감쌌다. 태형의 어깨부근에 턱과 코를 퍽 부딪친 지민이 아프다며 고개를 뒤로 빼려 했지만 태형의 손에 결국 얼굴을 그의 어깨에 파묻는 꼴이 되었다. 나 질투 나게 하지마. 태형의 나직한 말에 지민은 멍하니 듣다가 결국 피식 웃었다. 나 아무것도 한 거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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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하는 대상을

잘못 생각하고 있는 지민.

태형에 대해서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지민.

사실 태형은 많은 것을

숨기고 있는데도.

특히 제일 숨기고 있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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