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랩홉] 사랑옵다 3
길/사랑옵다
원래 호석은 주말에 카페를 가지 않았다. 남준이 주말 밖에 시간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말은 오로지 알바한테 맡기고 둘은 주말을 즐기곤 했다. 그랬는데...
남준은 잔뜩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 이불로 몸을 둘둘 말아 앉은 채 옷을 입고 있는 호석을 멍하니 바라봤다. 방금 잠에서 깨어나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지 파악 안됐다. 호석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바지에 다리를 끼웠다. 양말까지 다 신은 호석이 남준에게 다가와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머리를 정리했다. 남준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려 잠이 가득한 눈만 끔뻑였다.
준아 진짜 미안해. 오늘은 카페 나가봐야 할 것 같아.
응... 어?!
잠이 확 깬다. 두 눈이 커다랗게 떠지며 호석을 바라보는 남준에, 호석은 괜시리 더 미안했다. 왜 나가? 남준의 목소리가 잔뜩 잠겨있었다.
오늘 신메뉴를 좀 내볼까 해. 근데 그걸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나 밖에 없어.
그걸 오늘 꼭 해야 해?
주말이잖아. 손님들이 많이 와.
눈에 띄게 시무룩해 하는 남준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던 호석은 살짝 허리를 숙여 남준을 안아 등을 토닥였다. 나갔다 올게. 호석의 말에 남준이 급하게 그의 손목을 잡았다. 그럼 나 너희 카페 가도 돼? 남준의 물음에 호석이 환하게 웃었다. 당연하지.
호석을 먼저 보내고 남준은 재빨리 화장실로 달려가 씻기 시작했다. 호석이랑 다른 데이트를 못하는 것은 좀 아쉽지만 카페 데이트도 나쁘지 않지. 준비하는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어서오세- 팀장님?
종소리에 맞추어 인사를 하던 지민은 익숙한 얼굴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테이블을 정리하고 있던 정국도 고개를 들어 입구에 서 있는 남준을 봤다. 팀장님이 이 시간엔 어쩐 일이세요? 그들의 물음에 남준은 어쩐지 멋쩍어 볼만 긁적였다. 와 팀장님 대박이다! 지민이 그대로 다다다 남준의 앞까지 튀어나왔다. 팀장님 사복 입은 거 처음 봤어요. 아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지민의 말에 남준이 맞장구쳤다. 항상 퇴근 하고 오는 곳이라 거의 정장 차림이었다. 완전한 사복을 입고 카페에 온 것은 처음이었다. 팀장님 진짜 옷 잘 입으시네요, 완전 멋있어요 그냥 모델인데? 지민이 양 손으로 엄지를 치켜세우며 하는 말에 남준이 피식 웃었다. 고마워요, 지민씨도 항상 멋있어요.
어이, 지금 내 애인한테 작업 거는 거냐. 갑자기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지민이 뒤돌아 호석을 보며 웃었다. 그럴 리가요. 호석은 남준에게로 다가왔다.
너는 그리고 네 애인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이 카페 안에 버젓이 숨 쉬고 있는데, 엉?
내가 너 말고 누구한테 눈 돌리냐?
말이나 못하면.
그거나 줘. 내가 매줄게.
남준이 호석에게 바짝 붙어 그의 손에 들린 에이프런을 가져갔다. 살짝 그를 안은 채 리본을 묶는 남준을 멀뚱히 쳐다보던 호석이 살짝 그의 어깨에 기대었다. 남준이 피식 웃는 게 느껴졌다. 다 묶은 남준은 그대로 호석의 목에 살짝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호석이 놀라 손으로 목 부근을 가렸다. 야 뭐하는 거야, 일터에서. 호석의 타박에 남준은 어깨만 으쓱였다. 아직 오픈도 안했는데, 뭐. 지민은 두 눈을 가리며 뒤돌았다. 아 사장님, 사장님 때문에 커플만 보면 온 몸이 간지러운 병에 걸릴 것 같아요.
그럼 오늘은 팀장님도 일일 알바 하시는 거예요? 정국이 직원실에서 나오면서 하는 말에 호석이 기겁을 하며 양 손을 저었다. 안 돼, 절대 안 돼 준이한테 뭐 하나 시키지 마. 너무도 단호히 말하는 호석에, 남준은 괜히 머쓱해져 입만 삐죽였다. 아이 사장님, 애인 너무 아끼는 거 아닙니까? 정국이 카운터로 들어가며 장난스레 말했다. 야 말도 마. 호석은 손을 저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혹여나 일손이 부족하다고 해도 절대 준이는 시키지 마.
왜요?
되게 단호하게 말하시네요?
왜 호석아. 나 잘할 수 있어.
남준의 말에 호석이 남준을 째려봤다. 준아, 다른 건 몰라도 너한테 카페 일은 시킬 수 없어. 남준은 제 성격을 아주 잘 알고, 호석도 무슨 이유로 그렇게 반대를 하는지도 매우 잘 알아서 무어라 반박할 수도 없었다. 왜요, 왜 그러는데요. 호석이 유난히 단호하게 반대의사를 보이는 것이 어딘가 미심쩍어 지민이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맞아요, 하필 오늘 주말이라서 손님이 안 그래도 많이 오시는데. 정국도 오픈 준비를 하면서 은근슬쩍 붙었다. 호석은 살짝 한숨을 쉬었다. 그의 한숨을 들은 남준은 괜히 호석의 손가락만 만지작거렸다.
너희한테 준이가 어떻게 비춰지는지는 모르겠지만 얘 알고 보면 엄청 허당이야.
진짜요?
안 돼 안 돼 절대 안 돼. 얘한테 집안일 시키면 절대 안돼.
고개까지 절레절레 저어가며 반대하는 호석에 결국 지민과 정국은 웃음을 터뜨렸다. 남준은 고개만 숙인 채 호석의 손만 계속 주물 거렸다. 안할게. 어쩐지 풀이 죽은 목소리에 호석은 남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카운터 안에 들어가던지 테이블에 앉아 있어. 호석의 말에 남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1인 테이블에 가는 남준의 뒷모습을 보던 지민이 호석의 옆에 서서 입을 가린 채 살짝 물었다. 대체 얼마나 허당이면 사장님이 그렇게 기겁을 해요. 호석은 쯧 혀를 찼다.
말도 마. 설거지 시키면 무조건 접시 하나는 깬다니까. 쟤한테 테이블 닦으라 하면 테이블 부러질걸.
헐 진짜요?
물건 다루는데 조심성이 없어서 안 돼. 옛날부터 집안일이든 카페든 도와주고 싶어 하는데 본인도 자기를 아니까 섣불리 말 못 하는 거지.
진짜 모든 게 다 완벽해 보이시는데.
그런 거라도 허당스러워야 인간미 있지. 자자, 이제 오픈 한다.
호석의 말에 정국은 밖으로 가 팻말을 돌렸다. OPEN.
호석의 카페는 항상 사람이 많았다. 오전에는 그나마 널널한 편이지만 오후만 되면 어디서 사람이 그렇게들 오는지 세명이서 거의 정신을 놓는다. 제발 알바 좀 더 뽑자는 두 알바생들의 하소연에도 호석은 단호했다. 난 아무 알바나 안 뽑아. 실제로 지민과 정국 본인들은 그냥 이력서 보고 일손 부족해 뽑힌 줄 알고 있지만 호석의 그 깐깐한 기준에 당당히 합격한 아이들이었다. 이 카페는 호석의 모든 것이 담겨 있는 곳이었다. 아주 소중한 공간이었다. 이런 소중한 공간에 소중한 인연을 만들고 싶은 것이지, 단순히 돈을 주고 인력을 쓰고 싶지 않았다. 그런 소중한 인연을 아무렇게나 뽑고 싶지도 않았다. 또한 제 카페는 모든 메뉴를 직접 만드는 핸드메이드 카페였다. 모든 디저트, 커피, 샌드위치 등을 직접 만드는 만큼 그런 것에 일가견이 있어야 했다. 이런저런 기준들에 지원 하는 사람은 있겠냐고 남준이 타박 했지만, 예상을 깨고 상당한 수의 이력서가 들어왔었다. 지민과 정국은 그렇게 심사숙고 해서 뽑힌 소중한 인연들이었다.
호석은 아메리카노와 조각 케이크 하나를 남준의 테이블에 두었다. 이게 이번에 선보일 신상이야? 남준의 물음에 호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너 제일 먼저 주려고 지민이랑 정국이한테도 안줬으니까 먹고 심사평 좀. 호석의 말에 남준은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나 진짜 솔직히 말한다.
바라던 바야.
막 진짜 맛없으면 맛없다고 한다.
알겠다니까.
남준은 제 앞에 놓인 케이크를 유심히 봤다. 아니 그것보다 나 블루베리 별로 안 좋아하는 거 알면서 굳이 블루베리를 주냐... 남준은 속으로 작게 투정하며 한입크기로 잘라 입 안에 넣었다. 아...
호석아.
어.
나 진짜 솔직히.
어.
완전 맛있어. 대박이야.
진짜야?
진짜라니까. 네가 만든 것 중에 안 맛있는 게 어디 있냐.
......
... 솔직히 내가 객관적일 수는 없겠지만 객관적으로 맛있어.
호석은 말없이 테이블 위의 케이크를 카운터로 가져갔다. 엇 호석아, 나 먹을 수 있는데, 호석아? 남준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포크를 든 채 그의 뒤를 따랐다. 지민과 정국이 있는 곳까지 온 호석이 케이크를 내밀었다. 너희가 먹어보는 것이 훨씬 더 빠르겠다.
저희가 먹어봐도 돼요?
안될 건 또 뭐 있어. 너희들도 여기서 일하는데. 남준이는 못 믿겠어.
아니, 호석아. 이번에는 진짜 너라서 그런 거 아니고 정말 맛있어.
얘가 이런 말을 한 게 한두 번이 아니라서.
먹어먹어. 호석이 손을 내밀며 하는 말에 지민과 정국은 포크를 가져와 한 입씩 입에 담았다. 헐 대박. 지민이 깜짝 놀라며 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 정국도 두 눈이 동그래진 채 입을 오물오물 씹으며 호석을 바라봤다.
사장님, 진짜 맛있어요. 대박.
그래?
거 봐, 맛있다니까 진짜.
살짝 투정 부리는 듯 한 남준의 말에 호석은 푸스스 웃으며 그의 엉덩이를 토닥였다. 미안해. 남준은 휘어진 호석의 눈을 보곤 그의 머리를 헝클였다.
턱을 괸 채 카페를 쭉 둘러본다. 다섯 테이블 정도의 사람들이 있었다. 커피 향이 카페 안을 채우고, 분위기 있는 노래가 잔잔히 들려온다. 간혹 사람들의 말소리가 크게 들리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조용한 분위기이다. 오전에는 이렇게 평화롭구나. 남준은 라떼를 한 모금 머금으며 생각했다. 항상 왔던 시간이 7시에서 9시 사이라, 평소 호석의 카페는 어떤지 전혀 몰랐다. 오후와 저녁때만 되면 항상 손님들이 바글바글 하고 미친 듯이 주문해서 정신을 놓을 정도라고 하던데 아직 실감이 나지는 않았다. 그렇게 손님이 많나. 생각에 잠긴 남준은 문득 든 생각에 인상을 찌푸렸다. 카페에서 일하는 게 제일 위험하다던데... 애인 사귀려면 카페 알바 하라는 말도 있고... 아 잠깐만 호석이 카페 하면서 한번도 대쉬 안 받아 본 적은 없을 거 아냐. 한번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니 이것저것 하나하나 다 거슬리기 시작했다. 아니 알바 두 명이나 있는데 왜 굳이 자기가 카운터에 있는 거야. 입술이 불퉁하니 나왔을 때 즈음, 딸랑이는 종소리와 함께 여자 둘이 들어왔다.
남준은 두 눈에 힘을 줬다. 여자가 무어라 말했다. 호석은 웃으면서 포스기를 터치했다. 아니 왜 웃어줘. 남준의 입이 더 나왔다. 그 때 지민이 트레이를 들고 왔다. 팀장님, 이거 사장님이 팀장님 주시라고 하셨어요. 남준은 바로 괴고 있던 턱을 빼고 웃어보였다. 고마워요. 트레이는 라떼 한 잔과 조각 케이크가 하나 있었다. 남준이 제일 좋아하는 치즈 케이크였다. 지민씨. 남준의 부름에 지민이 뒤돌아보았다.
평소에도 호석이가 카운터 봐요?
네. 보통은 다 사장님이 보세요. 정국이가 커피 만들고 제가 디저트 만드니까요.
호석이 카운터 볼 때면 저렇게 막 웃고 그런가요?
에... 뭐, 일단 서비스업이니까요.
아...
머리로는 이해하는데 가슴으로는 이해 안 된다는 게 이런 느낌인가. 남준은 왠지 모를 불편함에 인상만 찌푸렸다. 당연히 손님한테는 친절해야 하고 일종의 서비스업이고 다 안다. 아는데 꼭 저렇게 환하게 웃어줘야 하나. 아는데 싫다. 남준은 눈웃음을 지으며 트레이를 내미는 호석을 조금도 놓치지 않고 뚫어져라 쳐다봤다. 손님을 보내고 시선을 살짝 돌린 호석은, 남준의 눈빛에 깜짝 놀랐다. 카운터에서 나와 남준에게 다가온 호석은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입 맛 없어? 왜 하나도 안 먹었어.
질투나.
어?
웃어주지 마.
뭔 소리야.
그렇게 웃어주지 말라고. 꼭 그렇게 눈웃음까지 지어야겠냐?
풉. 호석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 와중에도 남준은 웃음기 하나 없는 진지한 얼굴로 호석을 쳐다봤다. 나 농담 아니야. 남준의 말에 호석은 손을 까딱였다. 알았어, 알았어.
나 일하는 거야. 너한테 하듯이 감정 섞인 거 아니야.
아 싫어. 싫다고.
뭐지. 오늘따라 왜 이렇게 투정 부리지?
너는 감정 없이 웃어줘도 남은 안 그렇게 볼 수도 있잖아.
아니야. 아무도 그렇게 안 봐.
내가 그렇게 봤었잖아. 너 웃는 거 보고 내가 반했잖아.
너는!...
호석은 말문이 막혔다. 갑자기 얼굴에 열이 오르는 느낌에 호석은 괜히 손부채질 했다. 봐봐, 너 할 말 없지. 남준은 여전히 진지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나도 그랬는데 여기 오는 100명 중에 한명이 나랑 똑같을지 어떻게 알아? 계속되는 남준의 말에 호석은 할 말을 잃었다. 그래, 내가 미안해. 결국 호석이 사과했다.
앞으로는 눈웃음 안 지을게.
......
왜 그렇게 봐.
...아니야.
남준은 문득 든 생각을 결국 말하지 않은 채 커피를 한모금 마셨다. 그냥 카페 안 나가면 안 되냐고 말하면 맞겠지. 남준은 괜한 욕심은 내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아직 안 바쁘면 나랑 놀아줘. 남준의 말에 호석은 주위를 둘러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심심하면 집에 가도 돼.
아니. 너 보는 거 별로 안심심해.
너무 뚫어지게 쳐다보지 마. 다 느껴져.
그렇게 뚫어지게 쳐다보지는 않았어.
네가 너무 노골적으로 바라보는 게 다 느껴져.
계속 쳐다봐야겠네. 다른 사람한테 한눈팔지 말라고.
내가 누구한테 한눈을 팔아. 너 아까부터 좀 이상하다?
호석은 팔짱까지 끼고 쭉 남준을 훑어봤다. 남준은 괜히 시선을 피하며 케이크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뭐야, 또 무슨 일인데. 호석의 말에 남준은 어깨만 으쓱해 보였다.
무슨 일은. 별 일 없어.
별 일 없는 게 아닌데? 아까부터 막 투정 부리고, 질투난다 그러고, 한눈 파니 어쩌니 그런 소리 하고. 이상하잖아.
여기 카페, 여자들 많이 오나?
여자? 뭐... 일단은 카페니까. 확실히 여성 손님이 많긴 하지.
너 카운터 안보면 안 돼?
호석이 인상을 팍 찌푸리자 남준은 금방 또 시선을 회피하며 라떼를 한모금 마셨다. 너 내 일 방해할거면 그냥 가. 호석의 단호한 말에 남준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야 내가 무슨 일을 방해 하냐...
아 그냥 오지 말라 할걸. 호석은 아침에 자신이 한 말을 후회했다. 아니, 오지 말란다고 정말 안 올 애는 아니지만. 남준이라면 무작정 찾아오고도 남을 사람이기는 했다. 남준은 제 앞에 놓인 커피잔 끝을 만지작거리다가 호석을 쳐다봤다. 그럼 내가 카운터 보면 안 돼? 남준의 제안에 호석이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어차피 설거지 이런 거는 안 시킬 거니까. 카운터 정도는 내가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아... 그러면 그럴래? 어차피 너 여기 계속 앉아만 있으면 힘들기도 하고. 주문 받는 것 정도는.
어어. 내가 할게. 내가 할래.
그래 그럼.
호석은 자리에서 일어나 직원실로 향했다. 남준도 그를 따라나섰다. 호석이 직원실로 들어가자 남준도 재빨리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호석의 손목을 잡아 당겼다. 순간적인 힘에 앗 하는 순간 입을 맞춰 오는 남준에, 호석은 정신이 없었다. 부드럽게 들어오는 남준에게서 라떼 향이 났다. 호석이 남준의 목을 팔로 감자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점점 밀리는 힘에 뒷걸음질 치던 호석은 락커에 등이 닿았다. 남준은 그의 머리를 감쌌다.
남준은 버드키스로 가볍게 쪽 하고 나서야 완전히 입술을 뗐다. 살짝 숨을 몰아쉬던 호석이 그를 살짝 올려보다 팔뚝을 아프지 않게 쳤다. 뭐하는 거야. 남준은 그 손을 잡아 깍지까지 꼈다. 밖에서 할 수는 없잖아. 호석은 헛웃음을 지으며 락커 하나를 열어 에이프런을 꺼냈다. 네가 해주는 거야? 남준의 물음에 호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해줄게.
호석은 허리 쪽으로 손을 뻗어 리본을 매기 시작했다. 멀뚱히 보던 남준은 호석을 그대로 안았다. 호석이 피식 웃었다. 네가 안겨 오길래. 남준의 말에 호석은 아예 소리 내어 작게 웃었다. 자, 다 됐다. 호석이 손을 슥 빼자 안은 손에 더 힘을 준 남준이 그의 이마와 볼에 한번씩 입을 맞췄다. 가자. 아쉬운 듯 한 번 더 꽉 안은 남준이 호석의 등을 두어 번 토닥이며 떨어졌다.
점심 때 즈음 되니 사람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점점 손이 빨라지기는 하지만 아직 정신 놓을 정도는 아니었다. 이 정도는 할 만 한데? 남준은 속으로 생각하며 카페에 들어오는 손님께 인사했다. 이번에도 여성 두 분이다. 그들은 카운터에 서 있는 남준을 보더니 살짝 놀란 듯 보였다. 주문하시겠습니까? 남준의 물음에 그들은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놀라기만 했다. 남준은 영문 몰라 고개만 갸웃했다.
여기 일하시는 거예요?
아주 일 하는 건 아니고 오늘 하루만 돕는 겁니다.
여기 사장님이랑 아는 사이세요?
예.
제 애인인데요. 남준은 하고 싶은 말을 꾹꾹 눌러 참았다. 여기 진짜 잘생긴 사람만 뽑나봐. 여자애들끼리 속닥거리며 하는 말에 남준은 괜시리 웃음이 나와 고개를 숙인 채 손으로 입을 살짝 가렸다. 호석이가 외모를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어떻게 뽑다보니 알바생 두 명의 얼굴이 여자들한테 인기 있는 얼굴인가보다.
사장님 친구분이세요?
... 예... 뭐.
친구분도 되게 잘생겼네요.
아... 감사합니다.
오늘 하루 왜 도와주시는 거예요?
네? 아... 원래 오늘 저랑 약속 있었는데 부득이하게 여기 일이 생겨서 그 김에 저도 돕는 거예요.
어머, 그럼 오늘 사장님 계세요?
네, 뭐. 눈에 띄게 좋아하는 기색에 남준은 왠지 언짢아졌다. 뭐야, 자기가 왜 기뻐해. 안 그래도 아까부터 예민해져 있던 남준에게 그들의 표정 하나하나, 말 하나하나 다 거슬리기 시작했다. 친구가 이렇게 유명한 카페 사장님이면 정말 뿌듯하시겠어요. 한 여자의 말에 남준은 대충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네. 기분 좋기는 하죠. 인터넷에서도 몇 번 글 봤어요.
엄청 엄청 유명해요. 저희 여기 근처 ○○대학교 다니는데 거기 대학교 다니는 사람들 중에 여기 모르는 사람 없을 걸요? 여기 근처 회사원들도 많이 오고.
그 대학교에서 커피 마시러 오기에는 좀 멀지 않아요?
멀어도 감수하고 오는 거죠. 여기 케이크 진짜 맛있거든요. 사장님이랑 알바생도 잘생겼고.
아 예... 남준은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하긴 호석은 옛날부터 인기가 많았다. 그는 비단 외모 뿐 만이 아니라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어쩌면 자신이 그에게 반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에게 한없이 휩쓸리기만 했던. 호석은 죽어도 모르겠지만. 자신이 불안 해 하는 것에는 나름 이유가 있긴 했다. 호석은 절대 이해 못하겠지만. 너는 가만히 있기만 해도 사람들을 끌어당겨 네 옆에 다가왔고, 나 역시 그런 너에게 주체 없이 끌려 다니다 네 눈웃음에 반했는데. 다른 사람이라고 안 그런다는 보장이 없다. 호석을 못 믿는 게 아니었다. 그냥 그의 주위에 흑심을 가지고 다가올 다른 사람이 눈에 거슬릴 뿐이다.
사장님 혹시 애인 있어요?
네. 있어요.
한 여자의 물음에 남준은 단호히 말했다. 여자는 아쉬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어쩐지 번호 물어봤을 때 어색하게 웃으면서 애인이 싫어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냥 거절의 의미인 줄 알았는데. 남준은 기가 차 속으로 헛웃음을 뱉었다. 벌써 번호까지 물어봤단 말이지. 이래놓고 아무도 그렇게 안본다고. 오늘 내가 카운터 보길 잘했네. 여러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쪽은 이름이 어떻게 돼요? 명찰이 없어서... 옆에 있던 다른 여자가 물었다.
아, 김남준 입니다.
여기 자주 오세요?
네 그럼요. 거의 매일 옵니다.
아 그래요? 저희도 여기 되게 많이 오는데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요.
거의 마감할 때 즈음에 와서 그런가 봐요. 저 퇴근하고 오거든요.
나이 물어봐도 돼요?
저 나이 많아요. 전공서적 들고 계시는 두 분한테 나이 얘기하기 민망할 만큼.
그래도 30대 중반까지는 안가겠죠.
남준은 그녀의 말에 웃기만 했다. 정말 30대예요? 살짝 놀라서 묻는 말에 남준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직 30대는 아니에요. 그쪽은 애인 있어요? 당돌한 그녀의 물음에 남준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웃었다. 호석이 생각났다. 생각난 김에 보고 싶다. 네, 있어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남준에, 여자는 가볍게 웃었다. 좋은 사람은 역시 이미 애인이 있네요.
오랜만이에요, 오늘도 오셨네요? 갑자기 옆에 다가와서 인사하는 호석에 여자 둘은 살풋 웃으며 인사했다. 사장님 오늘 주말에 오셨다 해서 놀랐어요. 호석에게 관심을 보였던 여자의 말에 남준이 그녀를 힐끗 쳐다봤다. 호석은 웃으며 남준의 손목을 잡았다. 저희는 잠시 할 이야기 있어서 실례하겠습니다, 정국아 여기 주문 좀 받아줘! 정국에게 일을 맡긴 채 남준의 손목을 잡고 끌고 가는 호석의 행동에, 남준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끌려가기만 했다. 또 다시 직원실에 들어간 호석은 남준을 밀어놓고 문을 잠근 후 뒤돌아 남준을 봤다.
너는!
야, 넌!
동시에 나온 말에 둘 다 입을 꾹 다물었다. 잠시 정적이 돌았다. 먼저 얘기해. 남준이 먼저 양보했다.
너는 카운터 보라고 했지, 누가 손님이랑 잡담 하라고 했어?
...그건 미안. 그런데 계속 물어보잖아. 그리고 그 여자 너한테 관심 있더라? 막 엄청 친한 것 같던데.
단골이야. 자주 오는 분이니까 당연히 안면 트고 그러지. 이런 개인 카페에 단골손님이 얼마나 중요한데.
막 애인 있냐고 물어보고 전화번호도 물어봤다고 그러던데? 내가 이래서 걱정 했던 거야. 내가 넌 믿는데 네 주위에 오는 사람은 못 믿겠다고.
야, 나 애인 있다고 했어. 그리고 너도 막 여자한테 웃어주고 그러더만! 웃겨 진짜.
나 그 사람보고 웃은 적 없어.
막 그 여자들이랑 대화하다가 눈웃음 날리고 보조개 패이도록 웃고 난리나더만.
몰라. 나 네 생각 하면서 웃은 기억 밖에 없어.
호석은 무어라 더 말하고 싶어도 말문이 막혀 결국 뾰로통한 표정으로 남준을 노려봤다. 그렇게 봐도 설렌다. 남준의 말에 호석이 헛웃음을 지었다. 네가 카운터 보겠다는 말, 그냥 도와주려고 한 말은 아니지. 호석의 말에 남준은 어깨를 으쓱였다.
나 솔직히 말해도 돼?
말해.
카페에서 알바를 하면 커플 생길 확률이 많아진대. 실제로 보면 카페 알바생한테 번호 물어보는 사람도 많고, 같이 일하다가 눈 맞는 경우도 많고.
그래서 지금 내가 그럴 것 같다는 거야?
나 질투 많은 거 알잖아, 호석아. 네가 그렇다는 게 아니라 너한테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과 마주한다는 것조차 나는 보기 불편하다는 거야.
야, 나는 안 그런 줄 알아? 나도 너처럼 막 너 좋다고 그러고, 너 멋있다 그러고, 나한테 너 사귀는 사람 있냐고 물어보면 내가 얼마나 불안한 줄 아냐?
... 그런 사람이 있었어?
당연하지! 이씨, 생각하니까 또 열받네. 대학생 때부터 그것들 쳐내느라고 내가 진짜...
머리를 마구 헝클이며 짜증내는 호석을 멍하니 바라보던 남준은 결국 피식 웃으며 호석에게 다가갔다. 머리를 다시 차분하게 정리를 해준 남준은 이마에 입 맞추고 허리를 살짝 숙여 그와 시선을 맞췄다. 호석아. 남준의 부름에도 호석은 눈만 돌려 그의 시선을 피했다. 호석아. 다시 불렀다. 그의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에 여과 없이 흘러들어왔다. 그렇게 부르면 안볼 수가 없잖아. 호석은 여전히 뾰로통한 표정으로 남준을 힐끗 봤다.
미안해. 내가 너무 나만 생각했네.
......
에이, 미안해.
남준은 말꼬리를 늘이며 호석을 확 안아 좌우로 몸을 천천히 흔들었다. 그의 품에 꽉 안겨있던 호석은 결국 피식 웃었다. 아 김남준, 미워할 수가 없다. 호석의 말에 남준이 그의 볼에 쪽 가볍게 키스했다.
***
오후에 한차례 폭풍이 지나가고 저녁 때 즈음 되니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남준은 정신없이 카운터를 보면서 혀를 내둘렀다. 매일을 이렇게 셋이서 카페를 봤었단 말이야? 작업량이 많은 남준도 놀랄 만큼 바쁘기 그지없었다. 준비해놓은 디저트가 다 빠질 때 즈음부터는 조금 여유롭다는 지민의 말은 사실이었는지 이제야 테이블에 좀 앉아 쉴 수 있었다. 많이 힘들었지, 괜히 나 때문에 쉬는 날 또 일하고. 호석은 미안한 표정으로 남준의 앞에 커피를 내려놓았다.
호석아. 진짜 알바 한 명이라도 더 들이면 안 돼? 너 이러다 과로사로 쓰러질 것 같아서 그래.
그 정도는 아니야. 우리보다 더 바쁜 데도 많은데.
조금이라도 힘들다 생각하면 꼭 알바 더 뽑아, 알았지?
알았다니까.
남준은 기어코 호석에게 답을 받고 나서야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여기서 좀 쉬어. 남준의 어깨를 두어 번 토닥이고 돌아가는 호석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던 남준은 문득 든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호석이 테이블 정리를 하고 있는 동안 정국에게 다가간 남준이 무언가를 부탁했다.
카운터 옆에 있는 바 테이블에 두 손으로 턱을 괸 채 가만히 앉아있던 호석은 갑자기 훅 나타난 남준에, 깜짝 놀라 몸을 순간적으로 뒤로 젖혔다. 아 깜짝이야. 가슴에 손을 얹은 채 안도의 한숨을 내쉰 호석은 의아한 표정으로 남준을 바라봤다. 뭐야 갑자기? 그의 물음에 남준은 살풋 웃으며 커피잔을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김남준 스페셜 라떼 한 잔 나왔습니다.
제 사랑도 가득 담았으니 따뜻할 때 드세요.
아, 뭐야아. 아까워서 못 마시겠네.
호석은 라떼아트까지 그려져 있는 커피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말꼬리를 늘이는 걸 보니 부끄러운가보다. 남준은 제 앞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쑥스러워 하는 호석을 보고 웃으며 살짝 호석 쪽으로 더 밀었다.
와중에 또 라떼 아트까지 했네.
내가 할 줄 아는 게 이거 밖에 없어서.
흐흥. 이 하트가 네 사랑이야?
그럼요. 하트는 그대에게만 주는 거예요.
다른 사람한테 라떼아트는 해주나 봐?
정국씨랑 지민씨한테는 해줬지. 나뭇잎으로.
호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팀장님! 정국의 부름에 남준은 고개만 돌려 그를 쳐다봤다. 정국과 지민이 커피 잔을 들고 그들 쪽으로 다가왔다.
팀장님 라떼아트 어떻게 배웠어요? 팀장님도 커피 내릴 줄 아세요?
아뇨. 라떼 밖에 못해요. 그것도 라떼아트 때문에 배운 거지, 저 사실 커피 같은 거 잘 몰라요.
근데 솜씨가 장난 아니에요. 이런 라떼아트 연습 되게 오래 하셨을 것 같은데.
제가 하고 싶어서 배운 거예요. 그래도 애인이 카페 하는데 라떼아트 정도는 해주고 싶어서.
뭘 그런 것까지 이야기 하냐. 호석은 아닌 척 하면서 기분 좋은 듯 표정에 다 드러났다. 남준은 그런 호석이 귀여운 듯 바라보았다. 아... 정국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결국 잔을 바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뭐야, 그럼 팀장님 진짜 사장님한테 해주려고 그냥 라떼아트 배운 거예요? 지민의 물음에 남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티비에서 봤는데 라떼아트 너무 예뻐서 나도 해주고 싶다고 생각했었거든요.
나도 몰랐었어. 어느 날 갑자기 커피를 딱 내오는 거야. 그래서 뭔가 봤더니 라떼아트까지 예쁘게 되어있어서 깜짝 놀랐지. 아 그때도 이 모양이었던 것 같은데.
맞아. 하트는 변함없어.
그때도 너 커피 주면서 고백 했던 것 같은데.
내가 하는 말이 다 거기서 거기지, 뭐.
커플의 대화에 지민과 정국은 점점 짜게 식어갔다. 아, 괜히 물었나. 항상 남준이 오면 일터가 달달하다 못해 닭살스러워졌다. 당사자 둘은 그 사실을 모르는 듯 했지만. 참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팀장님 겁나 사랑꾼 아니냐. 지민의 말에 정국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가 10년 사귄 커플은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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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량 조절 실패...
쓰고 싶었던 장면 하나 때문에
이게 이렇게 길어질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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