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랩홉] 사랑옵다 5
길/사랑옵다
호석은 저절로 잠이 깨 천천히 눈을 떴다. 일어났어?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호석은 그대로 고개만 돌려 남준을 바라봤다.
남준은 팔로 머리를 받친 채 옆으로 누워 있었다. 언제 깼어? 호석은 잔뜩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음... 1시간 전? 생각보다 훨씬 더 긴 시간에 호석은 화들짝 놀랐다. 한 시간? 그러면 나 깨우지! 호석의 작은 투정에 피식 웃은 남준은 다른 한 손으로 호석의 콧대를 천천히 쓸었다. 네가 자는데 어떻게 깨워. 호석은 푸스스 웃었다.
침대는 아늑하고 이불은 푹신하고 이불속은 따뜻하다. 호석은 좀 더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남준이 호석을 안아주었다. 아 진짜 일어나기 싫다... 호석의 말에 남준은 그를 더 꼭 껴안았다. 그럼 오늘은 하루 종일 뒹굴까? 남준의 말에 호석은 푸핫 웃었다.
오늘은 뭐할까. 침대에 옆으로 누운 채 말하는 호석에 남준은 그의 목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나 하루 종일 침대에 있어도 되는데. 낮게 울리는 그의 숨결이 뒷목에 닿아 호석은 살짝 움츠리더니 몸을 잉차잉차 돌려 남준을 바라봤다. 남준은 그의 입술에 살짝 베이비키스를 했다.
침대에 하루 종일 있겠다는 건 무슨 의미야.
그대가 생각하는 대로.
음...
오늘따라 섹시해 보이네.
아 너 변태인 거 잊지 말았어야 했는데.
남준이 푸스스 웃으며 이번에는 호석의 코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아 일어나야겠다. 호석은 결국 상체를 일으켜 침대를 나오려다 재빨리 남준의 입술에 가볍게 입 맞추고 일어났다. 새벽에 셔츠만 입히고 재운 터라 호석의 다리가 그대로 드러났다. 남준은 휘파람을 한 번 불었다. 한번쯤 그렇게 다니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남준의 말에 호석이 헛웃음을 뱉었다. 적당히 놀리고 그만 일어나시죠? 호석의 말에 그제야 남준이 상체를 일으켰다.
아 맞아, 오늘 장 봐야 해. 남준이 입 앞까지 갖다 준 사과를 아삭 베어 문 호석이 문득 생각나서 말했다. 장? 남준은 호석이 베어 문 사과의 반대쪽을 베어 먹었다. 아 오늘 저녁에 먹을 거 있나? 호석이 후다닥 부엌으로 달려갔다. 남준이 그의 뒤를 느릿느릿 따라갔다.
커다란 냉장고 문에 가려서 보이지는 않지만 그 앞에 쭈그려 앉아 고민하고 있는 호석의 모습이 눈앞에 선해 남준은 낮게 웃었다. 한참을 냉장고 속만 보던 호석은 결국 문을 닫고 남준을 돌아봤다. 준아, 장 보러 가자.
남준은 잠시 말이 없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쇼핑 갈래?
남준은 쇼핑을 좋아했다. 그리고 옷을 좋아했다. 호석은 그리 패션에 그리 의의를 두지 않는 편이었다. 그러니까 굳이 따지자면 관심이 없는 편이었다. 그래도 호석은 남준의 취미를 존중했다. 아니, 존중이랄 것도 없다. 그냥 남준이 좋으니까 좋은 거다. 남준이 제일 좋아하는 취미는 호석한테 옷 사주는 것이었다. 쇼핑하러 가면 8할은 호석이 옷 사기 위해서다. 남준은 호석이가 자신이 사주는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그렇게 좋아했다. 솔직히 호석은 그게 왜 좋은지 잘 모르겠지만 남준이 자신에게 이상한 옷을 입히는 것도 아니고, 패션 감각이 뛰어난 그라서 오히려 호석의 입장에서는 땡큐였다. 매일 아침마다 남준이 꺼내주는 옷만 입고 출근하면 되니까.
오늘의 컨셉은 도깨비였다. 어떤 옷을 입혀도 다 받아줬었는데 이번은 아닌 것 같다면서 빼는 호석에게 사정 사정을 하면서 남준이 기어코 호석에게 목티와 롱코트를 입혔다. 남준이 그 드라마를 너무 감명 깊게 본 나머지 롱코트를 사재낀 적이 있었다. 남준의 드레스 룸을 보면서 하루에 하나씩만 입어도 한 달은 입겠네 생각했는데, 그 중 하나를 입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던 호석이었다.
야 이건 진짜 아닌 것 같애... 옷을 다 입으면서도 제 팔을 잡고 찡찡대는 호석이 퍽 귀여워 남준은 가볍게 입 맞추었다. 야, 뽀뽀만 하지 말고 진짜. 호석이 남준의 팔을 아프지 않게 찰싹 때렸다.
왜 이쁘기만 하구먼. 누구 애인인데 이렇게 이뻐, 응?
......
진심으로. 나 진짜 맹세코. 진심으로 예뻐. 이런 옷을 소화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호석이가 다하네.
... 나 참.
호석은 결국 피식 웃어버렸다. 사랑하는 사람이 저런 눈으로 저런 말만 하는데 혹여 빈 말이라 해도 넘어갈 수밖에 없다. 호석은 남준의 손을 끌어와 꼭 잡았다. 남준의 따뜻한 온기가 호석의 손을 덮었다. 준아. 호석의 나직한 부름에 남준은 조용히 호석을 바라봤다. 혹여 네가 하는 말이 정말 거짓인 날이 온다 하더라도, 난 너를 사랑하고 있을 거야.
왜? 남준의 물음에 호석은 말없이 고개만 저었다. 아니, 아무것도. 호석은 살풋 웃어보였다. 남준이 따라 웃었다.
남준이 심각한 표정으로 옷을 하나하나 세심하게 보고 있으면 호석은 두어 발짝 뒤에 서서 가만히 그런 남준을 보고 있었다. 호석아 이건 어때? 조금 크려나? 남준이 호석에게 옷을 대 보며 거의 혼잣말 같이 물어볼 때마다 호석은 같은 대답만 해주었다. 조금 커도 너랑 같이 입으면 되지, 뭐.
뭐 찾으시는 것 있으세요? 직원의 물음에도 남준은 옷 고르는데 온 집중을 다 하는 탓에 그의 귓속까지 말이 닿지 못했다. 호석은 직원한테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그냥 구경만... 호석의 말에 직원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주위를 서성거렸다. 남준은 그런 직원이 보이지도 않는지 옷 고르기에 여념이 없었지만, 호석은 자꾸 직원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저 멀리서 속닥거리는 서너 명의 직원도 거슬리고 근처에서 눈을 반짝이며 서 있는 직원도 거슬린다.
남준과 같이 다니면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대놓고 다가와서 폰 번호 달라고 한 적도 많고 힐끗힐끗 이쪽을 쳐다보며 멋있다며 다가가볼까 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많다. 호석은 그때마다 불편한 감정을 숨길 수 없었다. 그 옆에 있는 나는 완전 열외라는 거지. 현실을 알면서도 씁쓸한 건 어쩔 수 없다.
호석아, 혹시 뭐 입고 싶은 건 없어? 남준의 물음에 호석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어, 어디 보자. 재빨리 옷을 보려던 호석은 남준의 팔에 걸쳐진 옷 무더기에 기함했다. 이게 다 뭐야. 호석의 물음에 남준은 해맑게 웃어보였다.
호석아, 이거 너한테 진짜 잘 어울릴 것 같아.
그래도 그렇지 너무 많잖아. 드레스 룸도 거의 다 찼는데.
새 드레스 룸 만들면 되지.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너무 과해.
네가 입었으면 좋겠는데.
아쉬움이 가득한 눈길로 옷을 내려다보는 남준에 호석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알았어, 대신 당분간 쇼핑은 안 돼. 그래. 호석의 말에 금방 또 기분 좋은 웃음을 뱉으며 고개를 끄덕인 남준이 옷을 더 보기 시작했다. 손님, 제가 들어드리겠습니다. 앞에 서성이던 직원의 말에 남준은 부드럽게 웃으며 거절했다. 괜찮습니다, 무거워요. 호석은 남준의 말에 얼굴이 살짝 붉어지며 살풋 웃는 직원을 제대로 봤다. 뭐지 이 엿 같은 기분은. 호석의 표정이 단번에 굳었다. 호석아 이것 좀 입어볼... 남준은 호석을 돌아보며 말하다 입을 다물었다. 알았어. 딱딱하게 대답한 호석은 남준의 손에 들고 있는 옷을 하나 집어 그대로 피팅룸에 들어갔다. 남준은 머리를 긁적였다. 큰일 났네...
호석과 남준은 질투가 심한 편이었다. 다만 그 질투를 표현하는 것은 달랐다. 남준은 자신의 질투를 스킨십으로 표현하는 편이었다. 호석에게 유난히 더 붙어있거나, 뒤에서 안거나, 뽀뽀도 서슴지 않았다. 호석은 불쾌함을 행동이나 표정에 드러났다. 아무 말 하지 않지만 유난히 틱틱 대는 행동이라던가 정색하고 있는 그의 표정을 보면 남준이 달래주거나 그에게 스킨십을 함으로써 호석은 위안을 얻고는 했다. 호석이가 오늘 기분이 안 좋나보네. 남준은 그가 들어간 피팅룸을 보며 제 팔뚝에 걸쳐진 옷만 만지작거렸다. 잠시 후 문이 살짝 열리면서 호석이 얼굴만 빼꼼 내밀었다. 준아... 호석의 부름에 남준이 재빨리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이 옷 나랑 좀 안 어울리지 않아?
아냐. 뭘 입어도 예뻐.
진짜?
진짜로. 이것도 입어보라고 하고 싶은데, 너 힘드니까 여기 빨리 나가자.
어?
얼른 나와.
그거 안 입어 봐도 돼?
어차피 다 예쁠텐데. 사이즈도 다 알고. 괜찮아. 얼른.
호석은 남준의 말에 살풋 웃으며 피팅룸에서 나왔다. 그들의 대화를 들은 직원들의 표정이 묘해졌다.
매장을 나온 남준은 호석의 머리를 헝클였다. 왜이래? 호석은 고개를 들어 남준을 바라봤다. 남준은 진하게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의 의미를 알아차린 호석은 살짝 붉어진 얼굴을 애써 모른 척 시선을 돌려 앞을 봤다. 귀여워. 남준은 속으로 생각하며 키득댔다. 그의 웃음소리를 들은 호석의 표정은 민망한 듯 해보였다. 그래서. 남준이 입을 열었다.
오늘은 뭐 때문에 그렇게 심통이 났어요?
심통 안 났어요.
애인한테 거짓말 치는 거 아니에요.
호석은 말없이 남준의 앞에 서서 쭉 남준을 훑어봤다. 쇼핑백을 들고 있는 남준은 호석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눈만 끔뻑였다. 이씨... 호석의 입꼬리가 살짝 내려갔다. 남준은 그에게 다가가 양손으로 입꼬리를 올렸다. 왜 그래. 남준의 물음에 호석은 남준을 노려봤다. 잘 알면서 일부러 묻는 게 얄밉기만 하다. 그의 표정에 담긴 의미를 알아차린 남준은 푸핫 결국 소리 내면서 웃었다. 아 짜증나. 호석은 남준의 팔을 탁 쳐서 떼어냈다. 남준은 아예 호석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미안, 미안해 호석아. 사과를 하는 말에도 웃음기가 담겨 있었다.
왜 이렇게 잘난 거야... 호석은 남준의 품에 안긴 채 입만 삐죽거렸다. 같은 남자가 봐도 잘났는데 여자는 오죽할까 싶다. 남자도 반해서 이렇게 허우적거리는데 여자는 더 안 그렇겠냐고... 입만 삐죽이는 호석을 본 남준은 그의 입을 아프지 않게 잡았다. 우브읍! 호석은 그의 손목을 잡으며 노려봤다. 낄낄거리는 남준이 얄밉기만 하다. 질투하는 거야? 남준이 물었다.
그래, 질투한다. 마음 같아서는 거적데기만 입고 다니라고 하고 싶은 심정이야.
그게 뭐야.
남준은 부드럽게 웃으며 대꾸했다. 오늘따라 저 웃음도 왜 그렇게 멋있어 보이는지... 오늘따라 옷은 또 왜 이렇게 예쁘게 입고 온 거야... 불안해 죽겠다. 도저히 풀리지 않는 듯한 호석의 표정에, 남준은 결국 제 턱을 만지작거리며 호석을 내려다보았다. 오늘 밖에 나올 기분이 아니야? 남준의 물음에 호석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날씨도 좋고 기분도 물론 좋았다. 이건 그냥 제 스스로의 문제였다. 만난지 얼마나 오래 됐는데 아직도 그런 거에 질투를 하고 그러냐. 아니, 오래 만났기 때문에 불안한 건가. 사실 자신도 잘 모르겠다. 그냥 오늘따라 잘나 보이는 남준에 괜히 불안해졌을 뿐이다. 호석은 다시 남준을 올려다보았다. 남준은 여전히 자신을 보며 웃고 있었다. 살짝 들어간 보조개가 그를 더욱 매력적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오늘따라 너 왜 이렇게 잘났어.
어?
뭔가 짜증나 진짜. 아까도 저 옷가게에서 너만 쳐다보는 거 봤어?
입을 삐죽 내민 채 웅얼웅얼 자신의 불만을 계속해서 얘기하는 호석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남준은 불시에 촉 그의 입을 맞췄다. 굉장히 놀라며 커다란 눈으로 남준을 쳐다 본 호석은 결국 그의 팔을 찰싹 때렸다. 맞아도 좋다고 흐흐거리는 남준을 밉지 않게 노려 본 호석이 입을 열었다. 너 내가 밖에서는 스킨십 하지 말라고 했잖아. 남준은 호석의 말에도 배째라였다. 아 몰라, 내가 하고 싶으면 하는 거지 어차피 다들 다시는 안 만날 사이야.
아, 좋다.
뭐가, 나는 지금 기분 안 좋은데.
내가 매번 카페에서 너를 보는 기분이 그랬어.
......
너는 서비스업이랍시고 막 손님들한테 웃어주는 거 볼 때마다 속이 뒤집어지는 느낌이야.
......
나만 그렇게 느끼면 어떡하나 조금 우울했었는데. 아, 나 네 말대로 변태 맞나봐.
뭐가.
네가 막 질투하는 거 보면 왜 이렇게 좋지.
남준의 말에 잠시 멍하니 그의 말을 곱씹던 호석이 그대로 몸을 돌려 빠른 걸음으로 가버리기 시작했다. 아 미안해 호석아, 미안해! 남준이 재빨리 그의 뒤를 따랐지만 호석은 멈추지 않았다. 미안해! 남준이 재빨리 호석의 손목을 잡아 돌렸다. 씩씩 거리는 호석의 표정이 담겼다. 남준은 웃음이 나왔지만 애써 그 웃음을 숨긴 채 호석에게 계속 사과를 했다. 내가 나쁜 뜻으로 그런 건 아니야, 정말로. 호석의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아아... 호석아... 작게 앙탈을 부린 남준이 결국 호석을 팍 안아주었다. 오뚜기 처럼 오른쪽 왼쪽 왔다갔다 거리며 화난 호석을 풀어주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의 품에 얼굴을 묻은 호석은 콩콩콩 그의 어깨부근에 머리를 서너 번 찍었다. 못된 놈. 중얼거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숨과 섞인 남준의 웃음소리가 호석의 귓가를 간질였다. 어깨에 손을 대고 고개를 들어 남준을 바라봤다. 진심으로 사과를 해도 웃음기 가득한 표정은 숨길 수 없나보다. 얄미워 죽겠네 진짜. 호석은 남준을 노려봤다.
다음부터는 그러지마 진짜. 완전 짜증나니까.
안 그럴게.
나 질투 엄청 많은 사람이라서 너 그러는 거 또 눈에 띄면 어떻게 될지 몰라.
응. 미안해. 절대 그럴 일 없을 거야.
그리고...
응.
그만 좀 멋있어져라, 진짜.
곧 서른인데 아저씨가 밑도 끝도 없으면 어쩌자는 거야. 그저 우스갯소리인줄로만 알았는데 진지하기 그지없는 호석의 표정에 결국 남준은 허리까지 접어 웃기 시작했다. 야 나 지금 완전 진지해, 여자들이 뭣 모르고 다가온다니까. 호석의 말은 이미 들리지 않는다. 아 진짜 어떡하면 좋지. 남준은 결국 또 한 번 호석을 꽉 안아주었다. 저야말로 곧 서른인데 아저씨가 밑도 끝도 없이 귀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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