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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아 기다리고 기다리던 개강



지민은 죽을 맛이었다. 씨발 오지마라, 개강. 제발 개강 전까지 학교가 폭파되게 해주세요. 개강 전 날 천재지변으로 학교가 무너지게 해주세요. 아 갑자기 학교가 사라졌으면 좋겠다...


모든 바람이 무색하게 시간은 흘러갔고 개강까지 앞으로 10시간이 남았다. 하 씨발 그냥 자퇴할까... 지민은 거의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마 대한민국 대학생이라면 대부분 개강이 마냥 좋지만은 않을 것이다. 방학동안 노는 것도 지친다며 그냥 빨리 학교 갔으면 좋겠다 싶다가도 과제에, 시험에, 갖가지 인간관계를 생각하면 또 개강이 싫어진다. 지민은 딱히 개강에 대해서 어떠한 감정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개강 하면 하는대로, 방학 하면 하는대로라는 마인드였다. 그러니까, 지민은 지금 인생 살면서 처음으로 개강 전 날 미친듯이 올라오는 학교 폭파글에 대해 공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시간은 지금도 야속하게 흘러가고 있다. 아 씨발 올해 군대 갈까 말까 고민 했었는데... 갈까 말까 할 때는 가는거랬다고 존나 명언을 몰라뵀다니... 아, 인생... 지민은 침대에 널브러져 힘 없이 손에 들고 있는 폰을 들었다. 잠금화면을 해제하고 카톡에 들어갔다. [내일 봬요, 형.] 대화내역 카테고리 제일 윗 칸에는 아직 3이 사라지지 않았다. 도저히 대화 창에 들어가 볼 자신이 없었다. 와 씨발 얘를 진짜 어쩌면 좋지. 지민은 생각할수록 꼬이는 머릿속에 머리를 마구 헝클였다. 아, 몰라... 지민은 결국 베개에 얼굴을 푹 묻었다. 될대로 되라지...






오랜만이네요, 형.


누군가 자신을 툭툭 치며 그렇게 인사를 했을 때, 처음에 지민은 누군지 몰라봤다. 와 낯짝도 두껍다 난생 처음 보는 사람한테 다짜고짜 형이라니. 지민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살짝 웃어보였다. 어, 미안 내가 사람 얼굴을 잘 기억 못해서... 우리 어디서 만났지? 그렇게 말하며 제대로 다시 맞은 편에 서 있는 사람을 본 지민은 순간 사고회로가 정지되는 기분을 느꼈다. 저를 기억 못할 수가 없을텐데요. 그렇게 말하며 피식 웃는 남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지민의 머릿속에는 비상경보음이 울렸다. 삐용삐용삐용- 비상! 비상! 그녀석이 나타났다! 기어코 그녀석이 이 학교에 입학했다! 당황스럽다 못해 당혹스럽기까지 한 이 만남은 지민을 정신 못차리게 만들었다. 어... 아, 안녕. 지민은 간신히 손을 살짝 들어 그에게 인사했다. 왜 순간 못알아봤지 했더니, 그 새 엄청 자랐다. 키도 조금 큰 것 같지만 그것보다 얼굴선이 더욱 진해지고 골격도 눈에 띄게 넓어졌다. 그 1년 새에 이렇게 많이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을, 지민은 그를 보며 느꼈다. 아... 남자는 저렇게 자랄 수 있구나... 어쩐지 상대적 발탁감이 느껴졌다. 지민은 제 옆머리만 괜히 괴롭히며 쭈뼛쭈뼛 거렸다. 도대체가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 지 몰라 망설여졌다. 형. 그의 부름에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던 지민은 눈을 꾹 감았다. 아 어쩌지... 지민은 고개를 들며 어색하게나마 웃어보였다. 어, 그래. 그는 지민을 천천히 보기 시작했다. 눈에서 코, 천천히 입술, 더 밑으로 턱까지 내려가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노골적인 시선이었다. 지민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살짝 내려깐 눈이 다시 올라와 지민과 눈을 맞추었다. 잊지는 않으셨죠? 그의 한마디에 지민은 완전히 무너졌다.






자신이 경솔했다. 그것은 인정했다. 정말 그 말만 철썩같이 믿고 여기까지 따라올 줄은 몰랐지. 그때는 참 어리석다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자신이 너무 어리석었다. 존나 무서운 새끼, 한다면 하는 새끼였잖아. 지민은 제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더 이상 물러날 구멍도 없어 보였다. 아니 애초에 여기서 제 머리를 더 굴린다고 되는게 아니었다. 그 놈은 이미 여기까지 왔고, 자신은 독 안에 든 쥐나 다름 없었다. 독 안에 든 쥐? 제 처지를 그렇게 표현하는게 맞는가 싶긴 하지만 어쨌든.


띠링. 카톡 알림음이 울렸다. 지민은 힐끔 폰을 봤다. [다 보고 있는 거 알아요.] 헐 씨발 무서워. 지민은 화들짝 놀라며 폰을 엎었다. 제일 처음에는 자체 휴강이라도 할까 싶었지만 이 정도면 직접 집까지 데리러 올 것 같았다. 그래, 진짜 답이 없었다. 뭘 어쩌겠어, 결국 그렇게 만든 건 자신이었다.











지민은 학교 내에 있는 카페에 자리 잡고 앉았다. 오랜만에 과 사람들 만나고 마지막 남은 강의 하기 전에 시간이 조금 남아 카페에서 시간 떼울 생각이었다. 개강이 목요일인건 불행 중 다행이었다. 아싸 금공강. 지민은 작게 허밍을 하며 커피를 한모금 마시다 갑자기 제 앞을 차지하고 앉는 그에, 풉 커피를 뿜어버렸다. 헐 미안해! 아 어떡해! 지민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손수건을 꺼내 그에게 다가갔다. 아, 괜찮아요 괜찮아요. 그는 지민의 손수건을 받아들고 대충 얼굴과 옷을 털어내듯 닦아냈다. 다행히 많이 튄 건 아닌듯 했다. 지민은 잔뜩 미안한 기색으로 조심스레 제 자리에 앉았다. 진짜 미안해, 혹시나 얼룩 같은 거 생기면 바로 나한테 얘기해줘, 내가 깨끗히 빨던가 새로 사줄테니까. 지민의 말에 그는 힐끗 지민을 보더니 손수건을 돌려주었다. 형 저 피하는 거 아니었어요? 갑작스런 그의 물음에 지민은 순간 당황했다. 어, 어?



저 피하는 줄 알았는데. 그렇게 대놓고 다시 만날 구실을 만들어주시네요.


내, 내가 너를 왜 피해.


형 그거 알아요?



형 거짓말 진짜 못해요. 그의 말에 지민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어쩐지 치부가 드러난 것 같아 부끄러워졌다. 지민은 애써 침착한 표정으로 그를 봤다. 저한테 할 말 없어요? 지민은 그의 물음에 어떻게 말을 꺼낼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이 학교에서 볼 줄은 몰랐는데... 네가 이 과로 올 줄은 몰랐어.


뭐. 제가 한다면 하는 성격이라.


......


뭐든지.



어쩐지 말에 뼈가 있는 듯한 느낌이라 지민은 불편한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아까부터 자신을 보는 저 눈빛을 제 속 깊은 곳까지 샅샅이 뒤져보는 느낌이라 더 그런 것 같았다. 하긴, 죄인은 말이 없다. 지민은 시선을 살짝 피하려고 커피를 마셨다. 와, 진짜 나 뚫어지겠네. 고개를 숙여도 느껴지는 그의 시선에 지민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둘의 사이에 잠시 정적이 돌았다. 지민은 그 정적이 더 힘들었다. 차라리 뭔 말이라도 하던가. 결국 그 정적을 못이긴 지민이 먼저 입을 열었다.



1년동안 어떻게 지냈어?


공부했죠. 여기 오려고.


아... 학교는 어때? 학교 오기 전에 뭐 로망 같은 거 상상해 본 적은 없어?


있죠. 공부 힘들때 많이 상상했죠.


역시 새내기네.


형이랑 하는 상상.



씨발. 지민은 제 얼굴을 굳이 보지 않아도 와자작 굳었을거라 생각했다. 쟤는 지금 자기가 무슨 말을 뱉었는지 알기나 하나. 커다랗고 맑은 눈망울이 마치 자신이 뭘 했는지도 모르는 듯 순수해 보이기까지 했다. 지민은 두 손으로 컵을 감싸쥔채 손가락으로 컵을 살짝살짝 긁었다. 또 할 말이 없었다. 아 시간아 제발 빨리 갔으면 좋겠다... 지민은 어제 통하지도 않은 제 바람을 또 빌었다. 그는 테이블에 손을 올려둔 채 손가락으로 톡톡 일정한 간격으로 두들기며 지민을 빤히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한달이에요.


어, 어?


한달 뒤에 다시 고백할거예요.


뭐?


형이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것 같아서. 그 이상은 저도 안돼요.


......


이미 1년이나 참아서.



그는 제 할 말만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민을 스쳐지나가면서 지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지민은 흐트러진 제 머리를 정리할 생각도 못하고 멍해졌다.






지민과 정국은 같은 고등학교 선후배 사이였다. 당시 밴드부였던 지민은 동아리 면접 때 처음 정국을 봤었다. 드럼 하고 싶어서 지원 했다는 정국의 말을 들은 지민이 물었다. 너 나랑 같이 보컬 안 할래? 그 당시 정국은 보컬 입시를 준비하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노래에 흥미를 가지고 있던 정국을 알아본 부모님께서 중학생  때부터 보컬 학원을 보내주셨었다. 너는 남들이랑 다른 길을 가고 싶어 했기 때문에 다른 공부를 시켜주는 거라고, 공부 잘하라는 소리는 안해도 음악 공부는 열심히 하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었다. 음악은 생각보다 엄청 힘들었다. 알면 알수록 더 복잡해지고 어려워지는게 음악이었다. 재능도 일정 부분 받쳐주어야 하는 계열이다보니 저보다 날고 기는 애들은 수두룩 했다. 예고는 떨어졌다. 변성기 때문에 한동안 슬럼프까지 왔다. 회의감이 들었다. 이제와서 음악을 포기하면 돌아설 곳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억지로 억지로 멱살 부여잡고 음악을 끌고 가고 있는 중이었다.


정국이 진학한 고등학교 밴드부는 나름 입소문이 난 전통도 있고, 이름도 있는 밴드부였다. 그래봤자 고등학생들끼리 모여서 취미삼아 악기 두들기며 노래 부르는 거 아니냐 할지라도, 실제 이 학교 밴드부에 있다가 인디로 여전히 음악하고 있는 선배들도 많았고 기획사에서 캐스팅 한 선배들도 있었다. 진지하게 음악을 공부하면서도 진짜 음악이 하고 싶은 사람들이 많았다. 그만큼 부원들을 뽑는데 꽤나 공을 들이고 있기도 했다. 정국은 여전히 음악이 좋았다. 슬럼프가 오고 자신에게 회의감이 들지라도, 이 길이 내 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도 한번에 음악을 버리지를 못했다. 그래서 나름 자기만의 답을 내렸다. 이 밴드부에 들어가서 머리를 좀 식히자고. 입시로써 음악을 하지 말고 정말 내 취미로, 내가 하고 싶은 음악을 하자고. 여기서 전공이 아닌 다른 걸로 음악을 하다보면 또 모를 내 재능을 찾을 수도 있고, 어쩌면 슬럼프를 넘길수도 있을 것이라고. 그래서 드럼을 선택했었다.


그런데 다짜고짜 보컬이라니. 정국은 맞은편에 앉아 있는 지민을 보며 애써 표정관리를 했다. 뜬금없이 무슨 보컬이야. 옆에 앉은 다른 선배의 말에 지민은 그를 힐끗 보고 다시 정국을 바라보다가 살짝 웃어보였다. 너, 보컬 전공 아니야? 지민의 말에 정국은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뭐야, 둘이 아는 사이야? 다른 선배의 물음에 정국은 입까지 굳어버린 듯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는 사이는 무슨, 난생 처음 본 사람이었다. 정국의 경계어린 시선을 느낀 지민은 결국 빵터져 책상까지 퍽퍽 쳤다. 너 가끔 버스킹 하지 않았어? 지민의 말에 정국은 입을 앙 다물었다.



나 가끔 너 버스킹 하는 거 봤었거든.


버스킹 아니었어요.


길거리에서 공연하면 다 버스킹이지 뭐야.


공연 아니에요. 그냥 내가 부르고 싶어서 부른 것 뿐이에요.


그래, 그렇다고 치자. 난 네가 노래 부르는게 좋아. 내가 보컬이라서 보컬은 내가 뽑거든.


제가 전공인 건 어떻게 아셨어요?


어, 그건 그냥 찍은건데 맞았네.



정국은 결국 입을 다물었다. 제 앞에서 생글생글 웃고 있는 지민이 너무 얄미웠다. 형 같지도 않다. 어디가서 친구라고 해도 믿게 생겼다. 옆에서 가만 듣고 있던 다른 선배가 정국에게 물었다. 너 드럼은 칠 수 있어? 정국이 고개를 살짝 저었다.



사실 너 말고도 드럼 하고 싶다는 애들이 몇 있어서. 근데 걔네들은 이미 몇년 쳐 본 실력자들이거든.


......


각 포지션마다 한명씩 밖에 못 뽑는데 밴드부 꼭 들어오고 싶으면 지민이한테 들어가는게 나을거야. 사실 지민인가 이렇게 마음에 들어 한 적이 없어서.



이름이 지민이구나. 정국은 다시 지민을 바라봤다. 두 손을 턱에 괸 채 부담스러울 정도로 초롱초롱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한테 오면 내가 진짜 잘해줄게. 고민하던 정국은 지민의 마지막 말에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너 그 새내기랑 무슨 사이야?


요 며칠 내내 듣는 소리가 저거다. 지민은 귀찮다는 듯 손만 휘휘 내저었다. 요즘 너랑 그 새내기 이야기가 온 학교에 파다하다. 동기의 말에 지민이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오버 좀 하지마. 동기는 더욱 오버스럽게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레알. 우리 과에서 너희 둘 이야기 모르는 사람이 없어.


참 나. 그냥 같은 고등학교 선후배 사이야. 뭘 그거가지고 할 말이 많다고.


어? 걔는 그렇게 말 안하던데.



지민은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우뚝 멈추고 천천히 동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이 어찌나 긴장이 되는지 목에서 끼기긱 소리가 나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뻣뻣한 움직임이었다. 뭐, 뭐라고 말하는데? 지민은 제 목소리가 떨리는 것도 알아채지 못 할 정도로 긴장해서는 물었다.



약속 지키려고 왔대.


무슨 약속.


그거야 걔랑 너랑만 아는 거지. 안가르쳐 주던데?


아...



지민은 안도를 해야할지, 화를 내야할지 감이 안와 어정쩡한 표정을 지었다. 그나저나 너 그렇게 잘난 애랑 어떻게 친해졌냐? 고등학교 때라 그래도 학년이 다른데. 지민은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다. 같은 동아리.






정국은 이미 과 안에서 유명인사였다. 오티 때 처음 그를 본 사람들은 너도 나도 정국에게 관심을 가졌다. 특히 병아리 티 많이 나는 새내기들은 정국에게 관심이 많았다. 오티 때 정국 쪽을 힐끔힐끔 보거나 수줍은 웃음을 짓는 것이 다 보였다. 귀엽네. 지민은 그들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한창 캠퍼스 로망에 기대가 부풀어 있을 때지. 남자인 제가 봐도 정국이는 참 멋있었다. 키도 크고, 몸도 좋고, 얼굴도 잘생겼고, 노래도 잘 부르고, 성격도 귀엽고. 고등학교 때 내가 여자였으면 너한테 고백 한 번 해봤을거라고 농담삼아 말 한 적도 있었다. 정국은 오티 때 내내 지민의 옆에 붙어 있었다. 아 저 낯 많이 가려서요. 정국은 그렇게 말하며 지민의 옆에 앉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자신이 잠시 화장실 갈 때, 술게임 때문에 자리를 바꿀 때 등등 지민이 조금만 움직이면 자신도 따라서 움직이는 것이다. 뭐야, 정국이 지민이 껌딱지야? 한 선배가 장난스러운 말투로 물어보자 정국이 살짝 웃어보였다. 네 제가 지민이 형 좋아해서요.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동생이 귀엽다면서 웃어댔지만 지민은 따라서 웃을 수가 없었다. 표정관리가 안되어 굳은 얼굴을 애써 풀며 어색하게 웃으며 정국을 노려봤다. 자신은 당당한 듯 땡글땡글한 두 눈이 더 얄미웠다. 저거 분명 일부러 저 말 한거야. 지민은 정국의 속을 모를리 없었다.


술게임이 한창 절정을 달리고 있었다. 이미 몇 명은 취해서 술잔도 뺏겼다. 올해 새내기들은 술들이 좀 센데? 선배가 한층 업 된 목소리로 정국의 잔에 술을 채웠다. 지민은 약간 알딸딸한 상태로 맞은 편에 앉아있는 동기를 바라봤다. 또 게임을 시작하려던 그는 지민과 눈이 마주치자 기겁을 했다. 야, 박지민 저 새끼 취했어. 그의 말에 테이블에 있던 사람들이 지민을 바라봤다. 새내기들은 영문을 몰라 의아한 표정으로 지민을 봤다. 바로 옆에 앉아있던 정국도 고개를 돌려 지민을 바라봤다. 나 안 취했어. 지민이 허리를 꼿꼿히 세우며 소리쳤다. 나 더 마실 수 있는데. 지민은 술병을 들어 비어 있는 제 잔에 부으려 하자 정국이 지민의 손에서 술병을 빼갔다. 어... 지민의 눈이 멀어지는 술병을 향했다. 정국아 미안한데 지민이 좀 재워줘, 걔 지금 안재우면 큰일 나. 선배의 말에 정국은 네 하면서도 어떻게 재워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 못했다. 나 안취했어, 정국아. 지민이 두 눈 부릅 떠 정국을 보며 말했다. 볼이 살짝 빨갛긴 한데 원래 홍조기가 있어서 술 때문인지도 잘 모르겠고, 말도 잘 한다. 눈도 그다지 풀렸다는 생각은 안드는데... 정국은 고개를 갸웃하며 선배를 힐끗 봤다. 저 새끼 훼이크야, 주정 심하니까 못볼 꼴 당하고 싶지 않으면 그냥 재워. 아, 네. 정국은 지민의 등을 살살 쓸어내려주었다. 지민은 가까이 붙은 정국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정국아 그냥 머리를 어깨에 기댈 수 있게 하면 자기 알아서 자. 다른 사람의 말에 정국은 살짝 지민의 옆머리를 제 어깨에 기댈 수 있도록 해주었다. 지민은 기댄 채 눈을 끔뻑이더니 종국에는 완전히 잠들었다.


지민이 다시 눈 떴을때는 정국의 등이었다. 이미 완전히 깜깜해진 거리에, 가로등 불빛만이 거리를 밝히고 있었다. 지민은 화들짝 놀라 등에 기대고 있던 얼굴을 확 들었다. 일어났어요? 정국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렸다. 내, 내려줘. 지민의 말에 정국은 천천히 걷고 있던 발을 멈추었다. 지민은 그의 등에서 벗어나려고 몸을 움찔거렸지만 제 다리를 감고 있는 정국의 팔은 꼼짝도 안했다. 정국아 빨리 내려줘. 지민의 말에 그제서야 정국은 무릎을 굽혀 지민을 내려주었다. 지민은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언제부터였는지도 기억이 안난다. 분명 술게임 시작한 것은 기억 나는데 그 이후로는 아무런 기억이 없다. 나 혹시 술주정 부렸어? 지민이 다급히 정국의 팔을 잡으며 물었다. 아니요. 정국의 말도 믿을 수 없다. 창피했다. 그냥 빨리 집으로 뛰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지민은 아직 완전히 술이 꺤 상태가 아니었다. 그렇게 많이 마신 편도 아니었는데 어째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리는게 영 안좋았다. 지민은 재빨리 폰을 꺼냈다. 자신이 또 술 마시고 주정을 부렸으면 카톡이 난리났을 거였다. 그러나 다행히 카톡은 잠잠했다. 아 주정 부릴 정도는 아니었구나. 지민은 속으로 안도를 하며 정국을 바라봤다.



아... 여기까지 데려다줘서 고마워.


아뇨, 뭐. 형 집 알아서. 통학 한다길래 제가 데려다 준다고 했어요.


아, 그래 고마워. 여기서부터는 나 혼자 갈 수 있으니까.


데려다 줄게요.


아니야, 괜찮아. 여기까지 업고 오는 것도 많이 힘들었을텐데.


어두워요. 남자도 위험한 세상이에요.



더 이상 무어라 받아칠 말이 없어 지민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처음 정국이를 만났을 때 그 놀람과 혼란스러움이 아직 남아 있었다. 말이 되냐고, 몇년을 보컬 준비 하던 애가 갑자기 이쪽으로 오다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고등학교 때 자신은 음악만 해와서 공부 못한다는 말을 했던게 기억 났다. 공부 못하기는 개뿔, 못하는게 아니라 안한 거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또 정국이 마냥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굴도 잘생기고, 노래도 잘하고, 공부도 잘하고... 부러운 새끼.


형. 정국의 부름에 지민은 힐끗 정국을 봤다. 어느새 지민의 집 앞에 도착했다. 정국은 가만히 서서 지민을 바라보고 있었다. 키 많이 컸네. 지민은 새삼 그렇게 생각했다. 작년에는 이렇게까지 올려다 보지 않았던 것 같은데.



처음에 형 봤을 때 너무 놀랐어요, 더 예뻐져서.


... 야. 형한테 예쁘다는게,


잘 어울려요, 그 머리.


......


벚꽃 닮았네요. 예뻐요.



지민은 무어라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 지민의 표정이 귀여워 정국은 피식 웃었다. 개강 때 봬요, 형. 돌아서는 정국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던 지민은 문득 든 생각에 소리 없이 경악하며 제 머리를 부여잡았다. 곧 있으면 자주 볼 사이였다. 아주 껄끄럽게도.






여자애들이 널 부러워 하더라, 전정국이랑 그렇게 붙어다니는 애가 너 밖에 없다고. 돈까스를 한 입 입에 넣으면 하는 말에 지민은 한쪽 입꼬리만 올려 피식 웃었다. 부러울 것도 많다. 지민은 제 앞에 놓여있는 덮밥만 숟가락으로 휘적휘적 저었다. 야 넌 밥 맛 없으면 걍 앉아있어, 밥 맛 떨어지게 진짜. 동기의 한마디에 지민은 입술을 삐쭉 내밀며 결국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우리 학년끼리 과에서 내기 한 거 있는데 너도 할래? 동기의 물음에 턱을 괸 채 폰만 보고 있던 지민이 힐끔 그를 쳐다 보았다. 무슨 내기. 관심을 보이는 듯한 지민의 물음에 그는 포크까지 내려놓았다.



그 인기 많은 정국이가 얼마만에 여친을 사귈까.


여친?


지금 전정국 노리는 여자들이 한 두명이 아니에요. 지금이야 전정국이 다 쳐내더라만 나중에 자기 취향 나오면 사귈지 어떻게 아냐.


다 쳐내?


... 너 정국이랑 같이 다니면서 한번도 못 느꼈냐? 그렇게 붙어다니면서 그거 하나 눈치 못 채냐.



아니 붙어다니면 얼마나 붙어다녔다고... 지민은 머쓱함에 머리만 긁적였다. 오티 이후로 정국은 자주 지민의 옆에 다가왔다. 형형 하면서 쫒아다니길래 그러려니 했는데 주위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렇게 붙어다닌 걸로 보였나보다. 정국이가 하도 너만 졸졸 따라다녀서 별명이 새끼 오리야, 네가 엄마인 줄 알고 졸졸 따라간다고. 동기의 말에 지민이 질색했다. 뭐야 그 별명은. 동기가 빵터져서는 지민의 턱 밑을 간질였다. 아이고, 우리 찜니 그렇게 귀여움 받던 애가 언제 이렇게 엄마가 다 됐데? 아 썅, 그만해. 지민은 그의 손을 팍 쳐내려고 했다.


안녕하세요, 형. 그 순간 불쑥 튀어나온 손이 동기의 손목을 잡고 자연스럽게 내리면서 인사했다. 어, 정국아 너도 밥 먹으러 왔냐? 동기는 정국을 보고 화색을 띄었다. 아뇨, 지민이 형이 여기 있다고 해서요. 정국은 자연스레 지민의 옆에 앉으며 말헀다. 나 찾았어? 지민의 물음에 정국이 고개를 살짝 저었다. 그냥요.


아 마침 잘됐다, 안그래도 우리 네 얘기 하고 있었는데. 동기의 말에 지민의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야 뭘 그런 걸 다 이야기 해. 무슨 얘기 했는데요? 지민의 반응에 궁금했는지 정국이 물어봤다.



정국이 넌 우리 과에 마음에 드는 사람 없냐?


아...


이제 학교 들어온지 일주일 밖에 안된 애한테 뭘 물어보는 거야!


왜 물어볼 수도 있지. 우리 과에서 지금 제일 주가를 달리고 있는 분이신데.


제가요?



동기의 얼굴이 못마땅 하다는 듯 구겨졌다. 너희 둘은 대체 같이 다니면서 뭐하니, 제발 너희 일에 관심 좀 가져줄래. 지민은 피식 웃었다. 정국이는 원체 자기 관심 있는 일 아니면 신경을 안쓰는 애니까. 정국이 재빨리 대꾸했다. 제가 관심 있는데 신경쓰다 보니까 다른데 신경 쓸 겨를이 없어서... 동기는 그 둘을 어이없게 바라보다가 다시 말을 꺼냈다.



그래, 어쨌든. 마음에 드는 사람 없어?


... 무슨 의미로 물어보는건지 잘 모르겠는데요.


우리 과에서 호감 있는 사람 없냐고. 너 주위에 여자들 되게 많이 오던데.



아... 정국은 지민을 힐끗 보더니 입을 열었다. 좋아하는 사람 있죠. 그의 말에 밥 한 입 넣으려던 지민이 놀라서 정국을 쳐다봤다. 동기는 화색을 띄며 말했다. 진짜? 대박 누구? 정국은 살풋 웃어보였다. 아직은 비밀이에요. 아니 괜찮아 괜찮아, 말 안해줘도 돼. 동기는 괜히 자신이 고백 받은 것 처럼 호들갑 떨어댔다. 지민은 점점 제 목구멍이 줄어들고 있는 건 아닌가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목구멍이 콱콱 막힐리가 없어. 정국이 자신을 힐끗힐끗 보는 그 시선이 느껴졌다. 그렇게 보지마... 지민은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어졌다.



대학교도 왔는데 연애 하고 싶다는 생각은 안들어?


연애요?


솔직히 너 정도면 마음먹고 고백하면 거의 넘어오지.


진짜요?



정국이 프스스 웃었다. 제가 그 사람한테 아직 부족하면 어떡하죠. 정국의 물음에 지민은 제 의자에 누가 가시방석이라도 깔아놓은 양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존나 이렇게 불편한 자리는 또 처음이다. 말은 전정국이 다 하는데 내가 왜 이렇게 남의 눈치를 봐야 하는건지. 지민은 정국을 노려봤다. 정국은 아무렇지도 않은듯 너무나도 평온한 표정이었다.



야 네가 어디가 어때서! 그냥 고백해. 완전 완성형이구먼 만약에 그 사람이 너 차면 그 사람 보는 눈 없는거야.


그런가요?


그래. 빨리 고백하고 사귀어서 같이 벚꽃놀이 구경 가야지.


네. 감사합니다.



동기는 푸하핫 웃음을 터뜨렸다. 지민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먼저 가볼게. 어? 박지민! 동기의 부름도 무시한 채 지민은 빠른 걸음으로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후다닥 잔반을 놔두고 식당을 빠져나가는 발걸음을 정국이 잡아세웠다. 형. 정국의 부름에 입술을 살짝 깨문 지민은 정국의 손을 뿌리쳤다. 미안, 내가 지금 정신이 없어서... 다음에 만나자. 지민은 정국의 부름에 더욱 발걸음을 빨리 해 그 자리를 벗어났다.






고등학교 때 둘은 합이 잘 맞았다. 원래 그들이 다니는 고등학교는 항상 보컬을 한명으로 곡 마다 다른 사람이 하거나 돌아가면서 하는 식이었다. 듀엣으로 시작한 건 그들이 처음이었다. 보컬이 두명이 되고부터 밴드부의 인기가 훨씬 더 많아졌다. 그 덕이 모두 지민과 정국 덕분이다라고 할 수는 없지만 적지 않은 영향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정국은 점점 슬럼프를 이겨냈다. 슬럼프가 올 당시에 주위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들었는데 정국은 확실히 그 덕을 봤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지민은 좋은 사람이었다. 저의 많은 것을 단번에 바꿔버린 대단한 사람이기도 했다. 정국은 주체없이 끌려다녔다. 그에게 끌려다니다가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곳곳에 그가 스며들어 있었다.


지민의 졸업식 날, 정국은 그를 축하하러 학교에 찾아왔다.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행복한 듯 막 웃으면서 얘기 하던 지민은,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정국을 발견했다. 눈이 마주치자 정국은 손을 살짝 흔들어 보였다. 친구들과 몇마디 더 나누던 지민은 정국에게 다가왔다. 겨울의 햇빛은 따사로웠고, 그만큼 눈부셨다. 정국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지민을 제대로 마주하기 힘들었다. 그에게 쏟아지는 햇살이 찬란했다.


지민이 정국의 앞에 멈추어 서자, 정국이 들고 있던 꽃다발을 내밀었다. 졸업 축하해요. 지민은 정국이 건낸 꽃을 받아들며 환하게 웃었다. 고마워, 정말로. 정국은 두 손을 코트 안에 집어 넣었다. 지민은 정국이 준 꽃다발을 만지작거렸다. 형. 정국의 부름에 지민이 고개를 들었다. 응. 지민의 두 볼은 발그레했다. 날이 따스해서 그런건지, 추워서 그런건지는 모르겠지만 이따금 지민의 두 볼에는 홍조가 발그레하게 생겼다. 좋아해요. 정국이 툭 내뱉었다. 꽃다발을 만지작 거리던 지민의 손이 움찔 멈추었다. 응? 지민이 고개를 들어 정국을 쳐다봤다. 정국의 표정은 진지했다. 나도 너 좋아해. 지민이 말했다. 그런 거 아닌 거 잘 알잖아요. 정국의 말에 지민의 눈에 당황한 기색이 나왔다.


정국은 수많은 고민과, 혼란과, 그 와중에도 시도때도 없이 들이닥치는 설렘과, 여러가지 섞이는 감정들을 경험해왔다. 첫사랑이었다. 이게 과연 사랑이 맞는건지 뭔지 감도 오지 않았고, 원래 누군가를 좋아한다는게 이렇게 힘들기도 한건가 싶기도 했다. 많은 방황을 했다. 결국엔 겸허히 인정했다. 그를 좋아하고 있음을.


정국은 절대 가벼운 마음으로 고백한 것이 아니었다. 만약 가벼운 마음이었다면 굳이 다시는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르는 졸업식 날 일부러 여기까지 와서 그의 앞에서 고백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같이 있었던 2년동안 충분히 시간이 많았다. 그럼에도 정국이 어쩌면 마지막 만남이 될지도 모르는 오늘에서야 고백한 것은 결코 자신의 감정이 언제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가벼운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툭 하고 내뱉은 한마디로 느껴질지 몰라도 그 말 안에는 정국이 이때까지 지민과 있으면서 겪은 모든 감정과, 자신의 고민과 방황이 한데 뭉쳐진 진심이었다.


지민은 어렴풋이 느꼈다. 정국이 자신을 대하는데 있어서 무언가 묘하게 변했음을. 아닐거야, 아닐거야 가볍게 넘겼는데 기어코 졸업식 날 털어놓아 버리는 제 사랑스런 동생이 미웠다. 지민은 꽃다발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어쩌면 자신이 가볍게 받은 이 꽃다발에도 그의 마음이 들어가 있을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꽃다발이 무거워졌다. 지민은 이런 분위기가 너무 싫었다. 마지막이잖아. 지민은 덜덜 떨리는 입술을 애써 감추며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에이, 이제 난 성인이고 넌 아직 미잔데?


......


너가 내년에 대학교 들어가서 멋진 사람이 되어서 돌아오면 네 고백 받아줄게 꼬맹아.


진짜죠.


그럼 내가 언제 거짓말 하는 거 봤어?


내년에는 무조건 받아줘야 해요.


어?



형이 돌아오면 받아준다고 했으니까. 정국의 말에 지민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정국은 그의 손을 잡아당겨 팍 끌어안았다. 내년에 다시 올게요. 귓가에 속삭이고 몸을 뗀 정국은 지민을 살짝 내려봤다. 어 안이 벙벙한듯 멍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지민을 보며 살풋 웃었다. 졸업 축하해요. 먼저 뒤돌아 가는 정국의 뒷모습만 보며 지민은 꽃다발만 꽉 쥐었다.











아 제에에바아아알 지민아!!! 나 좀 살려줘어어어. 제 팔을 부여잡고 거의 오열하기 직전인 여동기의 부탁에 지민은 꽤나 난처했다. 야, 그걸 나한테 이야기 해도... 아아아악!!!! 지민아!!!! 나 죽는다 진짜!!!! 오열이 아니라 거의 악을 쓰는 그녀의 행동에 결국 지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으니까 제발 좀 닥쳐! 지민의 승낙에 그제서야 팔을 감은 손을 떼고 언제 그랬냐는듯 평온한 표정으로 지민을 바라봤다. 와 씨 진짜... 지민은 그녀를 어이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건 당사자한테 직접 부탁하면 되잖아.


내가 그것도 안해보고 너한테 이렇게 미친년처럼 부탁하겠냐.


미친년 같은 건 아는구나.


걔가 철벽이 심한 줄은 알고 있었는데 그 정도일 줄은 몰랐단 말이지.


......


세상에 그냥 오는 여자만 막는게 아니라 여자와 함께 할 듯한 모든 것들을 다 처단하더라니까?

... 그게 대체 뭔 말이야.


지금 한창 과팅이니 뭐니 닥치는대로 들어올 때 아니냐. 걔한테 그거 하나 제의 안들어왔을 거 같아? 한달도 안됐는데 걔한테 제의 들어온 것만 내가 알기로 10개 넘어.



미쳤다. 10개라니. 지민은 입이 떡 벌어졌다. 아니 대체 전정국을 어떻게 알고 10군데에서 제의가 들어와? 지민의 말에 여자는 말도 말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런 얼굴이 학교에 재학중이었다면 모를리가 없을테니 당연히 새내기인 거 알고. ○○관에서 많이 보이는 이러이러하게 생긴 사람 어느 과인지 알 수 있을까요? 너무 잘생겨서요. 익명이요. 이런 글 페북에서도 올라와. 학교 소문 얼마나 빠른데.


근데 나도 기대 하지마. 물어는 볼게.


안돼. 물어만 봐서는 안돼. 데리고 와야 한다니까? 아 제발 너 정국이 과팅에 데리고 오면...


... 오면?


내가 앞으로 너 공책 제본 안뜰게.


야 이씨 양심 없는 새끼야.


야 네 놈의 정국이 인맥 좀 쓰면 어디가 덧나냐? 자랑할게 정국이가 졸졸 쫒아다니는 거 밖에 없으면서!


......


그래, 과탑도 자랑할거리지. 아아아 지민아 제발, 믿을 사람이 정말 너 밖에 없다. 너 말고는 아무도 이 일을 성공할 사람이 없어.


너는 양심도 없는데다가 부탁하는 태도도 안예뻐서 기각이야.


지민완댜님.


아 씨발 진짜.



지민은 외면했다. 여자는 다시 팔뚝을 잡고 들러붙었다. 알았어, 알았어! 원하는 거 아무거나 들어줄게, 제발! 그녀의 완곡한 부탁 끝에 결국 지민은 최종적으로 승낙했다.




하지만 자신도 문제였다. 정국이 피하기도 바쁜 와중에 직접 제 입으로 과팅 나가달라고 어떻게 부탁을 하냐는 말이다. 지민은 끄으으 작게 앓으며 제 머리를 부여잡았다. 어디 아파요? 갑자기 들리는 목소리에 지민은 고개를 팍 들었다. 정국이 막 과방에 들어오고 있었다. 어어, 왔어? 지민은 어색하게 물으면서 제 머리를 부여잡은 손을 내렸다. 정국은 지민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정국은 가방을 테이블에 내려놓자마자 폰으로 무언가를 하기 시작했다. 가끔 인상을 찌푸리고 작게 짜증을 내는 것을 보면 무언가 일이 풀리지 않는듯 했다. 지민은 타이밍만 재다가는 결국 말도 못 꺼낼 것 같아서 결국 정국이를 불렀다. 정국아. 네? 정국은 바로 지민을 보며 폰을 내려놓았다. 지민은 그 폰을 힐끗 보다가 입을 열었다.



아, 너한테 부탁이 있는데...


예? 저한테요?


응.


별 일이 다 있네요. 나 피해다니기 바쁘더니.



열이 확 오르는 느낌이다. 거짓은 아닌지라 지민은 민망했다. 그게 그렇게 티가 났나. 그의 입장에서는 꽤나 상처 받을 수도 있는 일인데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것을 보니 정국도 보통내기는 아니었다. 지민은 어떻게 말해야하나 고민 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사실 지금 정국과 지민의 관계에 있어서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게 보통 철면피가 아니고서는 힘들었다. 지민은 아찔해지는 머리에 눈을 꽉 감았다 떴다. 미쳤지 박지민, 네가 제일 양심이 없어 지금...



과팅 한번 나가보지 않을래?


......


아니 거기 나가보면 생각이 달라질지도 몰라. 네 또래들도 만나고 이야기도 좀 하고. 거기가 무조건 애인 만들러 간다기 보다는 그냥 새로운 사람 만나고 친구 사귀려고 가는거지.


허.



그의 헛웃음에 결국 지민은 입을 꾹 다물었다. 정국은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렸다. 그의 행동에 빡침이 여실히 묻어나왔다. 형 지금 나랑 장난쳐요? 그의 목소리에 날이 섰다. 말 뿐인데도 날카롭기 그지 없었다. 어차피 기대도 안했지만 이딴식으로 나오니까 오기까지 생기네요. 정국이 일어서며 하는 소리에 지민의 고개는 절로 숙여졌다. 볼 낯이 없었다. 그래, 애초에 승낙을 하면 안되는 일이었다. 그저 친한 선후배 사이에서는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지민과 정국의 사이는 그 때 졸업식 이후로 그냥 선후배 사이가 아니었다. 지민 혼자 그 사실을 부정하고 있었다. 혼자 도망치기만 했으니 이 사단이 나는거다. 그의 고백을 받아주고 자시고 하기 전에 자신과 정국의 관계를 파악하고 있었어야 했다.



미안하기는 한가보죠. 고개도 못 들고 있는 걸 보면.


......


그때부터 알고 있었어요. 좆고딩이 뭣 모르고 그냥 마음이 동해서 한 고백이겠거니 했겠죠. 형한테는 그렇게 가벼웠던거죠.


......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니까 나한테 과팅을 나가라는 개소리까지 할 수 있는거죠.


......


그냥 그렇게 생각하는게 내 마음에도 편해요. 만약 형이 정말 내 진심을 알고도 그런 말을 했다면 쓰레기죠. 자기 좋다는 사람한테 과팅이나 나가보라니. 


미안해, 정국아. 그럴 의도는 아니었어.


나갈게요. 형 말대로 다 할게요. 그때부터 형이 하란대로 다 했으니까 한번 더 한다고 힘들 거 없죠.


......


대신 형도 그만큼 각오는 해야할거예요.


......


저 물러날 생각은 추호도 없거든요.



정국은 제 할 말만 하고 과방을 박차고 나갔다. 문을 열어재끼는 행동에서도 정국이 얼마나 화가 났는지 뼈저리게 느껴졌다. 지민은 정국이 나가고 조용해진 과방에서 멍하니 문만 바라보다 결국 두 손에 제 얼굴을 묻었다.






성인이 되어서 멋진 사람이 되면. 정국은 그 말을 몇번이나 되새겼다. 고3으로 올라가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부모님께는 말씀드렸다. 음악을 정말 좋아하지만 그렇게나 좋아하는 걸로 직업을 삼기에는 너무 무섭다고. 나중에 정말 좋아하는 걸 잃어버릴까봐 두렵다고. 지금부터라도 공부 열심히 할테니까 믿어만 달라고. 정국은 코피 나는게 일상이 될 정도로 빡세게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가 진학한 대학교에, 그가 간 학과로 가려면 어중간하게 공부 해서는 안됐다. 이미 수시는 망했기 때문에 바로 정시를 파기 시작했다. 제 생에 이렇게 무언가에 열중한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공부는 하나도 몰랐지만 그나마 정국이에게 유리했던 것은 경쟁에 익숙했다는 것이다. 공부에 있어서는 감히 우러러 볼 수 조차 없는 천재가 많지 않았다. 게다가 고3이라는 압박감, 친구들과 경쟁 해야 한다는 그 심리가 정국에게는 스트레스로 오지 않았다. 심리전도 은근 있는 수험에 있어서는 정국이 절대적으로 유리했다. 가끔 미치도록 힘들 때, 진짜 대학이고 뭐고 다 포기하고 싶을 때,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사진을 꺼내 보기도 했다. 그가 했던 말을 곱씹기도 했다. 정국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내뱉었던 말이 100% 그럴 마음으로 한 말이 아니었다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거절은 안했으니까. 그 사실 하나로, 가능성을 품에 안고 가는 것이었다.


고3이 되면서 키도 훨씬 더 커지고 얼굴 선도 더 굵어졌다. 체력관리를 위해 가벼운 운동만 했을 뿐인데 근육이 잡히기 시작하면서 골격도 커졌다. 워낙 주위에 관심이 없는 정국도 느껴질 정도로 제 주위에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게 형이 말한 멋진 사람인가. 아직은 잘 모르지만 대학교 올라가면 알 수 있지 않을까. 정국은 그렇게 생각했다.


정국이 생각하는 멋진 사람의 기준은 있었다. 일종의 롤모델이었다. 고3 때 공부를 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히고 붙여주신 과외쌤이었다. 그 사람은 정국과 5살 차이 나는 대학생이었는데, 정국은 그 사람을 보고 남자가 봐도 멋있다는게 이런 느낌이구나 처음 생각했다. 정국이 보기에 그 남자는 완벽한 남자의 이상향이었다.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정국은 진심으로 남자를 존경했다. 그래서 털어놓았다. 아무한테도 털어놓지 못했던, 자신의 이야기를. 남자는 아주 좋은 조언자 밑 조력자가 되어주었다. 이런게 멋진 사람이라는 거구나. 정국은 그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1년간의 과외 후에는 좋은 형이 되었다. 대학 합격한 것을 보여줬을 때 남자는 정국보다 더 기쁜 표정으로 그를 안아주었다. 정국아, 넌 정말 멋있어. 남자의 말이 힘이 되었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갑자기 만나게 되어 정국은 순간 숨 쉬는 법도 잊을 정도로 놀랐다. 분홍색으로 물들인 그가 저 앞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는데 꿈처럼 비현실적으로만 느껴졌다. 1년 전과 전혀 다를 거 없는, 아니 오히려 더 격렬해진 제 감정의 변화에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이렇게 미친듯이 사람을 좋아할 수 있나. 정국은 아무나 잡고 물어보고 싶을 정도였다. 원래 이렇게 좋아하는게 정상이 맞나요, 정말 제 심장이 제대로 미친건 아닐까요.











벚꽃이 만개했다. 여기저기 벚꽃 축제를 했다. 봄은 언제나 설렜다. 항상 새로운 사람, 새로운 만남이 있는 봄은 설렐 수 밖에 없었다. 정국은 결국 과팅을 나갔었다. 그 뿐이었다. 어쨌다더라 저쨌다더라 말은 들리지만 정국에 대한 이야기는 들리지 않았다. 이제 4월이구나 싶었다. 벚꽃은 이렇게나 예쁜데 같이 보러 갈 애인이 없네. 매년 주위에서는 그런 소리가 들렸다. 아 미친 올해도 박지민이랑 벚꽃 봐야하나. 질색하면서 말하는 제 동기에 지민도 인상을 찌푸렸다. 누가 너랑 보러 간대?


어, 전정국이다. 동기의 말에 지민은 그가 보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 멀리 정국이 어떤 여자와 지나가고 있었다. 저 애 과팅에서 만난 애라던데 그 이후로 저 여자애가 정국에게 들이대나봐. 동기의 말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오로지 지민의 정신은 정국과, 그의 옆에 있는 여자에게 쏠렸다. 둘은 꽤나 잘 어울려 보였다. 그래, 저게 맞는거지. 지민은 멀어져가는 둘을 보며 멍해졌다. 야, 박지민 어디가! 동기는 갑자기 홱하니 가버리는 지민을 보며 허둥지둥 따라갔다. 박지민? 멀리서 들리는 목소리에 정국은 슬쩍 고개를 꺾어 멀리 바라 봤다가, 여자가 부르는 소리에 다시 고개를 돌렸다.


정신 없이 뛰어왔다. 그저 문득 그에게서 멀리 떨어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어울려 보인다는 생각과 함께 자신이 눈에 띄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건물 밖에 나오니 갑자기 회의감이 들어 걸음을 멈추었다. 내가 뭐 하고 있는거지. 지민은 제 크로스백 끈을 한 손으로 꾹 잡고 천천히 걸었다. 학교에서 제일 예쁘다는 꽃길이었다. 원래는 정식 명칭이 있는데 양 옆에 벚꽃나무가 길 끝까지 심어져 있어서 벚꽃 필때마다 길에 꽃이 쌓여서 꽃길이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온통 분홍생 투성이인 길 한가운데를 걸으려니 눈 앞이 어지러웠다. 이런 분홍빛, 이제는 지겹다. 지민은 오른발로 살짝 땅을 스치며 찼다. 땅에 쌓인 꽃잎들이 지민의 발길질에 따라 이리저리 흐트러지고 흩날렸다.


이 기분 도대체 뭐지. 지민은 무어라 탁 꼬집어 설명 할 수 없는 기분에 짜증이 났다. 나 정말 쓰레기인가. 우울해졌다. 내가 오히려 피하고 다니고 여자 만나라고 자리도 만들었으면서, 막상 진짜 여자랑 있는 모습을 보고 혼란스러운 생각이 든다면 쓰레기가 맞겠지. 지민은 나무 아래에 있는 벤치에 털썩 앉았다. 지민이 앉으면서 벤치에 내려 앉은 꽃잎들이 바람따라 흩날렸다. 예쁘네. 멍하니 길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애인 생기면 꼭 같이 이 길을 걸어야지. 처음 이 학교에 와서 이 길을 걸을 때 그런 생각을 했더란다. 지민도 새내기였던 시절이 있었듯, 당연히 캠퍼스 로망 같은 것이 있었다. 대학교에서 애인을 사귀어야지. 애인이랑 벚꽃 구경 가야지. 대학교 들어온지 1년은 더 지난 지금까지 애인 한번 사귀어 본 적 없는 모솔 신세지만. 그래서 더 혼란스러운지도 몰랐다. 갑자기 저 좋다고 들이대는 연하가 진심인지 아닌지 몰라서. 그 마음을 알아차릴만큼 지민도 연애를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사실 믿지 않았다. 그냥 자기한테 잘 해주니까 사춘기이고 어린 마음에 그런거라 생각했겠지. 그렇게만 생각했었다. 졸업식 날 고백 받았을 때도 그렇게 생각했다. 여자 만나본 적 없으니까. 또 여자 만나면 생각 달라질거야. 대학교 와서는 그에 대해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 다음 해 오티에서 처음 봤을 때는 정말이지 놀라서 말도 안나왔었다. 잊지는 않았겠죠? 하고 물어 올 때 그때서야 그가 품고 있던 마음의 무게가 한번에 다가왔다. 보컬만 하던 애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1년만에 이 학교 이 학과에 왔다는 것은 보통 마음 먹은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민은 순간 무서워졌다. 그런 진심은 한번도 받아본 적 없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의 고백에 몇번이나 두루뭉술하게 넘어갔는지도 몰랐다. 정국이를 잃기는 싫은데 정국의 마음이 진짜로 그런지 어떤지는 모르겠고. 어장이네. 지민은 스스로 정의를 내렸다. 정국에게 몹쓸 짓 한거다. 이기적으로 굴었다. 이제라도 정리를 해야했다. 끝이 어떻게 되든, 그냥 빨리 마무리 짓고 싶었다.


벚꽃 만개했네요.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지민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정국의 얼굴이 거꾸로 보였다. 지민은 당황해서 자리에 벌떡 일어나 뒤돌아 봤다. 벤치 뒤에 정국이 서 있었다. 정국은 주먹 쥐고 있던 손을 내밀었다. 지민은 머뭇 거리다 손을 내밀었다. 정국의 손에서 벚꽃이 서너개 떨어졌다. 형 머리 위에 있었어요. 정국의 말에 지민이 작게 탄식하며 머리를 살짝 털었다. 머리에 살포시 올라 앉은 벚꽃이 하늘하늘 떨어졌다. 벚꽃나무네요, 형. 정국의 말에 지민은 민망한듯 헛기침을 했다. 



아까 그 여자는...


여자?


아, 아까 같이 가던데.


역시 아까 그 소리 형 부르는 소리 맞았나보네요.



친구가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그새 들었나 싶다. 지민은 놀라운 청력에 혀를 내둘렀다. 걔는 왜요? 정국의 눈이 얍실해졌다. 아니, 뭐... 지민은 무어라 적당한 말이 안 떠올라 입 안에만 맴돌았다.



아무 사이 아니에요. 그냥 뭐 좀 도와달라고 그래서.


아무 말도 안했어.


표정이 말 하더만.


......


형한테 벚꽃축제 가자고 하려고 했는데. 굳이 필요 없을 것 같아요. 여기도 너무 예뻐서.


응. 여기 우리 학교 명물이야. 꽃길.


애인이랑 걸으면 딱 좋겠네요.



정국의 눈빛이 묘하게 바뀐 것을 느낀 지민은 슬쩍 시선을 돌려 벚꽃을 바라봤다.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고 생각은 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할지는 몰랐다. 이런 것에 있어서는 지민도 서툴기 짝이 없었다. 아니, 아직 제 마음 하나 제대로 모르는데 그와 어떻게든 마무리를 지으려 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일 것이다. 이도 저도 못해 혼란스러웠다. 정국은 지민의 표정을 유심히 바라봤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초단위 마다 바뀌는 것 같은 얼굴 표정에 정국은 결국 피식 웃었다. 지민은 움찔하며 정국을 쳐다봤다.



좋아해요.



직격이었다. 이 상황에서 말할 줄 몰랐던 지민은 당황스러움에 온 몸이 굳어버려 혀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뭐라도 말을 하고는 싶은데 말이 안나왔다. 정국은 시선을 피하지 않고 지민과 눈을 맞추었다.



형이 졸업식 날 뭐 때문에 그렇게 거절 했는지 잘 알아요. 이제 고3 올라가는 애가 뭘 안다고 그러겠나 싶었겠죠. 근데 그거 저 나름대로 많이 생각도 해보고 방황도 해보고 한 끝에 겨우 뱉은 한 마디였어요.


......


형한테 그 말 듣고 나서 또 생각했어요. 아 역시 내 마음은 그냥 스쳐 지나가는 비인가. 한 때의 불장난인가. 형이랑 떨어져 있으면 자연스레 사라질 감정인가.


......


그때 이후로 1년 하고 몇개월은 더 지났죠. 형한테 한달의 시간을 또 줬어요. 그래도 형이 여전히 사랑스러워 보인다면.


......


그건 진짜 아닌가요.



지민은 고개를 숙였다. 알고 있었다. 진작에 그의 마음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버거워졌다는 것은 지민도 알고 있었다. 그래, 피한 것이었다. 저 무게를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몰라 무작정 피하고 보는 것이었다. 피하고 나면 괜찮아지겠지. 바람에 마모되는 것처럼. 그렇게 점점 작아지겠지. 어리석었다. 그렇게 어설프게 넘어가기에는, 정국이 많이 커버렸다. 나, 나는. 지민이 입을 열었다. 최대한 덤덤하게 하고 싶었는데 떨리는 입은 어쩔 수 없었다.



잘 모르겠어.


......


네가 아니라, 나를. 잘 모르겠어.


......


난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너랑 같은 마음이 아니란 걸 알게되면, 어떡하지?


형.


내가 잘못 생각한거면, 너무...


......


미안하잖아.



지민의 눈에서 결국 눈물이 툭 떨어졌다. 이미 제 이기심으로 몇 번이나 상처를 줬었다. 더 이상 그가 오래토록 간직해 온 마음에 흠집을 내기는 싫었다. 제 잘못된 선택으로 후에 닥쳐올 불행을 생각하니 눈물이 나왔다. 정국이 빠른 걸음으로 벤치를 돌아 지민의 앞까지 다가와 살짝 그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형. 정국이 작게 불렀다.



여기 이렇게 가만히 있을게.


......


얼마나 걸려도 좋으니까. 나한테 오고 싶다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든다면.


......


천천히 오세요.



잔잔한 바람이 불었다. 벚꽃잎이 하나 둘 하늘하늘 흩날렸다. 완연한 봄이었다.





















---


개강이 오지 않았으면 해서 시작한 글

개강 일주일 전에 쓰기 시작했는데

어떻게 벌써 개강 4일 앞으로 왔지

제목은 정국이 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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