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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랩홉] 사랑옵다 8

길/사랑옵다



호석은 항상 아침에 약했다. 특히 주말만 되면 그렇게 침대 밖에 나오기를 싫어했다. 평일이라면 어떻게든 어르고 달래서 깨웠을 테지만 주말이라 굳이 그러지 않았다. 남준은 옆으로 누워 자고 있는 호석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제 자고 있는 모습을 이렇게 오랫동안 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면 아마 뭘 자고 있는 모습도 보냐면서 한 소리 하겠지. 남준은 어쩐지 호석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작게 키득거렸다.

 

가지런히 내려앉은 속눈썹도, 이쁘게 뻗은 콧대도, 도톰한 입술도. 그의 얼굴을 찬찬히 보다가 간질간질한 느낌에 남준은 결국 호석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으응... 앓는 소리를 내며 작게 뒤척이는 호석에, 남준은 후다닥 고개를 받치고 있던 손을 내리고 누워 자는 척 했다. 별 다른 미동이 없자 슬쩍 고개를 들어 호석을 본 남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도둑뽀뽀는 들키고 싶지 않다. 깊게도 잔다. 남준은 작게 중얼 거리며 입가를 쿡 찔렀다. 호석이의 보조개가 들어가는 자리였다. 너는 여기도 예쁘면 어쩌자는 거냐. 아침이라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하던 남준은 이내 그를 폭 껴안았다. 호석의 온기가 그대로 남준에게 전해졌다. 따뜻하다.

 

뭐야... 호석이 작게 중얼거리며 남준의 품에 파고들었다. 남준은 호석의 머리에 제 턱을 댔다. 깼어? 남준의 물음에 호석은 작게 웃으며 잠이 덕지덕지 묻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그렇게 만지작거리는데 어떻게 안 깨. 그의 말에 어쩐지 멋쩍어져 남준은 턱만 부빗 거렸다. 더 잘 거야? 남준이 작게 속삭이듯 물었다. 으음... 고민하는 듯 앓는 소리를 내던 호석이 이내 고개를 저었다. 자는 건 아닌데, 그냥 누워 있을래.

 

 

요즘 따라 너 되게...

 

되게 뭐.

 

움직이기 싫어하는 것 같다.

 

진짜? 겨울이 다 와서 그런가.

 

겨울이랑 무슨 상관이야.

 

겨울 되면 이불 속이 너무 따뜻해서 침대 밖에 나오기 싫잖아.

 

 

흐흫. 호석은 낮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래, 너 따뜻한 거 좋아하지. 남준은 그를 더 꼭 안으며 말했다. 너 아까 나한테 뽀뽀 했지. 뜬금없는 호석의 물음에 남준은 턱으로 다시 그의 머리를 부빗 거렸다. 몰라.

 

 

안 했어? 뭔가 입술에 닿는 느낌이 들었는데.

 

......

 

꿈인가.

 

이렇게?

 

 

남준이 재빨리 그의 입술에 살짝 입 맞추었다. , 맞네! 호석이 몸을 바르작거렸다. 남준은 작게 웃었다. 호석의 반응은 언제나 재밌다. 남준은 호석의 코 끝을 콕콕 건들며 장난 쳤다. 앗 여기 우물이. 하고 속삭이며 그의 입가를 콕콕 건들기도 했다. 그러면 호석은 힘을 주어 볼우물을 만들었다. 슬슬 일어나야지. 남준의 말에 호석은 꾸물거리다 결국 이불을 젖히고 침대 밖을 나왔다. 오늘은 뭐 할까. 남준의 물음에 호석은 뒤돌아 침대에 상체만 일으켜 앉아있는 남준을 돌아봤다. 오늘은 대청소 할 거야.

 

 

 

 

 

그들의 집은 매우 넓었다. 둘이서 살기에는 적적하게 느껴질 정도로 넓었다. 이렇게 넓은 집을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능력 있는 애인을 둔 덕에 생긴 집이었다. , 사실은 남준이 집안이 능력이 있는 것이지만. 원래는 사람을 불러서 청소를 하지만 한 달에 한 번 이상은 꼭 직접 청소를 하고는 했다. 오늘은 그 대청소 날이다.

 

호석은 손으로 턱을 괴고 생각했다. 일단 오늘은 날 좋으니까 이불 빨래를 하고, 옷 방 정리도 좀 할까. 서재 정리도 좀 해야 할 것 같고. 거실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호석은 제 허리께를 감싸오는 손길에 움찔 몸을 떨었다. 간지러워. 호석의 말에 남준이 그의 허리를 살짝 간질였다.

 

 

오늘은 뭐 청소 할 거야?

 

일단 이불빨래부터 하자.

 

... 그냥 세탁기로 하면 안돼?

 

안돼. 이불 빨래는 직접 해야 마음이 편하단 말이야.

 

 

얼른 이불이랑 커버랑 아, 베개 커버도 다 벗겨와. 호석의 말에 남준은 느릿느릿 허리를 감고 있던 손을 빼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호석은 화장실로 들어가 욕조에 물을 받기 시작했다. 바지를 야무지게 접어 올리고 욕조에 걸터앉아 남준이 오기를 기다렸다.

 

, 여기. 남준이 두 손 한가득 들고 왔다. 호석은 이불을 받아들어 바로 욕조 안에 넣었다. 나 이불 빨고 있을 테니까 너는 옷 방에서 옷 정리 좀 하고 있을래? 호석의 말에 남준은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팔짱을 낀 채 문에 삐딱하게 기대어 섰다. 오늘 데이트 하고 싶었는데. 남준의 말에 욕조 안에 들어간 호석이 힐끔 남준을 바라봤다.

 

 

날씨도 좋은데 데이트 하러 가지.

 

날씨가 좋아서 이불 빨래하고 싶었단 말이야. 요즘 바빠서 청소도 못했고.

 

이불빨래만 하면 안돼?

옷 너무 많아서 정리 좀 해야하지 않을까? 특히나 옷 방이랑 서재는 사람들한테 맡길 수도 없는데.

 

 

또 입술 나왔네. 호석은 뚱한 표정의 남준을 보며 생각했다. 이렇게 노는 걸 좋아하면서 회사는 어떻게 다닌대. 호석은 작게 혀를 찼다. 어쨌든 난 오늘만큼은 양보 안 할거야. 호석의 말에 결국 남준이 미적미적 움직이기 시작했다. 호석은 세제를 풀어놓은 물에 조심히 발을 넣었다. 이불을 자근자근 밟을 때마다 늘어나는 거품들이 발을 몽글몽글 간질였다. 발가락 사이사이, 발목을 휘감는 이 몽글몽글한 부드러움이 기분 좋다. 남준이는 세제를 어떻게 믿고 그렇게 발을 담구냐고 타박하지만 확실히 이불 빨래는 직접 하는 게 마음 편하다.

 

음흠흠. 작게 허밍을 하며 천천히 밟던 호석은 어딘가 느껴지는 시선에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들었다가 거울을 통해 마주친 시선에 흠칫 놀랐다. 언제 왔는지 남준이 아까처럼 팔짱을 끼고 문에 기대 선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깜짝아... 호석은 작게 중얼거리면서 제 가슴을 슥 쓸어내렸다. 뭐야, 나 보고 놀란 거야? 남준의 말에 호석이 어색하게 웃었다.

 

 

나도 도울까?

 

아니 괜찮아. 이불 빨래야 뭐.

 

아니, 나 심심해서.

 

내가 하라는 거 다했어?

 

... 혼자서 하면 심심하잖아. 난 같이 하고 싶단 말이야.

 

 

투정어린 목소리에 호석은 결국 들어오라 손짓했다. 금세 해맑은 표정으로 화장실에 들어온 남준은 천천히 욕조 안에 발을 들였다. 몽실몽실한 거품이 발을 휘감았다. 생각보다 기분 좋은 느낌이었다. 미끄러져 넘어지면 안 돼. 호석의 말에 남준이 어이없다는 듯 혀를 찼다. 내가 그렇게 허술해 보여? 호석은 아무 말도 하진 않았다.

 

조용한 화장실에 물이 찰랑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가끔 호석의 발이 스칠 때마다 남준이 작게 웃었다. 왜 자꾸 웃어. 호석의 말에 아예 눈이 휘어진다. 아니 막 간질간질 거리네. 남준의 말에 호석이 그를 쳐다봤다. 호석아 손 잡아줘. 남준이 두 손을 내밀며 하는 말에 호석은 영문도 모른 채 두 손을 잡아주었다.  으흐흫. 아까와는 다르게 기분이 좋은지 자꾸 웃음을 흘리는 남준을 호석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너 좀 이상해. 호석이 결국 한마디 뱉었다.

 

 

?

아 뭔가. 자꾸 실실거리고. 뭐 청소 하면서 재밌는 거 봤어?

 

아니. 그건 아니고.

 

그럼 뭔데?

 

아니 그냥. 이러니까 뭔가.

 

뭔가.

 

뭔가 음... 신혼부부 같아.

 

 

참 나. 호석은 생각지도 못한 말에 아닌 척 하면서도 부끄러운지 귀 끝이 붉어졌다. 갑자기 남준의 목걸이가 눈에 띄었다. 내가 그 때 프로포즈 했으니까 신혼부부지. 호석이 확 고개를 들며 하는 말에 남준은 아예 소리 내어 웃었다. 신혼부부니까 더 달달하게 해줘. 남준이 허리를 살짝 숙여 시선을 맞추었다. 갑자기 가까워진 거리에 호석이 놀라며 고개를 살짝 뒤로 물렀다. 뭐야 갑자기, 당황스럽게. 작게 떨리는 목소리를 캐치한 남준이 볼을 들이밀었다. 빨리, 신혼부부처럼. 호석은 새초롬한 눈빛으로 남준을 바라봤다. 빨리. 잡은 두 손을 살짝 흔들면서 재촉하는 남준에, 호석이 결국 쪽 뽀뽀를 해주었다. 이쪽도.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린 남준에 그 쪽도 입을 맞추었다. 남준은 고개를 돌려 호석의 입술에 살짝 키스했다. 답례. 호석은 작게 속삭이듯 말하는 남준에못 말린다는 듯 피식 웃어버렸다.

 

 

목걸이, 잘 하고 다니네.

 

당연하지. 프로포즈 받은 목걸인데 맨날 하고 다녀야지. 너도 반지 맨날 하지?

 

나야 맨날 하고 다니지, 당연히.

 

아 맞아. 나 이거 회사 사람들이한테도 자랑했어. 내 애인이 해준 거라고.

 

 

약간 업 된 목소리로 회사 사람들 반응에 대해 막 말하는 남준의 표정이 한껏 상기되어 있었다. 호석은 그를 말없이 보다가 충동적으로 그를 확 껴안았다. 남준은 그 반동으로 뒤로 넘어갈 뻔 한 것을 간신히 중심 잡고 호석을 감싸 안았다. 아 깜짝아, 네 애인 머리 부딪칠 뻔 했다. 남준의 말에 호석은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채 키득거렸다. 아 호석이는 이렇게 안고 빨래하고 싶었구나. 남준은 장난스럽게 말하며 호석을 안은 채 이불을 밟기 시작했다. 자세 때문에 불편하기 그지없지만 떨어지지는 않았다. 너한테 막 찝쩍거리는 사람 없지? 호석의 물음에 남준이 그의 이마에 아프지 않게 딱밤을 때렸다. 아야! 호석은 놀라 이마를 문질렀다.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마. 남준의 말에 호석은 금방 시무룩해졌다. 남준은 항상 그런 반응이었다. 어쩔 때는 그런 반응이 더 서운할 때도 있었다. 물론 정말로 아무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옛날에 본 게 있으니 그냥 넘어가는 것도 찝찝한 거다. 너 자신을 알라. 진지한 표정을 진지하게 그 말을 뱉으니 남준이 피식 웃었다. 귀엽게 뭐하냐. 호석은 그런 남준의 반응이 얄미웠다. 내 말 허투루 듣지 말라고!

 

 

허투로 안 들어.

 

너 막 이상하게 입고 가. 막 멋있게 입지 말라고.

 

뭐야, 언제는 그렇게 입으라더니. 어제는 네가 입혀줬다.

 

아니야. 아저씨처럼 입어. 머리도 막 넘기지 마. 이제 너도 아저씨니까 아저씨처럼 입어.

 

그게 뭐야.

 

남자 눈에도 잘생겨 보이는데 여자 눈에는 오죽하겠어?

 

... 호석아 솔직히 너 콩깍지 아직 안 빠진 것 같다. 나야 좋지만.

 

 

나 개진지해 진짜야. 호석이 단호한 목소리로 뱉는 말에결국 남준이 푸핫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로 나한테 다가오는 사람도 없었지만 노력 할게. 남준의 입에서 기어코 그렇겠다는 답을 얻어내고 나서야 흡족한 미소를 짓는 호석이다. 뭐 좋은 게 좋은 거지. 남준도 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호석은 가끔 뭐가 그렇게 불안한지 어리광을 부리고는 했다. 누가 누구한테 할 소린지 원. 남준은 아직도 웬만하면 카페 자주 나가지 말라고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오늘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세탁기에 이불을 집어넣고 탈수로 돌리며 묻는 호석에, 서재에 있던 남준이 나왔다. 남준의 손에는 책 한권이 들려 있었다. 저녁? 남준의 물음에 베란다에서 나오던 호석이 응 하고 대답했다.

 

 

... 딱히 생각나는 게 없는데.

 

근데 그 책은 왜 들고 있는 거야?

 

, 이거. 서재 정리 하는데 추억 돋는 물건이라.

 

뭔데?

 

 

호석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가오자 남준이 입술을 불퉁하게 내밀었다. 뭔데 라니. 남준의 말에 호석은 아차 싶었다. 이거, 뭔진 몰라도 겁나게 중요한 거다. 슬쩍 책을 보니 제목이 없다. 그냥 하얀 책이고 앞에 일러스트가 그려져 있는 듯 했다. 제 눈치를 힐끔힐끔 보면서도 책을 유심히 보는 호석을 보니 남준은 쯧 작게 혀를 차며 호석에게 책을 내밀었다.

 

 

이거. 선물이야.

 

?

 

나 누군가를 위해서 선물을 골라본 적이 없어서 너에게 맞는 선물을 도저히 찾을 수가 없어서.

 

......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시 구절을 적은거야. 좋아할지는 모르겠지만.

 

......

 

너 생각하면서 쓴 건데. , 그러니까...

 

......

 

너도 좋아했으면 좋겠다.

 

 

그 때 그 날이 머릿속을 스쳤다. 호석은 절로 벌어지는 입을 두 손으로 막았다. 너무 놀라 눈동자도 커졌다. 내가 왜 이 날을 까먹고 있었지. 정말 멍청한 게 분명하다. 호석은 제 머리를 콩콩 때렸다. 그가 천천히 말을 잇자, 그 때의 장면이 바로 눈앞에 펼쳐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추운 겨울날, 둘 다 목도리를 칭칭 둘러매고, 코드를 입고, 눈이 고요히 내리는 어느 겨울 날, 그러니까 제 생일. 남준은 그 때도 똑같이 저런 말을 하면서 저 책을 건넸었다. 제 생에 이렇게 예쁘고 정성스러운 선물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남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호석은 그 선물이 정말 좋았고 의미 있는 선물이었다. 한 장 한 장 넘기기 아까워 몇 번이나 곱씹고, 직접 썼다는 그 글씨를 손으로 살살 만져보기도 하면서 새벽을 지새웠던 적도 많았다. 그 때는 아직 친구였을 때였는데 호석은 고백 받은 수줍은 고등학생처럼 굴었었다. 나중에 사귀고 나서 훨씬 뒤에 남준이 간접적으로나마 제 본 마음을 담아 보낸 선물이라고 하더라. 어쨌든 호석에게는 그 책이 너무 소중했다. 자신이 그렇게 느끼는 만큼 남준도 이 책이 굉장히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물건일 것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뻗치자 미치도록 미안해지기 시작했다. 미안한 마음이 너무 커서 표정관리도 안 된다. 울듯 말듯 일그러진 호석의 표정을 보자 남준이 피식 웃었다. 그렇게 웃는 모습마저 제 애인은 다정해서 호석은 더 미안해졌다. 미안하면 키스해줘. 남준의 말이 끝나자마자 호석은 그의 목에 팔을 둘러 확 끌어안고 바로 입을 맞추었다. 남준이 자연스레 그의 허리에 한 손을 감았다. 가볍게 입 안을 한 번 훑은 호석이 천천히 입을 떼더니 바로 입과 목덜미에 쪽쪽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여러 번 맞추었다. 난데없는 뽀뽀 폭격에 남준은 아예 두 손으로 호석의 허리를 꽉 감싸 안으며 웃음을 흘렸다. 입 안에 머무르는 웃음소리는 그의 목소리처럼 낮으면서도 다정했고, 진중했다.

 

 

솔직히 너 기억 못하고 있는 것 같아서 서운할 뻔.

 

미안해. 내가 이걸 어떻게 잊어. 내가 이걸 어떻게 대했는데.

 

어떻게 대했는데?

 

너한테 받고 나서 침대에 누워서 몇 번이나 곱씹어 보고. 손가락 끝으로 천천히 글씨도 만져보고. 네 글씨체도 유심히 보고.

 

......

 

좋아서 끌어안고 막 침대도 구르고. 특히나 마음에 드는 구절 형광펜으로 줄긋고. 손으로 꾹꾹 눌러썼는지 부분 부분 볼펜 잉크 많이 나온 거 보면서 아 정말 마음 담아서 썼나보다 그런 생각도 하고.

 

내 마음 다 담아서 쓰긴 했지.

 

내가 말 안 해줬었구나.

 

 

 

남준은 호석을 안은 채로 책을 폈다. 호석의 어깨에 얼굴을 얹은 채 책장을 스르르 넘겼다. 한 바닥에 시 한 구절씩. 잘 쓰지도 못하는 글씨 예쁘게 적어보겠다고 천천히 꾹꾹 눌러쓴 제 글씨들을 보니 제 마음도 괜히 몽글몽글해진다. 되게 풋풋했네. 남준의 말에 호석이 푸스스 웃으며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남자 고등학생이 제 친구한테 줄 선물 치고는 좀 과하긴 했지.

 

 

지금 보니까 시도 다 사랑 고백 시네. 너 처음에 받아 보고 좀 당황했겠다.

 

뭐래. 겁나 좋아했다니까.

 

......

 

처음에 깜짝 놀랐어. 절절한 사랑 고백만 잔뜩 써져 있어서 내 마음 알아차린 줄 알았다니까. 옛날에 말했었잖아. 네가 나를 좋아했던 그 기간만큼 나도 널 좋아했었어. 정말로.

 

......

 

우리 삽질 좀 오래 했잖냐.

 

 

호석의 말에 남준이 푸핫 웃으며 그를 안은 채 걸음을 옮겼다. 자연스레 거실로 향하는 남준의 발걸음을, 호석은 따랐다. 그래서, 네가 제일 마음에 들었던 구절은 뭔데? 남준이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그가 소파에 앉으니 호석은 자연히 그의 품에 안긴 채 무릎에 앉게 되었다. 안 무거워? 호석의 물음에 남준이 고개를 저었다. 별로.

 

 

마음에 드는 구절은 다 형광펜 쳐놨다니까. 나중에 찾아봐.

 

어디 보자.

 

아 지금 보지 마.

 

 

호석은 책을 펴려는 남준의 손을 다급히 잡으며 말했다. ? 라고 묻는 듯한 남준의 표정에 호석은 말을 잇지 못했다. 살풋 붉어진 듯한 호석의 얼굴을 눈치 챈 남준이 푸스스 웃으며 책을 소파에 내려놓았다. , 이게 뭐라고 부끄러워 해. 제 속을 직격으로 말한 남준에 호석의 얼굴이 눈에 띄게 붉어지면서 후다닥 남준의 품에서 떨어져 일어났다. , 뭐 만들어 먹을 거 있나 보고 올게. 후다닥 부엌으로 향하는 그의 뒷모습에서 '나 지금 엄청나게 부끄러움.'이 적혀 있는 듯 했다. 귀여워. 남준은 웃음을 가득 머금은 표정으로 중얼거리며 책을 폈다. 앞에서부터 스르륵 책을 넘기니 오래가지 않아 연한 하늘빛 형광펜이 보였다. 남준은 눈으로 그 구절을 읽었다. 어쩐지 그 시절, 스탠드만 켜 놓고 제 마음을 써낸 시를 따라 쓰던 그 때가 떠오르는 듯 했다.

 

 

 

 

 

내가 그다지 사랑하던 그대여

 

내 한평생에 차마 그대를 잊을 수 없소이다

 

내 차례에 평생 못 올 사람인 줄은 알면서도

 

나 혼자는 꾸준히 생각하리다

 

자 그러면 내내 어여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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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시는 이상의 '이런 시' 중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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